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회 샘터시조상 수상
나는 1973년 10월 13일 강원도 삼척군의 화전 국민 학교에 첫 발령을 받고 부임하였다. 그곳에서 1978년 2월 28일까지 근무하였으니 만 5년이 넘게 근무하였다. 당시는 석탄산업이 매우 활발하던 때였기에 18학급 규모의 큰 학교였다. 하루 동안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으면 교실 안에 있어도 소매에 탄가루가 검게 묻었다.
검은 광산 마을에 있으니 내 고향 정선 문래리의 맑고 푸른 고향의 모습이 한층 더 소중하게 마음속에 어렸다.
1976년 초, 화전리에 눈이 내렸다. 하얀 은발의 축제는 검은 탄광 마을을 아름다운 설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3월 초, 매봉산에서 비치는 푸른 햇살은 지붕에 있는 눈을 녹이고 낙숫물을 만들었다. 곧 봄이 오는 듯했다. 내가 지내는 관사 지붕 아래의 흙은 촉촉한 모습으로 고향의 봄 냄새를 떠오르게 하였다.
‘맑은 햇빛과 지붕위의 하얀 눈, 눈이 녹아내리는 낙숫물, 그리고 흙담 밑에 쌓인 햇볕들의 모습 …’
이런 모습은 상상력에 날개를 달게 했고 설렘과 기쁨에 들뜨게 하였다.
자연발생적으로 즐거움에 마음을 담아내고 싶은 시조가 있었다. ‘늦겨울 아침’ 이다. ‘늦겨울 아침’이 태어난 배경이다. 아마도 내 인생도 겨울을 헐어내고 볕 묻은 마음 밭에 봄을 꽃 피우고 싶었던 마음이었나 보다.
1976년의 5월의 화전리와 ‘늦겨울 아침’
-샘터시조상 가작 1석 입선
내가 삼척군의 산간 탄광마을에 있는 화전 초등학교에 발령을 받고 간 것이 1973년 10월 13일이었다.
그 이듬해인 1974년에는 신출내기 교사의 어리숙한 1년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의 글을 모아 『나룻배』라는 문집을 발간하였다. 강의 나루에서 이쪽저쪽으로 손님을 건네 보내는 역할을 하는 나룻배, 나는 그 나룻배로 살기로 한 것이었다. 그 당시 이렇게 꽤 그럴듯하게 문집 제목에 대한 철학적인 변경까지는 늘어놓지 못하였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이 문집이 내가 교단에 발을 들여놓고 펴낸 문집 중에는 제일 첫 번 째 문집인 셈이다.
이렇게 내 문학의 글쓰기 작업은 아이들 곁에서 1974년부터 시작되었다.
1975년엔 『꽃밭』이라는 학급문집을 만들었다.
1975년엔 문학작품에 대한 글쓰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71년과 1972년의 대학생활에서는 『문학사상』,『현대문학』등의 잡지와 소설집을 주로 읽기만 했다. 대학 도서관에서 원효 사상에 대해 집중적으로 책을 읽고 사유에 몰입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입시 위주 공부가 이루어졌지만 그 틈새에 시적 사유에 대한 시간을 많이 가졌다. 특히 점심을 끝내고나면 강릉고등학교 본관 건물 뒤에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 옆에 앉아 쉬며 시적 정서를 만끽하였다. 고등학교 때에는 조병화의 ‘의자’를 인상적으로 읽고 외웠다. 한시에서는 두목의 ‘산행’이 매우 깊은 정취와 의미로 다가왔다. 또 빨갛고 두툼한 표지의 김소월 시집을 사서 지니고 다니면서 뽐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어릴 때의 고향 산천과 당시의 가족, 마을 사람들의 인정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고향에서 지낸 기간은 12년의 기간이다. 그런데도 그 기간은 그 이후인 55년의 삶보다 더 긴 시간으로 많은 역사적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왜일까. 지금도 그 고향의 크고 작은, 아름답고 무서운 이야기들은 저 황하의 물줄기처럼, 양자강보다 더 긴 흐름으로 내 삶의 주요한 부분을 이어주고 있다.
1976년 초, 문득 내 눈에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때가 1976년 2월의 어느 눈부신 아침나절이다. 마을이 탄 무더기로 여기저기 얼굴을 드러낸 게 마치 검은 먹물이 쿨렁쿨렁 흘러나온 듯했다. 그런 마을에 이틀 전에 내리던 하얀 눈이 마을을 모두 덮어버렸다. 그리고 해가 뜬 것이다. 해는 눈 위를 맨발로 밟고 찾아오는 손님 같았다. 움막 같은 관사 지붕에서는 낙숫물이 작은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고 있다. 물방울이 연주하는 음악이었다. 흙벽 바로 아래의 흙들은 햇볕이 묻어 뽀송하였다. 슬레이트로 덮은 관사의 헐렁한 지붕을 나는 고향의 초가집 지붕으로 환치(換置)해 놓았다. 그러자 이 모든 것이 그려내는 풍경은 신비로웠다.
단숨에 붓을 들어 시조를 그려나갔다.
햇살이 눈을 밟고 달려오는 이 아침
지붕엔 토독 토독 겨울이 헐리는데
볕 묻은 흙담 밑에선 봄은 자릴 트는가
- 늦겨울 아침 -
이렇게 써 놓고 ‘늦겨울 아침’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냥 말 그대로 늦겨울 아침에 일어난 일을 쓴 것이기 때문이다.
3월 초, 나는 이 작품을 월간 『샘터』에 응모하였다. 76년 5월호인가에 이 작품이 게재되었다. 내 나이 스물 세 살 만으로는 스물 한 살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인쇄된 책에 내 이름 석자가 시를 쓴 작가로 올려진 것이다.
전국의 많은 여성들이 감동이 있었다고 편지를 보냈다. 이 작품이 연말에 심사위원들에 의해 [샘터시조상 가작 1석]에 뽑혀 1977년 샘터 1월호에 게재되었다. 이것으로 나는 한국문단에 시조 또는 동시조라는 장르로 얼굴을 내민 것이다. 당시 나는 갑자기 보통의 인간에서 뭔가 달라진 인간으로 착각하였다. 우쭐거리는 기분도 들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의 그 치졸한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1975년 3월 1일자로 화전국민학교에 최도규씨가 전근 오셨다. 그는 황지중앙국민학교에서 오셨다. 그 분은 이미 강원아동문학회에 회원으로 활동하며 많은 시를 쓰고 계셨던 분이다. 그 분을 만나면서 내 문학의 불꽃은 활활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 수상 작품
늦겨울 아침
남진원
햇살이 눈을 밟고 달려오는 이 아침
지붕엔 토독토독 겨울이 헐리는데
볕 묻은 흙담 밑에선 봄은 자릴 트는가
(심사위원: 정완영. 백재삼. 이근배)
시상식은 1976년 11월 10일 샘터사 본사에서 있었다. 내 문학의 인생에서 가장 먼저 받은 문학상이었다. 이 시조상을 받고서 서울의 시조시인 류제하 선생을 만나는 행운도 얻었다. 샘터를 보고 그 분이 연락을 해주셨다.
그해 겨울 최도규 형과 함께 화곡동 아파트에 사시는 그 분 댁을 방문하였다. 그날도 화곡동에는 하얀 눈이 내려 눈을 밟으며 다녔다. 류제하 선생은 당시 금성출판사에 근무하셨고 시문학에 시조 월평을 한동안 집필하고 계시던 우리 문단에 쟁쟁한 중진이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내 되시는 진복희씨도 유명한 시조시인인 줄을 뒤늦게 알았다. 그날 집에서 뵈었을 때 부인도 시조작가라는 걸 전혀 말씀에 담지 않으셔서 우리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이 동그랗고 앳되어 보이는 사모님이 무척 상냥하고 미인인 것 외에는 아무 지식이 없었다.
그리고 20 여년이 썩 지난 어느 날 서울의 한국아동문학인협회 총회에서 뵈었다. 동시조를 쓰시는 동시조 시인으로 우리 한국아동문학인협회에 신입회원으로 가입하시던 날이었다.
지금 그때의 샘터를 다시 읽어보니 시조 투고에 이정환 시인과 이준섭 시인도 눈에 띄었다. 샘터시조상 당선은 ‘억새풀’의 최정웅 시인, 가작 1석에 ‘늦겨울 아침’의 남진원 시인, 가작 2석에 ‘새벽 산길’의 이정환 시인이 뽑혔다. 후일 최정웅 시인, 이정환 시인, 이준섭 시인은 한국문단을 이끄는 원로로 존경을 받고 있다. 한 두가지 예를 들면, 최정웅 시인은 전남문인협회 부회장을 지냈고 도서출판 [열린문학]대표로 계신다. 이정환 시인은 대구시조시인협회 회장도 하시고 이준섭 시인은 한국동시문학회 회장을 하신 훌륭하신 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