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복동 단팥죽
그럭저럭 지겹고 힘든 수업 7교시가 끝나고 청소당번들이 청소 준비에 한 참 바쁜데 김도곤이 내게 살금살금 까치발로 다가오더니 뭐 좋은 일 없냐며 몸을 배배꼬고 물었다.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몸을 배배 꼬았자 귀엽기는커녕 둔하고 밉살스럽기만 한 김도곤의 체형이다.
그러나 그를 미워 할 수 없는 것은 그 웃는 모습이 천진스럽고 천연덕스러워 그럴 때의 김도곤을 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
김도곤이 뭐 좋은 일 없냐는 말은 우리가 얼른 듣기엔 뭐 공부 더 할 일이나 아니면 여학생이라도 만날 일 없냐 그런 것으로 알기 쉽지만 김도곤이 이렇게 묻는 것은 전혀 다른 생각이 있어서다.
쉽게 말해서 뭐 먹을 일 없냐는 말이다.
부산 보수동에 단팥죽 집으로 유명한 만복당이 있었습니다.
옴방한 하얀 우동 사기그릇의 만복당 붉은 단팥죽은 솜씨 좋은 우리 어머니가 아무리 정성껏 끓여주셔도 그 맛을 따라가지는 못했습니다.
몇 년 전 성북동 스님부부와 아오모리로 골프투어 갔을 때 호텔뷔페에 나왔던 단팥죽도 만복당의 맛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지금 옛 추억이 다 흩어졌어도 만복당의 그 단팥죽에 대한 향수는 금방 쪄낸 찐빵 같이 생생하게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만복당 모르면 그 사람은 부산 사람 아니라고 할 만큼 단팥죽 하나 만은 확실했던 집이었습니다.
- 야 쎄이야
- 왜?
- 오늘 망복당 안갈끼가?
- 사주는 거야?
- 에이 잘 알몬시로
- 지난번에 그렇게 혼나고 아직 정신 못 차렸냐?
- 묵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조타 카더라
- 누구 누구 갈 거냐?
- 응 알랑미하고 찐계란하고 또 한 놈 더 있다
- 그래?
이렇게 해서 우리 절친 다섯은 방과 후 만복당을 가기 위해 학교에서 다섯 정거장 정도되는 보수동까지 뛴다 싶은
걸음으로 걸어갔습니다.
만복당 주인은 참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은 학생들에 한해서는 아무리 짓궂은 일을 당해도 다음날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깜빡 건망증이 있었습니다.
밤 도둑도 손님은 손님이라 했는데 어쨌던 단골은 단골인 우리 다섯이 만복당 앞에서 가게 안의 분위기를 정밀 탐사하고 있는데 팥소쿠리를 들고 나오던 주인은 며칠 전 사건을 잊고 또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 추운데 바께서 모하노? 안들어 오고
- 안녕하십니까?
- 앉아라 다섯그릇이가?
- 예
며칠 전에도 기분 좋게 먹고 회오리바람처럼 사라진 우리는 오늘도 도망가다 잡히면 잡히는 놈이 단팥죽 값을 책임
지기로 하고 만복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늘의 운세처럼 똑 같은 수법으로 범행을 하는데도 언제나 머리가 나쁜 놈이 있기 마련이고 그 나쁜 놈이 뒷일을 수습하기 마련입니다.
오늘도 나는 뒷일을 생각해서 문 앞쪽에 앉기 위해 이 핑계 저 핑계로 제일 늦게 들어갔습니다.
먹고 튀는 데는 자리배치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죠.
단팥죽 집뿐만 아니라 먹을 것 앞이라면 범행 후 도주로 따윈 신경 끄던 김도곤이가 오늘은 항상 앉던 문 앞의 내 자리에 나를 밀치고 억지를 부리며 재빨리 앉았습니다.
평소에는 제일 먼저 입장해서 제일 안쪽의 자리에 장군처럼 버티고 앉는데 오늘은 완전 뒤바뀐 김도곤의 돌발행동
에 잠시 어리둥절해 있는데 김도곤은 마치 자기가 단팥죽 값을 낼 것처럼 떠듭니다.
- 아 아재 여기 단팥죽 네개하고 곱빼기 한 개 주이소
- 와 니는 곱빼기가?
- 알라들하고 지하고 같심니꺼? 고기 근 수가 틀리는데예
- 돈은 누가 낼끼고?
- 아따 아재 우리가 언제 돈 내고 묵었심니꺼 묵고나서 돈 안냈지예
- 엉? 그랬나?
언제 우리가 돈 내고 먹었나 먹고 나서 돈 안 냈지.
김도곤은 언제나 이렇게 정직하긴 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김도곤이 돈 안 냈지 에서 안자를 교묘히 적게 발음해 버려 김도곤의 돈 안 낸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돈 낸다는 뜻으로 받아 들인 것입니다.
어쨌던 단팥죽 집 안으로 들어가서 김도곤이 문 앞 도주명당자리인 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으니 오늘은 한 놈 경을 치긴 칠 모양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나쁜 직감이라 나는 몇 번 망설이다 에라 모르겠다 김도곤이 항상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 던 말에
용기를 얻고 일단 들어갔습니다.
내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알랑미를 비롯한 찐계란 감초는 그래도 이등석쯤 되는 자리에 앉았고 어쩔 수 없이 내가 제일 꼴찌로 입장했지만 내가 제일 위험한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서로 튈 기회를 노리며 신경전을 벌이면서도 맛있게 단팥죽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토끼라 하면 앉았던 자리에서 토끼처럼 튀어 올라 튀어야 합니다.
건망증이 심한 만복당 주인이라 해도 당일 현장에서 튀다 걸리면 그 걸린 놈은 확실하게 죽여줍니다.
절대 용서가 없는 냉혹한 사람이었습니다.
먹고 튀다 잡힌 학생들의 바지 신발 시계 빈 책가방 친구인 듯한 여학생사진 빈 샬렘담뱃갑 양말 주머니 16구 하모니카 찌그러진 지포라이터 뚜껑 깨진 빠이롯트만년필 오늘 이야기가 다 끝나도 열거 할 수 없는 돈 안 되는 물건들이 뒷방에 가득했습니다.
모두 단팥죽 먹고 튀다 잡힌 학생들에게서 빼앗아 보관하고 있는 물건들이었습니다.
만복당 주인은 아무리 먹고 튀다 잡혀도 학생들의 책이나 모자 학생증 명찰이 달린 교복 윗도리 등은 절대 빼앗아 두지 않았습니다.
당시엔 우리들의 소견이 좁아 만복당 주인의 깊은 뜻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분의 뜻을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오늘은 내가 제일 구석 자리에 밀려 앉았으니 큰 낭패였습니다.
제일 덩치 큰 김도곤이가 튀면 김도곤의 체구가 빠져 나가기도 벅찬 작은 문을 사용해야 하니 0.1초안에 튀어야 하는 우리들이 빠져 나갈 구멍은 쥐구멍 만한 여유도 없기 때문에 온갖 지혜를 다해 탈출 작전을 짜느라 단팥죽 맛을 음미할 마음의 여유도 없이 먹어야 하는 내 가슴은 타 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단팥죽은 맛있었고 먹을수록 입맛은 당기고 단팥죽이 그릇에서 줄어 들수록 초조해 졌지만 그래도 한 그릇 더 먹고 싶을 지경이었습니다.
알랑미도 체구는 작아도 먹는 속도 하나는 야구공 던질 때의 속도와 맞갑니다.
알랑미는 우리 팀의 포지션이 투수거든요.
조그맣다 못해 짤다막한 체구에서 속구가 나오는 것 보면 참 신기합니다.
알랑미가 두 번째 그릇을 비우고 있는 김도곤의 단팥죽 그릇에 슬그머니 숫가락을 집어 넣었습니다.
갑자기 먹던 사료에 침범한 고양이 쫓듯 알랑미의 숟가락을 자신의 숟가락으로 탁 쳐내며 얼굴로 단팥죽 그릇을 막고 겁나게 째려 봅니다.
움찔 뒤로 몸을 뺀 알랑미는 딴전을 피웁니다.
한 없이 너그러운 김도곤도 먹는 것 앞에서는 눈물도 피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다행이 알랑미는 더 이상 김도곤의 단팥죽 그릇에 자신의 양은숟가락을 찔러 넣지 않았습니다.
이제 김도곤이 마지막 남은 단팥죽 그릇을 비우면 운명의 시간은 시작됩니다.
문득 출입구 문 앞에 놓인 커다란 검은 항아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것은 만복당 주인이 단팥죽을 끓일 때 사용하는 삶은 팥을 재어두는 항아리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항아리 밑에 만화책 한 권이 있었습니다.
- 아저씨 저 만화책 저 주시면 안됩니까?
- 학생이 공부책 봐야재 만가책 보면 뭐하노?
- 아뇨 저 책 안 쓰면 우리동생 가져다 주려고요
- 니 동생이 몇살이가?
- 인제 6살입니다
- 알라가 빨리 글 깨쳤네 그라문 가가라
- 고맙습니다
나는 일어나 항아리를 들었습니다.
무척 무거웠습니다.
김도곤을 일어나라고 해서 내가 들었던 항아리를 맡겼습니다.
김도곤은 내 말에 마지 못해 일어났지만 그릇 밑바닥에 남은 단팥죽 때문에 알랑미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알랑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반쯤 일어나 그 항아리를 안았습니다.
만화책을 집었습니다
그 때 김도곤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엉거주춤 검은 항아리를 든 체 내게 말했습니다.
- 니 동생이 언제 생깄노 너그 아부지 실력 존네?
- 야! 토끼라 지금이다
- 절마가야!
기회는 언제나 단 한번뿐인 법.
김도곤이 내가 넘겨 준 항아리를 들고 있는 사이 알랑미 찐계란을 비릇한 우리들 네 명은 멋지게 벌처럼 날아 자유의 보수동 거리로 무사히 탈출했습니다.
우리가 튀고 난 다음 김도곤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날은 알 수 없었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그 후 김도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새로 생긴 제 애인 때문에 바빠서 여기서 물러갑니다.
헐^
김도곤
너 아직도 항아리 들고 서 있냐?
그러니까 잔꾀 부리면 안되는겨.
첫댓글 자리는 제일좋은자리 앉아서 오늘또 당했군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지만 미루어 짐작컨데 주인한테 당한게 뻔하군요.
잔꾀에 빠저 넘어젓으니 팟죽값은 당연히내는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나는 학창시절에 빵집과 짜장면집에서 그랫던 생각이나서 이른아침에 한없이 웃어봅니다.
제미있는 글 보며 너무 즐거웠슴니다.
젠틀맨님도 그런짓을? 나뿐 사람.....^.*
학교 다니면서 그런 추억 없는 사람 없을 것 같습니다
고운 마음으로 오늘 대보름 즐기십시오
학창시절의 추억 제미있게 보았어요., 남학생들의 세계는 독특헸군요.
팟죽집에 빼앗아놓은 소지품만 생각해봐도 그때당시의 학생들이 얼마나 짓궂었나를 알수있군요.
아~ 모....나....리.....니........임
가슴이 떨려서 마음이 생숭거려 답글도 몬써겠심니더.......우예야 좋을까? 미치겠네.
^.* 전 원래 여자 앞에선 항상 이렇게 가슴 떨리는 병이 있답니다.
이때까지 전 좀 여성스러운 불루인줄 알았는데 오늘 레드란걸 학씰히 알아 또 병 도지나 봐여...^.*
오늘 대보름이라며요?
가족과 함께 풍속 음식드시면서 행복하십시오
일생의 가장 인상깊었던 일들이 학창시절 다음에는 군대생활 할때 같아요.
저도 꽤나 구잡을 떤다고 했슴니다만 불루보트님께서는 좀 유별나게 제미있는 학창시절을 겪은것 같슴니다.
제미이있는글 잘봤슴니다.
이슬김님의 닉에서 풍기시는 것이 정말 재미난 분이란 겁니다.
허물없고 스스럼 없는 마치 천년지기 벗처럼 격의 없는 그런 분...그런 분이니 당연히 개구장이 짓 많이 했겠죠.ㅎ
지난 추억은 사라질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함께 옛날 생각해 볼 수 있어 저도 기쁩니다.
만복동 팟죽집 얼마나 맛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시절에는 아마도 무엇이되었던 맛있을때입니다.저같은경우에는 시골서 학교 다닐때라 하학길에 시제지내는대가서
막걸리도 얻어먹었던 시절이었슴니다. 나의 학교시절은 배곺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추억에 젖다보니 다시 기억하고 싶지안은 생각이 납니다.
제미있는글에서 젊음이 풀타던 시절을 생각합니다.
둘이 먹다 셋 죽어도 모릅니다
한번 맛보면 완전 중독 증세 일으킵니다
부산 사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당연히 만복당 단팥죽 때문이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있을 지 모르겠네요.
김도곤 사건이란 타이틀을 보며 큰 범행 사건인가하고 깜짝놀랐슴니다.~~ㅎㅎ
그러나 놀랄만한 사건이 아니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였슴니다
안도의 숨쉬고 돌아갑니다. 아름답던추억 누가보아도 제미있겠슴니다. 건필하세요^^~~
아 사건.....네 김도곤이 사고 칩니다...조금있으면요...여학생 앞에서.....ㅎㅎㅎㅎㅎ
진짜 놀랄만한 사고 치죠....그래서 김도곤 사건이라 타이틀 붙인겁니다
그런데 오늘 보름인데 정민님은 달맞이짚불 쥐불놀이 안가시나요?
아~ 깡통에 불 넣고 빙빙 돌리며 논두렁 달리던 옛날로 가고 시퍼요
누구보다도 남다른 학교시절의 활동을 뒷밭침하는 제미나는 글입니다.
김도곤 친구분 체구도 크고 운동선수라서 체격을 앞세우고 팟죽집에서도 무시할만한 존제가 아닐게 생겼는데
그,귀추가 주목할만합니다. 무서워서 돈을 안받아버리지 안았을지도 모르겠네요.
김일수님 대보름 산에 갑니까?
쥐불놀이하러 ......옛 추억 그리운 날이죠?
허지만 장사는 썩은 생선 한토막 때문에 십리 간다는 말이 있는데 팥죽값 안받았겠어요?...ㅎㅎㅎ
일수님이시라면 몰라도....아름다운 밤 되세요
김도곤씨를 당혹스럽게만든 장본인은 만화책때문에 그렇게 되었군요.
만화책만 아니엇어도 꼼짝없이 불루보트님이 당했는데 잘빠지셨슴니다.
그렇죠 김도곤에겐 운명의 만화책이었고 제겐 행운과 구원을 준 만하책이었죠...ㅎ
오늘 대보름 가족과 즐거우셨죠?
꾸밈새없는 솔직한 맛이보이는 아름다운 학창시절 불루보트님 글솜씨에 빠저보는 순간 제미있게 머물다 갑니다.
고운밤 되십시요.
초혼님도 정월 대보름 가족과 함께 쥐불놀이라도 하셔야 할텐데.....날씨가 안 받혀 주죠?
남은 시간 평안하게 보내 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