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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과 풍요의 변증법
5. 변증법은 상대주의가 아니다
1. 자명한 절대적 제일원리를 인정하지 않고 대립과 구별의 타당성이 상대적임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상대주의를 옹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변증법은 상대주의가 아니다. 헤라클레이토스와 다른 측면에서 변증법의 원천을 이루는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를 예리하게 비판한다. 프로타고라스는 당대 최고의 소피스트로서 고액의 수업료를 받으며 논쟁술을 가르쳤다. 그가 내세운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라는 명제에서 ‘인간’은 각 개인을 뜻한다. 그에 따르면 각자가 자신에게는 유일한 판관이고 자신이 판단하는 것은 모두 옳고 참이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이렇게 시비를 건다. “어째서 프로타고라스는 자신은 지혜로워서 남들을 가르치고 고액의 보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더 무지하여 그에게 가서 배워야 할까요? 우리 각자가 자신의 지혜의 척도라면 말이오.” 나아가 플라톤은 모든 사람의 의견이 참이라면 프로타고라스의 의견을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의견도 참이라고 인정해야 하고, 따라서 그 자신의 의견이 거짓임을 인정하는 셈이라고 비판한다.(테아82) 플라톤의 대화법은 그 시대에 널리 퍼졌던 상대주의에 맞서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상대주의 비판과 유사하게, 상대주의는 모든 것을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주장 자체만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자체모순에 빠진다고 논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원론적 비판으로 상대주의가 간단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과 유물론을 끌어들이면서 상대주의는 끈질기게 살아남아 인식의 진위 문제에 혼선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이때 프로타고라스식 극단적 상대주의의 주인공인 개인들의 자리에 특정한 집단들이 들어설 수도 있다. 예컨대 노동자들이 타당하다고 받아들이는 인식과 자본가들이 옳다고 여기는 인식은 서로 다르며, 그 각각은 그들의 상이한 물적 조건의 산물로서 근거를 지닌다고 보면, 이는 유물론이 가미된 상대주의라고 할 수 있다. 물적 조건이나 이해관계를 고려할 때 상이한 집단들은 얼마든지 늘어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집단적 이해관계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영역에서 어떤 주장⋅명제⋅인식⋅관념 등의 진위는 그것을 판정하는 집단에 따라 얼마든지 상이하게 평가되는 것이 당연하다. 또 서로 입장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미덕과 교양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주장이나 인식의 진위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논쟁하는 일은 야만스러운 짓으로 간주되며, 그런 문제는 각자의 생각에 맡겨놓는 것이 불문율로 통한다. 이 교양 있어 보이는 상대주의는 매순간 생존투쟁을 벌여야 하는 일상에서 멀어질수록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아도르노는 “모든 사유가 조건을 지닌다”는 상대주의 테제의 편협성을 지적한다. 즉 이 테제 자체도 조건을 지니는데, 그 조건은 사유의 ‘초개인적 요소를 은폐한다’는 점이다. 그는 개인이나 집단의 주관을 넘어서 사회 전체라는 객관에 근거할 때 그 집단들의 상이한 관점들이나 한계들을 타당성 있게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그러한 테제 뒤에는 “값나가는 유일한 것인 물질적 관계들의 우선권을 위해 정신을 경멸하는 입장이 감춰져 있다”고 보며, 이 점에서 이러한 상대주의는 속류유물론적이며 “정신 자체에 대해 적대적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추상적인 상태에 머문다”고 비판한다. 그 적대감의 뿌리를 아도르노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찾는다. 즉 해방된 이성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파괴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그는 상대주의가 아무리 진보적인 제스처를 취하더라도 언제나 반동적 계기를 수반한다고 비판한다.
2. 상대주의의 반동적 계기, 기존 지배관계를 옹호하는 측면에 대해서는 좀 더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상대주의의 속류유물론적 성격은 정신에 대한 적대성과 추상성의 문제를 넘어선다. 특정한 문제와 관련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견해가 서로 충돌할 때, 모든 사유는 그 나름의 조건을 지닌다는 테제에 근거해 각자의 견해를 서로 인정하자는 추상적 원칙에 만족하고, 어떤 공약수를 찾아 그 문제에 대한 좀 더 타당한 인식으로 나아가기를 포기한다면, 지배자의 견해를 진지하게 비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결과 지배자의 견해는 상대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절대적으로 타당한 위치를 유지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상대주의는 본질적으로 지배논리가 된다. 예컨대 경제학자들이 잉여가치론을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각자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고 그것에 대한 논의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는다면, 잉여가치론이 상식으로 통용됨으로써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자본가들과 그 대리자들은 내심 환호할 것이다. 오늘날 부르주아 경제학은 그러한 무언의 합의를 바탕으로 착취 개념 없는 이윤 개념을, 가변자본 개념 없는 유동자본 개념을 애용한다.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입장을 동등하게 인정하자는 것은, 착취자는 착취를 계속해도 좋으며 피착취자는 그 위치에서 만족하라고 설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변증법은 각자의 주관이 아니라 대상에 우선권을 부여하며, 각 인식들이 동일한 인식가치 혹은 진리치를 지닌다고 보지 않고 어느 인식이 더 대상에 타당한지 묻는 진리투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한다. 그리고 실천을 통해 그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변증법은 어떤 대상과 관련해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생성된 특정한 인식이 완전무결한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역사적 제약을 받는 인식능력과 인식의 필요에 따라, 대상의 무궁무진한 속성과 관계들 가운데 미지의 것이 새로 인식되거나 과거의 잘못된 인식들을 논박하고 바로잡거나 아예 근본적으로 뒤집는 일은 늘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엥겔스는 “개인들이 개별적으로 도달하지 못할 ‘절대적 진리’는 내버려두고, 그 대신에 실증과학에 의하여, 또 변증법적 사유에 의한 그 성과의 총괄에 의하여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상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매진”할 것을 주문한다. 변증법이 받아들이는 상대적 진리는 모든 인식들의 가치를 대등하게 받아들이거나 무효화한다는 의미의 상대주의와 어울릴 수 없다. 상대주의는 각자의 생각을 대등한 것으로서 절대화하는 가운데 인식 상의 진지한 진전을 이루기보다 추상적 인식에 만족하면서 게으른 냉소주의를 부추긴다. 변증법이 받아들이는 인식의 상대성은 특정한 역사적 인식을 절대화하는 것을 피하게 해주지만, ‘절대적 인식’ 혹은 좀 더 심오하고 좀 더 완전한 인식을 향해 부단히 나아가는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다.
엥겔스가 인식의 본질적 상대성을 강조하는 데에 비해, 레닌은 그 상대성을 인식의 역사적 조건이라는 의미에 제한하고 진리의 본질적 절대성을 인정한다. “인간의 사유는 그 본질에 있어서, 상대적 진리의 총합인 절대적 진리를 우리에게 줄 수 있고 또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변증법에 충실한 엥겔스와 달리 레닌은 독단론자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상대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의 구별에 대한 레닌의 주장은 독단적이기보다 현실적이다. “이 구별은 과학이 그 말의 나쁜 의미에서의 도그마, 즉 죽어버린, 얼어붙은, 화석화된 어떤 것으로 되는 것을 막기에 충분할 만큼은 ‘불명확하다’. 동시에 우리가 과학을, 신앙주의, 불가지론, 철학적 관념론, 칸트와 흄의 추종자들의 궤변으로부터 가장 결정적이고, 돌이킬 수 없도록 갈라설 수 있게 하기에는 충분히 ‘명확하다’.”(유물론142) 레닌이 말하는 ‘절대적 진리’의 실질적 의미는 영구불변의 도그마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구체적 조건 속에서 이루어낸 최선의 인식, 즉 절대가 아닌 최대의 인식가치 내지 진리치를 지니는 인식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단편적 사실 확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대상들의 무한한 속성들과 관계들을 밝혀가는 포괄적 인식과 관련해 특정한 단계의 인식이 절대적 진리에 도달했다고 고집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각각의 인식들은 대체로 절대적 타당성을 표방하면서 등장하고, 또 절대적 타당성을 추구하는 것은 인식의 기본 속성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루카치는 ‘절대적인 것이 언제나 상대적인 것, 점근적으로만 타당한 것의 형태로’ 나타나는 데에 인식의 본질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정식을 뒤집어서 ‘상대적인 것, 점근적으로만 타당한 것이 언제나 절대적인 것의 형태로’ 나타나는 데에 인식의 본질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이때 어떤 인식이 스스로 상대적 진리임을 표방하는 것은 그 인식의 진리치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오히려 인식의 진리치를 최대한 높이기 위한 노력을 회피하는 변명이 되기 쉽다. 어떤 인식이 절대적 진리의 형태로 등장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형태에 걸맞지 않은 내용의 빈곤과 부재 혹은 오류와 노골적 기만이 더 본질적인 문제 아니겠는가.
3. 진리투쟁은 언제나 지배의 양상을 결정하는 핵심사안이다. 지배자들은 지배관계의 실상을 피지배자들이 알 수 없도록 호도하는 데에 많은 공을 들인다. 그럴 수 있는 물질적 정신적 지배장치들도 다양하게 갖추고 있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융단폭격을 뚫고 실상을 파악하는 것은 지배관계를 무너뜨리고 평등사회로 가는 첫걸음이다. 그런데 지배관계의 실상이라는 것이 종종 단순명료하지 못할뿐더러 다양한 방식으로 은폐⋅왜곡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피지배자들이 꿰뚫어 보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일시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실상을 파악하더라도 그것은 다시 다른 속임수를 통해 은폐되거나 왜곡되기 일쑤다. 상대주의도 그러한 속임수의 일부로서 시대적 조건의 변화에 발맞춰 형태를 바꿔가며 그 역할을 다한다. 어떤 명제나 인식의 진위 문제를 일일이 따지기도 전에 아예 진위 문제 자체가 의미 없는 것처럼 호도하는 것이 상대주의의 본질적 역할이다. 지젝이 소개하는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에서도 그러한 본질은 변함없다. 그에 따르면 포스트모던 상대주의는 ‘환원 불가능한 다양한 세계들’ 각각이 “특정 언어 게임에 의해 지지되며, 각 세상은 바로 그 구성원들이 자신들에 대해 스스로 말하고 있는 서사로서, 여기에는 어떠한 공유된 지대도 없으며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공통 언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언어 게임’이니 ‘서사’로서의 ‘세상’이니 하는 유행어들이 가미되었지만, 본질은 역시 진리투쟁을 불가능하게 혹은 무의미하게 만드는 데에 있다.
[자본론] 3권에서 맑스는 1844년 은행법이 잉글랜드은행의 금 보유량에 화폐발행액을 묶어놓음으로써 화폐핍박을 초래하고 공황을 격화시키는 과정을 세세히 밝힌다. 이 은행법의 숨은 목적은 이자율을 높이는 데에 있었다. 그 결과로 은행업자들과 대부업자들은 높은 이자율에 따른 폭리를 얻는 데에 반해, 군소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그런데 은행법 제정을 주도하고 은행업자들을 대변하는 오브스톤은 이렇게 주장한다. “1844년의 은행법의 원칙을 엄격히 즉각적으로 준수함으로써 모든 것은 질서정연하게 쉽게 지나갔으며, 화폐제도는 안전하고 확고부동하며, 이 나라의 번영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으며, 1844년의 은행법의 현명함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매일 증대하고 있다.” 오브스톤의 말은 뻔뻔한 거짓말이다. 그 진위는 당시의 공황과 1847년의 정부조치 등을 통해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것이지, 맑스와 오브스톤의 주관적 입장차이로 돌릴 문제가 아니다. 그의 거짓말에는 리카도의 화폐이론을 비롯한 경제학 전문지식도 동원된다. 그 허위를 명확히 밝히는 데에는 맑스의 집요한 진리투쟁이 필요했다.
지배자들이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늘어놓으면, 기득권세력의 첨병인 언론은 뻔한 거짓말을 부끄러움도 잊은 채 마구 살포하는 시대다. 뻔한 거짓말조차 반복을 통해 사실로 둔갑하는 현상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금의 언론환경에서는 명백한 허위를 허위라고 밝히고 진실을 사회적으로 통용시키는 것도 쉽지 않다. 까다로운 이론들과 자료들로 무장한 허위들을 폭로하고 복잡한 지배관계의 실상을 드러내는 데에는 무제한의 노력이 필요하다. 변증법은 이러한 노력의 총체다. 변증법적 진실투쟁 없이 평등사회를 위한 해방전쟁도 없다. 어떤 세련된 신종 상대주의도 이 장대한 투쟁을 저지하거나 대체할 수 없다. (2023.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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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https://napo.jinbo.net/v2/archives/9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