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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장 강해 일부 고통하는 때의 복음
디모데후서 3장1-디모데후서 3장 12
요절 디모데후서 3장 1절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며칠 있으면 자신은 순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죽은 후 낙원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고 평안히 쉴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디모데는 고통하는 때가 올 것을 생각합니다. 바울은 남아 있는 디모데에게 고통의 때에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 고통하는 때의 복음을 가르칩니다.
(1) 말세는 하나님보다 자기와 돈을 더 사랑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바울은 말세가 이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는 창세가 있고 현세가 있고 말세가 있고 내세가 있습니다. 말세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부터 재림할 때까지를 의미합니다. 지금은 말세고 말세의 끝 곧 말세지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2000년이 흐르고 과학문명의 발달로 세상에는 세상은 테크노피아, 컴퓨터피아가 이르러 살기 좋은 세상이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세가 지속될수록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말합니다.
고통하는 때가 영어 성경에는 terrible times(niv), difficult times(nasv), time of stress라고 했습니다. 이는 말세가 얼마나 끔찍하고,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는 때인가를 말해 줍니다. 바울은 문명의 발달 속에서도 인간의 영혼의 고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즘에 과학이 발달하고 풍요로운 물질 문활를 누리고 있지만 사람들은 일이차 세계대전과, 요즘에는 팬대믹이 일어났습니다. 인간이 소외되고, 자연이 파괴되어 사람들은 고통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통의 때는 해가 뜨기 전의 어둠과 같습니다. 새벽 전은 가장 어둡습니다. 이런 어둠 후에 아침 해가 떠오릅니다. 말세 다음에는 예수님이 재림하는 내세가 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옵니다. 바울은 이런 미래를 말해주면서 디모데에게 이것을 알라고 합니다. 우리가 미래가 고통하는 원인을 분명히 알아야 미래를 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말세에 고통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말세의 징조로 19가지 끔찍한 현상들이 나옵니다. 이런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가치관이 전도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올바른 가치관은 하나님-인간-만물 순으로 중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잘못된 가치관으로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가 자기이고, 둘째가 물질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말세가 될수록 자기와 물질을 우상 숭배합니다.
먼저,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해야합니다. 이곳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이나 이웃보다 자기를 사랑합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왕이 되고 내가 주인이 되고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철저한 이기주의, 자기중심적인 삶을 말합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고 자기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나동설을 주장합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자기만 좋으면 남이야 어찌되든지 상관치 않습니다. 남을 짓밟아서라도 철저히 자기 유익만 챙깁니다. 이웃집에서 도둑이야 하면 아무도 나오지 않지만 불이야 하면 자신이 타 죽을까봐 얼른 나옵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이 되다 보면 가정이 파괴됩니다. 이렇게 나를 중심으로 부부가 결혼하면 행복할 리 없습니다. 부모도 자식을 버리고 바람나서 집을 나갑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손자를 돌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손해를 보지 않고자 합니다.
손해 보지 않으면 가정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결혼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밥도 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돈도 벌어야합니다. 희생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세에 갈수록 사람들은 절대로 손해 볼 수 없다고 합니다. 똑똑한 처녀들이 노처녀들이 됩니다. 결혼해도 애기를 낳지 않고자 합니다.
이기심과 자기중심주의에서 모든 죄가 나옵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면 자신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고독합니다. 허무해지고 기쁨이 없습니다. 이기주의는 자기가 파놓은 함정입니다. 손해를 보아야 행복합니다. 우리가 손해를 보고자 하면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합니다. 과거에는 그래도 명분을 중히 여겼습니다. 충성이나 효와 같은 명분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세가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돈에 미치게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죽어 지옥에 갔습니다. 아들도 죽어서 지옥에 왔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 지옥 오지 말라고 도둑질해서 돈 벌어주었는데 왜 지옥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공짜돈을 주어서 공짜돈을 쓰다고 보니 지옥 왔다고 합니다.
돈은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자나깨나 돈, 죽으나 사나 돈, 돈에 미쳐서 살아갑니다. 돈만 된다면 무슨 짓이든지 합니다.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아내가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죽이고, 심지어 자식의 손가락을 자르고 자신의 발가락을 자릅니다. 돈 더 받으려고 꽃게에 납을 넣고 참깨에 타일을 칠하여 팝니다. 부산에서 사는 정두영이라는 자는 천안에 와서 처음으로 여자와 미래의 장모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여자와 장모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10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10억을 모으고자 하는 목표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고급빌라를 다니며 돈을 훔치고 목격자를 9명을 다 죽였습니다. 죽인 이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돈을 버는데 방해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할 때 여러 가지 부도덕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선, 교만해집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자신을 자랑합니다. 남을 무시하고 교만합니다. 현대인들은 교만합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교만하면 망합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잘났다고 합니다. 요즘에 사회의 복잡한 문제가 교만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는 자는 남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기보다 남을 판단하고 비방합니다. 서로 상처를 받습니다.
다음으로, 감사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니 자연히 부모에 대한 감사가 없고 부모를 거역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도, 육신의 아버지에게도 불효합니다.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고마워할 줄 모릅니다. 고마운 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고맙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원망 불평불만이 많습니다. 거룩하지 않고 더러운 정욕을 추구합니다. 자기의 성욕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절제가 없어집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긍휼이 없고 무정합니다. 원통함을 풀지 않고 복수하고자 합니다. 사나워집니다. 어떤 부부가 있는데 부인이 죽어갑니다. 부인이 죽어가면서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부인이 “내가 당신의 금고에서 만 불을 꺼내서 당신의 친구와 놀아났습니다. 당신의 애인을 이 동네에서 쫓아냈습니다. 당신의 탈세를 고발한 것도 나입니다. 미안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조금도 미안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에게 독약을 먹인 것은 나야” 고 하였습니다.
아무 잘못이 없는 다른 사람을 중상모략하고 모함합니다. 감정이나 말이나 식사를 절제하지 못합니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기분 나쁘면 사납고 무자비합니다. 요즘의 영화가 잔인합니다. 사람들의 감각이 점점 무뎌지고 있습니다. 잔인한 자는 악을 즐깁니다. 사람 죽이는 것을 즐기고 전쟁을 즐기고 강도하는 것을 즐깁니다. 조급합니다. 공중전화를 오래한다고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칼로 찔러죽입니다.
한 천사가 사람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여행하는데 두 사람이 가는데 천사가 따라갔습니다. 천사가 두 사람에게 한 가지 소원을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소원을 먼저 말하며 그 소원을 들어주고 다음에 말한 사람은 그것에 대해서 곱빼기로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욕심쟁이고 한 사람은 질투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헤어질 때쯤 되어서 욕심쟁이가 질투하는 사람의 목을 조이고 한 가지 소원을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목이 조인 사람이 내 눈을 하나 빼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목을 조인 사람이 두 눈이 빠집니다.
(2)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에게 손해가 되면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조급합니다.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자만합니다.
세 번째 전도된 가치관으로,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더 쾌락을 사랑합니다. 좀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떠나 원조교제, 묻지마 관광을 즐깁니다. 남녀 관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변태 성욕자가 나옵니다. 동성끼리 관계를 갖고 심지어 짐승과도 관계를 갖습니다. 부부를 바꾸어 자는 스와핑도 합니다. 사람들은 방탕하고 비도덕적으로 됩니다.
이런 세상에서 더욱 더 무서운 것은 교회 안에서의 타락입니다. 말세가 이르면 종교지도자들마저 빛 좋은 개살구가 됩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구제하고 금식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경건은 모양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얼마나 죄와 세상을 이기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여유 있게 이웃을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형식만 있고 내용은 없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처럼 회칠한 무덤과 같습니다. 금과 은은 있는데 예수님의 능력은 없습니다. 교회도 다니고 예배도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거룩함을 잃어버립니다. 크리스천들이 혼전 순결을 지키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이혼합니다. 물질적인 부정부패가 많습니다. 이권을 위해서 서로 치고 받고 싸웁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자에게서 돌아서라고 합니다. 상관하거나 교제하지 말아야합니다. 관계를 분명히 끊어야합니다.
(3) 마술사와 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6-9절을 보십시오.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
이렇게 쾌락을 더 사랑하는 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마술사처럼 신앙생활하는 자입니다. 마술사는 속이는 자입니다. 마술사는 재미로 속이지만 이들은 위선적이 되어 독사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줍니다. 그들은 영적인 지식을 가르친다는 미명 아래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서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합니다. 선량한 여인들을 유혹하여 가정을 파괴시킵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자입니다. 당시에 학자나 예술가를 가정에 초청하여 배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가서 이단 사상을 가르칩니다. 이처럼 말세에는 종교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기보다 오히려 죄를 짓게 하고 영적인 기쁨보다 고통을 줍니다.
요즘도 어떤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말씀은 잘 전하지만 남녀 관계에서 타락해 있고 물질적으로 타락해 있습니다. 만민중*교회의 이*록 목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여러 여자들을 성적으로 타락시키고 교도소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들의 유혹에 넘어간 여인들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도 자기 욕심에 끌린 바 되었습니다. 이들은 배워도 진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들이 왜 배워도 진리에 이르지 못할까요?
첫째, 그들은 죄를 중히 지고 있습니다. 죄를 죄인 줄 모릅니다. 죄를 짓고 반복하여 짓고 죄짓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시킵니다. 나만 죄인인가 다 죄인이지 하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하면 죄를 회개하지 못합니다. 내 죄를 뉘우쳤으면 그냥 회개해야 합니다. 누가 고자질했느냐 너는 잘 났냐 하면 회개하지 못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이 반복되면 마음이 완악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회개합니다. 회개는 은혜입니다. 회개할 마음이 있고 용기가 있어야 회개합니다.
다윗왕은 이런 점에서 위대합니다. 사람의 이름 중에 다윗의 이름이 팔백 번 이상 나옵니다. 그는 진실되다고 말합니다. 그는 나단의 지적을 받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는 시편에서 한 번도 밧세바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집트의 바로왕 같은 사람은 마음이 완고해졌습니다. 그는 죄의 지배를 받아서 회개할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둘째는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립니다. 욕심이 지나치면 아무 진리도 없습니다. 진리를 들어도 들리지 않고 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가시덤불과 같은 밭과 같습니다. 씨앗이 있어도 씨앗이 자라지 못합니다. 질투가 생기고 원망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라고 합니다. 낚시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낚시할 때도 마음을 비워야합니다. 꼭 잡겠다고 큰 것을 잡겠다는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성경공부도 마음을 비워야 순수한 성경공부가 됩니다. 성경공부도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순수하게 공부해야합니다. 성경도 욕심으로 공부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지혜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고 왜 사는가? 죄는 무엇인가? 죄에서 어떻게 자유할 수 있는가? 왜 죽는가 영생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성경공부를 통하여 이런 것의 답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욕심으로 성경공부하는 자들은 아무리 배워도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번영하고 복받으려고 성경을 공부하는 자는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진리의 예수님께 이를 수 없습니다. 성장이 없고 열매가 없습니다. 이들은 마음이 비틀어진 사람입니다. 그들은 이미 심판 받은 자입니다.
호세아서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합니다. 욕심에 이끌리는 자는 배우는 것 같으나 배우지 않습니다. 듣는 것 같으나 듣지 않습니다. 순종하는 것 같으나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욕심에 끌려서 배우고 진리를 얻지 못한 자가 가룟유다입니다. 그는 삼년 동안 많은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욕심에 이끌려서 끝까지 예수님을 배우지 못하고 진리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오래 믿고 직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진리가 그 마음 속에 없습니다.
목자가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목자에게 요나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요나는 악한 심성으로 40일 후에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요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도 구원 받을 사람은 구원 받습니다. 또한 가룟유다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변화시키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예로 얀네와 얌브레가 있습니다. 얀네와 암브레는 모세에게 대항했던 애굽의 마술사들입니다. 바울은 얀네와 얌브레를 지난 날의 악인의 모형으로서 언급합니다. 말세의 위기적인 상황에서 이단들도 이들과 똑같이 진리를 대적합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합니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습니다. 이들은 마음이 여러 가지 욕심으로 부패하여 썩어버렸습니다.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이성이 가지는 비판 추리기능이 없습니다. 보다 깊은 진리를 추구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성경공부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관해서는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어디까지는 능력을 행하지만 마술의 한계에 부딪혀 더 이상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모세를 대적한 마술사처럼 이단의 세력도 표적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들로 나일강을 피로 변화시키고 나일강에서 개구리가 올라오게 하였습니다. 마술사의 어리석음은 곧 이의 재앙에서 드러났습니다. 그와 같이 이단의 세력도 결국은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볼테르는 철저한 무신론자입니다. 그는 돌아다니며 백년 후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파리 큰길을 다니면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을 하고 다닙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하나님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죽을 날이 가까웠습니다. 그는 의사에게 육 개월을 더 살게 하면 재산을 다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6분도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나는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구나 하면서 죽었습니다. 이렇게 진리를 대적하면 점점 악의 수렁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는 결국 어리석음에 빨려갑니다. 바로도 어리석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바로는 첫 번째 재앙만 받아도 회개해야하는데 욕심에 끌려 회개하지 못하고 열 가지 재앙을 받습니다. 나중에 또 이스라엘을 따라갔다가 홍해에 빠져죽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너희는 완고함을 면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자는 항상 공부하고 기도해도 소용없습니다.
(4) 바울은 복음적인 삶을 간증합니다
10-12절을 보십시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바울은 이런 영지주의자들과 달랐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간증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목자로서 좋은 본을 보였습니다. 말세의 증상들에서 떠나 복음 진리를 가르치고 생활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 건설에 나의 생활 목표를 두고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다음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물질을 다스렸습니다. 바울은 고난을 오래참고 핍박하는 자를 사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인내를 본받아 살아왔습니다. 도덕적으로 선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매사에 경건의 본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도 바울에게는 영광과 칭찬과 인정보다는 늘 고난과 핍박이 따랐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는 죽을 고비를 많이 겪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로 침을 당하여서 거의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디모데도 이것을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위기에서 바울을 건져주셨습니다. 주님은 사명을 감당하도록 그를 건져주셨습니다.
이 세상은 죄악되고 경건치 못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박해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악한 세상에서 핍박을 받지 않으면 이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당연히 핍박을 받습니다. 절대 신앙을 지키면 핍박을 받습니다.
악한 사람에게 칭찬 받으면 악한 사람입니다. 악한 사람에게 욕을 받아야 선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핍박 받았으므로 제자들이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진리대로 사는데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느냐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경건하게 살면 악한 사람의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 같이 불의하면 불의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의롭게 살면 그렇지 못한 사람이 정죄를 받습니다. 다 타협해도 한 사람은 타협지 않습니다. 그러면 타협하는 사람의 죄가 드러납니다. 거짓말 안 하고도 장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다 컨닝할 때 컨닝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거짓말하고, 컨닝하는 사람들은 이미 심판을 당하고 있습니다.
핍박을 통해서 진리는 드러나고 믿음이 성장합니다. 핍박이 있어야 열심이 생깁니다. 교회는 핍박이 있을 때 질적으로 부흥합니다. 핍박이 없으면 교회가 타락하고 세속화됩니다. 핍박을 통하여 선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노아가 죄악된 시대에 핍박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죄 많은 세상에서 핍박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결론) 자기와 돈과 쾌락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자
말세의 고통하는 때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말세의 때에 고통하지 않기 이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합니다. 자기나 쾌락이나 돈은 우리가 사랑해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 고통하지 아니하고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 첫째, 이웃 둘째, 나 셋째가 기쁨의 비밀입니다. 이것이 JOY입니다. Jesus first, Others second, You third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천 대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세 고통하는 때에 자기나 돈이나 쾌락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므로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디모데후서 3장 강해 일부 고통하는 때의 복음
디모데후서 3장1-디모데후서 3장 12
요절 디모데후서 3장 1절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디모데후서 3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
첫댓글 말씀이 참 좋슴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