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35기 현대사상 세미나(현대 맑스주의1) 6. 27. 신재길 선생님의 '루카치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의 의의와 한계' 발제문과 동영상입니다.
루카치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의 의의와 한계
— 의식은 어떻게 실천적 힘이 되는가: 존재방식의 변증법·주체/주관·의식/의식성에 의한 비판적 재구성
신 재 길(노사과연)
1. 들어가며: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
의식과 실천의 관계, 곧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관계는 맑스주의 철학사를 관통하는 핵심 문제였다. 이 발표는 그 관계를 세 시대로 나누어 짚는 데서 출발한다. 그래야 왜 오늘날 혁명적 주체가 좀처럼 출현하지 못하는지, 그리고 루카치가 평생 씨름한 ‘계급의식’의 문제가 어떤 새로운 형태로 되돌아왔는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맑스의 시대, 핵심은 “모르고 행한다”였다. 맑스는 『자본론』 제1권의 상품물신성 분석에서, 노동자들이 자기 행위의 사회적 성격을 자각하지 못한 채 객관적 법칙에 종속되어 움직인다는 점을 해명했다. “그들은 그것을 모르지만, 그렇게 행한다.” 이 시기의 과제는 물신성의 비밀을 과학적으로 폭로해 노동자계급에게 인식의 무기를 쥐여 주는 것이었다.
레닌의 시대, 핵심은 “진정으로 안다면, 조직되어 행한다”였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1902)에서 자발적 운동만으로는 노동조합주의 의식에 머문다고 진단하고, 외부에서 매개되는 과학적 이론과 전위당의 조직적 개입을 혁명적 계급의식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1917년 10월 혁명은 이론이 조직이라는 매개를 통해 역사적 실천으로 전화할 수 있음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오늘날, 역설은 정반대다. 핵심은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이다. 플랫폼 경제가 공유경제라는 이름 아래 저숙련 노동을 양산하는 자본주의의 변형이라는 분석, 배달 알고리즘 이면의 비대칭적 노사관계에 대한 고발, 자산과 소득의 복합 양극화를 적시하는 통계 등 착취 구조에 대한 정보는 차고 넘친다. 그러나 이 방대한 지식은 좀처럼 노동자들의 실천을 추동하는 힘으로 전화하지 않고 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오늘의 노동자가 가진 것은 정확히 말하면 구조에 대한 ‘체험적 불만’이지, 아직 총체적·구조적 ‘인식’은 아닐 수 있다. 배달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이 구조적 착취에 포획되어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지만, 그 예리한 감각은 고립된 한숨으로 흩어질 뿐 집단적 실천으로 수렴되지 못한다. 이 유실된 고리는 단순한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지식이 사상의식(의식성)으로 비약하지 못한 데 있다.
2. 왜 루카치인가, 그리고 세 가지 분석 도구
게오르크 루카치(György Lukács, 1885–1971)는 바로 이 물음에 가장 집요하게 씨름한 20세기 맑스주의 철학자이다. 헝가리 혁명의 좌절을 겪은 그는 망명지 빈에서 그 원인을 구명하며 『역사와 계급의식』(1923)을 썼고, 이후 그 초기 저작의 관념론적 경향에 대한 비판과 자기비판을 거쳐, 만년에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으로 나아가는 존재론적 전회를 감행한다. 초기에서 후기로의 이행은 결국 하나의 동일한 물음, "의식은 어떻게 실천적 힘이 되는가"에 대한 방법론적 전회였다.
이 발표는 루카치의 전회를 평가하기 위해 세 가지 분석 도구를 사용한다. 이 세 범주는 발표자가 고민해 온 것으로, 여기서는 도구로서 간략히 정의하고 적용하겠다.
(1) 존재방식으로서의 변증법, 유와 무의 주격-술격 구조.
변증법은 인식의 방법론이나 논리방법일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물질의 존재방식이다. 출발점은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도 있다"는 명제이다. 스피노자의 금언대로 "모든 규정은 부정(omnis determinatio est negatio)"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사물은 자기 안에 자기 아닌 것(무)을 본질적 규정으로 품고 있다. 중요한 것은 유와 무가 동격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는 주격(주어)이고, 무는 그 유에 내재하는 술격(술어적 속성)이다. 무는 유 바깥의 또 다른 실체가 아니라, 유를 한정하고 변화시키는 유 안의 계기이다. 이렇게 무를 자기 안에 품어 끊임없이 자기를 넘어서는 유를 ‘생성존재’라 부른다. 이 주격-술격의 위계, 주격이 술격을 품되 술격으로 환원되지 않는 비대칭적 통일이 물질의 존재방식인 변증법이며 이 발표의 가장 근본적인 도구이다.
(2) 주체와 주관의 구분.
‘주관’은 객관의 대립항으로서 외부 세계를 반영하는 인식 기능의 담지자, 곧 뇌수의 기능이다. 동물도 외부를 감각하는 한 주관을 지닌다. 이에 반해 ‘주체’는 주관을 포함하되 그것을 넘어선다. 주체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기 활동의 목적과 방향을 스스로 세우고 실현하는 살아 있는 사회적 인간이다. 핵심은 주체는 뇌수가 아니라 사회적 인간이라는 점이다. 주관이 인식론적 개념이라면 주체는 존재론적 개념이다.
(3) 의식과 의식성의 구분.
‘의식’이 뇌수의 반영 기능이라면, ‘의식성’은 사회적 인간이 자기 이해관계를 자각하고 그에 따라 자기 활동을 능동적으로 규제하는 주체적 역량이다. 그 핵심 내용이 ‘사상의식’, 곧 "요구와 이해관계에 대한 자각이며 이를 실현하려는 입장·각오·결심·신념·의지의 총체"이다. 거울은 사물을 반영하지만 사물을 변혁하지 않는다. 거울은 주관이지 주체가 아니다. 반영만으로는 의식이 어떻게 존재에 반작용하는가를 설명할 수 없다. 의식이 인식론적 주관이라면 의식성은 존재론적 주체이다.
이 세 도구의 관계를 미리 밝혀 둔다. 존재론적으로 가장 근본적인 것은 (1) 주격-술격 구조의 존재방식이다. 이것이 없으면 (2)와 (3)도 존재론적 정초를 잃는다. 그러나 오늘의 교착을 해명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3) 의식/의식성 구분이다. ‘근본’과 ‘결정적’을 이렇게 구별해 두는 것이 이 발표의 중심 테제이다. 곧, 루카치의 존재론적 전회는 올바른 방향의 시도였으나 이 세 도구가 결여되어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는 교착을 해명하는 단초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3. 초기 루카치: "알면 행한다"의 관념론적 형태
『역사와 계급의식』(1923)이 등장할 무렵 맑스주의의 주류는 제2인터내셔널의 경제결정론이었다. 경제적 토대가 무르익으면 혁명은 필연적으로 뒤따른다는 기계론적 도식이 지배하고 있었다. 루카치는 이에 맞서 의식의 능동적 역할을 복권하려 했다. 물화(Verdinglichung)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적 상품관계가 인간 의식을 관조적 태도로 고착시킨다고 진단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이 이 물화를 돌파하는 실천적 힘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시도에는 세 가지 관념론적 한계가 내장되어 있었다.
첫째, 주체가 주관으로 치환되었다. 루카치의 ‘계급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총체를 인식할 때 성립하는 것으로, 그 핵심은 ‘올바른 인식’이었다. 그러나 주체의 감정적·의지적·실천적 계기는 이론 안에서 체계적 자리를 갖지 못했다. 사회적 관계의 총체(주체)가 아니라 인식 기능(주관)이 혁명의 담지자로 사실상 격상된 것이다.
둘째, 의식과 의식성이 구분되지 않았다. 루카치에게 계급의식은 총체성의 인식이자 곧 혁명적 실천의 동력이었다. ‘안다’는 것이 곧 ‘행한다’는 것으로 자동 전화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인식(의식)이 실천적 역량(의식성)으로 비약하는 과정, 그 비약을 매개하는 조직적·실천적 계기는 이론적으로 해명되지 않았다.
셋째, 귀속된 계급의식(zugerechnetes Klassenbewußtsein) 개념에 의한 현실 우회. 루카치는 경험적 노동자의 실제 의식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객관적 위치로부터 “귀속될 수 있는” 이상적 의식을 계급의식으로 정의했다. 이 개념은 노동자의 실제 의식이 어떻게 그 귀속된 의식에 도달하는가를 설명하지 못한 채, 당위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이론적으로 봉합해 버렸다.
이 세 한계의 공통 뿌리는, 의식의 능동성을 복권하려는 정당한 동기가 관념론적 형태로 실현되었다는 데 있다. "알면 행한다"는 전제는 의식의 힘을 과대평가한 것이 아니라, 의식이 실천적 힘으로 전화하는 물질적 매개 과정을 생략한 것이다. 루카치 자신이 이 한계를 가장 예리하게 감지한 사람이었다. 루카치는 이 한계를 메우는 것이 ‘기적’이라 표현하며 자아비판 했고, 그 자기비판이 만년의 존재론적 전회를 추동했다.
4. 존재론적 전회: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의 구도
4.1. 전회의 배경과 헤겔 비판의 미흡함
1930년대 모스크바 망명기 맑스의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와 『경제학 비판 요강』을 접한 루카치는, 맑스의 사유가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의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이후 수십 년에 걸친 자기비판과 미학 작업을 거쳐, 1960년대에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 집필에 착수한다. 전회의 핵심 동기는 소련 철학의 교과서적 형식화에 맞서 맑스주의를 철학적으로 쇄신하고, 자신의 초기 저작이 빠졌던 관념론을 존재론적 지반 위에서 극복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루카치는 헤겔 변증법을 사회적 모순을 반영하는 "참된" 변증법과 역사를 논리에 종속시키는 "거짓" 변증법으로 나누어 전유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 곧 헤겔이 ‘방법주의’의 원천이라는 점—변증법을 존재의 양식이 아니라 사유의 방법으로 파악하는 입장—까지는 충분히 청산하지 못한다. 구체적으로, 루카치는 헤겔 『논리학』의 본질론(Wesenslogik)에 주로 의존했다. 본질론은 현상과 본질, 원인과 결과처럼 이미 규정된 존재를 전제한 위에서 그 내적 관계를 다룬다. 이에 비해 존재론(Seinslogik)은 유·무·생성이라는 가장 추상적인 범주에서 출발해 존재 자체의 자기운동을 해명한다. 루카치가 본질론에 머물면서 존재론 수준의 유-무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전유하지 못한 결과, 그의 존재론은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정초되지 못한 채 이미 구성된 범주(노동)에서 출발하게 된다.
4.2. 존재의 세 층위와 핵심 범주: 목적론적 정립으로서의 노동
루카치의 존재론은 비유기적·유기적·사회적이라는 세 층위로 구성된다. 한 층위에서 다음 층위로의 이행은 이전 범주를 보존하면서 질적으로 초월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사회적 존재의 고유한 범주적 구조가 목적론적 정립(teleologische Setzung)이다.
목적론적 정립의 구조는 세 단계이다. ⓐ 인간이 목적을 설정하고, ⓑ 그 목적 실현에 필요한 인과적 수단을 인식하며, ⓒ 인과적 과정에 개입하여 목적을 실현한다. 이 구조의 원형이 노동(Arbeit)이다. 루카치에게 노동은 단순한 경제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적 원범주(Urphänomen)이다. 목적론과 인과성의 통일, 의식과 물질의 실천적 매개가 노동에서 가장 단순하고 투명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5. 전회의 의의: 정당하게 평가할 지점
루카치의 존재론적 전회는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첫째,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의 이행 자체가 올바른 방향이었다. 초기의 "총체성의 인식이 곧 실천"이라는 인식론적 틀을 벗어나, 의식의 능동성을 물질적 실천(노동)의 존재론적 구조 속에 정초하려 한 것은, "알면 행한다"의 관념론을 극복하기 위한 필수적 전환이었다.
둘째, 목적론적 정립 개념은 의식과 인과성의 실천적 매개를 최초로 존재론적 범주로 정식화한 시도였다. 의식을 단순한 반영으로 환원하는 속류 유물론과 의식의 자율성을 과장하는 관념론 양쪽을 동시에 넘어서려는 것이었다.
셋째, 자연변증법 문제에서 후기 루카치는 입장을 부분적으로 수정한다. 초기에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전면 부정했던 것과 달리, 후기에는 '자연과의 노동의 신진대사’라는 맑스적 관점에서 자연-사회의 연속성을 인정하려 했다.
6. 전회의 한계: 세 도구에 의한 해부
6.1. 가장 근본적 한계 — 주격-술격 구조의 부재
루카치는 존재론적 전회를 수행하면서도 가장 근본적인 수준, 곧 유와 무의 모순적 통일(생성존재의 존재방식)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그의 존재론은 ‘노동’이라는 이미 고도로 발전된 범주에서 시작한다. 그 결과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첫째, 목적론과 인과성의 "통일"이 어떤 존재론적 형식을 갖는지가 불투명해진다. 주격-술격 구조는 이것이 위계적 통일, 인과성(유, 주격)이 목적론(무의 계기, 술격)을 품되 거기로 환원되지 않는 비대칭적 통일임을 명시한다. 돌을 손도끼로 만들 때, 돌의 결(인과성, 주격)이 의도(목적론, 술격)를 제약하는 동시에, 의도가 돌의 깨짐을 손도끼의 형태로 방향 짓는다. 이 긴장에서 손도끼라는 새로운 대상성이 생성된다. 루카치가 "통일"이라고 명명한 이 관계의 내적 메커니즘이 불투명한 채 남는다.
둘째, 노동 이외의 사회적 현상을 같은 원리로 분석할 도구가 확보되지 않는다. 물론 루카치가 이 한계를 전혀 자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단순 노동을 ‘제1의 목적론적 정립’으로, 타인의 행위를 방향 짓는 것(경영, 국가, 이데올로기 등)을 ‘제2의 목적론적 정립’으로 구분하며 노동 모델을 복잡한 사회 형태로 확장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 ‘제2의 정립’조차 여전히 인간(주체)이 인간(주체)을 대상으로 목적을 정립하는 대칭적 관계를 전제한다. 그 결과 자본의 자동화된 운동이나 비인간적 알고리즘 통제와 같은, 인간 주체를 매개하지 않고 작동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구조적 전도를 포착할 존재론적 도구를 확보하지 못한다. 주격-술격 구조의 존재방식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현대적 사례가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사례 1: 가공자본과 금융화 (주격-술격 구조의 ‘전도’)
정상적 상태에서 가공자본(술격, 미래 기대수익의 관념적 현재화)은 생산자본(주격, 현실적 가치생산 과정)의 내재적 규정으로서 주격에 종속된다. 주가는 기업의 현실적 수익 능력을 반영하는 ‘술격’에 불과하다. 그러나 금융화 과정에서 이 위계가 전도된다. 주가의 단기 상승이라는 관념적 술격이, 생산설비 매각·연구개발 축소·해고라는 주격의 물질적 실재를 강제하고 잠식한다. 술격이 주격인 양 행세하는 ‘물신적 전도’가 발생하는 것이다. 거품의 붕괴란 이 전도된 술격이 주격의 물질적 한계와 충돌하여 폭발적으로 해소되는 사건이다. 루카치의 목적론적 정립 개념만으로는, 실재적 효과를 갖는 이 ‘가상의 술격’이 어떻게 ‘물질적 주격’을 지배하는지 그 구조적 역전을 포착할 도구가 없다.
사례 2: AI 플랫폼과 알고리즘 통제 (타자적 술격에 의한 주격의 ‘모순적 포획’)
배달 플랫폼에서 알고리즘이 배차·경로·단가를 결정할 때, 노동자의 목적론적 정립은 어디로 가는가? 여기서 알고리즘은 노동자의 내재적 술격이 분리·외부화된 것이 아니다. 알고리즘은 본질적으로 자본이 잉여가치 추출을 위해 설계한 ‘자본의 술격’이다. 이 타자적 술격이 노동자의 노동 과정(주격)에 외부에서 침투하여 그것을 강제로 포획한다.
이것은 단순한 주격-술격 구조의 ‘분열’이 아니라, ‘타자적 술격에 의한 주격의 외과적 절단과 모순적 포획’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생계라는 자기 목적(주격)을 갖고 행위의 담지자로 남아 있지만, 개별 노동행위의 방향과 리듬을 규정하던 자기 고유의 술격(어떻게 일할 것인가)을 알고리즘(자본의 술격)에 의해 강제로 박탈당한다. 그 결과 노동자의 자기규정성은 공동화(空洞化)된다.
그렇다면 공동화된 노동자는 더 이상 ‘생성존재’가 아닌, 정지된 객체로 전락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여기에 현대적 저항의 존재론적 근거가 있다. 알고리즘(자본의 술격)은 노동자를 완벽한 인과적 도구로 환원하려 하지만, 살아 있는 노동자(주격)는 신체적 한계, 생존의 요구, 피로와 감정이라는 ‘무(부정성)’를 여전히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생성존재이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의 무한 최적화 요구와 살아 있는 신체의 한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마찰과 파열, 그것이 바로 현대 자본주의에서 계급투쟁이 재점화되는 존재론적 지점이다.
6.2. 둘째 한계 — 주체와 주관의 구분 불철저
루카치의 존재론에서 목적론적 정립의 담지자는 ‘의식을 지닌 인간’으로 설정된다. 그러나 이때의 ‘의식’은 주로 인과성을 인식하고 목적을 설정하는 인지적 기능, 곧 ‘주관’의 관점으로 서술되는 경향이 있다. 노동하는 인간은 돌의 경도를 인식하고 타격의 각도를 계산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물론 루카치도 노동에 감정과 의지가 개입함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틀에서는 인지적 목적 설정(주관)이 1차적이고, 감정이나 의지는 이를 보조하는 2차적 현상으로 종속된다.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주체를 주관으로 축소하는 결과를 낳는다. 돌을 깨는 원시인의 노동에서조차, 타격하는 것은 ‘인식하는 뇌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회적 인간’ 전체이다. 배고픔이라는 결여(무), 동료와의 협력에서 오는 안도감, 성공의 쾌감, 이 모든 정동과 의지가 인지적 계산과 불가분하게 얽혀 노동이라는 ‘생성존재’의 운동을 추동한다.
주체/주관 구분이 불철저한 결과, 루카치의 존재론은 두 가지 난점에 봉착한다.
첫째, 목적론적 정립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목적은 어디서 오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돌을 깨겠다는 ‘목적’은 순수한 인식(주관)에서 솟아나지 않는다. 인식은 ‘있는 것(유)’을 반영할 뿐, ‘아직 없는 것(무)’을 지향하지는 못한다. 목적은 배고픔(감각적 결여), 사냥의 필요(사회적 관계), 도구 사용의 경험(역사적 축적)이라는 주체 내부의 ‘무(부정성)’가 빚어낸 것이다.
둘째, ‘제2유형의 목적론적 정립’, 곧 다른 인간의 의식에 작용하는 정립(이데올로기, 교육, 설득 등)의 고유성을 해명하지 못한다. 자연에 대한 노동(제1유형)에서는 대상이 인과법칙에 따르지만, 타인에 대한 작용(제2유형)에서는 대상 자체가 목적론적 존재이다. 이 질적 차이는 ‘주체가 주체에게 작용한다’는 관계의 복잡성에서 비롯된다. 타인의 ‘의식(인지적 반영)’을 바꾸는 것과 타인의 ‘의식성(이해관계와 실천적 의지)’을 바꾸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루카치가 주체를 주관으로 축소하는 한, 제2유형의 정립은 타인의 인지적 주관에 정보를 주입하는 과정으로만 처리될 위험이 있다.
6.3. 가장 결정적 한계 — 의식과 의식성의 구분 부재
루카치의 ‘목적론적 정립’은 목적 설정 → 수단 인식 → 실행의 구조를 갖는다. 그런데 ‘목적의 설정’은 이미 의식성의 발휘이다. 이 세상에는 아직 없는 것(무)을 있어야 할 것으로 정립하고, 그 실현을 위해 자기 활동의 방향(술격)을 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카치의 목적론적 정립 개념은 이 의식성이 이미 작동하고 있는 ‘결과 상태’만을 서술한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된다: 의식(지식과 감정의 반영)은 어떻게 의식성(목적의 설정과 실현 의지)으로 질적 비약하는가?
의식에서 의식성으로의 비약은 자동으로 일어나지 않으며, 사회적 실천·조직·투쟁이라는 물질적 매개를 통해서만 발생한다. 그 과정은 네 계기의 나선형 순환이다.
1) 체험적 불만의 축적 (정동적 결여의 형성): 노동자는 저임금, 불안정 고용, 알고리즘적 통제를 감각적으로 겪으며 불만을 축적한다. 이 단계의 불만은 단순한 인지적 인식이 아니라, 신체적 고통과 생존의 결여(무)가 뒤섞인 정동적 체험이며, 아직 고립적이고 개인적인 ‘의식’의 차원에 머문다.
2) 집단적 실천과 조직 (주체의 존재론적 전환): 파업, 집회, 노조 결성 등 집단적 행동을 통해 개인의 고립된 불만이 공유된다. 여기서 ‘조직’은 단순한 사회학적 결합이 아니라, 자본의 타자적 술격에 포획되었던 개별 노동자들(주관)이 비로소 자기 목적을 스스로 정립하는 ‘집단적 주체’로 탄생하는 존재론적 도가니이다.
3) 사상의식의 형성 (관념의 주체적 전유): 체험이 이론적 인식과 만나며, 단순한 정동적 불만이 "이대로 두면 안 된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방향 감각, 곧 사상의식으로 결정(結晶)된다. 역사적으로 축적된 객관적 인식이 노동자 주체의 내재적 술격으로 전유되는 질적 비약이 여기서 일어난다.
4) 의식성의 발휘로서의 실천 (나선적 심화): 사상의식에 의해 규제되는 의식적·조직적 실천이 전개되고, 이 실천이 다시 새로운 체험과 인식, 그리고 더 높은 수준의 정동을 낳아 순환이 심화된다.
이 네 계기는 일직선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순환하며, 각 순환에서 의식에서 의식성으로의 질적 비약이 일어난다. 루카치의 목적론적 정립은 이 순환의 (4)에 해당하는 국면만을 서술할 수 있을 뿐, (1)에서 (3)으로의 이행, 곧 앎과 체험이 실천적 의지로 비약하는 결정적 매듭을 해명하지 못한다. 이것이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는 오늘의 교착을 해명하는 데 있어 루카치 존재론이 갖는 가장 결정적 한계이다.
6.4. 넷째 한계 — 존재양식으로서의 변증법과 방법으로서의 변증법
마지막으로, 루카치의 전회는 변증법을 사유의 방법이 아니라 존재의 양식으로 복권하려는 시도였으나, 그 복권을 완수하지 못했다. 루카치는 엥겔스식 자연변증법이 기계적 유물론으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한 나머지, 의도적으로 ‘일반 존재론’을 나중으로 유보하고 ‘사회적 존재’로부터 곧바로 이론을 전개했다. 그러나 존재양식으로서의 변증법을 충분히 정초하지 못한 채 사회적 존재라는 특수한 층위로 직행한 결과, 변증법이 사회적 존재에만 적용되는 특수 논리로 국한될 위험을 완전히 씻지 못했다.
주격-술격 구조(유-무의 모순적 통일의 존재방식)는 이 보편성을 명시한다. 변증법은 사회에 국한된 방법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관통하는 사물 자체의 맥박이기 때문이다. 비유기적 자연에서 물질의 운동은 유(물질, 주격)가 자기 동일성을 깨뜨리는 내적 모순과 형태 전환의 부정성(무, 술격)을 품은 생성존재의 가장 단순한 형태이다. 유기적 자연에서 생명은 유(유기체, 주격)가 환경과의 신진대사를 통한 끊임없는 자기갱신과 죽음의 부정성(무, 술격)을 품은 형태이다. 사회적 존재에서 노동은 유(물질적 인과과정, 주격)가 무(목적론적 정립, 술격)를 품은 형태이다.
각 층위에서 주격-술격의 비대칭적 통일은 동일한 형식을 취하되 내용적으로는 질적으로 상이한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루카치가 이 보편적 존재양식의 정초 없이 사회적 존재로 직행한 것은, 변증법을 존재의 보편적 양식이 아닌 사회적 존재를 파악하는 ‘방법’으로 남게 만드는 구조적 원인이 되었다. 이것이 그의 존재론을 "일반 존재론 없는 사회 존재론"으로 만든 한계이다.
6.5. 네 한계의 공통 구조: 발생론적 공백과 전화론적 공백
앞의 네 한계는 따로 떨어진 결함들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구조적 결여에서 파생된 증상들이다. 그 구조를 한 문장으로 옮기면 이렇다. 루카치는 "이미 완성된 것"에서 출발하여, 그것이 어떻게 발생하고 전화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존재방식의 주격-술격 구조가 지적한 것은 발생론적 공백이다. 루카치는 노동이라는 이미 고도로 발전된 범주에서 출발한다. 노동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더 근본적인 존재의 자기운동 — 유와 무의 모순적 통일 — 을 해명하지 않은 채 그것을 전제로 삼는다는 뜻이다. 그 형식적 원인은 그가 헤겔 『논리학』의 본질론에 주로 의존하고, 존재론(유·무·생성)을 유물론적으로 전유하지 못한 데 있다.
의식과 의식성의 구분이 지적한 것은 전화(轉化)론적 공백이다. 루카치는 의식(반영)이 의식성(능동적 실천)으로 질적 비약하여 전화하는 발생을 묻지 않고, 전화가 끝난 결과에서 출발한다. 거울이 사물을 반영하되 그 반영을 바탕으로 세계를 변혁하는 의지는 스스로 발생시키지 못하듯, 반영(주관)이라는 규정 자체에는 반작용(주체)의 능력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공백은 완벽한 동형(同型) 구조를 갖는다. 따라서 처방 또한 동형일 수밖에 없다. 각각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출발점 이전"으로 한 걸음 더 내려가는 존재론적 하강이 요구된다. 발생론적 공백에 대한 처방은 노동 이전의 존재 일반, 곧 ‘생성존재(주격-술격 구조)’로 하강하는 것이다. 전화론적 공백에 대한 처방은 의식성 이전의 ‘의식’과 그것이 조직적 실천을 매개로 의식성으로 비약하는 과정으로 하강하는 것이다. 이때 주체/주관 구분은 이 발생과 전화의 담지자가 인지적 뇌수가 아니라 정동과 의지를 품은 사회적 인간 전체(주체)임을 규정하며, 존재양식의 변증법은 이 법칙이 자연과 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 존재양식임을 천명한다.
7. 종합: 미완을 이어받는 오늘의 과업
부다페스트 학파를 비롯한 제자들의 비판은 루카치의 작업이 양립 불가능한 두 존재론(인간과 무관한 자연 법칙 vs 인간의 의식과 실천 중심의 역사)을 혼합한다는 데 모였다. 이 발표의 분석은 그 비판의 공통 배경을 세 개의 빈자리로 정리한다.
* 빈자리 1(가장 근본): 주격-술격 구조에 의한 일반 존재론의 정초. 유와 무의 모순적 통일이라는 가장 추상적인 원리에서 출발해, 이 원리가 각 층위에서 취하는 구체적 형태를 체계적으로 전개하는 과업.
* 빈자리 2: 주체와 주관의 명시적 구분에 의한 실천론적 정밀화. 목적론적 정립의 담지자가 인지적 주관이 아니라 사회적 인간 전체(주체)임을 명시하고, 감정적·의지적·실천적 계기를 이론 안에 통합하는 과업.
* 빈자리 3(가장 결정적): 의식과 의식성의 구분에 의한 핵심 매듭의 해소. 의식이 의식성으로 비약하는 과정, 그리고 그 비약을 매개하는 사회적 실천·조직·투쟁의 메커니즘을 해명하는 과업.
이 세 도구는 루카치의 미완을 완성할 방향을 제공한다. 주격-술격 구조는 빈자리 1을 메우며 발생론적 공백을 해소한다. 주체/주관 구분은 빈자리 2를 메우며 담지자의 축소를 교정한다. 의식/의식성 구분은 빈자리 3을 메우며 전화론적 공백을 해소한다.
두 범주의 위계적 연결도 분명하다. 주격-술격 구조는 의식/의식성 구분의 존재론적 지반을 제공한다. 사회적 인간은 생성존재, 자기 안에 자기 아닌 것(무, 곧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목적)을 술격으로 품은 유이다. 유가 자기 안의 무에 의해 끊임없이 자기를 넘어선다는 생성존재의 일반 원리가, 인간이라는 특수한 생성존재의 수준에서 의식성으로 구체화된다. 즉 의식성은 형이상학적 잉여도, 물질로의 환원도 아니며, 생성존재의 자기초월 능력이 사회적 인간의 층위에서 취하는 구체적 형태이다.
만약 주격-술격 구조가 없다면, 의식/의식성 구분은 왜 인간만이 의식성을 갖는가를 설명하지 못한 채 인간학적 특권의 선언에 그친다. 거꾸로 의식/의식성 구분이 없다면, 주격-술격 구조는 존재 일반의 형식 논리에 머물고 왜 그것이 혁명적 실천의 문제와 관련되는가를 보이지 못한다. 두 범주는 서로의 결손을 메우며, 함께 루카치 존재론의 두 겹 공백을 봉합한다.
여기서 "근본"과 "결정적"을 굳이 구별하는 이유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주격-술격 구조는 존재론적 정초의 순서에서 가장 근본적이고(무엇이 무엇을 떠받치는가), 의식/의식성 구분은 실천적 해명의 순서에서 가장 결정적이다(무엇이 오늘의 교착을 직접 푸는가). 근본은 토대의 언어이고, 결정적은 국면의 언어이다.
현대적 함의를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는 오늘의 교착은, 엄밀히 말하면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의식성의 미형성이다. 배달노동자가 자신의 처지를 아는 것(의식)과, 그 앎을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방향으로 결정화하여 조직적 실천에 나서는 것(의식성) 사이에는 질적 비약이 놓여 있다. 이 비약은 개인적 각성으로 달성될 수 없으며, 집단적 실천·조직·투쟁이라는 사회적 매개를 통해서만 발생한다. 이론의 과제는 이 매개의 구조를 해명하는 것이고, 실천의 과제는 이 매개를 현실에서 조직하는 것이다.
8. 결론
초기의 『역사와 계급의식』은 "알면 행한다"를 관념론적으로 보장하려다 헤겔적 환상에 빠졌고, 그 자기비판이 만년의 존재론적 전회를 추동했다.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은 의식의 실천적 힘을 물질적 실천의 구조 속에 정초하려는 올바른 방향의 시도였다. 그러나 세 도구의 부재로 미완에 그쳤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오늘의 교착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의식성의 미형성에 기인한다. 그리고 의식성의 형성은 개인적 각성이 아니라 사회적·조직적 실천의 문제이다. 의식성은 개인의 내면에 갇힌 심리 상태가 아니라, 사회적 활동의 형태가 주체 안에서 능동적 역량으로 전환된 것이며, 그 전환은 언제나 집단적 실천 속에서만 현실화된다.
루카치의 미완성 기획을 이어받는 일은 학술 유산의 정리가 아니라, 바로 이 교착을 돌파할 이론적·실천적 무기를 벼리는 작업이다.
주요 참고문헌
* 루카치, 게오르그. 2016–2017.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전4권). 권순홍·이종철·정대성 옮김.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 루카치, 게오르크. 2017.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을 위한 프롤레고메나』(전2권). 김경식·안소현 옮김.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 Fehér, F., Heller, Á., Márkus, G., & Vajda, M. (1976). “Notes on Lukács’ Ontology.” Telos, 29, 160–181.
* Foster, J. B. (2022). “Lukács and the Tragedy of Revolution.” johnbellamyfoster.org.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