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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박씨족회서>에 나타난 평도공(平度公: 휘 訔)의 위상
광해 7년(1615년) 2월 13일 경상도 안동부(安東府) 관아에서 열렸던 나주박씨족회(羅州朴氏族會)에 참석했던 나주박씨 외손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 1566~1629)이 지은 <羅州朴氏族會序>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옵니다.
☞<. . . . . 噫 彼此內外雲仍 雖千百其形 實我平度公一人之分也 一人在天之靈 洋洋陟降於千百人之庭 其肯曰 余有後也 . . . . . 噫 自吾雲仍而視之 則七十人爲七十人 自吾平度公視之 則只是一箇骨肉耳 竊願座上諸親 毋自七十其心 終始一骨肉以之 俾我平度公怡悅於冥冥中曰 今而後吾子孫式相好矣 無相猶矣云 則令公以下疇非孝也 吁亦幸矣>☜(註: <羅州朴氏族會序>와 관련한 사항은 대종중 웹사이트 자유게시판 6201번 <족사(族史) 연구 자료> 참조)
그 뜻은 대강 다음과 같이 이해됩니다.
<. . . . . 아! 이곳저곳 수많은 내외(內外) 후손들이 비록 그 모습은 서로 달라도, 사실은 모두 우리 평도공(平度公: 휘 訔) 한 분에게서 나뉘어 나왔도다. 그 한 분께서 하늘의 혼령으로 계시면서 수많은 후손들의 가정을 두루 오르내리시며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이런 후손들이 있구나.”라고 하실 것이다. . . . . . 아! 우리 후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일흔[70] 사람은 그대로 일흔 사람이 되겠지만, 우리 평도공의 입장에서 보신다면 모두가 하나의 골육(骨肉)일 뿐이다. 삼가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 족친들에게 바라노니, 각기 일흔 사람이란 마음을 갖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골육으로 생각하여서, 우리 평도공께서 하늘나라에서 기쁜 마음으로, “이제부터 나의 자손들은 응당 서로 화목하고 서로 도모함(꾀를 씀)이 없을지라”라고 말씀하시게 한다면, 영공(令公) 이하 어느 누가 효도하지 않는 것이랴? 아, 참으로 다행한 일이로다!>
참고:
1. <나주박씨족회서>의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고전 학자의 도움을 받았음. 다만, 원문 이해의 오류에 대한 최종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승혁)에게 있음. 혹시 잘못이 발견되면 지적해 주시기 바람.
2. 원문 끝 부분에 나오는 “吾子孫式相好矣無相猶矣”에서 “式相好矣無相猶矣”는 『시경(詩經)』 소아(小雅) 기보지십(祈父之什) 사간(斯干)에 나오는 “兄及弟矣式相好矣無相猶矣(형급제의식상호의무상유의)”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猶(유)’의 의미에 대해서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있는 것 같음. 예컨대, ‘猶’를 ‘似(사)’와 같이 보고 ‘형제는 서로 닮지 말아야 한다’로 해석하는 경우, ‘猶’를 ‘謨’와 같이 보고 ‘형제는 서로 꾀함(모략)이 없어야 한다’로 해석하는 경우 등임.
3. 영공(令公): 종2품과 정3품 당상관의 별칭. 영감(令監)이라고도 함. 여기서는 당시 안동부사로 부임한 나주박씨 13세 서포공(휘 東善: 평도공 7세손)을 가리킴.
'나주박씨(羅州朴氏)'는 원래 현성(縣姓)으로 4세 밀직공(휘 秀)의 계축(1373년) 호구에 표기되어 있듯이 관적(貫籍)(본관)이 '반남(潘南)'이었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년) 반남현이 혁파되어 본주인 나주목(羅州牧)에 합병되자 평도공(당시는 潘城君, 후에 錦川君으로 개봉)의 청(請)으로 그 해 12월 13일 태종이 평도공의 본관을 '羅州'로 내려줌에 따라 나주박씨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본다면, 나주박씨의 시조(始祖)는 평도공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물론 이 말은 호장공(휘 應珠)께서 '반남박씨'의 시조이심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羅州'라는 본관명(本貫名)을 놓고 본다면 평도공을 나주박씨의 '시조'로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1412년 12월 13일 이후 반남박씨는 나주박씨가 되었으며 약 270년 뒤 2차보(譜)인 계해보(1683년)에 이르러 본관을 '반남'으로 환원한 뒤에도 여전히 나주를 본관으로 사용한 경우가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나주박씨족회가 열렸던 17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나주박씨 사람들은 모두 평도공의 후손으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은 1642년 경상도 영천(榮川: 오늘날 경북 영주(榮州))에서 처음으로 간행된 나주박씨 대동보(大同譜)인 임오보(壬午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시 나주박씨 후손들에게 있어서 평도공의 위상은 가히 절대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평도공께서는 나주[반남]박씨 (1)최초로 정1품 상신(相臣)에 오르셨으며, (2)최초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셨고, (3)최초의 공신(功臣)이시며, (4)최초로 불천위(不遷位)에 오르시었고, (5)최초로 시호(諡號)를 받으시었으며, (6)배위 장흥주씨(長興周氏)께서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작되신 인물로 나주[반남]박씨가 조선조의 명문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신 독보적 선조이셨음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謹記
주의:
물론, 반남[나주]박씨가 '명문(名門)' 어쩌구하는 것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일 뿐임을 명심할 것. 또한 유명한 조상을 내세워 자신과 동일시하는 행위는 이른바 '팔푼'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명심할 것. 삼오당(三誤堂) 김소운(金素雲) 선생의 『목근통신(木槿通信)』에 나오는 다음의 우화(寓話)를 음미해 보시길!!!
<동물들이 모여 자격 심사회를 열었다. 거위(A)의 차례가 되었다. 심사관(B)이 물었다.
B: “자네 공적은 무엇인가?”
A: “네, 제 8대조 할아버지가 트로이전쟁 때 성을 넘어오는 적병을 맨 처음 발견했지요. 그래서 하마터면 위태할 뻔한 성을 구해냈답니다. 유명한 이야기이지요.”
B: “그건 자네 8대조 이야기 아닌가. 자네 공적이 무언가 말이야.”
A: “제 공적이 무어냐고요? 제가 바로 그 8대조 할아버지의 8대손이라는 것이지요.”
B: “글쎄, 트로이전쟁은 트로이전쟁이고, 자네 자신이 대체 무엇을 했느냐 말이야.”
A: “어, 참,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제가 바로 트로이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그 유명한 분의 8대손이라니까요.”
B: ". . . . . . . . . . . . ? ? ? ! ! !">(빠른 이해를 위해 두세군데 편집).
참고: 트로이전쟁에 대해서는 다음의 나무위키 기사를 참고할 것. <https://namu.wiki/w/%ED%8A%B8%EB%A1%9C%EC%9D%B4%20%EC%A0%84%EC%9F%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