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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데로 가라 / 사 6:1-8, 눅 5:1-11
우리나라에는 겨울철에 전쟁을 치룬다. 입시전쟁이다. 시험보는 학교의 정문에는 어머니들이 나와서 교문을 붙잡고 기도하는 모습, 염주알을 돌리며 자식들이 시험을 잘 치르기를 기원하는 모습을 흔히 본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바른 신앙을 가져도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모습들이 미신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올해도 입시전쟁이 서서히 끝나가고 있다. 합격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기뻐하고 감사하다. 반면에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경우에는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낙심한다. ‘내가 그렇게 기도했는데 하나님도 별 수 없는 존재다. 이제부터 신앙생활 하지 않겠다.’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가 진정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올바른 기도를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믿음 위에 확고히 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지 점검해 볼 일이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들의 기도는 무속적이며 기복적인 기도와는 분명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무속 곧 점보는 것에 대해 몇마디 말씀드리고 싶다.
최근 들어 무속인과 점보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점보는 것에 대한 기독교의 대책이 시급하다는 것을 느낀다. 점을 보는 그리스도인들이 갈수록 늘고 있는 것은 한국교회의 양적 팽창에 따른 기복신앙이 빚어낸 결과이다. 한국역리학회에 따르면 현재 역술인, 신접자, 무당 등은 20-30만 명에 달하며, 이중 고학력자가 전체의 10%인 2-3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는 10여년 전에 비하면 무려 2백% 이상 증가한 것이며, 근래 2-3년 전부터는 1년에 1만명 가까이 되는 무속인들이 생겨났고 사이비 무속인들까지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갤럽조사연구소에 의하면 돈을 내고 점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38%나 되며, 운명이나 팔자를 믿는 사람은 36%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국민들의 점문화에 대한 긍정적 시각도 점문화의 확산을 부채질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매년 입시철만 되면 인기를 누리고 있는 점집의 성황이 올해도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입시생을 둔 기독교인들도 적지 않게 점을 보러 다닌다는 얘기가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TV나 각 언론들이 3년전 김일성의 사망 예언을 경쟁적으로 보도한 것과 삼풍백화점 붕괴시 살아있는 사람이 어디쯤 있다는 예언을 보도함으로 각종 대형사고의 불안심리를 틈탄 점문화가 빠른 속도로 번지고 있다. 아울러 예전의 단순한 개인사적인 점에서 이제는 곧 있을 총선으로 인해 당선이 될 것인지 어떨지를 묻는 풍토가 계속되고 있다. 이제 점을 보는 단골손님은 가족을 생각하고 가정을 염려하던 아줌마 세대에서 정치가, 사업가, 결혼세대, 대학생, 청소년 등으로 전계층에 고루 퍼져 있다. 대학 내의 역술 동아리로부터 시작해서 서점마다 역술코너가 마련되어 있고, 각종 일간지나 주간지 월간지 등에 오늘의 운세나 금주의 운세, 이달의 운세 등이 소개되어 있으며, 전화로 운세를 알려주는 광고가 신문마다 빠지지 않고 실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점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게 출발했다. 특히 우리의 농경문화는 정초부터 신년운세인 토정비결을 보는 것으로 시작했고, 추수 때나 연말에는 반드시 온 마을이 공동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1년의 운세가 길한가 흉한가, 올해의 나의 목표가 이루어질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 등에서부터 잘되게 해달라는 기복신앙은 농경사회의 공동체를 공고하게 하는 역할을 해왔다. 대부분의 점괘가 악운일 경우 남에게 덕을 쌓고 선행을 행하면 없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제사장의 위치는 곧 왕과 같았다. 이런 의미에서 역학이나 주역 등은 분명 철학이나 신학처럼 인간의 학문으로 존재하였고 인간의 역사발전에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점보는 것은 점차 개인적 심리적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확산, 마침내 점문화를 형성했다. 따라서 직간접적으로 초자연적인 힘과의 교제를 통하여 복을 누리고자 하는 개인주의적 이기적인 생각을 부풀렸다. 전에 단군교주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김해경 씨는 자신이 쓴 ‘주여, 사탄의 왕관을 벗었나이다’에서 원래 역학은 자연의 변화와 그 철학적 의미를 담은 학문의 하나로 시작, 예언의 기능보다 과거와 현재를 잘 살펴 미래에 대비하자는 온고이지신이 기본정신이었다. 그러나 중국 당나라 때에 단순히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사주와 연결되면서 잡기로 변질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감신대 이원규 교수는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종교는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이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앙이라든지 사랑의 실천 또는 희생이나 헌신과 같은 수단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수단의 추구는 자연히 이웃을 생각하고 선행을 실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점의 경우는 그것 자체가 수단이 되며 목적은 개인의 여러가지 복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나 사랑의 실천 여부는 없고 나만 잘되면 그만이며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적인 사고를 갖게 한다’고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성서에서는 무속의 문화를 형성하는 주체를 ‘귀신, 사탄, 거짓된 영, 마귀, 악령’ 등으로 표현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을 대적하는 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는 영으로 분류되고 있다.
서울 신촌에서 쪽집게 점을 운영하는 한 여자 도사는 ‘목사 전도사 장로도 1년에 1명씩은 꼭 찾아오며, 집사 권사는 한달에 1명 꼴로, 일반교인은 10명중 2-3명 꼴로 찾아온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괜한 자존심에 자기 고집을 내세우면서도 점을 본 후 죄의식을 보이는 사람은 영락없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점집을 찾는 이유는 ‘교회가 은사위주의 치료행위를 신앙의 척도로 삼거니 목사의 기도가 평신도의 기도보다 더 효력이 있다고 믿는 교인들의 의식, 그리고 기독교를 축복종교로 전락시킨 부흥사와 목회자들의 설교가 한국교회에 무속의 문화가 스며들게 한 주요 원인’이라고 한 신학자는 분석했다. 실제 교회 내에는 많은 점문화가 들어와 있다. 일반상식처럼 되어 있는 혈액형으로 성격을 감별하는 것, 연애유형과 혈액형 궁합, 풍수지리에 기인한 지역감정으로 어느 교회에서는 어느 지역 목회자는 사절이라고 한다. 놀라운 것은 개 교회가 년초나 봄에 하는 심방의 경우 옛날 무녀들이 농사가 시작될 봄철에 굿거리가 없을 때 지난해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두루 방문하여 1년 신수를 봐주고 복채를 받았던 것과 너무 흡사하다. 더욱이 기독교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예배보러 간다’는 표현도 ‘점을 보러 간다, 굿보러 간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한다.
그래서 올 심방은 이렇게 해볼가도 생각해 보았다. 좋아하는 찬송이 무엇이냐, 왜 좋아하냐, 어느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느냐, 요즘 성서 어디 읽느냐, 읽으면서 느,낀 점이 무엇이냐, 어떤 교훈을 받았느냐 등을 물어보면서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심방을 끝내려다가 이렇게 물어보면 과연 몇 가정이나 제대로 얘기를 할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변해야 한다. 서울 어떤 집에 목사님이 심방을 갔다. 아파트인데 여름이라 거실이 시원하여 거실에서 예배드리자 하니 안방으로 가서 드리자 한다. 왜 그런가 했더니 옛날에 굿할 때 안방에서 했다나. 그리고 부목사가 심방가면 새끼 목사왔다고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는 가정도 있다고 한다. 또 어느 교회에서는 심방을 갔는데 교인이 부재중이었다. 그런데 심방대원들이 문 앞에서라도 예배드리고 가자 하더란다.
점 문화는 분명히 하나님의 영을 대적하는 악한 영들의 문화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영을 대적하는 무리에게 분명히 경고한다. 막 3:28-29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성서는 또 미래라든지 운명이라든지 죽음 등의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영역은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어 인간이 넘볼 영역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한국인은 팔자타령을 많이 하는데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시고, 음부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팔자 역시 새롭게 못하시겠나? 자신의 악한 모습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진정으로 고쳐주십사 하는 기도와 죄악의 행위를 버리고자 노력하는 의지적 믿음은 혈액형이 무슨 형이든, 어느지역 출신이든 다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거듭나게 한다. 전주성광교회 나이든 집사님 한분은 관상 수상을 잘 보신다. 이걸 신앙으로 상담하려고 이용한다. 그러면서 기도하면 손금도 변한다고 말한다. 성서는 하나님의 영을 대적하는 영이 나타났을 때 ‘기도할 것과 힘을 다해 싸사울 것을 명령’하고 있다. 한국인의 정서에는 무속신앙이 뿌리 깊게 박혀 있지만 이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진정한 의미의 예배와 성경공부, 말씀훈련으로 예수의 참제자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 읽은 신약의 본문은 이런 문제를 해결해 주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호숫가에서 부르시고 귀한 사명을 주시는 내용이다. 베드로는 그날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다. 그러나 그날만은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 호숫가에서 잔뼈가 굵은 그였지만 그의 기술은 헛수고였다. 베드로는 할 수 없이 그물과 빈배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허전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가까이 오시더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 그때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베드로는 너무나 신기해서 예수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죄인입니다. 내 곁을 떠나소서’라고 고백을 하였다. 오늘 이 말씀에는 우리에게 주는 몇가지 교훈이 있다.
1. 예수님은 지금도 빈 배를 찾으신다.
빈 배는 무엇을 의미하나? 우리가 건강을 원하거나 병이 들어 빈 배처럼 될 때도 있고,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빈 배처럼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될 때도 있다. 바로 이때 주님은 찾아오신다. 고전 1:27-28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그러기에 자기 생애에 지금 아무 것도 없다고 할 때가 가장 좋은 때이다. 내 심령을 빈 배로 만들어야 주님이 찾아 오신다. 물질 권세 지식으로 교만한 심령을 빈 배로 만들어야 주님께서 찾아주신다.
2. 말씀을 들음으로 은혜받게 하신다.
축복은 말씀을 듣는데 있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도 생기고 은혜도 받는다. 은혜를 받아야 세상의 물질도 축복이지, 은혜받지 못하면 물질 때문에 고생을 당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빈 배에 고기를 채우기 전에 먼저 베드로에게 말씀으로 가까이 하셨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어떤 때는 실패해서 외롭게 홀로 남는 때가 있다. 그러나 실패하였기 때문에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복이다. 주님만 만날 수 있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도 베드로에게 말씀으로 은혜받게 한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3. 예수님은 베드로를 깊은 곳으로 인도하신다.
여기에 귀한 진리가 담겨 있다. 깊은 곳은 말씀에 의지하여 가는 길을 의미한다. 깊은 곳으로 가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베드로의 경험과 세상 지식을 부정하고 말씀의 진리에 우선하라는 말씀이다. 인간의 이치, 이성, 생각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오직 말씀에 의존하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깊은 데로 가라는 말씀은 네 이치를 포기하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생각을 앞세울 때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이치가 아무리 맞아도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만은 못하다. 그러기에 우리의 생각이 아무리 옳더라도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면 실패하고 만다.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하였다. 여기 말씀이라는 헬라어는 레마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을 통하여 마음을 감동시킬 때 그 말씀이 레마가 된다. 베드로는 주님 말씀을 듣는 중에 말씀에 의지했다. 이제 더 이상 내 경험이나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 지혜요 진리임을 깨달았다.
4. 깊은 곳에서 신앙의 큰 변화를 체험했다.
8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베드로는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 자기의 죄인됨을 알게 되었다. 자기의 죄인 됨을 알 때 예수님께서는 그때에 불러 쓰신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다. 내가 의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은 주님이 가까이 하시지 않는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똑똑하고 열심이었고 지식이 많았지만 주님은 제자로 부르지 않았다. 베드로와 같이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것이다.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다한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있다. 교회에 나오면 달라져야 한다.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다. 전에는 내가 잘났고 의롭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살았는데 이제 알고 보니 내가 죄인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또 하나는 감사할 일이 많아져야 하낟. ㄷ죄인이 죄인됨을 알았다는 것은 이로워졌다는 말이다. 감사할 일이 많아졌다는 말은 행복해졌다는 말이다. 5절상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불렀다. 무엇을 배워보려고 하는 사람, 돈이나 벌어보려고 오는 사람, 가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는 사람, 병이나 고쳐보려고 오는 사람들이 있다. 베드로도 그랬다. 그러나 깊은 곳에 가서 은혜를 받고 난 후에 ‘주여’라고 했다. ‘주여!’라는 말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나는 이제 종이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이다. 이제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뜻이다.
5. 베드로는 깊은 곳에서 사명을 받았다.
기독교인들은 세 번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한번은 모태에서 태어나고, 두 번째는 성령으로 거듭나고, 그 다음에는 사명으로 태어나야 한다. 사람은 일하기 위해서 태어나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깊은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는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없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다. 주님은 지금도 베드로처럼 깊은 곳에서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에게 사명을 맡기신다. 베드로는 사명을 받은 이후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 고기를 많이 잡았지만 그것을 다 포기했다. 누가 주를 위해 헌신하겠나? 베드로처럼 많은 것을 얻었으나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돈은 있지만 주를 위해 포기할 수 있는 사람,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졌으나 이 지식과 경험을 주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오늘 이 땅에는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해 믿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신 주님의 제자들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28:18-20절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제 오늘 이 시간에 깊은 데로 가자.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듣자. 오직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자.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을 다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자. 내 생각을 포기하고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자. 겸손하게 주님과 함께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자. 거기에 반드시 축복이 있고 기쁨이 있게 될 것이다. 이럴 때 여러분들에게는 무속문화, 점문화, 악한 영들의 문화에서 해방받고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열심히 그리고 깊게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6-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