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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31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복음을 전도하는 사울, 福音を伝道するサウロ。
본문: 사도행전 9장 19b절~25절
행 9:19b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냈다. 20 그런 다음에 그는 곧 여러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였다. 21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다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을 마구 죽이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그가 여기 온 것도, 그들을 잡아서 대제사장들에게로 끌고 가려는 것이 아닌가?" 22 그러나 사울은 더욱 더 능력을 얻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면서, 다마스쿠스에 사는 유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23 ○여러 날이 지나서, 유대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기로 모의하였는데, 24 그들의 음모가 사울에게 알려졌다. 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모든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 25 그러나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서, 성 바깥으로 달아 내렸다.
19b サウルは数日の間、ダマスコの弟子たちと一緒にいて 20. すぐあちこちの会堂で、「この人こそ神の子である」と、イエスのことを宣べ伝えた。21. これを聞いた人々は皆、非常に驚いて言った。「あれは、エルサレムでこの名を呼び求める者たちを滅ぼしていた男ではないか。また、ここへやって来たのも、彼らを縛り上げ、祭司長たちのところへ連行するためではなかったか。」22. しかし、サウロはますます力を得て、イエスがメシアであることを論証し、ダマスコに住んでいるユダヤ人をうろたえさせた。23. かなりの日数がたって、ユダヤ人はサウロを殺そうとたくらんだが、24. この陰謀はサウロの知るところとなった。しかし、ユダヤ人は彼を殺そうと、昼も夜も町の門で見張っていた。25. そこで、サウロの弟子たちは、夜の間に彼を連れ出し、籠に乗せて町の城壁づたいにつり降ろした。
지난 주일에 우리는 사울을 만난 아나니아의 용기와 헌신으로 사울이 시력을 회복하였다는 메시지를 나누었습니다. 올바른 시력과 시선을 회복한 사울은 비로소 올바른 인생길을 걷게 됩니다. 그의 인생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15절에 사울의 인생을 당신의 이름을 전하는 그릇으로 사용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울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모두 주님께 쓰임을 받는 그릇입니다. 어떠한 그릇이 될 것인지를 노력하기보다, 먼저 우리도 주님께서 어떻게 쓰고 계신 그릇인지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될 것을 믿습니다.
사울은 자신을 주님께서 어떻게 쓸 그릇인지를 보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안수하고 나서 그의 눈에서 비늘과 같은 것이 떨어졌다고 하였지요.
지금까지는 유대교의 율법이라고 하는, 교리라고 하는 비늘로 덮혀 있어서 올바르게 볼 수 없던 사울이 제대로 볼 수 있는 시력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례도 받고, 음식을 먹고 기력을 회복하였지요. 지금까지의 자신에 대한 절망에서 이제 주님을 향한 소망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받은 것입니다.
주님과 주님의 영원한 나라를 향한 소망이 우리에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입맛과 식욕을 허락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을 지냈다고 오늘의 본문 19절 하반절은 시작합니다. 오늘 첫 번째로 주목하고 싶은 구절이 바로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냈다”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 소속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는 제자들이지요.
우리 교회도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는 제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올 때의 마음은 언제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에 관심을 갖고 계셔야 합니다. 저도 오직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섭니다.
그런데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교회의 목회자나 임원들도 실은 무언가를 가르칠 것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함께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안내하는 일에 각각의 역할에 맞게 봉사하고 섬기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뭔가 좀 더 나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무리라고, 성도라고 일방적으로 먼저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이지요.
제자들은 혼자 말씀이나 가르침에 대하여 골몰하여 연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자는 반드시 공동체를 통해서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 안에 예수님의 영이 임재하여 계시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자기 나름의 지식과 경험으로 말씀의 의미를 추측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도를 닦는 것처럼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활하며 자극을 주고받으며 배우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공동체를 이루어 말씀을 배우는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시로 노래하였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 133편)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한다”는 말은 공동체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를 통해 주어진 복은 바로 “영생”이라는 것이지요.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 시편 133편의 마지막 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그곳이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시고 영생을 베푸시는 현장이다.”
교회 공동체가 바로 그 연합의 현장이며, 영생을 베푸시는 현장입니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잠시 대면하여 모이기 어려운 형편이지만, 다시금 모든 전염병의 위협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우리 다시 현장에서 걱정 없이 모여야 날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마냥 대면하여 모일 것을 기다리기만 하거나, 혹은 포기하고 각자도생하듯 개별적으로 흩어질 일이 아닙니다. 제한적인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서로 연합하고 연결되어 공동체로서의 관계성과 연대감을 지켜야 합니다. 분명히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5)
이 말씀은 위험요소를 무시하고 율법적인 모임의 법칙을 지키라는 말씀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연대감과 연합의 끈(連帯感と連合の絆)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으로 그 연대와 연합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사울이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세례를 받고, 그리고 음식을 먹을 힘을 얻고 나서 한 일이 곧 다마스쿠스의 제자들, 즉 성도들과 함께 관계의 끈으로 공동체로 자신을 묶는 것이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 있더라도 우리는 서로에 대한 연대와 연합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이며 제자인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배움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제목이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는 예수님의 기도문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 중에 22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2)
예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영광이 곧 우리가 하나 되는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자인 것으로 인해, 그리고 우리 안에 살아계신 성령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믿음으로 연합한 제자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서로 말씀을 배우는데 하나 되어서 서로 사랑하면 마침내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증거가 된다고 예수님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5)
그래서 사울은 거듭난 후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공동체로 연합하고 연대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울의 본을 따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그리고 그는 곧 전도하는 자가 됩니다. 사울이 전도할 때 두 가지를 선포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심을 또한 고백”하였습니다. 이 두 구절을 곰곰이 묵상하면 제자들과 초대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의 기초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자신들의 존재를 당당히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와 그 죽음에 대해서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로마제국에 의한 박해가 시작되고 나서는 십자가의 상징을 드러내놓고 공개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신 사용했던 상징이 곧 물고기 마크입니다.
여기 보이시는 그림을 많이 보셨을 텐데요. 물고기를 헬라어로 익투스(ΙΧθΥΣ)라고 합니다. 이 익투스라는 글자를 알파베트 한 자씩 떼어 신앙을 고백하는 암호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말이지요.
Ιησους (예수) Χριστος (크리스토스) θεου (데우) Υιος(휘오스) Σωτηρ (소테르)
연결하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 고백은 시몬 베드로가 선언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물론 베드로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이 고백하기 전에 예수님을 대면하였던 귀신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며 두려워했었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또한 그리스도, 즉 메시야(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에 이미 약속하신, 그 구별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성도이며 제자인 우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은 단지 이 땅에서 모범적이고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삶을 살거나, 혹은 남들보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야 하기 위해서가 아님은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제가 세속적인 성공이나 사업 아이템을 위한 어드바이스는 약속드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 사람답게 살기 원하신다면, 인생의 불안에서 벗어나 영생의 안도감으로 살기 원하신다면, 주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그 비법은 공개할 수 있습니다. 이미 태초부터 공개된 방법이라 비결이나 비법이라고 하기도 민망합니다.
인생 100년을 청년처럼 살고 계시는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이신 김형석 박사님이 어느 언론과 인터뷰한 내용을 읽어 봤는데요. 그분의 인터뷰의 핵심적인 주제가 7가지였습니다. 정말 귀한 말씀이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1. 만족할 줄 알아라. 만족할 줄 모르면 불행하다.
2. 마음그릇을 넓혀라.
3. 노년의 건강은 50대부터 관리해야 한다.
4. 일하고 공부해야 건강해진다.
5. 가치있는 인생은 60세 이후에 온다.
6. 정신이 건강해야 육체도 건강하다.
7. 이기주의자는 불행하다.
특별히 노년의 건강은 공부에서 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공부는 골치 아픈 자격증을 따기 위한, 혹은 어떤 유용한 일을 위한 투자로서의 공부가 아니라, 생각과 마음의 지평을 넓히는 배움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평생에 다 배워도 모자랄 예수님의 제자됨의 삶이겠지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고, 그분이 곧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그분으로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수시로 고백하고 기억하고 인정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요, 제자도의 핵심인 것입니다.
사울은 주님을 만난 즉시 그렇게 전도의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고 제자들과의 연합을 경험한 뒤에 그 복음을 고백하고 전도하는 것을 주저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은혜를 입고, 복음의 놀라운 비밀을 알고 나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고 관심사가 다르고 삶의 자리가 다릅니다. 그래서 방법과 모습을 다르지만, 그 안에 이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곧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증거이기도 하지요.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 그것이 성령님으로 충만한 증거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그리고 말씀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성령으로 인해 전도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마 10:19b-20)
복음을 전하고, 영생에 대해서 알리고 싶은 마음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인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23절에는 ‘여러 날이 지났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누가의 표현으로 꽤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을 뜻합니다. 신학자들은 이 기간이 약 3년 정도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갈라디아서 1장 17절-18절에 보면 바울이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사도들에게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내려가서 칩거하고 다시 다마스쿠스로 왔다는 고백이 나오는데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거듭난 지 3년 만에 사도들을 만나러 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 3년 동안의 기간을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여러 날이 지난 것’으로 표현했다는 것이지요.
여하튼 사울은 이제 복음전도로 인해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으며 본격적인 고난의 시작에 들어서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제자들은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서 성벽으로 내려 탈출하게 하였던 것이지요. 유대인 최고의 학자인 가브리엘의 문하에서 배우던 사람이 처량하게 밤에 광주리에 담겨 성벽을 타고 탈출하는 모습이라니, 참으로 불쌍하기 짝인 없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결코 그러한 고난에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상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고난을 받는 것을 감사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훗날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고후 11:30-33)
자신에게 있어서 자랑은 오직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 받고, 나약하게 보이는 것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자신의 제자이며 아들과 같은 존재였던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딤후 1:12)
사울은 전도의 사명이 있는 한 자신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예수님의 그릇으로 쓰임을 받는 한 절대로 버림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도이며 제자인 우리들에게 필요한 믿음은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가진 이는 절대로 버림받지 않는다는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나를 아시니까 내가 하는 일은 모두 잘 될 거야. 내가 얼마나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했는데... 주님이 보상해 주실 거야. 내가 그래서 성경을 몇 번이나 읽었는데... 내가 하루에 기도를 얼마나 하는데...
여러분, 성도이며 제자인 우리가 생각할 것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 내가 얼마나 노력하느냐, 내가 얼마나 많이 심었느냐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알아서 보상해 주실 것이고, 그저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어떻게 쓰임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그릇으로 주님께서 쓰고 계신 지에 관심을 먼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저와 여러분을 향한 그 놀라운 계획을 배우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배움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연합하는 곳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눈이 열린 사울처럼 복음을 전도하는 그릇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는 그릇으로 쓰임 받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고난을 받는다 해도 그것은 절대 주님이 자신을 버리신 것이 아님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비록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피해서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통해 탈출해야 하는 초라한 체험을 해야 했지만,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고난을 자랑하였습니다. 자신의 아들과 같은 제자에게 그러한 삶을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배워야 할 것은 어떻게 젠틀하고 나이스하게 살 것인가, 어떻게 자존감을 지키며 살 것인가, 어떻게 순탄하게 살 것인가, 어떻게 고통을 피할 것인가, 어떻게 성공적으로 살 것인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께 배워야 할 것은 고난을 어떻게 견디어 내고, 그 고난 가운데 어떻게 쓰임을 받을 것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배우기를 기뻐하십시다. 그리하여 복음을 전하는 그릇으로 쓰임을 받는데 온전히 순종함으로 사람답게, 아름답게, 행복하게,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참된 영생의 주인공들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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