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 신 18:15-22, 막 1:21-28
이번 주는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날이 있다. 일제 때부터 없애버리려 했어도 없애지 못한 명절이다. 이런 뜻있는 명절을 앞두고 귀신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오늘 읽은 본문에 귀신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귀신들린 사람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군에 있을 때 유격훈련 시 마지막 밤에는 산악훈련인데 담력훈련이란 것이 있다. 묘지에 사람 하나 들어갈 구멍을 파놓고 기어서 무덤을 통과하는 것이다. 또한 산길을 걸어갈 때 귀신으로 분장한 조교들이 갑자기 나타나 겁을 주는 것도 있다. 귀신의 종류도 많다. 처녀귀신, 몽달귀신, 달걀귀신 등.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무서워하면서도 귀신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왔다. 성경에도 귀신들린 사람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신앙인은 절대로 귀신들릴 수 없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 그 근거로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영접할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점을 들고 있다. 성도들이 귀신이 영향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귀신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성서말씀이 요일 5:18절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귀신이 성도들을 소유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또 어떤 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도 귀신들릴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의 주장은 눅 13:10-11절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고쳐주셨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말을 했다. 아브라함의 딸을 성도를 의미하는 말로 본다면 성도들도 사탄에 매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예수께서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신 다음 아브라함이 자손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표현에 근거해서 우리가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포로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분들도 있다. 고전 5:5절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교회에는 성도이면서도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성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께서 이런 사람들을 징계하실 때 마지막 단계에서 사탄에게 내어준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범죄할 때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이 사실이라면, 상당한 범위에서 우리의 삶이 사탄에게 농락당할 수 있음을 추리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은 귀신의 포로는 되지 않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탄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바울이 엡 4:27절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했다. 고전 7장은 기도할 틈을 얻은 잠시의 시간을 빼놓고는 부부가 헤어져 있는 것은 절대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5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부부 사이를 갈라놓고 가정 파탄을 초래하는 일에도 사탄이 개입함을 경고하는 말이다. 욥기에도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욥의 자녀와 재산을 치고 욥을 시험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성도도 귀신들릴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성도들의 삶에 귀신의 영향이 상당히 미칠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한 회당에 들어가셔서 귀신들린 자를 만났다. 이 말씀으로 귀신 들린 성도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귀신의 영향을 받았을 때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 알아보기 위해 귀신의 정체를 살펴보겠다.
첫째, 귀신의 정체
본문에서 더러운 귀신이 발작한 시기는 예수께서 말씀을 강력하게 전하셨을 때이다. 그때 귀신은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폭로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망의 깊은 곳을 드러낸다. 그것이 말씀의 권세 가운데 하나이다. 히 4: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살아있다. 이 말씀이 권세있게 역사할 때 말씀의 예리한 칼이 우리 영혼의 깊은 곳을 건드린다. 그러므로 말씀 전하는 설교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는 언제나 간절하게 기도해야 한다. 간절히 기도하고 설교를 듣거나 말씀을 읽으면 그 말씀이 마치 죄우에 날선 검처럼 우리의 영혼 깊은 곳을 파고 들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된 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할 때 귀신들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1. 귀신은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귀를 막는다.
귀신들린 사람이 말씀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 큰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우리 귀를 막아서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한다. 복음의 빛이 우리를 비추지 못하게 한다. 말씀의 빛을 쪼이게 되면 귀신은 숨을 곳이 없다. 그 정체가 폭로된다. 마치 범인이 경찰이 나타나면 안절부절 못하는 것처럼, 귀신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가만 있지 못한다. 본문에서 귀신은 소리를 지르면서 발작하기 시작한다.
2. 귀신은 그리스도와 관계 맺기를 거부한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귀신은 인격을 소유한 존재이다. 귀신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지성, 감성,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귀신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알며, 무저갱으로 들어가는 것을 무서워하고 자신들을 위한 의사 결정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귀신들은 절대로 그리스도와 상관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본문에는 더러운 귀신들린 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귀신은 더러운 영이다. 반대로 주님은 아주 거룩한 영이다. 그러므로 둘이 함께 있을 수 없다.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죄짓기를 즐긴다. 죄를 즐기는 삶에 거룩한 주님이 개입하시면 그 즐거움을 빼앗길까 봐 싫어하는 것이다. 귀신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거룩하신 주님이다. 또한 귀신은 성령이 역사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분과 어떤 관계도 맺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단지 교회에 나오지만 말고, 진실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친밀한 간계를 맺고 각 개인의 구세주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요 1:9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분은 여러분의 빛이 되기 원하신다. 교회에 나가지만 주님과 생명적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은 귀신들렸거나 귀신의 영향권 아래있는 자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3. 귀신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한다.
귀신은 예수께서 내리실 심판 앞에서 벌벌 떤다. 귀신들린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24절에 보면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묻고 있다. 귀신은 예수님이 심판으로 자기가 멸망당할 운명인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계 20:10절에 보면 마귀가 가게 될 지옥의이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마귀는 지옥에 가기 전에 무저갱에 갇히게 된다. 눅 8:31절에 보면 귀신이 무저갱에 들어가지않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귀신은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고, 그분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도 알고 있다. 귀신은 최후의 심판 때 무저갱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할 뿐아니라, 이 세상에 있을 때 자기들의 거처를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귀신들은 영적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 영이 역사하기 위해서는 육신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거할 곳을 찾는다. 예수께서 권세 있는 말씀을 전할 때 두렵게 된 마귀는 자기가 거할 편안한 곳을 찾는다. 무저갱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마침 그곳에 있던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마 8:31절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귀신은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충만해진 사람을 싫어한다. 그것은 귀신이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귀신은 그리스도가 없는 마음, 그리스도로 충만하지 못한 사람들을 우습게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두려워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4. 귀신은 행동이 없는 영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귀신의 지식은 삶 속에 적용할 목적으로 갖고 있는 지식이 아니다. 본문에 보면 귀신은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은 예수님이 신성과 그분이 누구신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약 2:19절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여기에서 믿는다는 것은 그냥 알기만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변화시킬 만한 지식은 아니다. 자기의 삶 속에 적용할 의도가 없는 지식이다. 제가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서를 매일 읽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주의해야 할 점은 아는데서 그치고 마는 점이다. 말씀을 삶에 적용할 의도가 없는 영적인 지식은 귀신의 길을 추구하는 것이다. 귀신은 행동이 없는 영적 지식만을 소유하고 있다.
둘째, 귀신 추방
어떻게 귀신들린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승리할 수 있겠는가? 본문에는 특별히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1. 말씀을 알아야 한다.
귀신이 자신을 폭로한 계기는 예수께서 말씀을 권세있게 전하셨을 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권세있게 전파될 때 귀신들이 벌벌 떤다. 우리는 권세 있는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2. 악령 추방의 권세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 명령했다. 사탄과 같은 악령들과는 타협할 필요도 없고 수작부릴 필요도 없다. 명령을 해야 한다.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며 나오라고 명령하셨다. 귀신들린 사람을 본적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 불필요한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대화가 아니라 명령이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예수께만 이러한 명령을 할 수 있는 권위가 있다. 그 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다. 악령들을 제어할 수 있는 권위가 있으므로 악령들을 향하여 ‘나오라’고 명령하신다. 우리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또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런 말씀에 의지하여 복음을 전할 때,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면 우리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세를 사용할 수 있다.
여러분은 예수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만나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도울 수 있도록 권능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기 바란다. 우리는 말씀으로 무장해야 하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런 악령들을 다룰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이 권세에 근거하여 귀신에게 명령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명령할 때 악령들이 우리에게 순종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 주위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많다. 재물이라는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 권력이라는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 명예라는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 입신양명, 출세, 성공이란 이름의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 이런 귀신들에게 사로잡힌 희생자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악령을 추방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이들을 치유하고 해방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를 통하여 이런 역사가 일어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하루 속히 임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199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