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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2시집 『밤으로 흐르는 강』의 시 세계
매몰된 신화를 꿈꾸는 소년
가. 서론
인간의 원초적인 정서는 고독과 그리움이라 할 수 있다. 고독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적이면서 때로는 영혼의 조용한 안식을 가져오기도 한다. 서정성(抒情性)은 사회가 혼탁할수록 심성을 정화하는 촉매가 된다. 우리 선조들은 굴욕과 인고의 세월을 겪어 오면서 설움과 정한(情恨)의 슬픔을 시와 노래, 그리고 춤으로 표현하면서 안으로 강한 결속을 다져 왔다.
요즘은 대량화의 시대이다. 물건도 똑 같은 크기와 무게의 물건들이 공장에서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고 여차하면 덤핑으로 팔려 나가곤 한다. 작가들이 쓰는 시도 대량적으로, 아니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현대시라고 주장하는 일부의 시들은 그 색깔이나 입은 옷이 동일할 뿐만 아니라 그 기교적인 형태까지 비슷하여 공장에서 대량화하여 찍어낸 싸구려 옷과도 비슷하다. 이런 작품은 한 번 쓰고 나면 버려야 하는 일회용이다. 일회용은 결국 산업공해만을 조장할 뿐이다. 시가 다양해졌다고는 하지만 현대시의 한 부분 속에는 곪고 썩어서 요란한 빈 수레와 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작품들이 있다. 오늘의 시를 보면 말장난에 그친 기교놀음, 감정이 정제되지 않은 작품, 이미지가 혼합되어 혼탁한 작품, 자아도취적 관념세계에 머물러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작품 등 그야말로 시의 공해 속에 묻혀 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때 묻은 거울을 닦듯 영혼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세워가고, 거기에 더해서 마음의 향기를 발할 수 있는 것이 시의 창조적인 작업이다. 특히, 서정시 창작은 오늘날, 시대의 요구이다.
서정시는 인간의 감정을 주조로 한 시이기 때문에 삶의 본질을 꿰뚫어 내기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커다란 위안이 되며 힘이 된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박유석 시인의 시 작품은 서정이 근간을 이룬다.
앞의 시집에서 살펴 본 박유석의 시적 라이프(Life)는 절망과 아픔의 환상으로 이어진다. 삶의 희망보다는 우울한 기억에 더 다가선다고 했다.
박유석에게는 늘 꿈꾸는 의식이 있다. 정신의 온전한 죽음위에 부활하고자 하는 죽음이다. 철저한 자기인식의 확인위에서 벌어지는 방황과 절망은 정신의 부활을 꿈꾸는 과정에서 받아야 하는 고통임을 스스로 체득하고 있다.
박유석의 작품에는 강과 산이 많이 나온다. 시집의 제목도 강으로 하거나 산으로 하기도 하였다. 이번의 시집도 ‘밤으로 흐르는 강’이다. 이 시집에는 연작시 「밤으로 흐르는 강∙1」에서부터 「밤으로 흐르는 강∙7」까지 실렸다. 「고혈압」,「정선아라리」 등의 연작시와 중국 기행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시로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내면의식을 흐르는 그의 존재론적 아픔과 고독, 방황은 「밤으로 흐르는 강」에서 어떤 서정의 양상을 띄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볼 일이다.
나. 본론
인간의 가장 존엄한 가치는 인간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존중하는 것이다. 환경에 대한 무분별한 이용은 인간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위협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인간의 귀중한 가치를 전제로 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낮출 용기가 있어야 한다. 인간의 갈등은 자신의 내부에 기생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발견해 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하여 자신의 내부를 통렬히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박유석에게 자주 등장하는 하늘의 의미는 무엇일까? 박유석의 ‘하늘’은 오직 유년의 하늘만이 푸르고 온전하다. 이제 그 유년은 시들어버렸다. 밤새 꽃들은 슬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허공이 되었다고 한다. 숲도 황달로 누렇게 변색되었기에 강은 어둠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어둠으로 흐르는 강은 절망의 강이 되었다. 유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부서지는 노을 갈피에 누워
머슴새
목이 쉬도록 울어대지만
부질 없는 일
허망의 그림자를 숨기고자
탈출을 시도하지만
생애란
흐르는 강물
아파한 만큼의
빛깔로
침묵의 강은 흐른다.
- 밤으로 흐르는 江∙3 -
삶이란 허망하게 흐르는 강물과 같은 것이란 것을 깨닫는다. 아픔은 치유되지 못한 채 침묵의 강으로 흐르고 있다. ‘밤으로 흐르는 강이 애절하다’는 서정의 토로(吐露)는 깊은 상처로 인한 것이다.
박유석은 통렬할 정도로 자신을 비판하고 질책하는 내면의 의식세계를 만나게 된다.
이름 있는
근사한 꽃이라는
착각 속에 살았던
시절이 부끄러운
요즘
별것 아닌
잡초밭을 경작하면서
찾아낸 기쁨
마음 빈 꽃들이
더 요란하게 치장을 하는
시대
있는 듯 없는 듯
잡초로
그렇게 살리.
- 「잡초∙1」 -
석가가 말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은 인간의 고귀성과 신성성을 가리킨 언어도단의 발상법이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자신이 보통 사람들과는 차별된다는 생각을 한다. 바로 부처가 말한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점점 아집과 교만과 무절제가 시작되고 어느 날 깊은 수렁에 빠졌을 때 새로운 눈을 뜬다. ‘아, 나는 별로 잘난 게 없는 보통 사람이었구나.’라고 깨닫는 것이다. 그 보통 사람의 삶이 바로 부처가 말한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세계인 것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가 순리적으로 체득된다. 세상은 마음이 공허한 꽃과 같은 사람들로 득실댄다. 그들은 모두 찬상천하유아독존격인 사람들로 행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참 모습을 내려다보았을 때 오직 진리의 길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박유석은 그 진리의 길 위에서 잡초의 아름다운 생명력을 발견한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아도 하루를 살고 호흡하며 지상의 복락을 누리는 잡초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삶이 가장 아름답고 지혜로운 삶인 줄을 알게 된 것이다.
문학의 목적과 목표는 미를 추구하는 아름다운 삶에 있다. 그것은 빛이 될 수도 있고 어둠이 될 수도 있다.
‘미’는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즐겁고 기쁘고 쾌락적인 성질’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더럽고 추악하고 혐오스런 것도 그 속에 내장되어 있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도 ‘죽음은 허무한 것이 아니라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이라고 찬미하였다.
더럽고 아름다운 것은 원래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몸속에서 밖으로 분출되면 더러운 것이 많이 있다. 똥을 몸속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예수님도 똥을 누었고 부처님도 똥을 누었고 공자님도 우리처럼 똥을 누며 살았다. 그러나 이처럼 몸속에 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추한 인간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 똥이 밖으로 나와 아무데나 널려 있을 때 그걸 혐오하고 기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는 그 똥이 양식인 때가 있었다. 사람이 혐오하는 것이 개에게, 대지(大地)에게는 양식이 되고 거름이 된다. 이처럼 아름다움 속에는 추함이 있고 추함이 있는 가운데 아름다움이 있다. 다만 작가는 그것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느냐 하는 관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바르게 삶을 직시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을 나누면서 미움도 원망도, 동반자로 여기며 사랑의 손을 잡고 갈 때, 시를 밤하늘에 뜬 예쁜 별이나 아름다운 꽃에만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시(詩), 시(詩)는 어디에도 구체적인 현상은 없다. 그러나 시(詩)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공기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죽음 뒤에는
새로운 탄생이
숨겨져 있다
아픈 만큼의 열매를 맺는
잡초.
- 「잡초∙3」 -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태어나고 죽음을 맞는다. 잡초는 여리고 약해 보이지만 끈질긴 생명력은 그 어느 식물보다도 강하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것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아픈 만큼의 열매를 맺는 잡초의 삶은 바로 뜨거운 민초들의 삶이며 위대한 생명의 호흡인 것이다. 박유석은 죽음 뒤에 오는 새로운 탄생의 원형질 같은 아름다움을 늘 그리며 실상은, 시로 뜨거움을 덥히는 열정의 시인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봄눈 내리는 창가에서
부서지는 바람을 본다
귓속말 강물로 풀어
주문을 외우며
관속에서처럼 편한
잠이 매달린다
차분한 손놀림
서두름이 없이 피고 지는
민들레 뜰에서
하나님에게 전화를 건다
생애는 소꾼놀이였다고
허수아비춤을 추면서
봄눈이 스러지는 거리에 나서면
잡으려면 잡히지 않는
이승에서의 도깨비놀음을 본다
봄눈 내리는 들판에 서면
꽃상여
살구꽃 피고지는 고향 동구 밖
굽이 돌아 저승가는 길을 본다.
- 「봄 눈」 -
시집 『밤으로 흐르는 강』은 1995년에 발간한 시집이다. 박유석의 나이 55세, 인생에서 가장 기름지고 성숙한 삶의 사유가 무르익는 시간이라 보여진다. 그의 작품 또한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가 보여진다.
그는 ‘생애’라는 단시에서 생애를 ‘흐르는 / 물 // 흐르고 / 흘러 // 그렇게 / 흘러가버리는 / 순리’라고 짧게 표현하였다.
물이 흐르는 것 같은 삶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물처럼 사는 순리를 깨우친 박유석 시인의 모습은 아름다움에 물드는 한 폭의 노을을 보는 듯하다. ‘봄 눈’에서처럼 그는 관속의 죽음처럼 편안해지는 세계에 들어갔다. 생애는 소꿉놀이였다고 하나님에게 전화를 건다고 하였다. 동심이 묻어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또 살구꽃 피고 지는 고향 동구밖 구비 돌아 저승가는 길을 본다고 했다. 모든 삶을 내려놓고 걸어가는 탈속한 거사(居士)의 모습이다.
시 ‘고혈압’ 연작시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드나드는 긴박함과 체념의 미학을 본다.
뚝이 새던 날 / 오염된 강에서 / 구토는 시작되었다 // 우주가 / 이명에 부서지고 // 촛불 하나 / 무너지는 노을로 / 추락하고 있었다.
- 「고혈압∙1」 -
화사한 햇살 / 쏟아지던 날 / 두려움의 화살은 날았네 // 무기력한 의지 / 힘없이 부서지고 // 나만은 예외라는 확신 / 무참히 깨어버린 / 너
- 「고혈압∙2」 -
이제는
더 소유하려고
아등바등 말아야지
떠나감도
아쉬워하지 말아야지
- 「고혈압∙5」 -
바람으로
유유히
넉넉히
흔들리며 가자.
- 「고혈압∙6」 -
위 두 편의 시는 직설적 화법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고혈압으로 시달리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하는 심정이 있다. 죽음 직전에는 늘 질병이 찾아오거나 사고가 찾아온다. 그것을 대응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박유석은 회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에 담담하다. 소유에 대한 집착을 줄이려 한다. 그리고 유유히 넉넉하게 가려고 한다. 그가 죽음의 문턱에서 얻은 해탈의 방법이다.
이러한 사유의 길목에는 아름다운 미감이 드러난다.
백목련
은빛 날개로
하얗게 울었다
간절한 소망도
못 들은 척
미워할 사이도 없이
달빛이 되었구나
너.
아픔에 대한 백색미의 발현이 백목련을 보면서 이루어졌다. 아픔이 청각적 이미지인 ‘소리’로 아프게 부서져 내린다. 백목련이 피어난 흰 목련의 살갗은 하얀 울음소리로 변용되어 마음이 온통 간절한 소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못 들은체 하는 목련의 모습을 미워할 사이도 없이 달빛이 되고 말았다. 비감의 서정이 달빛 아래 펼쳐지고 있다.
질병으로 찾아오는 육신의 아픔과 사회에서 빚어지는 비진실의 모습을 보면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들 수밖에 없다. 거기에서 밝혀든 것은 ‘허망함’이다. 이별연습하며 노을이 지고 숱한 약속은 깨어진 채 저물어가는 세상을 본다. 강은 침묵으로 흐를 뿐이다. 막막한 강의 흐름과 인생의 흐름이 닮아 있는 것이다.
옆을 돌아보면 그 옛날의 고향에서 지내던 다정한 이웃은 없다. 시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이웃’이란 그저 빌딩이고 자동차의 물결이기에 허전한 잡것들이다. 원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타인 같은 존재로 서 있다. 실존적 외로움과 절망을 도시 곳곳에서 만나는 것이다.
두 번 째 시집에는 연작시 정선아라리가 9편 실렸다. 정선아라리는 정선에 살던 기층민의 애환이 담긴 노래이다. 이번 9편의 정선아라리에는 정선의 자연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정과 사랑을 추억하는 아픔의 노래이다.
7년 전 정선에서 지낼 때 정선의 모습은 순수와 진실의 표정이 고인 고향 같은 안식처였다. 그곳을 다시 찾는다. 그러나 그곳에는 반가움 대신 쓸쓸함이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고 실망하게 된다.
정선아라리∙1
7년 만의 귀향 반기며
달리는 열차 속으로
나무들이 뛰어와
손을 잡는다.
그러나
옛숲에 날던 새들은
어디에 숨었나
바람에
꽃잎만 지고 있었네
예나 지금이나
한폭의 풍경화로
신화를 지키고 있는데
매정하게 떠났었구나
텅빈 광원 사택 자리
햇살을 가리고 있는
산그늘
그래도 기차는
한을 토하며
터널을 빠져나와
쉰 목소리로
슬픔을 감추고 있었네.
연작시 ‘정선아아리∙2’에서 보면 그가 사랑한 것은 정선의 자연이다. ‘숲’, ‘냇물’, ‘안개’, ‘바람’, ‘새’들이었다. 그들은 시인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았는데 본인은 까맣게 잊어버린채 살았다고 미안해 한다. 탄마을을 찾아간 곳에서는 아픔의 통곡소리를 듣는다.
매몰된 신화를 찾아
탄마을에 갔더니
무섭도록 시린 고요 뿐
노송 몇 그루
아픔을 숨긴 채
통곡하고 있었다
기억의 빗장을 잠근 채.
- 정선아라리∙6 -
문학은 은연중에 자유와 억압까지도 글 속에 내포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결정되어진 전기회로 같은 것은 아니다. 또 ‘자유와 진실 사회적 억압이나 불리’ 등을 현실적인 방법으로 성취하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다. 문학이란 어찌 보면 사회적 현상의 이상을 언어로 실현하고자 하는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상상력의 힘이 어떻게 전해지는 가는 별도의 문제이다.
「정선아라리∙6」에서는 매몰된 신화에 대한 상상력이 고요와 아픔의 상징성으로 표출되었다. 또한 언어로 실현하고자 하는 상상력은 ‘아픔과 통곡’이란 상상적 현실로 드러내었다.
중국 기행을 하고 난 작품에서는 동족을 만난 기쁨, 중국 문화에 대한 생각, 한민족의 동질성과 이질성, 세월의 무상함 등이 그려져 있다.
김치와 고추장
북경의 조선 음식점
김치와 고추장 그리워
찾아갔건만
김일성 뺏지를 단 여성 동무
그들이 주는
김치찌개를 먹으며
휴전선은
남의 땅에서도 존재했다
그래도
김치내음에 묻어버린
분단의 슬픔.
북경에 가면 우리의 음식이 먹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북경의 조선음식점을 보면 고향처럼 반가웠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김일성 뺏지를 단 여성들을 보고는 이곳에서도 분단의 비극을 맞보았다는 글이다. 고조선에서 부여로, 부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으로 또 삼한으로 이어져 오다가 고려라는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그리고 조선으로 이어오면서 1000년의 시월이 흐른 뒤 우리는 다시 남북으로 갈라졌다. 분단의 아픔을 안은 채 이산가족의 슬픔은 유산처럼 대를 이어 전해진다. 세계에서 유일의 분단국가가 된 우리나라이다. 민족 역사의 비극을 중국에서까지 맛보았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슬픔이 아닐 수 없다. 통일문학에 대한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할 시점에 우리는 와 있는 것이다.
다. 정리하는 말
시인의 기능은 무엇인가. 보들레르가 보여주는 ‘악의 꽃’은 사람들의 생활 속에 부패한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부정한 방법에 의해 이루어진 일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모습은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부패의 연못 속에서 과자껍질처럼 떠돌기도 한다. 그 연못에 생각의 뿌리를 드리우고 미나리처럼 정화시키는 것을 해내는 몫이 시인의 역할이다.
시인은 자신의 자유에 의해서만 책임질 의무를 갖는다. 밤의 동굴에서 본래의 모습을 찾는 것도 시인의 자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시인이 미나리처럼 뿌리를 내리는 세상은 아름답고 정갈한 세상이다.
박유석의 시가 외형적으로는 매우 어둡다. 본질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그 무엇이 내부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나 그리움, 진실이나 순수성이라는 추상적 상징성들은 자연의 진실한 모습 앞에서 구원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은 모두 부자연스럽고 환경파괴적이고 개인의 이익이나 집단적 이익 앞에 무너져 내렸음을 확인한다. 시집 『밤으로 흐르는 강』에서 보여주는 시편들은 솔직하리만치 직설적 시법에 의존하였다. 그것은 오히려 강한 자극과 전달력을 동반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화려하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다만 순수를 오염시키지 않으면 된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그렇고 자연을 아끼는 그런 마음이 그러한 것이다. 정선아라리에 묻어나는 시의 가락이 또한 그렇다. 시집 속에 등장하는 박유석은 매몰된 신화를 꿈꾸는 영원한 소년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3) 제3시집 『산하고도 정이 들면』과 제4시집 『너에게 준 산』의 시 세계
- 자연을 통해 따뜻한 세상 만들기
가. 글 열기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박유석 시인은 아주 소탈하고 진솔하다. 마음먹은 일은 활달하고 투명하게 처리하신다. 꾸미거나 감추려고 하지 않고 감정이 굵고 직선적이시다. 이러한 성격은 때로 상대방으로부터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박유석 답게’ 만드는 뼈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큼직한 체구만큼이나 후덕하고 정이 많으시다. 그래서 이 분의 작품을 눈여겨보면 행간에 스며있는 정을 발견하게 된다.
생활 속에서 감정의 분출로 얻어지는 박유석의 시는 크게 세 부류로 특징지을 수 있다. 첫째는 감성 속에서 분출되어 나오는 그리움과 기다림의 서정성이며 둘째는 자연과의 만남을 통해 얻어지는 삶의 향기이다. 셋째는 평범한 생활에서 새롭게 발견한 아름다움의 실체들이다.
나. 본론
<1> 그리움과 기다림의 서정성
어떤 면에서 시 창작은 자연과 사람이 얼키고설키며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옷 매무새를 다시 한번 여며보는 외로운 작업일 수 있다. 이런 의미로 보아 시에서의 서정성은 하나의 축이다. 시가 필연적으로 서정시여야 한다는 포우(E. A. Poe )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서정은 우리의 삶을 기름지게 해주는 감각의 근원임을 알고 있다.
박유석의 작품에 흐르는 전반적인 기류는 잔잔하게 여울지는 싸리꽃 같은 감정의 꽃잎들이다.
다목리 오는 길에는
옛 고향 마을처럼
개나리 노란 등을 내걸고
진달래 풀 숲 봄을 깨우며
새들을 날린다
마을
복숭아꽃 살구꽃속에
집들은 낮잠에 졸고
아련한 그리움을 풀어낸다
다목리 오는 길은
시심에 젖어
마른 영혼에 꽃을 피우는
흠뻑 향수에 젖게 하는
길.
- 「다목리 오는 길∙2」 -
마을에는 개나리가 노란 꽃등을 걸고 있다. 진달래도 활짝 핀 봄날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복숭아꽃 살구꽃이 핀 마을의 집들은 낮잠 속에 조는 모습을 보고 아련한 그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다목리의 봄은 향수에 젖게 한다.
이 시에서 나타나는 정서는 아련한 그리움이다. 이러한 그리움은 시인의 메마른 영혼을 젖게 해 준다. 개나리, 진달래, 복숭아꽃, 살구꽃, 낮잠에 졸고 있는 집들은 작자의 고향을 떠올리게 하고 과거로의 회귀를 통해 본질적인 자아를 만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움을 찾아 떠나는 시인의 삶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념의 세계에 머물게도 한다.
삶이란
막연한 그리움이구나
종종
창가에 서서
앞산과 지나가는 차들을 보며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오늘은 아무도 찾아온 이 없지만
그래도 그 기다림의 시간은 아름답다
길들였던 것들을 버리고
다시 내가 길들여야 하는
생소한 곳에서의 일상들
적당한 웃음을 날리고
때로는 빛바랜 언어들을 토하며
그렇게 이 봄이 가는구나
- 「그렇게 이 봄이 가는 구나」 -
시인이 바라는 기다림은 꼭 만나야 할 대상이 있기 때문 만은 아니다. 누군가 찾아오기를 바라는 막연한 기다림이다. 그 기다림의 끝에서 만나는 것은 한 계절이 지나가는 외로움이며 그 속에서 길들였던 것들을 버리고 다시 길들여야 하는 삶의 또 다른 무게이다.
이처럼 시인의 어깨 위에 얹혀지는 것들은 다음 작품 <생애란 봄꿈>에서 알 수 있듯이 봄이 가고 계절이 바뀌는 일상에서 맛보는 쓸쓸한 공허함의 무게들이다.
생애란 봄 꿈
잎이 돋고
꽃이 피는구나 했는데
단풍이 떨어지고
눈이 쌓이고
다시 봄은 오고
스치듯 바람같이 지나간
세월아
숨어서 바꿔놓은
백발아
옛 어른들 말씀
실감 못 했는데
언제
내게도 찾아 왔는가
생애란
봄꿈
<2> 자연과의 만남에서 비롯되는 향기
박유석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또 하나의 표정은 자연과의 따뜻한 만남이다. 자연과의 만남을 통해 자연에 깃든 지혜를 배우고 자연을 통해 삶의 이치를 승화시키고 있다.
이곳
다목리에 와서
산에게서 배운 것은
시간을 기다리는
지혜이다.
초조해 하거나
성을 내거나
조바심 하지 않고
떡 버티고 앉아
웬만한 바람에도 끄덕 않는다.
산과 이야기 나누며
세월이라는 무형으로
그물코 한코 한코에다
시간을 담아
잊어버리는 습성
버리는 연습
죽음을 맞을 준비를
산에게서 배워 간다.
- 「산에게서 배워 간다」 -
산은 예부터 우리에게 신뢰의 대상이 되어왔다. 산을 통해서 나를 들여다보게 되고 산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며 자성의 시간을 갖게 한다. 박유석은 고향 같은 다목리에 와서 진실한 삶의 씨를 뿌리는 농부의 마음이 되고자 한다.
그것이 아픔일지라도
안일의 텃밭에서
자만의 세월을 축내며
가꿔온 쭉정이 뿐
버릴 것 다 버리고
이곳에서
씨뿌리고 가꾸는
농부되리라
그것이 아픔일지라도
자신을 겸손하게 드러낼 수 있음은 오직 마음을 비움에서 비롯된다. 이순(耳順)의 문턱에서 그는 부질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바탕 위에서 눈이 부시게 흰 나비 무리가 비상하는 하늘을 준비하려고 한다. ‘비상하는 하늘’을 통해 불순물이 거세된 순수의 삶을 지향하고 그것은 아름다운 향기로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다목리에서 다시 태어나며
다시
태어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포플러 가지에
까치집 짓고
온통
눈이 부시게 흰 나비 무리
비상하는
그런
하늘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래의 작품 「산하고도 정이 들면」에서 보면, 박유석의 산에 대한 친화력은 마치 할아버지와 아이가 대화하듯 너무 정답다. 마음을 주면 따뜻한 마음은 되돌아온다.
산하고도 정이 들면
화천에 처음 와서는
내가
산으로 갔는데
산하고 정이 들면서
이제는
산이 내 곁에 오느라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운다.
동시처럼 앙증한 맛이 나는 시이다. 산하고 정이 들면서 산이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운다는 것이다. 산이 가까이 다가오기 위한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마치 할머니가 아기를 사랑하듯 산에 대한 사랑이 알뜰함을 볼 수 있다.
산과 작자의 교감이 시심으로 무르녹아 이렇게 재미있게 이루어진 작품은 보기 드물다. 그는 자연과의 끊임없는 교류를 꿈꾸고 그래서 자연에 대한 애정은 지극하다 못해 뜨겁다.
또 아침마다 박유석의 산은 눈을 비비며 비틀 걸음으로 걸어오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꿈에서조차 영혼의 숲에 소쩍새를 보내는 것이다.
시인의 자연에 대한 애정어린 눈은 작품 「별」을 통해 어둠속에서 더욱 빛이 되는 새로운 존재를 확인하기도 하고 「다목리 까치집∙2」에서는 쓰러질 것 같은 나무에 집을 짓는 까치와 우리네 삶을 견주어 연민과 동정의 눈길을 주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시적 확인은 「봄눈∙2」에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확산됨을 보게 된다.
세상 살아가는 일 / 봄 눈 같으면 / 얼마나 좋을까 // 이웃의 허물도 쉽게 용서하고 / 과일상자에 숨겨둔 뭉치돈 꺼내 / 가난한 자 도와주며 / 버리고 버려 홀가분한 어깨로 / 이 시대의 숱한 아픔 함께 나누며 / 그렇게 살았으면 / 오죽이나 좋으련만 // 미워할 줄 모른 채 / 마음을 비운채로 / 스르르 녹아버리는 / 봄눈.
- 「봄눈∙2」 -
‘봄눈’은 스르르 녹아버린다. 봄눈이 녹는 모습을 보며 미워하는 마음도 봄눈처럼 녹기를 바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봄눈에 비유하여 우리 사회가 용서하고 도와주며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더불어 살아가고 싶은 훈훈한 사랑을 제시한다. 즉, 그는 맑은 세계에 홀로 칩거하는 것을 거부한다. 맑음을 함께 공유하고 싶어 이웃과 따뜻한 세상을 함께 하고 싶은 것이다.
달밤에
까까중 머리
어릴 적 뛰어놀던
고향마을에서처럼
개짓는 소리와
개구락지 우는 소리가
어우러지는 밤
참으로 오랜만에
달
산
내가
정갈한 마음으로
밤을 지킨다
함께.
시인이 세상을 향해 가장 의미있는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것은 자연과의 만남에서 비롯되는 시인의 눈과 귀가 열려있기 때문이다. 박유석은 개짖는 소리와 개구리 우는 소리가 어우러지는 원형적인 삶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그리고 달과 산과 시인 자신이 하나가 되어 밤을 지키려는 의식은 첨단 문명시대에서 홀로 정직한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영원한 시인의 목소리이며 삶의 향기이다. 그는 아울러, 자연을 통해 따뜻한 세상 만들기를 하고 있다.
<3> 생활속에서 발견하는 기쁨의 노래
박유석은 대체로 독자들이 쉽게 받아들이는 시들이다. 시가 쉽다는 말은 글의 무게가 가볍다는 뜻이 아니라 쉬운 언어로 독자들의 가슴 가까이 닿을 수 있다는 말이다. 머리로 짜 맞추어 예쁘게 다듬고 꾸미는 글이 아니라 경험들로 축적된 삶의 일상속에서 가슴으로 걸러낸 감동의 덩어리들이다. 따라서 시어의 투박함이 정감을 느끼게 하고 울림 또한 크다.
진하 은하의 편지
다목리에서
나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애쓰던
삼월초 오후
후평초등학교 삼학년 진하 편지를 받았다.
머리카락이 이제는 좀 났느냐 물어
오랜만에 웃고 있는데
춘천에서 전화가 왔다.
동생 은하도 편지를 한날 같이 보냈는데
주소를 바꿔 써
자기가 자기 편지를 받고 울었단다.
며칠 후 눈물번진
은하의 편지를 받고
가슴이 저리도록 아팠으나
이쯤 나이에서는
뒷모습을 남기기 위해 사는 건가
다목리 나무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다목리에서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에 대한 사랑도 지극했다. 위의 시 「진하 은하의 편지」와 「소꼽놀이」등에서 보여주듯 생활에서 묻어나는 정감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온돌방 같은 따뜻함으로 전해 주고 있다.
소꿉놀이
부녀회장 감투 벗어버리고
온달 찾아와
파 달래 냉이 오이 호박
텃밭에 좌판 펼쳐놓고
소꿉놀이 한다.
지난 해 죽어버린
풀잎의 눈물로
꽃을 피워내며
두더지처럼 흙을 뒤집고 있다
몸은 첩첩산중에
갇혔어도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소꿉놀이 한다.
다. 정리하며
지금까지 몇 편의 시들을 살펴보았다. 박유석의 시는 서정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시적 직관의 세계 밖에서 시도된 의도는 시적 의미의 세계에 머물며 사물에 대한 감정의 흐름을 본다. 자연과 사물, 인간에 아픔을 공유하고 싶은 작가의 의도는 ‘선(善)’의 세계에 닿아 있다.
시적 요소인 상상, 지성, 감성, 본능과 욕망, 의지, 사랑 등의 요소 중에서 정감을 실 뽑듯이 뽑아 올려 시가 태어났다. 박유석에게 있어 이러한 요소들은 대부분 산이나 강, 고향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을 통해 어우러지는 인간과 따뜻한 세상 만들기라 보여진다.
- 마음에 산을 담은 그리움
가. 서론
두 권의 시집 『산하고도 정이 들면』과 『너에게 준 산』은 모두 산과 연관된 시집들이다.
박유석의 시 속에는 ‘산’이 많이 등장한다. ‘산’에 대한 애착이 깊은 것이다. 그 이유는 그의 산문집에 쓴 글에서 알 수 있다. 큰 산은 작은 산을 품어주니 작은 산은 큰 산의 희망이요 즐거움이고 보람이라고 여긴다. 산은 가족이요, 이웃이요, 마을이요, 자기 자신이라 여긴다. 가까운 산은 사랑하는 아내요, 자식이요, 부모형제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가까운 산을 모두 잃어버렸다고 한다. 가족과 부모를 잃은 지금의 자신은 외톨이 산이요, 바보 산이요, 흔들리는 산이라고 하였다. 자신의 무력함 때문에 가까운 산들은 모두 깎여 나가고 대지가 되었고 돌부러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산에 대한 생각이 담긴 작품들이 박유석의 ‘산’ 작품이다.
가끔 고향에 가면 어릴 적 뛰놀던 산들이 흔적도 없이 파여 나갔지만 강 건너 앞산과 뒷산이 남아있는 게 다행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가까운 산 덕분에 오늘도 작품 몇 줄 쓸 수 있는 용기가 있다고 하였다.
‘산’을 소재로 하여 쓴 작품의 의도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람은 돌이나 나무로 된 고형물(固形物)이 아니다. 즉,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감정 여하에 따라 삶의 양태도 달라진다. 한편의 시가 상징적인 의미를 두지 않아도 감정의 여울목에서 듣게 되는 서정성 짙은 시는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해 준다. 오늘날과 같이 극도로 메말라 가고 황폐해 가는 인간의 늪 속에서 서정성이야 말로 사람답게 해 주는 좋은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부터 그의 산에 대한 작품을 눈여겨보는 이유이다.
나. 본론
박유석의 ‘산’은 ‘고향’과도 밀접하다. 박유석의 ‘고향’은 아주 각별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고향이란 포근하고 따스한 어머니 품안 같은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어린이나 어른이나 노인이나 돌아가고 싶은 막연한 그리움이요, 꿈꾸는 세계가 바로 고향이다. 그곳이 바닷가 산 속 강가 도심의 어디여도 다름이 없이 똑같이 느끼는 아름다움이요, 어려움에 처했거나 지금의 삶이 고통스럽더라도 그 고난을 극복할 힘을 주고 의지하며 기댈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가 고향이다. 나의 고향은 화양강이 흐르고 공작산을 뒤에 품고 있는 작은 농촌마을이다. 오늘 내가 글을 쓸 수 있게 해준 것은 고향의 산과 시냇물과 종달새 울음과 풀벌레와 송아지 울음 이 모든 것이 어울려 교향악을 이루고 별과 달과 해와 무지개와 이슬비와 곡식들과 가축들, 길 옆에 한 포기 풀까지도 모두 나의 스승이요, 나를 있게 한 근원이요, 힘이요, 용기요, 꿈이다. 이런 고향의 모든 것들이 내 마음에서 함께 자랐고 그것이 정신과 의지와 예술의 혼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쓰는 글은 그들의 이야기며 그들의 속삭임이며 그들이 내게 준 거짓 없고 순박한 선물이다. ’
그러니까, 박유석은 고향은 강과 산이 있는 마을이다. 그의 고향은 산이라 해도 좋은 것이다.
다목리에 와서
낮과 밤
한폭의 산수화 병풍 속에서
산다
안개의 면사포를 벗고
수줍은 신부처럼
살포시 숲을 커텐 속에 숨겼다
한 송이 꽃을 들고
산새를 날리는
산
그 산의 병풍 속에서
매일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
- 「산수화 병풍 속에서」 -
다목리 산의 모습은 마치 고향의 산처럼 여겼다. 아름다운 산의 모습을 보고 매일 한 폭의 산수화 병풍 같은 곳에 살며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즐거움을 느낀다.
화천에 교장 발령을 받고 간 곳이 다목 초등학교 이고 마을 이름이 다목리이다. 그곳에 있는 산을 보며 마치 고향 같은 마음을 느낀 것이다. 또 그곳의 산과 여울을 보며 삶의 모습을 깨닫는다. 산굽이 돌면 또 산굽이, 여울 건너면 또 여울이다. 인생도 어려운 일 끝나는 가 싶으면 또 다른 힘든 일이 기다린다. 이게 우리네 삶이다.
예부터 산은 우리 민족의 의지처였다. 천제를 지낼 때에는 산 위에 올라 지냈고 단군도 태백산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그만큼 산은 우리 민족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런 산의 모습을 보며 박유석은 배운다. 시간을 느긋이 기다리는 지혜이다. 우뚝하게 버티고 앉은 산은 눈이 쌓여도 끄떡 없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당황하지 않는다. 늘 의젓한 모습으로 나무와 풀을 가꾸고 새들을 품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박유석은 산으로부터 ‘잊어버리는 습성’, ‘버리는 연습’ 뿐만 아니라 ‘죽음을 맞을 준비’도 산에게서 배운다고 하였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포의 대상이다. 그런 죽음을 맞는 준비조차 산에게서 배운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박유석에게 있어 산은 또 다른 의미를 준다. 산은 환희로움이기도 하고 꿈이기도 하다. 그의 꿈은 청산에서 지내는 것이다.
하늘은
온통 은비늘
수만 마리
흰 나비 떼
잡목림에 쉬었다가
이내
꽃잎으로 떨어진다
나비야 나비야
흰 나비야
너도 날고
나도 날자
청산에서
- 「봄눈∙1」 -
매우 낭만적인 즐거움이 샘솟는다. 봄눈을 수 천 수만의 나비 떼로 본다. 신선한 표현은 보기 힘들지만 작자의 확고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봄눈∙2」에서는 봄눈이 스르르 녹는 특성을 이용하여 시를 썼다. 세상을 갈아가는 일이 ‘봄눈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갈구한다.
세상 살아가는 일 / 봄 눈 같으면 / 얼마나 좋을까 // 이웃의 허물도 쉽게 용서하고 / 과일상자에 숨겨둔 뭉치돈 꺼내 / 가난한 자 도와주며 / 버리고 버려 홀가분한 어깨로 / 이 시대의 숱한 아픔 함께 나누며 / 그렇게 살았으면 / 오죽이나 좋으련만 // 미워할 줄 모른 채 / 마음을 비운채로 / 스르르 녹아버리는 / 봄눈.
- 「봄눈∙2」 -
‘봄눈’은 스르르 녹아버린다. 봄눈이 녹는 모습을 보며 미워하는 마음도 봄눈처럼 녹기를 바라는 것이다.
시적 직관의 세계 밖에서 시도된 의도는 시적 의미의 세계에서 머물며 사물에 대한 감정의 흐름을 직조한 것을 본다. 아픔을 공유하고 싶은 작가의 의도는 ‘선(善)’의 세계에 닿아 있다. 위의 시를 보면 박유석의 시가 탄생하는 과정을 알 수 있다. 상상, 지성, 감성, 본능과 욕망, 의지, 사랑 등의 요인 중에서 정감을 실 뽑듯이 뽑아 올려 시가 태어난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부분 산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봄의 산」에서는 새롭게 변화하며 봄을 맞는 즐거움이 묻어 있다. 해마다 봄은 온다. 꽃들이 핀 봄산을 보면서 꽃을 다시 볼 수 있음에도 행복해 한다. 그가 늘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는 산은 고운 아낙으로도 대변된다. 계절이 바뀜에 따라 형형색색의 옷을 갈아입는 아낙의 모습을 시적 상상력으로 그리는 것이다.
‘산’과 관련된 또 하나의 작품이 「너에게 준 산」이다. 이 작품은 2001년에 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박유석은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를 담았다고 술회하였다.
너에게 준 산
작은 산 하나
너에게 주던 날
은하수가 떴었지
떡
버티고 앉아
숲과 샘
별과 달
새와 바람을 다스린다
그 견고한
믿음
산의 뿌리를 심어준
너.
이 시에 나오는 ‘작은 산’은 어느 날 그녀와 수타사에서 돌 하나를 주어주며 마음을 준 날을 기념하는 시라고 하였다. 그녀와 함께 살면서 행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보며 고마웠던 시간이 담겼다고 한다. 이 시에 등장하는 새는 그녀라고 여겼다고 한다. 자신을 나무, 그녀를 새라고 말이다. 이외의 많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나무와 새도 그렇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나무는 본인 자신이고 새는 그녀라고 말이다. 그녀에게 산을 주던 순간은 아름답고 진실하고 순수했다고 한다.
박유석의 산에는 다른 산처럼 나무와 새가 날아다닌다. 나무가 된 자신의 사랑을 ‘나무의 사랑법’이라고 하였다.
나무의 사랑법
나무의 사랑법은
짝사랑법이다.
바람은 수도 없이 스쳐가고
구름도 종종 쉬어 가며
초승달 가지에 걸렸다 도망친다
새들도 둥지를 틀었다
뿔뿔이 흩어져 날아간 후
다시 찾아오지 않아도
원망 한번 하지 않으며
모든 것 줄 뿐
마냥 기다린다.
나무에게는 바람이 찾아온다. 구름도 종종 쉬었다가 간다. 초승달도 가지에 걸렸다가 도망친다. 새들도 둥지를 튼다. 그러나 뿔뿔이 흩어져 날아간다. 다시 찾아오지 않아도 원망 한 번 하지 않고 새를 마냥 기다리는 사랑, 그것이 박유석 만의 독특한 나무의 사랑법이다.
다. 글을 맺으며
서정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번잡하고 들뜬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혀 주며 마음의 평안을 얻기도 한다.
서정시는 시대성이나 사회성, 사상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서정시를 읊을 수 있다는 것은 현실에 물들지 않고 마음이 순수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산을 좋아하고 산을 부모형제 아내 친구로 생각하는 박유석의 산에 대한 ‘서정성’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소박한 아름다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박유석은 새를 마냥 기다리는 나무의 사랑법처럼 마음에 산 하나를 담고 그리움의 나무를 키우며 산을 지키는 산지기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4) 제5시집 『그래도 저 강은 흐르는구나』와 제6시집『연민과 용서의 강』의 시 세계
욕망의 남은 그늘에서 기댄 종교의식
가. 서론
나는 지금까지 시를 쓴 일에 대해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잘못한 일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도 않았다. 박유석 시인이 쓴 시집들을 읽으면서 나는 깨달았다. 시를 쓰는 것이 참 잘한 일이라고…. 왜냐? 박유석 시인의 시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피를 토하는 아픔과 후회, 자책을 하는 시의 구절들을 보면서 그것은 박유석 시인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고 우리 모두의 참회라는 것을 알았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한 일에 대해 후회나 반성에 몹시 게으르다. 나도 그랬다. 그런 일은 우선 자신을 속이는 행위가 된다는 걸 알았다.
시집의 페이지를 점점 많이 넘길 때마다 간절한 기도 같은 진실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어찌 마음이 쏠리지 않을 수 있으리. 이제 그 내면의 솔직 담백한 언어의 세계를 들어가 보고 싶은 것이다.
이 시집에는 정신과 육신의 아픔이 드러나 있다. 병원 생활을 통한 고뇌와 체념, 달관 등도 보인다. 그러면서 욕망의 남은 그늘에서 종교에 기대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그 작품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나. 본론
<1> 자신을 마음에 가둔 정신의 어둠 상황
박유석의 동시나 시에서는 산과 강이 많이 나왔다. 산은 고향이요, 어머니였다. 그리고 새를 기다리는 나무를 키우며 사는 생명의 터였다.
강은 무엇일까? 앞에서도 『밤으로 흐르는 강』 시집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또 다른 모습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박유석의 작품에 등장하는 강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물론 작품에 따라 차이가 있을 터이다. 우선 「그래도 저 강은 흐르는구나」의 시를 보자.
사는 일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던 날
가슴이 더욱 시리다.
늘 안개 낀 것 같은 일상에서
이렇게 사는게
살아있는 걸까
회의를 퍼 먹고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요즘
때로는 과음으로 기억이 끊기지만
폭우에 유실된 둑인냥
뻥 뚫린 세상
간간이 마음 둘 곳이 없구나.
과거의 내가 죽어서
사는 영혼
어떻게 허수아비로 살게 하고
바람이 된
그는 편한 잠을 잘까.
텅빈 한해가 지고 있건만
잃어버린 신비의 하늘을
언제 쯤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래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저 강은
모른 척 흐르고 있네.
미련을 버린 숲
집착을 버린 강변
그 자리를 채우며
강물은
숨어서 흐르는구나.
훗날
육신의 옷을 벗고
영혼의 옷을 입는 날까지
믿음과 인내로 산을 넘고
강이 되리라
강물로 흐르리다.
- 「그래도 저 강은 흐르는구나」 -
아직도 삶에 익숙해지지 않고 마음이 쉽게 흔들리는 모습, 기계적인 삶 이런 것들이 마음을 괴롭힌다. 마음 둘 곳 없는 허수아비의 삶을 돌아본다. 그곳엔 바람이 된 그가 있고 그에 대한 원망도 스며있다. 그래도 작은 희망을 가져보지만 강은 모른척 흐르기만 한다.
이 시에 등장하는 강은 모든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흐르는 강이다. 시적 화자는 그래서 강이 되리라고 말한다. 번뇌와 아픔을 ‘강’이란 대상에 얹어 해소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다고 보여진다. 미련을 버린 숲이나 집착을 버린 강변을 채우며, 숨어서 흐르는 강물이기에 말이다. 영혼의 옷을 입는 날엔 믿음과 인내로 산을 넘고 강이 되리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강’은 화자가 ‘되고 싶은 강’이다. 편안히 근심과 걱정을 떠나 흐르는 강이기 때문이다. 이걸 보면 박유석은 ‘강’과 ‘산’에다가 매우 중대한 관념을 설정하여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시편들이 독백으로 구술해놓은 듯한 의미를 따라 읽어가는 시 편들이다.
- 윗부분 줄임 -
세상에서 설 곳을 잃고
떠도는
가슴이 빈 자에게
어디에간들
신나는 일
뭐 있겠는가
옛날의 너는 죽은지 오래야
아무렇게나 살아
이 머저리야.
- 「아무렇게나 살아 이 머저리야」 일부 -
자신에게 독백처럼 내뱉는다. 자신을 학대하는 인상도 짙고 혐오하는 인상도 든다. 또 인생에 대해 체념한 듯한 모습이기도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무렇게나 살라고 하는 그것’이 현실적 삶의 요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인지도 모른다. 즉, 가장 지혜로운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자물쇠를 채우고」에서나 「두뼘 밖에 안 남은 생애」에서 보면 자신을 가두어놓은 정신의 어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안한 마음이 나타난다.
테라스에서
별을 보며
달빛에
가슴이 따뜻했는데
언젠가부터
커텐을 치고
별을 안 본다
달빛도 못오게 했다
촉촉이 젖은 기억들을
지우려고
스스로 마음에
자물쇠를 채우고
무덤같은 방에서
미로를 맴돈다
암 치매 보험을 들고
저만치
죽음의 강을 두려워한다.
- 「마음에 자물쇠를 채우고」 -
커텐을 치고 별을 보지 않으려한다. 달빛도 못 오게 했다. 스스로의 마음에 자물쇠를 채우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촉촉이 젖은 기억들 때문이다. 그것들을 지우기 위해서란다. 그 ‘촉촉히 젖은 기억’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아름다운 것들과의 단절로 인해 모든 마음의 문을 닫아놓으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덤 같은 방에서 미로를 맴돈다. 그러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공포마저 느낀다.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고 그로 인해 고통과 방황은 지속된다.
<2> 기독교적 신앙으로의 발걸음
고독의 창가에서 문을 닫고 커튼을 치고 점점 어둠속에 가라앉는다. 그러나 주저앉을 수만은 없다. 종교적인 구원을 바라고 싶다. 그래서 얼마간 기독교에 귀의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히브리서 11장 1절을 기억해내며 하나님에게 길을 열어달라고 구원을 몸짓을 보낸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아무런 응답이 없다고 하였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이다.
믿음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또한 믿음은 선진들이 증거를 보였지만 다 믿음의 성과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약속 받은 자들에 한정하는 것이다. 그 믿음의 증거는 실천의 행위들이다. 단순히 바라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믿음의 약속을 받기가 힘들다. 모두다 자신이 한 일을 가장 정직하고 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믿음도 약속받을 수 있을 때에 온전한 믿음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히브리서 39절과 40절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 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빈껍데기만 남았다는 간병인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들 다 출가시킨 후
어느 날
빈 껍데기만 남았다는 걸 안 후
간병인의 길로 들어섰단다
중환자에게
온갖 정성을 쏟으며
빈 껍질을 채웠다고 한다
오늘도
간병인 아줌마가 있는
병동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
간병인의 길로 들어선 어느 아주머니의 이야기이다. 자신이 빈 껍데기인 걸 알고 환자들을 돌본다는 것이다. 믿음의 증거를 실천해 보이는 간병인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였다. 누구나 빈 겁데기인데 그걸 알기가 쉽지 않다. 자신은 늘 다른 사람과는 다르고 뛰어난 인물인 줄로 착각하고 지내니 말이다. 간병인 아주머니 역시 남편과의 사별이라는 아픔을 겪으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믿음의 시간, 생명의 시간을 살고 있다. 그 걸 본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같은 평안을 얻는다.
이런 기독교로의 귀의는 몇 몇 작품에 지속적으로 드러난다. 본인이 한 송이 꽃보다 못하였다고 자책하며 시를 쓴다. 지난 일들이 모두 헛되었다고 뉘우친다. 그는 믿음의 세계 속에 살며 구원받기를 바란다.
- 윗부분 줄임 -
그리하여
성령의 믿음 속에
하나님 만나 변하리라
염려하지 않으리라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고
믿고 또 믿고 나가리라
한송이 꽃보다
못했던
생애를
이제는 바꾸리라.
- 「한 송이 꽃보다 못하였네」일부 -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의 길로 나아간다고 하였다. 정신의 혼돈과 방황 속에서 찾은 길이 기독신앙이었다. 그는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한 몸부림으로 자신을 정화하려는 지난한 노력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방탕하게 살았고
보이는 것만
모두라고 생각했네
기도로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며
함께 계심을 알았네
염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기리라
집착을 버리리라
그리하여
마음을 지키리라
은혜의 말씀
오래 기억하며
깨어 있으리라.
- 「깨어 있으리라」 -
자신의 삶에 대해 방탕한 삶이라 여기며 참회한다. 그리고 은혜의 말씀 기억하며 깨어있으리라고 다짐한다. ‘죠지 뮬러’라는 사람은 19세기 후반의 사람이다. 그는 젊은 시절 거짓말, 음주 등에 빠졌고 사기죄로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5만번 이상의 기도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는데 돈으로 150만 파운드, 우리 돈으로 1300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 돈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모두 썼다.
박유석은 자존심을 버리고 교회에 나가는 생활을 한다. 그러자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을 하나님이 조금씩 보게 하신다고 하며 준비되는 그릇에 믿음을 채우리라고 다짐하기도 하였다.
박유석은 한동안 병든 정신과 육체, 마음의 절망에 빠져 윗샘밭에서 몇 년 동안 재활캠프에도 참여하며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 몸부림을 하기도 하였다. 아래의 시는 윗샘밭 재활 캠프를 마치고 떠날 때 쓴 시 같다.
윗샘밭을 떠나며
사람이 그리워
남몰래
눈물도 흘렸다
사내 답지 못하게
칠흑 같은 어둠 저 편에
빛 바랜 사진첩을
암장하고
무성한 소음 속에
잘도 버텨왔구나
잡초 밭에서
詩語들을 경작하며
사막을 건너
윗샘밭 종점을 지날 때 쯤이면
늘 허기가 들었었다
이제 윗샘밭을 떠나며
그런 것들이
다시 그리워지는
이 모순.
윗샘밭에서 재활 치료를 받던 윗샘밭의 생활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나 보다. 떠나려니 다시 그리워진다고 한다.
<3> 불심을 통한 참회와 속죄
박유석 시집 『그래도 저 강은 흐르는구나』는 2006년 10월 발간하였다. 이 시집 속에 담긴 종교적 신앙은 기독교적으로 흐르고 있다. 그러나 9년째를 맞아 발간한 시집 『연민과 용서의 강』에는 불심을 통한 참회와 속죄로 흐르고 있다.
인간의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 중에 문자 언어는 시각적이고 영속성을 지녔다. 인류의 많은 행적들은 이 언어를 통해 구체적으로 전해져 왔다. 이 중에 하나가 운율성을 가진 시가의 전달이다.
시적 언어는 인간의 표피적인 감성에서부터 심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시적 언어는 그 변화의 다양성으로 현재에도 호소력과 감동을 전하는 가장 고급의 문화형식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마음이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없고 색깔이나 맛도 없다. 그러나 마음을 시로 표현할 때는 마음이 색깔로, 맛으로, 향기로 우리의 오관을 통해 전달해 온다.
사실 마음이란 모든 행위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석가여래는 일체의 모든 행위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하였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마음은 행의의 시작이자 끝이다. 마음에서 시작되고 마음에서 모든 게 끝이 난다.
미워하고 사랑하고 성내고 화내는 것도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이고 그것이 행동으로 표출되면 사랑과 봉사, 자비가 되기도 하고 가공할 범죄가 되기도 한다.
이번에 박유석은 ‘마음’을 표현한 시들을 모았다. 마음 중에서도 번뇌와 망상에서 벗어난 증득된 지고의 선을 향하려는 마음이다. 그것은 수행과 정진으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것들이었다.
하늘이 쇠를 불에 달구는 것은 명물을 만들기 위함이요, 사람에게 온갖 고난을 주는 것은 그 성품을 청정하고 밝게 하여 혜안을 가지고 지혜롭게 살기 위함이다.
박유석이 쓴 시들을 보면 참으로 많은 형상을 겪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아픔과 고통이 모두 마음의 깨달음을 얻는 시편으로 다시 변환되어 나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50년이 넘는 동안 줄곧 문학을 위해 매진해 오시며 참회와 아픔의 신앙적 고백서 같은 작품들이었다.
육신의 고통 때문에 죽음의 문턱을 몇 번 씩 넘으셨고, 생활 속 고뇌와 아픔은 모두 깨우침을 향한 도의 길로 표출하였다.
박유석 시인이 쓰신 요즘의 시를 읽으면 생사의 고뇌로 얻은 사리 같은 언어들을 발견한다.
명예, 권력, 부(富)는 모두 실상이 아니라 없어진다는 실체를 느끼고 진정한 삶의 길을 찾아가는 고독한 수행자로 우리 앞에 다시 섰다. 바랑을 걸머지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무소유의 바랑이 등에 매여 있고 목탁을 들지 않아도 반야의 세계를 향한 조용한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시어들도 진공묘유, 악연, 깨달음, 무명, 집착, 소, 자각의 원(願), 정진, 무아, 관조, 청정함, 정심(靜心), 여일(如一), 선연(善緣)의 길, 심우도 등 불교의 전문적인 용어들이 많다. 그 만큼 신앙에 깊이 잠겨 불교의 보살행을 하는 모습을 알 수 있었다.
<4> 작품 속에 깃든 불성(佛性)
몇 편의 시 속에서 드러나는 불교적 세계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비우고 돌아서도 / 다시 생겨나는 버릴 것들 때문에 / 정체성의 혼란에 시달리는 일상 / 달빛 명상 속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 유년의 나를 만나 / 망상의 착각이란 짐을 내려놓기 시작한다 // 부모님 산소 앞을 지나노라니 / 죽음도 또 하나의 깨달음 / 삶이 값진 것은 사라지기 때문이구나 // 달빛에 하늘대는 꽃 한송이도 / 자기 위치에서 조화를 이루고 사는데 / 마음 찌꺼기를 남기지 않고 / 미워하지 않는 집을 지으며 / 아쉬움을 내려놓는다. // 악연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니 / 죄업도 하나 둘 꽃잎되어 / 화양강 여울에 흘러가 버리는데 // 흔들리는 생각을 바로잡았을 뿐인게 / 이렇게 마음이 가볍고 / 오묘로움이 흘러넘치는 걸 /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 이제 내 남은 시간을 / 꽃 한송이 피우듯 기도하는 마음으로 / 생로병사에서 자유로워지며 / 느긋하게 바라 보면서 내려놓아 / 늙어감을 담담하게 받아드리리라 / 없는 사람 그리워하지도 않으리라
- 「진공묘유」 전문 -
진공묘유(眞空妙有)는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절대의 진리를 말한다. 참다운 비움이기에 묘함이 있다. 그렇다면 깨우침이란 모든 것을 비워냈을 때 구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비우는 수행이 일어난다. 비우고 또 비워내도 다시 버릴 것이 있다고 한다. 착각이라는 짐과 미련이라는 짐도 내려놓으려 한다. 생로병사에서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해탈의 문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심정으로 늙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삶이란 집착 소유 무명(無明)이여서 / 늘 약속은 물거품이 되고 / 잡을 수 없는 실체와 현상 / 그걸 잡겠다고 / 아우성을 치지만 // 그 껍질을 벗기고 벗기면 / 궁극에 드러나는 건 / 죽음이라는 진실 하나 뿐 // 담담하고 소탈하게 놓아버리고 / 그윽히 바라보며 사유하면 / 인생의 답은 지혜와 덕 속에 있다. / 부질없고 허망한 생존이지만
- 「죽음이라는 진실」 전문 -
무명(無明)은 밝음이 없는 무지의 상태를 말한다. 즉, 집착하기에 진리를 보지 못하는 걸 무명이라 하고 모든 번뇌의 씨앗이 된다. 무명이 없어지면 진리를 보게 되고 부처가 된다고 한다.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집착하고 소유하는 것들은 모두 실상이 없는 것들이다. 그 걸 잡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내달리다 보면 결국 만나는 곳이 죽음이라는 곳이다. 어떤 사람도 죽음을 맛있는 밥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음은 인생의 공포이며 두려움 그 자체이다. 위 작품을 읽으면 죽음이란 화두를 들고 얼마나 많은 사유 속에 지냈는지를 알 수 있다. 죽음마저도 담담하게 놓아버릴 때 지혜를 얻는다는 체험적인 생각을 전하고 있다.
머물면 고여서 썩는 물이 된다
그래서 흘러가는 길이 멀고 험하다 해도
그것이 산다는 것임을 직관하고
지금 누리는 것에 애착을 내려놓고
안주하지도 말며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소멸하는데
잠시 모면 하려 자신을 속이지 말자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
막연한 기대에 내일로 미루지 말자
다음 생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 버리고 가야 하니까
늘 깨어 있는 자유인으로
허망함의 벽을 넘자
- 「다 버리고 가야 하니까」 전문 -
위의 시는 큰스님이 신도들 앞에서 하는 법문처럼 들린다. 하루하루가 행복하지 못한 삶이면 그게 곧 아수라장이요, 지옥이 아닐까? 박유석 시인께서는 그 행복의 삶을 찾았다. ‘다 버리고 가야한다’는 진리 앞에서, 깨어있는 자유인으로 살려는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나올 때 빈손으로 왔다가, 갈 때에도 가져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허망한 물질의 노예가 되어 아귀다툼을 하다가 한 방울의 이슬처럼 살다 가는 게 인생이다. ‘나’란 현상적으로 아무 것도 없다. 아픈 것도 괴로운 것도 행복한 것도 내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지녀서 생겨나는 것들이다. 죽음도 삶도 그런 것이다.
그래서 박유석 시인은 ‘나 없음’이란 시에서 말한다. 모든 것은 원래 실체가 없고 빈 것 뿐이다. 인연에 따라 오고간 티끌에 불과한 존재라 한다. 일체의 모든 상(相)은 ‘나’란 상에서 시작하므로,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타파하려고 한다. 모두가 신기루이고 꿈이고 환상이니 틀에 가두지 않고 ‘나’란 것도 원래부터 고정 지을 내가 없는 것이니 ‘나 없음이란 깨달음’도 놓아버린다고 하였다.
다음의 작품 ‘동면’은 신뢰와 정진으로 ‘잃어버린 소’를 찾겠다고 한다.
이번 겨울에는 치유의 길을 떠나
염력을 얻어
잃어버린 소를 찾고
자각의 원(願)을 세워
정체성의 오류를 수정하기로 했다
신뢰와 정진으로
잃어버린 청정함을 찾을 뿐 아니라
사물과 사고의 경계를 허물어
상을 타파하고
생과 사의 분별도 초월할 수 있으며
깨달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면하기로 했다.
그러나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길은
멀고도 아득하기만 하다
- 「동면」 전문 -
시 「동면」에서는 잃어버린 소를 찾고 자각의 원(願)을 세우려고 한다. 유교에서 소는 의로움을 상징한다. 또 도교에서는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상태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소를 불성에 비유한다. 잃어버린 소를 찾는 10단계의 그림을 심우도(尋牛圖)라 한다. 여기에 나오는 ‘소’는 수행을 할 때 찾아야 하는 ‘불성’ 즉, 인간의 진면목을 말한다. 수행하는 첫 심우도의 그림에서는 잃어버린 소를 찾는다. 그리고 소의 발자국을 보게 되고 소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소를 붙잡게 된다. 견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그 다음은 소에게 코뚜레를 뚫고 끌고 간다. 고행과 수행으로 삼독에서 벗어나는 모습이다. 이 단계에서는 소의 빛깔도 흰색으로 변한다. 그 다음은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나타내는 데, 흰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돌아오는 모습이다. 이후, 소는 없고 사람만 있다. 진여(眞如)한 자신의 모습이다. 그 이후엔 소도 사람도 없다. 텅 빈 원만 그려져 있다. 소도 사람도 모두 공(空)인 것을 깨닫는다. 그 다음은 산수풍경만 있다. 번뇌가 없는 참된 경지이다. 마지막 10번 째 그림은 육도중생의 세계로 손을 드리운다. 중생제도를 위해 속세로 나가는 그림으로 끝을 맺는다. 처음 소를 찾는 곳도 육도중생의 자리이고 깨달음을 얻어 제도하러 가는 곳도 육도중생의 자리이다. 번뇌와 즐거움, 깨달음이 모두 하나인 것이다.
못 죽어 살아 있다
풍물장에서 만난 노인의 말을 들으며
그 보다 나을 것이 없어 부끄러운 나
그 말은 열심히 죄 덜 짓고 산 이의 독백
가족이 소중하고 이웃이 정겨워
그렇게 하시는 말씀 일 뿐
죽음을 준비하는 예감이 부럽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저지른 죄업이 넘쳐 흘러
부끄러운 길을 회한이 덮고 있다
날 저문 둥지를 나서니
싸락눈이 푸득 푸득 날린다.
- 「못 죽어 살아 있다」 시 전문 -
누구나, 어떤 사람이나 모두 살아온 삶에 대해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다. 고집, 미움, 원망, 욕심, 폭언, 이밖에 숨겨야 할 일까지 떠올리면 더욱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일을 뒤로 하고 나이가 들어 백발의 고개에 올라서고 언제 죽을지 모를 질병이 벗하면 회한이 앞선다. 그러니 그런 잘못된 과거를 진정으로 참회하기는 더 힘들다. 대부분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용기를 가지고 회한으로 참회하는 시인의 모습을 보면 감동이 깃들 수밖에 없다. 정말로 용기 있는 시인이어야만 철저하게 참회할 수 있다고 본다. 박유석은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그것은 시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더욱 절실하게 그려져 있다.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그에게 / 해줄 일이 아무 것도 없는 데 / 면회 시간 찾아가 /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 나그네로 잠시 머물렀다 / 다시 떠나 / 이곳 저곳을 헤매어 봐도 / 마음만 천근만근 무겁구나 // 부부는 오십대 오십으로 모자라는 부분을 / 마음과 믿음을 합쳐야 / 원이 완성 된다는데, / 심우도에서도 원의 경지에 다다르려면 / 소와 내가 하나가 되고 / 참나를 찾을 수 있다는데 / 그는 저렇게 누워있고 // 나를 찾는다고 무슨 의미가 있는가
-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시 전문 -
식물인간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아내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고 자책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참다운 나를 찾고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도 당장 눈앞에 누워있는 아내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한탄한다. 이런 일이 어디 박유석 시인께만 있는 일일까?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마음 아픈 일이다.
인생이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일보다, 함께 슬퍼하고 같이 괴로움을 나누는 일이 더 아름다운 일이다.
떠날 때를 알아차려야
자고 일어나니
꽃 몇송이가 졌다
떠나는 뒷 모습 보이기 싫었나보다
그래도 영상 속에 너희가 있지만
그렇게 쉽게 가버리니
더 그립구나
생명순환을 일깨우고 떠난 너희들
만약 영원히지지 않는 꽃이였다면
그립지도 않고 짐만 됐을 거다
떠날 때를 알아차리고
그렇게 가 버리니
더 애틋하고 보고싶은데
그래도 죽는다는 건
서럽다
생자(生子)는 필멸(必滅)하게 된다. 생이 있기에 멸하는 것이다. 자고 일어나 보니 꽃 몇 송이가 바람이 졌다.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그렇게 훌쩍 떠났다고 생각한다. 살아있으면서 꽃송이는 떠나간다는 생멸 현상의 모습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게 쉽게 가버리니 그립다. 떠날 때를 알고 가는 그 모습이 거룩하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서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래도 멸하는 것은 서럽기 때문이다. 서럽다는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이기에 자비와 사랑이 있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그리움이 없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깨달음이 있기에 더욱 슬프고 더욱 아름다운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사랑하며 산다. 인생에 그리움과 기다림이 없으면 아니, 그것을 깨달음이란 이름으로 멀리 있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음에 빠지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다만 속되게 잡착하지 않을 뿐이다.
다. 마무리하며
자신의 탐욕을 위해 거짓의 정직과 정의, 허구의 진실로 포장하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혼탁한 면이 많은 세상이다.
세상은 음양과 다섯 가지 물질의 상호 관련 속에 이어져 간다. 그 중에 사람은 고도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천지 만물중의 으뜸자리에 있다. 그러나 사람도 물질로 이루어졌기에 부딪치고 도와주고 하는 생극(生剋) 작용 속에 일어나고 멸하게 된다.
사람의 진여한 정신은 원래부터 있어온 것이다. 생(生)할 수도 멸(滅)할 수도 없다. 생멸작용이 없는 그 자리가 본래의 자리이다.
박유석의 많은 시편들은 읽기에 편하고 느낌이 쉽게 전해온다. 직정적, 사실적인 기술에 가까운 글이 많아서 단점일수도 있다. 그러나 주제를 허심탄회하게 전해주는 이점이 있다. 그러기에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특히 세상을 향한 절실한 참회와 자아에 대한 뜨거운 속죄는 기독교로의 발걸음에서 돌아나와 불교에로의 귀환을 하였다. 박유석의 시는 진실한 사람의 맑은 영혼이 담긴 눈물이다. 심심상인(心心相印)에 입몰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5) 제7시집 『와동 가는 길』의 시 세계
죽음 앞에 하얗게 비우고 싶은 생의 여백
가. 서론
『와동 가는 길』은 2013년 5월 발행한 시집이다. 인생의 후반기에 정리한 시집이라 볼 수 있다. 시집의 서두에서 ‘이 시집을 부모님 영전에 바친다’는 글을 적었다.부모님에 대한 애틋함과 사랑이 이 시집 속에 담긴 것임을 알 수 있다.
박유석은 서문에서 말한다. 삶은 연민이요 그리움이고 기다림이고 버리는 것인데 시간은 너무 흘러왔고 어느새 황혼의 강가에 서 있는 한 나그네를 본다고 술회한다. 자신의 인생과 체험적인 삶에 대해 참회하는 진실한 고백이 독자의 마음을 울먹이게도 한다. 그는 이제 삶의 힘든 고갯길을 넘어 마음과 몸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잔잔한 여울처럼 고백적인 시가 펼쳐진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정으로 활자화되어 전해지는 시를 만나 보자.
나. 본론
아버지는 큰 산
새들 울어대던 그 숱한 밤
혼자 고향집에서
얼마나 적막했을까
자식에게 짐 되기 싫어
고고한 학(鶴)인 채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
우시장길 풀섶의 이슬 속 해를 띄우며
위대한 유산을 숨기고 사셨다
네 에미 밥상이 그립구나
임종 며칠 전 요양원에서
계면쩍게 웃으며 먼 산 보지만
아버지 모습에서
찔레꽃 향이 난다
한번 뿐인 삶을
자식을 위해 모두 주시고
빈손으로 가신 아버지는
침묵을 통해 자신을 갈고 닦을 수 있는
작은 동산과 나무를 자식들에게 심어준
큰 산
소나무 가지가 습눈으로 휘어진
와동 가는 길에
못다한 유언들이
초승달로 걸려
철새로 떠돌던 불효자를 깨우니
아버지 큰 산 그늘에서
복사꽃이 어둠을 지운다
그냥 여행을 떠났을 뿐
다른 세상에서도
아버지는
아버지란 이름으로 살아계신
큰 산
늘푸른 소나무 같은
어머니 옆에서
아버지는 끝까지 고향을 지키며 사셨다.
박유석의 고향은 홍천 와동이다. 천년 고찰의 수타사가 있고 아름다운 공작산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부모님의 선영이 있다. 늙어 병든 몸을 이끌고 고향에 가서 부모님의 묘소를 참배하면서 당신도 이곳에 묻혀지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본인은 고향에 대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었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 시집에 나오는 여러 편의 시들은 부모님과 고향에 대한 사랑의 시편들이고 아픔과 고뇌의 시편들이다.
암울함으로 내리는 올해의 눈은 / 유년의 신화마저 처형되었다 // 살아있음이 죄스럽다 / 힘겹고 답답하고 멍하다 // 문자 받기도 두렵다 / 누가 미련만 남기고 / 또 / 빈 자리만 두고 갔을까 걱정했을 때 // 아버지가 가셨다 // 북극성 보다 빛나던 / 기억들은 / 젊은 날의 꿈마저 암장하고 / 어디로 증발해버렸나 / 은밀히 주고받던 언어들은 / 치매란 벽에 / 빈 껍질만 바람에 너훌대던 요양원 // 고단함에 지친 아버지의 삶이 / 의지와 상관없이 / 무너지는 낡은 하늘로 / 임종을 맞은 고향 // 눈이 내리지만 / 막막하다 / 그래도 어머니 곁에 누우셔 다행이다 //정물로 고착된 철새들 / 꽝꽝 얼어버린 화양강가에서 / 망연자실 떨고 있는 / 네 모습이 / 나를 닮았구나 // 그래도 모진 목숨 부지하려고 / 빙판에 넘어졌다 일어서면서 / 소양2교를 건너가고 돌아오고 / 죽을 연습을 반복한다 / 오늘도 // 아버지는 자식들의 멍에를 지고 / 죽음보다 더 잔인한 / 치매의 덫을 피하기 위해 / 무던히도 애쓰셨지만 / 그러나 무너지는 하늘은 모른 척 했다.
- 「하늘은 모른 척 했다」 -
「아버지는 큰 산」, 「하늘은 모른 척 했다」의 두 작품들은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담겨있다. 아버지가 요양원에 계시면서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신 데 대한 연민과 죄송함 그리고 존경심이 가득 배어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그냥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곳 와동에는 아버지란 이름으로 어머니 옆에 큰 산으로 살아 함께 계시기에 두 분은 항상 아름다운 의지처가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바람에게 따귀 맞은 개망초 꽃
묵정밭에서 훌쩍 대며 낮달을 훔쳐보는 데
어린 참새가 들판에서 접혔다 처박히는
와동 가는 길모퉁이에서 나는
그냥 풍경 속 고목으로 못 박혀 서 있다
모든 건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데
나는 왜 여기서 두려움에 떨고 있나
중풍으로 절뚝대지 않고
치매 없이 집 잘 찾아가며
돋보기 없이 신문도 읽는다
연금도 받는다
몇 년 마다 새로 쓴 시집 한 권 들고
부모님 산소 찾아가
고향 하늘 아래 서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모든 즐거움의 시작은 욕심에서 비롯되고 모든 불행의 시작도 욕심에서 비롯된다. 욕심은 성격상 점점 불어나기에 과욕이나 탐욕으로 변하기에 재앙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적당한 욕심에 만족하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행복해진다. 이런 평범한 사리를 모르는 어른들이 몇이나 될까?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욕심이 앞에 다가오면 마음이 흐려지는 것이다.
시인은 이제 죽음을 바라보고 맞이하는 시간 앞에 서 있음을 느끼고 있다.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는 길이다. 자신의 영혼이 담긴 시집을 부모님 앞에 바치려고 한다. 그러나 또 생존 앞에 두려움을 갖다가 마음의 안심을 찾는다. 자신을 돌아보니 중풍으로 절뚝대며 걷지도 않고 치매도 없는 몸이다. 더욱이 매달 연금을 받으며 안정된 생활을 한다. 여기서 더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만족해 하는 것이다. 절실한 체험적 삶 앞에서 비움의 성자(聖者)를 연상하게 한다.
연민과 회한의 하늘
나의 뿌리 하늘은
와동 고향에 있다
그런데 철새로 떠돌다보니
이곳 춘천에도
어느 새 나뭇가지 끝에
또 다른 미련의 하늘이
낮달로 걸려있다
고향의 하늘에는
부모님 사랑이 들판 가로질러
숲으로 이어지는
그리움의 하늘이다
부모님 다 떠나신
지금의 하늘은
안개속에 숨어버린
연민과 회한이 환영으로 뜬다
노령난민의 하늘
잉여인간의 하늘
치매가 운석으로 쏟아지는 하늘
아, 텅텅 비어가는 하늘이여
영정 사진 앞에 놓고
나를 바라보는
나
다음 생은
연민과 회한의 하늘을
담지 말아야지
박유석은 어디 있어도 고향 와동을 잊지 못한다. 그곳은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으로 키워준 곳일 뿐만 아니라 산과 바람과 나무와 별과 새들이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힘들 때에는 위로가 되어 주었던 곳이다.
본인은 본인의 영정 사진을 만들어놓고 들여다본다. 그리고 다짐하는 것이다. 다음 생에는 연민과 회한의 하늘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화상을 보면서 부끄러움과 회한으로 속죄하는 모습에서 진실이란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시간을 더 달라 애원하지 말자
어느 날 천사의 나팔이
한 개울 섶다리를 건너 내게 왔다
거절할 변명이 생각나지 않아
무덤덤한 표정으로 식구가 되었다
물 주는 걸 잊어버려
말라 죽일지도 모르는데
짐을 다시 지게되었구나
죽음은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다
손수건 한 장 펼칠
내 소유의 땅도 없다
그런데도 널 받아준 건
사치 아니면 눈속임인지 모른다
나머지 여분의 생 동안
마음에서 두려움을 없애자
죽음은 생의 완성이다
고귀한 것으로 죽음을 맞이하자
나 하나 죽었다고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그냥 정해진 길로 흘러간다
그러니
시간을 더 달라고
애원하지 말자
병이 자신을 짓누르는 상황에서 죽음은 늘 가까이 있는 고약한 친구 같은 것이다. 앞의 시집 제목에서도 썼지만 생사번뇌 희로애락이란 인간 물결을 뒤로 하고 그래도 저 강은 흘러가는 것이다. 도도하게 흐르는 마음속 강물을 보면서 죽음마저도 내려놓고 허심하게 비우고 가려는 삶의 자세를 배운다. 그리고 죽음이야말로 생의 완성이란 큰 깨우침을 얻는다.
와동 선산에 아버지를 / 어머니 곁에 모시고 / 돌아오는 길에 / 히끗히끗 눈발이 꽃송이로 내린다. // 저만치 가는데 / 누가 부른다 / 뒤돌아봐도 아무도 없다 / 바람곁에 또 속삭인다 / 아 어릴적 부모님 목소리 / 잊어버렸는데 // 나는 죽은 후 / 와동에 묻힐 수 있을까 / 자신이 없다 // 자작나무 아래서 / 바람에 나부끼는 이파리일까 / 강물에 두둥실 떠가는 / 풀잎일까 // 수십 년을 고향 떠나 / 철새로 이곳 저곳 떠돌며 / 고향에 얼마나 정을 주었다고 / 아무런 생각 말라고 / 청둥오리 떼가 / 꽥꽥 고함을 친다 // 글 쓴다 협회 일이다 / 승진하겠다고 / 부모 형제 자식에게 소홀해놓고 / 문 밖에서 서성이던 그에게 아픔 주어놓고 / 아 수많은 죄목의 내 이력 어찌할까 // 그러고도 고향에 묻힐 생각을 하다니 / 참 뻔뻔스럽다 // 많이 늦었지만 / 그래도 죄업으로 흔들린 믿음을 바로 세우고 / 연민과 미련을 훌훌 털고 마음을 비우고 또 비우며 / 남은 생을 참회하면 // 죽어서라도 / 이 모든 죄를 용서받아 / 고향에 묻힐 수 있을까
- 「 죽어서라도 고향에 묻힐 수 있다면 」 -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돌아보게 한다. 수많은 죄를 진 모습을 돌아보며 죽어서 고향에 묻힐 생각을 하는 자신을 뻔뻔스럽다고 자책한다. 그러나 그렇지만 모든 죄를 용서 받고 고향에 묻히고 싶은 간절함이 드러난다.
진실로 무지한 자들은 자신이 지은 죄도 모르고 또 죄가 없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급급하다. 사실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참회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고 위대한 사람이다. 박유석은 시 속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모습은 정말 마음이 아프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하다.
남은 여백을 비우고 가자
해지기 전의 노을로
살다 가자
그리움이란 고질병은
태워버리자
모든 건
죽음과 동시에 소멸된다
순서가 다를 뿐
어차피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것
남은 생의 여백을
하얗게 비우고 가자
죽음의 문제는 어느 누구에게나 큰 화두라 볼 수 있다. 박유석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러면서 남은 생의 여백을 비워놓고 가자고 한다. 여기에 오기까지 고통이나 아픔 정신적인 방황의 세월이 그 얼마였을까를 헤아려보게 한다. 그리고 그는 겨울산을 보며 멋진 꿈을 꾼다.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겨울산은 누구의 집일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선시(禪詩)의 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겨울 산
바라보기만 해도
그냥 좋은
저 산은
누구 집일까
추악한 일
다 덮어버리고
바람에 뒤척이며
하얀 꿈을 꾸는
세상을 순하게 바꿔주는 집.
바라보기만 해도 그냥 좋다고 한다. 위의 시「겨울산」은 그런 산이다. ‘추악한 일은 다 덮어 버리고 바람에 뒤척이며 하얀 꿈을 꾸고 세상을 순하게 바꿔주는 집’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부활과 재생의 동력이 되는 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 정리하는 말
홍천 와동은 꿈에도 그리는 박유석의 고향이다. ‘고향’은 박유석에게 있어 절대적인 시의 영역 속에 자리잡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중도 고향 속에서 보다 빛난 가치를 발견한다.
고향은 또 산과 강을 품고 있으며 그 산과 강 역시 박유석 시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사랑과 그리움의 표지석이다. 그렇기에 모든 잘못을 참회하고 나면 죽어서 고향에 묻힐 수 있을까 ? 하고 자신에게 묻지만 그것은 염원이고 절대의 기도이다.
절망과 고독과 방황은 그의 삶을 폐허로 남겨놓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실패와 질병 고독으로 인해 죽음을 친근하게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빈 자리에 남아있는 여백의 삶에 대한 모습도 보게 된다. 이런 일들로 이루어진 속죄의 결과는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재생이었다. 구복적인 일이나 영생을 온전히 버릴 때 그 자리에는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것을 이미 그는 알고 따뜻하고 행복한 죽음의 잔치까지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
(6) 제8시집 『하늘가는 길』의 시 세계
욕망을 놓고 가는 길에서, 정토를 바라보다
가. 서론
이 시집은 유언서이기도 하지만 박유석의 신앙고백서이기도 하다. 어느 하나, 사람의 일생이 평탄한 것을 보았던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바라고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솔직히 죽음이 밥 먹는 것처럼 재밌고 식감 있는 것이라면 누가 두려워할 것인가? 그것도 지지고 볶고 사랑하고 이별하며 살다가, 늙어 각종 질병에 걸려 신음하고 사고가 아니면 병 이런 것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참으로 두려운 것들이다. 그러다가 격랑의 파도 같은 삶의 현장에서 울고 웃다가 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인생의 끝자락에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대표하는 한 사람이 여기에 있다. 정직하고 진실 된 마음이 있었기에 사랑과 슬픔을 감내하기에 버거운 고독한 시인이 쏟아놓은 아픔과 그리움의 언어들은 긴 방황의 터널을 지나 불교적인 신앙 시로 열매를 맺었다. 그 시의 흐름을 알아보려고 한다.
나. 본론
<1> 일대사는 일대사다
일대사는 부처님이 이곳에 오신 연유를 밝히는 말이다. 일체중생에게 진리를 전하고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일체중생들이 진리의 세계로 들어오기 위해서이다. 이를 개시오입(開示悟入)이라 한다. 이것이 또한 법화경의 중요 요체이다.
나는 일대사를 ‘一大謝’라 하기도 하고 ‘一大赦’라는 말로 쓰기도 한다. ‘一大謝’는 크게 사죄하는 것이고 ‘一大赦’는 크게 용서받는 것이다.
박유석의 시집 『하늘 가는 길』은 제목에서도 암시하듯이 ‘죽음을 향하는 길’, ‘죽음의 길’로 여겨진다. 그 시집 속에 발표한 작품들을 ‘일대사(一大謝)의 작품’이라 칭하고 싶다.
마음에 암울한 웅덩이 남기고 떠난
그를 용서하는데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미운 마음 놓아버리지 못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싸락눈 내리는 날
우연히 만나 스치고 지나친 후
문득 생각해 보니
이번이 마지막 우연일 수 있다는 걸 알아
먼저 화해를 청했다
악연도 인연이었으니까
지난 시간의 집착 번뇌의 매듭 풀고
살날도 얼마 없는데 편히
그를 용서하고 나를 용서하리라
- 「그를 용서하고 나를 용서하리라」 -
용서하는 마음은 힘들다. 그걸 해내는 사람은 이미 현자의 경지에 이르렀다. 늙을수록 용서가 더 힘들어진다. 뇌도 굳어가고 자연히 생각은 완고하게 되어가기 쉽다. 작은 일에도 크게 서운함을 느끼기 쉬운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말은 얼마나 하기 쉬운 말인가. 그러나 실천에 옮기기는 하늘에 있는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2> 마음은 늘 그 자리
그 자리에 있었는데
칠십년 넘게 찾아다녔다
마음이 어디 있는지를 알기 위해
그러던 어느 날
면벽의 입정에서
그 마음 찾았는데
마음은 떠난 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공空 하라는 분별에 빠져
잃어버린 줄 알고
그렇게 찾아다니며
어리석음에 놀아났다
마음은 늘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리움, 외로움 등이 눈에 보이는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니 자로 잴 수도 없고 근으로 달 수도 없다. 그런데 이 마음이 움직이면 큰 산도 없어지거나 큰 산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만상이 마음에서 나고 만상이 마음에서 지워지니 묘한 이치는 어떻게 구할 것인가. 만상(萬象)이 무상(無象)인 이 마음을 공부하는 길, 해탈의 길을 걷는 구도의 행각은 깨우침을 얻는다. 마음은 늘 그 자리에 있는데 어리석음에 놀아났다는 것을.
왜 문득 안심법문 떠올랐을까
나이 먹어 늙어 가면서
죽음으로 가는 길이 훤히 보이는데
산다는 고통과 시련이 만만치 않고
소소한 일에 더 마음 쓰게 되면서
어디를 가도 설 자리가 없어
잉여인간 천덕꾸러기 되기 쉽다
그래서 선한 일에도 애쓰지 않고
악도 흘려보낸다
마음의 본질 잡다한 현상
불안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마음 다스리고 정화하여
평안함과 자유 찾으면
세상사에 탐욕 번뇌 버리고
무심의 안심법문
왜 문득 떠올랐을까
위 시를 읽으면 시인은 무심의 안심법문이 생각난다고 하였다. 심적인 불안이 간간이 떠오르기 때문인지 모른다. 달마의 2대 제자 신광(혜가)은 달마로부터 ‘안심법문’을 받았다.
“제자가 되려고 합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러나 묵묵부답이다. 오직 면벽만 하고 있는 달마였다. 오죽하였으면 벽만 보고 앉았다고 ‘벽관바라문’이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소림사에 밤사이 눈이 내렸다. 온 세상은 하얗게 변했다. 푸른 잎이 매달린 나뭇가지를 보고 달마의 토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것이 어제 같은 데 붉은 나뭇잎이 무수히 떨어지더니 하얗게 세상을 덮은 눈이 내렸다.
“제자가 되려고 합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묵묵부답이다.
신광은 문득 옛사람의 도를 구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의 뼈를 깨어 골수를 뽑기도 하고, 피를 뽑아 굶주린 사람의 배를 채워주던 도인들, 그뿐인가? 절벽 밑으로 몸을 던져 호랑이의 먹이가 되지 않았던가. 그론데 나는 지금 어찌 하고 있는 것인가? 통렬한 자기 반성에 빠졌다.
때는 12월의 초순으로 넘어가고 있다.
한기가 온 사방에 가득차서 뼈가 시릴 정도였다. 그러더니 푸슬푸슬 소림사 주위를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소림사 경내에서 백여 미터 떨어진 토굴 앞에는 한 사내가 밀납처럼 서 있다. 신광이다. 눈은 밤새도록 내렸건만 사내는 역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새벽녘이 되자 눈은 사내의 무릎 위까지를 덮었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서 있는가?” 홀연히 한 목소리가 들렸다.
두 눈만 반짝이고 하얗게 온몸을 덮은 신광의 앞에 달마가 서 있다.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자 벼락치듯 달마의 말이 쏟아진다.
“ 아직 그 오만함으로 어찌 제자가 되려 하느냐?”
신광은 그 말을 듣고 이내 칼을 가져와 그의 한쪽 팔을 잘랐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하얀 눈 위로 붉은 물감이 번지듯 눈을 적셨다. 뜨거운 피는 눈을 녹였다. 그 순간 세상은 붉은 핏물의 침묵 속에 빠졌다.
“법기(法器)를 갖추었구나. 이제부터 너는 신광이 아니라 혜가(慧可)이니라.” 이렇게 하여 신광은 달마의 제자가 되었다.
달마의 제자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불안한 마음을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어느 날 혜가는 스승인 달마에게 묻는다.
“저는 아직도 마음이 평화롭지 않습니다.”
“불안한 마음을 내게 가져와 보이거라. 그러면 너를 편안하게 해 주리라.”
“불안한 마음을 찾을 수 없습니다.”
“찾을 수 있다면 그게 어찌 마음이라 할 수 있겠나. 너는 이미 편안에 들었다.”
신광, 아니 혜가는 그 말에 크게 깨우침을 얻었다. 팔을 자르고 받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환희로움이 몰려왔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달마는 혜가에게 안심법문(安心法門)을 전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달마에 이어 선종의 2대 혜가가 태어났다.
혜가(487 – 593)는 엎드려 말했다. “가르침을 문자로 남기는 방법을 알려 주소서.”
“나의 법은 기록할 수 없느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니 문자를 세우지 않음이로다.(以心傳心 不立文字)”
혜가는 왜 마음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을까. 마음은 형상과 문자를 초월하고 있으니 혜가는 당연히 마음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절대적 마음의 깨달음’을 중시한 안심법문은 선종의 중요한 법맥이 되었다.
혜가는 달마의 안심법문을 통해 진리에 이르렀고 달마로부터 금란가사를 전해 받았던 것이다.
능가경(楞伽經)은 석가모니가 능가성에서 설한 경이다. 이 경의 주요 요지는 분별지를 없애고 깨달음에 이르는 내용이다. 즉 무분별에 의한 깨우침을 요구한다. 중생은 미혹으로 대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분별을 통해 진리는 가려진다.
이 능가경은 달마이후 선종의 소의경전이 되었던 것이다.
<3> 스스로에서 벗어나기
선종(禪宗)의 2조인 혜가로부터 법을 물려받는 사람은 승찬이다. 그는 문둥병자였다. 하루는 너무 괴로워서 병에 신음하였다.
“스승이시여, 병이 나의 몸을 구속시킵니다.”
혜가는 말했다.
“그 병을 가져와 봐라. 내가 고쳐주마.”
이 말에 승찬은 번개 치듯 활연히 깨달았다. 마음이 환해지고 편안해졌다. 실체가 없는 것에 집착을 한 자신을 보았던 것이다. 나중에는 문둥병까지 낳았다.
병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의 부처
늘 병고에 시달리고
평범한 중생에 불과한 내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경전의 가르침은 기적이었다
열린 마음 큰 마음으로 당당하게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
확인하고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고민 있으면 고민 있는 그대로
약하거나 선하거나
병 있으면 병 있는
그대로의 부처님
연꽃 피는 묘한 깨달음의 이치 속
자성불自性佛
선종의 3대 승찬은 병을 앓으면서 병이 몸을 구속시킨다고 믿었다. 그러나 혜가는 승찬의 구속을 깨우쳐주었다. 박유석의 시 「병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의 부처」라는 시에 보면 박유석 또한 병고와 정신의 아픔을 앓고 있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부처라는 것을 깨달았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스스로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체득하고 연꽃 피는 묘한 깨달음의 이치를 알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하늘 가는 길∙1」에서 보면 박유석은 죽음으로 가는 길을 평온하게 맞을 준비를 한다.
하늘 가는 길∙1
한뼘도 안 되는 마음의 집에서
살기 위해 오래 헤매고 떠돌았지만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
늘 실패 좌절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어느새 죽음으로 가는 길 보이는데
왜 이리 마음이 평온할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느긋하게 유유자적 노닐며
소유의 길에서 채웠던 허망함
하나 둘 내려놓고 버리면서
변화의 흐름에 순응하며 깨달아 가는 것도
참 다행한 일
아름다웠던 기억 상처도 날려보내고
이번 생은 여기까지
미련없이 저 강을 건너리라
하늘 가는 길에서
<4> 법은 다만 ‘더럽히지 않는 것’
강릉의 구정에 사굴산파를 개창한 범일 국사는 당나라로 건너가 제안대사를 만나 법을 이어받고 돌아온다.
사람이 곧 부처
경문에 조건 없이 부처되는 길
가르쳐 주려고 부처님이 오셨다 했다
이 세상 바꿔 극락정토 만드는 게 아니고
이미 세상 그대로 정토임을 알려주는 일
억압 고통 받는 자 구원하는 일
자신이 무한한 불성의 소유자라는 걸
모르는 마음 깨우치는 것
그래서 말 한마디로 부처 찬탄하거나
산란한 마음으로 꽃 한 송이 공양
불전에 합장 예배 고개 숙임
그들은 이미 성불成佛 하였노라 하셨다
그러니
삼라만상 모든 중생도 이미 부처
사람이 곧 부처
범일은 불철주야 수행에 매진하고 있을 때였다. 범일은 제안선사에게 여쭙는다.
“스승이시여, 어떻게 해야 도를 온전히 닦을 수 있습니까?”
범일이 도에 대해 물은 것이다.
제안의 대답은 아주 쉽고 간결하였다.
“도를 굳이 닦으려 하지 말라. 더럽히지만 않으면 된다.”
범일은 다시 묻는다.
“그러면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까?”
“부처와 보살의 경지도 찾지 말라. 본래의 마음자리를 잃지 않으면 그것이 도이고 부처이니라.”
제안 선사의 이 법문은 ‘평상심의 도’를 말한 것이고 더럽히지 않은 그것이 부처고 정토이다. 그러니 이미 만상이 모두 부처이다. 현실에 살면서 깨달았다면 그곳이 바로 정토인 것이다.
지금 이 자리가 정토
펑펑 쏟아지는 미련의 눈발 흘려버리던 날
암자를 떠나는 발걸음 가볍다
내가 본래가 불법이요
있는 그대로의 진리였다
지혜 원만함 너그러움으로
소유 어리석음이란
마음의 쓰레기 버리고
걸어온 길을 참회한다.
일상의 때 묻은 생각들
정정하고 여여롭게 닦는 일
쉬운 수행 아님을 깨친다
글 쓰며 생명 아끼는
바로 이 자리가 정토淨土
박유석은 고뇌의 끝에 서서 알았다. 삼라만상 모든 중생이 이미 부처인 것을…. ‘소유와 어리석음’이란 마음의 쓰레기를 버리고 그는 걸어온 길을 참회한다. 그리고 자신이 서 있는 땅이 바로 정토라는 것을 알은 것이다. 또 나와 대우주 자연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을 헤아렸다.
대자연의 무정설법
번뇌의 낙엽 흩날리며
산행에서 돌아오는 길
침묵하는 산이
계절의 진리를 설하며
선禪에 들어 있는데
왜 너는
새롭게 재활하지 못하고
갈곳을 잃고 헤매는가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초발심으로 회향하여
하심下心 하라 하시는데
첫눈이 자비의 법문으로
세상을 품어준다
언어가 아닌 대우주자연이 설하는
무정설법
나와 자연이
둘이 아니고 하나였다
<5> 얽매임에서 벗어난 대자유
도신은 어린 나이에 선종의 제3조 승찬을 만났다.
어느 날 도신은 승찬에게 묻는다.
“스승이시여, 저는 모든 것에 얽매여 살아가기에 괴롭습니다. 어떻게 해야 해탈을 할 수 있습니까?”
“누가 너를 묶어놓았느냐? 그를 데려오너라.”
이 때 도신은 깨닫는다. 구속 또한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아챈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헛된 것에 얽매여 살아왔음을 알았다. 이후 30년 동안 겨드랑이를 땅바닥에 대지 않는 수행 속에 살았다.
담담하게 그 날을
가슴 아픈 일은 너무 일찍
죽음을 생각하는 일인데
그것이 생각한 대로 되는 일인가
다 인연에 의해 정해지는 것
모든 건 돌고 도니까
애쓰지도 방치하지도 말고
순리에 맡기고
그냥 놓아버리고 살면서
마음의 빗장을 풀고
느긋하게 기다리며
담담하게 그 날을 맞이하리라
삶이, 죽음이 허망한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뜬 구름 같이 허망한 것이다. 가야산 해인사 주련에는 이런 말이 있다. 歷千劫而不古(역천겁이불고) 亘萬歲而長今(긍만세이장금). ‘천겁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고 만세에 빛나도 항상 오늘’이란 뜻이다. 마음의 빗장을 푸는 순간, 항상(恒常)과 무상(無常)과 오늘이 다름이 아님을 알 것이다. 모든 것은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다. 공(空)인 것이다. 그러므로 박유석은 허물을 벗듯이 담담하게 그날을 맞이하리라는 다짐으로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다. 정리하는 말
이 우주와 우주에 사는 사람과 자연은 시작이 있어도 시작이라 할 수 없고 끝이라 해도 끝이라 할 수가 없다. 영원불멸의 모습이라 여겨지면, 곧바로 모든 것이 멸한 공(空)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생활 현장이 얼마나 놀랍고 날마다 경이로운 시간과 공간임을 알 수 있을 거다.
모든 수행은 진리의 법에 닿기 위한 방편임을 알 수 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아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의 강을 건넜는지도 모른다.) 자연이 이미 모두 보여주고 있다. 다만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 일 것이다.
박유석은 뜬 구름 같은 세상에서 모든 것은 인연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느꼈다. 모든 일을 순리에 맡기고,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살면서, 마음의 빗장을 풀고 담담하게 그 날을 맞이하리라고 말한다. 도신이 구속 또한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안 것처럼 박유석 또한 헛된 것에 얽매여 살아왔음을 알았다. 그래서 담담하게 그날을 맞이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욕망을 놓은 기다림의 길에서 그는 정토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바로 보고 있다.
[3] 박유석 시의 종합적 고찰
박유석의 시편들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솔직하리만치 직설적 시법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오히려 강한 자극과 전달력을 동반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박유석이 이끌어내는 연속적인 상상력은 절망과 아픔의 환상으로 이어진다.
삶의 희망보다는 우울한 기억에 더 다가선다. 일상의 자취는 삶의 버려짐, 또는 기억하기 위한 비석 같은 니힐리즘의 실존이다.
박유석에게는 늘 꿈꾸는 의식이 있다. 그 의식은 자신을 다시 곰삭혀내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그의 눈빛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닿는다. 거기에서 따뜻함을 발견한다. 그들은 놀랍게도 가진 자들에게 박혀 있는 못까지 뽑아주며 평화를 실천해 간다. 그것을 본 시인은 부끄러워하며 다시 사는 법을 그들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박유석 의식의 깊은 속살에 스며있는 정서의 올들은 매우 전통적이고 원태적이다.
실존적 불안과 아픔, 그리고 삶의 그늘은 작가의 내면세계에 그려지는 페르소나의 한 모습이다.
박유석의 시에는 진한 아픔과 고뇌가 보인다. 존재의 바닥에는 죽음이 깔려 있다. 육신의 죽음보다는 정신의 온전한 죽음위에 부활하고자 하는 죽음이다. 철저한 자기인식의 확인위에서 벌어지는 방황과 절망은 정신의 부활을 꿈꾸는 과정에서 받아야 하는 고통임을 스스로 체득하고 있는 것이다.
박유석의 시가 외형적으로는 매우 어둡다. 본질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그 무엇이 내부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나 그리움, 진실이나 순수성이라는 추상적 상징성들은 자연의 진실한 모습 앞에서 구원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은 모두 부자연스럽고 환경파괴적이고 개인의 이익이나 집단적 이익 앞에 무너져 내렸음을 확인한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화려하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다만 순수를 오염시키지 않으면 된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그렇고 자연을 아끼는 그런 마음이 그러한 것이다. 정선아라리에 묻어나는 시의 가락이 또한 그렇다. 시집 속에 등장하는 박유석은 매몰된 신화를 꿈꾸는 영원한 소년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박유석의 시는 서정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시적 직관의 세계 밖에서 시도된 의도는 시적 의미의 세계에 머물며 사물에 대한 감정의 흐름을 본다. 자연과 사물, 인간에 아픔을 공유하고 싶은 작가의 의도는 ‘선(善)’의 세계에 닿아 있다.
시적 요소인 상상, 지성, 감성, 본능과 욕망, 의지, 사랑 등의 요소 중에서 정감을 실 뽑듯이 뽑아 올려 시가 태어났다. 박유석에게 있어 이러한 요소들은 대부분 산이나 강, 고향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을 통해 어우러지는 인간과 따뜻한 세상 만들기라 보여진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거짓의 정직과 정의, 허구의 진실로 포장하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혼탁한 면이 많은 세상이다.
박유석의 많은 시편들은 읽기에 편하고 느낌이 쉽게 전해온다. 직정적, 사실적인 기술에 가까운 글이 많아서 단점일수도 있다. 그러나 주제를 허심탄회하게 전해주는 이점이 있다. 그러기에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박유석의 시는 진실한 사람의 맑은 영혼이 담긴 눈물이다. 심심상인(心心相印)에 입몰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홍천 와동은 꿈에도 그리는 박유석의 고향이다. ‘고향’은 박유석에게 있어 절대적인 시의 영역 속에 자리잡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중도 고향 속에서 보다 빛난 가치를 발견한다.
고향은 또 산과 강을 품고 있으며 그 산과 강 역시 박유석 시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사랑과 그리움의 표지석이다. 그렇기에 모든 잘못을 참회하고 나면 죽어서 고향에 묻힐 수 있을까 ? 하고 자신에게 묻지만 그것은 염원이고 절대의 기도이다.
절망과 고독과 방황은 그의 삶을 폐허로 남겨놓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실패와 질병 고독으로 인해 죽음을 친근하게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빈 자리에 남아있는 여백의 삶에 대한 모습도 보게 된다. 이런 일들로 이루어진 속죄의 결과는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재생이었다. 구복적인 일이나 영생을 온전히 버릴 때 그 자리에는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것을 이미 그는 알고 따뜻하고 행복한 죽음의 잔치까지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
절실한 참회와 자아는 기독교를 향한 발걸음으로 시작되었으나 나중에는 불교로 귀환하였다.
이 우주와 우주에 사는 사람과 자연은 시작이 있어도 시작이라 할 수 없고 끝이라 해도 끝이라 할 수가 없다. 영원불멸의 모습이라 여겨지면, 곧바로 모든 것이 멸한 공(空)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생활 현장이 얼마나 놀랍고 날마다 경이로운 시간과 공간임을 알 수 있을 거다.
모든 수행은 진리의 법에 닿기 위한 방편임을 알 수 있다. 박유석은 뜬 구름 같은 세상에서 모든 것은 인연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느꼈다. 모든 일을 순리에 맡기고,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살면서, 마음의 빗장을 풀고 담담하게 그 날을 맞이하리라고 말한다. 도신이 구속 또한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안 것처럼 박유석 또한 헛된 것에 얽매여 살아왔음을 알았다. 그래서 담담하게 그날을 맞이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욕망을 놓은 기다림의 길에서 그는 정토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바로 보고 있다.
주역 4괘의 마지막 괘는 화수미재이다. 박유석의 시는 아직 마침표가 아니라 화수미재와 같은 쉼표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미래는 그의 건강과 시적인 새로운 사유, 풍요로울 수 있는 철학적 사유에 따라 새로운 진경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다. 아둔한 내가 붓을 아직 놓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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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동시집, 『탄차를 밀어주던 달』, 문예운동, 2004.
[시집]
첫 시집, 『잠못 이루는 산』,울림사, 1991.(『정선 별곡』으로 표제를 바꾸기도 하였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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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시집, 『산하고도 정이 들면』,강원일보사, 1997.
제4시집, 『너에게 준 산』, 한결, 2001.
제5시집, 『그래도 저 강은 흐르는구나』,태원, 2006.
제6시집, 『와동 가는 길』, 태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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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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