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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여행 다섯 번째 시간
▶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회복의 첫째 날
첫째 날 ⇒ 빛의 날이었고 그 빛은 「첫째 날의 빛」이라고 함.
넷째 날 ⇒ 하나님께서는 광체(光體), 즉 해, 달, 별들을 지으심.
하나님의 회복이 또 다른 창조를 포함하여 여섯째 날에 완성됨. 이 엿새의 날들은 하나님의 원초의 창조를 위한 것이 아님. 하나님의 원초의 창조는 창세기 1장 1절에서 완성됨.
창조 이후 1장 2절의 어디에선가 큰 변동이 일어났고 하나님이 오셔서 우주를 심판하심. 심판 이후 오랜 동안의 시간이 흐름.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시어 회복과 함께 또 다른 창조를 시작하신 것임.
또 다른 창조를 포함한 이 회복은 엿새 동안에 완성됨. 이 엿새는 두 부분으로 나눔. 첫째 날의 빛은 첫째 날 빛이며, 넷째 날의 빛은 넷째 날 빛이 됨.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빛을 부심.
넷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들을 회복하심.
첫째 날과 넷째 날의 빛은 각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의 시작을 나타냄.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히 생명이 중심이었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지으신 모든 것의 중심은 생명이었으며 생명을 위한 것이었음. 빛이 필요함.
빛과 생명은 언제든지 짝을 이룸. 반대로 흑암은 사망과 함께 짝을 이룸.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기 전에는 흑암이 죽음의 물을 덮고 있었음. 이것은 흑암과 사망이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임. 사망은 추상적인 것임. 아무도 볼 수 없는 것임.
성경은 죽음을 의미하기 위하여 물을 사용함. 바다의 깊은 물은 죽음의 그림자임.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기 전에는 오직 두 가지, 즉 흑암과 사망만이 있었음.
하나님은 생명과 빛이시며 사망과 흑암과는 정반대이심.
빛이신 하나님은 흑암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그 흑암을 몰아내려고 오셨음. 생명이신 하나님은 사망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망을 삼키려고 오셨음.
성경을 읽을 때 과학적인 견해에서 보지 말고 하나님의 견해를 취할 것. 하나님의 견해에서 읽는다면 매 구절마다 빛과 생명이 가득할 것임. 왜냐하면 성경은 빛과 생명이신 바로 그 하나님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
빛과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흑암과 사망을 몰아내기 위해서 오셨음.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그 다음 하나님께서는 빛을 어두움에서 나누셨음.
그 나뉨이 흑암에게는 한계가 되었음. 그러나 이것은 반쪽뿐임. 아직 어두움의 일부가 남아 있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 어둠의 부분을 몰아내기 위하여 역사하고 계시며 결국 하나님은 요한계시록 21:25절 “거기는 밤이 없으리라.”고 선포하는 거기까지 도달할 것임. 언젠가 다시 밤이 없는 날이 올 것임.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빛을 부르셔서 어두움에 한계를 정하심. 같은 원칙으로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물에 한계를 정하심. 예레미야 5장 22절에서 하나님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으셨음.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바다에 마른 땅이 드러나 땅과 바다를 나뉘게 했음. 하나님의 회복의 창조에서 첫째 날 이후 반은 빛이었고 반은 어두움이었음. 셋째 날 이후 반은 뭍이었고 반은 물이었음.
하나님은 계속 나머지 반의 밤과 나머지 반의 죽음의 물을 몰아내기 위해 역사하고 계심. 요한계시록 21:25절과 1절에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바다가 다시 있지 않을 것임. 요한계시록 22:5절에 새 예루살렘에는 다시 밤이 없을 것임. 이 말씀은 흑암과 사망이 모두 완전히 없어지리라는 것을 의미함.
당신의 상태는 어떠한가?
당신에게는 얼마나 많은 흑암과 사망이 있는가?
이 질문은 주님께 대답해야 함.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끊임없이 자란다면 언젠가 밤이 없어질 것임. 스물 네 시간 동안의 낮이 있을 것임. 내 속에는 죽음의 물이 없음. 내 생활 중에서 내가 어디 있든지 어느 모퉁이, 어느 거리에 있든지 내겐 마른 땅만이 있을 뿐임. 우리는 모두 이렇게 되어야 함.
이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넷째 날의 빛이 필요함. 첫째 날의 빛은 우리의 어두움과 우리의 사망을 절반만 몰아 낼 뿐임. 그러나 넷째 날의 빛은 우리를 또 다른 세계, 즉 밤과 바다가 없는 세계로 인도해 줄 것임.
성경에 나타난 모든 진리들은 창세기 1장에 씨로 뿌려졌음. 창세기 1장 14절에서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은 성경에 계시된 놀라운 빛의 근원임. 생명의 원칙에서 볼 때 넷째 날의 빛은 생명을 낳기 위함이 아니라 생명을 자라게 하기 위함임.
셋째 날, 즉 첫째 부분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마른 땅을 불러내시고 뭍을 물에서 드러나게 하신 후 생명이 생겼남. 그 때에 빛, 공기, 땅과 같은 생명을 낳는 데 필요한 것들이 있었음. 마른 땅이 드러난 후 식물의 생명이 나왔음.
하나님은 둘째 날에는 기뻐하지 않았지만(둘째 날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이 없음)그분은 빛과 공기와 마른 땅과 모든 식물의 생명을 보신 셋째 날에는 분명히 기뻐하셨음. 하나님은 풀과 채소와 나무들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음. 그 전에는 땅 위에 창조된 생명이 없었음.
식물로부터 시작하여 생명이 나타났음. 그러나 그 생명은 가장 낮은 생명, 즉 가장 낮은 의식을 가진 생명이기 때문에 걸어갈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음. 하나님이 백합화에게 수천 번 말씀하신다 해도 백합화의 생명은 가장 낮은 생명이기 때문에 그분에게 대답할 수 없음. 생명은 주어졌지만 그 생명은 더욱 자라야 함.
이 생명을 자라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 넷째 날의 빛. 첫째 날의 빛은 생명을 낳기 위한 것이며 넷째 날의 빛은 생명을 자라게 하기 위한 것. 넷째 날에는 광체(光體)만이 준비되었을 뿐 다른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음.
많은 젊은 사람들이 첫째 날의 빛은 받았지만 과연 그들이 그 넷째 날의 빛 속으로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는 의심스러운 일임. 넷째 날의 빛은 첫째 날의 빛과는 다른 것임. 첫째 날의 빛은 구체적인 것이 아니지만 넷째 날의 빛은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것임.
이제 우리는 해와 달과 별들이 무엇을 예표 하는지 살펴볼 것임.
1. 해-그리스도와 성도들
해는 그리스도 자신과, 왕국에서 해와 같이 빛날 성도들을 가리킴. 말라기 4장 2절에 “의로운 해”라고 말함. 그리스도의 광선은 죽음을 치료함. 그리스도의 광선(光線)이 없으면 죽음이 있을 뿐이지만 그리스도의 광선이 비췰 때 죽음은 치료됨.
누가복음 1장 78~79절 ⇒ 그리스도의 나심 ⇒ 우리에게 임한 돋는 해.
마태복음 4장 16절 ⇒ 그리스도께서 갈릴리 바다에 오셨을 때 그가 큰 빛으로 나타나셨음.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음.
빛이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비취었음. ⇒ 그 빛은 주 예수님
마태복음 13장 43절 ⇒ 그 때에 의인(이기는 성도)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장래 올 왕국)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하셨음.
우리 ⇒ 지금 하나의 별이 될 수는 있음.
해같이 빛나기에는 아직 이름. 그 회복의 날까지 기다려야 함. 많은 성도들이 장차 왕국에서 해같이 빛날 것임. 오늘 그리스도는 해이시며 이기는 성도들 또한 장래에 해같이 빛날 것임.
2. 달-교회
달 ⇒ 교회를 말함.
요셉의 꿈에서 그의 아버지는 해에 비유. 어머니는 달로 비유. 그의 형제들은 별들로 비유됨.
창세기 37: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 하더이다 하니라.”
교회 ⇒ 신부(新婦).
교회 ⇒ 그리스도의 아내.
달 ⇒ 교회의 예표.
아가서 6:10 “아침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1장 20절 “교회들은 등대”(燈臺-원문 참조).
등불은 밤에 만 필요한 것. 요한계시록 1장 20절의 말씀은, 교회 시대는 낮이 아닌 밤임을 밝히 증명해 줌. 교회는 등대로서 밤에 비춤. 그러나 등대 자체가 빛을 내는 것이 아님. 빛을 내는 것은 등불임. 일곱 등대는 요한계시록 1장에 있으며 일곱 등불은 4장에 있음. 일곱 등불은 일곱 영(靈).
요한계시록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교회 ⇒ 등대.
성령님 ⇒ 등대로 받쳐진 등불.
성령이 없는 교회는 빛 없는 등대. 그렇게 되면 교회는 하나의 거치는 돌이 되고 맘. 그러나 빛을 내는 등불이 있는 등대는 놀라운 것임. 우리는 등대인 교회를 가질 수 있음.
그러나 등불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우리에게는 등불이 필요함. 등불은 등대 위에 있어야 하기 때문. 교회 시대인 오늘, 일곱 영의 빛을 가지려면 교회를 가져야 함. 일곱 등불들은 일곱 등대 위에 있는 것임.
교회 시대 ⇒ 밤.
밤에는 햇빛, 즉 그리스도의 빛을 직접 얻을 수 없음.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반사하는 빛이 필요한 것임. 햇빛을 반사하는 달이 필요함.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는 교회가 필요한 것임. 교회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빛을 보기 어려움. 우리가 교회에 올 때, 그리고 교회가 기울지 않았을 때, 우리는 분명 빛을 받을 것임.
역사상 교회가 기울었던 긴 기간이 있었음. 달이 기울었을 때, 그때는 바로 별들이 빛나기 가장 좋은 때임. 암흑시대 ⇒별들이 빛이 남.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 하나의 별. 루터 이전과 이후에도 많은 위대한 별들이 빛을 냄. 달이 기울었었기 때문.
200여 년 전 ⇒ 진센돌프(Zinzen-dorf)와 모라비아(Moravian)의 형제들.
비록 그들은 초승달이었음. 사람들은 그 당시에 교회가 있었음을 기억함.
그 후 한 세기가 지나 영국에서 형제회(Brethren)가 일어남. 초승달은 거의 보름달로 발전을 함. 빌라델비아 교회가 거기에 있었던 것임. 그러나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달이 차면 기운다는 속담이 있음.
19세기 후반기와 27세기 초엽에 이르는 약 70여 년에 걸쳐서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펜 루이스 부인(Mrs. Penn Lewis), 심프슨(A.B. Simpson)과 같은 몇몇 다른 별들을 볼 수 있음. 그 당시 별들은 있었지만 달, 즉 교회생활은 없었음. 달은 기울어 있었고 별들이 빛을 낸 것임.
오늘 우리에게는 보름달은 안 된다 하더라도 적어도 기울지 않은 초승달이 있음. 우리는 교회들 가운데 영적 거인들을 기대해서는 안 됨. 만일 거인들이 있다면 그것은 달이 기울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 달이 차고 커지는 한, 별들은 그리 드러나지 않는 법임. 달이 있을 때 우리에게는 별들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게 됨.
우리는 지금이 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함. 낮은 오지 않았음. 우리에게는 교회가 필요함. 요한계시록 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우리는 교회들에게로 가서 반사하는 빛을 얻어야 함.
교회에 들어오기 전에 그들은 자라지 못했음. 신실한 태도로 우리의 마음을 교회로 돌릴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반사하는 빛을 받을 것임.
우리가 교회에 문제를 갖고 교회에 등을 돌릴 때 우리는 완전히 어두움에 빠지게 됨. 만일 당신이 밤에 달에게 등을 돌린다면 당신의 얼굴은 어두움에 싸일 것임. 그러나 교회에 돌아올 때 우리는 언제든지 교회와 하나 되며 즉시 빛이 오는 것임.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교회만 강조하고 그리스도를 소홀히 한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달이 어떻게 해 없이 빛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없이는 교회에게 빛이 없음. 밤에 빛을 내는 달빛은 햇빛을 반사하는 데 불과한 것임.
교회의 빛은 다 그리스도를 반사하는 것임. 올바른 교회에 서 있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만 하는 사람들은 생명 안에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실제적인 빛을 얻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임. 생명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넷째 날의 실제적인 부분인 달빛이 필요함. 교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그만큼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을 것이며 빛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만큼 우리는 생명이 자라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임.
3. 별들-그리스도와 성도들
별들은 그리스도요 성도들임. 그리스도는 실제의 해이시지만 이 밤의 시대 동안에는 해로서 나타나지 않으심. 그리스도는 별, 즉 광명한 새벽별로 빛을 내심. 요한계시록 22:16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의 별이시고 모든 이기는 성도들 또한 별들임.
베드로후서 1장 19절은 그리스도이신 새벽별이 우리 마음에 떠오를 때까지 더 확실한 예언(말씀)을 주의하는 것이 가(可)하다고 말함. 요한계시록 1장 20절에서 교회는 성령으로 빛을 내는 등대라는 것을 말했을 뿐 아니라 교회들 가운데 이기는 자들, 혹은 사자(使者)들이 빛을 내는 별들이라고 하셨음.
다니엘서 12장 3절 ⇒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마태복음 5장 14절 ⇒ 믿는 자들은 오늘 세상의 빛
빌립보서 2장 15절 ⇒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심.
이것은 모두 올바른 위치에서 올바른 길을 가는 성도들이 곧 별들임을 보여 주는 구절들임.
4. 분별(分別)을 관리함.
넷째 날의 빛은 분별의 일을 하게 함. 분별은 빛으로부터 오는 것임. 넷째 날의 빛이 없다면 일을 분별하기 어려움. 생명이 자라기 위해 우리에게는 모두 이 분별이 필요함.
어디는 가고 어디는 가지 않으며,
무엇은 말하고 무엇은 말하지 않으며,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 않으며,
무엇은 하나님에 속한 것이고 무엇은 사탄에 속한 것이며,
영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고 혼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분별해야 함.
사귀어야 할 친구들과 사귀지 말아야 할 친구들을 분별해야 함.
분별은 빛으로부터 오는 것임. 빛이 비췰 때 그 빛은 관리를 하게 됨. 만일 내가 빛이 없는 방에 있다면 나는 넘어질 것임. 빛이 없다면 방향을 찾을 수 없고, 관리함이 없고, 분별이 없음. 그러나 내가 빛 아래에 있을 때 나는 내가 갈 길을 분별할 수 있음.
부모들이 자녀들을 돌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것임. 그들이 주님의 손에 맡겨질 때 그들은 빛을 받게 될 것임. 그 빛은 그들을 다스릴 것임. 이 빛의 다스림은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분별을 가져다 줄 것임. 분별은 제일 좋은 보호임. 이 분별은 빛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빛의 비췸이 곧 다스림임.
만일 당신이 창세기 1장 14절, 16절, 18절의 말씀과 에베소서 5장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13절, 14절의 말씀을 기도로 읽어서 이 말씀들이 당신 속에 들어와 빛이 되게 한다면 당신은 무엇은 거부하고 무엇은 용납하며, 무엇은 받아들이고 무엇은 거절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임.
요한일서 1장 5~7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줌. 즉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할 때 우리는 빛 가운데 있고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때 우리는 어두움과 빛의 차이를 알게 됨. 언제나 분별이 있을 때 관리함이 있게 됨.
5. 표시(表示)-행동을 위한 것
해와 달과 별들은 표시가 됨. 이 표시는 행동을 위해 있는 것. 고대의 뱃사람들은 별을 따라 항행(航行). 교통 신호 등에 따라서 자동차를 운전. 표시는 행동을 위한 길잡이인 것.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주 예수님에게 와서 하늘로서 오는 표적(표시) 보이기를 청했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음. 마태복음 16:1~4절 “어리석은 백성이여, 너희는 하늘의 표시는 안다. 너희는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고 말한다. 너희는 하늘의 표시는 분별할 줄 알지만 이 시대의 표시는 분별하지 못하는구나. 내가 바로 표시이며 요나와 같은 사람이다. 너희는 빛이 없기 때문에 표시를 보지 못한다.”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와서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의 징조(표시)에 대해서 물음. 마태복음 24: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요한계시록 12장 1절에서 우주 가운데 큰 표시가 발견됨(‘이적’은 ‘표시(표적)’으로 번역되어야 함).
즉 해와 달과 별들을 가진 여자의 표시. 이 우주 가운데에서 항해를 잘하려면 우리는 이 여자를 큰 표시로 가져야 함. 이 여자는 교회와 관계가 있음. 이 여자를 교회라고는 말하지 않지만 교회는 이 여자에게 속한 큰 부분임. 우리들이 이 우주 가운데에서 움직이고 행동하고 처신하려면 이 여자를 알아야 함. 이 여자의 기원은 창세기 3장에 있음.
성경은 여자의 책. 사탄은 여자를 통해서 인류 안에 들어왔으며 주 예수님도 여자를 통해서 인류 안으로 들어오셨음. 마지막에 가서 성경은 새 예루살렘, 즉 한 여자,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끝을 맺음.
우리는 모두 그 여자의 한 부분임.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 12장에 나타난 여자를 알아야 함. 그 여자는 성경에 나타난 여자이며 온 성경을 덮는 우주적인 여자임. 엄밀히 말한다면 그 여자는 창세기 3장이 아니라 창세기 2장에 나오는 하와에서 시작되어 창세기 2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계속됨.
이 여자를 알 때 당신은 표시를 알게 될 것임. 그 여자는 으뜸가는 표시임. 그 여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야 할 것인지 멈춰야 할 것인지를 아는 표시가 됨.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여자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음. 그들에게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음. 우리에게는 넷째 날에서 오는 표시가 필요함.
6. 절기(節期)-달에 의해 정해진, 성장을 위한 것
표시는 행동을 위해 있는 것이며 절기는 성장을 위해 있는 것. 추수에 관한 주 예수님의 말씀에서 절기는 성장을 위해 있는 것. 요한복음 4: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전도서 3:1~8절에서 이르시기를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고 했음.
절기가 있는 것 ⇒ 성장을 위함. 만일. 절기는 우리에게 밭 갈 때와 씨 뿌릴 때와 거두어들일 때와 될 때를 알려 줌. 요한계시록 22장 2절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힘.” 절기는 달력에 의해서 정해지며 달력은 달에 의해서 정해짐.
레위기 23: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5~6절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6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 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24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27절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34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
39절 “너희가 토지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 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41절 “너희는 매년에 칠 일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칠월에 이를 지킬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정월에 명절을 지켰음. 명절은 절기와 관계가 있음. 정월에 있는 명절은 유월절이고 그 다음에는 무교절이 옴. 그 다음에는 곡물의 첫 이삭을 흔드는 요제가 오며, 그 다음은 수확제(收穫祭)라 불리우는 칠칠절(七七節)이 옴.
이 네 가지 명절들은 그 해의 처음 육 개월 동안에 이루어졌음. 7월 제 1일은 나팔을 부는 명절이었으며 7월 10일은 속죄절(贖罪節). 또한 7월 15일은 초막절(草幕節). 이 일곱 명절들은 모두 달력에 있는 대로 행해졌음.
자라는 시간이 없다면 명절을 즐길 수 없음. 자란 것이 없는데 무엇으로 잔치를 베풀 수 있는가? 명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모든 풍성, 즉 소, 양, 포도, 그리고 농사 지은 모든 곡물을 가져 옴. 그 중에서도 초막절은 추수를 즐기는 잔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 앞에 함께 와서 추수를 즐기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곧 잔치임.
잔치는 성장의 결과. 이 성장은 달, 즉 교회와 매우 관계 깊은 것임. 만일 교회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잔치를 즐길 거리가 없음. 그리스도인들이 잔치를 즐기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에게 달이 없기 때문. 그들에게는 교회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잔치로서 충분히 누리지 못함. 우리에게는 성장과 잔치를 위해서 절기를 정하는 교회가 필요함.
민수기 28장 11절은 달에 관한 말씀. 29장 11절도 달에 관한 말씀. 이 구절들은 달력을 위해서 있는 말씀. 예레미야 8장 7절에서는 그 정해진, 나는 시기를 알 수 있는 학(鶴)에 대해서 말씀. 또한 그 올 때와 절기를 알 수 있는 반구(班鳩)와 제비와 두루미에 대해서도 말씀하심.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는 절기가 없다고 말씀하심. 이것이 오늘의 상황.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운 때도 없고 따뜻한 때도 없음. 그들에게는 초승달도, 그믐달도, 아무 달도 없음. 그들에게는 계절이 없음. 봄도 없고 가을도 없고 여름도, 겨울도 없음. 매일이 똑같음.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자랄 길이 없으며 잔치를 누리지 못함. 그 모든 것은 그들에게 넷째 날의 빛이 없기 때문.
그러나 우리가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할 때 교회는 달력을 정할 것이며, 그 달력은 절기를 가져올 것이며, 절기는 우리에게 잔치를 제공할 것임.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모든 잔치를 누리게 됨.
7. 일자(日字)-새 출발을 위해 지구의 자전에 의해 정해짐.
일자와 연한은 모두 해와 관계. 지구는 해를 따라서 두 가지 운동을 하는데 그 하나는 하루에 한 번씩 하는 회전이며 다른 하나는 일 년에 한 번씩 하는 회전.
하루에 한 번씩 하는 회전을 자전(自轉)이라 부르며 일 년에 한 번씩 하는 회전을 공전(公轉). 지구의 자전은 일자(日字)를 만들며 지구의 공전은 연한(年限)을 만듬. 창세기 1장 14절 “일자”란 말은 지구가 새로운 출발을 낳기 위해 끊임없이 자전함을 의미. 매일매일은 새로운 출발임. 매일매일 해가 떠오르기 때문. 매일매일 새벽이 옴. 마치 해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매일매일 새 출발을 주심. 매일 갖는 새벽기도시간은 우리 신앙의 새벽이 되어야 하며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우리 속에 태양이 떠오르는 시간이 되어야 함.
민수기 28장 3절, 4절은 우리에게 매일 양을 둘씩 번제(燔祭)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심. 매일매일은 새로운 출발임. 예레미야 애가 3장 22~23절에서는 주의 자비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다고 하심. 데살로니가전서 5장 4~8절에서도 우리는 밤의 자녀들이 아닌 낮의 자녀들이라 함.
8. 연한(年限)-더 큰 시작을 위해 지구의 공전에 의해서 정해짐.
일 년에 한 번씩 태양의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공전은 더 큰 시작을 가져옴. 이것은 정말 대단히 놀라운 것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교회 안에 있음.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절기와 일자와 연한을 주는 해와 달이 있는 것.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나왔을 때 주님께서는 그 때를 새로운 해의 시작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심. 출애굽기 12:2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 때 그 때가 곧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때이며, 우리가 새로 태어난 해이며, 참으로 우리의 인생이 뒤바뀌는 때임. 해를 거듭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의 해로서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주신 것임.
어떤 곡물이든지 절기나 일자나 연한이 없이는 자랄 수 없음. 모든 곡물들은 넷째 날의 빛을 받고 자람. 우리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곡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농장임. 우리에게는 절기를 정하는 달이 필요하며 일자의 연한을 정하는 해가 필요함.
창세기 8장 13절에서 노아는 그 해 정월 초하루에 땅을 다시 딛었음. 노아는 정월 초하루에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출발을 했던 것임. 출애굽기 40장 2절, 17절에서 성막은 정월 초하루에 세워졌으며 그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출발이었음.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넷째 달 29일에 성막을 세우라 하시지 않고 정월 초하루에 세우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
역대하 29장 17절과 에스겔 45장 18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월 초하룻날에 성소를 깨끗케 하고 성결케 하였음. 에스라 7장 9절에서는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네 가지 시작이 필요함. 새로운 땅으로 오는 것, 하나님의 성막을 세우는 것, 하나님의 성소를 성결케 하는 것,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 이 네 가지 모두가 그리스도 안의 성장을 위한, 믿음 생활 가운데 있는 새로운 시작들이며 그것들은 모두 정월 초하루에 이루어져야 함.
9. 그리스도의 그림자들
모든 일자나 표시나 절기나 연한은 그림자들이요 그 실제는 바로 그리스도이심.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貶論)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리스도는 거룩한 일자임. 새 달, 안식일, 해의 시작임. 모든 것이 되심. 그리스도는 당신의 새로운 시작이며 더 큰 시작으로서의 해이고 작은 시작으로서의 일자가 되심. 그리스도는 새 달이심.
10. 강하게 된 빛들
천년 왕국 시대에 달빛은 햇빛같이 되고 햇빛은 칠 배가 되어 일곱째 날의 빛과 같게 됨. 이사야 30:26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강화된 하나님의 성령은 일곱 영이 되며 강화된 해는 칠 배의 햇빛이 됨. 이것은 왕국 시대, 즉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상처를 치료하시어 회복시키는 그 때 이루어질 것임.
그러나 우리는 오늘 미리 맛볼 수 있음. 어떤 성도들에게는 달이 마치 해처럼 밝음. 내가 누리는 교회생활은 마치 해와 같으며 보통 달보다 휠씬 강함. 나에게는 햇빛처럼 밝은 달이 있으며 일곱 배로 강화된 햇빛이 있음.
11. 그 날에는 다시 밤이 없을 것임.
새 예루살렘에는 다시 밤이 없음. 요한계시록 21:23절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25절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요한계시록 22:5절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그 성안에는 해나 달이나 등불이 필요 없음. 그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빛이 되시기 때문. 요한계시록에 새 예루살렘 밖, 즉 그 성 밖에는 여전히 밤과 낮이 있지만 그 성 안에는 밤이 없음. 완전하고 유일한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취실 것이기 때문. 그 때에는 스물 네 시간이 낮이기 때문.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넷째 날의 빛이 필요함.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햇빛을 반사하는 달과 별들이 필요함. 이것이 우리가 자라는 길이기 때문. 당신이 넷째 날의 빛을 받으며 생명 안에 자라기를 바람. 첫째 날의 빛은 생명을 낳고 거듭나는 데 필요함. 그러나 당신이 생명 안에서 자라기 위해서는 반드시 넷째 날의 빛이 필요한 것임.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