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강 바울의 과거 이력(갈 1:10-24)
I. 사람이냐? 하나님이냐?(1:10-11)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지금 자신은 주인이신 그리스도에게만 복종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면, 그리스도 이외의 대상에게 아첨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하지 않았다.”는 선언입니다. 마음을 기쁘게 한다는 말은 설득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수사적인 설득술을 의미하지요. 말기술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자기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는 그러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도교부 가운데 이그나티우스(Ignatius)라는 분이 <로마교인에게 보낸 서신>을 기록했는데, 3장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위대한 일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인간으로부터 선물을 많이 받으면 좋아합니다. 인간은 신의 환심을 산 후에 자기가 받고 싶은 것을 부탁합니다. 선물과 함께 신들을 설득하여 자가기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야 맙니다. 하지만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은 정 반대입니다. 제물보다는 순종을 원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한 말기술로 전한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성실하게, 꾸준하게,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우리도 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말쟁이들이 말로 설득하는 것에 무장해제 당하기 쉽습니다. 거짓뉴스가 난무하는데, 믿는 이유는 자기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말은 때로 받아들이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듣고 싶은 설교만 귀에 들어오니까요. 그래서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유념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둘 다 모두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전하는 사람도 자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충실해야하고, 듣는 사람도 그 사람의 말재간에 현혹되지 말고, 그 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담겨있는지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실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입니다. 그 복음의 출처는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나온 것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받은 것입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나타나심”을 “계시”라고 번역하였는데, 원문을 보면 아포칼립스(apocalypse)입니다. 뒤에 예수 그리스도가 소유격으로 붙어있어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람으로부터 전해 받은 복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밝히 드러내어 주신 복음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밝히 드러내신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드러내심의 주체이기도 하고 드러난 대상이기도 합니다. 비록 갈라디아 교인이은 바울에게서 복음을 전달받았지만, 그 복음은 바울이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서 전달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입니다.
여기서 교훈과 계시가 대립합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교육과 마음의 감동의 대립이고, 지식과 지혜의 대립이며, 언어와 행동의 대립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마음에 감동되고, 지혜와 행동으로 우리를 이끌면 그것이 바로 오늘 현대인이 이해하는 계시라는 것입니다. 계시를 혼자에게만 전해진 아주 은밀한 신비적인 의미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구식입니다.
II. 바울의 이력서(1:13-14)
바울은 자신이 유대교에 몸담고 있었을 때에 한 행동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과거에 하나님의 교회를 심하게 박해하였다고 직언합니다. 사실 그 이유 때문에 바울을 의심하여 멀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도 아마 바울의 과거를 과장해서 폭로하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거에 바울은 새로 등장한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의 심각한 변종이요 훼방꾼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순수한 유대교를 수호하려는 “열심”이 강하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유대인과 비교할 때 유대교 전통과 율법에 대한 지식도 많았기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을 섰던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이라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유대인들에게 돌로 처형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이 그 곁에 서있었는데, 성경은 말합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8:1) 그때까지 바울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그 뒤에 사울은 교회를 진멸하고 남의 집에 들어가서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고(행8:3)합니다.
“열심”이라는 말의 원어는 첼로테스(ζηλωτης)입니다. 유대의 독립을 위해 강경하게 투쟁하는 첼롯당과 같은 의미입니다 물론 바울은 첼롯당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만큼이나 강하게 유대주의를 수호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바울이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는 사도행전 9장에 나옵니다. 다마스커스 근처에서 예수의 소리를 듣게 되고, 갑자기 눈이 멀게 된 사울은 예수가 택하여 보낸 아나니아라는 사람의 안수를 받고 다시 보게 됩니다. 그렇게 회심하였지만, 사람들은 사울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나중에 바나바의 천거로 예루살렘 교회에 받아들여진 사울은 얼마 후 가이사랴로 피신했다가 다소로 갑니다.
III. 회심이 아니라 선택(1:15-17)
바울은 자신의 회심이 다마스커스에서 일어났지만, 그것조차 모태에서부터 “따로 세운”(αφοριζω)것이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구별하다, 선택하다, 확정하다인데, 개역성경에서는 “택정(擇定)”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소명이 사실은 출생 전에 확정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한 동안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편에 섰던 것은 사실이지만, 바울은 그 과정조차도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부르심을 받게 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은혜”라는 단어는 역시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는 힘”이 분명합니다.
때가 되었을 때에 바울은 자기 속에 들어와 계신 그리스도를 인지하였습니다. 어쩌면 다마스커스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포로가 된 것이 분명합니다. 새 번역은 “그 아들을 나에게 기꺼이 나타내 보이셨다.”고 완곡하게 번역하였지만, 원문의 해석은 “내 안에”(εν εμοι)라는 말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여기서도 “계시”(αποκαλυψις)라는 단어가 다시 사용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감동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런 감동이 일어나게 된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그것은 이방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전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유대인을 박해하다가 돌아선 바울이라는 로마 시민권 자에게 적합한 일입니다. 유대인 출신이니 예수와 같은 민족이고, 그 예수를 박해하던 사람이었다가 회심하였으니, 그 이유를 이방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전달하기에 완벽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IV. 바울의 독자적인 사역(1:18-24)
그때의 기억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다른 사람들과 의논하지 않았다. 둘째,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다. 셋째,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돌아갔다. 개역성경에는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치 가족을 의미하는 인상을 주는데, 새번역이 맞는 번역입니다. 원문에 나오는 “피와 살”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 안에 드러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람들과 의논하지 않을 정도로 그리스도와의 직접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모(母)교회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사도직을 선배들로부터 확인을 받으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독립성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곧바로 아라비아로 내려갔습니다. 당시페트라(Petra)를 수도로 하는 나바태아 왕국의 어디쯤이겠지요. 그러고 나서 다시 다마스쿠스로 올라갔는데 그러는 동안 약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두 군데에서 각각 얼마동안 체류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약 3년 동안 바울은 독자적인 사역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 기간의 연대를 대략 정해보면 이렇습니다. 바울이 회심을 하게 된 것은 주후 35년경이고, 주후 35-38년 사이에 아라비아와 다마스쿠스에 체류하였습니다. 주후 38년에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를 만나 약 보름동안 같이 지냈고, 이번에는 곧바로 안디옥으로 가어 48년까지 약 10년간 안디옥교회를 사역의 기지로 삼고 동역자 바나바와 더불어 시라아와 길리기아 주변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3년 동안의 아라비아-다마스쿠스 무명생활도 모자라서, 10년 동안 시리아와 길리기아 이방지역 선교활동 덕분에, 바울은 여전히 유대지방의 그리스도교회에는 과거의 이력만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앞장서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이력서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억 덕분에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전에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사람이, 자기가 없애버리려고 한 그 믿음을 전한다.”(1:22)는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없애버리려던 “믿음”을 이제는 스스로 앞장서서 전하고 다닌다는 세간의 평가가 “복음”에 대한 신뢰성을 오히려 높여 준 셈입니다. 그렇게 진실한 사람의 진정한 회심과 변화는 하나님께 영광을 크게 돌리게 하였습니다.
2024년 3월 17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