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장제 개화4년(645)의 일이다.
고려 중기의 명신 유공권의 소설에서.
<육군六軍은 고구려의 조롱거리가 되고 거의 떨쳐 일어날 기미도 보이질 않았다. 척후병이 영공의 군기는 흑색 깃발로 에워 싸였다고 보고 하니 세민은 크게 놀랐다. 종내 저 혼자 탈출했다 해도 위험은 이와 같았다.>
라고 하였으니, 신구당서와 사마공의 통감은 부끄러워 이를 감추고 역사에 기록 하지 않았으니 나라의 치욕을 감추려는 졸렬한 처사였다.
이세적은 세민에게 말한다.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에 있읍니다. 우리 군대의 양곡은 벌써 요동으로 수송할 길을 잃었읍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 건안을 습격하는데 만일 고구려가 수송로를 끊으면 군세는 궁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안시를 공격함만 같지 않을것이니 안시가 함락되면 곧 북치고 행군하여 건안을 취할 뿐이옵니다."
안시성의 사람들은 세민의 깃발이 덮어 오는 것을 멀리 바라 보며 성위에 올라 북치고 떠들며 침을 뱉으며 세민을 조롱했다. 그의 죄목을 열거하면서 무리에게 떠들어 댔다. <그대 세민은 아비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동생의 아내를 음란하게 받아 들였으니, 그 죄가 크도다.>
세민은 몹시 화를 내면서 성을 함락시키는 날에는 성중의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흙구덩이에 생매장 하겠다고 했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더 굳게 성을 지키니 성을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이 때에 장량은 사비성에 있었는데 그를 불러오게 하였으나 채 이르지 못하였고, 이리저리 망설이는 사이 기회를 잃고 말았다. 장량은 막 병력을 이동시켜 오골성을 습격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고구려 관병 때문에 패하고 말았다. 이도종도 역시 험악한 곳에 떨어져 떨치지 못하니 당군의 여러 장수들은 의논한 끝에 갈라졌다. 세적만이 홀로 생각 하기를 , "고구려는 나라를 기울여 안시를 구하려 하니 안시를 버리고 곧 바로 평양을 치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장손무기는 생각하기를 "천자의 친정은 제장의 정벌과는 달라 요행을 바라고 행동한다는 건 안될 말이다. 지금 건안 신성의 적의 무리가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이끄는 말갈의 군대도 역시 수십만이다. 국내성의 병력도 오골성을 돌아 낙랑의 여러 길을 차단할 것 같다. 그리 된다면 세력은 날로 성해지고 포위 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적을 우롱 하다가는 후회막급이 될 것이니,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을 취하고 그런 후에 천천히 진격하느니만 못하다. 이것이 만전책이다 " 라고 했다.
이 문제가 채 결론이 나기도 전에 안시 성주 양만춘은 이를 듣고 밤 깊음을 틈타 수백의 정예를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오니 적진은 스스로 서로 밟고 찔러 살상된 수가 수없이 많았다. 세민은 이도종을 시켜 흙산을 안시성의 동남쪽에 쌓게 하였다. 관병은 성의 틈 사이로 출격하여 마침내 토산을 뺏고 참호를 파고 이를 지키니 군세는 더욱 더 떨치더라.
당군의 여러 진은 거의 싸울 힘을 잃으니, 부복애는 패전으로 목잘려 죽고 도종 이하 모두가 맨발로 나와 죄를 청하였다.
막리지는 수백기를 이끌고 난파를 순시하며 상세하게 정세를 듣더니 사람을 보내 총공격하여 사방을 칠 것을 명하였다.
연수등도 말갈병과 합쳐 협공하고 양만춘은 성 위에 올라 싸움을 격려하니, 사기는 더욱 더 떨쳐져서 일당백의 용맹이 없는 자가 없었다. 세민은 이기지 못함을 분하게 여기어 감연히 나서서 싸우려 했다. 양만춘은 이에 한마디 소리 지르며 화살을 당겨 반공에 날렸다. 세민은 진에서 나섰다가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떨어져 버렸다. 세민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서 도망쳤다.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 기병 수만을 이끌고 후군이 되도록 하였으나 요택의 진흙길은 군마의 행군을 어렵게 했다. 무기에게 명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풀을 베게하여 길에 깔고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니, 세민도 몸소 장작을 말고삐에 연결하여 매고 역사를 도왔다.
겨울 10월 포오거에 이르러 말을 쉬게하고 길이 메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너는데 심한 바람과 눈이 몰아쳐 사졸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이 나왔다. 이에 불을 길에 지피고 기다렸다. 때에 말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 이들을 심히 급하게 추격했다. 추정국은 적봉에서 하간현에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으로 나아가니, 군세는 크게 떨쳐졌다. 당나라 군사는 갑옷과 병기를 마구 버리면서 도망가, 드디어 역수를 건넜다. 때의 막리지는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을 개축하니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제군을 나누어서 일군은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창려이다. 일군은 세민의 뒤를 바짝 쫒게하고 또 일군은 상곡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 이다. 이에 세민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하게 되니 막리지는 정국, 만춘등의 수만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에 입성하여 세민과 약속하였으니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곧 양자강 북쪽)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밖에서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요서의 땅에 있게 되었으니, 백제가 영유하던 곳은 요서의 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 산월, 좌월, 이 있었다. 문자제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제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서 알맹이를 삼았다. 이 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음으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의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고려진은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 되는 곳에 있고, 안시성은 개평부의 동쪽 70리 되는곳에 있다. 지금의 탕지보이다.
고려성은 하간현의 서북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 무열제때 쌓은 것이다.
《삼한비기》에서 말한다.
「옛 책에선 <요서에 창요현이 있다>고 했는데 당나라때 요주라 개명했다. 남쪽에 갈석산이 있고 그 밑은 곧 백암성이다. 역시 당나라때의 소위 암주가 그것이다, 건안성은 당산의 경내에 있다. 그 서남을 개평이라 한다. 일명 개평이요, 당나라 때에는 개주라 한곳이 이것이다. 」
《자치통감》에 말하기를 「현도군은 유성과 노룡사이에 있다. 《한서》의 마수산은 유성의 서남쪽에 있다. 당나라때 토성을 쌓다.」라고 했다.
《신지비사》는 단군 달문 때의 사람 신지 발리가 지은 것이다.
말하기를 「저울의 대는 부소량이다」라고 했으니 곧 진한의 옛서울을 말한다. 역시 곧 단군조선이 도읍한 곳으로서 아사달이 그곳이니, 즉 지금의 송화강의 하르빈이다. 또 「저울의 추는 오덕지」라 함은 번한의 옛서울을 말함이니 지금 개평부 동북 70리에 있는 탕지보가 그곳이다. 또 고려사에 말하기를 「저울 그릇은 백아강이라」고 했으니 이는 마한의 옛
도읍지를 말하며 지금의 대동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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