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무대왕 김유신
신라 삼국통일을 이끈 주역 김유신 장군은 죽어서도 천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이름이 더욱 높이 날리고 있다. 신라시대 최고의 벼슬 태대각간에 올랐다가 훗날 흥덕왕이 ‘흥무대왕’으로 추봉해 왕보다 높이 받들어지는 인물로 부각됐다.
김유신은 태어날 때부터 남달랐다. 일찍 무예를 깨우치고 나라를 위한 일에 충정을 바치며 한가지 결심한 일은 끝까지 이루는 집중력과 의지력을 보였다. 청년시절 끓어오르는 사랑에 대한 열정도 단숨에 절단내고 학업과 나라일을 위해 매진하는 태도에서도 그랬다. 결국 가장 약한 나라를 가장 강한 나라로 이끌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주역이 됐다.
그의 발자취는 경주 곳곳에 남아있다. 그가 태어난 생가와 우물터, 그의 사랑을 위해 지었다는 천관사지, 삼국통일의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통일전, 왕의 무덤보다 큰 위용을 자랑하는 무덤,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흥무공원과 동상 등을 돌아보는 트레킹코스를 가본다.
역사적인 사실들을 둘러보는 테마관광코스로 개발하고 특히 청소년들의 교육적 관광코스로 크게 추천하고 싶은 곳으로 손꼽히고 있다.
❚생가터의 재매정
김유신 장군은 신라에 복속된 금관가야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신라귀족들의 무서운 경계를 받으며 어렵게 신라에서 입지를 굳혔다. 폐위된 왕손으로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던 김춘추가와의 중첩된 혼인관계로 김유신가는 신라에서 입지를 세우고 나라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김춘추의 부인이 김유신의 동생이고, 김춘추는 그의 딸을 60세에 이른 김유신에게 시집보냈던 것이다.
김유신, 외삼촌에게 시집와 훌륭하게 집안일을 꾸려 재매부인으로 오늘날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는 김춘추의 딸은 두 집안을 결속하는 역할과 함께 신라의 기둥을 튼튼히 세우는 데 내조한 공이 크다. 우물 재매정의 이름을 따서 재매부인이라 택호를 붙였는지 재매부인의 훌륭한 인품에 따라 재매정이라는 우물의 이름이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도 뚜렷한 주장을 못하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는 경주시 교촌동 한옥마을 옆자리에 터를 잡고 있다. 지금은 벌판에 유허비각과 우물터가 오래된 흔적을 안고 마실 수 없는 고인 물과 함께 흘러간 화려한 세월을 끌어안고 있을 뿐이지만 궁궐터인 반월성과 300여m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신라시대 왕궁과 이웃해 나라의 일을 좌지우지하는 장군의 성역으로 기능했을 터이지만 흔적만 남아 복원계획 속에서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재매정은 특별히 물맛이 좋은 우물이었을 것이라는 보고서들이 있다. 또한 김유신 장군이 당시 백제군사를 물리치고 돌아와 임금에게 승전보고를 마치는 중에 또 적군의 침입소식을 접하고 바로 출전했다. 그는 자신의 집 앞을 지나면서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자신의 집 우물 재매정의 물을 마시면서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칼을 들어 군사들을 독려해 말을 달렸다는 일화가 오늘까지 전하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는 경주시가 사적 제246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생가터에는 유허비각과 우물 재매정이 있고 주춧돌과 석등 부재 등이 흩어져 있다. 김유신 장군의 충정을 느끼게 하는 리더십이 재매정을 통해 오늘날에 재조명되고 있다.
❚첫사랑 못잊어 세운 천관사
김유신은 17세에 벌써 입신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무예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경주 서쪽 단석산에는 김유신 장군이 무예를 연마하면서 단칼에 양단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큰 바위 장군바위로 불리는 ‘단석’이 있다.
김유신 장군이 혈기왕성한 때 사랑에 빠졌다. 그와 사랑을 나눴다는 주인공은 기생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천관’이라는 벼슬을 가진 집안의 ‘천관녀’로 불리는 여인이다. 높은 벼슬이었으나 직급이 점차 낮아져 쇄락해가는 귀족의 가문 처녀쯤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가 한창 사랑에 빠져있을 때 그의 어머니가 훈계 했다. “지금은 공부하고 나라를 위한 국사에 매진할 때”라고. 김유신은 그의 어머니 앞에서 다시는 천관녀를 만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어느 날 술에 취해 귀가하는 길에 말 위에서 잠깐 조는 사이 말이 습관적으로 천관녀 집 앞에 당도해버렸다. 김유신 장군은 음주운전에 졸음운전까지 해버렸던 것이다. 김유신 장군은 어머니 앞에서의 다짐을 되새기면서 말의 목을 쳤다. 그리고는 천관녀를 뒤로하고 집으로 가버렸다.
입신양명을 위해 김유신 장군은 말의 목을 양단했지만 천관녀는 그녀의 사랑이 끊어졌다. 그 이후 천관녀는 저 세상으로 갔다.
삼국통일을 이루고 백발이 된 김유신 장군이 기억속의 천관녀를 찾아갔지만 덩그러니 빈집뿐이었다. 그는 천관녀를 추모하기 위해 ‘천관사’ 절을 지었다. 지금은 허허벌판에 절터를 웅변하는 주춧돌과 석탑부재 등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경주시는 복원계획은 아직 세우지 못하고 있지만 사적지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천관사지는 김유신 장군의 단호한 결의의 실천장소로 청소년들의 입신양명을 위한 결단과 의지력에 대한 교육현장으로 추천되고 있다.
❚삼국통일 기념 통일전
경주 남산의 동쪽 중앙지점에 통일전이 우뚝 서있다. 경주에서 울산으로 이어지는 7번국도까지 2Km의 진입로가 시원스럽게 시야를 틔워준다. 통일전은 통일을 염원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로 1970년대에 10만여m² 부지에 한옥으로 건립됐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공신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 그리고 김유신 장군 등 3명의 사적비를 세우고 영정을 통일전에 나란히 모시고 있다. 통일전에 오르기 위해 먼저 나라를 일으키는 ‘흥국문’을 지나 통일을 기원하는 ‘서원문’을 열고 높게 산중턱에 앉은 전통 한옥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통일전 둘레에는 이색적으로 갤러리가 조성돼 있다.
신라 삼국통일에 이르는 과정이 작품으로 기획전시된 것. 신라의 국가 생성과 화랑들의 활동, 세속오계의 품계, 김유신 장군의 출정도, 화랑 관창 전쟁도, 당나라와의 매소성 전투, 삼국통일을 이루고 기뻐하는 신라백성들의 환호도 등이 통일전을 애워싸고 있다.
김유신 장군은 김춘추와 손잡고 신라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면서 왕좌에서 쫒겨났던 후손인 그를 결국 왕좌에 오르도록 했다.
김유신 장군은 무열왕에 이어 김춘추의 아들 문무왕을 받들어 고구려까지 완벽하게 제압하며 삼국통일을 이루는 선봉장 역할을 했다.
경주시는 통일전에서 삼국통일을 이룩한 개국공신 3명의 영전을 모셔두고 매년 봄 통일을 기원하는 ‘서원제’를 올리고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을 포함해 많은 역사기록물들이 신라의 삼국통일 주역으로 김유신 장군과 태종 무열왕 김춘추, 문무대왕 세사람을 첫 번째 손가락에 꼽는다.
삼국통일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와 전쟁사 등은 다음호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흥무대왕과 장군묘
김유신 장군은 무열왕에 이어 문무왕과 함께 신라 삼국통일을 이루며 공을 세워 최고의 지위 ‘태대각간’의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공에 비하면 낮은 벼슬이라고 생각했는지 흥덕왕은 김유신 장군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했다. 그의 묘가 여타 신라시대 왕들의 무덤보다 결코 적지 않은 릉으로 규모를 갖추고 있다.
경주 서악동 무열왕릉의 위쪽 능선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릉을 수호하는 12지신상이 고분을 둘러싸고 있다. 학계에서 김유신 장군의 무덤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지만 지금까지는 김유신 장군묘로 소개되고 있다.
경주시는 또 김유신 장군묘 북쪽 능선을 공원으로 조성해 ‘흥무공원’이라 이름붙이고 김유신 장군의 어록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흥무공원은 사철 꽃이 피고 잔디밭과 벤치가 설치돼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인기가 높다. 매일 산책코스로 시민의 발길이 잦기도 하지만 휴일과 피서 휴양철에는 관광객들의 쉼터로도 알려져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경주시는 또 김유신 장군의 기개를 기념하고자 시민의 발걸음이 잦은 황성공원에 말을 타고 칼을 치켜 든 출정하는 모습의 김유신 장군 동상을 세웠다.
김유신은 죽어서도 그 이름을 높이 내걸고 있는 것이다. 김유신 장군의 탄생에서부터 사랑과 수신, 전쟁과 통일에 이바지한 공적, 그리고 죽음과 사후에까지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는 명성을 감상할 수 있는 김유신 장군 역사관광트레킹 코스 개발이 의미가 깊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