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은 세로쓰기를 전제로 만들어진 글자
정진명(시인)
훈민정음은 세로쓰기를 전제로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요 근래 30~40년간 가로쓰기에 벌써 익숙해진 우리의 눈으로는 언뜻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글자 표기의 원리가 그렇습니다. 첫소리와 가운뎃소리 그리고 끝소리라는 3성의 틀로 짜였다는 것이 바로 그런 사실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세종은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진작에 가로쓰기 방식으로 만들면 안 되었을까요? 궁금하죠? 세종이라고 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세종이 천재라고 해도 거스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회 전체가 흘러가는 거대한 흐름을 거슬러갈 수는 없습니다. 왜 훈민정음이 세로쓰기를 전제로 한 짜임이냐?
한자의 구조와 훈민정음의 표기 구조는 똑같다는 사실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한자는 글월을 세로로 발처럼 늘여서 쓰지만, 정작 한 글자를 쓸 때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 뒤에 아래에 획을 덧붙입니다. 훈(訓) 글자의 경우, 言을 먼저 쓰고 川을 나중에 씁니다. 그런데 아래에 획이 붙은 글자는 어떻게 쓸까요? 예컨대 성(聖)이라는 글자의 경우, 耳와 口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고, 그 다음에 王을 두 획 밑에 받쳐쓴다는 말입니다. 글월의 흐름은 위에서 아래이지만, 한 글자를 쓸 때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훈민정음이 초 중 종 세 소리를 결합하여 만든 까닭입니다. 한자를 써나가는 버릇으로부터 훈민정음의 쓰기 방식이 저절로 흘러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훈민정음은 먼저 첫소리를 쓰고 그 오른쪽에 가운뎃소리를 쓰고, 밑에다가 끝소리인 받침을 받쳐쓰게 되었습니다. 이 짜임이 바로 한자 쓰기의 흐름으로부터 왔다는 말입니다. <聖>과<성>을견줘보면, 짜임의동일성을잘알수있습니다. 그래서 가로쓰기로 글월을 배치할 경우, 위에서 아래로 쓰는 받침을 처리하기가 아주 골치아파집니다. 한글의 타자기 자모 배치가 힘겨웠던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받침 때문에 타자기에서 똑같은 닿소리를 밑에 쳐주기 위하여 누름쇠(쉬프트 키)를 하나 더 만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타자기 문제 때문에 한글의 자모 배치가 골머리를 썩일 무렵(1970년대), 한글학자 최현배 씨는 아주 참신한 제안을 한 적이 있습니다. 즉 영어의 알파벳처럼 한글의 자모도 옆으로 늘여서 배치하자는 것입니다. 이른바 <한글풀어쓰기>입니다. 받침을 밑에 쓰는 것이 아니라 가운뎃소리의 뒤에 쓰자는 제안이었죠. 1970년대면 벌써 한글의 가로쓰기가 자리잡고 출판물도 어마어마하게 만들어진 뒤여서 이 제안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사회에서는 받아들이 어려운 것이었습니다만, 일단 제안은 아주 참신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래서 최현배 씨는 가로쓰기에서 알바벳처럼 우리 글을 배치하기 위하여 닿소리와 홀소리의 모양까지 과감하게 새로운 모양으로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예컨데 홀소리 'ㅡ'의 경우, 작대기 같아서 그냥 줄긋기 표시인 '_'와 구별이 안 되니, 영어의 유(U)자를 엎어놓은 모양으로 쓰자는 방식이었죠. 청계천 7가 언저리의 헌책방에서 이 희귀한 책을 어렵게 구하여 혼자 읽었는데, 이 희귀한 책은 저만이 아니라 남에게도 소장본능을 자극했는지, 그 뒤로 저의 책장에서 슬그머니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책을 제 책장에서 빼내간 그 누군가도 지금 저처럼 이런 글을 써서 나름대로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우리 한글의 받침 배치가 얼마나 독특한 것인지는 일본어나 영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일본어는 세로쓰기이든 가로쓰기이든 한 음절을 하나로만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욱 나열해주는 것이죠. 우리 한글처럼 첫소리와 가운뎃소리를 쓴 다음에 가로쓰기에서 갑자기 세로쓰가로 가서 앞서 쓴 글의 밑에다가 받쳐쓰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 받침은 한자의 기록 습관이 그대로 넘어온 것이고, 이 거대한 흐름을 세종도 이기지 못하고 관행대로 이용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훈민정음이 모자라다거나 좀 더 나은 다른 그 어떤 모습이 있었을 것임을 지적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한 문명의 흐름에서 한 개인의 생각이 벗어나기가 그 만큼 더 힘들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고, 새로운 문자를 만들 뜻을 품은 분들은 이런 점을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헛소리를 한 번 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써온 것을 왜 그렇게 써왔냐고 묻는다고 해서 그걸 꾸짖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아울러 지난 400년간 세로쓰기를 해온 우리 글을 완전히 가로쓰기로 바꾼 지 30여년 밖에 안 되는 지금, 저는 한글이 가로쓰기보다는 세로쓰기를 위해 만들어진 글임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가로쓰기보다는 세로쓰기가 더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세로쓰기가 대세라고 해서 가로쓰기를 이 지경으로 멸종시키는 것은 훈민정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도 세로쓰기를 볼 수 없습니다. 세종이 다시 살아나서 이 장면을 본다면 하실 말씀이 과연 없으실까요?
참고로, 제 책꽂이에서 세로쓰기로 된 책들을 찾아보니, 대체로 1980년 무렵부터 세로쓰기가 사라지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80년이면, 2020년현재를 기준으로 한다면, 불과 40년밖에 안 된 세월입니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는다면, 한 세대가 겨우 지난 기간동안, 지난 수천년 이어온 관행이 사라졌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과감하게 개혁되고 혁신되는 사례도, 우리 사회의 관습에서 보기드문 현상이 아닐까 싶어서, 한국인들의 이 과감성과 혁신성을 어떻게 평가해야할지 선뜻 판단이 서지를 않습니다.
[우리 말글 나들이]훈민정음은 세로쓰기를 전제로 만들어진 글자 (1) - 충청매일 (ccd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