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반도 일주여행기(2)
마케도니아
마케토니아공화국 (Republic of Macedonia)
면적 : 25,333평방킬로 인구 : 206만 수도 : 스코페 종족 : 마케도니아인(64%),알바니아인(25%),터키인(4%) 공용어 : 마케도니아어 종교 : 마케도니아정교 (64.7%), 이슬람교 (33.3%) 통화 : 마케도니아 데나르 국민소득 : 4040불/인
휴양도시 오호리드의 산책 마케도니아는 발칸반도 중부에 있는 나라이다. 구(舊)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6개 공화국 가운데 하나였으나, 1989년 동유럽을 휩쓴 공산정권 붕괴의 소용돌이를 틈타 1991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리스와 국명 문제로 다툼이 계속되자 1995년부터 외교적으로는 마케도니아 구 유고슬라비아 공화국(Former Yugoslav Republic of Macedonia, 약칭 FYROM)으로 불리기도 한다. 북쪽으로 세르비아, 동쪽으로 불가리아, 남쪽으로 그리스, 서쪽으로는 알바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1998년 세르비아에 코소보 사태가 일어났을 때 알바니아계 난민을 대거 받아들였다. 우리가 찾는 도시 오호리드는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의 국경지대 남서부에 위치한 인구 55,000명의 소도시이다. 오흐리드호(湖)의 북동쪽 연안에 있다.
9세기 후반에 불가리아인에게 정복되어 슬라브인에 대한 선교(宣敎)의 거점이 되었다. 중기 이후의 비잔틴 미술이 많이 남아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마케도니아 주요 휴양지의 하나이며, 고기잡이와 자동차부품·진주가공 등의 제조업이 이루어진다. 10~11세기에 축성한 요새의 잔해가 남아 있으며, 성소피아 대성당(11세기)·성클레멘스 성당(1295) 등 많은 성당이 있으나, 오스만 제국 통치시대(1398~1912)에 대부분 이슬람교사원으로 개조되었다. 아름다운 오호리드 호수의 감상은 뒤로 미루고 성소피아,크레멘토,성요한 까르네오 성당을 찾아 언덕위로 걸어 오른다. 장미와 예쁜 꽃장식으로 단장된 주택들이 관광객들의 환호를 받는다.
정감있는 골목을 산책하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마케도니아 커피가 유명하다고 제법 커피매니아 행세를 하는 일행이 은근히 뽐낸다. 여인들의 수다는 여기 와서도 여전하다.작은 언덕을 오르며 유명한 네개의 성당을 볼 수 있었다. 워낙 믿음이 강하여 오스만터키 시절에도 동방정교가 유지되고 6~8세기의 로마 건축양식이 남아 있다. 먼저 나온 성당은 11세기에 건축한 성소피아 성당이었다. 그리고 13세기의 세인트메리성당, 지금 복원이 한창인 클리멘트교회를 거쳐 마지막 찾은 곳은 요한 까네오 성당이다. 영화 "Before the rain"의 촬영장소로 전세계적으로 이름난 곳이다. 교회에서 내려다 보이는 오호리드 호수의 풍경은 그림같다.
쉽게 그림같다고 했지만 글로도,말로도 표현이 어렵다. 과연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어떻게 잘 표현해야 실제에 가까울까? 사진으로는 제대로 표현이 안된다. 필력 부족을 항상 느끼게 된다. 까네오 성당을 구경하고 원래는 오던길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는데 성당 아래로 바로내려가 배를 타고 가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인당 불과 1유러씩만 지불하면-- 과연 훌륭한 선택이었다. 배를 타고 보는 언덕위의 성당,호수에 떠있는 배들, 호수변의 풍경들이 너무 아름답다. 배에서 내려 오호리드 호수변을 산책했다 오호리드 호수는 전 유럽에서도 물 깊이가 가장 깊은 곳으로 이름나 있다. 스위스의 호수들이 100m인데 비해 250m나 된다고 한다.
20만년 전에 생성된호수로 여름은 물론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권삼윤씨의 얘기가 또 나왔다.많은 여행지 중에서 어디가 가장 좋던가요? 라고 물으니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더니 어디가 가장 쉬기 좋은 곳이라면 바로 오호리드 입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호수를 산책하며 까네오 성당에 들러 1주일간 이 곳에서 쉰다면 분명 몸과 마음이 정화되리라-- 패키지 여행은 늘 쫒기듯 바쁘다. 다음 행선지로 가야 한다.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로-융단같은 마케도니아의 숲,곳곳에 보이는 벌꿀통,시원한 계곡물 버스를 타고 가며 문득 한국의 강원도 첩첩산중을 여행하는 기분이다. 음악CD를 들으며-- 인류사상 가장 크게 세계를 지배한 나라는 몽골제국 그리고 로마제국 그 다음으로 마케도니아를 꼽을 수 있다.
인솔자의 설명이 계속된다. 2000년을 맞으며 타임지가 뽑은 가장 위대한 인물로 1위가 징기스칸, 2위가 알렉산더 대왕이었다. 마틴루터는 5위. 알렉산더 대왕의 일대기가 화려하게 소개된다. 전쟁 시에는 언제나 선봉에 서며 알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플라톤을 제자로 둔 철학자이기도 하여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위대한 인물이었다. 당시 무적의 페르시아 다리우스2세를 치고 동방진출을 꿈꾸며 '나의 목표는 인도'라고 갈파한 알렉산더대왕. 그는 죽을 때 "나의 오른 팔을 관 밖으로 내놓고 장례를 치루라"고 유언을 했다고 한다. 빈 손으로 떠난다는 말이리라. 마케도니아라는 대 강국을 이룩했던 알렉산더대왕- 근세에 와서 '마케도니아'라는 국가명을 두고 그리스가 정면으로 반대함으로 대분쟁이 일어났었다. 엄밀히 말하면 알렉산더 대왕시와는 민족이 다르다.
당시는 그리스계의 라틴족인데 반해 지금의 마케도니아 민족은 남슬라브계이다. 2400년전의 이름을 사이에 두고 사용,불가의 쟁점이 된 것이다. 1995년부터 외교적으로는 마케도니아 구 유고슬라비아 공화국(Former Yugoslav Republic of Macedonia, 약칭 FYROM)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후 8시가 가까운 시간에 수도 스코페의 콘티넨탈 호텔에 도착했다. 내일 스코페 관광이 시작된다. <5월27일 마케도니아>수도 스코페 시내관광과 마리아테레사 집을 방문하다.스코페는 인구 50만의 마케도니아 수도이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는 돌다리 하나로 구분된다.이 돌다리는 스코페(Skopje)의 상징으로 손꼽힌다. 바르다르 강(Вардар, Vardar River)을 가로질러 각각 신·구시가지를 대표하는 마케도니아 광장(Плоштад Македонија, Macedonia Square)과 스코페 재래시장(Стара Чаршија, Old Bazaar)을 잇는다. 15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마케도니아인들이 자랑하는 것 중에 알렉산더대왕과 마더 테레사 그리고 키릴문자가 있다. 키릴형제는 슬라브족에 대한 선교사업에 공을 세웠으며 선교를 위해 키릴문자를 발명했다. 로마카토릭교회와 정교회에서 모두 성인으로 추대되어 성 키릴로스/성메토디우스라고 불린다. 키릴문자는 바로 성 키릴로스가 고안한 현재 러시아 글자의 모체가 된 문자이다. 돌다리 옆 신시가지 쪽에 키릴형제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그해 무스타파파스하(Mustapha pasha) 사원이 건립되었는데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힌다. 무스타파의 동상도 이곳에 서 있다.돌다리 옆에는 많은 영웅들의 동상들이 서 있고 사랑을 언약하는 조각상도 있다. 부부팀들은 빠짐없이 기념사진을 찍게 마련이다.
또 명동 같은 거리에는 희한한 여러 모양의 조각상이 시선을 끈다.구 시가지 재래시장에는 역시 풍부한 과일이 가장 탐난다. 값도 싸고 맛이 좋다. 자유시간 후에 우리는 이 나라의 자랑으로 여기는 마더 테레사 기념관으로 갔다. 마케도니아 스코페에서 태어나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테레사 수녀를 기리기 위해 정부에서 세운 기념관이다.테레사 수녀의 생가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설계하였고 내부는 박물관, 갤러리 등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테레사 수녀의 유물 등을 볼 수 있었다. 성인의 반열에 오른 마더 테레사 수녀는 전인류가 존경하는 분이다. 스코페의 유명한 깔레요새는 차창으로 보는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웅장하고 높은 성이 요새임에 틀림없다. 깔레라는 말은 터키말로 "성"을 의미한다. 터키 여행시 하얀 목화처럼 보이는 성- "파묵깔레"가 떠오른다.그곳에서 발 온천욕을 한 기억이 새롭다.스코페 요새는 석회암으로 지어지고 라틴 어가 새겨진 것을 보아, 518년 지진으로 무너진 고대 로마 도시 스쿠피(Scupi; Skupi)의 유적일 것으로 추측한다. 유적을 기반으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I) 때 재건하고, 10세기~11세기에 확대 건설하여 완성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1963년 지진으로 일부 무너졌다. 2006년 말, 정부 지원 발굴과 연구가 시작되었다. 1963년 대지진 때는 3000여명의 사상자와 엄청남 피해가 있었다고 한다. 이제 국경을 넘어 불가리아 소피아로 향해 차는 달린다. 멀리 높은 산위에 십자가가 보인다. 이 십자가는 1991년 전쟁의 종식과 화합을 위해 새워졌다고 하는데 지금은 관광객들의 시선을 끄는 명물이 되었다. 오후부터 보게되는 불가리아는 관광객들에게는 가장 선호하는 나라이다. 워낙 관광명소가 많기 때문이다.
언덕 끝에 자리한 성요한까네오 성당 성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호수 예정에 없던 배 유람도~ 첨탑이 두개인 모스크 키릴문자를 발명한 키릴 형제 동상 사랑의 조각상 앞에서 마더테레사 동상
마다테레사 기념관
불가리아
면적 : 110,910평방키로 수도 : 소피아 인구 : 726만명 언어 : 불가리어 민족 : 불가리아인 84% 터키인 : 9.5% 종교 : 불가리아정교 : 83% 이슬람교 : 12.6% 통화 : 레바 (유로와 비율 1:2) 인당 GDP : 6,200불(실질느낌은 10,000불정도)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스코페에서 기념비적인 돌다리와 마더테레사 수녀의 생가와 기념관을 보고 불가리아로 국경을 넘어왔다. 무려 220km를 달려왔다. 국경을 넘자 스마트폰의 시계를 보니 한시간이 빨라졌다. 시차가 계산된 것이다. 손목시계의 시계를 고쳐야 한다. 한국과 시차가 7시간에서 6시간차로 바뀐 것이다. 오후 2시(불가리아시간)에 현지 가이드를 만나 중국집 구룡반점에서 점심식사후 시내관광을 하게 되어 있다. 한국인이 현지가이드를 맡고 있는 나라는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뿐이다. 불가리아는 가장 볼거리가 많은 나라이다. 그래서 발칸 여행일정 중 2박을 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불가리아는 발칸반도의 가장 남쪽 터키와 국경을 하고 있고, 터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오스만터키의 지배를 482년간 받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불가리아는 터키의 동유럽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해 왔다.
불가리아는 매년 인구가 줄어들고 있어 국가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5년간 50만명이 감소했다고 한다. 2004년도에 나토에 가입했고 2007년에 EU에 가입했다. 그러나 아직 유로화는 통용되지 않고 있다. 불가리아는 장수촌으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불가리아 요구르트 때문이라고 선전이 되어 있으나 이는 광고용일뿐, 실제는 물과 공기가 맑고 모두 일하고 즐겁게 살기 때문이란다. 식품 중에서도 특히 과일과 채소를 좋아하는 것도 장수의 큰 요인일 것이다.
소피아 Sofia 시는 성녀 소피아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라며 유럽에서도 가장 오래된 도시의 하나로 도나우강으로 흘러드는 이스쿠르강의 두지류가 시내를 흐르고 배후에 산을 등지고 있으며, 시내 곳곳에 공원이 많아 "녹색의 도시"라 한다. 현지가이드를 늦게 만나 소피아 관광시간이 촉박했다. 차 안에서 설명하고 중요 광광포인트를 찾아가서 직접 확인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소피아 시내는 전철이 다니고 있었다. 차도 바닥이 돌을 깔아 덜거덩 거렸는데 이는 구도시는 돌을 깐 대신 어떤 도로는 시멘으로 되어 있었다. 소피아는 인구가 150만이나 되는 대도시이다. 실제는 250만명이란다. 지방과의 급여차가 무려 2배나 되어 소피아로 자꾸 모여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통계에는 잡히지도 않는다고 한다.
자동차도 많아서 교통이 문제가 되고 있다. 아침 러시아워는 대단한 혼잡을 이룬다. 이곳도 집시가 많다. 불가리아에 근 50만명의 집시가 있다. 그들은 걸인행세를 하고 좀도둑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 여권과 지갑조심을 강조한다. 여기도 시내가 강남과 북이 구분되는데 강남은 깨끗한 반면 북은 지저분하다고 한다. 가이드는 시내 관광명소를 모두 들러야 하니 자연 급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일행들은 이미 생맥주를 마시며 느긋한 분위기를 즐기는데 익숙해 있는지라 여태껏 보던 관광객과는 다르다며 놀란다. 길거리 카페에서 생맥주,커피를 마시는 여유를 부려본다. 불가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 브랜드는 "카마니짜"이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려고 다가온다. 집사람이 빨리 시키라고 눈짓한다. 나는 "가만있자"하니, "가만 있기는 시키라는데도"--벌써 종업원은 알아서 생맥주 잔을 들고 온다. 맥주 이름이 '카마니짜'라는 것을 알고서 집사람도 같이 웃었다. 화장실 입구에는 돈을 받는데 일본에서 왔느냐 고 묻는다. 꼬레아라고 하니 김일성을 묻는게 아닌가? 아직 사회주의 국가때 영향인가? 아니다 사우스꼬레아 라고 하니 아! 김우중~ 하며 그제서야 고개를 끄떡인다. 김우중씨의 파워가 대단했다는데 그토록 위대시하던 그가 원망의 대상이 되었었다고 한다.
소피아 시내의 투어 중 중요 포인트를 사진과 함께 설명한다.
(1)레닌광장 소피아 시내구경은 러시아 혁명가 레닌의 거대한 동상이 서 있는 레닌 광장에 서 시작된다. 주요 간선도로가 여기서 교차하고 인근에 발칸 호텔, 춤 백화점, 발칸투어리스트 등이 가까이 있어 광장을 중심으로 관광객들이 늘 북적댄다. 레닌광장에서 가장 큰 건물이 쉐라톤호텔이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김우중씨가 소유했던 이 호텔이 대우그룹의 도산으로 결국 오스트리아의 소유로 당시 2200만불이라는 헐값으로 넘어 갂다고 한다. 지금은 15억불로 평가된다고. (2)소피아여신상 시내 중심가 네거리에 공산당 시절 레닌동상이 있던 자리에 "소피아 성녀"의 금동상이 금빛 찬란하게 서있다.부엉이를 들고 있다. 부엉이는 지혜를 상징하며 소피아라는 단어는 지혜의 의미이다. 소피아여신상은 곧 지혜를 갈구하는 모습이다.
(3)알렉산더 렙스키 성당 이성당은 러시아 정교회로 불가리아 해방을 위하여 터-키와 싸운 러시아 병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882년부터 1924년까지 건립한 것으로 전쟁에서 사망한 러시아 병사 2 만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그 이름은 러시아 황제 아렉산드라 2세의 이름을 딴 것이라 한다.네오비잔틴 양식의 발칸반도 최대의 성당으로 높이가 45m나 되며 내부면적은 1300평방미터로 5천명을 수용 할 수 있다. 6개의 다른나라의 예술가와 도예가들의 작품들인 프레스코,벽화,거대한 샹드리제 등의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내부는 동서양의 혼합형식으로 동방정교의 전통과 이탈리아의 대리석,이집트의 설화석고 등 호화롭기 그지없다. 러시아가 1960년 지붕의 금도금을 위해 금 20톤을 기부했으며 종이 12개나 되는데 반경 3km나 들린다고 한다. (4)소피아 성당 알렉산드라 네프스키성당 광장 건너편에는 소피아 성녀를 위한 소피아 성당이 있는데 6세기 동로마의 유스타리우스 교황이 건설한 것으로 내부에는 많은 성화와 아이콘으로 장식되어 있고, 바깥 도로쪽 벽아래는 전몰 무명용사를 위한 영원한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5)바냐바시 모스크 1576년 오스만투르크제국 지배 당시에 지어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 중의 하나이다. 소피아에는 과거 70개에 달하는 이슬람 사원이 있었으나, 현재는 바냐바시모스크만이 이슬람 사원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바냐바시라는 이름은 공중목욕탕을 의미하는 경구로부터 유래되었고,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최고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Mimar Sinan)이 설계하였다. 이 사원은 거대한 돔과 하늘까지 치솟은 첨탑으로 유명하다.이 모스크 뒤에는 터키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6)페트카 교회 구 공산당 본부앞 광장에서 바라보면 지붕만 나와 있는 교회로 오스만투르크제국 지배 당시인 14세기에 건축되었으며 소피아에 남아 있는 중세교회 중의 하나이다. 오스만투르크제국 지배 당시 투르크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지하에 지었다. 외부는 타일에 덮여 있어 볼품이 없으나 내부는 매우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현재는 중앙백화점 앞 지하도 안에 있으며 노점상과 카페들로 둘러싸여 있다. 고대 로마 사원을 기초로 하여 건축되었다.
(7)목욕탕 시내 한복판에 고대의 온천 목욕탕이 있는데 이것이 터키식 목욕탕의 원조라 한다. 그옆 공원에는 지금도 뜨거운 온천수가 여러개의 수도 꼭지를 통하여 줄줄 흘러 나온다. 현재 목욕탕은 수리 중에 있었다. (8)세르디카유적세르디카의 유적지도 빼놓을 수 없는 소피아의 볼거리. 세르디카는 비잔틴 시 대 소피아의 지명으로 구 공산당 본부앞 광장 지하도공사 때 발견된 고대도시 유적지다. 2~14세기 경 세르디카의 동문에 해당하는 성벽과 2개의 탑이 보존돼 있는데 지금은 지하도를 건너가면서 구경할 수 있다. 지하도 한 켠에는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성곽의 모형과 발굴작업의 기록사진들이 전시돼있다.유적 발굴작업은 일본이 주도하고 있는데 고대 불가리아의 역사가 바뀔 수 있는 상황이다. 소피아에는 7개의 고대도시가 묻혀 있다고 한다.
(9)국립박물관 레닌 광장에서 비토샤 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불가리아 최대의 박물관 이 있다. 세계의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배낭여행을 온 학생들이 자주 눈에 띈다.남아 있는 모스크 단 2개중의 하나이다.
옛왕국의 수도 벨리코투르노브와 성모승천교회 소피아 시내관광을 마치고 6시10분경 버스는 다음 목적지이자 오늘 숙소인 '벨리코투르노브'로 향한다. 도시 이름이 어렵다.무려 3시간을 달려 도착한 숙소는 아주 크고 좋은 호텔이었다. 5월28일 아침에 새소리에 잠이 깼다. 유난스레 새들이 재잘거린다. 멀리서 왔다고 반기는 것일까? 아니면 빨리 아침산책을 나가라는 성화일까? 안개낀 이 도시의 아침 풍광은 너무 아름다웠다. 오늘 일정은 벨리코투르노브 성채와 성모승천교회를 구경하고 가브로브의 유머박물관과 자린고비 박물관을 찾기로 했다. 그리고나서 장미의 계곡으로 유명한 카잔루크로 향한다. 카잔루크 다음은 흑해변에 있는 관광도시 바르나에서 숙박토록 되어 있다. 중세의 성채 벨리코투르노보 성과 성모승천교회 벨리코투르노보는 소피아에서 동쪽으로 240km 떨어진 얀트라강(江) 상류에 있다. 제2차 불가리아 왕국(1185~1396)의 수도였으며, 아센 2세(1218~1241)시대에는 슬라브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불가리아의 아테네’라고 불렀다.1393년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왕국은 멸망하였으나, 이후 5세기에 걸쳐 문화·교육의 중심지로 번창하였다. 챠르베츠 요새 언덕의 성모승천교회 외에도 14세기에 세워진 성베드로 교회와 성바오로 교회, 고고학박물관·사관학교·종합대학 등이 있다. 천혜의 요새였던 벨리코투르노보 성벽 투어가 시작되었다. 성문에서 올려다 보면 멀리 챠르베츠 요새의 언덕위에 성모승천교회가 높다랗게 보인다. 1985년 대대적인 보수를 마친 성모승천교회는 챠르베츠 유적 중 완벽한 모습으로 남은 유일한 건축물이다. 900년이나 된 성모승천교회는 오스만터키의 파괴로 가운데 부문만 잔존된 것을 옮겨놓고 나머지는 200년전 새로 그려서 복원했다. 입구의 사진은 처음의 교회 모습이다. 성물과 아기예수를 그린 그림은 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 성당내부의 천장과 벽에는 1393년부터 500년간 계속된 오스만터키의 지배로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현대작가 '테오판케로브'가 그려서 기증한 그림들로 가득하다. 이 그림은 불가리아 현대 종교미술의대표작품으로 유명하다. 오르는 계단과 정원에는 빨간양귀비와 노란 꽃들로 마치 야외 나들이를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내려다 보이는 개천과 그 너머 도시 풍경은 한폭의 그림으로 떠오른다. 우리가 숙박했던 곳을 뒤돌아보니 그곳도 명당인 것 같다. 파란 지붕의 교회가 유명한 "성베드로교회"라고 한다. 다음 목적지로 떠나기전 자유시간에는 숙소 근처의 가게에 진열된 도자기 그릇,화병,소품들이 인기였다. 여행의 즐거움 중에 하나가 쇼핑이다. 특히 여인들은 안사고 가면 후회한다며 필사적이다. 가보로보의 유머박물관과 자린고비박물관 아침 이른시간엔 제법 찬 공기였으나 해가 나고나서부터는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가보로보까지는 불과 45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그곳에 좀 특이한 박물관이 있다고 한다. 웃음과 해학이 있는 유머박물관과 자린고비들의 동네로 그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야외박물관이 있다.도대체 어떤 박물관이길래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궁금해진다.
가보로보는 불가리아 전체로 보면 북부 중앙에 위치한다. 수도 소피아로 부터는 220km,루체까지는 160km 거리이다. 안티나강이 흐르고 인구 67,000명(2008기준)의 교통의 요지이다. 내일 가게되는 카잔루크로 가는 길목이다. 수공업,직물,피혁,모직물,목재산업이 발달되어 있고 화훼-장미 산지로 유명하다. 또 발효유도 꽤 이름이 나 있다. 가보로보의 숲,맑은 공기는 정평이 난 곳이다. 유머박물관 매년 유머페스티발이 이곳 가보로보에서 열린다고 한다. 페스티발에는 세계 150여개국이 참가하고 수천명의 작가들이 참가하는 세계적인 모임이다. 박물관 앞에 도착했다. 박물관 주변에는 많은 조각상들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내부 전시장은 그야말로 수많은 소재의 유머관련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림이나 사진, 그리고조형물도 있었다. 산초와 동키호테의 철구조물도 재미있었다. 꼬리가 잘린 고양이상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왜 이지방 사람들은 고양이 꼬리를 가위로 자를까? 여러가지 답이 나왔지만 아무도 정답을 맞추지 못했다. 고양이 꼬리가 길면 문을 열고 닫을 때 바람 때문에 한기가 들어온다고-- 역시 자린고비 정신이다. 유머박물관을 뒤로 하고 가보로보 시내를 지난다. 높다란 시계탑이 보인다. 가보로보 시청건물이다. 구왕궁 건물도,가보로보 성당도 차창 밖으로 지나간다.곧 자린고비 야외박물관에 도착하였다. 자린고비 야외박물관 감이 오지 않던 야외박물관은 그야말로 우리의 민속촌 같았다. 고택과 정원,대장간,물레방아,허수아비,농기구 등 예전의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전시품들과 자린고비 마을 사람들이 즐겨 먹던 빵도 관광객들에게 팔고 있었다. 주물로 직접 제조한 수제품을 기념으로 샀다.사슴뿔로 자루를 만든 칼도 인기가 있었다. 마을 옆으로 물이 흐르고 높은 종루도 있고 평화로운 마을 풍경이 너무 좋다, 계곡의 폭포가 내는 물소리를 들으며 나무숲 사이길과 좁은 산길로 산책을 하면서 모처럼 여유를 만끽했다. 트라키아 왕의 무덤과 장미의 도시 카잔루크 다음 코스인 카잔루크로 향한다. 차로 40여분 걸리는 곳이다. 원래 카잔루크는 장미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안내되어 있으나 아직 이른 시기인지 장미축제는 없었다. 그보다 예정에 없던 트라키아 왕의 무덤을 구경하게 되었다. 이 무덤은 1944년 불가리아 병사들이 이 곳에서 방공호 작업을 하던중 왕의 무덤을 발견하게 되었다. BC300년으로 추정되는 트라키아 왕의 무덤이다. 세우테스 3세 시대에 만들어진 트라키아왕 무덤으로서 카잔루크 북동쪽 낮은 언덕 위에 있다. 무덤 천장에는 트라키아의 장례의식과 전투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한 벽화가 남아 있다.
도굴과 오염을 막으려고 원 무덤의 내용은 박물관으로 옮기고 일반의 공개용으로 똑같은 크기의 무덤을 만들어 관광을 시키고 있다. 무덤 천장 벽화가 너무 아름답고 선명하였다. 왕과 손을 잡고 있는 순장한 왕비의 슬픈 모습이 가슴에 와 닿는다. 네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 그리고 여인들의 표정이 섬세하고 리얼하다. 도굴이 많이 되었으나 무덤속에 묻힌 많은 부장품들이 전시되어 유리관을 통해서 관람할 수 있었다.197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기원전 300년이면 지금부터 2300년이 넘는 고대의 유품들이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에 탄성을 지를 정도다. 또 당시의 순장문화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카잔루크는 장미계곡으로 유명한 인구 68,000명의 불가리아 중부 소도시이다. 장미에서 향수의 원료가 되는 기름을 추출하여 세계 각지로 수출되고 있다. 장미축제가 열리는 시기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이 소도시에 몰려든다고 한다. 장미의 도시라 해서 관심과 기대를 했었는데 장미 보다는 마로니에, 너도밤나무,아까시아 나무가 많이 보였다.그러나 역시 가게에는 장미로 만든 비누,로션,화장품 등 많은 제품들이 유혹을 한다. 관광상품이다. 근처 카잔루크의 중심가에서 자유시간을 가졌다.거리카페에서 차나 생맥주를 마시는 사람도 있고, 우리처럼 시내를 돌아다니며 거리풍경을 구경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곳의 가옥 건축양식은 쿨라타 전통가옥 양식이다. 특별한 이 양식을 모든 주택의 지붕에서 볼 수 있었다. 다음 여정인 바로나까지는 무려 5시간이 걸리는 장거리이다. 대평원의 연속이었다. 무한히 넓은 들판의 야생화 경연장 같다. 노란꽃,빨간꽃,남색꽃--형형색색의 꽃들이 모두 자신있게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들판에는 간혹 들소도 보이고, 파란 녹색밀밭도 또 낭만의 풍차 모습도 눈에 띈다. 흑해 연안의 부르가스 라는 도시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흑해해안을 따라서 북상한다. 흑해, 말로만 듣던 흑해- 생전 처음으로 흑해 바다를 구경한다고 생각하니 느낌이 달리 다가온다. 흑해는 왜 흑해라 하나? 바다물 색갈이 검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이 바다만 유독 검을까? 이곳 바다에는 검은색 프랑크톤이 많기 때문이란다. 시나이아 반도의 홍해 역시 붉은색 프랑크톤이 많아서 홍해라는 명칭이 붙었다. 흑해라는 이름은 이미 로마시대부터 Black sea라 불러왔다. 흑해를 끼고 차는 달린다. 흑해 주변은 공기도 좋고 늘 일기도 좋은 편이다. 그래서 고급별장이 많이 보인다. 부르가스는 불가리아의 남동의 해안도시로 여기서 터키도 멀지않은 곳이다. 기사 알렉스-고향(루마니아)이 가까워서인지 운전에 속도가 난다. 30분을 당겨 4시간반만에 바르나에 도착했다. 흑해의 여왕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는 바르나 관광이 내일부터 시작된다. 숙소 호텔에서 멀리 바다가 보였다. 식사후 바닷가 산책을 나갔으나 철길이 막혀 돌아와야 했다. 오면서 그곳 외국인에게 물으니 다른길로 한참 돌아가야 바다로 나갈수 있다고-- 호텔 대식당에서는 이날 결혼식에 이어 피로연이 열리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노래부르고 춤을 추고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일생에 한번있는 결혼 풍속도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르니--
<5월29일> 오늘 일정은 바르나 시내관광부터 시작되어 도시공원을 산책하고 공원옆 흑해 바닷가에서 모래사장을 거닐게 될 것이다. 그후 화석 산림지역인 포비띠까마니로 가서 진기한 돌모양을 구경한 후 루마니아로 넘어가는 불가리아 국경 도시 루체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것으로 불가리아 관광은 모두 마친다. 인솔자 말로는 불가리아의 바르나,포비티까마니 등은 올해부터 관광상품으로 등장하여 아직 한국 팩키지 상품으로 자리를 완전히 잡지 못하고 있단다. 그래서 내년 상품부터는 구체적인 세부 스케줄이 잡힐 예정이라고 한다. 흑해의 여왕 바르나(VARNA) 바르나는 인구 30만의 불가리아 제3의 도시이다. 지금부터 2800년전 BC8~7세기에 고대 그리스인에 의해 건설된 많은 그리스 도시국가 중 하나이다. AD2년에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1453년부터 터키가 점령한 후 500년간 오스만터키의 지배를 받아왔다. 흑해 바닷가를 끼고 7km나 되는 비치해안을 가진 여름 해수욕과 휴양의 도시이다. 그래서 흑해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갖는다. 조선소와 해군사관학교가 있는 항구,해양도시로 유명하다. 또 바르나에는 Assumption Kathedral 대성당이 있다.
Assumption Kathedral 먼저 찾은 곳은 '바르나 성모영면 대성당'이다. Assumption Kathedral 이라고 부른다. 외관에서 보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사진 잘 찍히는 장소를 알려주어 배경으로 인물사진을 많이들 찍었다. 외관 뿐만이 아니라 교회 내부도 성화의 이콘들이 많고 화려하다. 이 성당은 1886년에 완공되어 예배를 보기 시작했으나 그 뒤 계속 공사가 이루어졌다. 성당 내부 맨위의 돔에는 예수의 삼위일체를 표현하는 모습이 있다. 이스탄불의 소피아성당에도 있지만 꽃무늬 모양으로 덮여 있다. 500년간 회로 덮어씌었기 때문에 11년 동안 철거하려 노력했으나 떼내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 있는 돔 안의 그림에는 유난히 천사의 그림이 많다. 또 용을 창으로 찔러 죽이는 모습을 그려 놓았다. 설화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인데 용은 악마의 상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용은 곧 황제를 의미하는 최상의 영물로 존중받는 것과는 너무 상반된 현상이다. 도로 맞은편에는 바르나의 대표건물이 있다. 1800년 된 로마시대의 종탑으로 전쟁으로 다 부서졌으나 복원하였고 이 탑의 상부에 붙어 있는 시계는 나중에 붙인 것이다.
도시공원 일행은 도시공원으로 들어갔다 바르나 도시공원은 바르나 중심지의 1/5를 차지할 만큼 크다. 공원 메인 스트리트 끝에는 불가리아 독립 100주년 기념탑이 우뚝 서 있었다. 1차대전 때 불가리아는 터키에 지배된 영향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이 때 사망한 군인들을 위한 위령탑이다. 공원 안에서 새소리도 듣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책하는 기분은 말할수 없이 상쾌하다. 여기서도 노인들이 아침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파륜공 체조를 하고 있었다. 불가리아에서 이런 모습을 구경 하다니-- 잎사귀와 꽃잎을 붙여 만든 십자가가 서 있어서 여기에 웬 십자가냐고 물었더니 의미있는 십자가라고 한다.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 것은 예수께서 부활되고 150년 이후부터라고 한다. 이 지역의 동방정교는 나뭇잎,꽃모양의 십자가를 쓰다가 동.서로마제국이 분리되고 부터 동방정교는 십자의 길이가 상하,좌우가 같도록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 카토릭은 세로 길이가 길다. 두 종파의 화합을 위해 동방정교의 잎사귀,꽃잎 모양에 세로가 긴 로마카토릭 십자가를 합하여 만든것이 이 십자가이다. 2000년 6월에 제작하였다고 한다.
바르나 해수욕장 공원에 붙어 있는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았다. 바다에는 이미 여름을 준비하고 있었다. 흑해바다의 해수욕장이다. 해안가에는 파라솔과 썬텐의자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러시아인들의 꿈은 흑해에서 여름을 보내는 것이란다. 바닷물에 손을 담그고 모래사장을 거닐어 본다. 7km나 되는 비치해안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성급한 사람들은 수영복 차림으로 쎈텐을 하고 있었다. 흑해 바닷가에서의 기념사진도 모두 한장씩 남겼다. 아쉽게도 흑해바다를 뒤로 남기고 다음 여정인 포비티까마니로 향했다. 바르나에서 불과 20km밖에 안되는 가까운 곳이다. 화석산림지역 포비띠까마니 포비띠까마니는 화석산림지역으로 진기한 모양의 돌들이 모래 위에서 마치 돌 경연장처럼 서 있다. 터키의 카파토키아 지역과 같은 컨셒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인간의 손이 닿지않은 자연석 그대로이다. 화석이 산림화 된 것이다. 돌의 생김새가 마치 ~같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 많다. 푸들,군인,형제 등등. 바르나와 이 지방도 포도재배가 잘되어 포도주가 유명하다고 한다. 또 과일의 맛이 각별히 좋다고 강조한다. 올리브도 많고 살구,오렌지의 맛은 최고라고 자랑이다. 도로옆 과수원에는 벌통을 많이 키우고 있었는데 꿀을 팔고 있었다. 자연꿀이라 탐을 내어서 한통씩 사가기로 했다. 국경도시 루체로 아침 일찍 서둘러서인지 10시40분경 이미 포비띠까마니까지 관광을 마치고 루마니아로 들기전 마지막 국경도시인 루체로 향했다. 근 3시간이 걸릴 예정이다. 루체에 도착하여 불가리아의 마지막 식사(중식)를 하게 된다. 루체로 달리는 도로변에는 올리브나무가 무척 많았고 들판은 완전히 야생화천국이었다. 노란 유채,빨간 양귀비,하얀 이름모를 들꽃,유난히 튀는 보라색 야생화,초록잔디--파란하늘에 뜬 뭉게구름과 어우러져 자연의 대서사시를 펼치는 한폭의 그림이 전개된다. 아름답다는 표현은 이런 모습을 이르는 말인 것 같다. 자연보다 잘 그리는 그림은 없다.
휴게소에 들렀다. 그냥 지나갈 수가 없다. 불가리아 생맥주 '카마니짜' 500cc를 시켜 집사람과 둘이서 나누어 마셨다. 이러다가 술 늘겠다며 즐거운 비명이다. 불과 1유로밖에 안하니--싸기도 하다.여행사 인솔자가 마이크를 잡고 인생과 행복에 관해 개인소신을 설득력있게 피력한다. 우리 모두 지금 살아 있다는 것에 행복해 하자며--20년후에 다시 이곳에 오자는 제안에 모두 박수를 친다.박수를 치고보니--아니 그럼 그때 내 나이는 어떻게 되지? 허허 웃음이 나온다. 방송에서 어느 누군가 말했다. 자기나이에서 20을 빼고 생각하라고--그렇다면 나도 충분하리라. 루체에 도착하여 늦은 점심을 먹고 시내구경을 나섰다.
인구 45,000명의 도시. 너무 깨끗하고 예쁜 도시다. 까르프 등 대형마트가 있고 광장문화가 발달되어 있었다. 차없는 야외카페를 만들어 즐기고 사는 모습들이 너무 부러웠다. 개인소득으로야 10,000불도 안되는 나라지만 즐기며 사는 모습은 선진국이다. 노천카페에서 우아한 노부부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모든 것이 부부중심이다.카메라를 의식해서 젊은이들도 손을 흔들며 밝은 표정으로 웃어준다. 루체의 메인 스트리트를 거닐어 본다. 상점가도 들어가 보고--루체의 역사는 꽤나 오래다.1200년전에 세워진 도시란다. 불가리아에서 이틀을 보내고 이제 국경을 넘어 루마니아로 들어가게 된다. 다시 오지 못하는 불가리아라 생각하면서 눈으로 가슴으로 머리로 과도한 인풋을 해본다.이 모두 쓸데없는 욕심이지만--
소피아 여신상
알렉산드로 네프스키 성당 성소피아 성당
바냐바시 모스크 생맥주 까마니짜
성모승천교회
그림같은 마을 풍경
유머박물관 / 기상천외 조각상
포비따까마니
야외카페에서 커피와 생맥주를 즐기는 시민들
루마니아 면적 : 237,500평방키로 수도 : 부카레스트(208만) 인구 : 2,300만명 공용어 : 루마니아어, 헝가리어, 독어 민족 : 루마니아인 (89.5%),헝가리인 (6.6%),로마인 (2.5%), 우크라이나인 (0.3%), 독일인 (0.3%), 러시아인 (0.2%), 터키인 (0.2%) 종교 : 동방 정교회(86.8%),개신교(7.5%),로마가톨릭(4.7%) 통화 : 레이(New Romanian leu) 소득 : 인당 GDP 9,000불
유럽의 남동부에 있는 나라이다.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몰다비아공국과 왈라키아공국이 1861년 합병하여 루마니아 공국이 탄생한 지 20년이 지난 1881년에 투르크로부터 독립했다. 1948년 소련의 영향으로 인민공화국이 되었다가 1990년 민주화되었다
루마니아 수도 부카레스트 불가리아의 루체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약 한시간 루체의 시가지를 구경하다가 국경을 넘어 루마니아로 들어왔다.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트(부쿠레슈티)는 루마니아의 남단에 있어서 가장 먼저 이 수도부터 관광을 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영어발음인 부카레스트로 발음하나 현지에서는 부쿠레슈티라 발음하여 혼란이 있었으나 편의상 여기서는 부카레스트로 명기한다. 부카레스트는 인구 200여만의 루마니아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도시로 "부카레스트"라는 이름의 의미는 기쁨의 도시라는 뜻이다. 중세 이래 왈라키아 공국의 수도가 되어오다가 1861년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합방으로 루마니아가 성립되자 그 수도가 되었다. 그 이후 부카레스트는 급속도로 성장, 동쪽의 파리라는 별칭을 얻었다. 차우셰스쿠 치하에서는 역사적 건물들이 많이 파괴되었고, 1977년 대지진으로 1,500명의 사망자가 났다. 2000년대 이후 루마니아의 경제 호황에 따라, 부카레스트는 현대화되었으며 역사적 건축물들 또한 복원되고 있다.시내에는 공원과 녹지대가 많으며, 북부의 8개의 호수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헤라스트라우 공원은 스포츠와 레저에 이용된다. 도나우강의 지류인 딤보비차강이 시내를 흐른다.특히 도심에 마로니에와 보리수나무가 많이 보인다.
혁명광장과 차우셰스쿠 루마니아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고 차우셰스쿠 대통령이다. 루마니아 공산당 서기장 차우셰스쿠의 독재정치가 무너진 혁명광장부터 찾았다. 혁명광장은 빅토리에이 거리 남쪽에 있는 넓은 광장으로, 1989년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12월 혁명이 일어났던 곳이다. 1939년에 화재와 혹시 있을지 모르는 폭동에서 왕궁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1989년 혁명 이후 '혁명광장'이라고 불리고 있다.1989년 12월 21일 정오 차우셰스쿠 대통령의 연설이 5분 만에 중단되고, 대통령 지지 관허 집회가 아수라장으로 변하면서 루마니아12월 혁명이 발발했다. 이틀간의 시위와 총격전 끝에 시위대가 루마니아 국영방송국을 장악했고, 12월 25일에는 차우셰스쿠 대통령 부부가 총살을 당하게 된다.
광장 주변의 석조 건물에는 지금도 탄흔이 선명하게 남아 격렬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25m 높이의 삼각형 조형물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데, 1989년 당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혁명 기념비이다.혁명당시 1000여명의 사망자 명단이 혁명추모비 아래에 기록되어 있다. 혁명유적지 모형은 마치 한반도의 모양과 같아 관심을 끌었는데 이는 혁명으로 피를 튀기는 모양을 형상화 한 것으로 붉은 베꼬니아를 심어 놓았다. 세계2번째로 큰 건물 인민궁전 버스로 시내를 지나가면서 건물이름을 듣는다. 빅토리아광장에서 현지가이드를 만나 정부종합청사,개선문을 지나간다. 말을 탄 동상이 보인다. 캐롤1세의 기마동상이다. 부카레스트 대학과 도서관,대학로거리,말게루거리의 인터컨티넨탈호텔,로마광장,국무총리관저,자유광장,옛왕궁인 국립미술관,전비밀경찰건물도 시선을 끌었다. 인민궁전 앞에 섰다. 세계2번째로 크다는 인민궁전(25만 평방미터).미국 국방성 펜타곤 다음으로 큰 건물이란다. 북한의 인민궁을 보고온 후 챠우셰스쿠가 세계 제1의 궁전을 구상한 것이다. 1949년부터 89년까지 공사한 이 건물은 원래 인민궁전으로 부르다가 1989년 혁명 이후 이름을 의회궁전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대부분의 루마니아 인들은 인민궁전이라고 부르고 있다. 86m 높이이며 가로,세로 274m, 245m이다. 1,100개의 방이 있으며 12층의 높이이다. 3,500 여 톤의 수정으로 480개의 샹들리에, 1,409개의 천정용 전구와 거울을 만들었다. 20만 m2의 양모 카펫와 문직으로 짠 커튼과 금은으로 장식한 벨벳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이 화려한 궁전 발코니에서 연설을 하고 싶어 했으나 챠우세스쿠는 완성을 거의 앞두고 실각과 함께 처형을 당했다. 지금은 국회 상하원 의사당 그리고 헌법재판소로 사용되고 있다. 통일대로-부카레스트의 샹제리제 통일대로는 인민궁전을 기점으로 약 4Km에 걸쳐서 부카레스트 시내로 뻗어있는 대로로 파리의 상제리제 거리를 본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분수 41개가 설치되어 있다. 통일대로 부근에 통일공원과 중앙광장(통일광장),통일백화점이 있다. 헤라스트라우 공원(Parcul Herastrau) 시내를 관통하는 딤보비차강과 8개의 호수를 이용하여 만든 헤라스트라우 공원은 187헥타르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의 공원이다. 넓다보니 숲속을 거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고 시민들의 휴식과 일광욕 수영,레포츠의 장소로 활용된다. 여기서 자유시간을 얻었다. 넓은호수를 바라보며 산책을 즐기는 기분은 색다른 것이었다. 이곳에는 6홀의 골프장이 있는데 한국사람들이 많이 이용한다고-- 카신 루마니아 정교회 예정 코스에는 없었으나 현지 가이드가 독실한 카토릭신자로 꼭 보여주고 싶다며 안내한 곳은 루마니아 정교회 성당이었다.종탑 건물의 입구에서 본 성당 외에도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정교회 대주교는 국가로부터 국무총리 정도의 예우를 받는다고 한다.가이드 덕분에 교회 내부의 곳곳을 구경할 수 있었다.대주교의 숙소인 회관도 구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정교회는 1937년에 건립되었다. 전통적인 비잔틴 양식에 현대적인 건축양식을 적절히 결합시킨 아름다운 건물이다. 부카레스트에서 가장 큰 교회 건물이며, 다채로운 색상의 모자이크와 대리석으로 벽면을 장식해 화려한 느낌을 준다. 내부는 비잔틴 양식의 프레스코화로 꾸며져 있다. 1996년 4월 27일 루마니아의 전설적인 체조선수 나디아 코마네치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루마니아 종교계, 정치계의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하객으로 참석했으며, 교회 앞에는 2,000여 명의 구경꾼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나디아 코마네치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14세의 나이로 여자체조 사상 최초로 10점 만점을 기록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크레출레스쿠(Kretzulescu)교회도 유명하다. 빅토리에 거리에 위치한 18세기 동방정교 교회이다. 대법관이었던 이오르다케 크레출레스쿠(Iordache Kretzulescu)와 그의 아내 사프타(Safta)가 세웠고 루마니아의 유명한 화가 게로게 타타레스쿠(Gheroghe Tattarescu)가 내부 벽화를 그렸다. 1720부터 1722년 사이에 건물이 세워졌지만, 내부의 벽화는 그보다 100여 년 뒤인 1859년부터 1860 사이에 그려졌다. 부카레스트의 시내관광을 마치고 저녁식사는 '다미'라고 하는 한국식당에서 가졌다. 여행 중 한식은 처음이다. 메뉴는 육개장이다. 오랫만에 먹는 한식이라 기뻐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개운한 식사를 배불리 먹고 숙소인 시나이어로 달린다. 한시간40분이 걸리는 거리이다. 음악CD를 듣기도 하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감상한다. 최대의 유전지역으로 석유를 시추하는 현장의 채유기도 보이고 온수파이프가 지상으로 연결된 모습도 시선을 끌었다. 화력발전소의 냉각탑도 보이고 --밀,옥수수,유채,해바라기,감자 등 곡물류와 좌우의 유채밭에는 이미 꽃은 지고 없어도 한없이 이어지는 풀밭이 대단한 평원임을 보여준다. 버스를 타고 가며 현지가이드는 부카레스트의 한류에 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류바람은 여기도 드세게 불고 있다. 한국인은 400명가량 거주하는데 일반 50가정외에 상사인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1995년에 대우자동차가, 97년에는 대우조선이 들어왔으나 2006년에 대우는 문을 닫았고 2007년에 두산중곡업이 공작기계를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이곳의 한류바람은 대단하다고 한다. 재작년부터 국영방송국의 저녁 골든타임에 우리의 '대장금'이 시청률 1위를 차지한후 '이산'선덕여왕''다모'''허준''주몽''동의'로 이어지는 역사드라마가 방송드라마를 완전 장악하고 있다고--컴퓨터 ID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 '주몽''소서노'라고 하니 가히 알만하다. 반면 국영2TV에서 방영되는 중국드라마는 인기가 없다고 하며 그의 분석으로는 한국드라마는 애정표현이 기가 막히고 스토리의 목적이 분명하며 역사드라마 경우 주군을 위한 충성심에 시청자들이 감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드라마의 영향도 있어서인지 자동차의 경우 현대기아가 토종 다치아(15%)를 제치고 마켓셰아 1위(24%)를 차지하고 있단다. 가전에서도 삼성,LG의 LCD TV,노트북 그리고 에어콘 시장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고 하니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최근 파리에서 SM엔터테인먼트사의 이수만사단의 소녀시대 등 가수들이 공연에 대성황을 이룬 뉴스가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 결코 1회성이 아니다. 가이드는 현지 여성과 결혼하여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딸이 있는데 한국식 도시락을 사가며 젓가락질을 곧잘 한다고 한다. 대장금에서 장금이가 사용하는 젓가락이라며 으시대니 반 애들이 부모에게 젓가락 사 달라고 성화를 하여 중국집에서 젓가락을 구해주느라 쩔쩔맨다는 얘기를 들으며 모처럼 기분좋은 웃음의 시간을 가졌다. 현지 한국인들의 자긍심은 자연 높아지게 마련이다. 어둑해질 무렵 해발 800m의 시나이어에 도착했다. 작은 도시이나 그림같이 예쁜 도시이다.
빅토리아 광장 개선문
인민궁전(의회궁)
통일대로와 샹제리제 거리의 분수
카신루마니아 정교회
화려한 정교회 내부
<5월30일>
다른날 보다 더 일찍 일어났다. 아침산책을 하지 않으면 그만큼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어서다. 스위스의 인스부르크에 온 듯한 느낌, 혹은 캐나다 뱀프로 착각할 것 같다. 경사진 마을 위쪽으로 마을구경에 나섰다. 크리스마스 츄리 같은 키큰 나무들, 집집마다 디자인이 다른 예쁜 집들이 조화를 이루며 마을을 꾸미고 있었다. 관광도시답게 2,000m까지 케이블카가 다니고 있었다. 한바퀴 아침산보를 마치고 오니 식사시간이었다. 오늘은 '카르파티아의 진주'라 불리는 루마니아 최고의 산악휴양도시 이곳 시나이아에서 왕의 휴양지로 최고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갖춘 펠레슈성과 작은 펠레쇼르성을 구경한다. 이어 중세기의 정교회 수도원인 시나이아수도원을 구경하고 산을 넘어 브라쇼브로 간다. 시내의 아기자기한 풍경과또 유명한 검은교회도 구경하고 브란으로 옮긴다.드라큐라 소설로 유명한 브란성에서 마지막 관광을 마치고 오늘 일정과 이번 여행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시나이어 펠레슈성(Peleş Castle) 시나이어 지방은 6세기 다치아 왕국이 있었으나 AD105년 로마와 2년간 전쟁을 통해 왕국은 함락되고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로마군의 송환을 하기 위해 고산도로가 만들어졌고 산너머에는 항가리아인,독일인이 살고 있었다. 1859년 통일루마니아 공국이 들어서고 독일황제의 조카인 카롤1세가 지배하게 되었다. 카롤1세가 여름사냥을 나왔다가 아름다움에 반해 이곳에 여름별장을 짓고 5~8월을 이곳에서 보냈다. 해발 880m에 위치하고 년평균온도가 10도로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비교적 따뜻한 곳이다. 펠레슈성은 휴양도시 시나이아에서 단연 최고로 꼽히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카를 1세의 명으로 1783년에 짓기 시작하여 1883년 완성되었다.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되었으며, 처음에는 독일 건축가 빌헬름 도데러(Wilhelm Doderer), 나중에는 그의 제자 요하네스 슐츠(Johannes Schultz)가 공사를 감독하여 완성시켰다. 이후 왕가의 여름 휴양지로 활용되었으며, 1914년 카를 1세가 죽자 이곳에 묘를 만들었다.정교한 장식을 새긴 나무로 만든 건물 외관은 물론 건물 내부와 정원, 주변경관까지 모든 것이 아름답고 화려하다. 카르파티아 산맥의 우뚝 솟은 봉우리와 숲으로 둘러싸인 모습도 장관을 이루며 건물은 정면에 조각정원이 딸린 커다란 공원 안에 세워져 있다. 성을 지을 때 경비실, 사냥용 별장, 마구간, 발전소 등 부속건물들까지 같이 건설되었으며, 자체 발전소를 갖추고 있어 유럽에서 전력을 사용해 불을 밝힌 최초의 성이기도 하다.
성 안에는 170개의 방이 있는데 모두 사치스러울 만큼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도자기, 금은으로 만든 접시, 크리스털 샹들리에, 멋진 조각들, 그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가구들까지 어느 것 하나 호화롭지 않은 것이 없다. 1903년부터 1906년까지 조성된 무기의 방에는 4,000점에 달하는 유럽과 동양의 무기류가 전시되어 있다. 16~17세기 독일 무기만 따로 모아놓은 방도 있는데,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이 인상적이다. 성에는 또한 유럽 미술가들의 회화 작품 2,000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또 펠레슈성은 유럽 최초로 전기장치,진공청소기,엘리베이터,중앙난방식 보일러를 사용한 초현대적인 건물로, 방마다 건축방식이 다른 예술의 성이다. 펠레슈성 근처에 보다 작은 펠레쇼르성(Peleşor Castle)이 있다. 펠레슈성을 건설한 카를 1세가 조카이자 다음 대 왕이 될 페르디난도 왕자 부부를 위해 지은 것이다. 1899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903년에 완공했다.전체적으로 아르누보 양식을 따르면서 비잔틴 양식과 켈트 양식을 접목한 건물이다. 체코 건축가 카렐 리만(Karel Liman)이 설계하고 가구를 비롯한 내부 장식은 오스트리아 빈 출신 베르나르트 루드비히(Bernhard Ludwig)가 맡아서 진행했다. 인근의 펠레슈성에 비해 규모가 작고 디자인이나 인테리어가 단순한 것이 특징이다. 성을 건설하고 꾸미는 데는 페르디난도와 결혼한 마리아 왕비의 개인적인 취향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펠레쇼르성을 먼저 구경한후 아침의 맑고 쉬원한 공기를 마시며 산책하듯 걸어서 펠레슈성으로 갔다.부근의 작은 호텔숙소들 모두가 고성 모양으로 지어져 있어 조화가 잘 된다. 마침 휴관일이라 내부를 볼 수 없다고 한다. 외부에서 보는 펠레슈성의 아름다움 만으로도 만족한다. 방송에서 본 성의 내부사진이 너무 호화로워서 인터넷자료에서 발췌한 내부사진을 몇점 소개한다. 이 펠레슈성은 사회주의 정권이들어서면서 왕정이 폐지되고 재산을 몰수 국가소유의 예술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최후의 왕 미하엘이 개인소유의 재산이라고 재판을 한 결과 승소했다. 그러나 그는 현재 스위스에 망명하여 살고 있고 국가에 헌납의사를 밝혔다 한다. 시나이어수도원 시나이어 수도원 입구에서 바라본 수도원은 둥근지붕에 십자가를 세운 첨탑들과 종탑이 어우러져 수도원의 성스러움보다 중세의 아름다운 성으로 보였다. 시나이어수도원은 왈라키아 공국의 귀족인 미하이 칸타쿠지노(Mihai Cantacuzino)가 1695년에 세웠다. 시나이반도 시나이산에 있는 대시나이 수도원에서 이름을 따왔다. 또한 이 수도원의 이름을 따서 도시명을 시나이어라고 부르게 되면서 도시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과거에는 칸타쿠지노 집안의 여름 별장으로 쓰였으며 현재는 20여 명의 정교회 수도사들이 거주하고 있다. 수도원 부지는 수도사들의 독방이 있는 낮은 건물로 둘러싸인 두 곳의 뜰로 구분되고, 각 뜰의 중앙에 후기비잔틴 양식과 루마니아 양식을 혼합해 만든 그리 크지 않은 교회 건물들이 서 있다. 하나는 1695년에 세운 것으로 ‘옛 교회’라고 불리고, 나머지 하나는 1846년에 세워졌는데 규모가 더 커서 ‘큰 교회’라고 불린다. 도서관이자 박물관으로 쓰이는 작은 방에는 1668년 최초로 루마니아어로 번역된 성경을 비롯해 필사본과 성상 등이 보관되어 있는데, 루마니아 최초의 종교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1892년에 제작된 종루의 종은 무게가 무려 1,700kg이 넘는다. 최초로 건립된 1695년에서 300주년 되던 해인 1995년에 붙인 기념플레이트가 역사를 말해준다.
종탑건물을 지나니 오른쪽에 수도사들의 숙소가 보이고 바로 큰수도원이 나타났다. 큰수도원의 입구의 화려한 장식화도 눈낄을 끈다. 내부의 벽명과 천정에도 빈틈없이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지붕색이 검은 색으로 구분된 작은 옛수도원에도 많은 성화들이 그려져 아름다움을 보태준다. 성당에서는 하루에 한번씩 미사를 연다고 한다.시나이어의 펠레슈성과 수도원의 아름다움 그리고 시나이 산중의 맑고 향기로운 공기에 매료되어 떠나기가 싫었다. 다음여정은 1100m고개를 넘어 브라쇼브 시가지로 향했다. 멀리 구체지 산 정상에 십자가가 보인다. 2298m정상에 세워져 있는 이 십자가는 가로 14m에 높이 36m나 되는 대형 십자가로 차를 타고 가면서 신기한 십자가에 모두들 관심을 가지게 된다. 1차대전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를 위해 주요 축일이나 국경일에 자가발전으로 불을 밝힌다고 한다. 부라쇼브(BRASOV) 루마니아를 가로 지르는 카르파티아 산맥은 높이가 무려 2,500m나 되는 고봉들이 많은 산맥이다. 이쪽 트란실바니아 지방은 고산의 험준함과 중세의 아름다운 옛성들로 경치가 좋아 한층 관광객이 많아졌다. 인근에 있는 브란성은 드라큐라성으로 불리기도 하며 많은 여행객들이 몰린다. 이러한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중심도시가 바로 부라쇼브이다. 관광객을 상대로 하다보니 도시 전체가 예쁘고 쇼핑하기 좋은 곳으로 변모했으며 특히 역사가 있는 "검은교회(Black church)" 는 그 명성답게 많은 관광객들이 모이는 곳이다. 인구25만의 루마니아 최고 휴양도시인 부라쇼브는 중세 루마니아가 3개공국으로 나뉘어 있던 시기인 왈라키아,몰다비아,트란시바니아 공국의 세지방을 잇는 교통과 상업의 중심도시였다. 13세게 독일인에 의해 건설된 이 도시는 항가리 루마니아인이 거주하면서 15세기 트루크족의 침략을 막기 위한 성벽이 도시외곽을 둘러싸고 있다.루마니아에서 다섯번째 큰 도시로 800년의 역사를 가진 생활수준이 아주 높은 도시이다. 신시가지에는 1970년대와 80년대 챠우셰스쿠의 독재시대에 지은 아파트들이 많이 보였다. 브라쇼브 대공원도 예술회관의 모습도 보였다. 구시가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에카트리나 문을 거쳐야 한다. 야곱이 세웠다는 스케이문과 에카트리나문 두개의 문만 남았다고 한다. 좁은 길로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검은교회(Black church)와 구시가지 광장 구시가지 중심에 1420년에 지은 구청사가 있는데 사방에서 볼 수 있는 시계종탑이 있다. 먼저 들러볼 곳은 역시 검은교회이다.65m 높이의 검은 교회가 단연 눈길을 끈다. 1395년부터 무려 80년에 걸쳐 후기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이 교회는 처음에는 성모마리아교회로 불렀다. 1689년 합스부르크의 습격으로 건물외벽이 까맣게 그을린후 '검은교회'라 불리게 되었다. 대화재 이후 재건에 100여 년이 걸렸으며, 내부 장식이 대부분 바로크풍으로 바뀌게 되었다. 재건 과정에서 65.5m의 거대한 탑 2개가 만들어졌는데, 탑 속에는 루마니아에서 가장 무거운 6,300kg짜리 종 3개가 있다. 입구 문은 오리지날 호두나무로 소박하며 바닥은 돌대신 모두 전나무로 깔았다. 1920년대에 보일러 공사를 해서 온수 파이프를 설치했다고 한다. 보수공사는 독일 기사가 무료로 한다고.1839년 총 4,000개의 튜브관과 7개 음역의 4개 건반이 있는 남동 유럽에서 가장 큰 오르간이 만들어졌다. 우아하고 정교한 음으로 유명하며 현재도 음악회에 사용된다.14세기 건물로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교회로 평가받고 있다. 검은교회를 나와서 스파툴루어 광장으로 나왔다. 구시가지 중심에 1420년에 지은 시의회 구청사가 있는데 사방에서 볼 수 있는 시계종탑이 있다. 지금은 브라쇼브 주립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바로크 양식의 은색 지붕의 항거리 천주교 성당도 보인다. 건물 뒤에는 루마니아 정교회도 있다. 구시가지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주는 아이스크림으로 거리카페에 앉아 구라파 여행의 즐거움을 느끼며 시간을 보냈다. 쇼핑과 거리구경을 위해 한시간의 자유시간을 주었다. 한가로이 골목길을 걸으며 상점가도 기웃거리고 카페에 앉아 담소하는 평화로운 시민들 구경도 하였다. 곱게 늙은노부부의 모습도 좋고, 밝게 웃으며 손짓하는 젊은이도, 어린 아기의 순진하고 귀여운 모습도 너무 보기가 좋다. 마지막 아쉬운 작별을 위해 뒤돌아 본다. 멀리 BRASOV 라는 도시 이름의 글자판이 마치 Hollywood를 연상케 하듯 산 정상에 걸려 있다. 다음 여정은 이번 전체여행의 마지막 순서인 브란성이다.
브란성(드라큐라성) 부라쇼브에서 차로 한시간 거리에 브란성이 있다. 워낙 유명한 관광지라 역시 관광객들이 많았다. 위로 올라가는 산책길이 있고 성 입구를 보니 온통 바위로 된 성이다. 초기 돌부분은 망루가 되었고 수세기에 걸쳐 건축된 돌들은 시대마다 모두 달랐다.당초 출입구는 폐쇄되고 새로 문을 내었다. 브란성은 유럽에서도 가장 관심끄는 관광지 중의 하나이다. 1869년 브람 스토커의 공포소설 '드라큘라'는 전세계에 소설과 영화로 유명해졌고 '드라큐라' 흡혈귀의 대명사가 된 이 역사소설의 실제인물은 루마니아 왕궁중의 하나인 발라히아 왕국의 왕자 '불러드떼패쉬'(별명:블러드 드라큐라)이다. 그의 아버지 블라도 드라큘이 떼페쉬가 볼모로 잡혀가 있는 터키로부터 구해오고 그 뒤 떼페쉬는 터키를 상대로 싸워 이긴다. 그는 과거의 적개심으로 포로를 상상하기 어려운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하였다. 이런 잔혹함 때문에 드라큐라 백작의 모델이 되었다. 가이드는 여인들은 특히 목에 머플러나 목수건을 감고 구경하라고 하여 한바탕 웃었다. 성내는 꼬불꼬불한 좁은 계단을 오르며 사진과 옛 가구나 생활도구, 미로와 비밀방 등을 구경하며 성 꼭대기로 오른다. 성에서 내려다 보는 경관도 꽤나 좋았다. 요새교회도 보이고 농민들 요새도 보이나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다. 밑으로 내려와 영화에서 공포의 그 우물을 들여다 보니 행운의 동전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브란성은 실제로 그가 살던 곳은 아니며 그의 조부가 잠시 살던 곳으로 지금의 브란성은 흡혈귀-드라큐라의 이미지는 전혀 없고 매력적이고 고풍스런 고성일 뿐이었다.
모든 여행의 일정이 끝났다. 오늘 밤 부카레스트 공항으로 가서 탑승후 도하공항에서 환승하여 내일 오후 4시4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비행기 타는 시간이 가장 괴로운 시간이다. 좀더 빠른 마하 비행기로 여행할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 어느새 다 지나고 이제 그리운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비행기 안에서 잠은 오지 않고 영화를 여러편 보았다. 창 아래로 하얀 설산이 보인다. 히말라야 상공을 나르는가 보다. 좀 더 있으니 모래 사막지대가 한없이 펼쳐진다. 지구란 땅덩어리가 우리의 속도로는 한없이 크지만 높은 공중에서 보는 지구는 또 이렇게 작은가 싶기도 하다. 생소하게 느껴졌던 발칸반도, 전쟁과 화약고라는 이미지를 벗지 못한 발칸반도-이제 근 열흘간의 여행을 통하여 발칸은 슬프고 안타까운 전쟁을 겪은 불행한 땅이지만 이 지구상에서 어느 곳보다 아름답고 역사가 깃든 꼭 가 보고 싶은 관광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싶다. 슬로베니아의 발라드섬을 시작으로 크로아티아의 플로트비체 국립공원, 아름다운 성곽도시 드부로니크, 그리고 보스니아의 모스트다리, 몬테네그로의 코토르궁전, 마케도니아의 오호리드 호수와 수도 스코페-- 불가리아 소피아와 카잔루크.바르나 흑해의 정경 이 눈에 선하다. 또 마지막에 본 루마니아 수도 부카레스트와 시나이어의 옛성과 수도원,브란성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볼거리를 여러분들에게 짧은 필력으로 소개하기가 무리이고 벅찬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가끔씩 잘 읽고 있다는 격려속에 이제 6편의 모든 연재 여행기를 끝낸다. 내용 중에 오류가 다소 있더라도 양해바라며 내용 중에 인터넷 백과사전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였다는 점을 밝힌다. 감사합니다. <大完>
펠레슈성
시나이어 수도원
검은교회(Black Church)
브라쇼부 구시가지 광장과 시계종탑 드라큐라성(바위에 세워졌다)
브란(드라큐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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