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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은 사상 최악의 폭염이 이어지는 가운데 올해 전국 폭염일수와 열대야일수에서 최고기록을 했다.
여름의 끝자락 서울둘레길 1코스 수락산, 속세를 떠나지 않은 옛사람의 길은 서울창포원에서 시작한다. 서울둘레길 제14기 100인 원정대의 첫 발걸음이기도 한 1코스 수락산 코스 시작점인 서울창포원은 서울 강북의 끝자락인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에 세계4대 꽃 중 하나로 꼽히는 붓꽃(iris)이 가득한 특수식물원이다.
서울창포원은 약1만6천평에 붓꽃원, 약용식물원, 습지원 등 12개 테마로 구분 조성되어있다. 100인 원정대에 앞서 서울의 안쪽으로 숲과 마을과 하천을 이은 157km 둘레길 종주를 시계방향으로 시작된다.
중량천을 가로지르는 상도교를 지나 수락 리버시티공원을 통과한다. 통일로를 가로지르는 보도육교는 공사 중이라 우회길을 이동한다. 수락산으로 오르는 길목인 징검다리를 건너간다.
수락산 구간이 시작된다. 수락산은 서울의 서쪽의 인왕산으로부터 북한산 도봉산을거쳐 서울의 동북쪽을 지키는 산이다. 아래로 불암산 아차산 용마산등이 연이어지고 멀리 남쪽으로 관악산부터 우면산 구룡산 대모산등이 어림된다.
트레킹코스로 잘 알려져있는 수락산은 불암산과 이어진 능선에 봄철 철쭉이 아름답다. 수락산 하면 생각나는 기차바위, 산길은 험해도 서울시내에 위치해있어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산이다. 일설에 조선조 이태조가 수락산이 서울을 등지고 앉은 산세를 하고 있기 때문에 서울을 도읍지로 삼은 왕의 뜻에 어긋 난다하여 반역산이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수락산은 서울의 노원구와 경기도 의정부시, 남양주시에 걸쳐 위치한 산이다(고도:641m). 조선 시대에는 양주목에 속하였다. 내원암 일대 계곡에 바위가 벽을 둘러치고 있어 물이 굴러 떨어지므로 수락(水落)이라 이름 하였다는 설과 산봉우리 형상이 마치 목이 떨어져 나간 모습이 수락(首落)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한자 표기는 달라도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골짜기 물이 맑아 금류(金流) · 은류(銀流) · 옥류(玉流)라 하는 폭포를 이루어 떨어지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산의 자태에서 이름이 유래된 것 같다.
서울둘레길은 도봉구에서 노원구로 접어든다. 노원구는 서울 최동북부에 위치하며 북쪽과 동쪽으로 수락산, 불암산 등을 통해 경기도 의정부시, 남양주시, 구리시와 맞닿아 있다. 구의 서쪽 경계를 따라 월계동을 관통하며 중랑천, 당현천이 흐른다.
노원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옛날에는 갈대(蘆)만 무성해서 행인들이 불편을 겪어 여관인 원(院)을 설치했는데 여기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며, 단순히 갈대(蘆)가 많은 들판(原)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수락골이다. 수락골의 옛 이름은 벽운동계곡으로 서울 근교에서 알아주는 명소였다. 벽운동계곡이 있는 수락골은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영의정 홍봉한이 별장을 짓고 사는 동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면서 유명해진 곳이다.
홍봉한의 맏딸인 정주의 생모 혜경궁 홍씨도 어린 시절 이곳에서 서정성을 키워 훗날 '한중록' 과 같은 문장을 남겼다고 한다. 예전 덕성여대 생활관 안에 퇴락한 벽운동 별장의 안채 우우당이 남아 있었는데, 화려했던 과거의 명성은 간데없고 추사의 글씨로 쓴 현판이 있었다는 이야기만 전해져 온다.
그런데 추사는 이 별장 주인이 세상을 떠난 뒤 8년이 지나 태어난 사람이고, 오래된 소문을 확인할 글자도 지금은 볼 수 없다. 한 시대를 뒤흔든 권력자도 구름처럼 몰려들던 벗들도 간 데 없다.
수락골을 뒤로 한차례 가파른 계단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만나는 노원구 주민쉼터 전망대다. 그렇게 무덥던 길고 길었던 폭염, 가을 앞에는 장사가 없는지 어디선가 불어주어 발걸음을 붙잡는다.
전망대에서 노원골로 다시 내려가는 오솔길에서 늘 만나던 소나무 한 그루, 모진 풍파에 꺽이어 마치 4라는 숫자처럼 생긴 모양새가 언제나 이 길을 걸을 때 발걸음을 붙잡았는데 어쩌다 놓치고 말았다.
노원골이다.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던 '귀천'의 시인 천상병을 기리는 산길과 공원이 있는 곳이다. 시인은 생전에 "수락산정으로 가는 등산행객 / 막무가네로 가고 또 간다"고 했다. 시인이 떠난 뒤 산정을 향해 꾸역꾸역 몰려드는 인파는 더욱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