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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 2월 1일(월) 밤
다시 거센 파도를 뚫고 북상중이다. 낮 12시 35분 부족한 연료와 식량, 식수 그리고 조난선구조 덕분으로 얻은 작업복 한 벌과 내의 한 벌씩을 얻고 조업장으로 다시 올라가는 것이다. 처음부터 궂은 날씨다 먼저 모두들의 마음부터 궂다. 더욱 지루한 생각이 앞선다. 조타실 좌현 Hand Rail(손잡이)이 찌그러진 것을 보면 더욱 서글픈 생각이 앞선다. 301호 조난 구조 당시 부딪쳐 입은 상처인 것이다. 마치 그들 선원들이나 우리들의 마음이 저같이 찌그러지고 우거러 든 것처럼 -.
계속 몸이 쾌하지 못하다. 이번 항해는 왜 이럴까? 이 기록마져 마음은 앞서도 제 때 쓰질 못한다. 의욕이 없다. 몸의 Condition이 그런데다 배의 요동이 또한 너무 심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기압 속에서 마치려는지?
301호 구조 사건이 구시로(釧路)의 T.V방송에 까지 방영됐다. 고 김 선장은 결국 화장해서 귀국키로 했다. 함께 와서 통역 겸 여러 가지 일을 보아주던 민단구시로지부 간부들이 고맙게 여겨진다. 같은 핏줄의 동포라는 점에서 유별하게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은 유명을 달리한 고 김 선장만 너무나 허무하게 된 것이다. 그의 건장한 체구와 믿음직스럽던 인상이 진하게 남았다. 누구보다 먼저 ‘살았다’고 굳게 악수하며 얘길 나누었었는데. 처음 조난 당시부터 이미 자기는 선체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했지만 그와는 너무나 의미없는 죽음이었으니 말이다.
301호 조난 선원들의 함께 있을 때 있었던 일들이 심심찮게 들린다. 처음 이선(移船)해 올 당시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고 살았음에 대한 안도의 숨을 쉬면서 다른 잡념을 가질 수 없었었는데. 하루 이틀이 지나고 보니 무엇보다 남겨두고 온 밀수품(?)들이 아까워 못내 아쉬운 모양이란다. 급전을 내서 산 T.V랑 마누라 줄 선물들이 버린 배보다 더 아까운 모양이다. 몽땅 불태워 버린 사람보담 건재해 있으면서도 가져오지 못한 사람들이 더욱 그렇단다. 주로 침실이 뒤쪽에 있는 기관부 사람들이다. 하기야 그 같은 생사의 극한 상태 속에서도 내 봇다리를 부르짓고 찾는 사람도 있었고 우산 3개를 가지고 결사적으로 넘어온 사람도 있었다. 웃어야 할 일일런지.
그 보다 더 심한 사람이 있었다. 조난선원이 아닌 우리 선원이었다. 생사불문하고 결사적으로 가져온 것뿐이라고는 몸뚱이와 그기에 걸친 옷 외에 우산 3개인데 그놈의 우산을 쓸쩍 훔쳐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벼룩이 간’을 꺼내 먹을 놈이라고들 한다. Mr. 장석도. 선장의 친구였기에 말들이 많다. 갑판장이 직접 보고해 왔었다. 구시로항 출항 직전 전원 집합. 지금까지 쌓아두었던 것을 냅다 퍼 넘겼다. 개새끼들이라고-. 무더기금으로 -. 결국 양심의 가책을 받았는지 Mr.장이 스스로 잘못을 얘기해 왔으나 다른 일 관계상 결론을 얻지 못했다. 그로부터 그는 기가 죽어있다. 당연한 귀결이다.
현우 형님이 몹시 마음에 걸린다. 힘끗 보살펴 드리긴 했으나 잠자리도 몹시 불편했을 거고 여러 가지 생각도 많았으리라. 특히 강 선장과도 옛날 ‘개나리호’ 시절의 연관성이 있으니까. Mr. 강도 많은 편리를 보아주었다. 내 세타 1개, 담배 몇 갑, 양말 한 켤레 방한복 하의 하나를 갈 때 드렸다. 추운 날씨에 탈없이 도착하길 빈다.
2월 8일 (월) 22:00시
열 사흘째 달이 교교히 바다 위에 흐르며 부서지고 반짝인다. 좋은 날씨다. 무엇인가 아쉽고 그리움이 마음속에 가득한 느낌의 밤이다. 지난날 이런 달빛속에 가졌었던 각가지 일들이 가끔씩 생각키우곤 한다. 만선한 배는 육중한 몸체를 물 속 깊이 잠그고 무겁게, 그러나 힘있게 달린다. 약간 강한 북서풍이 분다. 바깥 날씨는 몹시 차다. 0도에 가까운 해수가 튀어 갑판에 오르자 곧 얼러붙는다. 갑판 위에 아직도 어망을 둔 체 처리하지 못하고 둔 약 10톤 가까운 고기에 살얼음이 낀다.
연 3일간 마주쳐 오는 바람과 시달이며 어장에 도착한 것이 4일 자정, 불과 3일이지만 모두를 몹시 치쳤다. 너무도 지루한 것 같다. 드디어 시작된 작업, 다소 생기가 돈다. 마침 물때가 좋았다. 초아흐레 달이 간간이 보이기도 했다. 앞서 25명의 생명을 구한 좋은 일을 해서 그런지 초반부터 호조를 보였다. 모두들 그래서 고기가 잘 잡힌다고 했다. 지루했고 어두웠던 마음들이 날씨와 함께 맑고 밝아져갔다. 대어를 외치는 고함소리와 함성이 저절로 튀어나오고 고기덤이 위에서 덩실 춤도 추었다.
1일 2000-3000여 상자씩의 어획이 올라왔다. 명태의 어체도 좋았다. 마침 산란기라서 알들을 한 배 가득씩 담았다. 미쳐 냉동처리가 따르질 못한다. 밤낮도 없고 휴식도 없다. 그래도 고된 줄을 몰랐다. 대어 만선의 꿈이 바로 눈앞에서, 손끝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2일반 만에 조업을 마쳐야 했다. 마침 보충한 연료량이 많아 더 이상 적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Over Load(과적)는 우리들 항로에 있어서 무엇보다 안전을 저해하는 위험한 요소이다. 얼마인지 숫자도 파악하지 못한 체 처리실을 가득 채우고 또 한 차례 예망, 약 10톤가량의 고기를 그냥 어망 속에 둔 체 갑판위에 묶어두고 7일 오전 11시 30반 뱃머리를 귀항 코스로 돌렸다. 역시 욕심의 대가리가 고개를 쳐든다. 더 잡자는 의견이 많다. 아쉬운 발걸음이다. 다시 여기까지 오려면 20일은 걸리는데-. 다음을 약속하며 항해를 시작, 의외로 날씨도 해상도 좋다. 짐을 가득 실은 배는 전속이다. 검푸른 물결을 헤치는 모습이 마음 든든하다 왠만한 파도엔 꿈쩍도 않고 물결을 부셔 튕겨내는 것이 바로 우리 26명과 전 가족들의 생과 삶을 짊어지고 굳세게 세상을 헤쳐가는 것 같기도 한다. 조용히 창밖을 내다본다. 앞뒤에서도 같은 코스로 귀항 길에 오른 배가 두어 척 보인다. 모두들 제각기 부푼 꿈과 향수에 젖어있을 것이다.
문득 생각키우는 귀절이 있다. ‘도리원, 원양파도에 넘실대는 우정아!’ 이것은 내가 교단을 떠나고 지기 남위호군이 교단을 버렸을 때 Mr. 류. Mr.양 넷이서 시장터 허름한 막걸리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새로운 길을 축복하는 의미에서 류상덕군이 즉석에서 읊은 시의 한 구절이다. 지금 그놈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미 밤은 늦었는데 아직도 잠자리에 들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아니면 마누라를 불끈 껴앉고 한차례 작업(?)에 여념이 없을런지도 모를 시간이다. 몹시도 그 놈들과의 대화가 그리운 밤이다. 모여 앉으면 펼쳐졌던 지난날의 대화들! 그것이 조금씩 모자람을 느낄 땐 술잔으로 대신했었다. 지금은 모두들 제각기 살길에 바쁘겠지만 가끔 즐거운 대화의 광장을 마련하고 있을 거다.
몸과 마음마저 둥실 떠 있어 소외된 느낌이 드니 더욱 그리워진다. 아마 놈들도 몹시 나를 욕할 거다. 그토록 편지 한 장 띄우지 못했으니-. 그렇다고 내 자신이 두터운 우정을 잊을 것은 아니다. 배반할, 잊을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오히려 더욱 절실하게 갈구하고 있는 지금인 것이다. 3년 전 Samoa로 떠나던 바로 그 전날 아침에 택시에 곰탕 그릇을 바쳐 들고 부두를 찾아준 일이 너무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 전날 밤 첫 출항을 빌어주려고 셋이서 내려왔다가 하숙집에서 소주잔에 흠뻑 취했던 것이다. 일찍 귀선했더니 속이 따가울 거라고 가져온 것이다. 정말 미안하다. 이제부터라도 틈나는 데로 소식 전하마. 뜬 소식이나마 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마. 너그러히 지난 일처럼 받아다오.
2월 11일(목) 24:00시 L.M.T(local mean time, 지방평균시)
정월 대보름을 막 지난 열엿새의 달이 희끄므레하게 달무리져 있다. 조용한 바다 위를 환하게 비출 땐 더없는 향수에 젖게 한다. 자정! 이 시간은 오늘의 끝과 내일의 시작을 잇는 순간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 시간을 무척 좋아한다. 바로 이 시간부터 내가 맡은 근무시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 하루의 무사했음을 감사드리며 또한 새로이 맞는 하루의 보람됨을 아울러 기원한다.
계속해서 좋은 날씨다. 지난번의 동해가 아니다. 마치 잠들고 있듯이 잔잔할 뿐이다. 어장을 떠나던 그때부터 만4일반. 어쩌면 기적같이 좋은 날씨다. 그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25명의 생명을 건진 적선의 응보일거라고 모두들 얘기한다. 하늘이 무심치 않으리라.
영아, 형님에게 안항과 입항예정일을 타전했다. 상철 군으로부터 역시 안항을 기원해주는 전보와 함께 회사를 설립했다는 소식이 왔다. 전화번호도 22-3394란다. 무척 기뻤다. 얼마나 숱한 날과 노력과 마음씀으로 보냈던가. 오늘을 위해서-. 어떤 진통을 껶었었는지는 지금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무척들 애를 먹었을 거고 애로도 많았으리라. 그러나 문제는 지난날이 아니고 지금부터다. 전진과 도약 그리고 발전만이 있어야 한다. 주저와 침체 그리고 망설임이 있어선 안 된다. 분명히 애씀의 보람이 뚜렷하리라 믿으며 축하전보를 보냈다. 가까이 있으면 축화라도 보낼걸.
어제 보름날이라 별식을 먹었다. 팥밥에 고기국에 김, 시금치 나물에. 보잘 것 없는 것들이지만 자칫 잊기 쉬운 뱃사람들의 명절을 용케 기분을 냈다. 가장 절후와 관계를 깊이 가지며 많이 따지고 계산해 나가는 뱃사람들이면서도 노상 잊고 보내고 마는 명절, 생일 등이 되고 보니 자못 아이러니칼하다.
배를 오래 탄 이일규씨의 얘기,
“나는 배 탄다고 설을 몇 개 못 쉬었다”
“그러면 나보다 나이가 적겠네? 설을 쉬어야 나이를 먹지. 이제부터 말을 놓아도 되겠다.” 강씨의 화답,
이씨 왈 “에키 이놈!”
김용태군의 얼굴에 우연히 난 부스럼을 기어이 내 손으로 수술(?)을 했다. 얼굴 오른쪽 옆 눈과 귀 사이에 두꺼운 살 속에서 염증이 생겨 부풀어 올랐다. 살결이 무척 거칠은 편이다. 무척 아팠으리라. 그래도 그 놈 곰같이 잘도 견디었다. 이상 더 그냥 둘 수 없다며 식전에 올라 왔다. 소같이 먹고 소같이 일하는 성실한 그였지만 마음은 약한 듯이 제 손으로는 도저히 딸 수 없다고 면도칼을 들고 왔다. 망설였다. 상처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지난날 내가 그 나이에 서너 군데 그러한 상처로 남은 칼자국이 아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쉽사리 칼을 대어 살을 찢기는 너무 마음이 약하다. 그러나 그냥 둘 수도 없다. 대수술을 실시했다. 면도칼을 쪼개어 뾰족하게 하여 성냥불로 구어 소독을 하고 상처의 겉도 Oxiful로 소독을 했다. 바야흐로 돌팔이의 수술이 시작됐다. 생각보다 피부가 두꺼워 고역을 치뤘다. 의외로 붉으스름하고 진한 농(膿)이 많이도 나왔다. 성공이었다. 쾌재를 부르짖었다. 마치 대의사가 된 기분이다. 제1항차 때 정봉두 씨의 심한 부상도 치료해 무사히 외상을 완치시켰던 일이 있다.
선박생활에 있어서 각 개인은 물론 전체로서 봐서도 한사람의 건강상태는 너무 크게 전체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고 가장 큰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항상 필요한 의약품과 치료도구 주사도구 등이 있지만 육상만큼 안전할 수는 없다. 더구나 나 같은 돌팔이(?)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번 항차에는 의학백과사전을 샀다. 두고 환자가 생기면 그것부터 찾아 처방하기로 하고 또 평소 틈나는 데로 읽어서 참고하려 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생사람 잡겠다. 전문지식이 없는 터라 모두가 환자 같고 우선 내 자신부터 온 전신이 병 투성이 인 것 같다. 더 볼 수 없어 덮어 버렸다. 그저 이 책이 무용지물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만 가득가지면서-. 매일 용태 군의 상처를 치료한다. 소독하고 심을 갈고-. 조금씩 완치되어 가는데 무척 신기함과 보람을 느낀다.
자정의 본선 위치는 북위38도 54.0분. 동경134도 44.0도이다. 울릉도의 동북방 200마일 지점이며 묵호까진 290마일이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29시간! 13일 오전 5시경이면 묵호 외항에 닻을 내릴 수 있다. 호수같이 잔잔한 바다. Co.245도 Nothing Port(더 이상 좌향은 안됨)로 전속이다. 남은 시간도 계속 좋은 날씨이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항구가 가까워 올수록 온갖 잡념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여자와 술 뿐만이 아니다. 육상의 모든 풍경이 그립다. 이번 정박 중은 얼마만큼 성실하게 의도하는 데로 될 것인가? 스스로 마음가짐을 야무지게 가져본다. 흩어러지지 않은 다부진 결실이 있도록 애써보자.
2월 13일 새벽 5시경 묵호외항 검역장소에 투묘하다. 또 한 차례의 항해를 마친 것이다. 갑판장이 예와 같이 각 곳에 술 한 잔씩 부어 감사드린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 멀고 가까운 산들에 허연 눈이 쌓였다. 9시경 내항에 들어왔으나 계류할 부두가 없어 한차례 Show가 벌어졌다. 결국 오후 3시경 도로 외항에 나가 다시 정박. 기다렸다. 슬픈일이다. 물동량에 비해 항구가 너무 좁고 부두가 협소하다. 이런 현실을 국가에서 좀 더 개선하고 보다 더 의욕적인 면에서 중점 건설할 수 없을까? 가금 바라보는 가까운 일본의 항만시설이 부럽다. 그 보다 한 달간의 긴 여로를 마치고 귀항한 배가 계류할 부두가 없어 외항에서 다시 하루를 묵어야 한다는 사실에 모두가 울분과 욕설이 있었다. 미리 수배를 해두지 못한 회사를 원망해본다. 결국은 가난한 나라의 실정임을 어찌 할 수 없나 보다.
14일(토)
궂은 날씨다. 아침 일찍 내항에 들어오다. 전 항차에 사용했던 부두에 계류했으나 작업 중인 ‘경진호’의 시멘트 적하작업이 끝나도록 기다려야 했다. 오후 2시경 경진호가 나가고 직접 부두에 계류했으나 즉시 양하작업에 들어갈 수 없었다. 회사에서 매매관계가 여의치 못한 모양이다. 고려원양의 운반선 ‘칠보산’호가 무려 1500여톤의 선어를 싣고 지금 양하중이다. 묵호항의 명태값이 하락일로란다. 고래싸움에 새우 등터지는 격이다. 강자의 횡포에 약자의 비애 같은 것이 느껴진다. 짓눈깨비가 곧 비로 변한다. 오후 늦게 시작한 하역작업이 결국 밤10가 넘어서 끝났다. 그나마 질서 없는 작업이라 뱃사람들만 고생이 많다. 옷이 너무 젖어 속옷까지 굽굽하다. 기분도 울적하다. 가족이 올라온 사람을 다 나갔다. 조용히 쉬었다. 피로가 엄습한다.
영아의 사랑어린 편지 No.1부터 5번까지를 찾았다. 마치 당신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다. 전날 Samoa에서 중간 입항했을 때 한꺼번에 10통 이상을 받았을 때의 기쁨을 다시 가질 수 있었다. 고마운 일이다. 정화가 몹시 앓는다고 했다. 염려스럽다. 생활의 일면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 정착돼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음이 있다. 차분히 가라앉지 못한 불안한 느낌이 담겨있다. 역시 염려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오고 싶어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 것일까. 나를 믿지 못해서 일까? 염려해서일까? 아니면 정신적 육체적 외로움 때문인가?
그렇게 야물게 약속하던 당신이 기어이 참지 못하고 꺾여진다는 그 사실 자체에 대해서 무척 서운함과 의분을 가진다. 여자가 한 가정과 직장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무리다. 어느 정도 스스로의 성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완전할 수는 없다. 어딘가 양쪽다, 아니면 어느 한쪽에 빈곳의 허점이 생긴다. 그것이 차라리 한쪽이었으면 좋겠다. 실제를 내 스스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잘 알 수는 없지만 내 추측과 생각으로는 영아는 양쪽 다 완전에 가까우리만큼 착실하게 꾸려 나간다고 믿는다. 물론 단칸 셋방살이에, 불구자 식모에, 주위의 많은 시가집들 까지-. 그 하나하나의 고충이야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를 포함한 채 나와 내 집과 내 직업에 대한 것만은 완벽하리만치 알뜰하고 깔끔하게 하고 있다고 본다. 또 그러기 위해 최대한 노력과 요령과 수단을 아끼지 않을 줄 믿는다. 그러나 그도 숱한 인간들과 꼭 같은 하나의 인간이요, 평범한 여자요 아내이며 엄마이다. 모든 인간이, 여자가, 엄마가, 아내가 가지는, 또 가지고 싶어 하는 평범한 생활을 그도 원한다. 내 자신이 그로부터 가지는 기대는 분명히 지나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기대하고 믿는바가 없으면 우선 내 자신부터가 견딜 수 없고 내 생활은 계속되지 못할 것이다. 저녁엔 인편에 보내준 속옷과 책과 식빵과 마가린을 받았다. 낮에 편지 속에서 있었던 모든 염려와 걱정이 사라진다. 다만 사랑스러움이 있을 뿐이다. 정화가 계속 열이 많다니 걱정이지만 예까지 오는 것이 정화에게 지나친 무리가 아닐는지?
2월 15일(월)
07시부터 다시 하역을 하다. 구름이 덮혔으나 어제 같이 궂은 날씨는 아니다. 제법 쌀쌀한 기운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가장(假藏 :임시로 저장함)했던 것이라 그런지 상자끼리 붙어서 애로가 많다. 새로운 문제점이다. 그러나 모두 급냉품이기 때문에 한결 수월하다. 저녁 늦게 작업을 중지하다. C/O와 함께 한일다실에서 차를 마시다. 아폴로 집에서 손인경 과장 한테 술 한 잔 대접받았다. 아직 호주머니가 비어 어쩔 수 없다. 이번 출항 전에 한잔 사서 갚아야지. 늦게 귀선하다. 선원들의 당직근무 태세가 약간 긴장되긴 했다. 그러나 아직 좀 더 정신적인 태도가 확립되어야 할 것 같다.
16일(화)
오전 중에 하역이 완전히 종료되었다. 2시경 회사 공장에 갔다가 늦게 귀선하다. 마지막 부스러기 고기와 大口(대구)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선장과 얘기가 있었다. 차기 본사 도입선에 대한 문제와 개인적인 문제 등등-. 역시 인간은 자기가 살아온 환경과 조건에 의해 Personality가 형성된다고 보면 강훈 선장 그 역시 Humanity한데 대해 서로 존경을 가진다. 내 자신이 자랄 때 받은 유교적인 사상과 가정적으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서모를 모시고 있는 등 너무나도 닮은 점이 있다. 그래서들 의(義)와 정(情)에 약하고 거절하지 못하는가 보다. 그러나 스스로 덕을 쌓고 선을 키워나간다면 비록 눈앞의 현실사회엔 당연한 손실이 빚어지지만 결코 그것이 헛되이 되질 않을 것이며 또 스스로 마음에 흡족하다면 보람 있는 삶의 가치를 찾을 수 도 있을 것이다. 차기 도입선에 관한 문제는 역시 실리보담 도의적인 면이 앞서는 듯하다. ‘55동방 이선 장이 원한다면 양보를-.’하는 식이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이 두 선장을 비교해 볼 때 각자가 지니고 처해있는 과거와 현재의 여건, 조건등을 고려해서라도-. 또 앞으로 북양트롤의 전망을 생각해서라도 단순히 넘겨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얘기했다. 물론 그 다음 신조선의 얘기도 있었지만 일년 후의 일을 예측하고 믿기란 특히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좀처럼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기에-. 또 비단 이 회사 하나뿐이 아님에 서랴. 여하튼 여러 가지로 좋은 대화가 되었음이 무척 만족스럽다. 또 많은 염려와 협조에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Mr. 윤과 오와 한잔 나누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나 급작스런 바람과 파도에 배를 비울 수 없어 약속을 이행치 못했다. 미안하다. 왠지 몸의 피로가 점차 심해지는 것 같다. 저녁이면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다. 잠이 부족해서 그런가? 영양주사라도 맞아야 할까보다.
2월 17일(수)
다시 4번째 출항 준비에 분주하다. 낮에 조원술 형이 찾아왔다. 영아와 정화도 왔단다. 우선 반가움이 앞선다. 한편 염려도 되지만 -. 형님의 편지와 현우형의 편지도 받았다. 조형의 건강이 완쾌했다니 안심도 되고 -.
형님의 궁금하던 소식이 다소 풀렸다. 새로 시작한 사업이 무척 바쁘긴 하고 장래가 낙관할 수 있는 상태라고 하지만 어딘가 생기가 있고 활발한 움직임이 있어 뵌다. 결코 지금의 노력이 헛되이 되지 않고 알찬 결실과 더불어 다듬어가는 계획에도 성사되길 빈다. 상철 군의 편지에서도 대강은 들었지만 모두가 힘을 모으고 협력을 아끼지 않으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젊음을 밑천으로 시작한다.’는 그이 말이 든든해 보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형태로서도 협력이나 참가를 아끼고 싶지 않다. ‘북양선도 지금이 가장 Owner들이나 선원들에게 유리하니 지루하고 고생이 되더라도 부지런히 뛰라’는 격려의 말도 있었다. 강 선장에게 주는 편지도 있어 전했다. 아마 조 형의 재승선을 부탁하는 내용인 것 같다.
영아와 마주했다. 무리하게 상경한 것을 무척 미안하게 여긴다. 정화, 많이 컸었다. 제법 아빠를 알아보는군. 애교가 여간 아니군. 염려했던 것만큼 심하지 않아 한결 안심이다.
〔여기에서 동방51호의 기록이 끊어졌다. 그 이유는 지금도 아리숭하다. 느닷없이 ‘동방55호’의 선장으로서 기록이 몇 장 보이길래 계속 남겨 두고 본다. 시간적으로 1년하고도 4개월의 공백이다. 그 동안 최상윤 선배가 떠나고 51호의 일등항해사로서 몇 항차를 더 했었고 그 당시 작은 참치선의 선장을 하던 FAO 선배들이 내 밑에서 3/O(3등항해사)를 한 기억도 있었고, 부산 광복동 술집들을 사그리 쓸고 다니면서 지랄을 한 것도 그 시절이었다.
그 후 선장으로 첫 발령받고 1000톤급 냉동운반선 73동방호를 일본 淸水(시미즈)에서 인수, 묵호항으로 끌고 왔었고 북양의 작업선들과 두어 차례 옮겨 실고 온 기억이 있다.
(주)동방원양에서는 신임과 능력을 인정받았었기에 누구보다도 일찍 승진할 수 있었다. 비록 작업선은 아니라 해도. 결국 당시의 사정으로 북양보다는 캐나다에서 청어를 실어다 묵호에서 알을 가공, 수출한다는 계획아래 준비 중, 그 놈의 해군사관학교 출신이라는 김상무(이름이 김종식이던가?)라는 작자가 같은 해군출신의 기관장과의 장난으로 한바탕 소란을 피운 후 73호를 떠나면서 깊은 좌절과 사회의 뒷면을 경험한 것이다.〕
동방 55호
1972년 6월 24일(토)
18:15시 예정보다 약간 늦게 묵호항을 떠나다. 55동방호를 맡도록 결정된 18일부터 꼭 6일이 된 날이다. 무척이나 바쁜 6일간이었다. 또한 이번일 자체가 너무 의외로 일찍 찾아온 것이다. 적어도 7월 중하순경으로 보고 있었는데-. 아무튼 내 주위에서 항상 염려해주고 협조를 아끼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5월 1일 73동방호를 떠나던 그때의 상처가 아직 채 아물지도 않았지만 이번의 결정은 어쩌면 완전한 타당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동료선원을 구하는데 가장 큰 애로가 있었다. 좀 더 폭넓은 인적자원을 개발해두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거기다 55호가 묵호로 상행한 것이 더욱 큰 애로를 가져오게 했다. 아무튼 출범은 시작됐다. 주어진 여건을 여하히 운영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느냐? 이것이 최대의 과제이다. 이번이 내 자신의 장래를 건 커다란 시험적 항차라고 봐도 좋다. 아니 꼭 그렇다. 아직도 차분히 머리가 정리돼지 않는다.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어장에 도착하는 날까지 모든 걸 정리하고 새로운 내 능력과 노력과 의지가 하나로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 날씨가 무척 좋다. 해상도 잔잔하다. 모두 나를 비롯한 모든 승무원들의 내일을 빌어주는 것일까. 육상에서의 겹친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온다. 내일을 위해 역시 오늘은 깊은 잠을 이뤄보자.
약 한달 반. 마음 편한 날이 아니었다. 아내의 쇠약해졌던 몸과 마음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너무나 많은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시켰다. 혀가 제대로 돌지 않아 말이 되지 않는다. 조급한 마음에 자꾸만 신경을 쓰니 춘해병원의 의사가 오히려 짜증을 낼 정도였다. 신경성이란 진단을 들었을 땐 마음이 찡했다. 어쩌면 내가 곁에 있은 것이 당신을 살린 격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차츰 회복의 길을 걷는 것을 보고 떠난 것이 한결 안심스럽다.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뱃속의 애기가 아무런 탈없이 출생해주기를 비는 마음 너무나 간절하다. 또 하나의, 나 하나의 잘못으로 온 가족이 함께 병원을 찾게 된 것이다. 두 번 다시 돌이키기 싫은 일이지만 무엇보다 크게 실감나게 얻은 하나의 교훈이다. 정화의 활짝 피고 또렷한 음성이 들린다. 4-5만원의 치료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이런 교훈을 쌌다면 너무 싸다고 치자. 한 달반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늘 하고 싶어 한 붓글씨도 조금 쓰다 말았지만 아쉬움이 많다. 좀 더 일찍 시작할걸. 앞으로도 기회 있을 때마다 연마해야겠다. 이번 출어를 계기로 해서 꽤 많은 낭비가 있었다. 그러나 결코 헛되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부지런히 모아둔 것이나마 있었기에 불의의 일이 생겨도 대처할 수 있는 방도가 생긴 것이다. 스스로 당신과 함께 감사드리고 싶은 일이다. 세상 살아가는 것이 천태만상이라지만 내 경우는 그래도 행복한 편에 있다고 자위를 해두자.
그간 동방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많았다. 아니 며칠만 더 늦었더라면 떠났을지도 모른다. Mr.강과 더불어 Las Palmas로 갔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물러날 때가 들어갈 때보다 더 어렵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내 자신이 동방을 떠날 때는 이른바 ‘명예제대’를 할 수 있는 경우이어야 한다. 비단 동방뿐아니고 어디던지 그렇다고 믿는다. ‘영예로운 퇴직’을 항상 염두에 두자.
6월 22일(목)
오후 5시 18분 기차로 일행 10명이 부산을 출발했다. 갑판부 정광웅 군은 포항에서 바로 가기로 하고-. 출발 직전 신현우 형님의 처사는 못내 기분이 언잖았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 함께 승선해서 날 도와주마 했는데 정작 출발을 앞두고 못 간다고 했었다. 역시 좋은 참고가 된다. 항상 대인관계에 있어서 너무나 원만하다고 할까, 결단성이 없이 유유부단한 내 성격에 일격을 가한 것이라고 보자.
23일(금)
아침 묵호도착. 인수인계 마치고 상자적재 하려 했으나 여의치 못하고 말았다. 선원 출항준비를 시킴과 동시에 총선원 집합 인사를 나누었다. 저녁엔 준사관 이상 모아서 ‘충북관’에서 간단한 자축연도 가졌다. 회사 소장이하 직원들과 점심이나 함께 같이 하지 못한 것이 서운하다만 내 바빴던 일정을 알아주리라.
6월 25일(일)
아침 7시. 찬란한 아침햇살이 좁은 창을 두드린다.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역시 쾌조의 상황속에서 북상중이다. 한결 피로가 풀린다. 예정보다 약간 빠른 Speed이다. 10Knot면 요즘 선속으로 보선 빠른편은 아니지만 우리 형편으로서는 이것만도 감사하다. 쾌적한 날씨, 잔잔한 바다, 마음속에서 울어 나오는 진실한 고마움을 느낀다. 개혁이란 것이 어떤 때 얼마만큼의 효력을 발생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 경우엔 그럴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이 배가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습관이나 내력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지금의 여건이 그렇질 못하다. 조타실에서부터 하나씩 내가 자신을 가질 수 있도록 파악하면서부터 서서히 기본 방침을 개선하고 능률적인 방향으로 이끌자. Eng. Part(기관부)는 기관장에게 맡겨 전반적인 상황을 조사 연구토록하고 내 자신도 차츰 하나씩 정리를 해 들어가야겠다.
식수문제가 크다. 너무나 적재량이 작다. 조수기 운영이 어려운 모양이다. 방법은 하나다. 절약뿐이다. 식수이외에는 별도 지시가 없는 한 사용을 금했다. 오전 중 어구 작업을 끝내다. 갑판장이 책임지고 하도록 했다. 모든 것을 이번 항차에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처리실 작업방식도 몇 가지 개선점이 있어야겠다. 두고 보자.
51호가 접근중이다. 53호도 오늘쯤 현장을 출발할 예정이란다. 아무튼 다른 생각은 없다. ‘사고 없이 어획이 계속되는 것’ 이것만을 기대한다. 해도가 없어 걱정이다. 너무한 생각이 든다. 믿었었는데-. 역시 사람을 겪고 봐야 한다. 그토록 악착같아야만 살아갈 것인가? 자꾸 잠이 온다. 멀미기운이 있나보다. 머리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사온 ‘개화백경’을 읽음으로 식혀본다. C/O. R/O와 함께 통신실에서 간단히 한잔하다. 일등항해사의 주선으로-. 방심은 금물이지만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는 맡겨주는 것이 차라리 심한 감시보다 유효할 것 같기도 할 것 같아 맡겨두고 만다.
7월 5일(수)
어장에 도착한지 5일째다. 그저께부터 어황이 풀린다. 제대로 고기가 올라온다. 오늘도 오전중으로 2차 투망을 마치고 멀찌기 띄웠다. 어체도 괜찮다. 도착하던 그 날과 이튿날은 많은 애로가 있었다. 첫째 알맞은 Chart(해도)가 없는 것이 큰 원인의 하나다. 정확한 Position(위치)이 잘 나오지 않았다. 또 전반적으로 어황이 나빴는데다 날씨도 별로 좋지 않았다. 짙은 안개는 더욱 많은 지장을 초래했다. 방황! 그것이었다고 할까. 배도 내 마음도 함께! 배 성능자체가 우와데(ウワテ: 맞바람 상태 향함)로 가기가 힘든 탓도 있었지만 자칫 내 스스로가 침착성을 잃었던 것 같았다. 과거 51호 강 선장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3일째부터는 아예 내 주관대로 하기로 하고 얕은 수심을 찾았다. 예상이 들어 맞았다. 어획 상황이 풀리기 시작했다. 남들의 얘기는 참고는 할망정 맹종할 필요는 없다는 것은 내가 그 전에 겪고 얻은 경험에서 나온 것이 바로 적중한 것이다. 밥맛이 차츰 되돌아 오는 듯하지만 잠은 아직 숙면을 못한다. 아마 배의 책임자로서 바다 위에 뜬 이상 숙면은 어려운 것이 아닌가 싶다.
출렁이는 선체, 짙은 안개 속에 쌓인 암흑 속에서 수억원의 재산과 그보다 몇십배 값진 수십명의 생명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잠시도 방심할 수 없음이 항상 정신적인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하기 때문인 것이다.
SSB를 통해 각선 선장들의 얘기 속에서 한가닥 허전함을 느낀다. 말이란 너무 적어도 탈이지만 많아도 탈이다. ‘말로서 말 많으니 말 마를까 하노라’ 명언이다. 필요한 요건만 적절히 마치고 마는 교신, 그것도 자기의 독점물인양-. 어처구니가 없다. 소위 그것이 곧 그들 자신의 인격과 품위를 재는 Barometer인 것이다. 수천리 떨어진, 그나마 적대국인 소련의 영해 가까운 위험을 안고 있는 이곳에서 그 귀중한 시간과 노력을 피차간에 보다 더 보람 있게 쓸 줄 아는 도량이 필요하지 않을까?
각선에서 내 첫 출항을 축하해주는 전보들이 온다. 51호를 비롯하여 77 동명호 강유향, 화랑호 정정덕, 81동원호 이주목 형님, 103오대양 남차출 선장 등등. 고마운 일이다. 비록 처음 시작한 것이지만 결코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 결과를 낳도록 보다 신중하고 고된 노력을 각오하자.
4일부터는 조용한 바다가 된다. 안개만 없다면 어느 정도 낭만이란걸 생각할 수도 있으련만 -. 그러나 51호시절 거대한 고려원양의 모선과 안개속의 충돌은 죽음 일보직전의 악몽을 되살린다. 냉동능력 때문에 더 이상 조업하지 못하고 그날 처리할 수 있는 양만큼 잡은 후에는 멀찌감치 표류한 채 다음날을 구상한다. 틈틈이 소주로 시름을 달래고 지난날을 구김 없이 털어놓고 만연지기인양 시간가는 줄 모르는 때도 있으니 말이다.
4일밤 10시 서울 제일방송에서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뉴스를 듣다. 무엇인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이는 듯한 이상한 감흥이 돋기도 한다. 단일민족으로서 분단의 비극을 염려해보기도 하고, 나아가 통일된 조국의 내일과 우리가 살아야 항 새로운 내일의 꿈도 아련히 피워본다. 그러기에 세상은 참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수천리 이곳에서 고국 방송국 아나운스의 생생한 음성을 통해 이런 것도 들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바다에 떠 있는 사람의 공통으로 갖는 핸디캡, 사회의 실정이 둔하고 자칫하면 낙오되기 쉽다는 것. 부득이 한 일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닦고 항상 책과 마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은 될거다.
숙면을 못하고 그저 짬나는 데로 잠시잠시 눈을 붙이는 터라 온갖 잡 꿈이 많다. 비몽사몽간이라고 할까? 먼 옛날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띄엄띄엄 순간적인 일들일 잠을 설칠만큼 집요하게 나타날 때가 있다. 선장이란 직업이 컴퓨터 조작자 다음으로 신경을 많이 쓰는 직업이란 말이 거짓이 아닌 듯 하다.
5일 계속 좋은 어황이다. 처리 능력의 부족이 항상 느껴진다. 무엇보다 기관부들에 대한 신경이 많이 쓰인다. 그저께 아침에도 Starting(시동)이 안 된다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역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각 Officer 그리고 기관사들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내게는 재산이 없는 거와 같은 것이다. 냉동기 자체가 결함이 있어서 인지 작동상의 Miss나 능력부적인지 결과가 일정하지 않아 늘 불안하다. 이곳에서의 어로작업은 각 Part 및 모든 계기. 기계가 80%의 제기능을 발휘해주지 않고 어느 한 개라도 이상이 생기면 조업을 포기해야 할만큼 상호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일본인들이 쓰다 남은 중고선을 도입하여 대강 손을 본 배에서는 더욱 그렇다.
Main Eng. 발전기 2대. 냉동기 2대. 조타실의 Radar, 조타장치, Loran, 통신실의 각 기기들. 너무 신경이 예민해질 것 같다. 무거운 중압감을 느낀다. ‘고장 노이로제’라고 병명을 붙여본다. 나 혼자 만의 생각은 아닐까?
역시 안개는 걷히지 않는다. 연 3일째 계속되는 주어장은 북위 50도 07분. 동경 156도 16분 그리고 북위 50도 14분, 동경 156도23분 사이이다. 수심은 90미터 전후. 소련령 Paramusiro섬 동남쪽 17-20마일 지점이다. 3일부터 갑자기 늘어 10여척이 한곳에서 북적거린다. 모두가 우리 국적선으로 명태를 잡기위한 것이다. 각회사에서 타전되어오는 바로는 현재 한국에는 장마철이고 명태가 공급 과잉으로 큰 난관에 봉착. 가급적 잡어를 잡어란다. 그러나 여기 사정은 그렇지 않다. 어기상 이면수나 잡어는 어획돼지 않는 시기이다. 현장에 고심분투하는 선장들이 상품의 질적 향상에 관심을 두고 애쓰는 것까지는 좋으나 판매에까지 신경을 쓰여서야 어디 견딜 수 있겠나. 이것도 하나의 한국적 현상이라 하겠다.
6일은 비교적 늦게 S/B(시작)했다. 어제 저녁 올라온 87도원호 이주목 형님(수산대 형님과 동기생)께 인사를 드렸다. 반겨하시며 타선에서도 내게 대한 협조를 부탁하신다. 아직 얼굴을 익히지는 못했지만 몇 마디 얘기 중에서 호감이 간다. 무엇보다 SSB를 통한 대화의 질에서부터 그렇다. 부산에서 뵐 기회 있을 테지. 정중히 인살 드려야지. 예상보다 더 잡혔다. 너무 잡아도 곤난하다. 여름철이라 어체 선도에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오후부터 날이 다시 거칠어진다. 저녁엔 심한 바람과 비가 내린다. 오후 4시부터 표류하다. 몹시 흔들린다.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바람은 불어도 안개가 걷히어 한결 마음도 걷힌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매시간 1마일 정도 육지쪽으로 밀린다. 다시 바깥쪽으로 몰아낸 후 잠을 청해야겠다.
황망히 집 떠난 지도 14일 가까이 된다. 잘들 있겠지. 당신의 몸은 성한지. 정화의 모습이 아롱거린다. 40여일간 무척 가까웠는데-. 그 목소리는 귓전에서 듣는다. 역시 즐거움에 앞서 서글픔이 든다. 똑 같이 누워 있건만 한쪽은 먼 바다 위, 그나마 흔들리는 배 위에서, 異床同夢(이상동몽)이다. 내일을 위한 오늘의 토대라 스스로 자위하지만 이렇게 가끔 마음이 쓰일 때 가장 괴로운 시간이다. 앞으로 며칠 더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10일경에는 현장을 출발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항차가 무사히 마쳐지기를 진심으로 빈다.
귀항 중 식수부족으로 두어 끼 결식이 있었다. 위험천만의 일이었다. 도중 77동명호와 102 행복화와 SSB교신이 있었다.
입항 17일 오전 10시! 정박 6일간 무척 바쁜날들이었다. 그러나 제품의 질적 우수성이 인정되어 많은 칭찬들이 있었다. 애씀의 결과이리라.
첫 번째 항차의 무사히 끝맺음이 너무 기쁘다.
7월22일(토)
두 번째 항차를 출발한다. 처음부터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운반선이 아니였으면 그렇게 쫒기다 싶이 해가면서 나오지 않았을 것인데-.
출항 직전 기관장이하 기관부의 선원들이 모두 바뀜에 따른 제반 문제와 일항사와 이항사의 선내 쟁투문제는 심각한 정도를 벗어난 것이다. 당장 하선감이다. 그런대도 그냥 출항치 않은 수 없었다. 모험중의 모험이다.
이번 항차는 북양에서 바로 동방73호 운반선에 이적을 해주고 다시 만선을 해서 내려오도록 되어 있었다. 순조롭게 어획했었다. 다만 운반선 이적 중 3/O 박 군의 해중 추락사고는 또 한번 기적을 다져다 주었다. 천운(天運)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 밤중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계속되는 양상 이적 작업중 일렁이는 파도위에서도 양 선박 사이의 해중에 빠졌으면서도 살아 올라왔다는 자체가 기적이다.
꼭 그를 또 한 번 시체로 내가 건져 올리는 꼴을 당하리라 짐작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행운이고 나의 행운이었다. 대부분 처음 승선한 탓이라 손발이 안 맞은 것도 당연하지만 숙련도가 너무 느렸다.
〔여기서 다시 기록이 없다. 분명히 어디 있을 법한데 없다. 55 동방호에서 북양 명태잡이를 두 항차 마치고 세 항차째 박종민 기관장의 Main Eng. Head cover 균열의 발견으로 인한 박 기관장과 최부장 영감과 나 3인의 의견차이로 갑자기 하선. 다시 한 번 실망과 좌절을 겪다. 여기서 받은 충격은 끝내 수산계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면 우리가 인수하기 전부터 주기 Head Cover에서 누수 현상이 있었음은 본사 공무부장인 최영감도 알고 있었으나 그 원인을 찾지 못한 채 나한테 넘어 온 것이다. 박종민 기관장은 동방51호 시절 1/E로 있었고 나보다 연장이지만 각별한 친분도 있었기에 기관장으로 함께 했었다.
누수의 원인을 찾기 위해 고전 분투한 결과 주기 Head Cover에 균열이 생겨 있음을 발견. 이 부분의 수리를 의뢰했으나 최부장은 그냥 한 항차만 더 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로 인한 책임은 본선에 없음을 인정해달라고 한 본선측 요청을 거절한 데서 시작됐다. 원인을 모른다면 모르되 알고 난 이상 이 상태로는 출항치 못하겠다는 C/E와 나의 주장은 한결 같았다. 알고 있으면서도 출항하여 발생한 사고에 대한 책임마져 우리에게 있다고 한다면 그 어느 미친놈이 갈거냐? 못하겠다고 버틴 것이 결국 하선으로까지 연결된 것이다. 미련도 가책도 없다. 당연히 했어야 할 요구였다. 그렇게 해서 수산계를 뜬 것이다. 그해 여름 3개월 가량의 실직상태를 겪은 후 다시 시작한 것이 商船(상선)인 것이었다.
[동방51호 시절, 두 번째 항차인가 기억이 아리송하지만, 51호가 항해 중 조난으로 SOS를 날린 적이 있었는데, 이 신호를 한국해경보다 일본 해상보안청이 먼저 캣취하고 연락, 부산에서 TV로 방송되므로 온 가족들이 난리를 겪은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은 본선이 일본 북해도 남쪽을 지나면서 조업장으로 항해 중, 친구인 정진천 선장으로부터 연락이 있었다. 지금 어디냐고? 항해지점을 얘기 해주는데, 한국에서의 일들을 들려준다.
원래 선박에서는 조난을 대비해 항상 ‘비상조난신호 발신기’를 필수품으로 싣고 다니게 되어 있다. 이것은 선박이 침몰할 경우에는 자동적으로 물위에 떠오르면서 조난신호를 발신하게 되어 있다.
마침 우리 배는 일본에서 인수받았기 때문에 그 신호가 일본선박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을 한국 정식 이름으로 변경해서 지참하고 나와야 하는데, 적당히 해서 수리업자에게 맡겨두고 그냥 나와 버린 것이었다.
본선(本船)도 본사(本社)도 수리업자 모두 불법을 저지른 것이다. 한데 수리업자가 수리를 마치고 테스트 한다고 바보스럽게 몇 초간 발신해버린 것이다. 이것을 그대로 일본해상보안청에서 수신하고 한국해양경찰에 연락한 것이다. 한국해경은 확인도 않고 사실로 인정, 발표를 해 버린 것이다.
항해 중 본사와는 매일 정오위치와 상태를 전보로 알리고 있음으로 본선도 본사도 정말 무심했었는데, 용코로 걸린 셈이다. 아마도 본사에서는 무마하느라 땀께나 흘렸을 것이지만, 바로 그것이 한국사회의 후진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TV에 나온 유경험자란 넘들이 ‘이 계절에 해수 온도가 낮아 침몰하면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바람에 가족들의 놀라움은 더욱 컷으리라.
그 항차를 마치고 귀국하자 영아는 한동안 그냥 멍하니 처다보기만 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으리라. 본선에서는 캄캄 모르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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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장이란 직업이 컴퓨터 조작자 다음으로 신경을 많이 쓰는 직업이란 말이 거짓이 아닌 듯 하다.
집이나 배나 ..
장소만 다를 뿐 신경쓰이기는 매일반 일거요.
[동방51호 시절, 두 번째 항차인가 기억이 아리송하지만, 51호가 항해 중 조난으로 SOS를 날린 적이 있었는데, 이 신호를 한국해경보다 일본 해상보안청이 먼저 캣취하고 연락, 부산에서 TV로 방송되므로 온 가족들이 난리를 겪은 적이 있었다.
이때 용당근무중 경산서 서모님이 오셨어
" 에미야, 어짜노?" 내 얼굴과 입만 쳐다보고"........." 할말이 없어..."
학교에 가서도 말없이 수업만 했다. 확인 안된싱황이라 속을 잃았다/ 얼마인지 몰라도 오보였다고 발표있어
"감사합니다. 소리만으로 확인했다.감사한 날이였다. 그때 아마 머리가 하얗게 희여졌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침착하기를 잘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딸을 안고 밤에 끙끙앓았다.
이해함다. 머리는 희여졌을지 몰라도 속은 더 단단해졌을 거라 생각되오. 생사를 갈림하는 현장에서야 그런 걸 느낄 여유도 없오. 그냥 순간이 좌우해 버리니까. 지금 이 순간이 기적임다. 감사
이렇게 만나고 함께 하는데 무엇이 불만일까마는 사람인지라.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못해서 ...
틱틱하기도하고 속으로는 괜챦다 하면서도 속상하면 골도 내고 그러고 살지요, 내가 또라이가 아닌 이상 너무 기대를 높이지말고 그러려니하고 지나가고 그냥 이대로 건강하게 살아봅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