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아직도 설레는 고향길...부모님이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듯이, 나 또한 이 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풍요가 가득한 가을,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의 황금빛 들판과 탐스런 감과 마당 한가운데를 차지하며 마르고 있는 태양고추, 밭 가장자리에서 누렇게 익어가고 있는 호박,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산 가장자리에 핀 들국화는 감수성 많은 나의 사춘기를 마구 흔들어 놓은 꽃이다.
마당 한 귀퉁이에서 어머니의 손길 속에
피어난 국화꽃,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어머니가 그린 그리움은 무엇이었을까? 장독대엔 된장 고추장이 햇살아래 무르익어간다. 팔순이 넘은
부모님의 마음과 손길은 바쁘기만 하다.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이 모여든 고향집은 사람사는 집으로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송편을 빚고, 솔잎을 따고, 동생은 가재를 잡기 위해서 골짜기로 떠난다. 80년이 넘은 앞 뒷마당엔 이미 고목이어 생산성을 잃은
나뭇가지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안간힘을 쓰며 주렁주렁 열린 감들이 정겹고도 애처롭다. 팔순의 노부부의 농삿거리는 아직도 줄지 않고 곳간을 그득
채운다. 저 부진런함이 어디서부터 나온 것일까?
고향집은 편안하다. 80년이 넘은 옛집과 현대식 집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가옥,
그 옛집은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고 꿈을 만들어준 안식처다. 대가족이 함께 비좁은 잠을자고, 자란 곳이다. 그래서 시골집은 정감이 간다. 헐지
않을 작정이다. 뼈대를 살리고 옛모습을 유지한 채 우리들의 그리움을 녹여줄 그런 공간으로 함께하도록 할 것이다
-장독대옆 국화꽃-
전화벨이 울린다. 명절때만 되면 만나는 고향친구들이 대전에서 벌써 도착했나 보다.혼자만 살짝 빠져나와 늘
만나던 대둔산 자락의 수락계곡의 손두부 집의 막걸리가 우리들의 대화를 이어준다. 대둔산의 높은 기상을 보고 꿈을 키워온 우리들은 대둔산의 정기가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몇잔의 술을 나누고 수락계곡을 오른다. 가을 단풍이 절정을 이룰때쯤엔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그 아름다운 고향에 와 있다.
고향의 친구는 늘 변함이 없다. 언제 어느때 만나도 그리움이고, 우정이고, 사랑이며, 끈끈함이
존재한다. 뽐낼 것도, 주늑들 것도 없다. 감출 것도, 숨길 것도 없는 우리들도 어느새 퇴임 후의 인생을 그리기 시작하며 대화가 그쪽으로
이어진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굳게 잡는 손에서는 따뜻한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온다.
-옛집과 새집의 혼재-
산골의 땅거미가는 일찍 내리고 어느새 보름달이 둥그렇게 오른다. 고향의 보름달, 그 보름달은 우리의
소망이었고 꿈이었으며, 사랑이었고, 그리움이었으며, 설움이고 애잔함이었다. 서러운달이었고, 희열의 달이었으며, 가슴이 메어지는 설움 자체이기도
하였다.
둥근달, 시리도록 밝은 달이 부부를 끌어냈다. 살며시 빠져나와 걷는다. 여름밤이면 동네 사람들의 공동의 터전이었던 냇가에
앉아 내 삶을 잔잔하게 때론 흥분하여 들려주는 얘기 소리는 아내에게 생소할지라도 동경의 한 풍경이다. 벌써 찬기운이 휘돌고 시린 보름달은 깊은
잠에 빠진 이 고향마을을 밤새 비출 것이다.
한바탕 농악이 마을을 뒤흔들고 한편에선 윷놀이로 떠들석했던 그 풍경은 보기 어렵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성묘가 끝나자마자 자신의 터전으로 내빼는
그런 삶 속에서, 친구들의 얼굴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그렇게 바쁜 세상에 살고 있다. 정겨운 공동체, 풍물 소리에 온동네가 어깨춤을 들썩이며
흥겨움에 젖던 옛날의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우리도 서둔다. 성묘를 다녀오고 미사시간을 맞춰야 한다. 벌써부터 자식들에게 바리바리
싸줄, 갖가지 농산물들을 챙기느라 어머니는 바쁘시다. 작은체구에 어떻게 저리 큰 힘이 나오실까? 그렇게 한가위는 한바탕 북새통을 이룬다. 그게
사는 재미다. 고향은 그 사는 재미를 만들어주는 곳이다. 이처럼 온 가족이 너나할 것 없이 다 모이는 기회가 어디 그리 많은가? 현대사회가 그런
기회를 만들기가 어려운 구조로 가고 있다.
돌아올 수밖에 없는 현실에 익숙해져 있다. 그렇게 훌쩍 떠나온 한가위 명절.. 이 번
추석은 풍년으로 풍요가 가득했다. 자식과 손자, 손녀들이 모두 참석한 금년 한가위는 부모님이 그 어느때보다 기뻐하셨다.
'언제나 한가위만 같아라' 풍요와 사랑이 만들어준 풍경이다.
-경갑룡 주교님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