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Ⅰ. 구약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유아교육
1. 성경적 근거
2. 포로 이전의 교육
⑴ 신앙교육
1)율법을 통한 교육
2)제사장들에 의한 교육
3)의식에 의한 교육
⑵ 가정교육
⑶ 생활교육
3. 포로 이후의 교육
⑴ 가정교육
⑵ 회당교육
⑶ 학교교육
1) 초등학교
4. 맺는말
Ⅱ. 신약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유아교육
1. 신약의 교육원리
(1) 신약의 근거
⑵ 교육원리
2. 신약의 교육 목적과 교육 내용
(1) 예수님의 교육
(2) 사도들의 교육
Ⅲ. 언약 사상에 근거한 기독교 유아교육
1. 언약의 개념
(1) 구약성경에서 나타난 언약
(2) 칼빈의 언약
2. 언약과 할례
(1) 할례의식의 고대의 관행
(2) 이스라엘의 할례
(3) 할례의식에 대한 교회사적 해석
3. 언약과 세례- 할례로부터 이어지는 언약의 표징
(1) 세례의 기원
(2) 언약표징으로서의 세례
(3) 유아들에 대한 언약의 표징으로서의 세례
4. 유아세례
(1) 유아세례의 성서적 근거
(2) 교회의 전통적 근거
(3) 신학적 근거
(4) 반유아세례의 견해
(5) 유아 세례에 내포된 교육적 의미
제2장 기독교 유아교육의 성경적 기초
Ⅰ. 구약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유아교육
1. 성경적 근거
유아를 위한 교육에 관한 언급은 구약성경 전반을 통해 나타난다. 구약성경에서 자녀에 대한 교육에 대한 대표적인 언급 구절은 신명기 6장 4~9절, 신명기 31장 11~13절, 잠언 22장 6절, 사무엘 상 1장 11절, 또한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절기와 의식 가운데 나타난다.
신명기 6:4-5절의 쉐마 구절은 히브리 교육의 핵심을 이룬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이 말씀은 생활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전하고 가르쳐야 할 자녀교육의 근본원리이다. 또한 신명기 31장에서는 아주 어린 연령의 유아들에게도 기독교 교육의 필요함을 시사하고 있다. 잠언 말씀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함으로 어릴 때부터 교육을 실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사무엘 상에서 한나는 사무엘이 젖뗀뒤부터 바로 제사장을 통해 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근거를 가지고 다음 살펴볼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어떤 교육이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크게 포로기 이전과 포로기 이후의 교육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포로 이전의 교육
⑴ 신앙교육
히브리인들의 교육은 신명기 6:4-5의 쉐마 텍스트에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이신 여호와’를 강조하는 유일신적 교육이다. 이들의 신앙교육은 성경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1)율법을 통한 교육
히브리인들의 신앙교육은 율법(토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신명기 6장 4-9절 , 신명기 31장 11-13절, 잠언 22장 6절, 사무엘 상 1장 11절)
2)제사장들에 의한 교육
히브리 교육의 특성은 제사장들에 의하여 교육이 이루어져 왔다는 점인데 제사장의 제 1차 직무는 하나님과 회중 사이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희생제를 드리는 중재적 사역이다. 제 2차 직무는 율법의 해석자이자 교사인 교육적 사역이다.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 (겔44:23)”
포로 이후의 회당학교가 정착되기 전까지는 각종 제사가 중요한 교육 형태였으므로 제사장들이 영적, 도덕적 교육을 실시하였고 이것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3)의식에 의한 교육
히브리 교육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의식(ritual)에 의한 교육의 실시이다. “모든 희생제사, 상징, 그리고 의식은 하나님을 향한 감정과 자세, 신조와 율법의 일부를 효과적으로 교육하는 수단이었다. 히브리인의 의식은 단순히 종교행위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육방법으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실물 교육을 하는 효과적 방법이 사용되었다.
⑵ 가정교육
히브리 교육의 특성 중 중요한 것은 가정교육이다. 가정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신적 기구로서 최초의 사회집단이며 부모와 자녀의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종교적 매개체와 교육 기구가 된다. 히브리 가정교육은 부모를 공경하도록 가르치고 자녀 교육을 통하여 사회의 구조를 유지하는 본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루이스 쉐릴이 말한 히브리인들의 가정교육의 특성을 살펴보면,
!) 가정의 모든 식구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활동에 자녀들이 비 형식적으로 참여하였다.
!!) 자녀의 품행을 통제하였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의 지혜를 배우게 하였다.
!!!) 가정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구전을 통하여 교육하였다.
⑶ 생활교육
히브리인들은 신앙과 민족 공동체를 통하여 생활교육을 받았다. 어린이들은 일찍부터 이러한 공동체의 제도나 안식일, 절기, 예배의식 등을 통하여 교육을 받았다. 생활교육의 주체는 부모, 예언자, 제사장, 지혜자 등이 있으며 그 중에서 부모의 교육적 역할이 더욱 강조되었다.
3. 포로 이후의 교육
유다 백성들은 포로 귀환 이후에 하나님의 율법을 통한 새로운 부흥을 체험하고 교육 부문도 특별한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포로됨과 흩어짐, 이에 다른 고통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슬픔은 신앙에 대한 새로운 열정과 민족의 결속을 가져오게 하였다.
⑴ 가정교육
히브리인들은 하나님 중심의 교육을 하였다. 가정교육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였고 이것을 삶의 현장에 구현시키려고 하였다. 이들은 가정을 단순한 사회적 관점에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적 입장에서 보았다.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 개인과의 언약인 동시에 히브리 민족 전체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히브리 교육은 민족적이면서도 개인적이었고 그 전통 속에서 가정의 귀중성이 강조되었다. 하나님은 히브리 가정교육의 중심이었고 율법은 교육의 바탕이 되었다.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부모에게는 가르칠 책임이 주어졌다(출12:26-27,신4:9-10, 6:6-7, 11:19). 부모들은 자녀들을 가르쳐야하는 일차적 교사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기까지는 현대적 의미의 학교란 존재하지 않았고 가정이 비 형식 학교로서 가르침의 장소였다.
교육의 책임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에게 있었다.(잠1:8-9). 자녀교육의 시작이 언제부터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유아기부터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필로(Philo)는 “유대인들은 신성한 법들이나 기록되지 않은 관습을 배우기 전에 그들의 강보 속에서 부모들과 교사들과 가르치는 자들에 의하여 하나님은 아버지며 세상의 창조자인 사실을 인식하도록 훈련 받았다”고 하였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르쳤고 특히 아침과 저녁은 물론 식사 전후의 기도생활과 안식일을 지키는 법, 절기 등세 대한 교육을 하였다. 어린이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기도문과 성경구절들을 배웠다.
모든 이스라엘 가정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도록 하며 그 말씀을 자기 자녀들의 마음에 새기도록 교육하였다(신6:6-9). 이러한 교육은 대를 이어 전승되었고(시 78:5-8), 삶의 현장에서 구체화 되게 하였다.
⑵ 회당교육
포로 이후 히브리인들의 교육은 회당교육을 통하여 구체화되었다. 회당이란 예배의 장소이지만 오늘날의 교회나 성당같은 ‘예배당’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참 예배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교육기능을 수행하는 공동체였다. 회당에서는 기도, 성경낭독, 성경해석 등을 하였는데 이러한 교육은 오늘날 기독교 교육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회당에서 교사들은 일주일 내내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다섯 살 정도가 된 어린이들부터 회당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 열 가구가 모이면 하나의 회당을 설립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⑶ 학교교육
가정과 회당을 중심으로 실시되던 교육에다가 학교교육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보강되었다.
1) 초등학교
초등학교 제도는 성문 토라인 성경을 의미하는 “그책”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벧 하세퍼”즉, “책의 집”이다. 일반적으로 벧 하세퍼는 회당에 있었다. 회당 바로 옆에 교육용으로 방을 짓는 것이 관례였다. 각 회당마다 그 자체의 학교를 소유하도록 되어있고 어린이들은 원칙적으로 다른 고장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학생들이 학교에 입학할 나이에 대해서는 특별한 규정이 없으나 성경을 배우기 적합한 나이인 5-6세가 입학할 수 있는 나이였다. 초기의 학습을 위해 선정된 것은 모세 오경과 쉐마, 십계명, 찬양의 노래인 시편 113-118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4. 맺는말
살펴본 바와 같이 포로 이전의 교육은 체계화되지 못한 비공식적 교육이었지만 율법을 교육의 기본 골격으로 하여 가정과 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이 시행되었다. 이들의 교육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바른 삶을 이루는 생활교육으로 구체화되었으며 또 종교의식을 통하여 교육하였다. 종교의식을 통한 상징적 교육을 함으로써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교육을 실시했다. 히브리인들은 가정, 회당, 학교라는 세 가지 교육의 장을 통하여 율법을 가르치고 어릴 때부터 이것을 삶의 원리가 되게 하였다. 이러한 교육을 통하여 히브리인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게 하였다.
Ⅱ. 신약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유아교육
1. 신약의 교육원리
⑴ 성경적 근거
신약에서 기독교 유아 교육의 근거를 찾는다면 디모데 후서 3:15-17절을 들을 수 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어려서부터’라는 표현을 다른 영어성경에서 찾아보면"from a child (KJV)", "from infancy(NIV)", "from childhood(NASB)" 라고 번역이 되어 있다. 단어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유년기, 혹은 말하고 걷기를 배우기 이전의 매우 어린 시기부터 유아를 위한 기독교 교육이 이루어져야 함을 성경은 명시하고 있다.
또한 “양육” 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신약성경에서는 교육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양육” 이란 헬라어로 파이듀오/파이데이아 이다. 이 단어가 사용된 중심되는 성경구절은 에베소서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이다.
[ Kai; oiJ patevre", mh; parorgivzete ta; tevkna uJmw'n, ajll j ejktrevfete aujta; ejn paideiva(양육하라 bring them up) kai; nouqesiva kurivou.]
( 여기서 자녀라는 말속에는 아주 어린 연령의 유아도 포함되므로 기독교 유아교육의 근거를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
파이듀오/파이데이아는 신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첫째는 도덕적 훈련의 의미로써 가르침 혹은 교육을 의미하였다. 이것의 예가 사도행전22:3에 나온다. NIV영어성경에 trained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있다.
“양육”에 대한 다른 의미는 징계 혹은 바르게 하는 일이다. 파이듀오와 가장 가까운 히브리 동의어는 “훈계하다, 바르게 하다, 훈육․징계하다, 가르치다”를 의미한다. 양육에 대한 의미가 징계로 표현되는 예는 고전11:3, 딤후2:24-25 에 나와 있다.
⑵ 교육원리
신약의 기독교 교육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가르침, 사도들의 설교와 서신들, 초기 교회의 예배와 교제 등을 통하여 실시되고 또 전승된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기독교 교육에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데 그 이유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생생하게 구체화된 존재이며(요14:6) 그가 가르치는 내용 바로 그 자체였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를 가지고 계셨으며, 가르치는 교수법도 탁월한 최고의 교사이셨다. 또한 성경을 교육의 기초 자료로 삼는다. 성경이 교육 논문은 아니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로서 교육의 지침서이다. 이러한 원리 속에서 기독교교육의 목적과 목표가 정립되는데, 이 모든 것의 바탕은 성경이다.
이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신약시대, 정확히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시대 초기 기독교 시대에 있었던 신앙교육을 찾아보고자 한다. 복음서와 서신서를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
2. 신약의 교육 목적과 교육 내용
복음서에 나타난 교육의 목적은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도록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교육의 목표와 삶의 방향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배움으로 그를 닮아 가는 삶을 살게 된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회당이라는 전통적 교육 처소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였고, 또 삶의 현장 전체를 교육의 장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예수님은 전통적 방법도 사용하시고 파격적인 방법과 장소를 활용하셔서 교육하셨다. 예수님이 거하신 모든 곳이 교육의 장이었고, 모든 대상들에게 교육하셨다.
(1) 예수님의 교육
예수님의 교육 내용은 매우 다양하였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부터 이 땅에서의 구체적인 삶까지 폭넓은 영역을 다루었다. 인간이 존재하는 삶의 현장에서 참다운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전 영역에서 접근하였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전승되어 제자들을 전도자와 교사로 변화시켰고, 이러한 가르침은 제자들의 생활 속에서 구체화되었고(행2:42), 제자들은 날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을 쉬지 않았다(행5:42).
또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린이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어린이에 대한 신학적인 가르침을 강조하고 이에 따른 기독교 유아교육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께 오는 어린아이를 꾸짖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마19:13, 막10:13, 눅18:15)고 가르치셨으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 자신을 영접하는 것(막 9:36, 눅9:48)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어린이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을 시사하셨다.
이와 같이 신약의 교육내용은
첫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가르치는 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둘째,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주는 것이며
셋째, 신앙 가운데서 영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사도들의 교육
사도들은 설교와 전도를 통하여 그들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사도들의 설교 내용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찬양으로 이루어졌으며, 여기서 파생된 크리스찬의 구체적인 삶까지 교육하였다.
사도들은 구약성경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가르쳤는데, 히브리인들에 대해서는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일이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을 정확하게 풀어 해석하는 하는 일이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 인들의 모임을 통해 교육을 실시하였다. 모임을 통해 예배, 성경공부, 친교의 요소를 포함하여 기도, 찬양, 성경낭독, 교육 등이 행하여졌다. 또 성만찬 뒤에 이어지는 애찬식을 통한 성도의 교제로 자연스러운 교육이 이루어 졌다.
이때에는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은 히브리인들의 전통이었다. 가정은 어린이 교육을 포함한 가정 공동체의 교육의 근거였다. 성경이 유일한 교본이었고 그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구체화 시켰다. 그러므로 학교는 일종의 ‘보조적인 교육을 하는 가정’의 구실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가정교육에서 부모의 교육적 책임이 강조되었고 자녀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양육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신약 성경에서는 기독교 유아교육의 근거와 목표를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16)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딤후 3:16-17) 라는 말씀을 근거로 성경만이 기독교교육의 궁극적 목표와 구체적 목표를 제시한다.
Ⅲ.언약 사상에 근거한 기독교 유아교육
기독교 유아교육의 근거는 또한 언약 사상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이번에는 특히 칼빈의 사상을 중심으로 보는 언약의 개념과 사상, 구약에서 언약의 표징이라 할 수 있는 할례, 할례를 신약에서 새롭게 이었다고 볼 수 있는 세례와 유아세례에 대해서 알아본 후 유아세례의 교육적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1. 언약의 개념
(1) 구약성경에서 나타난 언약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크게는 물질적 축복과 영적 축복으로 나눌 수 있다. 물질적 축복이라 함은 팔레스틴 전 지역을 차지하게 될 것과(창15:18) 또한 그의 육적 자손들이 많아질 것을(창15:5) 말하는 것이고, 영적 축복이라 함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세상의 축복의 통로적 역할을 할 것과(창12:2) 믿음으로 의에 이를 것과(창15:6)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까지 축복의 계속을 약속한 것이라(창17:7) 할 수 있다. 살펴본 대로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포함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구약성서 아래에 있던 교회가 진실한 종교를 고백하기에 충분한 연령과 지성을 구비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어린이와 자손들까지도 포함했던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어린이도 할례라는 표를 받았고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들에게 베풀어진 것임을 증거 한다.(창17).
또한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민족적 방면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영적 언약이었고 할례는 이 영적 언약의 표와 인이었다. 즉 할례의 우선적이고 본질적인 중요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가장 풍부한 영적 축복의 표이며 확증이라는 것이다.
이 언약은 노아(창6:18), 이삭(창24:8) 그리고 다윗(시89:3)으로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 하셨을 때 그 언약은 단지 아브라함과만 맺으신 것이 아니다.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언약 백성의 자녀 또한 언약의 백성, 언약의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2) 칼빈의 언약사상 : 기독교 강요에서 본 칼빈의 언약의 이해를 중심으로
언약의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Palmer Robertson은 언약이란 피로 맺은 약속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언약이란 (정희영,2000 재인용).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으신 관계의 기본구조이며 하나의 계약과 같은 것이다. 언약은 일종의 계약으로 볼 수 있고 계약의 성격상 쌍방간의 지속적인 책임이 요구되는 것이다.
1) 성부 하나님의 사역과 언약
아담 이래로 역사는 언약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 안에서 그의 교회를 보존하시고 그의 약속들을 지키신다. 구약에 나타난 언약백성의 역사는 인간이 죄를 지어 타락한 후에도 하나님께서 아담과 세우셨던 언약의 교제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인간이 스스로 갈 수 없는 길로 나아가는 길로 길을 제시하시며 구속자의 오심에 앞서 형편을 지도하시는 분의 은혜를 알게 한다. 그리고 신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구속주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몸된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지를 그의 백성들에게 알게 하신다.
첫째, 하나님의 언약 역사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한 본질과 삼위격에 대하여 논하면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언약을 맺으시며, 이 언약에 따라 그 백성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전 구속사역을 이루어 가시는 삼위하나님의 사역과 한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을 이야기 한다.
먼저 성자 하나님은 구약의 역사 가운데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중보자가 되시며,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그 백성들이 거하는 세상에 오시어 구약의 예언자들이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예언했던 것을 그의 사역과 이적을 통하여 성취시키시고 사도들의 증언들을 통하여 그의 하나님 되심이 명백하게 증거 되었다. 실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성자의 중보를 통하여 우리에게 올 뿐 아니라 또한 아들 자신이 아버지와 공동으로 그 권능에 참여하심으로써 그 축복들의 원천이 되신다.
그리고 성령님은 예수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을 통하여 성자께서 성부로부터 받아 보내심을 받아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사역(칭의, 중생과 성화)을 완성시키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시키시며 은사와 선물을 베푸셔서 교회를 온전케 하신다. 타락이후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만 그 백성과 관계하셨다. 그리고 출애굽을 기점으로 그는 당신의 택하신 모든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신다.
둘째, 창조는 언약역사의 시작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천지의 대표자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셔서 자신과의 교제가 가능한 대상으로 만드셔서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도록 지음을 받은 피조세계의 목표를 성취하신다. 그리고 ‘그 지으시던 일을 다 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그런데 창조 기사에서는 분명하게 살필 수 없지만 이 안식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실 때에 이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언약의 일부가 되어짐을 본다.(출16:13, 20;8-11, 신5:12-15) 즉, 창조는 언약역사의 시작이며 일곱째 날의 안식은 언약의 표징으로서 성례전인 요소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2) 구속주 하나님의 사역과 언약
칼빈은 인간의 의지가 인간의 구원에 아무런 공헌을 할 수 없음을 강조 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찾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기독론의 기초는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 언약을 인간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의무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지만, 성경에 나타나는 언약은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언약을 체결하시고 그 언약 안으로 우리를 불러 주신다.’ 는 것이다. 우리가 언약을 이해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언약의 내용’ 이다. 즉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것인데, 이 언약에서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주실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 칼빈은 “죄악에 오염되고 더럽혀진 인간을 그의 피조물로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인격 안에서 우리의 구속주로 나타나셨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인격 안에서 우리의 구속주로 나타나셨으며 그를 통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이 중보자를 통한 구원에로의 통로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는 바울의 말을 인용하며 ‘인간의 타락이후 중보자를 떠난 그 어떤 하나님의 지식도 구원의 능력을 갖지 못 한다’고 하였다.(롬1:16,고전1:24)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언약을 맺으신 것이며 따라서 옛 하나님의 백성들까지도 중보자를 떠나서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며 은총의 소망을 준 일이 없다고 보았다.
첫째, 언약의 초점은 중보자에게 있다. 언약에 있어서 칼빈의 초점은 중보자에게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인격 안에서 우리의 구속주로 나타나셨는데 심지어 옛 언약 가운데 있는 자들도 중보자를 떠나서는 은혜로운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는 이 중보자의 문제로 인해 언약을 아브라함으로부터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으로부터 그는 비로소 언약 안에 오실 구속자에 대한 약속을 비롯한 하나님의 약속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창세기17장의 주석에서 자신 있게 “하나님은 자연적으로 출생한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 이상으로 확실한 것은 없다” 고 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을 능가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언약의 백성이 된 것이며 그들은 날 때부터 다른 이방 민족과 구분되어 하나님의 왕국의 상속권이 약속으로 임하게 되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유대인들 가운데 믿지 않는 자들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나라의 자손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합법적인 자들로서 존경을 받을 수 없으며 오직 그 분의 성령님으로 인치 심을 받은 자만이 효능 있는 부르심으로 자녀가 될 것이다. 고 하였다. 즉 언약의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보내신 성령님으로 인치 심을 받지 않는다면 그가 비록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언약 안에 속하여 있다할 찌라도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한다.
둘째, 율법은 옛 언약의 백성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아브라함이 죽은 지 400년 후였다.(갈3:17) 즉 이 말은 은혜의 언약을 신앙으로 받아들여 구원을 얻은 다음에 모세를 통해서 율법이 주어졌음을 보여준다. 모세에게 이 율법이 주어진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약속된 축복들을 없애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그의 선진들과 맺어진 은혜의 언약을 반복해서 상기시키기 위해 보냄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결코 이스라엘을 언약에서 떠나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율법을 이스라엘을 은혜의 언약에로 다시 인도하기 위해 주어졌으며, 이 율법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상징이요, 그림자로 파악 하였다.
율법의 목적은 “믿는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데 있다.” 율법은 범법 때문에 주어졌다(갈3:19)이 율법은 죄와 저주를 깨닫게 하고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겸손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찾게 하는 준비 작업이다. 이에 칼빈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롬10:4)는 바울의 말과 함께 “그리스도께서는 의문으로 죽은 것을 살리는 영이라”함으로서 ‘율법은 죽이는 역할을 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살리는 역할을 한다.’ 고 한다.
실로 이것은 놀라운 은혜이다. 즉, 계명을 지킴으로 성취된 의가 인간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의를 성취하신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값없이 전가하심으로 우리가 사는 것이다.
칼빈은 몽학선생으로서의 율법의 고발적 기능을 통해 ‘율법이 악한 자에게는 위협을 주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려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림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그의 자비를 전적으로 의뢰하고 그 안에 김이 피신하여 그의 의의 공로를 붙잡게 하기 위함’임을 밝히며 율법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비, 곧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 되어진 언약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언약의 백성’은 ‘이 율법을 자주 묵상함으로 그 말씀에 청종하도록 자극을 받고 범죄의 길에 빠지지 않게 되어지며 게으른 육신을 채찍질하며 계속해서 언약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다.
3) 성령 하나님의 비밀한 사역에서의 언약
칼빈은 성령님을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시켜 주시는 띠’라고 표현했다. 즉 이 말은 ‘성령께서는 예배하는 공동체의 설교,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고 성경읽기를 통하여 우리 인간을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 시킨다’ 는 의미이다. 과거의 유일회적으로 완료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화해의 사역이 오늘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다름 아닌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그 구속과 화해의 사역에 연결시켜 주신다.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그렇다. 바로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의 것이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소외관계가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관계로 바뀐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의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구속주 하나님이 언약의 백성들과 관계하시는 것은 성령하나님의 사역을 통해서이며, 그 구속주 하나님이 그 백성의 것이 되게 하신다. 즉, 성령께서 ‘믿는 자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며 그들 안에 거하셔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와 나아가서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안에서 그 백성의 아버지가 되시며, 언약의 백성들의 받을 유업을 인치시고 보증 하신다. 실로 성령님은 교회를 언약 안으로 부르시며 확증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성령은 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복음신앙을 일으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다. 우리는 성령님을 통하여 구약의 모든 성도들 보다 직접 예수님을 본 제자들 보다 더 풍요롭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 우리 안에 거하심을 깨달으며, 체험한다.
2. 언약과 할례
언약의 참여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은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다(창17:10-12). 할례는 영혼의 언약에 대한 상징이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의 확실한 표시였다. 할례의 기원을 살펴보고 이스라엘의 할례의 관행과 그것의 교회사적 의미를 찾아보도록 하자.
(1) 할례의식의 고대의 관행
1) 구약시대의 관행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할례는 콜치아인에 디오피아인, 애굽인등 고대부터 가지고있던 일종의 관습이였고 애굽인에 의해서 팔레스틴의 수리아인과 페니키아인에게 전수된 것이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할례는 남근의 표피를 약간 짤라내는 행위에 해당한다. 히브리인들은 생후 8일된 남자아이들에게 이 의식을 행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마엘이 13세에 할례한것이 관례가 되어 후에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일반적인 관례가 되었던 것이다.
다음은 각 히브리어에 따른 할례의 의미이다.
- 베어버리다, 할례를 행하다.
- Niph동사: 할례를 받다. 자신을 할례하다.
- Piel동사: 잘라버리다.
- Hiph동사: 잘라버리다. 베다
(2) 이스라엘의 할례
1) 이스라엘 할례의 기원
할례의 기원이 고대의 어느 때인지는 확실히 알 수 가 없다. 창17:9-27 에서는 할례의 기원을 아브라함의 시대라고 하지만 그 기사는 후대 제사법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몇몇 학자들은 출4:24-26에 근거하여 할례의 기원을 미디안 족속의 영향을 받고있던 모세의 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수 5:2-7을 근거로 해서 할례의 기원이 여호수아 시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헤로도투스는 유대인과 다른 민족들이 이 의식을 이집트로부터 도입해 왔다고 주장한다. 할례가 고대세계에서는 널리 성행했던 관습이라는 점에 비추어볼 때, 이 이론들 중 어느것도 만족할만한 것이 못된다.
2) 할례와 언약과의 관계
창세기 17장의 구조를 살펴보면, 1-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실 약속을, 9-14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15-27절은 사라를 통하여 아들이 출생하리라는 예언과 아브라함과 그 집안의 복종을 나타내주는 할례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할례의식은 하나님과 언약의 징표로써 시행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세우신 언약의 표시로써 할례를 받게 하였다. (창17:3) 스데반도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다” (행7:8) 고 진술하였다. 이같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약속의 확증적 표징으로 할례를 행하게 하셨다.그 언약의 참된 의미는 첫째, 할례는 계약사회에 들어온다는 표징이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 여호와의 연합이며 그와의 교제로 확증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계약적인 공동체 안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둘째, 할례는 부정을 제거한다는 상징으로 정화의 행위였다. 이것은 죄의 용서 혹은 성결에 대한 인침이었다.
(3) 할례의식에 대한 교회사적 해석
1) 교부들의 해석
리용의 이레니우스는 할례가 율법의 완성으로서가 아니라 계약의 표로 주어진 것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에스겔에게 안식일을 준 것과 같다고 하였다. 밀라노의 암브로우스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약속 받았을 때 그것은 자연법칙에 반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어거스틴은 그의 원죄론에서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지 않으면 겨레에서 끊어지게 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중요시하였다.
2) 종교 개혁자들의 해석
루터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을 떠나지 말고 흠없이 살아라”고 말씀한 것을 볼 때, 할례가 흠없이 살도록 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며 일종의 순종행위나 믿음의 실천일 뿐이라고 강조하였다. 칼빈은 첫째, 인간에게 속한 것은 무엇이든지 더럽혀졌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으로 할례는 회개의 표시이고 둘째, 축복을 입증하는 표, 곧 언약의 표가 하나님의 복받은 자들에게서 기원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이다. 한마디로 칼빈은 택함받은 자의 책임과 사명을 매우 강조하는 입장에서 전개되고 있다.
랑게는 인간의 부패와 신의 은총을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부르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해산의 고통은 할례를 통해서 남성에게 전가되었고 여자는 남자에게 전적으로 종속되었다는 옛계약을 재선포한 것이다. 이처럼 새생명의 모형이라면 그 본질적 성취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있다고 랑게는 말한다.
브루지만은 첫째, 제의 행위로서의 할례는 단순한 신학적, 교육적 효과를 넘어서 공동체의 귀속을 확인하는 의미가 있었다.
둘째, 적극적인 신학적 상징으로서의 할례는 은유적 역할을 하므로서 예언자들은 마음의 할례를 말하게 되었다.
셋째, 그러한 상징이나 행위들은 신앙의 역동성에 큰 잠재력을 준다.
넷째, 할례의 전승은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공동체에의 충성스런 참여로서의 세례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지금까지 교회사적으로 살펴본 바에 의하면 할례의 신학적 의미는
① 바울은 복음에 비추어 계약과 할례를 해석하며
②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은 고백적으로, 은유적으로 또는 윤리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사실상 바울의 해석에서 조금도 더 나아가지 못했는데, 이는 성서해석에 대한 학문적 전통과 풍토가 거의 조성되지 않았기에 해석자의 통찰력과 영감에만 의존함으로써 독단적, 주관적 해석이 과다하게 반영되었으나
③ 현대 주석가들은 지금까지의 교권주의와 도덕주의에 의해 채색되고 가리워진 성경말씀의 본래적 의미를 성취하라는 측면에서 본 할례와 세례의 관계를 보다 깊게 논의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게 된 것이다.
3. 언약과 세례- 할례로부터 이어지는 언약의 표징
(1)세례의 기원
1) 유대교의 세례
기독교 세례의 기원은 유대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들은 새로운 개종자들을 받아들일 때 행하는 개종 의식들 중의 하나로서 세례를 베풀었다. 이 세례의식은 단지 의식적 정화 행위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성례전적인 성경의 물질적인 요소들과 아울러 영적인 요소들을 함께 갖추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자기를 봉헌한 행위로 간주했다.
2) 세례 요한의 세례
세례요한은 유대교의 세례와는 확연한 차이점이 있다. 그는 이방인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유대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는 또한 이 의식을 종말론적 성격, 즉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위한 도덕적 정화 의식으로 세례를 베풀었고, 이방인 그리고 유대인까지도 회개와 사죄의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는 요한 자신이 전했던 하나님의 나라 곧 구원을 받기 위한 준비를 상징할 뿐이며, 그것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눅3:16)
3) 예수님의 세례(복음서 기자들의 세례 이해)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받으심은 기독교 세례의 가르침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요한의 세례는 죄사함을 받게하는 회개의 세례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음으로서 인류의 죄와 비애를 짊어지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고난의 죄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희생제물로 바치고 죽는다는 의미와 어린양으로서 세상 죄를 제거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그의 세례받으심은 지상에서의 세례 주심의 시작과 그의 죽으심의 세례는 영원한 나라의 세례 베푸심의 시작이었다.
4) 초대 그리스도교 세례와 그 의미 (사도들의 세례 이해)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후에 제자들과 함께 유대 지방에서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오순절 이후의 세례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리고 후에는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주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죄에 대하여는 죽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산자가 되었음을 확증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또한 세례를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설명하였다. 자기의 백성을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활동에 힘입어 구원된 사실이, 곧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발전시키고 있다. 베드로 3장에서는 세례를 율법적인 정결의식으로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에 의뢰하게되는 신앙 양심에 의하여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례가 단순한 회개나 개종 혹은 입문 의식에 머물지 않고, 세례를 받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신앙과, 심판이요 죽음인 ‘물’과 ‘구름과 바다’가 오히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전응한 행동으로서의 ‘구원의 표’가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부활이 믿는자의 ‘구원의 표’요 곧 세례라고 말함으로서 그리스도교 세례의 독특한 의미를 설정하였다.
세례는 신앙에 대한 강한 상징적 확증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승리 안으로 한 개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2) 언약의 표징으로서의 세례
세례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기 위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가입되는 입문의 표징이다. 칼빈은 세례란 “깨끗이 씻음 받았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표시하는 것으로 이는 마치 문서에 찍힌 날인과 같아서 모든 죄는 도말되었고, 구속되었으며 지워져 버렸다는 것을 날인하는 것이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세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니라 내면적인 은혜이다. 따라서 세례를 집행하는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외적인 표징을 집행할 뿐이며, 내면적 은혜를 주시는 이는 그리스도시다. 그러므로 칼빈은 누가 세례를 주던 그리스도만이 세례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가장 중요한 논거로 삼았다.
(3) 유아들에 대한 언약의 표징으로서 세례(유아세례)
칼빈은 유아세례를 할례와 관련하여 설명하면서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언약’임을 역설한다. 즉 아브라함이 할례 전에 받았던 하나님의 약속 “내가 네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 내가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2,7) 을 통해 아브라함을 언약의 파트너로 삼으시고 그에게만 영생의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까지 언약의 약속을 주셨다. 그런데 이때의 할례란 은혜의 언약을 수용했다는 표시와 나아가서는 죄악 된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법도를 쫒아 살아야 하는 마음의 할례이다.(신10:16)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은혜로운 선택과 이에 대한 반응의 출발로서 할례가 갖는 뜻이다.
즉 할례는 세례와 외적인 의식은 다르지만 둘 다 동일한 내용을 가리킨다. 즉‘동일한 아버지 하나님의 약속과 총애, 사죄와 영생의 축복 그리고 중생’ 이 세례와 할례가 가리키는 영적인 내용이다. 칼빈은 유아들 역시 동일한 은혜의 언약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보며 유아세례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유대인의 자손들이 아브라함의자손인 한 은혜의 언약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듯이 그리스도의 자녀 역시 구별된 언약의 자손이라고 칼빈은 주장한다. 아브라함이 유아의 할례를 명하였듯이 우리는 믿는 자의 자녀를 세례 주도록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할례가 아니라 세례를 받는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또한 어린아이들을 초대하시고 축복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언약의 싸인에서 제외할 수 없으며 세례의 혜택에서도 제외시킬 수 없다고 언급한다.
그는 유아세례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유아가 세례를 받을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인은 경건한 부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 시키며,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 부모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그의 자녀들의 하나님도 되심을 인정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은 그의 은혜와 모든 좋은 것을 그 부모에게만 아니라 수천 대에 이르는 자녀들에게도 주신다고 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가 자기들의 자녀에게 베풀어진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인 부모들은 그이 자녀들을 교회로 데리고 나가서 은혜의 사인으로 인침을 받게 해야 하고... 다른 한편 자녀들이 유아세례로부터 받은 은혜는 다음과 같다. 즉, 이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교회의 몸에 접붙임을 받은 지체가 되고 다른 지체들에게 위탁된다. 그리하여 이들이 성장할 때 이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열심에로 크게 자극을 받으며, 하나님께서는 이 어린이들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만큼 성숙하기 전에 유아세례를 통하여 그의 자녀로 받아들이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이 가정에서 출발함을 기억해야 한다. 믿는 자의 자녀는 가정에서 신앙교육을 받아야 한다. 세례는 할례로 나타났던 언약의 성취이다. 유아세례란 세례를 통해서 비로소 아이를 언약의 백성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백성이라는 입장에서 인침을 받는 것이다. 내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순간에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는 아이가 장래에 예수님을 믿을 것을 근거로 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거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4. 유아세례
유아세례의 기원은 성경에 언급이 없을뿐더러 신약 성경 속에서 유아 세례를 시행한 예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교의적 논쟁도 분분하다. 그러나 교부들의 시기에 터툴리안을 제외하고 이 유아 세례가 시행되고 인정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유아세례의 성서적 근거
복음서나 사도들의 서간에는 유아세례를 정식으로 취급한 대목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사도시대의 교회 안에서 유아세례를 허용하고 실천했다는 견해를 찾을 수 있다.
1) 사도 바울은 세례를 할례와 결부시키면서 복음 아래에서는 세례가 할례를 대신한다고 했다.(골2:11-12) 어린이들이 생후 8일만에 할례를 받았으므로 여기에 비추어 어린이들도 세례를 받아 마땅하다는 추론이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다.
2) 구약에서는 부모에게 내린 약속이 그들의 자녀에게까지 해당된다. 오순절의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청중들에게 “복음의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들에게 하신”것으로 선언하면서 이 약속을 세례의 권유와 관련시키고 있다.
3) 유대 개종자들은 집안의 어린 아이들 까지도 세례를 받게 했다. 신약에서도 ‘온식구’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설명이 많다. 즉 루디아와 그녀의 집이 다 세례를 받았고(행16:15), 빌립보의 간수가 “제 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하고 묻자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네 집안이 다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한 사도의 말을 듣고 온 가족이 그 밤에 세례를 받았다.(행 16:30-33) 그들 가족 가운데에 자녀들만 세례 의식에서 제외되었다고 언급된 곳은 아무데도 없다. 이러한 기록은 고대 사회의 가장의 위치를 함께 이해해야 한다.
4) 온 식구들이 가장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있었고, 가장의 회개와 믿음이 자녀들 뿐 아니라 종들까지도 포함한 온 식구들의 회개와 믿음으로 간주되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5)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부모와 자녀들을 긴밀하게 결합시켰기 때문에 믿는 남편이나 아내의 자녀들을 ‘거룩’하다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고전7:14) 따라서 어린 아이들이 부모의 믿음을 따라서 부정한데로부터 거룩한데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시사했다.
(2)교회의 전통적 근거
유아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증거는 속사도시대 교회의 초기에서도 나타난다.
1) 112년 플리니우스(Plynius)가 트라이아누스(Traianus)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에는 “그리스도를 신봉하는 자들 가운데 모든 연령층과 모든 계층과 남자와 여자의 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붙여지고 있고 끌려지게 될 것이다.”라고 쓰여있다.
2) 180년 리옹의 이레니우스(Lrenaeus)는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Polycarp)의 제자였는데, “예수는 자신을 통해 모든 사람들, 곧 그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중생되는 모든 자들, 유아들과 어린이들 또한 청년과 노인들을 구원하려고 오신다. 그런고로 모든 세기를 통하여 유아들에게는 유아가 되어 유아들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오신다. 또한 어린이들에게는 이 나이를 가지고 있는 자들을 성화시키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경건과 의의와 복종의 본보기를 제시하면서 어린이가 되어 오시는 것이다.” 이레니우스에게 있어서의 세례는 “하나님을 향하여 태어나는 것”이며, “하나님을 향하여 갱생하는 힘”이다.
3) 215년경 로마에서 편찬된 ‘사도들의 전통’에서 교회의 관례를 볼 수 있다. “우선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줄 것이다. 말할 줄 아는 어린이들은 그들이 대답하게 하고, 말 못하는 아이들은 부모나 친척이 대답하게 하라.” 자신도 유아 때에 세례를 받은 오리겐네스는 그 관습의 기원을 사도시대로 보고 있다. 그는 로마서 주석에서 5장 9절을 근거로 “교회는 어린이들에게도 세례를 줄 수 있도록 사도들로부터 전승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누가복음서에 관한 설교 제 14편에서 “형제들간에 자주 논의된 문제에 대하여 한마디 덧붙이겠다. 유아들이 죄를 용서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데, 그들이 죄를 범했는가? 사실상 죄를 범한 적은 없다. 그러나 때묻지 않은 인간은 아무도 없다. 세례의 신비로 그 때묻음이 없어진다. 이것이 바로 유아들에게 베푸는 이유다”라고 말했다.
4)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터툴리아누스(Tertllianus)의 증언을 이용한다. 그는 200년경에 저술된 ‘세례에 관한 논고’에서 유아세례를 보류할 것을 권고한다. “어떤 사람의 처지와 상황과 나이를 위해 세례의 삼가가, 특히 어린이들에 대해 더 유효할 것인가?....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저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다. 따라서 그들이 젊었을 때 내게 오도록 하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한, 그들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가르칠 수 있을 때 오도록 하라.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 수 있을 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라. 나이가 어린데 죄의 용서를 재촉할 것이 무엇인가?” 어렸을 때 세례를 받은 자가 큰 죄를 범할 우려가 있으며 대부(代父)가 대자(代子)를 선도할 현명한 일이 못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신도 자신의 견해가 뿌리깊은 관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시사했다.
위와 같은 증거로 보아 동서를 막론하고, 초대교회에서는 유아세례를 거행했고, 또한 사도시대 교회에서 내려온 관례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 또한 유아세례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고백에도 나타나 있다. 그 예로 아우구스브르코 신앙고백 제 9조의 “세례는 구원에 필수적이며 아동들은 세례에 의해 하나님께 바쳐지며 하나님의 은총 속에 영접된다.”고 명시하였다. 그 외에도 이것은 제2스위스 신앙고백 제 23조,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1문 24항, 갈라디아 신앙고백 제 34조, 39개조, 신앙고백 제27조, 스코트란드 신앙고백 23조,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제28조 등에 명시되고 있다.
(3)신학적 근거(구원론, 교회론의 입장에서)
유아세례는 복음의 자비로운 은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과거와 미래의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데 근거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거행되는 일이다.
1) 아울렌(Gustaf Aulen)은 세례를 ‘하나님의 예비적 은총의 행위’라는 정의에 입각하여 “유아세례의 타당성은 즉시 성립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점은 유아세례가 복음의 은총 천명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린 아이도 하늘 나라에 속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아이들도 어른과 같이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권리를 갖는다고 이해한 것이다.
2) 요한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유아세례의 타당성을 논했다.
첫째, 만일 어린이들이 원죄에 죄책 되어 있다면 그들은 근본적으로 세례의 대상이다. 원조의 흠이 모든 인간에게 있다. 그래서 ‘진노의 자식들’이고 영원한 정죄를 당하게 되어 있다. 첫째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에게 온 이 병을 둘째 아담이 발견해 냈고, 이것은 그분이 그 목적을 위하여 정하신 정규 수단이다.
둘째, 어린 아이들도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 유아들과 너희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다 너희 하나님 야훼 앞에 선 것은 너희 야훼의 언약에 참예하여… 이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라”(신 29:10-13)고 하신다. 따라서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이었고 이 언약을 수행할 능력은 그들이 자람으로서 터득하게 될 것이다.
셋째, 신자의 아이들, 신실한 아브라함의 참된 자녀는 언제나 복음의 언약 아래 있다. 이것은 어린 상속자가 실재로 소유하지는 못할 지라도 자기 재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복음의 언약이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 22:17-18).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이 씨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갈3:1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약속은 모든 자손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창17:7,갈3:17) 이 언약 안에서 자녀들은 그 언약의 모든 유익과 약속을 얻을 자격을 동등하게 지니고 있는 것이다.
3) 아울렌은 유아세례를 ‘그리스도교의 산 양심’이라고 표현한다. 유아세례는 세례 받은 사람을 그리스도교적 영적 생활과 접촉할 수 있게 한다는 전제를 가지며, 이 접촉을 가져오게 하는 교회의 의무에 대한 생생한 증언으로서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4)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세례의 유일회성에서 중요성을 찾고 유아세례 역시 반복할 수 없는 일회적인 세례인 때문에 세례를 베풀 때 일정한 한계를 생각하게 된다면서 “유아세례는 단번에 이룬 은혜의 신앙적 회상과 반복이 보장되는 곳에서만, 다시 말하면 살아 있는 교회에서만 베풀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교회 없는 유아세례는 성례의 오용일 뿐 아니라 동신에 어린이의 영적 구원을 농락하는 저주받은 경솔이라 할 것이다” 라면서 강경한 어조로 교회의 책임을 강조한다.
5)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이들의 구원은 신앙의 문제이기에 앞서 교회가 지니고 있는 후원자적이요 양육자적 역할이 문제”라고 보았다. 아이가 스스로 자라기 전에 어머니가 자신의 태 속에 그를 양육하듯이 모교회의 품에서 유아는 양육되고 교회 의식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4) 반유아세례의 견해
① 터툴리안의 견해
- A. D. 160년에 출생하여 220년에 사망.
문헌상으로는 유아세례에 대한 최초의 반대자로 지칭된다. 세례에 관한 처음의 논문 “De Baptismo"에서 세례에 관하여 자세히 언급하는 가운데 유아의 세례 받음에 반대의사를 밝히며 유아세례의 연기를 호소함.
•주장•
“무죄한 나이에 왜 죄들의 용서를 재촉하느냐? 어린아이들이 더 자랐을 때 그들을 오게 하고, 그들이 배울 능력이 있을 때 그들을 오게 하며, 그들에게 오라고 명령되어진 곳이 어디인지 지시함 받을 수 있을 때 그들을 오게 하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 수 있을 때 그들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라“
- 터툴리안의 주장은 어린아이들이 기독교를 이해하고 그들 자신이 스스로 고백할 수 있을 때, 그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터툴리안은 심지어 결혼하지 않은 처녀 또한 과부들까지도 세례의 연기를 충고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항거할 수 없는 유혹이 올 때 그 유혹으로 인하여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세례 받은 후의 범죄는 용서받지 못하는 중죄로 여겼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데, 유아세례도 세례 받은 어린이가 다시 나쁜 길에 빠질 경우에 영원히 죄사함을 상실해 버릴 중대한 위험이 따른다고 말했음을 볼 때 더욱 확실해진다.
1. 유아들은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을만한 필요성이 없다.
2. 세례란 다만 성숙한 사람들에게만 이행되어야 할 만큼 중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
3. 세례를 받은 후에 지은 죄는 보다 더 과중한 죄를 그에게서 들어내게 한다.
4. 유아세례는 그 후견인(부모)들에게 너무나 무거운 책임을 지우게 된다.
② 재세례파(Ana-Baptist)의 견해
- 재세례파는 종교개혁이 진행 중이던 때 등장. 종교개혁 시기에 생겨난 급진적인 개혁그룹. 527년 1월 그들은 국가교회(the state church)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던 한 사람에게 재세례를 처음 실시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재세례파(Anabaptists)로 불리게 된다.
•주장•
1. 할례와 세례가 상징하는 성질 그 자체가 상이하며, 또한 두 계약은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어린아이를 부르는 명칭도 동일하게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세례와 할례를 분리시켜 둘을 공통의 것으로 볼 수 없다.
2. 어린아이들은 아직 철이 들지 않았으므로 세례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기에 알맞지 않으며(“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0:17), 세례의 참된 뜻은 영적인 중생으로서 이것은 처음 난 자들에게는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거듭나기에 알맞은 연령에 도달하기까지는 아담의 아들로서의 위치에 놓여질 뿐이라고 결론한다.
3. 사도시대에 실시된 세례 시에는 신앙과 회개를 고백함 없이 어떤 사람도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할 수 없다.(행 2:39, 행 8:37)
4. 마태복음 28장의 예수님의 세례 명령에 따르면, 사도들을 세계 국민에게 보내실 때 먼저 그들을 가르치고, 그 다음에 세례를 베풀도록 명령하셨다.
5. 마가복음 16장의 말씀에서도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므로 예수님께서는 세례 베푸는 일보다 가르치는 일을 앞세울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며, 세례는 신앙 다음에 제2의 위치를 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③ 침례교의 견해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거듭난 내적 경험을 가진 자가 불가시적 구원의 확신을 가시적인 의식을 통해서 나타내 보이는 것이므로, 따라서 이는 신자들만이 받는 세례인데 유아들에게는 이러한 경험이 없으므로 유아세례는 부당하다. 다시 말하면, 세례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오직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믿고 그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인데, 유아들은 그러한 능력이 없으므로 유아들은 세례를 받을 수 없다.
•주장•
1. 성경 어디에서도 유아세례에 대한 증거는 없다.
‣사도행전 10:44-48 : 고넬료와 그의 집안이 세례를 받을 때는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세례를 받았다.
‣사도행전 16:14-40 : 루디아는 사업차 여행을 다닐 때, 어린이를 동반하지 않았으며 그녀가 내 집이라 했지만, 그녀는 남편이 없었고, 형제들은 자주장사로서 물건을 옮기고 운반한 종들이었고, 그들은 일할 수 있는 충분한 나이, 즉 성인이었다.
‣사도행전 16:32-34의 빌립보 간수나 사도행전 18:8의 그리스도, 또한 고린도전서 1:16, 16:15-16의 스데바나 역시 집안에 어린이는 없었고, 집안 식구 모두 말씀을 듣고 예수임을 영접했다. 따라서 성인들만이 세례를 받았다.
‣마가복음 10:13-16 : 단지 예수님에게로 몰려오는 어린이들을 막지 말라는 말씀이고, 예수님은 그 중 한 어린이를 안고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뿐이지 예수께서 그들에게 세례를 베푸신 것은 아니다.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어른들은 예수님께서 안수하시고 기도해 주실 것을 원한 것이지 세례를 원한 것은 아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습관이 있었다면, 제자들이 어린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 어린이들은 이미 하늘나라를 위하여 합당한 존재들이었고 이점으로 미루어 보아 어린이가 유아일 때 세상을 떠나면, 어떤 종류의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틀림없이 천국에 간다.
2. 유아는 세례에 관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세례는 믿을만한 이해 있는 신앙고백을 전제로 하여 시행되어지는 의식인데 유아들은 이와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는 이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고(막 16:16) 예수님이나 세례요한과 제자들은 세례를 베풀기 전 죄의 자백과 회개, 또한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들에게만 세례를 행하였다.(마3:6-8, 행2:41) 그런데 유아들은 신앙고백을 위한 믿음을 가질 수 없고 자백과 회개도 불가능하다.
3. 할례와 세례의 관계 단절성
구약시대의 할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의 언약의 증표가 되는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 즉 영적 이스라엘 백성사이의 언약의 증표는 세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구약시대의 할례는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었고, 남자에게만 베풀어졌지만, 세례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므로 특정대상이 없다.
4. 세례 받은 유아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모든 어린이들은 세례 받음 없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는다.(마19:14, 요1:29,롬:12-21, 삼하 12:23) 어린이들은 죄가 없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고, 혹시 죄가 있다 하더라도 유아세례를 통해서 중생 즉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회개의 필요성을 감소시킨다.
5. 유아에게 세례는 베풀며 성찬참여를 거부하는 것은 모순이다.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정당하다면, 그들을 당연히 성찬식에 참여시켜야 한다. 그러나 유아세례론자들은 성찬식에는 참여할 만큼 철이 들지 않았다고 제한시키는데, 이것은 신약과 구약사이의 간격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모순된다.
6. 후견인의 무책임한 서약
신약성경에는 결코 대부나 대모의 제도가 없을 뿐 아니라, 이들이 행한 약속을 전부 이행한다는 보장도 없고, 나아가서 이들의 생명이 빨리 끝나게 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것인가? 믿음이란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개인적 만남이라 생각할 때, 유아세례를 시행함으로써 그 부모와 교회에 대하여 그 자녀의 양육책임을 지운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④ 칼 바르트의 견해
- 초기에는 유아세례에 대해 강한 부정을 보였지만, 1960년대 "화해의 교리“ 책을 저술하면서 약간의 생각을 변화를 보여줌. 유아세례가 초대교회에서 일찍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유아세례의 신학적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 될 수 없으며, 오리겐이나 시프리안의 증언에 따라서 그저 반성 없이 유아세례를 행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근거를 가진 일이 아니다.
•주장•
1. 세례 받는 자의 신앙적 결단 없이 베푸는 세례가 참된 세례가 될 수 있겠는가? 즉 부모․대부․회중 혹은 전 그리스도 교회의 대리신앙이 세례 받는 유아의 신앙으로 간주 할 수 있겠는가? 만일 이러한 대신앙의 원리를 승인한다면, 카톨릭의 공적사상이나 연옥교리가 다 허용된다.
2. 유아세례후 견신례(confirmation)와 같은 보충을 필요로 하므로 그것은 반쪽세례에 불과하다.
그러나, 칼 바르트는 유아세례를 받은 자가 다시 세례를 받는 것을 반대한다. 유아세례가 타당치 않은 의심스러운 방법으로 집행되었다는 것 때문에 그것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⑤ 반유아세례론의 주장의 요약
- 반유아세례론자들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성경적인 면을 고찰하여 볼 때, 유아세례론은 성경의 분명한 증거와 또한 유아세례가 시행된 성경의 실례가 전혀 없으므로 유아세례는 부당하다.
2. 유아세례론자들이 이야기하는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의 관계 곧 하나님의 언약적인 면을 고찰하여 볼 때 할례와 세례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으므로 할례를 근거로 하여 유아세례를 실시함은 부당하다.
3. 유아세례의 문제를 신학적․교리 적인 면에서 고찰하여 볼 때, 세례는 믿을만한 이해 있는 신앙고백을 전제로 하여 시행되어져야 하는 의식인데 유아는 이를 이해하고 고백하는 믿음을 가질 수 없으므로 부당하다.
(5) 유아 세례에 내포된 교육적 의미
유아에게 베풀어지는 세례는 그가 약속의 자녀임의 표이고 인이다. 이 언약의 유효성은 지속적이다. 그러므로 유아에게 베풀어지는 세례는 성인 세례와 같이 중요성을 가진다. 하나님은 세례를 통하여 어린아이 안에 있는 신앙의 은혜를 강화하시고, 세례를 받은 이후에 은혜를 증가시킨다. 또한 부모에게 은혜를 준다. 유아세례를 통하여 부모는 그들을 교회 앞에서와 하나님 앞에서 서약을 지키며 서약을 생각하며 아이를 기른다면 그들 자신에게 임하는 은혜가 크다
유아 세례에 관한 교육적 책임은 교회와 부모 모두에게 올바로 인식되어야하며, 이에 따른 구체적인 기독교 교육 방안이 적극적으로 모색, 실행되어야 한다.
유아세례는 교회와 가정에서 협동 교육을 통해 양육시켜야할 책임이 요구된다. 먼저 부모는 지금 완전히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며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친히 경건한 본분을 이 아이에게 보이기를 진력하며, 이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며, 이 아이와 함께 기도하며 우리 거룩한 종교의 도를 가르치며 하나님이 지시하는 모든 기관에서 진력하며 이 아이를 주의 양육과 교훈에서 성장케 하기를 서약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 역시 유아 세례 준비 교육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유아 세례 받은 자녀를 교회에서는 그 발달 단계에 따라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교육하여 서약한 사실 승인에 대한 내적이고도 공적인 참된 고백을 행동으로 옮기며, 하나님께 쓰임받는 올바른 제자로서의 도리를 열심히 실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