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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축 우보만리 한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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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서울성곽 서대문구간 답사기
우보만리 추천 0 조회 183 12.05.10 21: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경향신문 앞에서 신문로를 건너면 축대 겸 언덕에 전망대가 있다.

여기서 길을 굽어 보면 가운데 무언가 있다.

 

 

사진: 길 가운데 점들이 서대문(돈의문) 있던 자리 표시다.

 

 

 

사진: 서대문 상상도

 

 

새문,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돈의문은 도성 4대문 4소문 중 서쪽 대문으로 보통 서대문이라고 부른다.

이름에 의(義)가 들어간 것은 오상(五常)-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중

(義)가 서쪽 방향이기 때문이다.

 

태조 5년 (1396년) 처음 도성을 지을 때는 서쪽 대문을 사직단에서

독립문 넘어가는 언덕 그러니까 지금 사직 터널 근처에 냈던 모양이나

세종 4년 (1422) 위 사진 지점으로 옮긴다.

 

세종 때 새로 냈다고 새문, 그 문 안쪽이라고 새문안 이라 부르던 것이

600 년이 지나고 문도 없어져버린 지금까지  새문 신문(新門) 새문안이다.

 

지겨워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라는 말은 상대적이다.

필자 어머니는 우리 집안으로 시집 온지 60년이 다 된 헌 댁이지만

얼마 전 돌아간 노인 한 분은 그저 새댁으로 불렀다.

분가(分家)한지 백 년 넘고 돌아가신 지도 옛날이지만 새집 할배는 새집 할배다.

수 백 년 전 영국 York 이름을 딴 미국 도시는 아직 새 요크 (New York)다.

 


 


사진: 19세기 말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글씨가 보이니 성 밖에서 찍었을 텐데 적십자 병원 쯤일까?

성벽까지 바짝 붙어 집이 이어졌고, 가가(假家)를 내달아 길이 몹시 비좁다.

 

 

 

사진: 전차가 다니던 시절 서대문

 

찍은 장소는 처음 사진과 거의 같이 보이는데 전차 선로가 있다.

그 덕인지 길이 좀 넓어 졌다.

이 대목에서 요즈음 한참 뜨는 뉴라이트 들이라면 거 봐라

일제(日帝) 때문에 덕 본거 아니냐 하며 식민지 근대화 운운 하고 나올 것 같다

 

1915년 3월 돈의문(서대문)은 도로 확장 때문에 헐린다.

 

 

동양극장

 

여기서 잠깐 정동 경향신문사 앞에서 길 건너기 전으로 되 돌아가

서대문 로터리 쪽으로 내려가 본다. 농업박물관 앞 길가에 표석이 있는데

동양극장터 (東洋劇場址) 라고 쓰여 있다.

 

 

 

사진: 동양극장 표석

 

KBS 드라마로도 나온 바 있는 동양극장은 1935년 세워져 일제 때 날리던 곳이다.

 

 

 

사진: 동양극장.

간판에 적힌 청춘좌(靑春座)는 호화선과 같이 동양극장 전속 극단이었다.

 

여기서는 영화가 아니라 연극을 상연했는데 기생들이 많이 왔고

그들의 (評)이 또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좀 유치하지만 눈물 질질 짜는

신파를 전문으로 했는데 그 이름도  유명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어머니의 힘,

검사와 여선생 이 여기서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그 좋던 세월도 다 가고 해방 후 연극이 아니라 영화를 트는데

그것도 겨우 3류 극장이 되다가 76년 문을 닫고 그 뒤 건물마저 없어진다.

 

 

 

 

4.19 기념회관 서대문 경무대 (이기붕 집)

 

동양극장 옛터 표석에서 큰길 건너편을 보면 4.19 혁명 기념회관이 있다.

 

 

사진: 4.19 기념회관

 

여기에 자유당 때 이기붕(李起鵬)과 박마리아가 살던 집이 있었는데

비꼬아서 서대문 경무대라고 했다. 성곽 답사 글 쓰면서 4월 혁명의 역사적 의미가

어떻고 나가기는 적당치 않으니 필자 개인적 기억만 적어본다.

 

 4.19가 일어나니 이 서대문 경무대를 데모대가 에워쌌다.

누가 질렀는지? 하여튼 불까지 났다.

집 안에 돈 봉투가 굴러 다니고 바나나 까지 나오더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요즘 바나나 하도 싸서 과일 같지도 않지만 그 땐 욕 먹을 정도로 귀하여

아무나 먹는 것이 아니었다. 돈 봉투 몇 개를 누가 슬쩍 챙기다 걸렸다 더라

마치 본 듯이 떠 드는 통에 당시 국민학생이던 필자와 동네 아이들은

우리도 가 볼걸 했다 

 

 

서대문은 너무 멀고 종로 5가에 있는 은행도 (아마 한일은행) 불 났는데

구두닦이들이 돈을 막 주워 가지고 나왔다고 하더라 하여 애들끼리 가 보았다.

탈 생각은 감히 못하고 걸어서 가는데 신당동 집에서 꽤 멀었다.

막상 가니 불은커녕 멀쩡하기만 했다. 괜히 배만 쫄쫄 굶고 돌아 왔는데

그 중 한 놈이 지 엄마한테 그걸 또 다 말해 동네 웃음거리가 되었다.

대신 동묘 앞 파출소는 확실히 불 타 탄피 주워서 팽이에 박을 수 있었다.

 

하여튼 그때까지 이승만 박사 최곤지 알고 생일날이면(필자보다 하루 늦음)

존경하는 대통령 할아버지 만수무강 하셔요 하는 글 짓기 대회까지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박사 참 나쁘다 하니 혼란스러웠다.

 

 

적십자병원과 경기감영

 

서대문 로터리 적십자 병원은 조선시대 경기감영(京畿監營)자리다.

 

 

경기감영도, 작자미상, 19세기, 종이에 채색, 135.8 x 442.4 cm, 호암미술관 소장

 

오른 쪽 끝에 성벽과 서대문 문루가 보인다.

중앙에 경기감영이 있고 그 위 쪽으로 산들이 있는데

오른 쪽 뾰족한 봉우리는 생김새로 보아 북악(北岳=白岳)이고,

가운데는 위치적으로 인왕산, 왼쪽은 안산(鞍山, 길마재 곧 무악)일 것이다.

서대문에서 감영 쪽으로 수평으로 벋은 길이 지금 신문로고

감영을 돌아 위쪽 인왕과 무악 사이 길마재 쪽으로 난 길이 옛 의주대로다.

 

 

 

사진: 경기감영도 중 부분

 

왼쪽 아래에 감영의 정문인 외삼문(外三門)이고 보이고

그 안에 들어서면 다시 중간 삼문(三門) 있고,

그 다음 직각으로 꺾어 내삼문을 지나면 감사의 정청이 있다.

 

 

 

사진: 성벽-서대문 부근 옛날 사진. 갓 쓴 사람이 나오는 쪽 성벽은

이미 허물어졌고 가운데 돈의문(서대문)문루가 성벽에 묻혀 있다.

 

이제 답사는 강북 삼성병원 옆길을 따라 올라 간다.

 

 

경교장(京橋莊)

 

강북 삼성병원 구내에 경교장 건물이 있다.

 

 

사진 : 경교장(京橋莊), 사적 제465호

 

일제 때 금광으로 큰 재산을 모아 천만장자로 불리던 최창학(崔昌學)이

1938년 지은 집이다. 그 세월에 이런 집 지을 정도면 친일파가 당연하다.

최창학은 궁성요배(宮城遙拜), 신사참배(神社參拜) 따위는 물론이고

국방채권 매입에 앞장 서는 등 소위 총후봉공(銃後奉公)에 열심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해방이 되니 처지가 곤란하게 된다.

그 보신책인지 1945년 11월 23일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 선생이

국내로 돌아 오자 이 집을 제공한다. 최창학은 결국 반민특위에 체포되지만

“백범한테 갔으니 죄인 아니다. 백범도 나를 친일파로 안 본다” 했다고 한다.

 

이 집도 제공이지 아주 드린 것이 아니어 백범 암살 뒤 돌려 받는다.

그 뒤 대만대사관 등이 되다가 1967년 삼성이 사 들여 오늘에 이른다.

 

최창학이 안타깝게(?) 된 것은 끈을 백범한테 댄 점이다.

보병(步兵)은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내가 군대에서 귀가 따갑게 들은 말이다.

우남(雩南-이승만 박사)쪽에 줄 섰다면 지금 그 후예라도 떵떵거릴지 모른다.

 

참고로 최창학 고향은 평북 구성이고 방응모는 같은 평북에 정주 출신이다.

방응모가 처음 재산을 일굴 때 최창학의 광산 덕대로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 거부가 되어 조선일보를 인수한 것이다.

 

원래 이 집 이름은 일본 냄새가 풀풀 나는 죽첨장(竹添莊)이었다.

(최창학의 행태 중 일본어 생활화도 있었다.)

백범이 이걸 그냥 둘 리 없어 근처 다리 -경구교(京口橋)에서

이름을 따 경교장(京橋莊)으로 바꾼다.

 

 

백범 선생은 여기를 임시정부 집무실 겸 숙소로 쓰다가 1949년 6월 26일

여기 경교장 2층에서 안두희 총탄을 맞고 서거(逝去)한다.

 

건물 1층은 삼성병원 약국이 있고 2층은 원형을 살려 안두희 총탄 자국까지

볼 수 있다는데 갈 때 마다 잠겨 있다.

 

 

 

일요일이라 닫았다 길래 토요일에 갔더니 또 무슨 날이라고 잠겨 있다.

문화재 관람은 토, 일요일이 더 중요하지 않나?

무슨 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여닫는 다는 안내문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냥 닫고 싶으면 닫는 모양이다. 병원에서 이 정도 관리하는 것만해도

다행이지만, 문화재 보존 관리를 개인의 선의에만 의존하는 것도 문제다.

 

 

 

삼성병원을 지나 서울시 교육청, 기상청을 지나간다.

길 옆에 펜스로 가려 놓고 성벽 복원 겸 공원조성공사를 한다.

 

 

사진: 성벽복원공사-서울시 교육청 옆

 

 

기상청을 지나 구세군 영천교회, 홍난파 가() 팻말을 따라 오른 쪽으로 가파른 언덕을 올라간다.

홍난파 살던 집 가기 전에 길 옆 성곽공원 조성 공사 현장 문이 열려 있어 슬쩍 들어가니

옛 성곽 돌이 보인다.

 

 

 

 

홍난파(洪蘭坡) 옛집

 

 

 

근대문화유산 제 90호다. 음악사랑 운동본부이라는 데서 관리한다는데

꽤 잘 하고 있는 것 같다.

 

동네가 마침 홍파동이라 홍난파에서 이름을 땄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조선 말기 이 일대에 홍문동(紅門洞), 파발동(把撥洞)) 등이 있었는데

1914년 그 중 를 따서 홍파동을 만들었다.

 

홍문동은 효자문인지 열녀문인지 붉은 문(旌門)이 있다고 붙은 이름이고,

파발동에는 옛 역참제도의 파발(擺撥)이 있었던 모양이다.

따라서 홍파동은 한자로 紅擺洞 이어야 하지만 紅把洞이 되어 버렸다.

법정동은 홍파동이지만 행정동은 교남동(橋南洞) 관할이다.

 

 홍난파(洪蘭坡, 본명  영후(永厚) 1898-1941)가 지은 노래 봉선화

고향의 봄 성불사의 밤 낮에 나온 반달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느라 검색해 보니 민족 음악의 선구자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창씨(創氏) 명이 모리까와 준(三川潤)이고, 창씨가 문제 아니라

친일 행적이 만만치 않은 인물이다.

 

해방 후 우익의 면면(面面)을 보면 정치, 경제, 군사 어디나 왜놈 밑이나

핥던 인사들이다. 문화 쪽만 해도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미당 서정주

또 누구누구 이루 다 셀 수가 없고 차라리 눈을 감고 싶다.

 

그들이 오늘 우리 사회의 기초를 쌓았다고 자괴(自愧)에 빠질 필요는 없다.

또 이 사람들 다 지우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보수의 장점은 유연성이다.

시작에서 좀 삐걱거렸지만 나중에 얼마든지 창대(昌大)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친일행적이 뚜렷한 인물을 민족의 선구자로 둔갑시켜도 좋은 것은 아니다.

현실은 받아들여야 하지만 수치스러운 일 또한 그대로 밝혀야만 한다.

 

답사기 쓰다가 쓸데없이 옆으로 빠졌으나 성곽으로 다시 돌아간다.

홍난파 옛집에서 몇 발자국 내려가면 오른 쪽으로 오르막 골목이 나온다.

 

 

 

사진: 새문안 빌라 골목.

 

골목 끝으로 가면 오른 쪽에 성벽 복원공사를 하고 왼쪽으로 돌면 광희주택이라는

연립이 있는데 그 주차장을 들여다 보면 놀랍게도 축대가 옛 성곽이다.

 

 

 

 

 

사진 : 성벽-광희주택 차고

필자가 사진을 찍는데 젊은 아줌마가 그게 뭐에요 한다.

바로 옆에 살며 매일 봐도 모르려면 모르는 것이다.

 

 

 

 

 광희주택 골목을 나와 오른 쪽 언덕으로 올라가면 사직터널 위다.

 

 

 

사진: 옛 삼형제 고개 언덕

 

이 부분이 옛날에는 고개라 삼형제 고개로 불렸던 모양이다.

고개 밑에 효성이 지극한 삼 형제가 살았다나.

 

우리나라 땅 이름에 석 (三)이 들어가는 경우가 무척 많다.

삼산, 삼선동, 삼성산, 삼정, 삼태성, 삼두리, 삼천, 삼개.

삼형제도 많아 삼형제바위, 삼형제우물, 삼형제고개가 곳곳에 있다.

그런데 삼이 들어갔다고 꼭 셋이었다는 법은 없다.

 

 

사직터널 위 옛 삼형제 고개에 양의문 교회가 있다.

 

 

 

사진: 양의문 교회

 

양의문에서 양의(兩儀)를 떠 올렸으나 문패를 보니 양(羊)의 문(門)이다.

그럼 그렇지 기독교에서 주역, 태극과 관계 있는 개념을 쓸 리가 있겠는가?

주님은 목자(牧者)고 우린 그가 푸른 초장(草場)에 누이는 어린 양이라고

그렇게 이름 지은 듯.

 

 

권율(權慄) 집터

 

양의문 교회에서 왼쪽 아래를 내려다보면 연립이 있고

그 너머 은행나무가 보이는데 권율 장군 집터다.

 

 

사진: 권율(權慄, 1537-1599) 장군 집터

 

이 동네 행촌동(杏村洞) 이름은 아마 이 은행나무에서 나온 것 같다.

 

권율 집터라지만 황량하기만 하다. 권율과 관계된 터를 가 보려면

나중에 사위 백사 이항복 (白沙 李恒福 1556-1618)에게 물려 준

필운대(弼雲臺-현재 배화여대) 쪽이 낫겠다.

 

 

딜쿠샤(Dilkusha)-이상향

 

권율 장군 집터 바로 앞에 붉은 벽돌집이 하나 있다.

 

 

 

사진: 오른 쪽 나무가 권율장군 집터 은행나무고 가운데 보이는 벽돌 집이 딜쿠샤 건물이다.

 

 

 

 

사진: 딜쿠샤 전경, 종로구 행촌동 1-88

 

일제 시대 서울 사정으로 보면 아주 대단했겠다. 그러나 지금은

골목이 우중충하고 건물도 낡아 어쩐지 상해 뒷골목 분위기가 난다.

 

이 집 주인 앨버트 테일러(Taylor, Albert Wilder)는 미국인으로 아버지 때부터

조선에 살았다. 명성황후 시해 다음 해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해

있을 때 (아관파천 俄館播遷), 궁하여 용돈도 챙기고 미국 세력을 끌어들여

이이제이(以夷制夷)할 생각이었는지 운산금광 채굴권을 미국에 넘긴다.

그 때 앨버트의 아버지 조지 (Taylor, George Alexander)가 채금 기술자로 왔다.

 

운산 금광하니 노다지란 말이 생각난다.

광산에서 금을 캐는데 조선 인부들이 혹시 빼 돌릴까 미국인들이 노 터치

(no touch) 라고 소리 친 것이 변해 노다지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인데,

과연 맞는지 의심스럽지만 항간의 속설에 그런 게 있다.

 

조지는 그 후 1908년 우리나라에서 죽어 양화진에 묻힌다.

그 아들 앨버트는 UPI통신 경성 특파원을 하다가 1919년 삼일운동을 만난다.

그 때 일본 경찰의 수색을 피해 독립선언문을 침대 밑에 숨겼다가 빼 돌려

전 세계에 알린다. 그 후 태평양전쟁으로 미일(美日)이 적국이 되자
1942년 추방당한다. 1945년 광복이 되어 미군정청 고문으로 다시 돌아온다.

 

1948년 앨버트는 미국에서 죽으면서 ‘내가 사랑하는 땅 한국, 아버지

묘소 옆에 나를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에 따라 부인 메리가

한국으로 운구해 아버지 조지가 누워있는 양화진 제1묘역에 묻는다.

 

그 뒤 딜쿠샤의 유래는 잊혀졌다가 2006년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가

서울 방문하며 다시 알려진다.

 

 

 

사진: 딜쿠샤 정초(定礎). 적힌 대로 1923년에 지었다. 

딜쿠샤(Dilkusha)는 힌두어로 이상향, 행복한 마음, 기쁨을 뜻한다고 한다.

 

지금 딜쿠샤에는 열 몇 세대가 사는데 사용을 원할 경우 자산관리공사

국유재산관리부로 연락하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국가소유인 모양이다.

 

 

사진: 딜쿠샤 복도

 

 

 

사진: 딜쿠샤 내부

 

 

이제 양의문 교회 앞으로 돌아가 인왕산 구간 성곽답사를 하는데

글이 이미 넘쳤으니 꼭지를 달리하고 여기까지 답사로를 구글에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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