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네 가지 핵심 요소인 성경 본문, 설교자, 청중 그리고 성령을 기반으로 설교 세계를 구성해야 한다. 설교에는 그 설교를 듣는 회중이 있고, 회중으로부터 일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그 공동체 앞에 서 있는 설교자가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활동이며, 하나의 선포적 사건인 설교의 메시지와 그리스도의 임재이다. 이것이 설교의 중요한 4가지 구성요소이다.
해돈 로빈슨은 성경 본문의 배경에 관련하여 역사적, 문법적, 문자적, 신학적으로 연구하여 발굴하고 알아낸 성경적 개념, 즉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그 개념을 우선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하시며, 설교자를 통해서 다시 회중에게 적용하시는 것이라고 강해설교를 정의하면서 설교의 네 가지 핵심 요소에 성령을 포함시키고 있다.
존 스토트도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을 강해하면서 바울의 말씀을 통하여 네 가지 설교의 기본 요소인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 설교자와 청중, 그리고 성령이라고 했다. 그 중에서 성령의 사역을 가장 중요시했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 우리가 그 말씀에 대해 말할 때 갖는 확신,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모두 성령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김준곤 목사는 복음을 전파하는 목적으로 예수를 영접하지 못한 대학생들이 설교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다양한 언어적 기법을 사용하였다. 김준곤의 문설집 서문에 “초고성능 전자 감도 시대에 무딘 도끼 휘두르듯 혼자 고함을 쳐도 공감을 주지 못했던 쓰라림 경험 속에서 성령보다 기도보다 앞서지 말자, 성경의 말씀은 영혼 속에 심는 생명의 씨앗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후에 담대하게 그리고 쉽고 단순하게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외쳤다”고 기록된 것을 미루어 볼 때 김준곤 목사도 청중인 대학생들과 복음의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로 가장 심적인 고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설교자가 성경본문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설교자의 역할이 무엇이고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현대 설교에서 중요시 여기고 있는 청중에 대한 견해가 무엇이며, 마지막으로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지가 중요하다.
1. 성경 본문의 이해
회중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가슴 속 깊히 들려지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분에게 온전히 순종하게 하는 신실함으로 영감된 성경 본문을 열어 보이게 하는 것이 설교자의 중요한 역할이다.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이해하고 강해하는 설교 행위가 목회 사역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유일한 커뮤니케이션이며, 인간을 위한 진리이다. 그리고 가장 거룩하고 고귀한 진리와 빛과 능력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성경을 떠나서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M.패리가 말했다. 이처럼 설교의 원천적인 자료는 신구약 전체를 기르킨 성경이기에 설교자를 말씀의 사자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김준곤은 설교에 있어서 먼저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를 해야 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로서 기독교 신앙생활의 유일한 표준서이며 또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성경의 내용이 너무나 방대하고 심오하여 이해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성경의 전반적인 파악과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성경의 정글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기 쉽다고 토로했다. 그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를 개괄적으로 공부를 해야만 성경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올 수가 있고, 또한 성경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포괄적인 성경에 대한 전체적인 파악을 해야만 방향 감각을 잊지 않게 되고 세부적이고 부분적인 면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게 된다고 했다.
김준곤이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지를 살펴보는 것이 그의 설교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김준곤 목사가 피력하고 있는 성경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의 가치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준곤 목사는 인류의 문화권마다 그 배후에는 중심 사상을 이루고 있는 경전이 있다고 보았다. 성경은 일년 동안에 일억 팔천만 여권이 팔리고 무려 2,000 언어 이상으로 번역된다고 한다. 성경은 영원한 고전이고 사상의 원천이며, 한 나라에 성경이 들어가면 그 나라가 달라진다고 했다. 영국은 위대한 세익스피어를 낳았지만 그 영국인을 만든 것은 성경이라고 빅톨 위고가 말했다. 영국 사회의 개혁이나 미국의 부흥도 성경 말씀의 선포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긴 것이다.
김준곤은 성경 번역이 각국 언어 정립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고 여겼다. 칼빈의 불어 성경 번역이 불어를 정립하였고, 마틴 루터가 번역한 성경은 독일 언어 뿐만 아니라 문학 발전에 기초를 놓았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기독교 전래의 초창기에 한글 성경의 번역은 한국의 언어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우리의 말을 한글로 정착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성경은 영원한 고전으로 사상의 원천이고, 날이 갈수록 새로운 베스트 셀러이다. 성경권 내에 사는 사람들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성경으로 사고 구조의 기초를 확립한 국민들은 후진성을 면하고 번영을 이루게 된다. 성경이 들어가는 곳마다 절망이 소망으로, 어두움이 광명으로, 미신과 무지가 참 신앙으로 변하고,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이 생기고, 과학과 예술과 경제의 부흥이 일어난다. 에스겔 37장에서 성경은 삶의 생기라고도 한다. 이 사실은 통계학적 진리이며, 이 처방은 임상학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며, 또한 증언과 증거로 인정된 권위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이고, 생명이며(요 6:63), 살아있고 능력이 있으며(히 4:12), 성령의 검이다(엡 6:17). 영생의 책, 생명의 책, 구원의 책이다.
존 스토트는 성경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했다. 하나님께서 역사적 구원의 사역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시며 최종적으로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놀라운 구속 역사를 이루어 오셨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수 있도록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영감을 주어 말씀해 오셨다는 것과 신적인 행위에 대한 기록과 설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명문화되었다는 사실들을 믿을 때만이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되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가 하신 일과 하신 말씀이 모든 세대와 모든 지역의 사람들에게 유효한 것이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말씀과 기록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하나로 결속된다.
김준곤은 젊은 대학생들에게 “오색의 신앙을 갖자”라는 설교를 통해서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지에 대한 태도와 자세 그리고 성경의 가치를 강조했다.
성경을 읽을 때 벌이 꿀을 따먹듯 그 성경 속에 자신이 파묻히어 생명의 야식을 파먹는 사람, 날마다 성경을 가지고 성경에서 흥미를 느끼며, 성경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성경 안에서 기도의 응답을 받고, 성경 안에서 감격하고, 성경에서 성령의 역사를 받고, 성경에서 비젼을 받고, 성경을 통해서 걷는, 성경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이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 성경이 크리스챤들의 생활 속에서 먹고 마시는 피와 살이 되지 않으면 기독교는 힘을 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둘째, 김준곤은 성경의 주제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보았다. 성경은 신․구약 66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600년 동안 3개국 언어인 히브리어, 헬라어, 일부 아람어로 기록된 말씀으로 그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속주이시다라고 말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은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나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를 증거하였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 보았다. 40여명의 기자에 의해 성경이 기록되었지만 저자 안에 내주하신 성령님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고 편집된 책이기 때문에 서로 상충되거나 모순됨이 없이 통일성과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완전영감성과 전적무오성이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만일 이 교리가 무너진다면 다른 교리는 모래위에 세운 성처럼 된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관을 가져야 한다.
성경의 무오성은 모든 사실이 알려졌을 때, 정확히 해석된 원본 성경은 그것이 교리, 역사, 과학, 지리, 지질학에 상관없이 일체의 오류가 없고 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오한 성경에 대한 유일한 논리적 반응은 강해적으로 설교하는 일이다. 이 말은 성경 본문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대로 정확하게, 전부 다 제시하는 것을 뜻한다.
김준곤의 성경관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보수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조선신학교 때 구약을 가르치던 김재준 교수가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오류가 많은 책이라고 가르쳤으며, 칼바르트의 신학사상을 그대로 담습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신학사상에 반대하여 집단으로 자퇴하여 한국 장로교회를 뒤집어 놓은 일대 사건의 주동자이기도 하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딤후 3:16).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는 뜻은 하나님께서 기운을 불어 넣어 이루신 산물임을 가르킨 말이다. 모든 구절에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 넣으셨다는 것을 완전축자영감으로 하나님께서 성경의 말씀을 직접 받아 쓰도록 하셨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성경 기자로 하여금 그들의 용어와 표현을 선택함에 있어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셨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성경 영감의 방법은 유기적 영감으로 하나님은 불완전한 인간이 성경 기자들을 보호하여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그러면서도 인간 기자의 문장 스타일과 단어와 개성이 뚜렷하게 활용되도록 하셨다. 성령의 충분하고 충족한 감화가 성경의 모든 부분과 문자들에 미치어 누락되거나 잘못된 것이 조금도 없다.
존 스토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여기셨으며 다루셨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한 증거로 여겼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은 무오하다고 가르쳤음을 주저없아 말했고, 예수께서 구약을 그렇게 자주 인용하신 사실은 구약의 무오성에 대한 충분한 증거라고 말했다.
생명의 양식이며 영혼의 보고인 성경의 그 원소와 광맥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이 없는 기독교는 존재할 수가 없고 예수가 없는 성경은 무의미하다. 기록된 말씀과 살아있는 말씀과 함께 해야 한다. 기록된 말씀은 성경이고, 살아있는 말씀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여 구약은 바라보는 예수이고, 신약은 돌아보는 예수이다. 다시 말하자면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고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취이다. 따라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다른 내용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김준곤은 “성경을 배우는 학생이 되자”라는 설교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있기에 성경을 꼭 읽어한다고 강조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린 유럽이나 니이체와 같은 개인이 역사한 나라는 타락한 가인의 후예의 길로 가게 된다고 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성경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를 이야기 하고 있는가?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누구입니까? 다시 한번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시다. 예수는 과연 어떤 분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린 유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미치게 됩니다. 성경에 있는 그리스도를 송두리째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하는 사람은 니이체처럼 미치게 됩니다.
셋째, 성경의 권위는 성경 그 자체에 기인하고 있으며, 이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계시, 영감, 조명과 정경의 4가지 교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존 스토트는 성경의 권위를 성경 자체가 가지는 능력과 비중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에서 나온다고 정의했다. 그는 계시와 영감에 기초한 성경의 권위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이므로 성경은 인간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권위를 전달한다고 보았다.
김준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계시로서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계시의 뜻은 감취었던 것이 열리어 나타난 것을 의미한 것으로 계시의 기본 개념은 계시를 보는 자가 열어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자가 열어 주어야 보는 자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김준곤 목사는 계시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시지 않는다면 인간 스스로의 철학적 사변이나 과학적 탐구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으로 해석했다. 지능지수가 아인슈타인의 100배가 된다고 해도, 전 인류의 지식과 지혜를 다 동원해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지 않는다면 결코 알 수 없는 절대 비밀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거나 나타내는 일에서 주도권을 쥐신 것을 계시라고 존 스토트가 말한 것처럼 김준곤은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신 것 이상은 모르고, 그것을 계시라고 했고, 이 계시는 감추인 것을 열어서 보여 주시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절대적이고, 영원 속에 계시고, 하나님은 창조주시기 때문에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사를 통해서 성경을 계시하시고 역사적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에 예언한 대로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해 준 것이 기독교의 구속의 도리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특별한 관심과 사랑, 구속의 은총과 자비는 일반계시로서 나타내시지 않고 특별 계시로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심은 주로 족장에게 되어진 계시이고, 예언과 이적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그 최고 정점을 이루었고, 이 모든 계시의 사실들은 기록된 말씀인 성경으로 전승하게 된다고 했다.
김준곤은 “존재의 두 영역을 사는 비결”이란 설교에서 계시에 대해 개혁전통적인 견해를 가지고 젊은 대학생에게 설교할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요, 성경은 하나님과 동일함을 말한다고 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과학이나 철학을 가지고 알 수 없었던 전혀 비밀스러운 것을 인간에게 특수한 방법으로 계시해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신 말씀이고, 성경은 기록된 말씀입니다.
김준곤은 계시는 감추어져 있던 것을 열어 보여 주는 것이고, 영감은 성경 기자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기록할 때 오류와 누락에서 보호하고 감독하여 정확하게 기록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계시 기록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감독하고 간섭하신 것이다. 성경은 성령 받은 거룩한 자들인 성경 기자들이 기록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 기자들을 기계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유기적으로 동작하셨다. 성령께서 죄인인 성경 기자에게 영감을 주어 성경을 기록하게 하여 무오한 성경이 기록되었다고 했다.
영감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인간에게 오는 매개물이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벧후 1:21) 과정이다. 영감은 축자적이다. 성경 저자의 생각이나 개념뿐 아니라 성경의 문자 자체가 영감되었다.
존 스토트가 로잔언약에서 성경은 오류가 전혀 없으며 신앙과 실생활의 유일 무오한 법칙이며 유일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신 구약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과 진정성 그리고 권위를 가진다고 확신한 것처럼 김준곤 목사도 순수한 영혼의 원색적 언어로 기록된 성경은 엄마, 아빠, 사랑 등의 원시적 언어처럼 영원성이 있어 결코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는다고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주장을 편 것이다. 김준곤 목사는 성경의 영감성과 무오성을 함께 인정하지 않는다면 성경의 절대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 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영감은 신약성경이 완성되면 끝나고 그 다음에 조명이 있다고 김준곤 목사는 영감과 조명과의 관계성을 설명했다. 조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경을 깨닫고 이해하도록 마음을 비추시는 성령의 역사이다. 우리는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 계시에 조명을 체험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성령의 조명으로 영적 진리에의 이해와 영적 지각을 갖게 된다. 성경의 원 저자는 성령이시므로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결코 이해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의 구절을 인용하였다. 김준곤은 누가복음 24장 45절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의 구절에서 “깨닫게 하시고”를 영적 분별과 이해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그가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요 14:26), 에디오피아 내시도 성령의 조명으로 빌립이 성경을 해석할 때 깨달았던 것으로 보았다(행 8:26-39).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이 성경을 영감하셨을 때 계시를 받았다. 우리는 성령이 성경 말씀을 우리를 위해 살아나게 하실 때 조명을 받는다. 조명은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의 진리를 성령이 영적인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명은 계시과정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다.
김준곤은 성경과 성령을 뗄 수 없는 관계선상으로 두고 민족의 비젼화를 꿈꾸었다. 성령은 그에게 있어서 구속의 영이요, 예수의 영이요, 성경의 선생이기에 “기도보다 성령보다 앞서지 말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는 “민족을 위한 기도”라는 주제로 성경과 성령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하나님께서는 옛날에 죽은 우리의 영에다가 새로운 영을 주셨습니다. 그 영은 아담과 하와에게 주었던 것보다 훨씬 우수한 하나님의 영입니다. 십자가에서 구속한 영입니다. 아들의 영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통하는 아들의 영에 함께 계십니다. ........... 아무리 신학을 공부했고 성경을 많이 알아도 성령의 가르침을 우리의 영이 받지 않을 때는 영의 눈이 어둡습니다. 설교나 신학 강의를 들어도 도무지 모릅니다. 영은 영에게 직접 가르칩니다. 물론 말씀없이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성령도 말씀으로 가르치십니다.
또한 “다르게 살길이 없는 사람”이란 설교에서 성령과 성경과 나의 순종 생활이 일치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 말씀없이 성령은 역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 속에서 사는 사람, 성경에서 피와 살을 먹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고 말씀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속에서 사는 사람, 성경 속에서 사는 사람, 성경을 먹고 마시는 사람이 예수님의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2. 복음 전도자로서의 설교자
신학자 니버는 “복음은 사회를 변화시킨다”고 하였다. 사회를 하나님 중심문화로 창조하는 빠른 길은 지성인들이 복음으로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복음으로 대학 문화를 바꾸는 운동을 하신 분이 한국 C.C.C. 운동을 주도한 분이 김준곤이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고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했다. 이처럼 김준곤을 가르켜 바울이 진리를 가르칠 때 아버지와 같은 스승으로 제자들을 가슴에 품고 눈물로 교육시킨 스승과 같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김준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설교 메시지의 중심이며, 예수님의 선포가 모든 설교의 출발점이며 내용이고 대상으로 보았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후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했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도들의 설교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인 케리그마이므로 설교자는 당연히 케리그마를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준곤은 이러한 케리그마의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자리잡고 있어야 하고, 또한 그것이 선포되지 않는 설교는 성령의 능력도 나타낼 수가 없고 그 어떠한 의미도 없다고 십자가의 복음을 주제로 케리그마를 강조했다.
일본 교단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예수를 전도할 시대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회를 고쳐야 할 시대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현대는 전도의 개념이 달라져야 한다고 강단에서 하는 말이나 기독교 서적이나 기독교 운동이나 이 모두가 사회 운동인지, 정치 운동인지, 싸우는 운동인지, 도대체 무슨 운동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전도자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부활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과 화해하는 그 화해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김준곤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어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우리 민족은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삼는다. 우리 민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주로 삼는다. 성경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신앙과 행동의 표준으로 본다. 우리 민족의 수입의 십일조는 선교하는 일에 바친다. 우리나라 국기는 십자가로 한다는 사항을 만들어 놓고 사상 최초의 전례 없는 기독교 국가가 되어 세계를 선교하는 꿈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민족 복음화의 비젼을 강력하게 제시했다.
우리나라가 최초로 그런 기독교 국가로 탄생된다면 전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로마나 예루살렘에 갈 필요없이 성령의 현장인 예수님이 살아 계신 한국에 올 것입니다. 아마 관광 수입도 엄청날 것입니다. 전세계의 교과서들이 경제 이론을 바꿔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경제는 한국 사람의 신앙 때문에 부흥한 것이라고, 한국 사람의 교육이 잘된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라고, 세계의 교육학 원론이 바뀌고, 경제학 원론도 바뀌고, 정치학 원론도 바뀌고, 사회학 원론도 바뀌고, 세계의 사상을 뒤집어 놓게 될 것입니다. 온 인류를 바로 살게 해 주는 그러한 제2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민족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복음 운동을 하면서 이런 꿈을 꾸어 봅시다.
설교란 지금 이 자리를 향해 아무도 모르게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또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회중들의 개인적인 삶과 공동체가 변화되어 간다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다. 특히 설교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음성을 성육신화되어 회중들에게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따라서 설교자는 파토스를 소유한 자여야 한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갖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삶에 지친 영혼을 향한 열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70년도 초 신학생으로서 남에게 질 수 없는 복음의 열정에 불타던 제자들 중 한 사람인 김성영 목사는 “김준곤 목사님은 복음 전도자의 이상이고 모델이었다”고 회상하면서, 에스플로 ‘74대회 준비 그 당시에 영원한 미소년이신 김준곤 목사님은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었고, 미지의 동경심을 자아내는 신비스러운 전도자, 고독한 선지자의 이미지를 풍겼다. 특히 젊은 지성인들에게는 가슴 설레게 하는 영성의 지도자였고, 복음의 열정이 불타고 있었다고 했다.박하정 장로는 ’민족 복음화‘, ’예수 혁명‘, ’정신사의 강은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 등의 김준곤 목사님의 설교 녹음 테이프를 통해서 그 분의 비전이 담긴 생생한 메시지를 들을 수가 있었다고 했다. 또한 피 묻은 복음에 대한 열정, 민족 구원을 위한 그 분의 간절한 소망을 느꼈다고 했다.
빌 브라잇 박사는 김준곤 목사의 설교 스타일에 대해서, “그는 결코 말을 아끼는 조신한 스타일이 아니며, 많은 한국인들은 그를 굉장한 개인적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학생들의 마음을 녹이는 수려한 언어의 웅변력을 가지고 있고, 그는 정말로 내가 일생에 알았던 가장 비전에 사로잡힌 사람이자 매우 경건하고 헌신된 사람들 중의 한 명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준곤은 요한 웨슬리의 신학사상을 바탕으로 첫 번째의 헌신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해드리는 것이고, 두 번째의 헌신은 학생들에게 전도하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민족의 복음화를 주장하였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전할 사람이 없다. 이는 프랑스를 방문했던 선교사의 말입니다. 근대화의 뿌리이고 기수였던 영국의 웨슬리 부흥도 유럽에서는 이제 불이 꺼져 버렸습니다. 이제 역사의 수레바퀴는 아시아로 향하고, 복음의 촛대는 서양에서 아시아 동쪽의 작은 나라 한국으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이 깨달아야 할 것은 바로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건강상태를 하나님 앞에서 진단받고 민족과 국가 운명의 주권자인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김준곤의 설교는 열정과 헌신을 지닌 전도자적 설교였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헌신과 열정을 지닌 그런 전도자이라고 확신하면서 심상법 교수는 자신의 설교에 대한 첫 교과서가 되었다고 말했다.
김목사님은 목회자로서의 저에게 설교학을 가르쳐 주신 스승이시기도 합니다. 김목사님의 설교는 언제나 알아듣기 쉬운 일상의 언어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때로는 사자후를 토하며 설교하셨고, 때론 구수한 이야기꾼으로 말씀하실 때 우리는 시간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의 설교에는 한이 어려 있으면서도 확신과 희망에 찬 설교였고 언제나 헌신된 기름으로 불붙는 설교였습니다. 이 모든 모습이 고스란히 저의 설교의 품새로 형성되었다고 저는 자부합니다.
김준곤의 세계 선교와 민족을 향한 비전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고 변함이 없었다. 그것은 구원과 성령 체험 이후에 얻어지는 것으로 비전과 헌신이다. 그의 설교는 피를 토하는 것 같은 열정과 확신을 가득 차 있었다.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고난을 겪은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동안 나는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다는 메시지를 홍정길 목사의 가슴 속 깊이 심어주셨다고 말했다.
목사님의 설교는 이론과 지식과 관념이 아니라 성육신된 것입니다. 목사님이 목회를 하지 않고 대학생 선교에 뛰어든 것도 세계 선교와 민족 복음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젊은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민족을 그리스도에게 드리고 세계를 복음화하려는 차원 높은 전략이었습니다. 생명을 걸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여 이 민족에게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고 외치시는 목사님의 메시지는 영원히 저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지금까지 저의 목회와 삶에 시금석이 되어 있습니다.
김준곤의 설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오직 성경 중심과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 오직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오직 민족의 복음화와 세계의 선교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설교의 주 대상이 청년들과 대학생이었음을 미루어 볼때 설교의 내용이 항상 미래 지향적이며, 예언적이며 비전을 심어주기 때문에 복음전도 설교자라는 사실이 인정된다.
3. 설교자의 소명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와 사무엘과 선지자들을 부르셨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과 다소 사람 사울을 부르셨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아서 보냄을 받은 사람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자들이었다. 그 분은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들로 하여금 그 분을 섬기도록 부르신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 전도를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이러한 소명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으로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다른 많은 요소들로 인하여 다양한 형태로 부여받는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는 가장 명확하게 가시화되는 것은 바로 설교자를 통해서이다. 이와같이 설교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중요하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르지도 않은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설교자의 자리에 세워진다면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회중들에게 있어서도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목회자로나 설교자로 나선 일이 스스로 한 결단인지 막연한 동경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결단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목회자의 중요한 자질은 외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내면의 세계로 찾아오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소명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이어야 하고, 설교자 또한 소명 지향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소명이 있어야 한다.
일제시대 소만 국경지역인 마창이라는 화전민 마을에 잠시 피신해 있었을 때, 매일같이 교회에 가서 밤을 세워 기도를 했다고 한다. 살려만 주시면 앞으로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처음으로 소명을 하였고, 동시에 일본을 망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 때에 김준곤은 삶이란 죽음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죽음의 영점에 서 있는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고, 이 모든 수난이 주님의 뜻으로 자신을 향한 사랑과 주님만 사랑하게 하는 영원한 첫 사랑의 연습이라고 진실한 고백을 했다.
나는 나의 장례식 꿈을 꾼 일이 있다. 하관식이 끝나고 식구들이 헌토를 할 때 깨났다. 관 속에 있던 나, 그때 나는 가장 가난한 마음의 영점에서 내 양심과 내세와 하나님 앞에 피 묻은 예수의 십자가를 붙잡았다.
팔머는 홀로 있음의 시간을 통하여 자기 내면에 소리를 듣는 것이 우리의 소명임을 강조했다. 소명은 내가 살아가면서 이루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말하기 앞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주는 내 인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되는 문제로 요약될 수 있다고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 고향집 지도섬으로 피난을 갔다가 지역공산당에게 체포되어 아버지와 아내가 목전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자신도 학살 현장으로 끌려가다가 21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이때 김준곤은 주님으로부터 민족 복음화하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한다.
저는 비탄에 잠겨 하나님을 의심하기 시작했읍니다. 저의 영적인 생명도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그런데 사망의 골짜기에서 주님은 저를 부르셨읍니다. 그것도 제 가족을 살해한 바로 그 공산당들에게 당신의 증인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전까지 저는 절대 헌신하지 못하였읍니다. 이때서야 비로소 저는 저의 생애의 전폭을 주님께 드렸고 하나님께로부터 한국의 민족 복음화를 저의 개인적인 비젼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벧전 2:20-21)”라는 말씀으로 그들을 보복하지 않으셨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부당한 고난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의 피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이다.이와같이 김준곤은 고난을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다.
1962년 2월 삼각산의 기도처에서 민족 복음화를 위한 특별 기도를 하였다. 그날 밤에 성령의 감동하신 가운데서 민족 복음화을 위한 환상을 받아 민족복음화운동의 비전이 비로소 태동하게 되었다.
어머니처럼 하나밖에 없는 내 조국. 어디를 찔러도 내 몸과 같이 아픈 내 조국. 이 민족 마음마다, 가정마다, 교회마다, 사회의 구석구석, 금수강산 자연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게 하시고 뜻이 하늘에서 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4. 설교자의 영성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신의 소명과 관점을 가지고 다차원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목회자의 모든 삶(갈 5:16, 25)이 바로 영성이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영성은 생명이다. 설교 강단에서 설교자는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타오르고 영혼을 향한 애틋한 사랑의 불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어느 심리학자가 인간은 거듭나기 위해서 창조된 존재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예수님의 피에 의해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고, 그로 인하여 인간의 본성이 변화될 필요가 있다고 김준곤은 성령에 의해 새로워져야 함을 강조했다.
만물 중에 가장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렇게도 악할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동기가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동기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동기가 잘못되었습니다. 너무도 자기 자신의 욕심으로 꽉 차 있습니다. 깊고 깊은 동기가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언어가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깊은 동기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김준곤은 성령 충만의 표본으로 사도행전을 최초의 교회, 최초의 크리스찬, 그리고 표본적인 교회, 표본적인 목사, 표본적 크리스찬의 행전이라고 제시하면서 목회자들에게 성령 충만함을 강조했다.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이 전무하였다. 성도들은 날마다 모여 한 덩어리가 되어 교제하고 예배드리고 모든 소유를 서로 통용하고(행 4:34-37) 어디서나 반대를 받았으나(행 28:22), 담대히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를 전했다. 성령의 열풍이 불어 예수로 예루살렘이 꼭 차게 했고(행 5:28) 천하를 어지럽힌 사람들이 소동하고 기이히 여기며 반대했으나 속으로는 모두 칭송하였으며(행 2:47), 3,000명씩 호개하며 성령 충만한 사도를 아무도 가볍게 대할 수 없었다.
열정이 넘치는 설교자의 눈에는 회중이 한없이 측은하여 연민의 정이 흐르게 된다. 예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 백성이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죄와 사망 가운데서 방황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마 23:37).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도 눈물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행 20:31). 진실로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하며, 누군가가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지옥 백성으로 정죄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진정한 복음 전도자의 눈에는 결코 눈물이 말를 새가 없다. 위대한 부흥설교가 무디는 눈물이 없이는 결코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준곤은 가슴에 타오르는 예수의 사랑의 불길을 사모하는 영성이 깊은 복음 전도 설교자이다. 예수 칼럼에서 내 가슴 한복판에 십자가를 세우고 속죄에 불타는 사랑을 담아서 그 불로 하나님을 불같이 사랑하고, 이 불로 사람을 불같이 사랑하자고 했다. 또한 내 가슴에 타오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불길로 이 더러워진 거리 구석 구석을 태우자고 했다.
설교자의 인간성은 성령님께서 설교자의 삶에 부어주신 은사에 실행력있는 손과 발을 붙여주어 복음이 사람의 귀와 마음에 도달하게 한다. 설교자 자신의 영성이 설교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은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으로 저자는 바로 성령님이시다(딤후 3:16). 성경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를 성령님께서 감화 감동시키지 않는다면 설교자는 그 말씀을 바로 깨닭을 수가 없고, 또한 그 마음이 뜨거워질 수도 없다(눅 24:32). 그러나 성령님께서 설교자에게 감동을 주시면서, 성경을 쉽게 풀어 주실 때, 그들의 내면 속에서 뜨거움을 경험하게 되고, 그 결과 열정이 불타오르게 된다. 설교자와 성령님과의 깊은 연관성을 가질 때 말씀 안에서의 성령님의 역할을 설교자를 통해서 드려내야 하는 것이기에 설교자는 성령의 능력과 통제 아래 있는 자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은 설교란 정열에 불타는 인간을 통해 나오는 신학이라고 하면서, 그 정열은 바로 성령 임재의 결과로 변함없이 있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회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에 있어서 설교자와 성령님의 능력과의 관계를 강조했다.
김준곤은 캠퍼스 선교와 민족 복음화를 위한 지도자를 길러 낼 못자리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시고 1976년부터 정동 학생 채플을 시작하셨다. 학생 채플을 시작하기 전에 한얼산 기도원에 가서 함께 3일간 금식 기도를 드렸고, 박하정 장로는 기도원에서 3일간 같이 기도하면서 김준곤 목사의 학원과 민족 복음화를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기도를 보게 되었다고 박하정 장로가 말했다.
김준곤은 “과거는 하나님께 묻어 버리고, 미래는 주님께 맡기고, 오늘은 성령 안에서 살자. 성령보다 기도보다 앞서지 말자”는 말씀으로 성령님의 일하심을 위한 기도의 능력을 중요하게 여겨셨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자로서의 그의 영성을 발견하게 된다. 설교자가 내면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깨달을 때 말씀의 방향을 잡고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성령님 그분의 뜻을 분명히 전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하자면 설교자와 성령님의 깊은 연관성을 가질 때 말씀 안에서의 성령님의 역할을 설교자를 통해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김준곤은 크리스찬의 삶은 기도를 통해서 그 응답으로써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이루어 주시는 일이라고 성령님의 사역을 강조했으며, 하나님의 영이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기도와 믿음을 통해서 초자연적으로 살게 하시는 것이라고 했다.
성령은 인간의 지, 정, 의나 진, 선, 미를 닦고 키우고 승화시키고 연장시킨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한 끝까지 다하고 영원을 다해도 획득될 수 없는 절대타자, 절대타력이다. 차력이니 신통술이니 정신술이니 하는 말이 있다. 성령은 이런 것과도 전혀 다르다.
주선애 교수는 설교자의 영성은 기도 생활과 경건 생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했고, 김성규 목사도 기도의 능력을 아는 지도자가 바로 김준곤 목사라고 했다. 김준곤은 탁월한 지성인인 동시에, 기도가 얼마나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를 아는 분이고, 말이나 지식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시는 분이시기에 한국 교회의 기도운동에는 언제나 김준곤이 중심에 있었다고 했다.
그는 영력의 사람입니다. 그의 조리 있고 능력 있는 말씀 선포는 그의 많은 기도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늘 금식을 하시는 것은 다른 사람이 따를 수 없는 점입니다. 요새 와서 우리 여성들이 각성을 위한 운동을 계획하면서 자문을 구했더니 그저 금식기도를 해야 한다고만 강조하십니다. 그 노구에도 불구하고 강행하는 금식 기도생활이 그가 그토록 곧고 줄기차게 사역을 이끌게 한 원천임을 압니다. 때로는 수도사 같은 인격의 향기를 느끼게 하는 것도 그의 끊임없는 기도 생활과 침묵하는 경건 생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같이 김준곤은 금식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강조하고 있다. 설교자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바라면서 오직 기도 속에서 우리들의 삶 가운데 균형 잡힌 설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루돌프 보렌은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영으로 존재해 계실 때 하나님의 말씀은 영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영은 말씀의 사건인 것이다. 이것을 설교자는 섬기는 것이라고 보았다.이러한 주장대로 김준곤은 설교자로서 영적으로 민감하고 성령님에 매달리는 기도생활을 온 몸으로 실천하셨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설교함에 있어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을 때, 그는 “내가 이 복음을 올바르게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골 4:4). 바울의 이 기도는 하나님의 권능에의 의존과 설교자의 책임의 올바른 균형을 반영하고 있다.
5. 설교자의 권위
하나님께서 복음의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자신에게로 불러 모으신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신적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딤후4:2). 설교자가 성경말씀을 바로 풀어 전할 때 비로소 그의 권위를 갖는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풀어 해설하고 적용하는 강해설교가 “신적 권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설교형태”라고 해돈 로빈슨이 말했다.
페터 T. 포사이드는 “복음서를 포함한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받아 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를 기록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신약성경의 케리그마적 성격을 확고하게 붙잡았다. 설교 강단에서 설교자는 권위를 가지고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이때의 권위는 설교자의 인격에서 나온 권위이다. 참된 권위는 의지와 믿음, 결단과 헌신에 관계되는 도덕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경건이고 복음이며 하나님의 재촉이다. 설교 강단의 인격적 권위는 신적인 인격의 권위이다. 그것은 외적인 권위이지만, 동시에 우리 안에 살아계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권위이다.
설교자가 성경의 권위를 앞세워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 한다면 설교의 권위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을 받았지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다. 성육신은 우리 안에서 계속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결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설교자는 다만 말씀의 사역자들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받은 자로 모든 사역을 위해 전적으로 성경의 공급을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설교자의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선지자의 권위가 아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고 자주 쓰이는 빌리 그레이엄 박사가 적절한 구절인 성경은 말합니다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진짜 권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있게 선포하는 설교자는 그 말씀의 권위 아래 있어서 말씀의 권위에 자신에 자신을 복종시켜야 한다. 또한 설교자가 다루고 있는 본문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이 본문이 그의 영혼에 얼마나 강하게 말씀했는가의 강도 여부에 의한다. 설교자의 인격이 성경의 빛으로 가리워지고 그의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에 잘 기워질 때 설교자의 권위가 바로 서는 것이다.
권위 있는 설교가 반드시 권위적일 필요는 없다. 권위적인 설교는 성경의 말씀 대신에 설교자의 말로 청중을 억누르려한다. 반면에 권위 있는 설교는 성경 말씀의 권위 아래에서 혹은 그 권위와 함께 또는 그 뒤를 따라서 청중에게 설교자를 제시할 뿐이다. 또한 설교자는 부지불식간에 설교의 권위에 꼭 의지하여 설교할 수도 있으며, 그 과정이 참된 신념과 자신감이 넘쳐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의 권위가 존중되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조직사회에서 지도자들이 행사하고 있는 지도력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강제적이며 보상적인 권위에 근거를 하고 있다. 그러나 학문의 공동체나 교회내에서의 지도력은 전문적이며 준거적인 권위가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전문적인 지식 때문에 그 사람의 말을 존중하고 그를 따르게 되는 권위가 전문적인 권위이고, 준거적인 권위란 나도 이분처럼 되었으면 하는 인격적 존중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그 사람의 지도력을 인정하는 권위이다. 김준곤은 전문적이며 준거적인 권위를 가진 진정한 리더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C.C.C.라는 조직을 운영하면서 탁월한 기독교 정신의 리더십을 보여 주셨다고 박형용 교수가 증언했다.
김준곤은 메시지를 통해서 학생들에게 스스로 자발적으로 일어나게 하고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겸손한 인격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고, 주관적이지 않고 믿음의 객관적이고 인격적인 내용을 선포하게 한 복음전도 설교자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 장로교 선교사로 있었던 사무엘 모펫은 한국 교회의 극적인 성장에 김준곤의 주요한 역할을 인정했다.
지금 대학 캠퍼스에 복음이 잘 전파되어 있는 것은 전적으로 김준곤 목사님의 수고 덕입니다. 젊은이들은 한국 기독교에서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매우 많은 일을 성취하고 대형집회들을 조직해 온 사실에 대해 지나치게 말을 아낍니다. 그는 명백히 매우 많은 시간을 말씀 묵상과 기도하는데 보냅니다. 그 속에서 그는 자신의 영적 에너지를 얻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조직력이 있거나 분주히 움직이는 타입은 아닙니다. 김준곤 목사의 설교 스타일은 결코 말을 아끼는 조신한 스타일이 아닙니다. 많은 한국인들은 그를 굉장한 개인적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으로 압니다. 그는 학생들의 마음을 녹이는 수려한 언어의 웅변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빌 브라잇도 김준곤 목사는 정말로 내가 일생에 알았던 가장 비전에 사로잡힌 사람이자 매우 경건하고 헌신된 사람들 중에 한 명이라고 이야기했다.
설교자의 메시지는 간청하는 종의 말이 아니라 적법한 권위를 가진 사람의 강권하는 말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도덕적인 권위여야 한다. 설교자의 메시지는 단순히 얼마간의 반향이나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데 만족해서는 안 되며, 행동과 순종과 희생을 요구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김준곤은 1960년도 후반기 사역에서 많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지만, 1970년도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정동에 C.C.C.회관을 짓게 되어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새로 지은 C.C.C.회관에 채플을 세워 주로 학생들을 모아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 주일 예배가 일반 교회가 아니고 단순히 학생들을 위한 채플이다 보니 재정적인 어려움이 항상 따라왔다. 어렵게 키워 놓은 학생들은 다른 교회로 가게 되면, 다시 캠퍼스로 나가 새 학생을 전도해서 데려다가 훈련시키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는 우리 C.C.C.가 안믿는 학생들을 전도해서 훈련시켜 교회로 보내 주는 나룻배와 같다고 했다. 학생 채플대신에 정식으로 교회를 세워서 거기에서 나오는 유익을 직접 누리지 않고 끝까지 이러한 유혹들을 물리치시고 나룻배 역할을 감수하셨다.
우리도 학생 채플만 하지 말고 정식으로 교회를 세웁시다. 그러면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려고 사람들이 그름같이 몰려 올 것이고 재정도 튼튼해지고 그러면 우리가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건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그건 그렇다고 말씀은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실천에 옮기지를 않으셨습니다. ............ 저는 그때 당시에는 나름대로 참 지혜로운 건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은 지혜로운 건의가 아니고 변화산에서 초막 셋을 짓고 거기에서 안주하자고 했던 베드로의 건의와 같은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결국 이것을 받아드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설교 사역에 있어서 설교자의 도덕적인 존재로서의중요성을 권면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여함이라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3:17; 4:2상)”.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의 존재로부터 흘러나오고, 당신의 행동은 당신의 존재로부터 드러난다는 철학적인 경구와 같이 설교자가 어떤 사람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김준곤 목사는 인간적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유혹을 물리치시고 초지일관 순수한 학생 복음화 운동에 헌신하신 복음전도 설교자로서의 도덕적인 존재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