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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이니, 맨 아래 ‘Stay Foolish’ 목사님 댓글만 읽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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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선생님께서는
사도행전 10장 44절~46절 주석에서
‘방언 은사 중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토론은 제 글 <‘방언은사 중지론’만이 개혁 신학인가?>를 두고 엔드리케리 님과 나눈 토론입니다.
타 카페에서 있었던 토론입니다.
엔드리케리 님이 ‘칼빈 선생님 방언 은사 중지론’ 텍스트를 제공해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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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리케리 2018.11.28. 08:07
본문에 언급된 {제네바 요리문답}에서 다음 내용을 참고하십시오.
{제네바 요리문답} <제247문답>
문 : 그렇다면 방언으로(알지 못하는 말)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 이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며 일종의 사악한 위선입니다.
사계 2018.11.28. 19:16
답글, 감사드립니다.
{제네바 요리문답} <제247문답}만 보지 말고 바로 앞 문답 <제246문답>도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제네바 요리문답}은 {기독교 강요}를 요약한 문답이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네바 요리문답} <제246 문답> <제247문답>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기독교 강요 제3권} [제20장] <제33항: 기도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모국어로 드려야 함>을 읽으면 됩니다. 이로써, {제네바 요리문답} <제247문답>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시대배경ㅡ모국어가 아니라서 자신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라틴어 방언기도를 암기해 그 방언으로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마음 없이’ 기도할 수밖에 없는 중세 천주교 그릇된 관행ㅡ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제네바 요리문답} <제247문답>을 인용해, 방언기도 은사를 받은 형제들을 무조건 “사악한 위선” 같은 말로 ‘극단’의 ‘정죄’를 일삼는 일과 방언기도 은사중지론에 칼빈 선생님을 팔아 칼빈 선생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을 피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에서 펴낸 {기독교 강요 中}에서 옮깁니다. 477쪽입니다.
<제33항: 기도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모국어로 드려야 함>
···(전략)···
여기서 “영”이라는 단어는 방언 은사를 일컫는 것이다. 어떤 이들이 이 은사를 받고도 그것을 마음과 단절한 상태로 사용해 ㅡ 즉,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로 사용해 ㅡ 그 은사를 악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적인 기도나 사적인 기도나 간에 마음이 없이 방언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심히 불쾌하게 만드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마음이 일깨움을 받아서 방언이 입의 말로써 표현하는 모든 내용을 능가할 정도로 열렬한 생각이 일어나야 마땅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방언은 심지어 사적인 기도를 위해서도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만, 내적인 감정의 힘이 부족해 마음이 스스로는 일어나지 않거나 혹은 감정이 너무도 격렬하게 발동해 방언 행위가 저절로 함께 이뤄지는 경우는 예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훌륭한 기도들이 때로는 말로 발설되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감정이 일깨워지면 허세를 부리려는 의도가 없이도 방언이 저절로 말로 발설돼 나오고, 몸의 다른 지체들이 동작을 하게 되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이다. 한나가 혼자서 중얼거린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삼상 1:13). 그리고 모든 성도들도 간헐적으로 말이 터져 나오는 등 이와 비슷한 현상을 계속해서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하략)···
엔드리케리 2018.11.28. 23:58
1. 인용하신 기독교 강요는 라틴어 기도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방언(영언) 기도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2. 존 칼빈은 은사에 관련해 그의 성경주석에서 은사는 오래 전에 중지됐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3. 마찬가지로 존 칼빈은 여러 저서에서 방언(영언)기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일관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4. {제네바 요리문답}의 해당 내용은 방언(영언) 기도를 금하는 것입니다만, 사계 님 주장대로 라틴어에 대해 기술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방언(영언) 기도를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찬가지로 이해하지 못하는 기도를 금하는 것으로 방언(영언) 기도도 당연히 금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사계 2018.11.29. 06:40
1. 1970년대에 중고교생들이 팝송을 암기해 영어실력이 없는 중고교생들 경우 그 팝송 노랫말(영어) 뜻도 모른 채 부른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는 라틴어 기도를 말하고 있지 않”으면, 라틴어 방언 기도를 암기해 그 방언으로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마음 없이’ 기도해도 된다는 논리는 아니겠지요?
이른바 “문맥을 따라 읽기” 방법에서 중요한 것 하나는 ‘그 글이 태어난 시대배경’을 고려하며 읽는 방법입니다. {기독교 강요 제3권} [제20장] <제33항> 제목이 뜻하는 대로 이 조항이 태어난 시대배경은 당연히 ‘라틴어 방언으로 예배(미사)를 집전했던 중세 천주교 그릇된 관행’입니다.
이런 시대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현대 은사중지론’이라는 선입관(종족우상)에 사로잡혀 {기독교 강요 제3권} [제20장] <제33항>을 읽으면, “실제로는 마음의 감정이 일깨워지면 허세를 부리려는 의도가 없이도 방언이 저절로 말로 발설돼 나오고”에서 “방언이”를 “방언처럼”으로 읽습니다. 종족우상에 눈과 마음(이성)이 가려 난독증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ㅡ실제로 “이”를 “처럼”으로 독해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세대주의자 존 맥아더 방언은사 중지론에 사로잡힌 분이셨습니다. 다행히, 제가 이 난독증을 지적하며 {기독교 강요 제3권} [제20장] <제33항>이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시대배경을 설명하자, 그분은 “이”를 “처럼”으로 읽은 난독증을 인정하셨습니다. ㅡ 이 난독증으로 존 맥아더 방언은사 중지론에 꿰맞춰 어떻게 하든지 칼빈 선생님을 방언은사 중지론자로 주장합니다.
2. 3. 중요한 것은 텍스트입니다. 그 텍스트들, “성경주석”과 “여러 저서”들을 제시해 주실 수 있습니까?
4. 역시 중요한 것은 텍스트(성경)입니다. [프랑스 신앙고백] <제5조: 성경의 권위>에 적힌 “그 어떠한 것의 권위도 성경의 여러 책들을 반대할 수 없고, 오직 이 모든 것을 성경에 일치하게 검토하고, 규정, 개혁해야 한다.”대로 ‘엔드리케리 님이 해석하신 칼빈 선생님 방언론’이나 ‘칼빈 선생님 권위’가 ‘성경의 권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고전 14장 13절이 뜻하는 대로 고린도교회 방언 기도는 오순절 성신 강림 시 방언(외국어) 기도와 다르게 ‘통역’이 필요한 방언 기도였습니다. 이 점에서 고전 14장에서 말하는 방언은 이른바 “영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께서 고전 14장 28절, 39절에서 ‘통역이 없어서 골방에서 드리는 방언(영언) 기도’를 금지하셨습니까?
엔드리케리 2018.11.29. 11:15
{제네바 요리문답}과 {기독교 강요} 방언 부분을 라틴어라고 해석하시는 것이 사계 님 개인적 상상이나 추측이 아니시라면 그러한 내용으로 해석하는 문헌을 알려주시는 것이 무식한 저와 이 글을 보시는 다른 분들에게도 좋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방언 같은 은사가 중지됐다는 내용은 아래에 나옵니다. 그밖에도 칼빈 주석서 다른 부분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는데 지금 못 찾겠네요.
칼빈 주석(Commentary Upon the Acts of the Apostles translated by Henry Beveridge) 사도행전 10장 44절 : ···(전략)··· The gift of the tongues, and other such like things, are ceased long ago in the Church; but the spirit of understanding and of regeneration is of force, and shall always be of force, which the Lord coupleth with the external preaching of the gospel, that he may keep us in reverence of his word, and may prevent the deadly dotings, wherein brain-sick fellows enwrap themselves, whilst that, forsaking the word, they invent an erroneous and wandering spirit. ···(후략)···
{기독교 강요} 초판본이나 칼빈 편지에서도 본 것 같은데 찾는 대로 또 올려드리겠습니다.
사계 2018.11.29. 19:24
칼빈 선생님께서 사도행전 10장 44절 주석에서 “The gift of the tongues, and other such like things, are ceased long ago in the Church.” 하셨군요. 자료, 감사드립니다. 제 글에 적힌 “칼빈 선생님께서는 {기독교 강요}에서나 {제네바 요리문답}에서나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결코 ‘방언은사 중지’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존속’을 가르치셨습니다.”에 각주를 달아 “2018년 11월 29일에 무물 카페에서 엔드리케리 님 수고로 알게 된 사실이다.”며 이 주석을 적어야겠습니다.
회사에서 스마트폰으로 엔드리케리 님 답글을 읽고 ‘왜 칼빈 선생님께서는 방언은사는 오래 전에 교회에서 사라졌다고 하셨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 까닭 하나는 고린도교회 오남용 때문이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4절 주석에서 “사람들이 입술을 움직여 기도할 때, 만일 마귀가 그 기도하는 사람들이 적절하게 기도하고 있다고 믿는 그 생각들을 세상에서 그렇게 많이 빼앗아가지 않았더라면, 모든 사람들이 이 모든 영적 일들에 대해 철저하게 친근해졌을 것이다.” 하신 칼빈 선생님을 생각하며 ‘고린도교회가 보여준바 오남용, 성령의 은사를 자기 것으로 삼는 오남용, 성령의 은사까지도 마귀화해 분란을 일으켜 교회를 허무는 사탄을 종으로 쓰시는 하나님(대상 21:1, 삼하 24:1 참고)께서 방언은사를 거두셨다는 뜻이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아쉽게도 저에게는 ‘존 칼빈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주석}’만 있기 때문에, 제 글 <‘방언은사 중지론’만이 개혁 신학인가?>에 등장하는 예장 백석 라마드 목사님께 “칼빈 주석 사도행전 10장 44절에서 46절을 사진으로 찍어 스마트폰 메시지로 보내 주십시오.” 부탁드렸습니다. 다음은 46절 주석 끝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일례로 바울은 이 문제로 고린도인들을 호되게 책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얼마 안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가 과거에 허용하셨던 것을 빼앗아 가시며 더 이상 그것이 남용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전혀 이상한 노릇이 아니다.》
물론, 이미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ㅡ호방하고도 깊은 신학을 하신 칼빈 선생님, 하나님께서 크게 쓰신 종으로서, 중세 천주교 암흑시대를 물리치는 종교개혁이라는 세계사의 획을 그으신 칼빈 선생님 앞에서 저라는 존재는 참으로 하찮은 존재일지라도, ‘정말 그러한가?’ 자세를 귀히 여기는 저,ㅡ 저에게는 사도행전 10장 44절~46절 주석에서 ‘방언은사 중지’를 말씀하신 “‘칼빈 선생님 권위’가 ‘성경의 권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그 어떠한 것의 권위도 성경의 여러 책들을 반대할 수 없고, 오직 이 모든 것을 성경에 일치하게 검토하고, 규정, 개혁해야 한다.”는 {프랑스 신앙고백}대로, 이를 위해 자료 찾으시는 대로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사계 2018.11.29. 19:56
“{제네바 요리문답}과 {기독교 강요} 방언 부분을 라틴어라고 해석하시는 것이 사계 님 개인적 상상이나 추측이 아니시라면” 하셨습니다. 엔드리케리 님 이 의문점을 두고는 오늘 중으로 답변 드리겠습니다. 타이핑 중입니다.
사계 2018.11.29. 23:57
“제네바 요리문답과 기독교 강요의 방언 부분을 라틴어라고 해석하시는 것이 사계 님 개인적 상상이나 추측이 아니시라면 그러한 내용으로 해석하는 문헌을 알려주시는 것이 무식한 저와 이 글을 보시는 다른 분들에게도 좋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하셨습니다.
“그러한 내용으로 해석하는 문헌”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제 “추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추측”이라기보다는 {기독교 강요 제3권} [제20장] <제33항> 제목 “기도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모국어母國語로 드려야 함”에서 한때는 서방(서로마) 기독교에서 통용되는 살아있는 언어였지만, 게르만족 침공으로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죽은 언어’가 돼 버린 라틴어, 중세 천주교 영국, 독일, 프랑스, 같은 서유럽 각국 자국어自國語가 아니라서 회중이 이해할 수 없는 ‘죽은 언어’ 라틴어로 미사를 집전했던 ‘중세 천주교 그릇된 관행’이라는 시대배경을ㅡ중세 천주교에서 성경은 ‘죽은 언어’로 번역된 라틴어 성경이라서 평신도들은 성경조차도 읽을 수 없었던 시대배경 역시ㅡ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저, 제 ‘해석’입니다.
《성령께서 이 구절에서 방언에 불멸의 명예를 주신 것이 틀림없음으로, 어떤 종류의 영靈이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그렇게 심한 모욕적인 말로 언어를 배우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그런 비평가들을 움직일 수 있는가를 추론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문제들을 취급하고 있다. 바울은 모든 나라들 가운데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그런 강력한 도움을 주는 모든 말들에 대해 차이를 두지 않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존 칼빈 {고린도전서 주석}’ 14장 5절 주석에서.
“언어를 배우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그런 비평가들”이라는 문장에서 저는 ‘평신도들은 성경조차도 읽을 수 없었던 중세 천주교 시대배경’을 생각했습니다. 또한 “불멸의 명예”와 “모든 나라들 가운데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그런 강력한 도움을 주는 모든 말들”이라는 문장에서 ‘평신도들도 성경을 읽고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던 일, 종교개혁으로 영어 성경이나 독일어 성경이 태어나게 된 시대배경’을 생각했습니다.
《또 카톨릭 교도들은 그렇게도 지나치게 어리석어서 그들은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기도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을 뿐 아니라, 그들도 모르는 말로 속삭이고 중얼거리는 무지한 짓을 더 좋아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최종적인 뜻’이 충분하다고 말함으로써 격렬한 단편적인 궤변으로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다. 실례를 들어보도록 하자. 한 스페인 사람이 많은 세상적인 걱정으로 정신적인 대격변의 상태에 빠져 있으면서 독일말로 하나님을 저주했다고 가정해 보면, 그때 그가 공식적인 기도를 하는 한, 또한 잠깐 동안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화해한다면,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라고 생각한다.》 ‘존 칼빈 {고린도전서 주석}’ 14장 14절 주석에서.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기도에 대한 변명”이라는 문장에서 저는 ‘죽은 언어 라틴어로 미사를 집전했던 중세 천주교 그릇된 관행’을 생각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이 문장에서 우리는, 아니 중세 천주교 교회사를 아는 사람은 당연히 ‘중세 천주교 그릇된 관행’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바울이 즉시 거절한 그 일을 카톨릭 교도들은 거룩하고 합법적인 관례로 본다. 이것은 다만 그들의 놀랄만한 몰염치를 나타낼 뿐이다. 참으로, 그보다도 이것은 더 눈에 띄는 실례인데, 사단이 카톨릭 교도들 세계에서 어떻게 공격의 손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그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자. ‘기도 내용이 무엇인지 무식한 사람이 깨닫지 못하고는 그 사람이 공적 기도 내용에 참여할 수 없다.’는 바울의 말 이상 더 분명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감사와 기도를 공석에서 드릴 때 모든 사람들이 다 이해할 수 있는 자국어自國語(모국어母國語) 이외 다른 말로 드려서는 안 된다.’는 이 금지 이상 더 분명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울이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을 그들이 날마다 행하는 때에, 그들이 그를 교육받지 못한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그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지킬 때에, 그들이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이 그들 가운데서 아무 거리낌 없이 어떻게 자신을 즐기고 있는지 볼 수 있다.》 ‘존 칼빈 {고린도전서 주석}’ 14장 16절 주석에서.
가로 속 ‘모국어母國語’는 제가 더했습니다. “장로들 유전”을 ‘성경’보다 앞세웠던 바리새인들과 똑같이 “거룩하고 합법적인 관례”로서 “교회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회중들이 읽을 수 없는 라틴어 성경’을 고집하고 회중들이 ‘이해할 수 없는’ 죽은 언어라서 회중들이 ‘마음과 뜻을 다해’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었던 라틴어 기도, 죽은 언어인 라틴어로 미사를 집전했던 중세 천주교, 이런 ‘중세 천주교 그릇된 관행’을 적나라하게 비평하신 주석입니다. 엔드리케리 님, 그렇지 않습니까?
이만 줄입니다.
엔드리케리 2018.12.01. 02:45
답글 감사합니다. 사계 님 답글을 보고 {기독교 강요}를 다시 찾아보며 생각해 봤으나 방언을 라틴어 기도 관행으로 한정하신 사계 님 해석은 저로서는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존 칼빈은 “이해하는”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라틴어 기도와 방언(영언) 기도 모두 부정적으로 명시적으로 기술했기 때문입니다.
언급하신 {기독교강요} 최종판 3권 20장 33항에 말씀하신대로 기도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헬라어나 라틴어가 아닌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모국어로 드려야한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그 내용 바로 다음에 이어서 고린도전서 4장 15절을 인용하며 라틴어가 아닌 “방언 기도”를 분명하게 부정적으로 언급합니다.
···(전략)··· By the word "spirit" he means the singular gift of tongues, which some, though endowed therewith, abused, since they cut it off from the mind, that is, the understanding. However, we must unquestionably feel that, either in public prayer or in private, the tongue without the mind must be highly displeasing to God.···(중략)··· Lastly, we should hold that the tongue is not even necessary for private prayer, ···(후략)···
사계 2018.12.02. 18:09
《존 칼빈은 “이해하는”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라틴어 기도와 방언(영언) 기도 모두 부정적으로 명시적으로 기술했기 때문입니다.》 하셨습니다. 엔드리케리 님이 말씀하신 “방언(영언)”의 정의가 제가 이미 언급했던 정의라면, 동의합니다. 즉, 제 답글 《고전 14장 13절이 뜻하는 대로 고린도교회 방언 기도는 오순절 성신 강림 시 방언(외국어) 기도와 다르게 ‘통역’이 필요한 방언 기도였습니다. 이 점에서 고전 14장에서 말하는 방언은 이른바 “영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에 담긴 정의라면, 동의합니다.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왕하 17:33)
칼빈 선생님 시대는 ‘종교개혁의 시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종교로서 기독교회가 아닌, ‘혼합주의 음녀의 종교(왕하 17:33 참고)로서 중세 천주교회’와 싸우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칼빈 선생님도 시대의 아들이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대의 아들로서 칼빈 선생님이 지닐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이야기하는 말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크신 종으로서 칼빈 선생님 앞에서 저라는 존재는 하찮은 존재이긴 하지만, 저는 이 한계를 ‘존 칼빈 {고린도전서 주석}’ 14장 주석에서 읽습니다.
다음은 ‘존 칼빈 {고린도전서 주석}’ 14장 14절 주석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지난 봄에 {Daum} 모 개혁주의 카페에서 있었던 ‘방언은사 중지인가, 지속인가?’ 토론 때 방언은사 지속론자인 저 뿐만이 아니라, 라마드 목사님 역시 동의하시지 않았던 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제기된다. 성령의 역사로, 그들 자신도 모르는 언어로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적어도 우리는 그런 어떤 실례를 읽어보지 못했다).》
저는 “성령의 역사로, 그들 자신도 모르는 언어로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는 칼빈 선생님 주장에서 시대의 아들로서 칼빈 선생님 고뇌를 느낍니다. ‘그들 자신도 모르는(깨닫지 못하는) 언어(방언)로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고 인정하는 순간, ㅡ이른바 “초자연”의 언어인 ‘고전 14장 영언’과 ‘자연의 언어로서 죽은 언어인 라틴어’를 동일선상에서 생각할 수 없음에도ㅡ ‘죽은 언어인 라틴어를 고집하는 중세 천주교 그릇된 관행을 논박할 수 없다.’는 고뇌, 절박함을 느낍니다.
저는 ‘시대의 아들로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으셨던 칼빈 선생님 고뇌, 절박함’은 고려하지 못한 채, 《또 카톨릭 교도들은 그렇게도 지나치게 어리석어서 그들은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기도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을 뿐 아니라, 그들도 모르는 말로 속삭이고 중얼거리는 무지한 짓을 더 좋아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최종적인 뜻’이 충분하다고 말함으로써 격렬한 단편적인 궤변으로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다.》는 칼빈 선생님 주석에 적힌 “조롱”이라는 말과 “그들도 모르는 말로 속삭이고 중얼거리는 무지한 짓”이라는 말에서 {제네바 요리문답} <제247 문답>에 적힌 “조롱”이라는 말과 “사악한 위선” 말을 떠올려야 함에도, 이런 시대배경은 고려하지 못한 채 방언은사를 받은 형제를 두고 무조건 “조롱”과 “사악한 위선”이라는 말을 동원해 ‘정죄’를 일삼는 은사중지론자들 태도, 극단의 태도를 경계합니다.
몇 주 전이었습니다. “개혁 교회”로 알려진 교회, 예장 합동 소속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는 친구, 제 신앙의 첫 친구 전화를 받았습니다. 구역장인 제 친구는 주일 구역 모임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줬습니다. 목사들보다 신학 서적을 더 많이 읽는다는 의사 세 명 가운데 한 분이 구역 모임에서 존 맥아더 목사 방언은사 중지론을 언급하며 “현대 방언은 악령의 것이다.”고 정죄해 분란이 일어났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분란은 구역원 분들 가운데 사적으로 방언기도를 하는 분이 세 분이 있었다는 점에서 생긴 분란이었습니다. 물론, 제 친구는 그 세 분이 사적으로 방언기도를 하고 있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저는 이 사건에서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나라 장로 교회에 의외로 방언 은사를 받은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는 라마드 목사님 이야기를 떠올리며 ‘고전 14장에 적힌 바울 사도 가르침을 받들어 방언(영언) 은사를 사적으로만 누리는 분들이 장로 교회에 많겠구나.’를 생각했습니다.
엔드리케리 님, ‘고전 14장에 적힌 바울 사도 가르침을 받들어 방언(영언) 은사를 사적으로만 누리는 분들’까지 “조롱”, “사악한 위선”, “악령의 것”이라는 말을 동원해 ‘정죄’해야 할까요? 그들을 ‘정죄’해 이른바 “개혁 교회”, 우리나라 장로교회에서 내쫒아야 할까요? 그래서 그들을 이른바 “가나안 신자”로 만들거나 ‘무분별한 은사주의’를 추종하는 ‘신사도 계열 교회’로 내쫓아야 할까요?
엔드리케리 2018.12.03. 23:37
저는 방언 영언 기도를 하는 사람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제 와이프도 방언으로 기도합니다. 저희 교회 담임목사님도 방언기도 많이 하시고 교회 안에 방언하는 성도들도 많습니다.(저와 저희 담임목사님과는 방언에 대해 의견이 극명하게 반대됩니다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방언하는 것이나 예언이나 치유나 다른 특별한 초자연적인 은사가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 편에 서있다는 보증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말씀입니다.
그 누구도 성경 말씀 위의 권위에 있지 못합니다. 성경 말씀이 아니라면 아닌 것이고 맞다면 맞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지 않은 내용이 있다면 거기에서 멈추어야 합니다. 개인의 체험이나 주관에 성경말씀을 끼워 맞춰서는 안 됩니다.
그 성경말씀이 바르게 해석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제 자신 스스로도 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주로 정통 신학자, 권위 있는 주석가나 해석이 어떻게 말하고 그 말씀의 배경에 어떤 것이 있는가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편입니다. 언젠가 시간이 된다면 고린도전서 해당 본문에 대하여 여러 정통 주석가들 주장들을 살펴보며 논해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은혜로운 하루되세요.
사계 2018.12.04. 19:18
예. 오직 성경입니다. 주님의 평강을 빕니다.
Stay Foolish 2018.11.28. 12:45
얼마나 많은 이가 방언의 은사와 함께 바른 신앙 안에 있는가 주목해 볼 때 이 논제의 쟁점은 바른 행사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 수많은 은사자들을 향해 그것을 사악한 행위 즉 배교의 무게로 징치하는 표현은 자제돼야 합니다.
정이철 목사 건에서 개혁주의 신학교 총신대 교수님들 결론에 저는 동의합니다.
“개혁주의는 은사중지론이다.”라는 결론은 잘못된 것이며 그것은 개혁주의 안 일부 주장이며 그 안에 더 다양한 주장이 존재합니다.
크신 하나님 아래 그뜻을 쫒아야 하는 좁은 인간들의 한계입니다
저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명쾌하고 박식한 변증으로 그것을 다 표현할 수는 없으며 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그 무엇으로 단정할 능력은 없으나, 지금 방언을 통해 새 힘을 얻으며 더욱더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날마다 회복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방언기도는 사악한 짓이다.” 정죄할지라도 내 신앙의 양심이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바라보기에 강제로 사악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될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은혜라 말하고 싶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이젠 좀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목사님들 대단하세요...존경스러워요...어떻게 이런 어려운 말씀들을 다 알고 가르치시는지~😲...전 성경말씀도 궁금하고 이해하기 어려울때가 많거든요...제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을 잘섬겨야 하는데 은사중지론 이런 설교 하시면 얼굴 뵙기가 어려워져요~😥
“제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을 잘 섬겨야 하는데” → 이 귀한 마음을 계속 가지신 채, ‘은사중지론’ 설교를 하시면 그분 약점과 부족함으로 여겨 인내하십시오.
^^
사계님은 목사님은 아니에요. 하지만 신학적 소양이 풍부합니다..
평신도이신데 이런 말씀의 지식이 있으신 사계님 🖒🖒🖒...제가 뵌 적은 없지만 지성이 넘치고 넘치신 것 같아요...카페에 쓰신 글보면 속이 후련하고 아주 통쾌해요~😄
칭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