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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자원 |
□ 설화
△ 풍산 류씨의 입향
풍산 류씨는 본래 풍산 상리에 살았으므로 본향이 풍산이지만, 제7세 전서 류종혜 공이 화산에 여러 번(가뭄, 홍수, 평상시) 올라가서 물의 흐름이나 산세며 기후조건 등을 몸소 관찰한 후에 이곳으로 터를 결정했다고 한다.
입향에 관하여「나눔」의 전설이 있는데, 집을 건축하려 하였으나 기둥이 3번이나 넘어져 크게 낭패를 당하던 중 꿈에 신령이 현몽하기를 여기에 터를 얻으려면 3년 동안 활만인을 하라는 계시를 받고 큰 고개 밖에다 초막을 짓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음식과 노자 및 짚신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참외를 심어 인근에 나누어주기도 하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활인을 하고서야 하회마을에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입향 후 풍산 류씨들은 계속된 후손들의 중앙관계에의 진출로 점점 성장하였으며, 입암 류중영, 귀촌 류경심, 겸암 류운룡, 서애 류성룡 선생 등의 조선중기에 배출한 명신들로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 연기설화
천등산은 옛적에는 대망산이라 불렀다. 절 뒷산에는 거무스름한 바위가 산정을 누르고 앉아 있는데 그 바위 밑에 천등굴이라 부르는 굴이 있다.
능인대사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법문에 정진하기 위하여 대망산 바위굴에서 계절이 지나는 것도 잊고 하루에 한끼 생식을 하며 도를 닦고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휘몰아치는 겨울에도 "나무아미타불", 찌는 듯한 더위의 여름에도 "나무아미타불", 마음과 몸을 나른하게 풀어지게 하고 아지랑이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봄에도 "나무아미타불", 낙엽지는 가을에도 "나무아미타불" 뿐이었다.
괴괴한 산속의 무서움과 고독 같은 것은 아랑곳없었다. 이렇게 십년을 줄곧 도를 닦기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밤 홀연히 아리따운 한 여인이 앞에 나타나 "여보세요. 낭군님" 옥을 굴리는 듯 낭낭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미처 능인이 고개를 들기 전에 보드라운 손길이 능인의 손을 살며시 잡지 않는가! 눈을 들어 보니 과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고운 살결에 반듯하나 이마와 까만 눈동자 오똑한 콧날, 거기에는 지혜와 정열이 샘솟는 것 같아 진정 젊은 능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 했다.
여인은 "낭군님" 다시 한 번 맑은 목소리로 능인을 불렀다. "소녀는 낭군님의 지고하신 덕을 사모하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낭군님과 함께 살아간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사옵니다. 부디 낭군님을 모시게 하여 주옵소서." 여인의 음성은 간절하여 가슴을 흔드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능인은 십년을 애써 쌓아온 수련을 한 여인의 간청으로 허물 수 없었다. 능인은 준엄하게 여인을 꾸짖었다. "나는 안일을 원하지 아니하며 오직 대자대비 하신 부처님의 공력을 사모할 뿐 세속의 어떤 기쁨도 바라지 않는다.
썩 물러나 네 집으로 가거라!" 능인의 꾸중에 산도 크르릉 울리는 듯 했다. 그러나 여인은 계속 유혹을 하며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능인은 끝내 거절하였으며 오히려 여인에게 깨달음을 주어 돌아가게 했다.
여인이 돌아서자 구름이 몰려들더니 여인을 사뿐이 들어 하늘로 오르며 " 대사는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나는 천상 옥황상제의 명으로 당신의 뜻을 시험코자 하였습니다. 이제 그 깊은 뜻을 알게 되었사오니 부디 훌륭한 인재가 되기를 비옵니다." 여인이 하늘로 사라지자 그곳에는 산뜻한 기운이 내려오더니 굴 주변을 환히 비추었다.
그때 하늘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또 울려왔다. "대사, 아직도 수도를 많이 해야 할텐데 굴이 너무 어둡습니다. 옥황상제께서 하늘의 등불을 보내드리오니 부디 그 불빛으로 더욱 깊은 도를 닦으시기 바라나이다." 그러자 바로 그 바위 위에 커다란 등이 달려 어둠을 쫓고 대낮같이 굴안을 밝혀주고 있었다.
능인은 그 환한 빛의 도움을 받아 더욱 열심히 수련을 하여 드디어 득도하여 위대한 스님이 되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등의 덕택으로 수도하였다하여 그 굴은 '천등굴' 대망산을 '천등산'이라 이름 지어 불렀다고 한다
△ 안동 법제사의 전설
이 사찰은 남선면 현내리의 절골에 있었던 낙태사에서 유래된다. 지금부터 약 33년 전에 임남순 보살이 임보살, 박보살 등과 함께 절을 짓기로 결심하고 기금을 조성하여 예전부터 내려오던 낡은 절간을 헐고 2칸 크기의 법당을 지어 기도와 환자 치료를 하다가 1979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한 후 법제사로 명명하고 한국불교 태고종에 등록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임보살이 절골에 절을 짓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임남순은 16세에 남선면 현내리의 권영재에게 시집을 오게 되었는데 권영재는 시어머니가 딸 5명을 낳은 후 39세에 얻은 아들이다. 남편은 20세가 되면서부터 속병으로 고생을 했는데 임남순이 갖은 정성을 다하여도 차도가 없고 또 이들 부부사이에서 딸 2명을 낳은 후 아들이 없어 시부모님이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청포장수가 집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청포도장수에게 청포를 구입하는 조건으로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청포장수는 시댁의 윗대 조상부터 산불(산치성)을 썼기 때문에 그 산불을 못 찾아가면 칠성을 위해야 한다고 했다. 청포장수가 알려준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칠성에게 치성을 드리기 위애 당일 물레로 삼실을 자아서 석자 정도의 크기로 삼베를 짠 다음 그것을 치성드리는 장소인 부엌 뒤편에 깔고 납작한 돌을 rnm 위에 놓고 물 한 바가지를 올려놓는다.
또 쌀을 방앗간에서 7번 도정하여 깨끗한 물에 7번 씻어 밥을 지어 올리고, 들기름 종지불로 밝힌 다음 주부가 4월 초파일, 칠월 칠석 등 1년에 3번 밤 11시에서 새벽까지 기도하며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그래서 칠성에게 치성을 드린 지 1년만에 득남을 하였다.
그러나 남편의 병세는 차도가 없어서 점을 해서 물으니 신(일월신, 산신)을 받아서 법당을 차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절골에 있었던 옛 절을 헐고 낙태사를 짓게 되었다.
□ 유형문화재
△ 봉정사 극락전 [鳳停寺 極樂殿]
지정종목 : 국보 지정번호 : 국보 제15호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봉정사 시 대 : 고려, 종류 : 건축물 크 기 : 정면 3칸, 측면 4칸 |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는 신문왕 2년(682)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한다.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새를 만들어 날려 보냈는데,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이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극락전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72년 보수공사 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크게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상량문을 발견하였는데, 우리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 후 지붕을 크게 수리하기까지 통상적으로 100~150년이 지나야 하므로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까지 올려볼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기둥은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 형태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문을 달고, 양 옆칸에는 창문을 내었다. 건물 안쪽 가운데에는 불상을 모셔놓고 그 위로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화려한 닫집을 만들었다. 또한 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중기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 놓았다.
봉정사 극락전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본받고 있다.
△ 동부동 오층전탑 [東部洞五層塼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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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56호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소 재 지 : 경북 안동시 운흥동 231 시 대 : 통일신라시대 크 기 : 벽돌 길이 27.5cm, 너비 12.5cm 종 류 : 전탑 |
안동역 구내에 있는 탑으로, 전탑의 형태를 띠고 있다. 안동 지방에는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전탑이 다소 있는데, 전탑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른다.
탑은 무늬 없는 벽돌로 5층을 쌓았다. 몸돌에는 층마다 불상을 모시기 위한 방인 감실(龕室)을 설치했고 특히 2층 남쪽면에는 2구의 인왕상(仁王像)을 새겨두었다. 지붕돌은 벽돌을 사용한 것에서 오는 제약 때문에 처마 너비가 일반 석탑에 비해 매우 짧다. 밑면의 받침수는 1층부터 차례로 10단·8단·6단·4단·3단으로 줄어들었고 처마 끝에는 기와골을 받기 위해 총총한 나무를 얹고 4층까지 기와를 입혀 놓았다. 이러한 지붕모양은 탑신의 감실과 더불어 목탑양식의 흔적을 보여준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 남아 있다.
이 전탑은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동국여지승람』이나『영가지(永嘉誌)』에 기록된 법림사(法林寺)의 전탑으로 추정된다.『영가지』에 법림사전탑이 7층이라는 점, 조선시대에 크게 보수를 하였다는 점, 탑의 머리장식은 법흥사탑(法興寺塔)과 같이 금동제였으나 임진왜란 직후 명나라 군인들이 도둑질해 갔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지금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안기동 석불좌상[安奇洞石佛坐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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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58호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소 재 지 : 경북 안동시 안기동 152-13 시 대 : 통일신라시대 크 기 : 높이 53cm 분 류 : 석불 |
현재 불상의 머리는 후대에 새롭게 붙여 놓은 것으로 발견 당시에는 몸통과 대좌만 있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 역시 원래 불상과 같이 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비록 원래의 모습이 많이 없어지고 보존 상태도 그리 좋지 못하나 세부의 조각 수법이 우수하고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 옷은 소매 하나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고, 짤막하게 이어진 옷주름 역시 활달한 모습이다.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것은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비록 불상의 신체만 남아 있지만 균형 잡힌 자세나 둥글게 처리된 어깨, 부드럽게 흘러내린 옷주름 등 힘 있고 사실적인 모습을 통해 이 작품이 통일신라 후기의 것임을 알 수 있다.
△ 임청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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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182호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소 재 지 : 경북 안동시 법흥동 20 시 대 : 조선시대, 분류 : 누정 |
임청각은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지낸 바 있는 이명이 1515년(중종 10)에 건립한 주택이며,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의 집이기도 하다.
이 집은 영남산(映南山) 동쪽 기슭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한 명당에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중앙선 철도부설 때 50여간의 행랑채와 부속채가 철거되어 현재의 규모로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길에서 보면 맞담 너머로 보이는 웅장한 모습의 행랑채가 이 집이 소위 말하는 99간집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 중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보물로 지정된 군자정은 임청각의 별당으로 조선 중기에 지은 ‘丁’자 평면의 누각형 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중심은 남향의 대청이고, 그 서쪽에 이어서 지은 T자형의 온돌방이 부설되어 있다. 내부는 4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둘레에는 툇마루를 돌려서 난간을 세웠으며, 출입은 두 군데에 마련해 놓은 돌층계를 이용하게 되어 있다.
△ 도산서원 전교당[陶山書院 典敎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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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종목 : 보물 지정번호 : 보물 제210호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소 장 : 도산서원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시 대 : 조선, 종류 : 서원 |
서원이란 훌륭한 사람들에게 제사지내고 유학을 공부하던 조선시대 사립교육기관을 말한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처음 세웠다. 그 중 전교당은 유생들의 자기수양과 자제들의 교육을 하는 강당으로서, 전교당의 앞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이 전교당은 조선 선조 7년(1574)에 지은 것을 1969년에 보수한 것이며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이고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매우 간소하게 지은 건물로 선조가 서원에 내려준 ‘도산서원’이라는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임금님 앞에서 쓴 글씨라고 전한다.
△ 석빙고[石氷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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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305호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소 재 지 : 경북 안동시 성곡동 산225-1 시 대 : 조선시대 크 기 : 길이 12.5m, 너비 6.lm, 높이 5.4m 분 류 : 석빙고 |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 특히 이 석빙고는 낙동강에서 많이 잡히는 은어를 국왕에게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 영조 13년(1737)에 지어졌다. 형태는 동·서로 흐르는 낙동강 기슭의 넓은 땅에 강줄기를 향하여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으며, 입구는 특이하게 북쪽에 옆으로 내었다.
안으로 계단을 따라 들어가면 밑바닥은 경사져 있으며, 중앙에는 물이 강으로 흘러가도록 만든 배수로가 있다. 천장은 길고 크게 다듬은 돌들을 무지개모양으로 틀어올린 4개의 홍예(虹霓)를 세워 무게를 지탱하도록 하고, 각 홍예 사이는 긴 돌들을 가로로 채워 마무리하였다. 천장의 곳곳에는 환기구멍을 두었는데, 이는 안의 기온을 조절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바깥까지 연결하였다.
전체적으로 규모는 큰 편은 아니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특히 석빙고는 그 위치가 매우 중요한데,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여 지금은 본래의 위치보다 높은 곳으로 옮겨왔다. 이전에는 바로 옆에 강이 흘러서 얼음을 운반하기가 아주 쉬웠을 것으로 보인다.
△ 소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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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475호 지정연도 : 1968년 12월 19일 소 재 지 : 경북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562 시 대 : 조선시대 크 기 : 정면 4칸, 측면 2칸 분 류 : 누정 |
조선 중종 때 문신 서해(徐懈) 선생이 서재로 쓰기 위해 명종(재위 1545∼1567) 때 지은 별당이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부속된 방은 지붕 양식이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왼쪽 3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누마루며 앞쪽으로 온돌방 2칸을 붙여 집의 구조가 T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간략한 새부리 모양의 구조를 짰다. 누(樓)마루와 온돌방 뒤쪽으로 난간을 둘렀고 건물 안쪽은 민가 건축에서 볼 수 없는 재료를 사용하여 지붕 맨 윗부분에 있는 재료를 받치고 있다.
기와에 새겨진 용 두 마리가 나는 문양은 민가에서 보기 드문 것이며, 건물에 나타나는 오래된 수법들은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운청호종일기 [雲川扈從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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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484호 지정연도 : 1968년 12월 19일 소 장 : 김승태 소 재 지 :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79 시 대 : 조선시대 크 기 : 3책 분 류 : 원고본 |
이 책은 조선조 관료인 김용(1557∼1620)이 임진왜란 때에 선조가 의주로 피난 중 임금을 호종하였을 때 직접 쓴 일기이다.
김용은 안동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일찍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는데 그 후 임진왜란이 터지자 임금이 피난한 곳으로 달려가 왕을 수행하였다. 후에는『선조실록』을 펴내는 일에 참여하기도 했다.
작성기간은 1593년 8월∼1594년 6월까지 약 1년간이다. 표지에는『운천선조호종일기』라고 썼다. 이 자료는 후에 잊혀졌다가 1925년 9월에 발견되어 3책으로 장첩하였다. 호종일기는 평화시의『승정원일기』와 유사한 것이나, 임진왜란 중 행래소에서 사관들이 호종하면서 당시의 모든 정사를 기록한 것으로 일차적인 역사적 자료로서의 값진 기록이다.
더욱이 이『운천호종일기』는 피난 중 직접 체험하고 보고들은 사실들을 그대로 기록하였으며, 사생활은 물론 국가의 정치, 군사, 외교 등 각 방면에 걸친 귀중한 자료이다.
△ 농암 이현보 종손가 소장문적[聾巖李賢輔宗孫家所藏文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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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1202호 지정연도 : 1994년 7월 29일 소 장 : 이성원 소 재 지 : 경북 안동시 옥정동 439-6 시 대 : 조선시대 분 류 : 고문서·전적·회화 |
이 문적류들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며 시조작가로 유명한 농암 이현보(1467∼1555)와 그의 종손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교지 고문서와 전적류, 회화류 등이다.
이현보는 연산군 4년(1498) 문과에 급제한 뒤 내직으로 예문관검열, 사간원정언과 외직으로 밀양과 안동, 충주 등지의 지방관을 지냈다. 이후 형조참판, 호조참판 등의 벼슬을 지내고 1542년 76세 때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말년을 고향에 돌아와 지냈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소재로 삼아 시조를 지은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 사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고문서류인 교지는 총 23매로써 연산군 4년(1498)∼명종 15년(1560) 사이의 것으로 이현보(14매), 이파(1매), 이문량(8매)과 관련된 교지들이다. 전적류로서는『애일당구경첩』으로 모두 2책으로 되어있다. 한책은 당시 명사들의 친필로 쓴 시를 모아 하나의 첩으로 만든 것이고,『애일당구경별록』은 생일가를 포함한 국문가사 등 이현보의 작품과 행적을 별도로 모아 편성한 것이다. 또한 회화류의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는 이현보가 동부승지로 재직시 승정원 관원 10명과 계모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는 훼손이 심하기는 하나, 다른 계회도와는 달리 『은대계회도』가 처음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계회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교지 등의 자료는 조선 전기 인사행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들로써 평가되며, 전적류들은 국문가사와 국문학 연구자료로 주요한 것들이다.
△ 보광사(普光寺)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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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1571호 지정연도 : 2008년 8월 28일 소 장 : 보광사 소 재 지 : 경북안동시 도산면 서부2리 산50-7 보광사 크 기 : 불상1구, 복장유물 10종 194점 종 류 : 불교유물 |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정교성과 화려함을 두루 갖춘 보관, 이국적이면서도 우아한 귀족풍의 얼굴모습, 단정하고 엄숙하면서도 안정된 신체비례, 간결하지만 탄력 넘치는 옷주름의 표현, 불신 전반에 걸쳐 정교하게 장엄된 영락 장식 등 품격 높은 고려 불교문화의 한 단면을 뚜렷이 보여준다. 이 관음보살좌상은 조성발원문이 남아있지 않지만 현존하는 작품과의 비교를 통해 13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보살상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이 시기의 보살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점에서 그 자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 하겠다.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에서는 10종 194점에 이르는 복장유물이 함께 발견되었다. 복장전적 중 ‘보협인다라니경(寶篋印陀羅尼經)’과 ‘범서총지집(梵書摠持集)’의 인출시기는 불상 조성시기인 13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데, ‘보협인다라니경’은 1007년 총지사(摠持寺)에서 간행한 목판의 원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주목된다. 또한 ‘범서총지집’은 1150년 평양 광제포에서 선사 사원(思遠)이 교정하여 개판한 간행기록이 있어 서지학·밀교사상·다라니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있으며, 지질 및 판각술은 고려 인쇄문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경전류도 대개가 고려시대 인본들로 가치가 있다. 복장유물 중 ‘저고리’는 현전하는 예가 드문 고려시대의 저고리로 복식사 및 직물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 도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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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170호 지정연도 : 1969년 5월 28일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시 대 : 조선, 종류 : 서원 |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산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보물 제211호)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보물 제210호)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선조 8년(1575) 국왕에게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서원의 건축물들은 민간인들의 집처럼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 병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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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사적 제260호 지정연도 : 1978년 3월 31일 소 재 지 :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 시 대 : 조선시대 종 류 : 서원 |
병산서원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류성룡은 본관이 풍산(豊山)으로,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도승지·예조판서·우의정·좌의정 등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시에는 영의정으로 왕을 호종하고, 성곽 수축·화기 제작을 비롯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으며,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1598년(선조 31) 북인들의 탄핵으로 한때 관작을 삭탈당하고 향리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懲毖錄)』을 쓰는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도학(道學)·문장·덕행·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지역 후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병산서원은 원래 안동 풍산현(豊山縣)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풍산류씨의 교육기관이었다. 1572년(선조 5) 류성룡이 현 위치인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로 이건하였다. 1607년(선조 40) 류성룡이 세상을 떠나자 후학들이 1614년(광해군 6) 존덕사(尊德祠)를 세워 류성룡의 위패를 봉안하고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류성룡의 위패를 여강서원으로 옮겼다가 1629년(인조 7) 다시 현 위치로 옮겨와 주향(主享)하고 있다. 병산서원은 철종 때 사액서원이 되었다.
병산서원 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재와 서재, 신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경사지 아래쪽의 외삼문(外三門)인 복례문(復禮門)에 들어서면 왼쪽에 연못이 있고 건너편에 높은 석축(石築)이 있는데, 이 석축의 계단을 오르면 보기 드물게 큰 누각인 만대루(晩對樓)가 동서로 길게 놓여 있다.
누 밑을 지나 계단을 다시 오르면 마당 건너편에 강당인 입교당(立敎堂)과 그 앞 양측에 동재와 서재가 마주 보고 있는 강학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동재 뒤편 담장 밖에는 주사(廚舍)인 ‘ㅁ’자형 주택이 있다. 강당 뒤편에는 사당인 존덕사 공간이 전체의 중심축에서 약간 벗어난 오른쪽 높은 곳에 별도로 일곽을 이룬다. 사당 영역 좌측에는 장판각을, 우측에는 전사청을 두었다. 중심축 선상에 외삼문-누각-강당-내삼문-사당을 배치하는 일반적인 방식과는 달리 사당 공간이 중심축에서 벗어나 있는 점이 특이하다.
만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에 무익공(無翼工) 3량가 팔작지붕으로 꾸민 누각이다. 2층 누마루를 통간 우물마루로 꾸미고 그 주위에 계자각(鷄子脚) 난간을 돌렸다. 강당인 입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중앙 3칸에 대청을 두고 그 좌측과 우측에 각 1칸씩의 온돌방을 두었다. 좌측 방 앞에는 쪽마루를 두고 우측 방 앞과 뒤에는 각각 툇마루와 벽장을 시설하였다.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5량가 팔작지붕의 굴도리 장혀수장집이다.
동재와 서재는 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은 대칭적 구성의 건물로 각기 정면 4칸, 측면 1.5칸 크기의 납도리 5량가 맞배지붕이다. 서재는 동재와 달리 큰방 앞과 대청 뒤의 쌍창이 오래된 기법인 영쌍창으로 되어 있다. 존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내부를 통간 우물마루로 꾸몄다. 화강석 기단 위에 정평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5량가 맞배지붕의 초익공계 건물이다. 내삼문·외삼문과 장판각, 그리고 전사청의 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크기의 3량가 맞배지붕이다. 내삼문은 무익공으로 꾸몄고, 나머지 세 건물은 납도리 장혀수장집으로 꾸몄다.
빼어난 자연경관이 병풍을 둘러친 듯하여 '병산'이라 불기기 시작하였으며 화산을 등지고 앞으로 낙동강이 백사장과 함께 굽이쳐 흘러가고 그 투명한 푸름은 소나무의 짙푸름과 서로 다투는 듯 조화롭다. 만대루에서는 주변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입교당 에서는 자연과 조화된 병산서원의 미(美)를 더욱 느낄 수 있다.
‣ 병산서원은 1978년 3월 31일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 안동시 풍천면(豊川面) 병산동(屛山洞)에 있다. 전신은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풍산유씨의 사학(私學)이었는데, 1572년(선조 5)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13년(광해군 5) 정경세(鄭經世)가 중심이 되어 지방 유림이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863년(철종 14)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사원으로 승격되었다.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의 하나이다.
제향공간으로 존덕사(尊德祠)·신문(神門)·전사청(典祀廳)이 있고, 강학공간으로 입교당(立敎堂)·동재(東齋)·서재(西齋)가 있으며, 부속건물로 장판각(藏板閣)·만대루(晩對樓)·복례문(復禮門)·주사(廚舍) 등이 있다. 유성룡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 무형문화재
△ 하회별신굿탈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약 500년 전부터 음력 정초마다 동민들의 무병과 안녕을 위하여 마을의 서낭신[城隍神]에게 제사지낸 동제였다. 이때 신의(神意)를 기쁘게 하고자 부락 사람들이 광대와 악공이 되어 이 가면극을 연희(演戱)하였다. 하회리의 서낭신은 여신으로써 ‘무진생 성황님’이라고 불리는 17세의 의성김씨 처녀로 알려져 있다. 성황제는 동제인 평상제와 5년 또는 10년마다 행하는 부정기적인 별신굿이 있다.
현재, 하회별신굿탈놀이는 3월부터 11월까지 안동 하회마을 입구에 위치한 하회별신굿탈놀이 전수회관에서 상설공연을 한다. 3월, 4월, 11월은 매주 일요일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5월~10월은 매주 토·일요일 오후3시부터 4시까지 공연한다.
그리고 매년 한 차례 적당한 시기에 정기공연이 열리며,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기간에는 일정에 따라 여러 차례 공연한다.
△ 민속놀이
전통 사회에서 안동은 팔매싸움[石戰], 안동차전놀이, 금소 동채싸움, 줄당기기 등의 대형 편싸움이 성행하는 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들 민속놀이는 아이들로부터 시작되어 어른들에 의해서 마감되는 전개 과정을 갖고 있었다. 아이들의 팔매싸움에서 어른들의 팔매싸움으로, 골목줄에서 큰줄로, 째기동채에서 본동채로의 확산은 이를 잘 보여준다.
어른들이 주도하는 민속놀이가 행해지기 이전까지의 과정은 소규모의 싸움과 길놀이의 연속이었으며, 이 과정을 통해서 공동체 구성원들은 점차 고조되는 축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중 특징적인 민속놀이로 놋다리밟기, 하회별신굿놀이, 선유줄불놀이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놋다리밟기
안동 지역에는 여성들의 민속놀이인 놋다리밟기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고, 이들 놀이에는 남성 못지않게 격렬한 편싸움이 포함되어 있었다. 안동놋다리밟기라는 대표 명칭 아래 포함된 다양한 놀이 가운데 하나인 꼬깨싸움은 임하면 금소리, 풍천면 구담리 등의 사례로 보아서 대단히 격렬한 편싸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안동 지역에는 아이에서 어른, 남성에서 여성에 이르는 전체 구성원들이 따로, 또는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편싸움 형식의 민속놀이를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안동 지역 민속의 특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선유줄불놀이
역시 하회에서 전승되었던 선유줄불놀이는 또 다른 맥락에서 주목되는 민속놀이이다. 매년 7월 기망(旣望)에 정기적으로 행해졌던 이 놀이는 품격과 운치가 곁들여진 양반 놀이문화의 정수이다. 불꽃놀이와 뱃놀이, 그리고 달걀불과 선상의 시회(詩會)가 다채롭게 어우러진 선유는 당시 안동 양반들의 놀이 세계를 음미해 볼 수 있는 대표적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특징
첫째, 편싸움 형식의 다양한 민속놀이가 있었다. 이 가운데 동채싸움은 역동적인 남성놀이로서 안동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놀이이다.
둘째, 여성들의 놀이인 놋다리밟기가 강한 전승력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편싸움 형태를 취하고 있는 꼬깨싸움은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셋째,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서낭굿 계열의 탈춤으로서 탈춤의 옛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넷째, 선유는 양반 놀이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세시놀이로서 그 다채로움과 품격이 두드러진다.
□ 향토음식
△ 건진국수와 헛제삿밥
건진국수는 잔치음식의 하나이다. 전국적으로 국수는 혼례와 생일 때 먹는 중요한 의례음식이었다. 안동 지역의 건진국수는 ‘길한 음식’, ‘장수하는 음식’이라는 의미를 가진 국수로서 무척 곱다. 잔치 때 다수의 손님을 효과적으로 맞이하기 위해 독특하게 말아내는 것이다.
즉, 손님이 올 때마다 국수를 삶아내는 것이 아니라, 면을 미리 삶아서 1인분 정도로 뭉쳐 두었다가 손님이 오면 고명을 올리고 국물을 부어 양념간장과 함께 차려내던 국수였다. 이런 국수로 북적대던 잔치에서 매우 신속하게 손님 대접을 할 수 있었다.
유교 문화가 융성한 안동에서는 조상을 극진히 모시고 손님을 접대하는 일이 가장 큰 책임이라고 여겨 제사를 매우 중시했다. 제사 후에는 참석했던 사람들이 둘러앉아 제상에 올랐던 음식을 나누어 먹었는데, 이를 음복이라 한다.
이때 제사를 지낸 나머지 음식으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 풍습이 있었다. 이러한 풍습을 이어받아 제사를 지내지 않고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을 그대로 재현한 음식이 헛제삿밥이다.
헛제삿밥은 쇠고기·상어·문어·가오리·고등어·배추전 등이 주요한 내용물이 되는 제물 형식의 반찬을 제기에 담고, 고춧가루가 전혀 사용되지 않은 국과 간장, 그리고 한 그릇의 밥을 올린 것이 전부이다.
헛제삿밥은 1970년대 말에 새롭게 개발된 음식이다. 전통적으로 안동에는 없었다고 하는 게 맞을 듯하다. 다만, 일부 마을에서 확인되는 것은 ‘헛신위밥’, ‘허신지밥’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야식용 비빔밥이다.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 목현마을에서는 이웃끼리 동지섣달 밤에 모여 놀다가 배가 고프면 제각기 쌀과 나물을 조금씩 내어서 쌀밥에다가 나물을 얹어 비빔밥을 해 먹는데, 이를 두고 헛신위밥이라고 했다.
헛신위밥이나 허신지밥이나 가짜 제사음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헛제삿밥은 유교적 제례문화의 요소가 선별적으로 재창조된 것이다.
△ 부식음식
간고등어와 곤짠지, 명태보푸리(명태보풀음), 대구보푸리(대구보풀음), 육포보푸리(육포보풀음), 수란 등을 들 수 있다. 간고등어는 안동 지역 사람들에게 비교적 흔하고 값싸게 먹을 수 있는 대표적인 생선이었다.
시간을 소급하면 간고등어는 가난한 안동 선비의 고급 반찬이었다. 안동은 내륙에 위치해 싱싱한 어물을 구경하기 어려웠다. 안동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는 영덕이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예전에는 영덕에서 안동까지 하루 만에 오가기 어려워 하루를 묵어야 했다.
하루가 지나고 나면 소금에 절인 고등어는 적당히 발효되고 간이 베어 맛이 좋았는데, 이것이 간고등어가 된 것이다. 당연히 안동 사람들은 간이 되지 않은 ‘통고등어’보다 소금에 절인 간고등어를 더 자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안동 사람들에게 이처럼 고등어가 더 친숙하게 된 데에는, 혼상제례를 위시하여 생일이나 회갑잔치에도 고등어가 비교적 자주 올랐다는 문화적 취향이 작용하였다.
‘곤짠지’는 무말랭이김치를 말한다. 무말랭이를 이용하여 초겨울에 김장을 할 때 담근 김치이다. 이 곤짠지는 김치의 일종이니 겨우내 먹는 장기 보존형 부식인데다가, 젓가락으로 집어먹기 편하여 어른들 밥상에 자주 올랐다. 더구나 다른 김치보다 물기가 적기 때문에 1970년대까지는 도시락 반찬으로도 널리 애용되었다.
한편 안동에서는 명태포, 대구포, 육포를 가지고 만든 보푸리가 귀한 손님 밥상에 자주 올랐다. 포를 두드려 부풀려서 매우 곱게 육질을 뜯어낸 다음 참기름과 소금으로 간을 맞춘 고급 반찬이다.
또한 귀한 손님에게는 수란을 올렸다. 종지에 물을 담아 팔팔 끓을 때 달걀을 깨뜨려 넣고 반숙이 되면, 잣가루를 갈아서 새콤달콤하게 만든 양념을 넣은 것이다.
△ 간식
안동식혜와 점주를 들 수 있다. 안동식혜는 밥에 엿기름물을 붓고 삭히고 달여서 만든, 다른 지역의 예사 식혜와 매우 다른 음식이다. 예사 식혜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연구자들에 의해서 ‘안동식혜’로 구분하여 부르게 되었다.
이 음식을 안동 사람들은 그냥 ‘식혜’라고 불렀지 ‘안동식혜’라고 부른 적이 없다. 물론 다른 지역에서 말하는 식혜도 안동에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감주 또는 단술이라고 하여 식혜와는 확연히 구분되었다.
안동식혜의 기본적인 조리법은 쌀 또는 좁쌀로 지은 밥에 엿기름물을 부은 다음 잘게 썬 무, 다진 생강, 고춧가루 물을 넣고 물을 넉넉하게 부어서 삭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안동식혜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더 맛있게 하려면 잣, 밤, 배, 사과, 볶은 땅콩 가운데 2~3가지를 넣어야 한다. 안동식혜는 다른 지역의 식혜맛과 붉게 만든 물김치맛이 동시에 나는 것이며, 약간의 과일맛도 볼 수 있는 간식이다. 전체적으로는 달고, 얼큰하고, 시원한 맛이 주를 이루며 소화작용을 돕는다. 안동식혜는 장기 보존이 어려운 발효 음식이므로, 냉장 시설이 없던 시대에는 동절기 음식이었다. 특히 즐겨 먹던 시기는 설과 대보름을 전후한 시점이었다.
한편 양반가에서는 귀한 손님들에게 흔히 점주를 대접하였다. 점주는 찹쌀로 지은 고두밥에 맑은 엿기름물을 부은 다음 달이지 않고 따뜻한 아랫목에서 삭혀 만든 것이다. 아랫목에 5시간 정도 삭히면 감주와는 다르게 밥알이 동동 뜨는 맑은 점주가 된다. 점주를 먹을 때는 잣을 띄우기도 하고, 가늘게 채를 친 대추를 띄우기도 한다. ‘양반집에는 점주’라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점주는 귀한 접빈음식으로 여겨졌다.
△ 안동을 대표하는 술, 안동소주
안동소주는 알코올 도수가 높은 증류식 소주로서, 1281년 몽고군과 고려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안동에 머물던 충렬왕과 몽고군에 의하여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안동 지역에서는 각 가정마다 양조 방법이 전해 내려와 손님에게 접대하고 약용으로 이용되어 왔다.
이렇게 전승되어 오던 안동소주는 1912년 일제의 가양주 제조금지령에 의하여 사실상 전승의 맥이 단절되다시피 했다. 대신 일제강점기에 공장제 소주가 안동에서 생산·시판되면서 안동소주의 명성이 높아졌다.
오늘날의 안동소주는 1970년대 이후 무형문화재 정책에 힘입어 민속주로 다시 태어난 술이다. 1987년 5월 조옥화의 안동소주 양조법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받았고, 이어서 안동소주는 양산 체제로 생산되고 있다. 그 후 (주)안동소주에서도 증류식 소주를 생산하였고, 최근에는 알코올 도수가 낮은 ‘안동소주 일품’도 시판되고 있다.
△ 안동찜닭
세간에 널리 알려진 안동찜닭은 안동 지역의 전통음식이 아니다. 안동의 찜닭은 구시장의 세칭 ‘통닭골목’에서 만들어 팔던 것으로서, 그 역사가 20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찜닭은 통닭을 만들 때와 같은 크기로 닭고기를 썰어 넣고 여기에 당면·감자·당근·파·마늘·붉은고추를 넣어서 간장과 물엿으로 간을 하여 약간 물기가 있게 조린 퓨전음식이다. 크게 보면 찜닭은 갈비찜과 당면으로 만든 잡채가 절충된 것에다가 채소와 양념이 들어간 형태이다.
찜닭은 술안주·간식·반찬·찌개 등의 여러 용도로 먹을 수 있는 이점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안동찜닭은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원산지 안동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고, 차츰 전국의 대도시와 중소도시, 안동 인근의 중소도시로 급속히 확산되면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 안동삼베
옷감이 귀하던 시절 전국 어디서나 무명·모시·삼베로 옷감을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특히 궁중 진상품으로 지정되었던 안동포는 올이 가늘고 빛이 노란 수직 자연 섬유로 색깔이 아름답고 통풍이 잘되어 하절기에 최고의 옷감으로 각광을 받았다.
안동삼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19세기 전반에 발간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처음으로 언급(59개 중 한 곳)되어 있다. 그리고 1911년 일본이 발간한 『조선산업지』에 역사상 처음으로 안동이 대마의 주산지로 확인되고 있으며, 안동포(安東布)라는 표현이 언급되어 있다.
□ 축제
축제명 |
개최일시/ 기간 |
주요내용 |
안동국제탈춤 페스티벌 |
매년 2010.09.24 ~201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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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탈춤 공연, 외국탈춤 공연, 마당극 시연, 세계탈놀이 경연대회 |
△ 배경
안동문화는 시대별, 종교별로 편중되지 않는 다양한 문화들이 온전히 전승되어 온 지역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지역이기도 하며, 동시에 동양의 미학을 보유한 지역이기도 하다. 유형문화재뿐만 아니라 무형문화재 또한 많은 것은 안동이 가진 가치 지향적 철학에서 기인한다. 즉 문화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문화 수용과 계발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동문화는 동양의 가치관을 담고 있는 가운데 안동다운 특징을 가진 수준 높은 지향점을 보여 주기에 이런 문화적 자산이 탈춤페스티벌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즉, 문화 유산의 가치 속에서 정적인 마음의 고요함을 배우고, 탈춤이 가진 신명을 통해 동적인 발산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춤축제는 안동문화를 답사하는 것과 축제의 신명을 함께하는 것이 태극처럼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다.
△ 발생과정
1997년 6월 10일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10월 1일 97탈춤페스티벌이 5일간 개최되었으며 문화체육부 10대 문화관광축제에 선정되었다. 1998년 9월 25일 98탈춤페스티벌이 개최되고, 12월 19일 문화관광부 6대 집중육성 축제에 선정되었다.
1999년 10월 1일부터 10일간 99탈춤페스티벌이 개최되었으며 12월 7일에 전국문화관광축제 2위를 차지하였다. 2000년 9월 29일부터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2000 행사를 10일간 개최하였으며, 전국축제종합평가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2001년 문화관광부 집중육성 축제로 선정되었으며, 2001년 한국방문의 해 15대 특별이벤트에도 선정되었다.
2001년 10월 5일부터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2001 행사를 10일간 개최하였으며, 전국경영행정사례연구발표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전국축제종합평가 1위, 제3회 한국관광대상에 우수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 종교
△ 유교
안동 지역의 유교를 퇴계 이황과 주요 학파들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 이황
안동 유학의 선구자인 이황(1501~1570)은 경상도 예안에서 출생하였다. 풍기군수로 재직하는 등 관직에도 진출했으나 1555년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여 60세에 이르러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세우고 제자들과 함께 강학하며 일생을 보냈다.
이황의 철학은 정주의 학설을 따랐으며 이와 기는 결코 섞일 수 없는 이물이라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요약된다. 학문 탐구와 더불어 이황이 평생 힘쓴 사업은 서원을 창설하여 학풍을 진작시키고 사림파의 선현을 현창하는 사업이었다.
또한 만년에는 제자들과 함께 이황이 사는 고을인 예안에 역동서원을 창건하고, 가의도 하였는데 이곳은 안향의 제자로서 예안에서 만년을 지낸 우탁을 모신 곳이었다. 이후 예안과 안동 등 경상도 지역에 특히 많은 서원이 세워져 풍교가 진작된 것은 이황의 절대적인 영향이었다. 이와 같이 이황은 평생 학문에 전념하면서 수많은 문도들을 배출했으며 사후에 정리된 『문도록』에 의하면 문인의 수가 32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 영남학파의 학자들
이황의 후학들 중 주요 인물로는 김성일, 류성룡, 정구 등을 들 수 있다. 김성일과 류성룡은 안동에 뿌리를 둔 세족 출신으로 중앙에 진출하여 높은 직위에 올랐고, 제자들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후학이 끊이지 않았다. 경상도 성주 출신 학자 정구는 이황과 조식 양 문하에 모두 출입하였으나, 조식의 문인 정인홍과 불화하면서 이황의 연원에 더욱 친밀해지게 되었다.
류성룡의 학문은 김장생과 논변한 정경세에게 전수되었다. 정경세(1563~1633)는 인조반정 이후 영남의 남인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을 만큼 정치적으로도 비중이 있는 학자로서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다. 특히 예론에 밝았던 정경세의 학문은 류성룡의 아들 류진(柳袗)을 거쳐 류원지(柳元之)에까지 전해졌다.
류원지는 기해예송에 송시열의 예론을 반박하는 영남남인소(嶺南南人疏)가 있을 때, 그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학자였다. 류원지의 학문은 다시 정경세의 손자인 정도응에게 전해졌고, 이 학맥을 통해 근대에는 류심춘과 류주목이 배출되었다. 그들은 모두 류성룡의 후손들이었다.
류성룡의 학맥은 대체로 풍천의 하회와 상주를 중심으로 계승되었는데, 하회는 류성룡의 후손들이 세거했던 곳이고, 상주는 정경세와 류진의 후손들이 살았던 곳이다.
김성일의 학문은 장흥효(張興孝)를 거쳐 이휘일(李徽逸), 이현일(李玄逸) 형제에게 전해졌다. 장흥효와 이휘일은 일생을 처사로 지냈으나, 이현일(1627~1704)은 산림으로 국가의 초빙을 받아 숙종 초기에 일시 사환하여 이조판서에까지 올랐다.
이현일은 송시열이 이황의 학설에 대하여 맹렬히 공격했던 것에 대해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을 지어 율곡의 이기설을 축소 비판하였다. 이이의 성리설에 대한 이현일의 이와 같은 본격적인 비판은 영남 유학자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360여 명에 달하는 문도들의 배출과 더불어 이현일의 학문은 아들인 이재(李栽, 1657~1730)에게로 이어졌다.
이재는 어려서부터 가학을 이어 독실하게 배우고 실천하였다. 부친과 달리 평생 포의로 지낸 이재의 이기사칠론은 부친으로부터 이어지는 퇴계학설의 계승이었으며, 이재의 학문은 다시 이상정(李象靖, 1711~1781)에게로 전해졌다.
이상정은 이재의 외손이었으며 이상정의 학문은 남한조(南漢朝)를 거쳐 류치명(柳致明)에게로, 류치명의 학문은 다시 김도화·김흥락에게로 전수되었다. 김흥락은 김성일의 후손이었으며 김성일에서 김흥락에 이르기까지의 학맥은 모두 안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지연이나 혈연으로 긴밀하게 연관이 되면서 모두 퇴계의 학설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 영남 퇴계학파의 전개와 종말
영남 지방에 큰 영향을 끼친 영남의 퇴계학파는 안동과 상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그 학맥이 꾸준히 계승되었다. 그들의 학문은 새로운 이론을 만들기보다는 퇴계학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천에 치중하였다.
다만 류치명의 문하에서 배운 이진상(李震相, 1818~1886) 경우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하여 당시에 많은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진상이 세상을 떠난 뒤에 만들어진 문집은 도산서원에 의해 이단으로 배척되고 영남 일대의 유림들의 다수가 그 책을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영남학파의 학자들 중에는 구한말에 이르러 외적의 침탈에 대항하여 의병에 나서거나 해외로 망명한 이들이 많았다.
주요 인물로는 류치명의 문인인 김도화, 김홍락 문하의 이상룡, 김도화 문하의 류인식, 곽종석의 문인 김창숙 등이며 이들은 평생을 민족운동에 전념하였다. 따라서 이후로 전통적 방법으로의 유학의 전수는 더 이상 이루질 수 없게 되었다.
△ 불교
㉠ 유입경로상의 안동불교(5~6세기)
안동 지역에 언제 불교가 전래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적 추론은 가능하다. 삼국시대 당시 신라가 관할했던 안동 지역이 불교를 위시한 고구려 문화가 신라로 전파되는 경로 상에 위치하기는 했으나 그 사실을 토대로 신라가 공인도 하기 전에 이미 안동 지역에 불교가 먼저 전래되었다고 추론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당시 안동 지역의 경우 경주 지역의 지배세력만큼 불교 도입의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의 변방이었던 안동 지역으로의 불교 전파는 신라 지배 세력의 필요성에 의해 경주 지역에 먼저 전래되어 자리를 잡은 후에 서서히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당시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안동 지역의 주요 불교유물로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다. 이 보살상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예술적 완성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금동을 처리하는 기술도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화엄종토착화 시기의 안동불교(7~9세기)
7세기 이후로 안동 지역은 신라의 변방이 아니라 신라의 확실한 내부 지역으로 신라의 수도인 경주 문화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그러나 7세기 중반 신라가 삼국을 병합한 이후로는 당나라의 최신 문화와 사상이 이 지역에 직통으로 전해지기도 하였다.
통일 직후 의상에 의해 당시의 최신 사상이었던 화엄종이 한국적으로 변용되어 영주 부석사를 중심으로 지역에 소개됨과 더불어 당나라의 신문화 일정부분 한국적으로 변용되면서 같이 전파·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부석사를 근거지로 하는 화엄종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8, 9세기경까지 안동 지역에서도 법흥사·법림사·법룡사·법상사 등이 창건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통일신라가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하여 안정기에 접어든 9세기 후반~10세기에는 안동 지역의 불교가 다시 화려하게 꽃피던 통일신라 불교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시기 신라불교계는 화엄종과 유식 법상종이 주도권을 양분하고 있었는데 안동 지역은 화엄종의 외곽 근거지로서 화엄사상계열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9세기경의 화엄종은 부석사를 교두보로 한 의상의 화엄종뿐만 아니라 당나라 유학승에 의해 의상 이후에 발전한 중국 화엄종의 영향을 받은 화엄종이 경주(황룡사)를 구심점으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안동 지역의 불교는 비록 타 종파의 도전을 받고는 있었지만 종파적으로는 여전히 의상 화엄종의 영향 아래 있었다.
㉢ 나말여초 미륵신앙 토착화 시기의 안동불교(10~11세기)
나말여초 고려 건국에 일익을 담당했던 안동 지역은 위치상으로는 고려 내의 변방이었으나 고려문화의 개화에는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주요 관련 유물로는 10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제비원 미륵불이 있다.
제비원 미륵불은 신라의 예술 기법과 고려의 표현 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된 과도기의 문화유산으로 경주를 뒤로 하고 새롭게 부상하는 고려문화의 중심지인 개경을 향해 바라보고 있다.
또한 미륵신앙의 역사적 발전을 고려할 때, 제비원 미륵불은 신앙 계층의 변화 양상도 일정 부분 내포하고 있다. 진표의 미륵신앙에 들어 있는 불교의 토착화는 불교지도자의 민중지향적인 의도에 의한 토착화인데 비하여 이 시기의 미륵신앙은 민중 자체의 자연발생적 종교적 희망이 투영된 토착화라는 점에서 비교된다.
이러한 토착화는 정치적 혼동기를 겪으면서 철저히 소외받은 민중들이 기존 지배층에 대한 환멸과 더불어 새롭게 등장한 또 다른 지배층에도 기대지 미륵불신앙에서 직접적으로 구원 길을 찾으려는 경향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겉으로 드러나는 지배층의 귀족불교와 더불어 미륵신앙으로 대표되는 피지배층의 민중불교도 공존했던 것으로 보아, 고려 초의 안동불교는 고려불교의 한 축을 이끌어 가는 선도 역할을 한 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고려 중기와 여말선초 시기의 안동불교(12~15세기)
고려가 원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원나라 불교의 직접적 영향을 받게 되었지만 안동불교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그 주된 이유는 안동 지역이 고려 화엄종의 주 활동 무대였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에 머무르다 환도한 후로 안동 지역에 대한 많은 특별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극락전을 비롯한 봉정사 유적이 이때 보수되어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 건물로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부석사 무량수전의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공민왕의 안동 피신은 고려 말에 안동 지역의 토호 세력이 더욱 활발하게 중앙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중앙으로 진출한 지방 출신의 신진 세력은 보수적인 귀족보다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다.
그들은 선진사상인 신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처음에는 타락한 귀족 중심의 지배 체제를 개혁하여 고려 왕실을 지키고자 했지만 그들의 입지가 강화되자 마침내 왕조 교체의 추진 세력이 되어 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안동 지역 출신의 신진사대부는 조선 초기 권력 중심부로의 진출에는 실패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큰 정치적 변동에도 불구하고 안동 지역의 불교는 큰 변화 없이 조선 초기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이나 이후 안동 지역이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의 본거지로 부상하면서 크게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 천주교
1914년 대구에서 천주교인 이윤구가 안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안동 천주교의 첫 교인이자 개척자가 되었다. 이윤구 가족은 일직면 귀미동 옹기굴에서 주일마다 미사를 행했다고 전해진다.
다음 해에는 이윤구의 사위인 박모씨가 역시 대구에서 이사를 오게 되면서 교인은 두 가구로 늘어났다. 그리고 1922년 이윤구의 집을 성당 관할 공소로 삼고 이윤구를 초대 공소회장으로 임명함으로서 안동 지역 천주교회의 첫 출발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24년 6월에는 율세동에 초가 3칸을 마련하여 초대 본당 신부로 서벨라도 신부가 부임했으며 이윤구의 아들인 이종교가 본당 회장으로 간택되었다. 그러나 첫 성탄 미사에서 화재가 일어나 성당이 소실되었으며 1929년에는 안막동으로 성당을 옮겼다.
안동본당의 설립으로 신자수가 급격히 늘고 교세가 확장되면서 인근 지역도 자극을 받아 본당 설립 준비를 서둘렀다. 이리하여 예천 지역에서도 성당이 새로 지어져 봉헌되면서 본당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도미니끄 신부가 본당신부로 임명되었다. 이후 해방과 더불어 적산 대지를 받아 현대식 벽돌 건물로 성당과 사제관, 수녀원 등을 신축했으며 1951년에는 김수환이 제5대 신부로 부임하였다.
1957년에는 파리 외방 전도회 감목대리구로 지정되어 외국인 신부 로제리오가 부임하여 십자가 모양의 성당을 개축하였다. 1969년 6월에는 교황 바오로 6세의 명에 의하여 종래 대구교구 관할이었던 경상북도 북부 지역이 안동교구로 분리 설정되어 안동에 교구청이 설치되었으며 초대 교구장으로 프랑스인 두봉 주교가 부임하였다.
또한 같은 해 10월에는 룩셈부르크에 있는 그리스도 교육수녀회 한국본원이 율세동에 설치되었다. 1973년에는 동부동본당이 분리되어 안동천주교회를 목성동성당으로 개칭했으며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멕시코에 있는 마리스타의 교육수사회 한국본원이 옥정동에 설치되었다. 1979년에는 태화동교회가 설치되었다.
△ 개신교
안동 지역 최초의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회의 베아드이다. 1894년 부산을 거점으로 하고 선교의 방책을 세우기 위한 지역 답사로 안동을 거치게 되었다.
그 후 부산에서 대구로 옮겨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보낸 선교사들의 활약으로 1902년에 이르러 안동 지역에도 일직면 국곡리, 풍산읍 하리 등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1905년에는 와룡면 방잠마을에서 김성복을 중심으로 집회가 열렸는데, 이 방잠집회에 참여했던 교인들의 활약으로 예안 만촌, 녹전면의 방하, 녹래, 안흥, 와룡면 장수골, 영주 평은면 내매, 봉화 척곡 등지도 연이어 교회가 설립되었다.
1908년 8월에는 대구 주재 선교사 미국인 안의사 목사가 시내 대석동 기독서원에서 김병우, 강복영 모자 등 7명과 함께 첫 예배를 보았으며, 그 해 11월에는 강원도 원주 지역을 감리교파에 넘기면서 원주에 있던 북장로파 선교부를 철수하여 안동 지역에 설치하였다.
이 때 미국인 오웰목사와 김영옥 등이 안동에 정착하여 이듬해에 교회를 설립하고 1910년에는 선교부를 설치했으며, 김영옥이 안동교회의 초대 목사가 되었다.
이후 3·1운동을 기점으로 교세가 획기적으로 확장되면서 1921년에는 경상북도 북부 지역 장로교파의 연합체인 경안노회가 안동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1930년대에는 일본의 대륙침략정책으로 교회탄압이 가중되어 어려움에 시달렸으나 광복과 더불어 교세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3·1운동 이후 안동 교회사의 대표적인 지도자로는 이원영(李源永) 목사와 김광현(金光顯) 목사 두 사람을 들 수 있다. 이원영(李源永) 목사는 예안의 명문 출신으로 3·1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복역 중에 전도를 받았고, 출옥 후 평양신학대학을 나와 안동교회에서 시무하면서 사회계몽에 공헌하는 등 굳센 민족정신으로 끝까지 일제에 굽히지 않았다.
김광현(金光顯) 목사는 1934년에 안동교회에 부임하여 교계와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면서 일제에 대항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으나 해방으로 풀려났으며 해방 직후에는 고장 질서 유지와 국민사상 선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2009년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의 개신교 단체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과 신종교인 안식교, 통일교, 전도관, 구세군, 여호와의 증인 등 모두 10개 파가 있다.
□ 민요
민요는 오래전부터 작사자나 작곡자가 따로 없이 민중 사이에서 구전되어 전해 오고 있다. 따라서 민요는 민중의 사상이나 생활, 감정 등을 소박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때로는 국민성과 민족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안동 지역의 민요는 특별한 기능을 지니고 불리기 때문에 기능에 따라 노래의 갈래를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안동 지역에서 전승되는 노래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나 모자람 없이 민요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할 수 있다. 안동 지역에서 전승되는 민요들을 분류해보면 일 노래(노동요), 의식 노래(의식요), 놀이 노래(유흥요) 등으로 구분된다.
△ 노동민요
안동 지역에서 전승되는 민요들은 대부분이 일 노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농사와 관련된 노래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민요를 이야기할 때, ‘전문적인 소리꾼이 아닌 농민들이 농사일을 하면서 특별한 놀이판을 차리지 않은 채 일터에서 부르는 노래’라고 하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러한 경향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어느 지역에서나 일 노래가 풍부한 것은 자연스럽다. 선인의 옛 노래 문화 가운데 민요를 주목하게 되면 일 노래는 항상 그 중심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일 노래는 흔히 우리가 ‘민요’라고 일컫는 민중들이 부르던 옛 노래의 처음과 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 노래를 다른 노래나 오늘날 유행하는 노래와 비교할 때 남다른 것은 노래마다 저 나름의 구체적인 구실이 있다는 점이다.
노래가 가진 구실을 기능이라고 하는 점에 주목하면, 일 노래가 가진 기능이 가장 뚜렷하고 도드라진다. 특히 오늘날의 노래와 견주어 볼 때 의식 노래를 제외한 대부분의 노래들은 특별한 기능을 지니지 않고 여가와 유흥을 위해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일과 함께 부르는 노래는 일 노래로서 분명한 기능성이 한층 두드러진다. 또한 일 노래는 일의 고됨을 노래의 신명으로 전환하는 구실을 담당함으로써 일의 놀이화를 가능하게 한다. 일을 위한 일 노래가 사실은 일을 놀이처럼 신명나게 한다는 점에서 놀이 노래(유흥요) 구실까지 담당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모내기 노래와 같은 일 노래는 일의 기능과 상관없이 일의 현장을 떠나서 놀이 노래로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일 노래의 독자적 기능은 일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고 일의 능률을 올리는 것이다. 일의 행위와 밀착되어 일 노래 없이는 일 자체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 때로는 일없이 노래만 부르는 일도 적절하지 않을 정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 노래가 꼭 기능에만 이끌려 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노래 부르는 일이, 일하는 것처럼 사람을 더욱 고되게 할 수도 있다. 일을 잘 하기 위하여 노래까지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일만 해도 고된 터인데 노래의 의무까지 짐 지어 주는 셈이다. 그러나 노래와 일의 관계는 그렇지 않은 것에 매력과 그 남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노래는 그 자체로서 부를만한 가락의 신명이 있고 삶의 문제를 생각하는 사설의 뜻이 담겨 있다. 안 그래도 쉬지 못하고 일을 고되게 하는 판에 덤으로 노래까지 부르면서 일을 더 열심히 하도록 스스로 채근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일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기운이 남아 노래까지 불렀겠냐는 식의 생각은 삶의 신명을 잃고 사는 오늘 우리들의 메마른 판단이거나 일 노래로서 민요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탓이다.
옛날 사람들은 일하면서 노래 부르며 노는 것을 따로 나누어 했던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여럿이 함께 했던 것이다. 말이 일 노래이지 사실은 일조차 놀이로 전환시키는 놀이 노래보다 더 적극적인 놀이 노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일 노래 속에는 일의 내용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의 진행을 위해서 일을 지휘하고 채근하는 요소도 있지만, 일꾼들이 생산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데 따른 모순이나 일한 결과를 거두어들일 때를 내다보고 꿈을 키우는 내용도 들어 있다.
세상살이의 마땅한 이치와 엉뚱한 부조리들을 함께 견주어 인간다운 세상을 꾸려내고자 하는 전망으로 갈무리하기도 한다. 따라서 일 노래를 통해 현실 문제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삶의 희망을 담아 자신의 삶을 성숙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 노래는 일의 가치를 자각하고 삶의 현실들을 여러 모로 되짚어 보면서 바람직한 삶의 세계를 설계하고 실천하는 동력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일은 직장에서 하고 노래는 노래방에 가서 부르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나, 노래라 는 것은 한가한 사람들의 소비적인 사랑 타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일 노래는 새로운 노래문화로 다가온다. 일 노래는 여럿이 함께 어울려 노래 부르며 일하는 것이 얼마나 생산적인 노동이며 또 삶을 성숙시키는 것인가를 재인식하게 해준다. 일 노래는 일의 노래만이 아니다. 놀이의 노래이자 삶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안동 지역에서 최근까지 전승되는 노래를 보면 주로 벼농사와 관련된 일 노래가 대부분이며, 안동 지역의 특산물인 안동포 짜는 일과 관계된 노래도 많다.
이들 두 노래는 각각 남성 민요와 여성 민요로서 대표성을 지닌다. 때로는 논농사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에 길쌈 노래의 사설도 끼어든다. 이를테면 「저전동 논매기 소리」 앞소리는 「베틀 노래」와 같은 길쌈 노래로 전승되는 것도 특징이다.
△ 의식 노래
의식 노래(의식요)는 그다지 풍부하지 않다. 일정한 의식을 행하면서 부르는 의식요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장례 의식에 필요한 장례의식 관련 노래이고, 두 번째는 세시풍속과 연관하여 정월 대보름 전후로 지신밟기를 할 때 부르는 지신밟기의식 노래이며, 세 번째는 집안에서 성주를 올릴 때 부르는 성주의식 노래이다.
다른 고장처럼 「상여 소리」, 「덜구 소리」, 「지신밟기 소리」가 아직 전승력을 유지하고 있다.
장례의식요에 속하는 「상여 소리」와 「덜구 소리」는 특히 그 전승력이 강하다. 특히 「덜구 소리」는 거의 필수적이다. 상여는 영구차로 운송하더라도 무덤을 다지는 일은 사람들이 직접 할 수밖에 없다. 장례의식요와 관련하여 「대도둠 소리」가 전하는 것도 흥미롭다.
성주를 올리면서 부르는 노래가 아직 전승되는 것은 집안 신을 섬기는 가신신앙의 전통 가운데 특히 가부장의 권위와 관련이 있는 성주 신앙의 전통이 강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안동이 성주신앙의 본향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가부장적 전통이 강한 유교문화의 중심지가 안동이라는 사실도 고려할 만하다.
△ 놀이 노래
놀이 노래(유흥요)는 안동놋다리밟기와 관련된 것이 풍부하다. 따라서 놀이 노래의 대부분은 여성 노래이다. 여성들이 놋다리밟기를 하면서 꼬리따기, 실감기, 달넘세, 동애따기 등 여흥놀이를 다양하게 하였는데, 이들 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가 대부분이다.
놋다리밟기와 같은 여성 집단 놀이들은 다양한 놀이문화와 함께 풍부한 노래문화도 유지시키고 있는 셈이다. 기타 놀이도 「널뛰기 노래」와 「그네 노래」와 같은 여성놀이에 집중되어 있다.
남성들이 풍물을 치며 동채싸움을 하듯이 노래와 상관없는 집단적인 놀이를 주로 한다면, 여성들은 노래를 부르며 놋다리밟기를 하듯이 풍물놀이보다 노래 가락에 맞추어 집단적인 놀이를 주로 한다.
그러므로 놀이 노래는 여성놀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놋다리밟기가 여성놀이로서 대표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다른 놀이 노래도 놋다리밟기와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 특징
밭농사도 논농사 다음으로 중요한 남성들의 일이고 바느질도 길쌈 못지않게 중요한 여성들의 일이긴 하지만, 안동 지역에서 다른 일 노래 보다 특히 논농사와 길쌈 관련 노동요가 많은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같은 일이라도 혼자서 하는 일보다 여럿이 더불어 하는 일일 때 그와 관련된 일 노래의 전승력이 강하다. 아무리 긴요한 일이라도 혼자서 하게 되면 민요를 부르기 어렵다. 논농사와 길쌈은 어느 것이나 두레로 하는 전통이 있다. 따라서 논농사 노동요와 길쌈 노동요가 다른 노동요에 비하여 많이 전승되게 마련이다.
둘째, 삼베는 안동의 명산이다. 직접 대마(大麻)를 경작하고 거두어 들여 삼을 삼고 삼베 짜는 일을 하는 안동포의 전통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안동포의 고장에서 안동포와 관련된 길쌈 노동요가 널리 전승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외에도 안동 지역에서 전승되는 민요는 안동문화의 전통과 연관되어 있다. 안동은 성주신앙의 본향답게 성주 올리는 노래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놋다리밟기의 고장으로서 여성들의 놀이 노래는 주로 놋다리밟기를 할 때 하는 여흥놀이와 관련된 것들이다. 그러므로 민요의 전통은 다른 문화의 전통과 함께 간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