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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일부러 일삼은) 다섯 가지 색깔은 세상 사람들의 (본래 저절로 그러한) 눈을 멀게 하고, (일부러 일삼은) 다섯 가지 소리는 세상 사람들의 (본래 저절로 그러한) 귀를 먹게 하며, (일부러 일삼은) 다섯 가지 맛은 세상 사람들의 (본래 저절로 그러한) 입을 망가뜨린다.
五色, 令人目盲, 五音, 令人耳聾, 五味, 令人口爽.
상爽은 (본래 저절로 그러한 입의 공능功能을) 망가뜨린다는 말이다. (본래 저절로 그러한) 다섯 가지 색깔과 다섯 가지 소리와 다섯 가지 맛은 세상 사람들(의 본래 저절로 그러한 눈과 귀와 입의 공능)을 기르는 데 나아가는 바로서, 세상 사람들(의 본래 저절로 그러한 눈과 귀와 입의 공능)을 해치는 까닭이 되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일부러 일삼은 색깔과 소리와 맛을) 많아지게 하고, 쫓으며, 일삼고자 하게 되면, (그렇게 하기를) 멈출 줄 모르게 되고,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일부러 일삼은) 색깔을 기쁘게 여기게 되며, (따라서) 그 (눈이 본래 저절로 그러한 색깔대로) 참되게 보는 바(見; 공능)을 망가뜨리게 되고, (따라서 일부러 일삼은) 소리를 기쁘게 여기게 되며, (따라서) 그 (귀가 본래 저절로 그러한 소리대로) 참되게 듣는 바(聽; 공능)를 망가뜨리게 되고, (따라서 일부러 일삼은) 맛을 기쁘게 여기게 되며, (따라서) 그 (입이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맛대로) 참되게 맛보는 바(味; 공능)를 망가뜨리게 된다.
爽, 失也. 五色五音五味, 夲以養人, 非所以害人. 而人, 多循欲, 而不知節, 故悅色者, 失其正見, 悅音者, 失其正聽, 悅味者, 失其正味也.
(일부러 일삼아) 말달리며 사냥하는 일은 세상 사람들의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마음을 미친 듯이 날뛰게 한다.
馳騁田獵, 令人心發狂.
(중국 송宋나라 때) 동사정董思靖은 (『도덕진경집해道德眞經集解』 제12장 주註에서) 일컬었다.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마음을 미친 듯이 날뛰게 하는 바) 이것은 기氣이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아 말달리며 사냥하게 되면, 기氣가)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마음을 일부러 일삼는 바로 되돌아가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그 마음이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나아가는 바이다.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이것은 (그 마음이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뜻하는 바이다. 그러나 (일부러 일삼아) 말달리는 바에 이르게 되면,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마음이) 미친 듯이 날뛰게 된다. 이른바, 기氣로 하여금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마음을 일부러 일삼는 바로 되돌아가도록 하게 된다. 〔율곡栗谷이 설명한 “마음心”과 “(마음이) 뜻하는 바志”는 사단四端, 태극太極, 성性·명命, 자연自然·무위無爲, 도道·덕스러움德, 기수騎手에 비유될 수 있고, “기氣”는 칠정七情, 유위有爲, 말에 비유될 수 있다〕
董氏曰, 是, 氣也. 而反動其心. 愚按, 好獵者, 夲. 是, 志也. 而及乎馳騁, 發狂. 則反使氣動心.
얻기 어려운 재화는 세상 사람들의 (본래 저절로 그러한) 일삼음을 다치게 한다.
難得之貨, 令人行妨.
동사정董思靖은 (『도덕진경집해道德眞經集解』 제12장 주註에서) 일컬었다. “방妨은 해친다는 말이다. 따라서 (영인행방令人行妨은 세상 사람들의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마음에 따라) 일삼기를 잘하는 바가 다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된다(는 뜻이다).”
董氏曰, 妨, 謂傷害也. 於善行, 有所妨也.
따라서 성인은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인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 밖을 일삼는 바) 저것을 덜어내 없애게 하고, (그 안을 일삼는 바) 이것을 얻어서 (보태)게 한다.
是以聖人, 爲腹不爲目. 故去彼取此.
동사정董思靖은 (『도덕진경집해道德眞經集解』 제12장 주註에서) 일컬었다. “거去는 덜어내 없앤다는 말이다. 배腹는 (그) 안(內; 無爲)을 품고 가지는 바가 있는 바로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 有爲)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이다. 눈目은 (그) 밖(外; 有爲)을 살피고 쫓는 바로서, (그) 안을 (밖으로) 꾀어내는 바이다.” 그런데 (나는) 앞 (제3)장(의 주석)에서 일컬었다. “(도道는 유위有爲가) 텅 빈 바이자 (무위無爲의) 가운데 자리하는 바로서, (유위有爲가) 어렴풋하게 일삼는다.” 따라서 (거피취차去彼取此) 이것은 (성인은 도道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다음과 같이 세상 사람들을) 경계시킨다(는 뜻이다). “그대는 (그) 밖을 일삼아서는 안 되고, (그 안을 일삼는 바를) 열매 맺어야 한다.”
董氏曰, 去, 除去也. 腹者, 有容於內, 而無欲. 目者, 逐見於外, 而誘內. 蓋前章, 言虛中之玅用. 故此, 則戒其, 不可爲外邪, 所實也.
(따라서 성인은 일컫는다. 유위가) 어렴풋한 거울을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한 모습대로) 깨끗하게 씻어서 (한 점의) 티끌도 가지는 바가 없게 할 수 있는가?
滌除玄覽, 能無疵乎.
척제(滌除; 씻어서 없앤다)는 (비유컨대) 물건(에 묻은 티끌)을 (씻어서) 깨끗하게 한다는 말로서, (그 안과 밖의)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 有爲)를 (깨끗하게) 씻어낸다는 뜻이다. 현람(賢覽;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유위有爲가 어렴풋한 거울)은 (비유컨대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유위有爲가) 어렴풋하게 비추는 바(照; 거울)로서,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가 또렷하게) 살피는 이치(理; 太極·道·德·性·命)를 뜻한다. 이른바, 소리와 색깔과 냄새와 맛을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덜어내 없애게 되면, 마음이 (유위有爲를) 텅 비우게 되고, (마음이 뜻하는) 경계(境; 志)가 (유위有爲에 대해) 맑아지게 되며, 따라서 배움과 앎이 (무위無爲로) 나아가는 바를 더하게 되고, 앎과 일삼음이 (무위無爲가) 지극한 바를 더불어 하게 되며, 따라서 (그 안과 밖이) 한 점의 티끌(疵; 有爲)도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滌除者, 淨洗物欲也. 玄覽者, 照察玅理也. 蓋旣去聲色臭味之欲, 則心虛, 境淸, 而學識, 益進, 至於知行, 竝至, 則無一點之疵矣.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한 자신의 모습으로)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림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무위하게 할 수 있는가?
愛民治國, 能無爲乎.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한 자신의 모습대로) 자신을 닦는 바가 지극하게 되면,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밀어 올려지게 되고, 따라서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한 모습으로써,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리게 되며, 따라서 백성 또한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한 자신의 모습대로) 무위無爲하게 된다. 이른바, (백성이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한 자신의 모습과 더불어) 어우러지게 된다.
修己, 旣至, 則推以治人, 而無爲. 而化矣.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며 만물을 일삼)듯이, (백성을 일삼는 데 있어서, 유위가 조용한) 암컷의 모습을 일삼을 수 있는가?
天門開闔, 能爲雌乎.
개합(開闔; 열리고 닫힌다)은 (열림으로써 양陽의 모습이 되어 만물을) 일삼고, (닫힘으로써 음陰의 모습이 되어 유위有爲를) 조용하게 한다는 뜻이다. 자(雌; 암컷)은 음陰(의 모습)으로서 (유위有爲가) 조용한 모습을 뜻한다. (하늘의 문天門과 암컷雌) 이것은 (중국 송宋나라 때, 주돈이周敦頤가 쓴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따르면) “(유위有爲) 그것을 조용하게 함으로써, (본래 저절로 그러한) 인仁과 의義를 참되게 하는 바의 가운데 자리하고, (유위有爲를) 조용하게 하는 바를 주인으로 삼는” 바이다.
開闔是, 動靜之意. 雌是, 陰靜之意. 此, 所謂定之以中正仁義, 而主靜者也.
(무위로써) 천하를 밝게 하고 밝게 함으로써, (천하의 마음과 몸이 일부러 일삼아) 알아차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할 수 있는가?
明白四達, 能無知乎.
동사정董思靖은 (『도덕진경집해道德眞經集解』 제10장 주註에서) 일컬었다. “(무지無知) 이것은 ‘(마음이 유위有爲를) 조용하게 해야 하고, (몸이 무위無爲를) 알아차리게 해야 한다(는 말로서), (마음과 몸이 유위有爲의) 가장자리를 가지는 바가 없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기에 이 문장은 뜻한다. “천하는 (하늘과 땅에 의해) 일삼아진 바이다. (따라서 천하는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고, 일삼지 못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 이른바, (천하는 하늘과 땅이 일삼은 바로서, 아주 먼 옛날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부러 일삼아) 알아차리거나 일삼는 마음을 가지는 바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시경詩經』은 (「대아大雅·문왕지십文王之什·황의皇矣」에서) 일컬었다. ‘(따라서 백성은 몸도 일부러 일삼아) 알아차리지 않고, (마음도 일부러 일삼아) 알아차리지 않은 채, 임금이 제정한 법률을 (저절로 그러하게) 따르게 된다.’ 따라서 (위와 아래가 무지無知) 이것을 (더불어) 같이 하게 되면, 위와 아래가 하늘과 땅이 (무위無爲로써 만물을) 기르는 바로 흘러가고, (그것과 더불어) 뒤섞이며, (그것을) 이끄는 모습과 (더불어) 어우러지게 되고, 따라서 (유위有爲에) 머물지 않게 된다.” (따라서) 다음 문장은 (하늘과 땅이 무위無爲로써 만물을 기르는 모습) 그것을 (자세하게) 펼쳐서 일컫는다.
董氏曰, 此, 寂感, 無邊方也. 愚按, 此言. 於天下之, 事. 無所不知, 無所不能. 而未嘗有能知之心. 詩, 所謂不識不知, 順帝之則者也. 夫如是, 則上下, 與天地, 合流參贊育, 而不自居也. 下文, 乃申言之.
(이른바, 하늘과 땅은 만물을) 살아가게 하고 자라나게 하는데, 살아가게 하지만 (자신의 공功을 일부러 일삼아) 가지지 않고, (자라나는 바를) 일삼지만, (자신의 힘을 일부러 일삼아) 기대지 않는다. (이른바 하늘과 땅은 만물을 살아가게 하고) 자라나게 하지만, (유위를) 주재하는 마음을 가지는 바가 없다.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하늘과 땅은 만물을 살아가게 하지만, 그 (자신의) 공功을 (일부러 일삼아) 가지지 않는다. (하늘과 땅은 만물을 사계절에 맞게) 돌아가게 하고 일삼아지게 하며, 어우러지게 하고, 아우러지게 하지만, 그 (자신의) 힘을 (일부러 일삼아) 기대지 않는다. (이른바, 하늘과 땅은) 만물을 살아가게 하고(長; 生) 자라나게 하지만, (만물이 살아가고 자라나는 바를) 주재하는 마음을 가지는 바가 없다. (따라서) 성인은 (유위有爲가) 어렴풋한 덕스러움(德; 無爲)을 일삼는다. 이른바, (성인은) 하늘과 땅(이 만물을 일삼는 모습)을 (더불어) 같이 할 따름이다. (유위有爲가) 어렴풋한 덕스러움德이란 (무위無爲가) 지극하고, (무위無爲가) 참되며, (무위無爲가) 연못과 같이 깊고, (유위有爲가) 어슴푸레한 덕스러움(德; 無爲·命·道·自然·太極)이다.
天地, 生物而不有其功. 運用造化而不恃其力. 長畜羣生而無有主宰之心. 聖人, 之玄德. 亦同於天地而已. 玄德, 至誠淵微之德也.
여기까지가 제5장이다. 이 장은 제4장(의 내용)을 잇는다. 따라서 (이 장은) 시작했다. (일부러 일삼은 색깔과 소리와 맛과 같이) 사람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일삼는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먹게 하며, 입을 망가뜨리는) 공능功能에 대해 배우고 멈춰야 한다는 첫 문장으로써. (그리고 이 장은) 끝마쳤다. (만물을 살아가게 하고 자라나게 하는 데 있어서, 무위가) 가득 찬 하늘과 땅의 모습을 이끌고 뒤섞은 바(參; 문장으)로써. 이른바, 이 장 이후의 모든 장이 일컫는 바는 모두 이 장의 뜻을 벗어나지 않는다.
右第五章. 此, 承上章. 而始之, 以初學遏人欲之功. 終之, 以參贊天地之盛. 自此以後, 諸章, 所論, 皆不出此章之義.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