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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강 예수님께서 호통치는 제자 2
26.01.17(토)
이 교회 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시고 이제 예수님께서 바로 그 다음 21절부터 이 교회를 어떻게 세워가실까를 본격적으로 말씀을 하십니다.
자 여기 보면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 대사장들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 다음에 죽임을 당하고 제 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비로소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 비로소는 뭐냐 예수님의 비장한 결단 비로소는 그동안 참고 기다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하며 있다가 드디어 그분의 때가 돼서 본격적으로 그분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그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본격적으로 나타내시고 이루어 가실 것을 비로소 시작하시는데 어떻게 시작하시느냐 보십시오.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그리고 제 3일에 살아나야 할 것 살아나는 건 살아남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수동형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거를 뭐라고 얘기 하냐하면 신적인 수동태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디바인 패시브라는 말을 하는데요.
자 이것은 무슨 말이냐하면 자 인간적으로 볼 때는 그냥 내가 고난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근데 내가 고난을 받는 그 현장에 하나님의 신비로운 손길이 개입하여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니까 나는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막 끌려다니고 너무너무 모욕을 당하고 힘든데 이 나의 고난과 고초당하는 걸 통해 하나님의 신비로운 손길이 역사하는 방식 이걸 바로 신적 수동태라고 얘기를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무력하게 끌려다니는 수동태의 삶으로 이끌림을 당하시게 된다는 것을 비로소 나타내셨다는 겁니다.
자 엄청난 충격적인 선포죠 이게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입니다. 자 그러자 베드로가 이 예수님을 붙들고 얘기를 합니다.
뭐라고하느냐하면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죽게 믿지 아니하리이다. 이렇게 보면 항변했다라고 하는 건 그냥 소극적으로 안됩니다.
주님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 같죠 그런데 이 본문의 말씀을 좀 더 깊이 있게 보면 훨씬 더 심각하게 예수님께 문제 제기를 했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자 우리 영어 성적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Peter to take aside 자 take aside 이게 무슨 말이냐하면 예수님 붙들고 따로 저 구석으로 갔다는 겁니다. 따로 저 구석으로 가서 bigent reviewk reviewk라는 말은 아주 다그치고 혼내는 거죠.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 따로 끌고 가서 예수님 하고 혼내는 거 제자가 호통을 치는 것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냐면 갓 포비디 로드 갓 포비디 여러분 포비드라는 말 금지하다라는 말이죠. 금지시키다 하나님이 못하게 막으십니다.
이거를 하나님이 금지하시는 겁니다.
디세브 네버 해픈 투 유 이게 절대 당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 같아요. 하나님이 막으셨다는 지금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수난의 길을 간다는데 안 된다는 거죠.
자 이거를 보면은요, 자 이것을 헬라어로 에피티마오라고 얘기를 합니다. 이것은 영어 성경으로 리뷰크라는 단어로 많이 번역이 되어 있는데요.
자 이 리뷰크라는 말 에피티마우라는 말을 이제 의미를 보면 상대방의 행동이나 말이 우리의 판단 기준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상대를 향하여 심하게 힐난하는 말을 퍼붓는 것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님께 아주 심한 힐란의 말 호통을 치는 말을 퍼부었다 라는 것입니다.
자 예수님 앞에 어떻게 이 제자인 베드로가 그렇게 호통을 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가려는 길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은 예수님을 따라감으로서 수난과 고난의 길이 아니라 이제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영광과 부귀와 존귀의 길로 또 출세의 길로 성공의 길로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이 뒤에 나오는 마태복음 20장 21절 이하의 말씀이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십자가를 지러 가실 때 세베대의 어머니가 나타나셔서 얘기를 하십니다.
예수님 무언가를 좀 부탁을 하겠습니다.
그러자 무엇을 원하느냐 얘기하죠.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해주십시오.
쉽게 말하면 예수님 예루살렘 들어가셔서 이제 왕이 되실 것 같은데 왕이 되시면 출세하도록 좌의정 우의정에 앉도록 우리 아들들을 써주십시오.
일종의 어머니의 치맛바람이 작용을 한 것입니다.
자 이 정도로 제자들은 예수님 따라갔을 때 원했던 것들이 강렬하게 있었습니다.
출세지향적 성공지향적 그래서 지금 예수님 뭐라고 하십니까? 이제 나는 대제사장들에게 잡히고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거라고 말씀을 하시죠.
살아난다라는 건 귓전에 들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하고 고난을 당한다는 말이 충격이었던 겁니다.
그게 뭐라고 그러냐 베드로가 갓 포비디 하나님이 안 된다고 그러십니다. 이걸 하나님이 금지하시는 일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지금 행할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금하신다고 얘기하는 건 베드로도 그만큼 마음이 다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또 베드로를 데리고 가서 뭐라 그러십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베드로도 충격받았을 것입니다.
자 제자는 선생님을 호통치고 선생님은 제자를 사탄아 물러가라고 혼내키고 아주 불꽃이 이는 것 같은 장면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처럼 예수님께서 지고 가시는 그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따라가려고 할 때 사실 이런 불꽃이 튀는 갈등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내가 과연 갈 수 있을까?
참 어려운 길인데 예수님 따라가면 좀 멋진 일들이 일어나야 되는데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되는 것일까? 사실 이것이 우리들의 마음에 늘 찾아오는 고민이자 갈등 요소가 됩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거다 그러자 이 제자들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마실 수 있다고 그럽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 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얘기를 하시면서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 말씀을 하십니다.
자 이런 것 보면 이 제자들은 온통 출세를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는 것 같이 예수님께 달려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시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 말씀합니다.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고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을 것이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가시는 길 주난의 길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몸된 기회를 새롭게 탄생시키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를 이루는 우리도 이러한 자기 부인 십자가를 지는 삶 주님을 따르는 것 내 목숨을 기꺼이 주님을 위하여 내어 던질 각오 이것들이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입니다.
20장 28절에 말씀하시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일을 위하여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자 오늘의 적용점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나에게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습니까?
신앙고백이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교회를 오래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그분이 누구냐 그러면 잘 모르겠다고 머리를 긁적거리는 분들이 의외로 계십니다.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고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내 삶을 구원하신 구세주요 메시아이십니다.
이런 고백이 우리에게 분명히 있어야 할 것이고요.
두 번째 교회 공동체의 기초는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 고백이다라는 것입니다.
자 우리 모두 이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 고백을 확실히 하는 공동체의 기초를 잘 세워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나는 수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기쁘게 따라갈 수 있는가?
자 베드로 예수님 그렇게 3년 동안 따라다녔지만 십자가시신다고 그러니까 절대 안 된다고 말리죠
예수님을 기쁘게 따라갈 수 있는 삶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결단으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께서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합니다라는 메세지를 제자들을 통하여 한 무명의 성도에게 보내셔서 그들을 사용하시는 것을 우리가 살펴볼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어떻게 하면 주님께 멋지고 아름답게 쓰임 받을 수 있을까? 새롭게 배워보는 소중한 시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마태복음 11강 주께서 쓰시겠다고 합니다 1
그동안 예수님께서 정신없이 살아가시다가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라 빌립보로 가십니다.
자 이때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면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물어보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더냐
이 질문이 바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고백하는 질문일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정체성이 결정되는 질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정확하게 고백을 하죠.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 뭐라고 하십니까? 이제 나는 대제사장들에게 잡히고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거라고 말씀을 하시죠.
베드로가 이 예수님을 붙들고 얘기를 합니다.
뭐라고 하냐하면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죽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자 예수님 앞에 어떻게 이 제자인 베드로가 그렇게 호통을 칠 수 있을까요?
자신은 예수님을 따라감으로써 수난과 고난의 길이 아니라 이제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영광과 부귀와 존귀의 길로 성공의 길로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시는 그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따라가려고 할 때 사실 이런 불꽃이 튀는 갈등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따라갈 수 있는 삶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결단으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지난 시간에 마태복은 16장 20절 이하의 예수님께 호통치는 제자 베드로에 대해서 함께 공부를 해봤습니다.
한때는 주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 메시아로 고백을 해서 큰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 예고앞에 마음이 다급해지면서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예수님을 따로 붙들고 호통을 치는 모습 그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함께 비춰보기도 했습니다.
자 오늘은 마태복음 21장 1절에서 11절 이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주께서 쓰시겠다고 합니다라는 주제로 함께 오늘 마태복음 말씀을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의 포인트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마태복음 21장 전후의 이 문맥적인 흐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마태복음 이제 21장은 본격적으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이 이제 전개가 됩니다.
바로 그전까지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면서 예수님과 제자들 간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이제 갈등과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자 이것을 뒤로 하고 이제 21장에 본격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흐름에 대해서 우리가 함께 공부를 하고요.
두 번째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귀 어떻게 보면 나귀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면서 타고 또 사용하셨던 아주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단순히 나귀가 아니라 이것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스가랴의 말씀을 성취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나귀의 역할이 어떤 것인가? 또 이 나귀를 기꺼이 내어주었던 주인의 역할은 어떤 것인가? 이런 것들을 함께 살펴보고요.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우리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먼저 오늘 21장 전후의 문맥적 흐름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21장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본격적으로 입성을 하시는데 이제 여기서부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이제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미 세 차례에 걸쳐서 수난에 대한 예고를 하셨습니다. 먼저는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마태복음 16장 20절 이하에 나오는 고백이었구요.
그 다음에 이제 두 번째로 예수님이 경고를 하신 거죠. 수난 예고를 하신 것은 마태복음 17장 22절 23절의 말씀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또다시 두 번째로 예고를 하셨고 그다음에 세 번째 예고가 등장을 하는데 그게 바로 20장 17절이하의 말씀입니다.
여기를 보시면 17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말씀하시죠.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하며 십자가에 못 받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이 이렇게 예고를 하십니다.
자 이렇게 예고를 하시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각오를 더욱 다지시며 올라가는데 이 중간에 웃지 못할 상황이 등장을 합니다.
바로 20장 20절 이하에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와서 예수님께 부탁을 합니다.
예수님 무엇을 구하든지 들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무얼 원하느냐? 예수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하나는 우리 아들 중에 하나는 주님의 우편에 하나는 주님의 좌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얘기를 하죠.
자 이렇게 부탁하니까 이 얘기를 들었던 주변의 제자들이 시기 질투를 하면서 미워하게 됩니다.
24절에 보면
열 제자가 듣고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자 예수님이 이제 십자가지러 가시는데 제자들끼리 알력 싸움을 하면서 다투는 것입니다.
자 제자들에게 대해서 우리가 상당히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만 사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외에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또 다른 숨겨진 제자가 있는데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귀의 주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숙하게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위하여 아무 조건없이 내어드리기를 원하는 제자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 이 성도의 소유였던 나귀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짐승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어미 나귀도 등장하고 또 새끼 나귀도 등장을 합니다.
이 나귀는 평범한 짐승이었습니다만 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평화를 가져오시는 왕으로 보통 승전의 장군 개선장군은 말을 타고 들어오죠
그러나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나귀를 타고 들어오십니다. 정말 귀하게 쓰임받는 나귀지요
그래서 초대교의 전설에 따르면 이 나귀는 예수님을 태운 이후로 주인이 일부러 평생 동안 아무도 태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귀의 생도 놀랍게 변화가 된 것이죠.
자 이 주인 나귀를 내어드린 주인의 삶도 놀랍게 아마도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자 그럼 오늘 본문에 이 배경을 보면 이 배경은 유월절입니다. 이 유월절을 맞이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데 주변 정황을 보면 사실 심상치가 않습니다.
8절에 보면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서 길에 펴고
또 9절에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렇게 외칩니다.
자 예수님이 들어가시는데 수많은 무리들이 이 예수님의 입성을 기다리며 따릅니다. 들어오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펴고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소아시아와 유럽 전역에 퍼져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다 이곳으로 전 세계의 유대인들이 다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 유월절은 사실 원래대로 말하면 애굽에서 출애굽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념하는 이스라엘 최대의 명절 민족의 명절이죠.
자 이들은 이 명절을 지키면서 지금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압제하에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 민족을 제 2의 출애굽을 시켜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절기를 지켰죠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에 대한 대망과 열망 희망이 강했던 기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시니까 적어도 수십만의 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자기들의 겉옷을 깔고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이러면서 나뭇가지를 베어서 길에 펴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자 여기서 두 가지 행동이 나오죠.
겉옷을 깔고 종려나뭇가지를 길 위에 폈습니다.
이건 특별한 행동입니다.
먼저 겉옷을 까는 행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겉옷은 딱 한 벌밖에 없는 외투이자 이불이었습니다.
겉옷을 벗으면 당장 속옷이 나왔죠
그래서 마태복음 5장 40절에도 보면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왜냐하면 겉옷을 벗는 것은 자신의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내어드리면서 그분 앞에 겸손함과 극진한 예의를 갖추는 것을 표현을 합니다.
자 이런 행위가 이 구약에 등장을 합니다.
이 아합왕 시절에 열왕기와 9장 12절 이하를 보면 아방이 그 어머니 이세벨과 또 하나님 앞에서 이 그 함께 너무나 이제 범죄를 하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예후에게 찾아와서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습니다.
자 예후가 기름 부음을 받고 주변의 부하들에게 내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 급하게 겉옷을 벗어서 예후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면서 왕이라고 선포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자 이미 아합이라는 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왕으로 선포를 하니까 주변에 있는 추종자들이 충성의 표시로 자기의 겉옷을 벗고 그 아래 깔고 경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겉옷을 까는 행위는 뭐냐 새로운 왕을 인정하고 영접하는 행위가 겉옷을 까는 것입니다. 그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이 표시가 바로 겉옷을 까는 행위였습니다.
자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나뭇가지를 잘라 흔드는 행동입니다.
이거는 예수님 당시로부터 200년 전에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헬라의 셀류코스 왕조가 있었습니다.
원래 알렉산더가 세운 헬라 제국이 있었는데,
이 제국이 나중에 둘로 나뉘죠 애굽을 중심으로 한 톨레미 왕조가 있고 또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셀루코스 왕조가 있었습니다.
이 셀루코스 왕조가 나중에 이스라엘을 너무 억압을 하고 또 하나님의 성전에 막 돼지 피를 뿌리고 주피터상을 세우고 이러니까 이들이 셀류코스 왕조에 대항해서 이제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승리해서 입성을 하는데 이때 유다 마카베오 장군의 행적을 기념하고 환영하면서 이제 구약 외경 중에 마카베오 하에 보면 10장7절입니다.
거기에 보면 마카베오가 입성을 할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백성들이 늘 열렬하게 환영을 합니다.
그래서 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입성을 하고 나서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을 깨끗하게 정화하고 예배를 드리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백성들의 환영을 받고 곧 바로 어디로 가시냐하면 성전의 21장 12절에 보면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정화하시죠.
성전 안에 매매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 막 돈 바꾸는 사람들 상 뒤엎고 이렇게 하십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새롭게 승리하면서 들어오시는 승리의 왕으로 성전을 정결케 하는 역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이 들어오시자 뭐라 그럽니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는 무슨 뜻입니까?
주역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러니까 로마 정부로부터 우리를 빨리 구원하시고 이기시고 새롭게 왕이 되셔서 이 나라를 다스리소서 다윗 왕가의 예언된 왕이요 이런 뜻입니다.
오늘 말씀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까 어떻게 됩니까? 온 성이 소동했다고 말씀을 하죠.
온 성이 소동했다. 그만큼 많은 백성의 기대와 흥분이 간절하게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을 많은 신학자들은 뭐라 그러냐 왕의 대관식이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백성들이 환영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이 등극해서 들어가는 장면과 같다 이런 뜻입니다.
자 그런데 예루살렘을 향하여 들어가시는 이 예수님이 십자가와 고난 가운데 들어가시는 왕으로 등장을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흥분하고 또 기대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환영하지만 이 사람들이 기대했던 왕이 아닌 다른 왕으로 들어가시는 겁니다.
자 이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뭐냐 바로 나귀라는 것이죠. 자 보통 왕이나 장군이 승리해서 들어갈 때는 말을 그것도 하얀 백마를 타고 가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입니다.
말은 전쟁을 위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나귀를 타고 즉위하시죠. 볼품없는 나귀입니다.
그러니까 이 나귀가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십자가를 지시는 왕으로 즉위하시는데 반드시 필요한 중요한 짐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승리하기 위해서 들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왕으로 자기를 낮추기 위해 들어가신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이게 바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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