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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과 2절은 하나님의 창조의 배경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3절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3절부터 어떤 사건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죠?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빛이 있으라고! 그러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빛이 있었다. 3절의 흐름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4절에 보니까 그 빛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그 빛을 보셨다. 그 다음 하나님이 보시니까 어떠했나요? 좋았더라! 그리고 그 빛을 어떻게 하십니까? 나누셨습니다. 어떻게요? 빛과 어두움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5절에 어떻게 하십니까? 빛과 어두움으로 나누었던 것을 하나님이 부르시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누었던 것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입니다.
원문을 보시면서 3절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동사는 바요메르입니다. 말하다는 동사입니다. 말씀하시니까 그 다음 동사가 하야= 있다, 존재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말씀하니까 존재로 나타났죠? 말씀이 존재로 나타난 게 무엇입니까? 빛입니다. 그럼 이 빛은 존재하게 되었죠? 그리고 하나님이 이 빛을 보시죠? 보시니까 어때요? 좋았더라!! 그러면 여기에서 좋았더라는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것입니까? 말씀이 존재가 되고 그것을 볼 때 좋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으로 끝내지 않고 어떻게 합니까? 나누십니다. 어떻게 나누나요? 빛과 어두움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나눈 다음에 어떻게 하나요?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합니다. 칭한다고 하는 것은 이름을 짓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됩니다. 그러니까 첫째 날입니다. 그런데 첫째라고 번역한 이 단어는 오역입니다. 잘못된 번역입니다. ( 잠시 후에 살펴보겠습니다 )
그러면 3절부터 5절까지가 첫째 날인데 이 첫째 날을 동사를 기준으로 해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동사를 중심으로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3절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처음 단어가 무엇인가요? 아마르 = 말씀하셨다.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빛이 있으라고! 그러면 빛이 있으라는 이 말씀은 어디를 향해 하는 말씀인가요? 1장 2절에 있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는 그 상태를 향하여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빛은 우리의 눈에 보여지는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말씀하고 있는 빛입니다. 우리 안에 있게 된 빛입니다. 그러면 성경에는 빛을 어떤 의미로 말하고 있는지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잠 6:2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전 2:13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
시 37: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시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빛은 말씀, 지혜, 의, 구원, 생명!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 모든 단어의 의미를 하나의 말씀 구절로 결론 지어서 말씀을 드린다면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주었나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영원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주셨는데 그 일의 시작과 끝을 알수 있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추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장래 일을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이 전도서입니다. 장래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의 일생은 무엇으로 끝나나요? 허무한 것으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 앞으로 되어질 예언 그런거 아닙니다 ) 그러니까 3절에 빛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거기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위한 모든 것들이 만들어져 나온 것입니다. 도덕도 나오고, 윤리도 나오고, 법도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3절에 등장하는 이 빛은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와는 상관없는 빛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이라는 것을 주기 위한 하나님이 마음의 품고있는 시작, 의지를 의미합니다.
시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여호와가 나의 빛이고, 구원이고, 생명입니다. 맞죠? 그렇다고 한다면 창세기 1장 2절에 혼돈과 공허뿐인 인생에게 생명의 빛으로 자신을 우리 안에 계시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빛이 있으라 이 말입니다. 그럼 그 빛으로 인해 사람들은 영원을 사모하게 되는 것이구요. 그래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있는 “영”입니다. 그래서 영은 늘 보이지 않는 세계의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장 3절에 말씀이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풀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죠? 이 상태가 혼돈과 공허, 이것이 흑암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6절에 보시면
고후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이 말씀이 어디에 있는 말씀인가요? 창세기 1장 3절에서 하신 말씀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빛이 있으라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말씀의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지금 우리 마음에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으로요? 말씀으로!! 그래서 말씀이 빛이요. 구원이 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시 43: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는 빛이 나타났는데 그 빛이 주의 진리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똑같은 말입니다. 말을 바꾸어서 이야기하는 것뿐입니다. 왜 단어를 바꾸죠? 설명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주의 빛이 진리로 바뀌고 그 진리는 무엇을 하나요? 나를 인도하는 겁니다. 어디로 인도하나요? 주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합니다. 주의 거룩한 산에는 뭐가 있나요? 예루살렘 성전! 그 성전 안에는 누가 있나요?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가 빛이고, 그 빛이 진리로 우리에게 나타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나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어두움이 있나요? 없습니다. 빛만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인가요? 성막 안에 성소입니다. 그곳을 풀어서 말해놓은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금은보화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시록에서 말하는 천국은 얼마큼 화려하고 웅장하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냐? 계시지 않느냐?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이 어디에 거하시는줄을 기록해 놓은 성경은 어디에 있나요? 요한복음 17장입니다. 어디에 계시나요? 너가 내 안에, 내가 너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하나됨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과 동행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빛이고 생명이고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세상에서 물질 축복받고, 몸 건강하고, 이름 날리기 위해 하나님께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알 수 없는 빛이고 생명이신 그 분과 하나될려고 하는 사람만 오라는 것입니다. 부자는 축복받은 것이고 가난하면 축복 못 받은건가요? 아니예요! 아무 상관없습니다. 명심하십시요! 여호와의 빛만이, 진리만이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빛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사람의 발걸음은 길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발과 길은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인생여정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 여정에서 빛이 없고, 등이 없다고 한다면 그 발은 실족할 수 밖에 없고, 실족한다는 것은 그 길에서 빗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그 사람은 인생에서 방황하며 살수밖에 없습니다. 어디로 못 가나요? 주님이 계시는 성전으로 가지 못합니다. 왜요? 등과 빛이 없으므로.. 지금의 많은 성도들이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목적으로 삼고 열심히 걸어가지만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을 인도하는 빛이 참 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잠시 켜져있다가 꺼져버리는 율법의 신앙에 매여서, 병을 낫기 위해 예수 믿고, 부자되기 위해 예수 믿고, 오중복음-삼박자축복, 별 이상한 것을 만들어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실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빛이 있으라 이 말씀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일하심의 시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나타난 빛을 하나님이 보시니까 좋은 것입니다. 왜 좋은 것인가요? 보기 좋아서요? 아닙니다. 말씀이 존재가 되고, 존재가 나타나니까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순서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가 존재가 될려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나요? 말씀으로 되어진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되어진 존재를 보실 때 하나님은 기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등장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가 된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날 때 하늘에 영광, 땅에는 기뻐함을 입은 사람들의 평화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왜요? 그 말씀대로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탄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육신으로 이 땅에 살아갈 때 다른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율법에 기록된 그 말씀을 이루며 살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식이라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입니다. 수 천 만원의 헌금을 한다고 해서, 수 십 시간의 기도를 한다고 해서, 수천억의 교회를 지은다고, 수 천명의 많은 성도들이 모인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장로교단의 교리학습서 소요리문답 첫 번째 질문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즐거워함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려면 뭘 해야 하나요?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더라가 되어야죠! 그래야만 하나님이 보시고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 보시면 그것을 어떻게 하시나요? 바이쁘딜.. 나누십니다. 왜 나눌까요? 이 단어의 뜻은 “나누다, 선택하다, 구별하다, 절단해내다”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눈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은 선택해서 취하는 것이고 어떤 것은 잘라서 버리게 되는 겁니다. 취사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나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나눈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빛이 있어야만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빛이 있을 때 나눌 수 있습니다. 빛이 없을 때는 나눌수도 없을뿐더러 나눠봤자 똑같은 것입니다. 어떤 것이 참인지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성분들이 좋아하는 진짜 다이아를 어떻게 확인하나요? 빛을 비추어서 확인합니다.
그런데 이 빛이 참 빛이 있고 참 빛이 아닌 것이 있습니다. 참 빛이 아닌 것으로 나타난게 누구인가요?
요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예수그리스도를 참 빛이라고 말하고, 세례요한은 참 빛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세례요한은 켜서 비추는 등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참 빛과 등불의 차이를 비교해 볼까요? 등불도 빛이죠? 그런데 이 등불은 누군가가 켜주어야 합니다. 저절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수동적입니다. 그리고 어느 때까지인가요? 그 안에 심지나, 기름이 다 탈 때까지만 켜져 있는 빛입니다. 그러나 참 빛이라고 하는 빛은 영원한 빛이기 때문에 누가 켜주지 않아도 되고요, 꺼지지도 않는 빛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추구하는 빛은 잠시 잠깐 켜져있다가 꺼져버리는 등불과 같은 것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영원한 빛인 참 빛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 2:20절에 어두움에 속한 빛이 나옵니다.
롬 2: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2: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2: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유대인인 무엇인가요?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종파를 말하나요? 아닙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을 있는 그대로 섬기는 사람들을 통틀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이 없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처럼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에 가르침을 받고 있는 자들은 어두운 빛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진리와 썪여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뭐가 생기나요? 그림자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등불에는 반드시 뭐가 생기나요? 그림자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쪽의 밝은 것만 계속 이야기하다 보면 좋은것 같지만 반대쪽은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덕, 윤리의 기준에서 선악은 항상 빛과 어두움을 같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도덕 윤리는 참 빛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덕, 윤리는 사람을 밝게는 하지만 하나님 쪽으로는 어두워지게 하는 것입니다. 외면을 꾸미는데 있어서는 최고인데 내면을 꾸미는데 있어서는, 영원에 이르게 하는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의 가르침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사탄이 어두운 빛으로 나타난다고 말해주는 구절이 있죠?
고후 11:13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1: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1: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그리스도의 거짓사도로 가장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쉽다는 말이죠? 뭐가요?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둔갑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눔과 분리가 없으면 빛과 어둠으로 나뉘지 않으면 어떤것이 참 빛인지, 어떤 것이 등불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뉘시는 것입니다. 뭣 때문에요? 빛이 있기 때문에. 참 빛이 있기 때문에 이제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참빛으로 선택될 자와 등불로 선택될 자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 단어로 말해주는 것이 바이브딜 = 나누나 이 단어입니다. 이것은 빛에 의해 나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참 빛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등불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눈 다음에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나요? 부릅니다. 칭하십니다. 이름을 정해주십니다. 부르다라는 이 단어를 살펴보면 “ 이름을 부르다. 초대하다, 이름을 짓다의 뜻입니다. 빛을 날이라 부르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시고. 이름은 존재에게만 주어집니다. 없는 것에는 이름을 주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것만 이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인들에게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이고 생명이고 축복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불려지지 않는 것은 어두움에 묻혀버린 것이고 죽은 것입니다. 이름은 존재이며, 살아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새로운 존재를 의미합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삭을 이삭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사래를 사라로 그래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을때는 이름이 바뀌어 등장하는것입니다.
행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그러니까 어둠에서 빛으로 온 것은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고, 기업무를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빛에 의해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가 나뉘게 되었습니다.
요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빛의 아들이 되려면 빛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어둠을 믿나요? 아니에요! 물어보세요. 당신은 빛을 믿을래요? 어두움을 믿을래요 라고 물으면 다 빛을 믿는다고 하지 어두움을 믿는다고 하나요? 그렇치 않나요? 그러면 무슨 말인가요? 빛을 빛으로 믿지 못하고, 빛을 어두움으을 믿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빛이라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우리의 것으로 준 것이 어두움인데. 그 어두움이 누군가에게는 빛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어두움 그 자체로 믿어버리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빛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요?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에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전제해야 합니다. 13절입니다.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첫째가 뭐에요? 혈통이나 육정을 말하는 사람의 뜻으로 나면 안되고, 둘째는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접은 누가 하는거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영접하는거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접합니까? 뭔 능력이 있어서... 그래서 혈통과 육정은 첫 사람 아담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께로 난 것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을 하나님께로 난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상태를 데살로니가전서 5장 5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살전 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우리가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면 우리에게 어둠이 있을 수 있나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두움이란 무엇인가요? 어두움이란 혈통과 육적으로 난 사람의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빛의 아들들은 진리로 행하는 것이고, 혈통과 육적으로 난 사람의 뜻, 율법의 속성이 끊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에베소서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5: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빛의 열매는 무엇이죠? 빛 안에서 행한 결과죠? 첫 번째는 착함. 아가도스 = 절대 선입니다. 선은 뭐가 선인가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존재가 되는 것이 선이죠? 이게 빛의 열매입니다. 두 번째는 의로움 의= 의는 무엇인가요? 사 32:17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하나님과 하나된 그 상태를 가리켜서 의롭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세 번째 알레떼이아 = 진리입니다. 뭐가 진리죠? [요17:17]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면 그것을 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나요? 성령의 9가지 열매로 말하고 있죠? ( 또 볼까요? ) 말씀이 진리가 되면 그 상태를 가리켜 영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반대로 어두움에 속해 있는 자들을 볼까요?
사 5:20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5:21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5:22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유력한 자들은 화 있을진저 5:23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지금 이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요? 그 본질을 잊어버린 상태입니다. 모든 것을 거꾸로 알고 있는 상태! 이것은 선과 악이 완전히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안에 참 빛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이아는 빛으로 구별하는 것이지 어두움 안에서 구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자기에게 좋은 것은 선이 됩니다. 나만 좋으면 됩니다. 그것을 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때가 언제인가요? 어렸을 때 입니다. 어렸을 때는 자기만 좋으면 됩니다. 소리지르고, 자기마음대로해도. 이것도 선은 선입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었을 때 어렸을 때 선이라고 생각했던 선은 선인가요? 아니죠? 아무짝이 쓸데가 없습니다. 그러면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의 그 선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그 상태로 머물러있다면 그것이 뭐가 되나요? 악이 되는 것입니다. 낼 모래 시집갈 여자가 어머니에게 어렸을 때는 좋다고 하더니 이제는 왜 나쁘다고 말하는 거랑 같은 것입니다.
23절을 보시면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뇌물이라는 단어가 “돈으로 얻을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재물을 연관지어서 의를 말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누가 이렇게 하나요? 요즘의 많은 교회들이 재물을 중심으로 의를 장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장사를 잘하는 교회도 있지만 우리교회는 장사가 안됩니다. (오늘 사무총회하느라고 1년 결산했는데 진짜 장사 못했더라구요! 제가 장사할 목적이였으면 원문갖다 대면서 헌금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
성경에서 정욕을 얻기 위해서 구하는 모든 것들은 악하고 추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나요? 정욕이 이루어지고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면 복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쓴 것을 단것으로, 단것을 쓴 것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기도 안해서, 저한테 교회성도 물어봐서 15명 정도 출석합니다. 그러니까 뭐래는 줄 아세요? 기도 많이 해야겠다고 하더라구요. 부흥할려면!! 속으로 지랄하고 있네!! 까딱하면 기도가 부족하다는 둥. 뭐가 부족하다는 둥, 아주.. 왜 그렇게 말하나요? 그들은 어둠에 속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직 참 빛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안다고 말하고, 본다고 말하고,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시고 난 다음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 아닙니다. 한날입니다.(표를 참고) 이 단어는 통일이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야죠! 아니 우리는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면 하루가 되는데 왜 성경은 거꾸로일까요? 그래서 유대인들의 하루의 시작은 저녁부터 시작된다고 하더라구요.. 이 말을 있는 그대로 사용해서... 그 말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날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날의 개념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움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빛의 가치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반대입니다. 사람의 아침은 기분 좋게 일어나서. 행복한 하루 되세요. 좋은 아침. 굿모닝 그러는데 저녁에는 파김치가 되어서 들어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녁으로 시작해서 아침의 밝은 소망으로 끝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인류의 역사가 대단한 것 같고 휘황찬란해 보이지만 인간의 역사는 결국 아침으로 시작해서 어두움으로 끝나버리는 역사입니다.
렘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미래의 소망은 무엇이죠? 아침을 이야기합니다. 아침은 빛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고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저녁으로 시작해서 아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날, 한날의 역사입니다.
정리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존재가 되었고 그것을 보시니까 좋았고, 그것을 구별해서 이름을 정하시고, 그리고 어둠이 지나가고 아침이 되니까 한날이 완성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창세기 첫째 날에 숨겨진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입니다. 여러분들도 부디 저녁이 지나가고 아침이 되는 한날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