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 없이 잠든 적 없고, 꿈꾸지 않고 눈뜬 적 없다”
글 : 李根美 자유기고가
서울 가락동 지하에서 시작하여 용인 죽전지역의 3만명 교회로 성장한 새에덴교회. 전라북도 시골에서 맨몸으로 상경하여 기독교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고 있는 소강석 목사는 매년 미군 참전용사를 초청하고, 한일외교에 나서면서 지역주민을 섬기는 사회적 역할을 다하고 있다.
⊙ <시사저널> <목회와 신학> 등이 주관한 설문 조사에서 ‘차세대 기독교 리더’로 선정
⊙ ‘살아 있는 예배, 감동적인 설교’를 위해 토요일이면 강단에서 설교 리허설 가져
⊙ 수천만원 들여 <점프> <난타> <맘마미아> 등의 유명 공연단 교회에 초청,
지역주민들과 함께 감상
⊙ 교인 개개인의 개성을 인정하는 ‘샐러드 목회’를 하되 필요할 때 함께 힘을 모으는
‘용광로 목회’를 병행할 계획
蘇康錫
⊙ 1962년생.
⊙ 광신대ㆍ연세대연합신학대학원ㆍ미국 낙스신학교 졸업(목회학 박사).
⊙ 칼빈대 석좌교수.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 대표회장. 새에덴교회 담임목사.
⊙ 저서 : <신정주의 교회를 회복하라>, 시집 <꽃씨> 외 다수.
⊙ 상훈 : 2007한국기독교출판문화대상, 2008목양문화상, 2007마틴루터킹 국제평화상 수상.
몇 년 사이 한국교회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한국교계가 40~50대 목사들 중심으로 지형이 바뀌고 있다. 젊은 유명 목사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대개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나 해외 유학을 마친 뒤 이미 자리가 잡힌 유명 교회의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거나 아버지가 일군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다.
1980년대 이후 교회의 성장이 정체되면서 뒤늦게 시작하여 대형교회를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모 교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새로 시작한 교회의 70%가 자립하지 못해 문을 닫는다고 한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 위치한 새에덴교회의 소강석(蘇康錫·48) 목사는 바닥에서 시작하여 등록교인 3만명을 이루었다. 프라미스 콤플렉스라고(Promise Complex) 이름 붙인 새에덴교회 건물은 연면적 1만 평에 이른다. 작은 키에 정감 어린 목소리를 지닌 소강석 목사는 앞 세대 목사들의 트레이드 마크인 ‘거룩함’과는 좀 거리가 있는 ‘민첩함’이 먼저 엿보였다. 토대가 없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요즘 큰 교회를 이룬 비결부터 물었다.
“목사든 사업가든 가장 중요한 건 소명이라고 봅니다. ‘나는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만 확실하면 필요한 방법은 갖춰지게 됩니다. 목회는 영성과 수행능력, 이 두 가지가 꼭 필요합니다. 영성을 기업에 비유한다면 핵심가치, 수행능력은 경영마인드라고 할 수 있겠죠. 변화하는 트렌드에 맞게 목사도 목회의 노하우를 터득하고, 자기 정체성과 소명이 확실하고 뜨거워야 합니다. 거기에 목숨을 거는 ‘승부사 기질’이 덧붙여져야 합니다.”
소강석 목사에게는 ‘3M 목회자’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맨손, 맨몸, 맨땅’밖에 없어 ‘맨발의 소명자’로 불렸던 그는 요즘 기독교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2008년 12월호 <시사저널> 지령 1000호 기념호에서 기독교 차세대 리더를 묻는 설문조사와 2009년 <목회와 신학>이 창간 20주년 기념으로 ‘10년 후 한국교회를 이끌어 갈 목회자’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소강석 목사는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매년 한국전쟁 미국인 참전용사 초청
영향력이 생기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소강석 목사는 지난 6월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들을 초청하여 화제가 되었다. 2006년 7월,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시험발사로 남북관계가 경색되었을 때 그는 백악관 직원들로 이뤄진 신우회 모임에서 설교를 했다.
“설교가 끝나자 참석자들이 ‘왜 한국은 미국을 싫어하나, 예전에 도와줬는데 성조기를 찢고 태우는 이유가 뭐냐, 왜 북한과 그렇게 가깝나’, 이런 질문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미국에 대해 잠깐 오해하고 있어서 그렇다. 그리고 그들은 대한민국의 전체가 아니다’라는 취지로 답변했습니다. 그 자리에 참전용사가 한 분 계셨는데 매우 섭섭해하시더군요.”
미국에는 약 10만명에 달하는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생존해 있다고 한다. 소강석 목사는 2007년 6월에 한국전쟁 참전용사 30명을 초청한 데 이어 2008년에는 100명을 초청했다. 2009년에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미국 국방부 관계자를 비롯한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열고 한미(韓美) 우호증진을 위한 심포지엄과 독도 수호 포럼을 개최했다. 올해 6월에도 미군 참전용사 89명을 초청하여 5박6일간 6·25 기념행사 참석과 전적지들을 돌아봤다. 비행기 티켓과 특급호텔 숙박비 등 모든 비용을 새에덴교회가 부담하는데 올해만 4억원이 들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일이 처음이라며 다들 우십니다. 미국으로 돌아가면 그분들이 다 홍보대사가 됩니다. 백악관에 ‘한국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피 흘려 지킨 나라’라는 편지를 보내고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걸 알리는 분도 있습니다.”
참전용사 초청은 전략적으로 강석희 시장, 조재길 시장 등 한인 정치인이 활동하는 어바인과 세리토스 지역에서 선발해 이뤄진다. 공화당의 차기 대선 후보인 조지 알렌 전 상원의원의 지역구인 버지니아주에서도 선발했다. 소 목사는 조지 알렌 의원 부부를 초청하여 함께 부여를 탐방하며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준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한국 농촌에 대한 배려와 협력을 당부하기도 했다.
소강석 목사의 민간외교 활동은 미국 내에서도 큰 주목을 받아 2008년에 LA의회에서 연설을 하고 특별공로패를 받았다. 그해 10월에는 미국 노퍽시(市)에 있는 맥아더 장군기념관에서 열린 제44주기 맥아더추모회와 정기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했다.
한일기독연맹 지도목사인 소강석 목사는 한일관계의 용서와 화해를 위해서도 노력해 왔다. 일본의 양심으로 대변되는 도이 류이치(土肥隆一) 의원을 새에덴교회에 두 차례 초청했다. 도이 류이치 의원은 동행한 민간사절단들과 교인들 앞에서 일본의 과거를 참회하는 큰절을 하며 용서를 구했다. 도이 류이치 의원은 소 목사로부터 선물 받은 한복을 입고 일본 국회에 등원하기도 했다. 소 목사는 사할린을 방문하여 동포들을 위한 권익보호 활동도 펼치고 있다. 그는 2007년에 한일기독연맹 활동을 인정받아 마틴루터킹 국제평화상을 수상했다.
올해 4억원을 들여 미군 참전용사 89명을 초청했다.
지하점포에서 맨몸으로 개척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 대표회장인 소강석 목사는 교계의 중심인물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그가 주목받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386세대인 그의 이력은 개발연대를 힘겹게 살아온 기독교 1세대 목사들과 흡사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예쁜 여학생을 만나기 위해 교회에 나간 그는 3학년 때 참가했던 수련회에서 목사가 되겠다는 소명을 품게 되었다. 한학에 조예가 깊은 무신론자 아버지는 아들을 집에서 쫓아냈고, 교회 활동에 지나치게 열심인 그를 기숙사에서도 퇴출시켰다.
고등학교를 힘겹게 마친 그는 고학(苦學)으로 신학교를 다녔다. 양복이 없어 설교할 기회를 놓치자 “양복 한 번 입게 해 달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주말에 혼자 기숙사에 남아 있다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배경이 없는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 과정에서 후일 장모가 된 정금성 권사를 만났고, 결코 목사의 아내가 되지 않겠다는 정 권사의 딸을 끝까지 따라다녀 결혼에 골인했다.
“꿈 없이 잠든 적 없고, 꿈꾸지 않고 눈뜬 적 없다”는 그는 광주신학교(현 광신대학교) 2학년 때인 21세에 전남 화순군 능주면 백암리에서 헛간을 빌려 교회를 시작했다. 하지만 미신을 신봉하는 마을 유지들이 교회 가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물리고 교회에 분뇨를 뿌리는 등 엄청난 방해를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3년6개월을 고생한 끝에 마을에 교회를 지었다.
대학원 공부를 위해 백암교회를 사임하고 서울로 온 그는 인맥이 없어 애초부터 큰 교회 전도사는 꿈도 못 꾸고 스스로 개척할 각오를 다졌다. 교회 개척에 필요한 내용을 수집할 때마다 노트에 옮겨 적고, 각 교회의 주보와 전도지를 모았다. 나중에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인쇄소 직원을 찾아가 인쇄에 관한 특별교육을 받기도 했다.
서울 시내 여러 곳을 돌아봤으나 돈이 부족해 가락동에서 교회를 시작하기로 결심한 뒤 곧바로 지역조사에 착수했다. 직접 만든 설문지를 들고 일주일 동안 지역주민 100여 명을 만나 의식구조, 종교 실태와 성향 등을 조사했다. ‘다른 지역에서 성공하지 못해 이사 온 교회가 대부분이고, 교회의 성장속도가 느리고, 활동적으로 움직이는 교회가 없고, 대형교회가 없고, 다른 동네에 있는 교회로 나가는 사람이 많고, 지역 주민들은 교회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런 결과가 오히려 확신과 자신감을 주었어요. 영적인 부분을 살리고 지역사회에 봉사를 해 교회 이미지를 살릴 수 있을 거라고 분석한 거죠.”
26세였던 1988년에 서울 가락동의 25평짜리 지하점포를 1800만원 보증금에 38만원 월세로 얻은 뒤 동네에 현수막을 붙이고 홍보전단을 돌렸다. 첫 예배에 건물주인과 간판집 주인 등 달랑 4명이 인사차 참석했다. 그나마 밤에는 아내와 장모밖에 없는 가운데 쥐들만 찍찍 소리를 내며 오갔다. 그는 아예 집에 들어가지 않고 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사생결단하듯 목회에 매달렸다.
교회가 자꾸 생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가락동 주민들에게 사과로 시작하는 편지를 보내 공감을 끌어낸 뒤 새에덴교회의 차별성과 상대성, 독특성을 홍보했다. 지역 여론을 주도하는 부동산, 미용실 등지에는 ‘자녀교육을 위한 긴급동의 제1호’ ‘6·25에 대한 기독교적 재조명’ ‘가락동 캠페인’ 등을 만들어서 배포했다. 소강석 목사가 워낙 열심히 뛰자 교인들도 열성을 다해 전도 대열에 동참, 교회가 점차 부흥하기 시작했다.
장년성도가 50명 정도 되었을 때부터 새에덴교회는 사회봉사를 시작했다.
“한국 불신자들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할까, 지역사회 주민들이 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처음부터 이 점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저는 돈도 실력도 없으니 이 두꺼운 장벽을 어떻게 뚫을까, 이 지역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 뭘 원할까, 그걸 연구하면서 주민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동장에게 제안을 하여 동사무소로 150여 명의 동네 어른을 초청해 경로잔치를 열었다. 정기적으로 경로잔치를 열자 국회의원과 구청장도 참석했다.
“그때마다 ‘이건 다 동장님이 하신 일이다. 나는 한 일이 없다’며 동장님을 높여드렸죠. 동장님이 고마워하시면서 외지에서 전입 오신 기독교인의 명단을 주시더군요. 그분들에게 ‘가락동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 어디가 우범지역이고 백화점은 어디 있는지 가락동의 특성은 무엇인지를 담았다. 그렇게 간접 전도도 하고 동네를 누비며 직접 전도도 하면서 2년 만에 교회를 120평으로 옮겼다. 3년 만에 교인이 300명이 되었지만 더 이상 늘지 않았다. 주차를 할 수 없는 데다 준주거지역이어서 성장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새에덴교회는 지역주민에게 교회를 개방하고 문화를 공유하는 새로운 전형을 제시한다.
교회 건축 중 응급실에 실려가
때마침 분당이 개발되면서 그 지역으로 옮긴 교회들이 크게 부흥하자 분당으로 교회를 옮기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이전을 원치 않는 교인들의 반대로 아쉽지만 포기해야 했다. 교인들의 뜻이 일치한 1994년에서야 분당에 400평의 교회 부지를 마련하고 우선 130평 지하점포에서 예배를 시작했다. 몇 달 만에 교인이 배로 늘었지만 교회 건축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교회 부지 위로 34만5000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국내 최고의 고압선이 지나가고 있어서 건축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토지공사, 한전과 합의를 하여 다른 장소를 분양받았으나 부지 이전하는 데만 2년3개월이 걸렸다. 드디어 건축을 시작하려고 하자 인근 주민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백방으로 노력하여 공사를 시작했지만, 그로 인해 교회 성장이 둔화되고 좋지 않은 소문만 퍼져나갔다. 설상가상으로 시공회사가 부도나면서 다시 공사가 중단되었다.
악재가 겹치면서 몸과 마음이 다 힘들어지자 협심증으로 인한 심장마비 증세가 찾아왔다. 응급실에 실려 간 소강석 목사에게 의사는 간 기능마저 몹시 안 좋다며 당장 입원을 권했다. 그즈음 교통사고까지 당했지만 병원이 아닌 교회 건축현장에서 버텼다. 차라리 벽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끝까지 겸손하자’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고향에서 맨주먹으로 올라와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감사한데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까다로운 준공검사를 끝내고 드디어 1996년 11월 16일에 입당예배를 하게 되었다. 45억원을 들여 1030평의 교회를 완공하자 매주 수십 명씩 신자가 늘어났다. 순식간에 1000명을 넘어섰다.
교회가 성장하자 언론에서 소 목사를 인터뷰하고, 수많은 교회로부터 집회초청이 들어왔다. 해외에서도 부흥회와 목회자 세미나 강사로 와달라고 요청했다.
분당에서는 봉사활동을 통해 전도하는 전략을 펼쳤다. 탄천과 거리 청소를 하고 아파트를 돌며 자동차 닦는 일도 했다. 차를 만지면 갑자기 도난경보기가 울려 곤란을 겪기도 했다.
“우리 교인들도 저를 닮아서 얼마나 열심인지 몰라요. 너무 교회 홍보를 열심히 해서 주변 교회들로부터 원망을 듣고 자제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중 IMF 사태가 발생했고, 건축 부채 이자가 불어나면서 어려움에 직면했다. 건설회사 관계자가 예배시간에 소리를 지르고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자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분당에 마지막 주자로 와서 막 피어오르는데 그런 일이 생기자 힘이 빠졌지요. 다시 한 번 저를 돌아보면서 힘들수록 더 전도하고 더 희생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교인들과 단합하여 8개월 만에 모든 부채를 갚고 교회 헌당식을 했다. IMF 때 헌당식을 한 교회는 새에덴교회밖에 없다는 소문이 전국으로 퍼졌다.
교인이 더 늘어나면서 얼마 안 가 새로 지은 교회도 비좁아졌다. 하지만 예배 횟수를 늘리는 것 외에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교회 편의시설 지역주민에 개방
새에덴교회는 사회봉사와 불우이웃돕기를 계속하는 가운데 2000년부터 북한에 의약품과 발전기를 보내는 등 봉사의 범위를 넓혀 나갔다. 2001년 3월에 소강석 목사는 평양을 방문했다.
남한산성에서 초등학생들에게 우리 역사를 설명하는 소강석 목사.
“북한의 여러 곳을 가봤는데 창광유치원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완전히 주체사상으로 세뇌시켜 김정일(金正日)의 사람을 만들고 있더군요. ‘앞으로 통일한국 시대가 올 텐데 지금 우리 공교육으로는 안 된다, 우리의 자녀를 독특한 방법으로 키워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며 돌아왔습니다. 인성교육이 안되면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깨진 그릇에 물 붓기밖에 안됩니다. 자녀들을 교육시키려고 보니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요. 교회를 완공한 지 5년밖에 안되는 시점이었지만 다시 짓기로 결심했습니다.”
가락동에서 분당으로 옮길 때 반대 때문에 이전이 늦어진 것을 떠올려 소 목사는 우선 교인들 분석 작업부터 시작했다. 반대할 것으로 예상되는 교인의 집으로 교역자들을 보내 왜 이 시점에서 교회를 다시 지어야 하는지 설명하게 했다. 그 결과 짧은 시간에 단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죽전 신도시에 교회를 다시 짓기로 결정이 났다.
“당시 우리 교회 등록교인이 4000명으로 매주 출석 인원은 2000명이 좀 넘을 때였어요. 외부에서 500억원짜리 교회 건축이 가능하겠느냐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4년 후 교회를 완공해 이전한 시점에 출석교인이 1만명을 넘었습니다. 교회가 계속 성장한 것이지요. 교회를 완공하자 여기저기서 고전할 거라는 말이 나오더군요. 건축을 하고 나서 대부분 빚 갚느라 쩔쩔매지만 우리 교회는 과감하게 교계와 사회를 섬기는 일에 나섰습니다.”
교계 내에서도 교회 크게 짓는 것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은데 이에 대해 소 목사는 이런 의견을 밝혔다.
“무조건 과시욕으로 크게 짓는 건 반대합니다. 필요해서 크게 지어 교회와 지역주민을 섬긴다면 환영해야 할 일이지요. 교회를 크게 짓는 건 무조건 나쁘고, 큰 교회가 작은 교회 죽인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은 깨야 합니다.”
교회당을 약속의 복합건물이라는 뜻으로 ‘프라미스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였다. 대지 2000평에 연면적 1만 평으로 지하 3층 지상 10층 규모이다. 교회 본당이 4500석으로 그리 크지 않은 대신 다목적홀, 독서실, 인터넷룸, 식당, 피트니스클럽 등을 개설해 평일에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배치했다.
건물이 완공된 후 곧바로 이스라엘 쉐마교육을 벤치마킹한 비전스쿨과 리더십스쿨을 개설해 영아부터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성경, 역사, 예절, 과학, 문화, 리더십과 성공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인이라는 뿌리교육을 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고난의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남한산성, 삼전도비 등지에 가서 우리 민족이 수모당한 것을 학생들에게 설명해 줍니다. 자신이 고생한 걸 숨기고 자녀에게 벤츠를 사주는 졸부는 금방 망합니다. 남대문에서 고생하여 사업을 일으킨 걸 자녀들에게 알릴 때 튼튼하게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고난을 자랑하고 전수합니다. 학생들이 아픈 역사 이야기를 들을 때면 울면서 꿈을 키우고 각오를 다집니다.”
새에덴교회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로 완전히 자리매김했다. 매년 두 차례 대중문화콘서트와 뮤지컬 공연 등을 수천만 원을 들여 유치하여 지역주민들을 초청한다. 그동안 <점프> <난타> 등의 넌버벌(non verbal) 퍼포먼스와 뮤지컬 <맘마미아>를 비롯해 윤도현 밴드, 웃찾사 등을 초청해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피트니스클럽을 비롯한 교회 내 편의시설을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문화센터와 실버스쿨을 개설했다.
목사도 조용필의 열창처럼 해야
전문가들은 새에덴교회가 크게 성장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소강석 목사의 열정적인 설교와 독특한 예배 분위기를 꼽는다. 소강석 목사는 <월간 문예사조>로 등단하여 시집 5권을 출간한 시인이다. 소강석 목사는 설교시간에 설교 내용을 함축한 시를 발표하고 수준급 노래 실력으로 내용과 가사가 일치되는 찬송가를 직접 부르며 역동적으로 설교한다.
장모 정금성 권사와 함께한 소강석 목사.
“어릴 때 잠들기 전에 늘 할머니와 어머니, 누나한테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어요. 할머니가 저한테 ‘나중에 이야기 장사할래?’라고 하셨는데 목사가 되었습니다. 동화와 위인전을 많이 읽어서인지 남들이 딱딱한 강해설교, 교리설교를 할 때 저는 이야기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는 철저한 소통입니다. 2~3년 전까지 내러티브 스피치가 대세였다면 요즘은 아트 스피치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말을 몰랐는데 이미 오래전부터 그걸 실천하고 있었더군요. 드라마를 보거나 조용필의 열창을 들을 때면 목사도 저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연구를 많이 합니다.”
소강석 목사는 개척교회 시절부터 ‘살아 있는 예배, 감동적인 설교’를 위해 토요일이면 강단에서 설교 리허설을 했다. 리허설을 마치고 빈 의자를 하나하나 만지며 교회가 가득 차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엉엉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예배가 축제가 되도록 하기 위해 빈틈없이 준비하는 일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매년 두 차례 소 목사가 인도하는 자체 부흥회를 열어 교인들의 결속을 다지고, 소 목사의 마음과 생활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진솔한 목양칼럼을 주보에 게재한다.
소강석 목사는 자신의 약점으로 “기독교 가문에서 자라지 못해 아직도 도시적 세련미가 좀 떨어지는 편”이라고 자평했다. 실제로는 훈훈하고 포근하여 고향 같다는 평을 받는 그의 설교가 기독교 케이블 4개 채널을 통해 방영되면서 전국적으로 ‘팬’을 거느린 인기강사이다.
영상예배와 온라인 헌금 등 교회도 디지털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소강석 목사는 함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아날로그적 신앙의 전통을 강조한다. 저녁 예배가 없어지는 추세를 거슬러 일요저녁예배와 금요철야예배를 강화해 밤에도 교회가 꽉꽉 찬다.
교회는 비영리 단체의 모습 실천할 필요
소강석 목사에게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을 질문했다.
“한국교회는 민족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아픔을 보듬은 사회적·정치적 교회였습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당했을 때 함께 궐기했고, 기독교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순교를 많이 당하자 선교사들이 본질에 우선순위를 두라고 가르쳤습니다. 한국교회가 조금씩 탈사회화하면서 복음적인 교회로 돌아갔는데 이제는 본질에 충실하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죠. 역사인식을 바로하고 역사에 대한 책임을 가지는 것이 한국교회의 사명입니다. 정부가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예언자적 역할을 해야 합니다. 독일통일을 독일교회가 이루었습니다. 빈부, 진보 보수, 지역감정 등으로 갈라진 우리 사회를 한국교회가 하나로 잇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는 정치가들에게 “당리당략보다는 미래를 보고 소신껏 나라를 운영해 달라”고 당부했다.
“정부는 좋은 안이 있을 때 국회에 가서 비전을 설명해야 합니다. 국회는 일종의 시장입니다. 시장에 가서 물건을 잘 포장하여 팔아야지요.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 책임자가 국회에 나가서 통일한국을 바라보고 나라를 위해 마음을 모아달라고 진심을 다해 얘기하면 국민여론이 올라가고 국회의원들은 국민들의 뜻을 따를 겁니다.”
소강석 목사는 새에덴교회의 미래상을 ‘목회적 대형교회’라는 말로 정리했다.
“피터 드러커는 ‘앞으로 미국은 목회적 대형교회에 의해 이끌려 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비영리단체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투명하고 거룩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경을 받는 교회여야 영향력과 파급력을 가지고 시대를 주도해 나갈 것입니다. 목회적 대형교회의 본질은 영혼 구원입니다.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 가는 꿈과 비전이 있는 교회가 저의 목표입니다.”
뜨거운 용광로 목회를 했던 과거 방식에서 야채를 그대로 살려 다양한 드레싱으로 새로운 맛을 창조하는 샐러드 목회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소강석 목사는 교인 개개인의 개성을 인정하는 샐러드 목회를 하되 필요할 때 함께 힘을 모으는 용광로 목회를 병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본질은 변함이 없으나 상황은 변합니다. 본질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길 원합니다.”⊙
출처: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008100053&ctcd=&cpage=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