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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강씨 역사 바로잡기 시리즈 04
제1차 왕자(王子)의 난(亂)에 대한 고찰(考察)
글쓴이 : 강훈기
I. 들어가면서
1392년에 조선(朝鮮)을 개국하고 얼마 안 되어 1398년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에 대하여 학자들은 여러 견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정도전(鄭道傳)과 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 간의 대결에서 빚어진 난(亂)으로 보아 신권주의(臣權主義)와 왕권주의(王權主義) 세력 간의 권력 투쟁이었다고 정의합니다. 둘째는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의 왕자들 사이에 벌어진 권력 다툼이었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면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을 태조 임금이 왕세자(王世子) 책봉(冊封)을 잘못한 탓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도전 일파가 요동 정벌계획(遼東征伐計劃)을 추진하면서 무리한 진도 훈련(陣圖訓練)과 말썽 많은 사병 혁파(私兵革罷)를 시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조선왕조를 개국하고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제1차 왕자의 난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과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검토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II. 태조 임금의 왕세자 책봉은 정말로 잘못되었나?
태조 임금이 신덕왕후의 소생으로 여덟째 왕자인 의안군(宜安君) 이방석(李芳碩)을 왕세자로 책봉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지적합니다. 만약에 태조 임금이 처음부터 둘째인 영안군(永安君) 이방과(李芳果)를 왕세자로 세웠으면 정안군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지는 못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첫째 아들이 은둔해버린 상황에서 실질적인 장자(長子) 역할을 해온 둘째 영안군을 왕세자로 세웠어야 옳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영안군은 둘째이기 때문에 다섯째인 정안군보다 적장자 원칙에서 우선합니다. 그리고 조선 개국과정에서 영안군이 세운 공로 역시 정안군 못지않아 감히 쿠데타를 일으키지는 못했을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이 주장은 상당히 일리(一理)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정안군이 보여준 실제의 행적은 그 논리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정안군이 쿠데타를 성공시킨 후에 영안군을 왕세자로 추천해 처음은 억지라도 적장자 원칙을 따르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안군이 쿠데타의 취약한 명분(名分)과 정통성(正統性)을 세우기 위한 궁여지책(窮餘之策)이었지, 정말로 사심(私心)을 버린 양보는 아니었습니다.
정안군이 일으킨 쿠데타에 엄청난 충격과 커다란 상심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태조 임금은 환란을 당한 지 열흘도 못 되어 왕세자 영안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는 옥좌를 떠났습니다. 이는 정안군이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간에, 태조 임금이 옥좌를 떠남으로써, 이른바 그가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바로잡는다고 내세운 명분은 관철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정안군 역시 그가 일으킨 쿠데타의 책임을 지고 권력의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정안군은 정종(定宗) 임금을 허수아비로 세워 놓고 계속해서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형인 회안군(懷安君) 이방간(李芳幹)과 왕세자의 자리를 놓고 치열한 쟁탈전까지 치렀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정안군 스스로가 형인 정종 임금의 양아들로 입양하는, 정상적인 법도에 어긋난 형식을 취해 왕세자 자리를 차지했고, 마침내는 왕위까지 물려받았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정안군이 왕권에 대한 탐욕이 얼마나 극단적이었는지를 여실히 입증해 준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부왕(父王)을 상대로 그처럼 무도한 행위를 절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안군이 아닌 다른 누가 왕세자가 되었다 해도 같은 결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조 임금이 처음부터 영안군을 왕세자로 세웠다면 제1차 왕자의 난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태조 임금이 순전히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말만 듣고 자격도 없는 의안군 이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승자인 정안군이 왕이 되어 쿠데타의 명분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태조실록(太祖實錄)>을 왜곡(歪曲)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확인시켜주는 좋은 사례는 태조 임금이 영안군에게 내린 왕세자 책봉 교지(敎旨)에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도전 등이 반역을 도모하여 국가의 근본을 요란(搖亂)시켰다는 등 진실과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임금께서 마침내 영안군(永安君)을 책명(冊命)하여 세자로 삼고 교지(敎旨)를 내리었다. “적자(嫡子)를 세우되 장자(長子)로 하는 것은 만세의 상도이며, 종자(宗子)는 성(城)과 같으니 과인(寡人)의 기대(望)이다. 다만 그대의 아버지인 내가 일찍이 나라를 세우고 난 후에 장자(長子)를 버리고 유자(幼子)를 세워 이에 방석(芳碩)으로써 세자로 삼았으니, 이 일은 다만 내가 사랑에 빠져 의리에 밝지 못한 허물일 뿐만 아니라, 정도전, 남은 등도 그 책임을 사피(辭避: 거절하여 피함)할 수가 없을 것이다. <중략> 요전에 정도전, 남은, 심효생, 장지화 등이 몰래 반역(제1차 왕자의 난)을 도모하여 국가의 근본을 요란시켰는데, 다행히 천지와 종사(宗社)의 도움에 힘입어 죄인이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하고 왕실(王室)이 다시 편안하게 되었다. 방석(芳碩)은 화(禍)의 근본이니 국도(國都)에 남겨 둘 수가 없으므로 동쪽 변방으로 내쫓게 하였다. 내가 이미 전일의 과실을 뉘우치고, 또 백관(百官)들의 청으로 인하여 이에 너를 세워 왕세자로 삼으니, 그 덕을 능히 밝혀서 너를 낳은 분에게 욕되게 함이 없도록 하고, 그 마음을 다하여 우리의 사직(社稷)을 진무(鎭撫)하라.”] <태조실록, 태조 7년(1398년) 8월 26일 기사>
이 교지는 병중에 있던 태조 임금이 졸지에 제압당한 상황에서 정안군의 뜻대로 만든 문서에 치욕과 분노를 무릅쓰고 압서(押署)한 것입니다. 이처럼 왜곡된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 탓에 판단이 빗나갔습니다. 태조 임금이 교지에 전일의 과실을 뉘우친다고 했으니 진짜 잘못한 줄 알고 신덕왕후의 말만 들어서 비극을 자초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비극을 초래한 사건의 시초는 태조 임금의 첫째 부인 한씨(韓氏)의 사망에서부터 찾아야 합니다. 만약에 한씨 부인이 조선의 개국 초에 생존해 있었다면 이런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연히 한씨 부인이 중전(中殿)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고, 한씨 소생의 적장자를 왕세자로 세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씨 부인이 지병인 위장병으로 개국 전에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둘째 부인 강씨(康氏)가 현비(顯妃)로 책봉되어 중전의 자리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권 국가에서 왕위계승 원칙은 첫째는 성리학(性理學)의 종법(宗法) 체제를 따라 국모(國母)인 중전(中殿)의 적장자를 왕세자로 책봉하는 것이고, 둘째는 왕이 될 사람은 덕(德)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원칙을 따르면 당연히 중전인 신덕왕후의 소생으로 왕세자를 책봉해야 마땅합니다. 신덕왕후가 첫째 아들인 이방번을 밀었지만, 그런데도 태조 임금은 개국공신들의 뜻을 좇아 덕(德)이 있는 둘째인 이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했습니다.
<태조실록>에는 한씨 부인의 절비(節妃) 추존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1393년 9월 18일에 세운 태조의 부친, 환조의 정릉비문에 한씨 부인을 절비(節妃)라 증시(贈諡)했다는 기록과, 정종(定宗) 임금이 즉위하고 나서 1398년 11월 11일에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시(追諡)한 기록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1392년 8월 7일에 현비(顯妃)로 책봉되고, 1396년에 신덕왕후로 시호를 받은 강씨 부인보다 추존이 늦었습니다. 그런데도 조선왕조실록에는 한씨가 수비로 강씨가 계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현비(顯妃) 강씨(康氏)가 수비(首妃)였고, 절비(節妃) 한씨(韓氏)는 차비(次妃)였습니다. 또한, 강씨 부인은 현비로 책봉되어 명(明)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로부터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을 하사받아 머리에 쓴 중전이었지만, 한씨 부인은 절비로 추존만 되었을 뿐 왕비의 관을 쓰지 못했습니다.
[태조 3년(1394년)에 명나라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明太祖))가 면복 구장(冕服九章)과 규옥패(圭玉佩)를 내렸으며, 왕비(신덕왕후)에게는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과 하피(霞帔) 명부(命婦)의 예복(禮服))과 금추(金墜: 금목걸이)를 내렸다.] <임하필기 제15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참고: 한씨 부인의 절비 추존 기록이 <태조실록>에 빠진 것으로 보아 강씨 부인의 현비 책봉보다 늦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이 아닌 다른 고문집에는 절비의 추존 일을 개국 초라고만 기록했는데 후세의 기록자들이 정확한 날짜를 몰라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1397년(태조 6년) 3월 8일에 권근이 가지고 온 명 태조의 칙위조서(勅慰詔書)에도 분명히 신덕왕후가 조선의 수비(首妃)이고 국모(國母)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자(使者)가 이르러 왕의 수비(首妃) 강씨(康氏)가 죽었다는 말을 아뢰니, 심히 슬펐노라. 왕은 반드시 아침저녁으로 권련(眷戀)하게 생각하여 스스로 마지못할 것이다. 무슨 까닭일까? 옛날 집을 변화시켜 나라를 만들 때에 근로하여 내조(內助)하고, 삼한(三韓)에 국모(國母)로 있던 이가 강씨(康氏)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명 태조 홍무제의 칙위조서 중에서>
그러므로 태조 임금이 신덕왕후 소생인 의안군 이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한 것이 적장자 원칙을 지키지 않아 잘못했다는 실록의 기록은 왜곡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정안군이 내세운 적장자 원칙은 성리학의 종법 체제를 따른 정확한 왕위계승 원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왕세자 책봉 원칙에는 적장자 원칙뿐만 아니라 덕(德)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간과한 점도 함께 지적받아야 마땅합니다.
III. 요동 정벌 계획 추진과 진도훈련이 끼친 영향은 무엇이었나?
조선 개국 초에 요동 정벌(遼東征伐)을 추진했던 계획을 두고 학자들은 여러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견해를 살펴보면, ① 정도전 일파가 사병 혁파를 위한 구실로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 ②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추진한 것은 1396(태조 5년)년에 터진 표전문 사건 탓이다. ③ 태조 임금이 개국 초부터 정도전 등을 앞세워 요동 정벌계획을 추진했는데, 조준의 반대로 보류되었다가, 대명 관계가 악화하자 1398년(태조 7년)에 다시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 견해가 도출된 원인은 정도전과 정치적 대립 관계에 있던 <태조실록> 편찬세력이 곡필한 결과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록에는 요동 정벌계획 추진과 관계된 모든 책임을 정도전 일파에게 전가했습니다. 그 결과 학자들이 요동 정벌 계획을 이해하는데 혼란을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요동 정벌계획은 태조 초부터 태조의 의지에 따라 정도전을 앞세워 추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태조실록> 편찬자들은 정도전과는 정치적으로 대립되는 세력이었으므로 요동 정벌 계획과 관계되는 모든 책임을 정도전에게 전가시킨 곡필의 결과로 이 문제에 대한 이해에 혼란을 초래케 한 것으로 보인다.] <신편 한국사,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국사편찬위원회>
태조 임금은 무장 출신답게 즉위 다음 해인 1393년(태조 2년)부터 정도전을 앞세워 군제개혁, 군사훈련, 병기제조 등 군비 강화를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진도(陣圖) 훈련을 통한 인재육성에 직접 간여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실록에 보면 진도훈련(陣圖訓鍊)을 중단없이 계속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나아가 1395년(태조 4년) 4월에는 삼군부(三軍府)에 명하여 정도전이 지어 올린 <수수도(蒐狩圖)>와 <진도(陳圖)>를 간행하여 전국에 보급까지 하였습니다.
[삼군부(三軍府)에 명령을 내려서 <수수도(蒐狩圖)>와 <진도(陣圖)>를 간행하게 하였다.] <태조실록, 태조 4년 1395년 4월 1일 기사>
그런데 1396년(태조 5년) 6월에 표전문(表箋文) 사건이 터졌습니다. 명(明)나라 태조(太祖)가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에 적힌 일부 단어가 모욕적이고 불손하다는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러면서 일방적으로 정도전을 작성자로 지목하여 압송하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 이 표전문은 정탁(鄭擢)이 짓고 정총(鄭摠)과 권근(權近)이 고쳤습니다. 정도전이 표전문을 지은 적도 없고 고친 적도 없다고 변명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명 태조는 조선이 1393년(태조 2년)부터 군비와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이 요동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고, 그 핵심인물로 정도전을 지목했습니다. 그래서 정도전을 명나라에 볼모로 잡아 두기 위해 표전문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처럼 명 태조가 조선의 요동 공격을 우려했다는 사실은 요왕(遼王) 무정후(武定侯) 곽영(郭英)에게 보낸 문서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들은 국도(國都)로부터 압록강에 이르기까지의 요충지에 비축하는 군량이 역마다 1, 2만 석 또는 7, 8만 석, 10여만 석에 이르고, 사람을 보내 동녕부(東寧府)의 여진을 유인하여 넘어가고 있으니 반드시 깊은 음모가 있을 것이다 <중략> 지금 요동은 군량이 모자라 군사들이 굶주리고 있는 바, 즉시 사령창(沙嶺倉)의 식량을 내어 그들을 진제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고려로 하여금 유인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 것이니 좋은 계책이 못된다. 만일 고려가 20만 군을 내어 쳐들어 오면 우리 군대가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명 태조실록, 권 238, 홍무(洪武) 28년(1395년) 4월 신미>
명의 이러한 사정과는 정반대로 조선에서는 이 사건을 정치적인 쟁점으로 삼아 하륜(河崙) 등이 나서서 정도전을 명에 보내자고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통사 양첨식(楊添植) 같은 사람은 조선에 와 있던 명나라 사신들에게 정도전을 반드시 압송해 가도록 적극적인 공작을 펼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태조 임금은 결코 명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명 태조는 조선 사신을 접견할 때마다 정도전이 조선의 화근이라며 그를 보내지 않는 태조 임금을 비난하고 위협했습니다.
[지금 조선 국왕 이성계가 중용하고 있는 정도전이라는 자는 왕에게 무슨 도움을 준다는 말인가? 왕이 만약 깨닫지 못한다면 이 사람이 반드시 조선의 화근이 될 것이다. 이성계는 정도전이란 자를 잘 모른다. 그를 중용하여 무엇한다는 말인가? 네가 돌아가거든 왕에게 분규를 일으키지 말도록 일러라. 소인의 말을 듣고 함부로 도발하다가는 앞으로 모든 것을 망치게 될 것이다.] <태조실록, 태조 6년 1397년 4월 17일>
이처럼 명 태조는 조선이 함부로 도발하면 모든 것을 망치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지만 실제로 그런 준비는 없었습니다. 단지 조선의 요동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을 뿐입니다.
1397년(태조 6년) 6월 14일의 실록 기사는 진도훈련을 지속적으로 실시한 사실을 확인해줍니다. 이때 정도전 등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공격할 것을 태조 임금에게 주청했습니다.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정도전(鄭道傳)이 일찍이 <오진도(五陣圖)>와 <수수도(蒐狩圖)>를 만들어 바치니, 임금이 좋게 여기어 명하여 훈도관(訓導官)을 두어 가르치고, 각 절제사(節制使), 군관(軍官), 서반 각품 성중 애마(成衆愛馬)로 하여금 <진도(陣圖)>를 강습하고, 또 잘 아는 사람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가서 가르치게 하였다. 당시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심효생(沈孝生) 등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에 나가기를 꾀하여 임금께 의논을 드렸는데, 좌정승 조준(趙浚)의 집에 가서 유시(諭示)하였다. 준(浚)이 병으로 앓고 있다가 즉시 가마를 타고 대궐에 나와 극력 불가함을 아뢰었다. <중략> 임금은 이를 듣고 기뻐하였다. 남은이 분연(憤然)히 아뢰었다. "두 정승(政丞)은 몇 말 몇 되를 출납하는 데는 가하지마는 큰일은 더불어 도모할 수 없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은(誾) 등이 준(浚)과 틈이 생겨 뒤에 은(誾)이 준(浚)을 임금에게 무함하니, 임금이 노하여 질책(叱責)하였다.] <태조실록 11권, 1397년 6월 14일 기사>
여하튼 조준(趙浚)의 불가론으로 요동 정벌계획은 보류되었지만 이후에도 진도훈련은 중단없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1397년 11월 말에 조선 조정에 날아든 비보(悲報)는 표전문 문제로 명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정총, 김약항(金若恒), 노인도(盧仁度)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지난날 황제를 하직하는 자리에서 권근은 황제가 내려준 옷을 입었지만, 정총은 신덕왕후 상중(喪中)이라 흰옷을 입었습니다. 황제가 이를 보고 화를 냈고, 그 일로 권근(權近)만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정총, 김약항, 노인도가 다시 억류당했는데, 끝내는 이들이 처형당한 것입니다. 그간 명의 조선에 대한 횡포와 위압으로 양국 관계가 몹시 불편했는데 이 사건으로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보류되었던 요동 정벌계획이 1년 후에 다시 추진되었습니다. 정도전 일파의 주청도 있었지만, 당시 명나라의 가중되는 위압이 오히려 조선을 반발하게 했습니다.
요동 정벌계획이 다시 추진되면서, 태조 임금은 정도전과 이지란(李之蘭)을 동북면에 보내 삭방도(朔方道)를 정비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두 사람이 그 일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오자 1398년(태조 7년) 3월 20일에 태조 임금이 그들을 치하했는데, 같은 자리에 배석했던 남은(南誾)이 사병 혁파(私兵革罷)의 필요성을 임금에게 진언했습니다.
[동북면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 정도전(鄭道傳)과 도병마사(都兵馬使) 이지란(李之蘭) 등이 복명(復命)하니 각각 안마(鞍馬)를 주고, 인하여 잔치를 내려주고 임금이 도전에게 일렀다. “경의 공(功)이 윤관(尹瓘)보다 낫다. 윤관은 다만 구성(九城)을 쌓고 비(碑)를 세운 것뿐인데, 경은 주군(州郡)과 참로(站路)를 구획(區劃)하고 관리의 명분(名分)까지 제도를 정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삭방도(朔方道)를 다른 도(道)와 다를 바가 없이 하였으니 공이 작지 않다.” 또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에게 일렀다. “충성된 말이 귀에는 거슬리나 행실에는 이로우니, 경들은 마땅히 말하여 숨기지 말라.” <중략> 은(誾)이 진언(進言)하였다. “상감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일찍이 군사를 장악(掌握)하고 있지 않았던들 어떻게 오늘날이 있사오며, 신 같은 자도 또한 보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개국하는 처음을 당하여 여러 공신(功臣)으로 하여금 군사를 맡게 한 것은 가하였지마는, 지금 즉위(卽位)하신 지가 이미 오래니, 마땅히 여러 절제사(節制使)를 혁파하고 합하여 관군(官軍)을 만들면 거의 만전(萬全)할 것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누가 남은(南誾)을 무실(無實)하다 하는가? 이 말이 진실로 시종(始終)의 경계이라.”] <태조실록, 태조7년, 1398 년 3월 20일 기사>
그러니까 태조 임금이 무명시절 사병(私兵)인 가별치를 가졌던 덕택에 오늘날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임금이 즉위한지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개국 초에 절제사(節制使) 등에게 주었던 시위패(侍衛牌)의 지휘권을 회수하여 관군(官軍)에 귀속시키자는 건의였습니다. 고려 말부터 시행하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지휘권을 가진 절제사가 자신의 시위패를 서울로 호출하면 의무적으로 올라와야 했습니다. 절제사는 비상시에 시위패를 중앙으로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실제로 사병처럼 부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은이 이를 혁파하자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병 혁파를 곧바로 추진할 경우 엄청난 반발이 예상됐습니다. 그래서 정도전은 진도훈련을 통해 자연스럽게 시위패의 지휘권을 관군으로 흡수하는 방안을 찾은 것으로 보입니다. 진도훈련의 명분을 요동 정벌추진에 두어 군사력 증강을 꾀하면서 장차 화근이 될 수 있는 사병을 혁파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렸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런 와중에 1398년 8월 9일에는 진도훈련에 힘쓰지 않은 여러 왕자와 종친, 그리고 개국공신 들을 처벌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관련자들의 신분과 공로를 참작하여 직접적인 형벌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아랫사람에게 태형(笞刑) 또는 장형(杖刑) 등의 형벌(刑罰)을 가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해 당사자인 왕자 및 종친과 공신들의 불만이 커졌습니다.
[대사헌 성석용(成石瑢) 등이 상언하였다. "전하(殿下)께서 무신(武臣)들에게 <진도(陣圖)>를 강습하도록 명령한 지가 몇 해가 되었는데도, 절제사(節制使) 이하의 대소 원장(大小員將)들이 스스로 강습하지 아니하고 그 직책을 게을리하오니, 그 양부(兩府)의 파직(罷職)된 전함(前銜)은 직첩(職牒)을 관품(官品)에 따라 수취(收取)하되 1등을 체강(遞降)시킬 것이며, 5품 이하의 관원은 태형(笞刑)을 집행하여 뒷사람을 감계(鑑戒)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중략> “그 당해 휘하(麾下) 사람은 모두 각기 태형(笞刑) 50대씩을 치고, 이무(李茂)는 관직을 파면시킬 것이며, 외방(外方) 여러 진(鎭)의 절제사(節制使)로서 <진도(陣圖)>를 익히지 않는 사람은 모두 곤장을 치게 하라." 처음에 정도전과 남은이 임금을 날마다 뵈옵고 요동(遼東)을 공격하기를 권고한 까닭으로 <진도(陣圖)>를 익히게 한 것이 이같이 급하게 하였다] <태조실록, 태조 7년, 1398년 8월 9일 기사>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불만세력은 표전문 사건을 빌미로 요동 정벌계획의 주동자인 정도전을 명나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 후 요동 정벌계획이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었던 이유는 각 세력 간의 이해득실 때문이었습니다. 불만세력은 정도전 측이 요동 정벌계획을 핑계로 진도훈련을 무리하게 다그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병을 혁파하여 자신들의 병권을 빼앗으려는 음모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요동 공격, 진도훈련, 사병 혁파 문제로 정국이 불안한 가운데 태조 임금이 병환으로 드러누운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거사를 준비하던 정안군 측에 호재로 작용했습니다. 결국 태조 임금은 즉위 다음 해부터 준비해오던 요동을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사병 혁파도 단행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정안군이 태조 임금의 병환과 정국이 불안한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IV. 정도전 일파는 과연 여러 왕자를 제거하려고 모의했나?
<태조실록>에는 정도전 등이 여러 왕자를 제거하기 위해 모의를 했고, 1398년 8월 26일(기사일)에 거사를 계획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태조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지만, 정도전 등이 환자(宦者) 김사행(金師幸)을 사주(使嗾)하여 비밀히 중국의 여러 예(例)를 좇아 여러 왕자를 각도(各道)에 나누어 보내기를 주청하였다고 했습니다.
[정도전과 남은 등은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자 하여 어린 서자(庶子)를 꼭 세자(世子)로 세우려고 하였다. 심효생은 외롭고 한미(寒微)하면 제어하기가 쉽다고 생각하여, 그 딸을 부덕(婦德)이 있다고 칭찬하여 세자 이방석(李芳碩)의 빈(嬪)으로 삼게 하고, 세자의 동모형(同母兄)인 방번(芳蕃)과 자부(姉夫)인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등과 같이 모의(謀議)하여 자기편 당(黨)을 많이 만들고는, 장차 여러 왕자를 제거하고자 몰래 환자(宦者) 김사행(金師幸)을 사주(使嗾)하여 비밀히 중국의 여러 황자 (皇子)들을 왕으로 봉한 예(例)에 따라 여러 왕자를 각도(各道)에 나누어 보내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임금이 정안군에게 넌지시 타일렀다. “외간(外間)의 의논을 너희들이 알지 않아서는 안되니, 마땅히 여러 형에게 타일러 이를 경계하고 조심해야 될 것이다.”] <태조실록, 제7년 1398년 8월 26일 기사>
이 기사는 심하게 왜곡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태조 임금이 정도전 등에게 왕자들을 제거하라고 지시했을 리가 없습니다. 또한, 정도전 등이 태조 임금이 멀쩡히 살아있는데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모의할 이유도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왕자들이 가지고 있는 사병의 지휘권을 회수하기 위해 시도했던 일을 심하게 과장해 곡필한 것입니다. 그리고 태조 임금이 정안군에게 조심하라고 한 것은 사병 혁파는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는 필요하다. 그래서 앞으로 너희들의 병권을 회수하려고 하니까 저항하지 말고 순순히 응하라는 뜻으로 타일렀을 것입니다.
이 일로 정안군은 자신이 곧 무장해제되리라는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또한, 이를 감지한 하륜 역시 정안군에게 상을 엎지르는 무례한 짓을 하면서까지 일이 위태하게 되었다고 했을 것입니다.
[과거에 하륜(河崙)이 충청도 관찰사(1398년 7월 7일)가 되어 갈 때, 그 당시 정안군에게 하륜이 아뢰기를, “왕자의 일이 위태합니다. 상을 엎지른 것은 장차 경복(傾覆)될 환란이 있겠기에 미리 고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침실로 끌고 들어가서 계책을 물으니, 하륜이 말하기를, “신은 왕명을 받았으므로 오래 머무를 수 없으나, 안산 군수(安山郡守) 이숙번(李叔蕃)이 정릉(貞陵: 신덕왕후의 무덤)을 이장할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에 도착하였으니, 이 사람에게 대사(大事)를 맡길 수 있습니다. 신 또한 진천(鎭川)에 가서 기다릴 것이니, 일이 만약 이루어지면 신을 급히 부르소서.” 하고, 하륜이 갔다.] <용재총화(慵齋叢話), 연려실기술 제1권 태조조고사본말>
하륜이 위태하다고 한 것은 바로 사병 혁파로 정안군이 무장해제를 당할 위기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에 하륜이 내세운 계책은 안산군수 이숙번과 그가 거사 일에 내응(內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하륜이 이미 이숙번과 모의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숙번은 정릉 이장문제로 서울에 올라와 있어 거사 당일 낮에 신속히 내응하였고, 하륜은 충북 진천에서 군사를 이끌고 올라와 거사 당일 밤에 도착했습니다. 서울까지 2~3일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거사 일에 도착한 것으로 보아 정안군이 거사 개시 3~4일 전에 비밀히 통보해 주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사전 모의 사실을 분명히 해주는 더욱더 구체적인 내용이 다음의 실록 기사에 있습니다.
[하륜이 일찍이 임금(태종)의 잠저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묻자 하륜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쳐서 이 무리를 없애는 것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하륜이 다시 "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태조)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쩌겠습니까?"] <태종실록, 태종 16년, 1416년 11월 6일, 하륜의 졸기>
하륜이 정안군에게 제시한 계책은 선수를 쳐서 정도전 등을 없애는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그 방법은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정안군이 태조 임금의 군사를 이용하여 정도전 일당을 제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더욱 기막힌 점은 비록 태조 임금이 놀라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륜의 계책은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종묘사직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태조 임금의 군사를 이용해 무력으로 권력을 빼앗기 위해 거사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사 일에 실제로 벌어진 일들이 여기에서 사전 모의한 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선수를 쳐서 정적들을 살해했습니다. 둘째, 태조 임금의 군사를 하륜과 이숙번이 이용하여 쿠데타에 성공했습니다. 셋째, 태조 임금과 왕세자가 있는 경복궁의 금군(禁軍)을 지휘하던 조영무와 조온을 포섭했습니다. 거사 일에 궁 안에서 아무런 반격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조온을 비롯한 동조자들의 내응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채 30명 남짓한 소수의 병력으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신(神)이 도와줘서 성공했다고 실록을 왜곡했습니다.
태조 임금은 자신을 배반하고 정안군에게 돌아섰던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도 오죽하면 조영무, 조온, 이무를 찍어서 처벌하라고 몇 번이나 정안군에게 요구했겠습니까?
[동북면 도순문사 영흥 윤(東北面都巡問使 永興 尹) 이무(李茂)를 강릉부(江陵府)에, 서북면 도순문사 평양 윤(西北面都巡問使 平壤尹) 조영무(趙英茂)를 곡산부(谷山府)에 귀양 보냈다. 이날 세자(정안군)가 덕수궁에 조알하니, 태상왕(태조)이 다시 세자에게 일렀다. "조온(趙溫)은 자부(姊夫)의 아들이고, 조영무(趙英茂)는 번상(番上)하는 군사인데, 내가 그 미천한 것을 불쌍히 여겨 혹은 의관(衣冠)도 주고, 혹은 관작도 제수하여, 입상(入相) 출장(出將)할 때에 따라다니지 않은 적이 없어 드디어 개국 공신이 되고, 지위가 경(卿)·상(相)에 이르렀으니, 모두 나의 덕이다. 조온과 조영무가 모두 금병(禁兵)을 맡아 내전(內殿)에 숙직하다가, 무인년에 과인(寡人)이 병으로 편치 못한 때를 당하여, 옛날의 애호(愛護)한 은혜는 돌아보지 아니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내응하였으니, 배은 망덕한 것이 비할 데가 없다. 이무(李茂)는 비록 조온과 조영무와 비할 것은 아니나, 또한 과인에 의지하여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참예하였다. 이무는 본래 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과 좋아하며 항상 서로 모의를 하여 너희들을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무인년 변(變)에도 왕래하면서 반간(反間) 노릇을 행하며 중립을 지키면서 변을 관망하여 이기는 자를 따르려 하였다. 마침 너희들이 이겼기 때문에 와서 붙은 것이니, 이는 변(變)을 관망하는 불충한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모두 정사 공신(定社功臣)의 열(列)에 두었으니, 만일 급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무인년의 과인을 배반하던 일을 본받지 않겠는가! 너희들이 만일 나를 아비라고 한다면, 이 세 사람을 죄주어서 사직(社稷)의 장구한 계책을 도모하고, 후세의 불충한 무리를 경계하도록 하라." 세자가 돌아와 임금(정종 이방과)에게 고하니, 임금이 부득이 귀양 보냈다.] <정종실록 5권, 정종 2년 7월 2일 을축 8번째기사 1400년 명 건문(建文) 2년>
나아가 정안군이 사전 모의한 사실을 알려주는 기사를 태조실록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보다 먼저 정안군은 비밀히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 이숙번(李叔蕃)에게 일렀었다. "간악한 무리들은 평상시에는 진실로 의심이 없지마는, 임금이 병환이 나심을 기다려 반드시 변고를 낼 것이니, 내가 만약 그대를 부르거든 마땅히 빨리 와야만 될 것이다."] <태조실록 제7년 1398년 8월 26일 기사>
따라서 제1차 왕자의 난은 정도전 측이 여러 왕자를 제거하려 모의한 것이 아니라, 정안군이, 하륜의 계책처럼, 태조 임금이 병환 중임을 틈타 선수를 쳐서 정적들을 제거한 사건이었습니다.
V. 정안군과 여러 왕자는 정말 사병을 혁파했는가?
다음의 실록 기사를 보면 정안군은 자신의 사병을 없애고 무기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안군만은 10여 일이 되었는데도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정안군이 처음에 군사를 폐하고 영중(營中)의 군기(軍器)를 모두 불에 태워버렸는데, 이때 와서 부인이 몰래 병장기(兵仗器)를 준비하여 변고에 대응(對應)할 계책을 하였다.] <태조실록, 제7년 1398년 8월 26일 기사>
[이때 여러 왕자가 거느린 시위패(侍衛牌)를 폐하게 한 것이 이미 10여 일이 되었는데, 다만 방번(芳蕃)만은 군사를 거느림이 그전과 같았다.] <태조실록 제7년 8월 26일 기사>
그러나 사병 혁파는 분명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음의 실록 기사가 확인해 줍니다.
[도전 등이 또 산기상시(散騎常侍) 변중량(卞仲良)을 사주(使嗾)하여 소(疎)를 올려 여러 왕자의 병권(兵權)을 빼앗기를 청함이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태조실록 제7년 8월 26일 기사>
같은 날의 실록 기사인데도 그 내용이 아주 다릅니다. 처음 기사는 정안군이 거사 전에 군사를 없애고 무기를 모두 불태웠습니다. 다음 기사는 여러 왕자도 시위패를 없앤 지가 이미 10여 일이 지났는데도 무안군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은 변중량이 여러 차례 소를 올려 왕자들의 병권을 빼앗기를 주청했으나 태조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위의 두 기사는 분명히 틀렸고, 마지막 기사는 맞습니다. 그 이유는 훗날 정안군이 왕세자가 되어 가진 서연(書筵)에서 진실을 실토한 기록 때문입니다. 1400년(정종 2년) 4월 6일에 왕세자 정안군이 사병을 혁파하고 난 후의 일입니다.
[세자(정안군)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읽다가 좌보덕(左輔德) 서유(徐愈)와 더불어 병권을 잡는 폐단을 논하였다. 당나라 현종(玄宗), 숙종(肅宗)의 일에 이르러 탄식하였다. "숙종이 이보국(李輔國)을 두려워한 것은, 다만 이보국이 병권을 잡았었기 때문이었다. 병권이 흩어져 있게 할 수 없는 것이 감계(鑑戒)가 이와 같다. 또 우리 집 일로 말하더라도 태상왕(태조)께서 병권을 잡았기 때문에, 고려(高麗)의 말년을 당하여 능히 화가위국(化家爲國) 할 수 있었던 것이고, 무인년 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의 난에 이르러서도 우리 형제가 만일 군사를 가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사기(事機)에 응하여 변을 제어할 수 있었겠는가? 박포(朴苞)가 회안군(懷安君)을 꾄 것도 또한 병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하 생략> "] <정종실록, 정종 2년 1400년 6월 20일 기사>
이처럼 여러 왕자는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결코 사병 혁파를 하지 않았습니다. 쿠데타의 명분과 정통성을 세운다고 곡필할 곳을 찾아 여기저기 고치다 보니 이런 실수가 나왔습니다.
VI. 정안군이 거사를 모의한 것은 사실인가?
정안군은 왕세자 책봉에서 밀려나자 왕권을 뺏기 위해 준비하면서 기회를 노렸습니다. 지략과 속임수가 뛰어났던 하륜을 만나 그의 음모가 가닥을 잡았고, 이숙번, 조영무, 조온, 이화, 이무, 박포, 이애 등을 끌어들여 빈틈없이 거사를 준비해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태조 임금이 병환 중임을 틈타 거사 일을 1398년 8월 26일(己巳日)로 정하고 하륜과 이숙번에게 통지했습니다. 또한 궁궐에는 조영무, 조온에게 알리고, 이무, 박포, 이애를 통하여 정도전 등의 움직임을 파악했습니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과 판중추(判中樞) 이근(李懃), 전 참찬(參贊) 이무(李茂), 흥성군(興城君) 장지화(張至和), 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 등이 임금의 병을 성문(省問)한다고 핑계하고는, 밤낮으로 송현(松峴)에 있는 남은의 첩의 집에 모여서 서로 비밀히 모의하여, 이방석, 이제와 친군위 도진무(親軍衛都鎭撫) 박위(朴葳), 좌부승지(左副承旨) 노석주(盧石柱), 우부승지(右副承旨) 변중량(卞仲良)으로 하여금 대궐 안에 있으면서 임금의 병이 위독(危篤)하다고 일컬어 여러 왕자를 급히 불러들이고는, 왕자들이 이르면 내노(內奴)와 갑사(甲士)로써 공격하고, 정도전과 남은 등은 밖에서 응하기로 하고서 기사일에 일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 <태조실록 제7년 1398년 8월 26일 기사>
정도전 등이 여러 왕자를 제거하기 위해 밤낮으로 모의했다는 위의 기사는 완전히 왜곡된 것입니다. 정도전 등이 정말로 여러 왕자를 제거하려 했다면, 그들은 거사 준비를 당연히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안군이 병력을 인솔하여 남은의 첩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밤이 이경(二更)인데, 송현(松峴)을 지나다가 숙번이 말을 달려 고하였다. "이것이 소동(小洞)이니 곧 남은 첩의 집입니다." 정안군이 말을 멈추고 먼저 보졸(步卒)과 소근(小斤) 등 10인으로 하여금 그 집을 포위하게 하니, 안장 갖춘 말 두서너 필이 그 문밖에 있고, 노복(奴僕)은 모두 잠들었는데, 정도전과 남은 등은 등불을 밝히고 모여 앉아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태조실록 제7년 8월 26일 기사>
이처럼 정도전 등은 거사 일 저녁에 이미 이경(밤 9시~밤 11시)이 되었는데도 아무런 준비 없이 모여 앉아 담소하고 있었습니다. 정안군의 가노(家奴)들이 공격하자 그들은 졸지에 살해당했고, 도망가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이 상황은 그들이 거사를 꾸미지 않았다는 것을 잘 입증해줍니다.
나아가 정안군은 첩보활동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이를 잘 이용했습니다. 그가 거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보수집을 위해 노력한 사례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점(占)치는 사람 안식(安植)이 "세자의 이모형(異母兄) 중에서 천명(天命)을 받을 사람이 하나뿐이 아니다."고 한 말을 도전이 듣고, "곧 마땅히 제거할 것인데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의안군(義安君) 이화(李和)가 그 계획을 알고 비밀히 정안군에게 알렸다.] <태조실록 제7년 8월 26일 기사>
[이무(李茂)는 본디부터 중립(中立)하려는 계획이 있어 비밀히 남은 등의 모의(謀議)를 일찍이 정안군에게 알리더니, 이때 와서 민무질을 따라와서 정안군을 뵈옵고 조금 후에 먼저 갔다. 이무는 무질의 가까운 인척(姻戚)이었고, 죽성군(竹城君) 박포(朴苞)도 또 그사이를 왕래하면서 저쪽의 동정(動靜)을 몰래 정탐하였다.] <태조실록 제7년 8월 26일 기사>
그러니까 정안군은 철저히 정적들의 움직임을 감시했습니다. 일찍부터 이무, 박포, 이애 등이 정적들의 동정을 몰래 정탐하여 정안군에게 알렸습니다. 정안군에게 정보를 가져다주는 역할을 맡았던 이들이 쿠데타 성공 후에 정사공신(定社功臣)을 포상할 때, 이화, 이무, 이애는 1등 공신, 박포는 2등 공신에 오른 것을 보아도 그들의 첩보활동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잘 말해줍니다. 더구나 2등 공신에 오른 박포는 논공행상이 불공평하다고 불만을 드러내어 귀양까지 갔습니다. 그 일로 정안군에게 반기를 들었고 회안군에게 붙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여러 사례는 정안군이 일찍부터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주고 있습니다.
VII. 정안군은 정말 소수의 병력으로 거사를 성공시켰나?
호시탐탐 선수를 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정안군은 태조 임금이 병환 중임을 틈타 거사를 단행했습니다. 실록에는 정안군이 하륜에게 거사 일을 통지해준 기록이 없습니다. 처음에 모의할 때 거사 일을 알리기로 했고, 거사 당일 밤에 군사를 이끌고 서울에 도착한 하륜이 군영의 비워 둔 자리에 와서 앉은 것을 보아도 분명히 하륜에게 3~4일 전에는 통지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태종 임금과 하륜이 <태조실록>을 편찬하면서 의도적으로 뺀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하륜이 거사를 성공시키는 길은 오직 아버지의 군사를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정안군이 아버지의 군사를 이용해 쿠데타에 성공했는데도, 그 사실을 감춘 것입니다. 하륜은 자신과 이숙번이 군대를 동원한 사실도 누락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정안군이 실제로 군사를 혁파한 것처럼 곡필했고, 민씨 부인이 병장기와 말을 몰래 감춘 사실만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소수의 병력으로 거사를 도모하고, 천명을 기다렸는데 마침 신이 도와주어 성공한 것처럼 사건을 조작했습니다. 이는 명분과 정통성이 없는 그들의 쿠데타가 적나라하게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후대에 전해지는 것이 싫었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정안군 부인 민씨가 동생 대장군 민무구(閔無咎)와 장군 민무질과 함께 모의하여 병기와 말을 몰래 준비하여 태종을 응원할 계책을 세워놓고 기다렸다.] <연려실기술, 태조조고사본말>
이날에 왕자와 종친들은 임금의 병이 위급했으므로 근정문 밖의 행랑에 모여 숙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임금의 병이 매우 급하니 정안군과 익안군(益安君) 이방의(李芳毅), 회안군(懷安君) 이방간(李芳幹), 청원군(淸原君) 심종(沈淙), 상당군(上黨君) 이백경(李伯卿), 의안군(義安君) 이화(李和)와 이제(李濟) 등이 모두 근정문(勤政門) 밖의 서쪽 행랑(行廊)에서 모여 숙직(宿直)하였다.] <태조실록 제7년 1398년 8월 26일 기사>
드디어 오후 4시경이 되자 민씨 부인이 찾아온 민무질과 한참을 이야기한 후에 종 소근을 시켜 궁궐에 가 정안군을 불러오도록 했습니다.
[이날 신시(申時)에 이르러 민무질(閔無疾)이 정안군의 사저(私邸)에 나아가서 들어가 정안군의 부인(夫人)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한참 동안 하니, 부인이 급히 종 소근(小斤)을 불러 말하였다. "네가 빨리 대궐에 나아가서 공(公)을 오시라고 청하라." <중략> 정안군이 사저(私邸)로 즉시 돌아오니, 조금 후에 민무질(閔無疾)이 다시 와서 정안군 및 부인과 함께 세 사람이 서서 비밀히 한참 동안을 이야기하다가, 부인이 정안군의 옷을 잡고서 대궐에 나아가지 말기를 청하니, 정안군이 말하였다.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대궐에 나아가지 않겠소! 더구나 여러 형이 모두 대궐 안에 있으니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가 없소. 만약 변고가 있으면 내가 마땅히 나와서 군사를 일으켜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오." 이에 옷소매를 떨치며 나가니, 부인이 지게문 밖에까지 뒤따라 오면서 말하였다. "조심하고, 조심하세요."] <태조실록 제7년 1398년 8월 26일 기사>
정안군이 다시 궁궐로 돌아가면서 “만약 변고가 있으면 내가 마땅히 나와서 군사를 일으켜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오”라고 말하면서 나갔습니다. 이 대목 역시 곡필한 것으로 사전에 선수를 치는 것이 아니라 변고가 있으면 군사를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처남 민무구에게 서울에 머물고 있는 안산군수 이숙번을 불러와 경복궁 서쪽 정안군의 집 문 앞에 있는 신극례의 집에서 기다리게 했습니다.
[이에 정안군은 민무구에게 명령하여 이숙번으로 하여금 병갑(兵甲)을 준비하여 본저(本邸)의 문앞에 있는 신극례(辛克禮)의 집에 유숙하면서 변고를 기다리게 하고는, 그제야 대궐에 나아가서 서쪽 행랑(行廊)에 들어가서 직숙(直宿)하였다. 여러 군(君)들은 모두 말을 남겨 두지 않았으나, 홀로 정안군만은 소근을 시켜 서쪽 행랑 뒤에서 말을 먹이게 하였다.] <태조실록 제7년 1398년 8월 26일 기사>
이날 밤 초경(初更: 밤 7시~9시)에 궁에서 사람이 나와 "임금의 병이 위급하여 병을 피하고자 하니, 여러 왕자는 빨리 안으로 들어오되 종자(從者)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전했습니다. 그때 이화(李和), 심종(沈淙), 이제(李濟)는 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정안군, 익안군(益安君), 회안군(懷安君), 상당군(上黨君)은 “궁중(宮中)의 여러 문에 등불이 없다."면서, 이를 의심하고 머뭇거렸습니다. 정안군은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밖에 남았습니다. 안으로 들어간 익안군 등이 한참 있다가 달려 나왔습니다. 그때 정안군이 "형세가 하는 수 없이 되었다."면서 모두 궁 밖으로 도망 나갔습니다. 익안군 등이 정말로 죽임을 피해 궁 안에서 도망쳤다면, 정도전 측이 여러 왕자 제거작업을 시작했다는 의미 말고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궁 안에서는 아무도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습니다. 궁 안에 아무런 변고가 없었는데도 익안군 등이 죽임을 피해 도망 나온 것처럼 꾸몄고, 그리고는 정안군이 군사를 일으킨 것처럼 곡필했을 뿐입니다.
실록에 보면 정안군이 궁에서 빠져나와 자기를 좇는 병력을 점검해 보니 30명 남짓했습니다.
[정안군이 본저 동구(本邸洞口)의 군영(軍營) 앞길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이숙번을 부르니, 이숙번이 장사(壯士) 두 사람을 거느리고 갑옷 차림으로 나왔으며, 익안군, 상당군, 회안군 부자(父子)도 또한 말을 타고 있었다. 또 이거이(李居易), 조영무(趙英茂), 신극례(辛克禮), 서익(徐益), 문빈(文彬), 심귀령(沈龜齡) 등이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정안군에게 진심으로 붙좇는 사람인데, 이때 이르러 민무구, 민무질과 더불어 모두 모였으나, 기병(騎兵)은 겨우 10명뿐이고 보졸(步卒)은 겨우 9명뿐이었다.] <태조실록 제7년 8월 26일 기사>
정안군이 처음에 하륜과 모의할 당시에는 안산군수 이숙번의 정릉 수호군을 동원하기로 했는데 단지 장사 두 사람만을 데리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기사는 민씨 부인이 숨겨 둔 병장기도 형편없는 것처럼 기록했습니다. 정안군이 소수의 병력과 보잘것없는 병장기로 쿠데타를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부인이 준비해 둔 철창(鐵槍)을 내어 그 절반을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여러 군(君)의 종자(從者)들과 각 사람의 노복(奴僕)이 10여 명인데 모두 막대기를 쥐었으되, 홀로 소근만이 칼을 쥐었다.] <태조실록 제7년 8월 26일 기사>
정안군은 말을 달려 원수(元帥)의 대기(大旗)가 있는 북쪽 길에 이르렀을 때 산성이란 군호(軍號)를 내리고 천명(天命)을 기다렸습니다.
[정안군이 달려서 둑소(纛所: 원수의 대기가 있는 곳)의 북쪽 길에 이르러 이숙번을 불러 말하였다. "오늘날의 일은 어찌하면 되겠는가?" 숙번이 대답하였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군호(軍號)를 내리기를 청합니다." 정안군이 산성(山城)이란 두 글자로써 명하고 삼군부(三軍府)의 문 앞에 이르러 천명(天命)을 기다리었다.] <태조실록 제7년 8월 26일 기사>
그런데 <용재총화>에는 위의 기사와는 아주 다르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태종이 숙번을 불러 그 사유를 말하니, 숙번이 말하기를, “이런 일은 손바닥을 뒤엎는 것보다 쉬운 일인데,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하고, 마침내 태종을 모시고 궁중의 하인들과 이장할 군사들을 거느리고 먼저 군기감(軍器監)을 탈취하여 갑옷을 입히고 병기를 가지고 나가서 경복궁을 둘러쌌다.] <용재총화(慵齋叢話), 연려실기술, 태조조고사본말>
그러니까 군호를 내리고 나서 잠자코 천명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이미 정안군과 내통을 한 궁중의 하인들과 이숙번의 군사들이 군기감을 탈취하여 갑옷을 입고 병기를 가지고 나가서 경복궁을 둘러싼 것입니다.
그리고 밤늦게 핵심 참모인 하륜이 정안군의 군영(軍營)에 합류했습니다.
[태종은 남문 밖에 장막을 쳐서 그 가운데 앉았고, 또 한 장막을 그 아래에 쳤는데, 사람들은 누구의 자리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하륜이 올라와서 그 가운데에 앉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가 오래지 않아 정승이 될 줄을 알았다. 정사(定社)의 공은 모두 하륜과 이숙번의 힘이었다.] <용재총화(慵齋叢話), 연려실기술, 태조조고사본말>
뒤늦게 정안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말을 들은 세자 이방석이 나가서 싸우려고 했습니다. 하나 반군의 정예 기병이 광화문에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꽉 찼다는 보고를 받고 두려워 감히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신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는 하륜이 충청도 진천에서 이끌고 올라온 군사가 남산에 진을 치고 대기하고 있던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환상을 본 것처럼 곡필한 것으로 보입니다.
[방석 등이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싸우고자 하여, 군사 예빈 소경(禮賓少卿) 봉원량(奉元良)을 시켜 궁의 남문에 올라가서 군사의 많고 적은 것을 엿보게 했는데, 광화문으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정예(精銳)한 기병(騎兵)이 꽉 찼으므로 방석 등이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으니, 그때 사람들이 신(神)의 도움이라고 하였다.] <태조실록 제7년 8월 26일 기사>
이 기사를 용비어천가 98장에도 다음과 같이 중국의 고사를 들어 재현해 놓았습니다.
[臣下(신하) 말 아니 드러 正統(정통)애 有心(유심)ᄒᆞᆯᄊᆡ 山(산)ᄋᆡ 草木(초목)이 軍馬(군마) ᄃᆞᄫᆡ니ᅌᅵ다. 님그ᇝ 말 아니 듣ᄌᆞᄫᅡ 嫡子(적자)ㅅ긔 無禮(무례)ᄒᆞᆯᄊᆡ 셔ᄫᅳᆳ 뷘 길헤 軍馬(군마) 뵈니ᅌᅵ다] <용비어천가 제98장 기사>
그러니까 전진(前秦)의 오랑캐 왕 부견(苻堅)이 신하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정통(중원)을 차지하려 했었는데 산의 초목이 군마로 보였다는 중국의 고사처럼, 정도전 등이 태조 임금의 말을 듣지 않고 정안군에게 무례를 범하여 서울의 빈 길에 군마가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 용비어천가는 세종 임금의 주도하에 만들었습니다. 세종 임금 역시 <태조실록>의 곡필에 가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실과 달리 실록 기사와 용비어천가를 왜곡한 것은 정안군이 아버지(太祖)의 군사를 이용해 쿠데타에 성공했다는 역사의 기록을 후대의 왕들에게 적나라하게 남겨주는 것이 싫었고, 두려웠기 때문으로 판단됩니다.
VIII. 정안군은 어떻게 궁궐을 장악했나?
정안군이 이숙번의 군사로 경복궁을 포위한 다음, 밤 이경(밤 9시~밤 11시)이 되자, 이숙번과 의논하니 그가 정도전 등을 죽이는 계책을 올립니다.
[정안군이 또 숙번을 불러 말하였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숙번이 대답하였다. "간당(姦黨)이 모인 장소에 이르러 군사로써 포위하고 불을 질러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문득 죽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태조실록 제7년 1398년 8월 26일 기사>
실록에 여러 왕자를 제거하기로 했다던 정도전 등은 거사 일에 아무런 대비도 없이 담소하다가 정안군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졌습니다. 군사로 포위하고 집에 불을 지르는 통에 뛰쳐나오다가 살해되었거나, 도망 다니다가 살해당했습니다. 대궐 안에 있던 사람이 송현(松峴) 쪽에 불꽃이 하늘에 가득한 것을 보고 달려가서 임금에게 보고했고, 궁중(宮中)의 호위하는 군사들이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고함을 쳤습니다. 그런데 태조 임금에게 변고를 보고했는데도 아무런 후속조치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궁궐에서 내통한 세력에 의해 사건 보고가 차단되었든지 아니면 조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태조 임금이 아무리 병환 중이었다 해도 이처럼 위급한 변고를 알았다면 가만히 누워서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정도전 일당을 아주 쉽게 제거하고 나서, 정안군은 조정의 백관을 불러 모으게 합니다. 이어서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궁궐도 손쉽게 장악합니다.
[마침내 예조(禮曹)에 명령하여 백관(百官)들을 재촉해 모이게 하였다. 친군위 도진무(親軍衛都鎭撫) 조온(趙溫)도 또한 대궐 안에 숙직(宿直)하고 있었는데, 정안군이 사람을 시켜 조온과 박위(朴葳)를 부르니, 조온은 명령을 듣고 즉시 휘하(麾下)의 갑사(甲士), 패두(牌頭) 등을 거느리고 나와서 말 앞에서 배알(拜謁)하고, 박위는 한참 동안 응하지 않다가 마지 못하여 칼을 차고 나오니 정안군이 온화한 말로써 대접하였다. <중략> 정안군이 그를 도당(都堂)으로 가게 했는데, 회안군이 정안군에게 청하여 사람을 시켜 목 베게 하였다. 정안군이 조온에게 명하여 숙위(宿衛)하는 갑사(甲士)를 다 나오게 하니, 조온이 즉시 패두(牌頭: 형조의 사령) 등을 보내어 대궐에 들어가서 숙위하는 갑사를 다 나오게 하였다. 이에 근정전 이남의 갑사는 다 나와서 갑옷을 벗고 무기(武器)를 버리니, 명하여 각기 제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태조실록 제7년 1398년 8월 26일 기사>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실록에는 경복궁 안에서 정도전 측이 여러 왕자의 제거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정안군과 익안군 등이 궁 밖으로 도망 나간 것처럼 꾸몄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궁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습니다. 또한, 정안군이 정도전 등을 제거한 후에 30여 명 남짓한 병력을 이끌고 궁 앞에 도착했을 때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정안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하기까지 그에게 살려 달라고 한 인물은 있어도 저항을 한 인물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는 궁궐의 모든 사정을 꿰뚫고 있는 정안군이 거사 전에 곳곳에 필요한 인물을 미리 포섭했음을 시사해줍니다. 군기감의 무기를 탈취할 때에 궁궐의 하인들을 이용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정안군의 포섭대상 1순위는 궁궐을 수비하는 금군(禁軍)의 책임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영무와 조온을 포섭했습니다. 조영무는 밖의 쿠데타군에 합류했고, 조온은 안에서 내응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정안군은 태조 임금을 철저히 고립시킨 상태에서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궁궐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IX. 정안군은 왜 왕세자 책봉을 형에게 양보했나?
밤이 사경(四更: 새벽 1시~새벽 3시)이 되었을 때, 정안군이 삼군부(三軍府)의 문 앞에 이르러 말을 멈추었습니다. 드디어 성공의 문턱을 넘어선 것입니다. 평소에 관망하던 사람들도 잇달아 와서 합류했습니다. 조금 후에 도당(都堂)에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임금에게 아뢰도록 했습니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도당(徒黨)을 결합(結合)하고 비밀히 모의하여 우리의 종친 원훈(宗親元勳)을 해치고 우리 국가를 어지럽게 하고자 했으므로, 신 등은 일이 급박하여 미처 아뢰지 못하였으나 이미 주륙(誅戮) 제거되었으니, 원컨대 성상께서는 놀라지 마옵소서.] <태조실록 제7년 1398년 8월 26일 기사>
이어서 정안군은 도당(都堂)으로 하여금 왕세자를 책봉하는 소(疏)를 올리게 했습니다. 하륜 등은 정안군이 마땅히 왕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정안군은 영안군을 추천했습니다. 영안군은 처음에 정안군이 공로가 많다고 사양했으나 동생의 권유를 받아들였습니다. 정안군이 주청한 대로 태조 임금이 영안군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적자(嫡子)를 세자로 세우면서 장자(長子)로 하는 것은 만세(萬世)의 상도(常道)인데, 전하(殿下)께서 장자를 버리고 유자(幼子)를 세웠으며, 도전 등이 세자(世子)를 감싸고서 여러 왕자를 해치고자 하여 화(禍)가 불측한 처지에 있었으나, 다행히 천지와 종사(宗社)의 신령에 힘입게 되어 난신(亂臣)이 형벌에 복종하고 참형(斬刑)을 당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적장자(嫡長子)인 영안군(永安君)을 세워 세자로 삼게 하소서.] <태조실록 제7년 1398년 8월 26일 기사>
▣ 참고: 영안군 왕세자 책봉 교지문은 <I. 태조 임금의 왕세자 책봉은 정말로 잘못되었나?>에 있습니다.
정안군이 왕세자 자리를 영안군에게 양보한 이유를 분석해보면 첫째, 쿠데타에 대한 명분과 정통성을 세워야 했습니다. 둘째, 아버지의 군사를 이용해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태조 임금이 과연 왕세자로 책봉해줄지 두려웠습니다. 셋째, 영안군을 왕세자로 세운다 해도 정치적 실권은 자신이 가질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넷째, 왕세자 영안군이 임금이 된다 해도 슬하에 적장자가 없었습니다. 다섯째, 비록 종법체제의 상도(常道)는 아니지만, 임금의 양아들로 입양하여 왕세자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X. 신덕왕후와 그 소생들의 억울한 참극
쿠데타를 성공시킨 정안군은 마무리 작업으로 신덕왕후 소생인 폐 왕세자 이방석, 무안군 이방번을 살해했습니다. 왕세자 이방석의 현빈 심씨는 1398년 5월 29일에 왕세손이 될 아들을 낳았는데, 출생기록만 있고, 그 이상의 기록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후에 세종 임금의 아들 금성대군을 봉사손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의안군의 아들도 함께 살해된 것으로 보입니다. 태조 임금이 폐 왕세자 의안군을 동쪽의 먼 곳에 안치 명령을 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도중에서 살해했습니다.
[방석을 먼 곳에 안치하기로 하여 방석이 궁성(宮城)의 서문을 나가니, 이거이(李居易), 이백경(李伯卿), 조박(趙璞) 등이 도당(都堂)에 의논하여 사람을 시켜 도중(道中)에서 죽이게 하였다.] <태조실록 제7년 1398년 8월 26일 기사>
[왕세자의 현빈(賢嬪)이 아들을 낳았다.] <태조실록, 태조 7년 1398년 5월 29일 기사>
무안군 이방번 역시 통진으로 안치하러 가는 도중에 살해당했습니다.
[방번을 장차 통진(通津)에 안치(安置)하려고 하여 양화도(楊花渡)를 건너 도승관(渡丞館)에서 유숙하고 있는데, 방간(芳幹)이 이백경(李伯卿) 등과 더불어 또 도당(都堂)에 의논하여 사람을 시켜 방번을 죽이게 하였다.] <태조실록 제7년 1398년 8월 26일 기사>
그리고 신덕왕후의 사위 흥안군 이제도 집에서 살해당했고, 경순공주만 살아남았는데, 후에 태조 임금이 입적시켜 여승이 되어 불도를 닦다가 한(恨) 많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李濟)가 나오니, 정안군이 이제에게 일렀다. "본가(本家)로 돌아가라." 이제(李濟)가 사제(私第)에 돌아가니, 저녁때에 군사들이 뒤따라 와서 그를 죽이었다.] <태조실록 제7년 1398년 8월 26일 기사>
그런데 태종 임금의 탄압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태종 임금은 무엇보다도 쿠데타의 명분, 정통성, 도덕성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 해결책을 신덕왕후에게서 찾은 것입니다. 신덕왕후가 태조 임금의 정실인 것을 알면서도 신덕왕후를 정실(正室)이 아니라 첩(妾)이라고 폄훼(貶毁)했습니다. 그렇게 할 경우 태조 임금에게 적장자가 아닌 첩의 자식을 왕세자로 세운 잘못을 추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나름대로는 ①잘못된 종묘사직을 바로잡았다는 쿠데타의 명분이 생겼습니다. ②잘못된 정통성을 바로 세웠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③아버지에게 저지른 패륜행위에 대한 도덕성 문제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일석삼조의 효과를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태종 임금은 이미 승하한 신덕왕후를 천대(賤待)했습니다. <태조실록>에 적자(嫡子)인 왕세자 이방석을 얼자(孼子)로 낙인 찍어 놓았습니다. 고려 시대에 적서차별(嫡庶差別) 제도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과거의 적법한 제도를 깨뜨리고 신덕왕후와 그 소생들을 또다시 쿠데타의 희생양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태종 임금의 이러한 임기응변식 해결방법은 사상누각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 누각은 1669년(현종 10년)에 무너졌습니다.
XI. 나가면서
지금까지 종합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1차 왕자의 난에 대한 사건 내용들이 숱하게 곡필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과 혼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안군이 일으킨 쿠데타의 성공 요인을 짚어보면 곡필 부분을 쉽게 찾을 수 있고, 사건 전모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안군이 성공한 요인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소수의 재상만으로 국정을 운영한 태조 임금의 통치 스타일에 반발한 여러 왕자와 공신 등의 불만 세력을 정안군이 쉽게 포섭할 수 있었다.
② 요동 정벌계획, 진도훈련, 사병 혁파 추진에 대한 불만세력을 적기에 잘 이용했다.
③ 하륜과 이숙번을 포섭하여 쿠데타를 모의했다.
④ 첩보원(이화, 이무, 박포, 이애 등)을 잘 활용했다. 정적들을 방심하게 했고, 반대로 쿠데타 추진 사실을 감쪽같이 숨겼다.
⑤ 경복궁 금군의 책임자인 조영무와 조온을 포섭, 궁 안팎에서 내응하도록 했다.
⑥ 태조 임금이 병환 중임을 이용했고, 이로 인해 정적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틈을 잘 이용했다.
⑦ 궁궐 내부의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장점을 적절히 잘 이용했다.
⑧ 아버지의 군사를 쿠데타에 이용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하륜, 이숙번, 조영무, 조온 등의 병력).
⑨ 사병이 혁파되기 직전에 거사를 했다(왕자, 종친, 공신 등의 시위패)
⑩ 민씨 부인과 처남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리하여 정안군은 쿠데타를 쉽게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자기편의 병력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제거 대상 정적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처치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왕권을 빼앗은 쿠데타였기 때문에 그는 명분, 정통성, 도덕성 문제로 발목을 잡혀야 했습니다. 그래서 태종 임금은 재위 기간 동안 숱한 사건에 시달렸고 또한 스스로가 숱한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한마디로 시작이 좋지않았기 때문에 재위 기간 내내 피의 숙청을 단행해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여러 사건 중에서 왕권의 명분, 정통성, 도덕성과 관계되는 사건들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1400년(정종 2년) 11월에 정종 임금은 태종 임금에게 선위(禪位)했습니다. 태상왕(태조)에게 알리 지도 않았습니다. 상당수의 신하는 이를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1401년(태종 원년) 2월에 사헌부에서 선위를 반대하던 31명을 탄핵했습니다. 그중 26명이 외방에 자원 안치되었습니다. 선위의 정통성 부족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태종실록, 태종 1년 1401년 2월 2일 기사>
② 1402년(태종 2년) 1월에 신문고(申聞鼓) 설치를 한 교서 서두에는 민원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고자에게는 1등 공신에 버금가는 파격적인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백성의 억울한 사정 보다는 정권 반대세력을 색출하려는 의도가 다분했습니다. 따라서 취약한 명분과 정통성 강화에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태종실록, 태종 2년 1402년 1월 26일 기사>
③ 1402년(태종 2년) 11월 5일에 일어난 안변 부사 조사의(趙思義) 난은 <태종실록>에 신덕왕후의 원수를 갚기 위한 난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는 태조 임금이 개입한 난이었습니다. 태종 임금의 왕권에 대한 명분, 정통성의 결여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태종실록, 태종 2년 1402년 11월 5일 기사>
④ 1404년(태종 4년) 10월에 이거이(李居易)와 그 아들 이저(李佇)가 “1400년에 태종과 그의 왕자들을 제거하고 정종을 다시 세우려는 역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처벌했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취약한 왕권과 정통성 결여 때문에 생긴 사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태종실록, 태종 4년 1404년 10월 18일 기사>
⑤ 태종 임금은 1406년(태종 6년)과 1409년(태종 9년) 두 차례에 걸쳐 전위 표명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실제로 왕위 전위보다는 반대세력을 노출시켜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취약한 왕권과 정통성 강화를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태종실록, 태종 6년 8월 21일, 태종 9년 8월 10일 기사>
⑥ 1409년(태종 9년) 2월 23일에 태종 임금이 정동에 있던 신덕왕후의 정릉을 파헤쳐 지금의 정릉에 천장 했습니다. 능의 모습이 사라진 채로 오랜 세월 동안 버려져 있어야 했습니다. 선조(宣祖) 임금 때부터 신덕왕후의 종묘 부묘론이 일어났습니다. 신덕왕후가 태조 임금의 정실(正室)이었고, 정비(正妃)였으므로 마땅히 종묘에 부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태종 임금의 잘못을 시인하는 꼴이 되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후 현종(顯宗) 임금 때에 송시열(宋時烈) 등이 다시 강력히 이 문제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에 조정은 물론 유림까지 합세한 결과 마침내 260여 년만인 1669년(현종 10년) 8월 5일에 성취되었습니다. 마침내 신덕왕후가 종묘에 배향되었고, 신원도 회복되었습니다. 신덕왕후의 명예가 회복됨과 동시에 태종 임금의 명분, 정통성, 도덕성은 무너졌습니다. <현종 개수실록, 현종 10년 8월 5일>
태종 임금은 역사의 기록으로 영원히 남길 <태조실록>의 편찬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태조 임금이 승하하자마자 하륜에게 명하여 당대에 <태조실록>을 편찬하도록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사건의 진실을 숨기고 왜곡하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켕기는 것은 아버지의 군사를 이용해 아버지의 권력을 빼앗은 적나라한 사건의 진실을 후대의 왕들에게 남겨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후대의 왕손들이 자신의 행위를 본받을까 봐 가장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30명 남짓한 병력으로 거사했는데 하늘의 신과 종묘사직의 도움으로 성공했다고 곡필했습니다. 나아가 정도전 등이 여러 왕자를 제거하려 해서 선수를 쳤다는 등 <태조실록> 곳곳에 왜곡을 해 놓았습니다. 심지어 쿠데타의 명분, 정통성, 도덕성을 세운다고 신덕왕후를 첩으로 만들어 태조 임금이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한 본디의 죄인이라고 낙인까지 찍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신권주의 대 왕권주의의 대결이 아닙니다. 왕자들 간의 권력다툼도 아닙니다. 왕세자 책봉을 잘못한 탓도 아닙니다. 그것은 <태조실록> 등이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되고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시각에서 이 사건을 살펴본 바로는 오직 왕권에 대한 정안군의 극단적인 탐욕 때문에 부왕의 권력을 빼앗고, 부왕을 죄인으로 만든 쿠데타였습니다.
역사는 진실에 근거하여 기록해야 하고 정확한 사료를 가지고 편찬해야 합니다. 그리고 왜곡된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역사로서의 가치를 빛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따라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현재의 시각에서 과거에 잘못된 역사를 찾아 바로잡아 나가야 합니다.
제1차 왕자의 난은 우리 신천강씨의 역사를 수난의 시대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이처럼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준 사건의 진실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왜곡된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아 나갈 수 있습니다. 이 길만이 우리 신천강씨의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문중은 더욱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