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완산 5차 탐방 옥인동-석굴암-기차바위-세검정
인왕산의 5차 탐방은 옥인동 아파트촌을 거쳐 인왕상 허리 도로를 가로 질러 석굴암 구경하고
인왕산 성벽에 올라 기차바위로 내려 가서 부암동을 거쳐 세검정으로 가는 코스를 택하였다.
우리는 경복궁역에 내려 우선 옥인동으로 갔다. 옥인동 아파트 골목을 걸어가면서 노인 한분을 만나
이 주변에 문화재가 없는가고 물어보았다. 그는 없다고 한다.
골목 길에는 목련의 꽃봉오리가 곧 돋아나올 것 같다. 그리고 큰 느티나무에 전정을 하였다.
올라가니 오른편에 일산가옥이 나타난다. 일본식의 일자 지붕에 한식을 가미했다고 돌판이 말한다.
좁은 골목 길 아파트 촌으로 가니 꽤 넓은 길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 산으로 올라 허리 도로를 질러
석굴암으로 올라갔다.
석굴암
1. 석굴암 탐방
힘 들려 경사면을 오르니 큰 바위가 나타난다. 허리 도로 철책에 '석굴암'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그 석굴암을 찾아 올라가는 것이다. 정말 석굴암이었다. 거대한 바위 속 공간에 삼존불을 모실 만큼
큰 공간이 있었다.
보살 한분이 점심 때인데 공양을 들고 가시라는 말씀을 하신다. 원래 절밥이 맛이 있다. 그래서 그
권유에 우리는 바위 속의 공간에 들어가서 점심을 맛있게 먹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치마 바위의 설화를 들려주었다.
"그 치마 바위가 암자 옆에 바로 있습니다.
그것을 여기 걸어 여러 관광객이 읽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요."
"그러겠습니다. 다시 와야 겠군요."
우리는 약속을 하고 점심을 잘 얻어 먹고 내려왔다.
기차바위
2. 장수천 지나 성벽의 초소 경유 기차바위-부암동 하산
내려오다가 다시 '장수천'으로 돌아 구경하고 계속 올라 성벽 보고 초소까지 갔다. 계단을 오르는데
힘이 든다. 땀이 난다. 안개가 하도 짙게 깔려 100m 바같을 볼 수 없다. 우리는 안개 속에서 기차바위
길로 내려가서 부암동으로 내려간다.
기차바위 능선에는 기암절벽이 많다. 해골바위도 있으며 이상하게 생긴 바위도 있다. 그리고 이 능선
에는 소나무가 많다.
마침 산행하는 사람을 만나 부암동으로 내려가는 길을 알았다. 바위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그곳이 "청계동천"(靑溪洞天)이다. 그곳에는 규모가 큰 신촉 된 건물도 있고 고가도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현진건의 생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다음 세검정으로 내려가면서 석파랑, 홍지문, 세검정 등을 구경하였다.
3. 부암동에 얽힌 설화
-안평대군과 정선의 몽류도원도
아버지 세종이 안평이라는 아들 이름이 너무 태평스러워 경계의 뜻으로 호를 비해(匪懈)라고 지어
주었다. 비해라는 말은 게으름을 가두어둔다는 의미이다. 시경의 대아편에 나오는 귀절이다. 안평
대군은 북악을 바라보는 인왕산 자락에 정자를 짓고 그 당호를 비해당으로 하였다.
비해당은 일명 무계정사(武溪精舍)라 불렀다. 무계는 무릉계곡이라는 이름이다. 몽유도원도를 탄생
시킨 안평의 유명한 꿈 이야기가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꿈을 깨고 난 후에 안견을 시켜
바로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는 꿈에 본 것과 비슷한 곳을 찾았는데 바로 부암동이 그곳이라고 보았
다. 산과 산이 싸안고 산과 마을이 꿈에 본 것과 비슷하다고 본 것이다.
이만큼 부암동 일대는 안견의 몸유도원도를 탄생시킬만큼 유명한 곳이다. 이곳은 바위로 된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개울 물도 많다. 그래서 세검정 일대라면 명승지로 이름나 있다.
-부암(付岩)
자하문 턴널에서 나와 굽이져 도는 길 가에 곰보가 져 있는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에 돌을 붙이면
아들을 낳고 못붙이면 불임이 된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의 기원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여인이 시집 간지 하루만에 남편을 잃었다. 몽고군이 붙잡아 간 것이다. 이 여자는 당황하여
날마다 바위 주변을 빙빙 돌았다. 이 사연을 알게 된 왕이 수소문하여 남편을 되돌려 주었다.
남편이 없을 때는 붙여도 붙지 않는 돌이 부부가 해후한 이후로는 절로 잘 붙었다. 그런 영험이
전해지자 아들을 낳지 못하는 불임 여인이 돌을 눌러대는 통에 홈 자국이 났다는 것이다.(http://blog.joins.com/isomkiss/5017801) 그런데 이 바위가 바로 부암동이라는 이름을 낳게
하였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자하문 도로를 넓히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석파랑
4. 석파랑
세검정 삼거리에서 자하문길 방향 오른쪽에 '석파랑'이 있다. 이 석파랑은 흥선대원군의 사랑채로
더욱 유명한 곳이다. 인왕산의 바위 기슭을 기초로 하여 석파 대원군이 사랑채로 지었다. 일종의
별장이다. 자연을 그대로 이용하여 집을 안쳤다.
이 집은 일본에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찾아온 서예가 손재형이 기거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은 버려진 우리 문화재를 제대로 관리하여 많은 사람에게 우리 건축 문화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다. 지금은 한옥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면서 한정식 전문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홍지문
5. 홍지문과 탕춘대 성곽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외성 형태로 쌓은 것이다. 홍지문은
漢城)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弘智門'
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면서부터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홍지문은 숙종 41년(1715)에
건축되어 1921년까지 탕춘대 성문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으나 1921년 홍수로 붕괴되어 50여 년간
방치되어 왔다. 이에 서울특별시에서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하였다.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화강암으로 중앙부에 월단(月團, 아치)이 꾸며지고, 그 위에
지붕이다. 홍지문 북쪽으로 홍제천(모래내, 沙川)을 가로질러 홍지문과 같이 설치하였던 오간대수문
(五間大水門)도 1921년에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77년 홍지문 복원 때 길이 26. 72m, 폭 6.8m높이
5.23m, 수구 폭 3.76m, 수구 높이 2.78m의 5간의 홍예교(虹霓橋)로 복원하였다. (http://cafe.joins.com/mjkcos)
세검정
6. 세검정
북한산 자락 부암동 계곡에 위치한 세검정은 조선조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군사들의 휴식
처로 세웠다고도 하며 연산군의 유흥을 위한 수각(水閣)으로 세웠다고도 전한다.
이 정자를 세검정(洗劍亭)이라 부르게 된 연유는 광해군 15년(1623)에 인조가 능양군(綾陽君)으로
있을 때 이곳에서 광해군의 폐위(廢位)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날을 세웠다 하여 세검정(洗劍亭)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불의를 무찌른 정의의 칼을 깨끗이 씻어서 칼집에 넣고 평화를 구가하는
찬미의 상징으로 이룩된 정자라고 볼 수 있다.
자연암반(自然岩盤)을 기단(基壇)으로 하는 사각초석(四角礎石)을 암반 모양대로 높고 낮게 배열
하여 평면정자형(平面丁字形) 정자로 세워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계획한 점과 평면크기에 알맞은
부재(部材)의 크기 등에서 한국적인 건축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정자의 한 예로 귀중하다 할 수 있다.
현재의 세검정 정자는 1977년에 복원된 것이고, 서울시 기념물 제4호로 지정 되어 관리되고 있다.
(http://www.soguri.com/buam-dong)
석파랑의 복수초
이날은 석굴암 탐방하고 장수천 계곡으로 올라 기차바위 타고 부암동으로 내려와서 석파랑 홍지문
세검정 구경하였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산행을 하였는데 이외로 좋은 구경을 많이 한 셈이다.
경복궁 역 가까이 와서 음식점에 들여 하산주 한잔 하였다. 인왕산은 정말 구경할 곳이 많은 산이다.
곳곳에 바위도 많고 설화도 많고 이야기도 많은 산이다.
2007 3 5 정태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