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임청각-군자정에 대해서 언론사에서 다루지 못한 부분을 자랑스런 숭실 동문들에게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수많은 독립열사들과 시인 묵객들이 묵어간 군자정은 조선중기 1519년 중종14년 형조좌랑 이명이 건립한 양반주택의 별당형 정자이다.
이 군자정에서 호연지기를 키우며 성장한 석주 이상룡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큰 뜻을 품고 모든 재산을 팔아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후 독립운동에 전 상애를 바첬다.
노블리스오블리제를 실천한 참 인물이시다.1925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셨고 1932년 만주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독립운동의 산실로만 알려졌던 임청각-군자정은 마가복음서를 토론한 역사적인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나의 제부 이덕화목사의 조부이신 건초 이상동장로님과 부친이신 백광 이운형 목사님은 수십대에 걸쳐 내려온 엄격한 유림사상의 높은 담을 과감히 뛰어넘어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전통유교와 초기기독교의 처절한 갈등의 중심에서 묵묵히 신앙을 지켜내셨읍니다.
그리고 국가의 수난기였던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으로 투옥되기 직전까지 40년 동안 민족을 위해 교육사업 교역사업 자선사업에 헌신하셨습니다.
제부의 일가는 애족장 4인 독립장4인 애국장1인 도합 아홉분과 독립유공자 친인척 47명[ 포상 56명]으로 나라를 위해 애국애족운동에 전념을 바친 가문으로 알려졌다.
안동 고풍의 위엄을 자랑하고 있는 임청각은 세상의 그것을 뛰어넘는 복음과 구원의 역사적의미가 서려있는 곳입니다.
고려때에 문하시중 ,조선왕조 초기.중기에 걸쳐 영의정,좌의정,참판,참의등으로 봉직중 1445년 왕위찬탈의 정쟁에 환멸을 느낀 이 가문은 안동으로 낙향하여 [임청각]을 건축해 안착했습니다.
원래 임청각은 99칸의 기와집이었는데 일제가 민족의 정기를 끊고자 철길을 내서 현재는 70여칸만 남아 있는데 1965년 부터 시작된 복원사업은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하여 2025년 까지 복원사업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광복절을 앞두고 중요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동문들께서 익히 알고계시는
제 여동생의 시댁이었던 임청각 복원사업을 기적처럼 허락하시고 역사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임청각은 독립운동의 산실이기도 했지만 복음전파를 위해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고 예배를 드리던 다락방이었던 역사적 사실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뉴스에서 빠뜨리고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중요한 문제의 시정을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임청각 복원사업을 감사하며 ....
숭실 영문61 이 목 자
석주 이상룡이 서간도로 떠나면서 남긴 말은 유명하다.
"고향동산에 잘 머물며 슬퍼하지 말지어다.태평성대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물리라"
"나라를 되첮지 못하면 가문도 의미가 없다"고 조상의 신위를 땅속에 묻어 현재 사당에는 봉안된 신위가 없다고 합니다.
안동 임청각이 유명한 것은 1925년 당시 상해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기 때문이며 우당 이회영 선생 일가와 함께 경학사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