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내가 가져야 할 신앙의 모습
2024. 2. 4.(주일낮예배) 시편 77:1-11
여러분은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나타내는가? 한국 초기 기독교는 청교도 신앙을 가진 선교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북장로교회에서 파송된 청교도 신앙을 가진 선교사님들은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제사, 술, 담배, 첩, 도박을 금하였다. 자료에 의하면 어느 선교사님은 담뱃대를 입에 물고 연기를 내품는 한국사람은 지구상에서 가장 게으른 사람이다고 말하기도 하였고, 또 술을 먹고 길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보면서 많이 힘들어 했다는 자료도 있다. 그래서 1893년 마펫 선교사는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으려면 제사, 음주, 담배, 축첩, 도박을 하지 않고, 주일성수와 효도와 성실한 삶을 사는 증거를 요구하였다. 쉽게 설명하면 제사를 드리지 않고,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을 예수님을 믿는 증거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도 이러한 것이 기독교인의 증거가 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여러분 중에 저는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첩을 두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면,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 사람은 첩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첩을 두지 않는 것이 교회에 다니는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도표를 보기 바란다. 2020년 보건복지부 국민건강영양조사에 의하면 1998년 한국남자의 흡연율은 66.3%였다. 그런데 2020년 남자 흡연율은 35.7%라고 한다. 오늘날은 폐암의 원인이 되고, 또 간접흡연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의 수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90%, 95%가 되면 그때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다는 증거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사드리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는 것도 교회에 다니는 증거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교회다닌다는 증거를 어떻게 나타낼 수 있겠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아삽의 시이다. 레위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하였던 아삽은 큰 고난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아삽은 두 손을 들고 밤새 기도하였는데,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랬던 아삽은 3절에서 하나님을 기억해서 불안해 한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하나님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근심과 한숨이 더 많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니 7-8절을 보면 주께서 영원히 나를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하면서 시인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근심에 떨고 있는 것이다.
왜 아삽이 불안과 낙심에 빠져 있는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11절이다. 그 아삽이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옛적에 행하신 일들을 기억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한 아삽은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이가 누구오니이까?(13)하고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이상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었던 아삽은 불안하고 근심해 한다. 그랬던 아삽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할 때 하나님을 다시 찬양하는 사람으로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과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사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아삽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낙심하고, 또 하나님을 기억하여 회복될 수 있었던 이유는 10절에 나온다. 먼저 10절을 읽기 바란다.
(시 77:10)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아삽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아삽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도하였다.
그런 아삽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시편 77편은 1-10절과 11-20절로 구분할 수 있다. 이렇게 구분할 수 있는 이유는 1-10절까지는 내가 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아삽은 고난 가운데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기도한 것이다. 그런데 11절부터 반복되는 단어는 주께서 이다. 아삽은 자신이 중심이 되어 기도하며 하나님을 생각할 때 더 낙심에 빠졌지만, 하나님을 중심으로 주의 역사를 바라보니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노래하는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중심으로 신앙생활 하고 있는가? 영어사전에 GGONDAE 라고 쓰면 이런 설명이 나온다.
한국어에서 유래한 말로, 자신의 생각이나 방식이 항상 옳다고 여기는 권위적인 사람
꼰대는 자신의 경험이 항상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라떼는 이라는 말을 통하여 자신을 인정받고 또 은근히 다른 사람은 무시하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이 꼰대는 아닌가?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2024년 신년사에서 핵심화두로 한 말이 One less click 이다. 이 말은 고객이 클릭을 한 번이라도 덜하게 만들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용진 부회장의 신년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객이 여기저기서 쿠폰을 찾도록 숨바꼭질시키고, 무료 배송을 위해 이런저런 조건을 맞추게 하진 않습니까? 결제부터 배송에 이르기까지 고객을 지치게 하진 않나요? 고객들은 바로 이런 걸 불친절하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One less click 상품을 고를 때도, 할인 혜택을 받을 때도, 결제를 하고 배송을 받을 때도 경쟁사보다 “한 클릭” 덜 하도록 고객을 배려해 줘야 합니다.
정용진 부회장은 신세계의 경쟁사인 쓱닷컴과 G마켓보다 앞선 기업이 되려면 회사가 편한 것이 아니라, 고객이 편한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One less click 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기업문화도 이제 자사 이기주의, 보여주기식 실적 쌓기, 불필요한 업무 중복 모두 One less click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하여 정용진 부회장은 One more step 을 말한다. 업무를 바라보는 관점은 고객의 편의를 위한 것이라면, 이제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내가 한걸음 더 한층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용진 부회장은 기업은 본질적 가치인 수익의 안정화와 재투를 통한 사업영역 확장을 이루기 위해서 One less click과 One more step를 통하여 자기 이기와 편리를 버리고 수고의 한걸음으로 더 나아가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것이 재계 11위, 대한민국 10대 재벌에 들어가는 신세계 부회장의 생각이다. 정용진 부회장은 더 큰 기업이 되려면 다른 기업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희생과 헌신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신앙의 바른 태도가 아니겠는가? 오늘 본문 1-9절까지 아삽의 모습을 살펴보기 바란다. 하나님을 믿는 아삽은 간절하게 기도한다. 그런데 계속하여 반복되는 단어는 “내가”이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1절),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2절),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3절)
이렇게 “내가” 를 외치는 아삽은 결국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10절에서 아삽은 이는 나의 잘못이라고 외친다. 그리고 11절부터 아삽은 “주께서” 라는 단어를 반복한다. 이렇게 주께서 주는 으로 중심이 바뀌어 졌을 때 아삽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는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마태복음 20장은 천국은 마치로 시작하는 포도원 품군 비유이다. 주인은 이른 아침, 제 3시, 6시, 9시에 장터에서 일군을 불러 포도원에서 일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11시에도 가서 사람들을 포도원에서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말하면 이른 아침에 사람을 데리고 오고,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 사람을 데리고 온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온 사람은 오후 5시에 불러온 것이다. 그래서 오후 6시가 되었을 때 주인은 나중에 온 사람부터 약속한 한데나리온을 주었다. 그런데 먼저 온 사람들이 원망하기 시작하였다.
왜 먼저 온 사람들이 원망을 하고 있는가? 만약 먼저 온 품군들은 내가 일찍 와서 뜨거운 햇빛 아래서 얼마나 많이 고생했는데.. 하는 말을 한다. 그들은 아무도 써주지 않는 불쌍한 사람을 섬기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내가 얼마나 수고했는가?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품군들은 천국에 합당치 않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허비한 탕자가 돌아왔다. 그때 아버지는 내 아들이 죽었다 살았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4)고 말하고 기쁨으로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밭에서 일을 하다 돌아온 큰 아들은 아버지가 둘째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는 소리를 듣고 잔치의 자리에 들어오지 않으려 한다. 큰아들이 이렇게 화를 내고 잔치에 참여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내가 아버지를 섬겨 어김없이 일했다는 것이다. “내가”를 생각했던 큰아들은 동생이 돌아온 기쁨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먼저 온 품군과 형님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예수님은 천국에 합당치 않는 사람이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다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천국에 합당치 않는 사람은 “자기의”, “자기 생각”에 빠져서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천국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신앙은 무엇이 중심이 되어져 있는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한다. 그런데 그 예배와 봉사의 자리에서 내가 라는 생각에 빠져 있으면 그 사람은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매주 주일을 성수하고, 또 봉사도 많이 하고 있는데, 왜 교회는 이렇게 밖에 되지 않지? 하는 낙심과 원망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절에 친척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는 내가 너희키운다고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 줄 알아! 라고 하면서 아버지가 고생한 것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인정받으려 한다. 그러한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아들은 그래서 내가 작년 한 해동안 아버지께 드린 용돈이 얼마인데?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면 명절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씁쓸할 것이다.
반가운 형제, 친척을 만나서 아버지는 우리 아들이 매년 용돈 주느라 힘들지 고마워! 하고 아들입장이 되어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께서 우리 키우느라 고생많이 하셨는데, 이제는 좀 편히 사셔야지요! 하고 말씀을 드린다.
뭔가 뿌듯하지 않는가? 저는 이것이 예수 믿는 증거(우리가 나타내어야 할 신앙의 태도)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예수 믿는 증거는 내가 중심이 되어서 꼰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형제를 섬기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 중심이 되어질 때 내가 서 있는 이 곳이 천국으로 변화되는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은 누가 중심이 되어져 있는가?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중심축이 변화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천국을 만들어 가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