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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강(宣姜)
탈잠(脫簪):주선왕(周宣王)이 일찍 자리에 들고 늦게 일어나 정사에 게으르매, 왕후 강씨(姜氏)가 하루는 영항(永巷,궁중복도)에서 대죄(待罪)하며비녀와 귀고리 등 장식품을 뽑아놓고“첩이 부덕하여 군왕으로 하여금 예를 잃고 늦게 일어나게 했으니 죄주소서”하면서 대죄(待罪)하니, 선왕이 말하기를“과인이 부덕(不德)하여 저절로 생긴 잘못이지 부인의 죄가 아니다.”하면서, 크게 깨닫고 그 후로 정사에 근면하여 국가를 중흥하였다한다. 《열녀전(列女傳)》주선강후전(周宣姜后傳).
주이(周珥):주선왕(周宣王)이 아침에 늦게 일어나자, 강후(姜后)가 비녀와 귀고리를 뽑고 궁중 복도에서 대죄(待罪)하며 자신이 부재(不才)한 소치(所致)라 하고 죄를 청하니, 선왕이 깨닫고 정사(政事)에 근면하여 중흥(中興)을 이루었다는 고사(故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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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71권, 7년(1476 병신/명성화(成化) 12년) 9월 13일(계축) 3번째기사
화공에게 중국 역대왕의 권려할 만한 일과 선후가 다른 일을 그리게 하다
화공(畫工)에게 명하여, 주문왕(周文王)의 후비(后妃), 선왕(宣王)의 강후(姜后), 제(齊)나라 화맹희(華孟姬), 초(楚)나라 번희(樊姬), 한(漢)나라 풍소의(馮昭儀), 반첩여(班婕妤), 한나라 명덕황후(明德皇后), 당(唐)나라 장손황후(長孫皇后), 송(宋)나라 광헌조황후(光獻曹皇后), 의인고황후(宜仁高皇后)의 사적(事跡)으로서 권려(勸勵)할만한 것과 오왕(吳王) 부차(夫差) , 한무제(漢武帝), 진무제(晉武帝), 당(唐)나라 현종(玄宗), 덕종(德宗)의 처음에는 훌륭했으나 나중에는 잘못한 사적을 병풍에 그리게 하였다.
○命畫工畫周文王后妃、宣王姜后, 齊華孟姬、楚樊姬、漢馮昭儀、班婕妤、漢明德皇后、唐長孫皇后、宋光獻曹皇后、宣仁高皇后可勸事跡及吳王夫差、漢武帝、晋武帝、唐玄宗ㆍ德宗先明後暗事跡于屛風。
성종 72권, 7년(1476 병신/명성화(成化) 12년) 10월 21일(신묘) 8번째기사
박효원 등이 명군병, 선명후암군병, 현비병의 세 개의 병풍을 바치다.
병풍의 내용
이보다 앞서, 현명(賢明)한 임금과, 앞서는 현명했다가 암군(暗君)이 된 이와, 현비(賢妃)의 사적(事跡)을 세 개의 병풍6668)에 그려서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제목(題目)을 나누어 시(詩)를 짓게하고, 또 장령(掌令) 박효원(朴孝元), 응교(應敎) 유순(柳洵), 진사(進士) 성담수(成聃壽)에게 명하여 사적과 시를 그 위에 쓰도록 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박효원등이 써서 바치니, 어의(御衣) 각각 한벌씩을 내리고 이어 선온(宣醞)6669)을 대접했다.
○명군병(明君屛)
신농도(神農圖)
신농(神農)은 천지(天地)의 도(道)를 알고 인성(人性)에 밝아서 천하(天下)를 가지게 되었다. 옛날에는 백성들이 나물먹고 물마시며, 나무열매를 따먹고 소라[蠃],조개[蚌] 따위의 고기를 먹고 살았었는데, 신농은 인민(人民)이 많아서 그것으로는 오래 먹고살기 어렵다고 여겼다.
그래서 백성에게 오곡(五穀)심는 것을 가르치고 뇌사(耒耜)6670)와 서호(鉏鎒)6671)를 만들어서 풀밭을 개간하게 한 연후에 오곡이 흥성하게 되었다. 영을 내리기를,
“장부(丈夫)들이 장성하여 경작(耕作)을 아니하면 천하에 주리는 자가 있을 것이고, 부인(婦人)들이 많이 있으면서 길쌈을 아니하면 천하에 추위에 떠는 자가 있을 것이다”하였다.
그래서 신농이 몸소 농사짓고 후비(后妃)가 몸소 길쌈하여 천하에 솔선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그 옛날 염제(炎帝)6672)가 천하를 다스리며,
신교로써 신공(神功)을 세웠네.
백성들의 배부름과 주림은 농사에 달렸으며,
세상사람 춥고 따뜻함은 여공(女工)에 달려있네.
옥이나 구슬비도 세상엔 소용없어,
농사짓고 길쌈함을 백성과 함께 했네.
천년을 두고 삼퇴례(三推禮)6673)를 다행히 보겠구나.
신농의 법을 취하여 시종을 보전하고 싶네.”하였다.【현석규(玄碩圭)】
제요도(帝堯圖)
제요(帝堯)는 황수(黃收)6674)와 치의[純義]6675), 동거(彤車)6676)와 백마(白馬)를 사용하고, 모자(茅茨)6677)를 가지런하게 자르지아니하고 흙으로 만든 계단이 세 층이었으며, 임금의 도리에 힘쓰면서 정사(政事)를 펴는 궁(宮)을 지어 구실(衢室)이라 하였으며, 비방(誹謗)하는 나무를 세워 온 세상 사람들이 하고싶은 말을 다할 수있게하고, 진선(進善)하는 기(旗)를 세워 온세상 사람들이 그 재주를 다할 수 있게 하였으며, 간고(諫鼓)6678)를 조정(朝廷)에 걸어두고 세상에서 임금의 잘못을 충간할 수 있게 하였다.
한 사람의 백성이 주려도 내가 주리게 했다고 여기고 한 사람의 백성이 추위에 떨어도 내가 춥게했다고 여기니, 그로 해서 백성들이 추대하기를 해와 달같이 하고 친하기를 부모같이 하였다.
어떤 노인(老人)이 땅을 두드리며 노래하기를,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휴식하네. 밭에 농사지어 먹고 우물의 물길어 마시는데, 임금이 우리에게 무슨 힘이 되는가?”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날마다 눈이시게 옛 역사 읽어봐도,
제요(帝堯)같은 어진 성군, 세상에 다시없네.
흙 계단 띠 지붕의 검소한 생활이며,
비방하는 나무에다 간고(諫鼓)까지 설치했네.
온누리 화평케한 지극한 정치,
사악(四岳)6679)에게 모든 것을 자문하였네.
높고 넓은 그의 덕이 하늘처럼 커,
멀거나 가깝거나 한맘으로 귀의하네하였다.【홍응(洪應)】
제순도(帝舜圖)
제순(帝舜)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먼 곳 사람을 구휼(救恤)하고 가까운 곳 사람을 친하며, 묻기를 좋아하여 이언(邇言)도 살피기를 좋아하며, 나쁜 것은 덮어주고 좋은 것은 드러내주며, 양단(兩端)6680)을 잡아 그 중도(中道)를 백성에게 적용했다.
당시 해와 달이 유난히 빛나고 경운(卿雲)6681)이 모였다.
순(舜)이 오현금(五絃琴)을 타며 남풍시(南風詩)를 노래하기를,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불만을 풀어주도다. 남풍의 때맞음이여, 우리 백성의 곡식을 풍부하게 하여주네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온 세상이 역수(曆數)6682)가 돌아옴을 칭송하니,
그 중화(重華)6683) 오래도록 높이높이 우러르네.
경운은 뭉게뭉게 천장(天丈)6684)에 드리우고,
서일(瑞日)은 찬란하게 진의(袗衣)에 비치도다.
많은 업적 이룩될 때 단면(端冕)이 장엄하고,
오현금을 타는 곳에 봄바람 살랑살랑.
남풍 한 곡조에 민온(民慍)이 다 풀리니,
넓고 큰 인덕(仁德)이 천하에 두루 찼네”였다.【홍귀달(洪貴達)】
대우도(大禹圖)
우(禹)는 오음(五音)으로 정사를 처리하였다.
종(鍾),고(鼓),경(磬),탁(鐸),도(鞀)를 매달아놓고 사방의 선비를 기다리는데, 순거(簨簴)6685)에 새기기를,
“과인(寡人)을 도(道)로써 가르치려는 자는 고(鼓)를 치고, 의(義)로써 논(論)하려는 자는 종(鍾)을 치고, 일을 고(告)하려는 자는 탁(鐸)을 흔들고, 근심을 말하려는 자는 경(磬)을 두드리고, 옥송(獄訟)이 있는 자는 도(鞀)를 흔들라.”하였다.
한번 밥먹을 동안에 여남은 번씩 일어나고, 한번 목욕하는 동안에 서너번씩 머리를 움켜쥐고서 천하의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밖에 나가다가 죄인(罪人)을 보고서 수레에서 내려 사연을 물으면서 눈물을 흘리니, 좌우에서 말하기를,
“죄인이 도를 따르지않았는데, 군왕(君王)께서 어찌 하여 슬퍼하십니까?”하니, 우왕이 말하기를,
“요(堯), 순(舜)때의 사람은 다 요, 순과 같은 마음으로 마음을 가졌는데, 과인이 임금이 되고서는 백성이 각자가 자기의 마음으로 마음을 가진다.
그래서 슬퍼한다”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그 당시의 발자취가 천하에 두루두루,
갖은 고생 겪으면서 큰 업적을 이룩했네.
북과 종을 치게 하여 다스리는 도리,
도(鞀)와 탁(鐸)을 울리게 하여 민간 실정 펴게했네.
안타깝게 죄를 물어 깊은 사랑 남기었고,
토악(吐握)6686)하며 사람맞아 지성을 보이었네.
요, 순 때만 못하다고 수치로 여긴 마음,
지금까지 그 덕화를 이름하기 어려워라”하였다.【홍귀달(洪貴達)】
성탕도(成湯圖)
탕(湯)은 들에 나갔다가 야인(野人)이 사면(四面)에 그물을 펴놓고 축원하기를,
“천하 사방에서 모두가 나의 그물로 들어오라.”하는 것을 보고,
탕임금은 그물의 삼면(三面)을 제거하고 빌기를,
“좌(左)로 가고 싶으면 좌로 가고 우(右)로 가고 싶으면 우로 가고, 그렇지않은 자는 나의 그물로 들어오라.”하였더니,
제후(諸侯)들이 듣고 이르기를,
“탕의 덕(德)이 지극하다.”하고,
귀의(歸依)한 것이 40여 나라였다. 그 당시 7년이나 크게 가물었었는데,
태사(太史)가 점을 치고서 하는 말이,
“마땅히 사람을 제물로 기도해야 합니다”하니, 탕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를 비는 것은 백성을 위함인데, 만약 사람을 제물로 기도해야 된다면 내가 스스로 제물이 되겠다.”하고,
드디어 재계(齋戒)하고, 손톱 깎고 머리를 자르고 소거(素車)와 백마(白馬)로, 몸에 흰 띠[茅]를 두르고 몸소 희생(犧牲)6687)이 되어 상림(桑林)의 들에 나아가 기도하면서 여섯 가지 일로 자책(自責)하기를,
“정치를 절도(節度)있게 못했는가? 백성이 직업(職業)을 잃었는가?
궁실(宮室)이 사치스러운가? 여알(女謁)6688)이 기세를 부리는가?
포저(苞苴)6689)가 성행(盛行)하는가? 참부(讒夫)6690)가 번창하는가?”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사방 수천리에 큰 비가 내렸다. 시(詩)에 이르기를,
“하(夏)나라 덕이 쇠할 때, 해도 망하고자,6691)
인심과 천명이 성탕에게 돌아갔네.
칠년의 가뭄에 백성 근심 간절했고,
여섯 가지 일 두려워하여 자신 책망 세밀했네.
한결같은 지성은 힐향(肸蠁)6692)이 감동하고,
온 들에는 단비가 흠뿍 쏟아졌네.
그물에 빌 때부터 어진 마음 커져서,
상나라의 혁엽(奕葉)6693)이 터전을 마련했네”하였다.【현석규(玄碩圭)】
상고종도(商高宗圖)
고종(高宗)은 즉위(卽位)하여 은(殷)나라를 부흥(復興)시키기를 생각하였으나 보좌(補佐)를 얻지못하여 2년이나 정사(政事)를 말하지않고 총재(冢宰)에게 재결(裁決)하게 하고, 국가의 기풍을 관찰하고 있었다.
고종이 꿈에 성인(聖人)을 얻었는데, 이름은 열(說)이었다.
그래서 꿈에 본 것을 가지고 신하와 관리들을 대조해 보았으나 모두 아니었으므로, 이에 그 모습을 그려서 그 형상을 가지고 백공(百工)을 시켜 시골에서 찾게하여 부암(傅巖)이란 바위 밑에서 열을 찾았는데, 같이 대화를 하여 보니 과연 성인이었다.
그를 등용하여 재상(宰相)을 삼았더니 은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시(詩)에 이르기를,
“높고 높은 탕왕의 덕 견줄 데가 없더니,
고종의 빛난 업적 전대에 못지않네.
삼년동안 말이 없이 치도(治道)를 생각했고,
어느 날 밤 뜻밖에도 대현(大賢)을 꿈꾸었네.
큰 솥을 조화시키는 양념이 되었으며,
넓은 내를 건너게 하는 수운(水運)역할하였네.
만약 서미(胥靡)6694)가 암혈(巖穴)속에 묻혔더라면,
은나라가 어떻게 육백년을 누렸으랴!”하였다.【홍귀달(洪貴達)】
주문왕도(周文王圖)
문왕(文王)때에 여상(呂尙)이란 이가 있었는데, 나이 80여세에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하였다.
문왕이 사냥을 가려고 점을 치니, 점장이가 말하기를,
“사냥할 것은 용(龍)도 아니며, 이무기[彲]도 아니며, 범[虎]도 아니며, 곰[熊]도 아니고, 왕자(王者)의 보좌(補佐)입니다”하였다.
드디어 사냥을 나가 반계(磻溪)에 이르러서 과연 여상을 만나 같이 수레를 타고 돌아와 스승을 삼았다. 일찍이 못을 파다가 썩은 뼈가 나왔는데,
명하여 장사(葬事)하게 하니, 좌우에서 말하기를,
“이것은 주인이 없는 것입니다.”하니, 문왕이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천하(天下)의 주인이고 제후(諸侯)는 한 나라의 주인인데, 과인(寡人)은 진실로 뼈의 주인이다.”하고,
드디어 장사지내 주었다. 천하에서 그 말을 듣고,
“서백(西伯)6695)의 인덕(仁德)은 썩은 뼈에까지 이르렀는데, 하물며 산 사람이겠는가?”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주(周)나라의 기업(基業)조성 문왕 때 높았으니,
삼분한 천하에서 하나를 차지했네.
기산(岐山)까지 감화된 덕화에 봉황이 울었으며,
위수에 어린 상서는 보필을 얻었도다.
천자의 덕은 영대(靈臺)에서 전파되고,6696)
주역(周易)의 이치는 유리(羑里)에서 연구했네.6697)
묻지 말라, 생민이여. 성인 은혜입은 것을,
구원의 마른 뼈도 그 은혜 입었다네.”하였다.【김유(金紐)】
무왕도(武王圖)
무왕(武王)이 주(紂)를 칠 때 상교(商郊)에 진(陣)을 치고 하늘의 큰 명을 기다렸는데, 주가 저의 군사를 수풀처럼 거느리고 와서 목야(牧野)에서 마주쳤으나, 무왕의 군사에게 대적하는 자가 없고 앞장선 무리들이 창을 거꾸로 쥐고서 뒤따른 저희 군사를 치면서 달아나니,
피가 흘러 방앗고가 뜰 정도였다.
한번 융복(戎服)을 입고 온 천하를 평정했는데, 이에 상(商)나라의 옛 정치를 되돌려주어 정치는 옛 법대로 따르게 하고, 기자(箕子)의 옥살이를 풀어주고 비간(比干)의 무덤을 봉해 주며, 녹대(鹿臺)의 재물을 흩어 주고,
거교(鉅橋)의 곡식을 풀어서 사해(四海)에 크게 나누어주니,
만백성이 열복(悅服)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천심과 인심에 순응하여 독부(獨夫)6698)를 문죄(問罪)하니,
앞섰던 무리들이 창을 거꾸로 쥐고 달아났네.
땅속의 넋들도 응당 한을 풀었으며,
구속했던 충신들 모두 풀려났네.
말과 소는 목야로 돌려보냈고,
재물과 곡식은 외로운 백성에게 나눠주었네.
만약 기자(箕子)를 찾아 홍범(洪範)6699)을 전하지 않았다면,
이륜(彝倫)의 차례가 정해졌을까?”하였다.【이극배(李克培)】
한문제도(漢文帝圖)
문제(文帝)는 처음엔 대왕(代王)에 봉(封)해져서 대(代)에서 검박하게 지냈다. 주발(周勃)등이 이미 여러 여씨(呂氏)6700)를 주벌(誅伐)하고 대왕(代王)을 맞이하여 천자(天子)로 세우려 할 때 왕이 송창(宋昌)에게 명하여 참승(驂乘)6701)케하고 장무(張武)등 6인에게 전거(傳車)를 타고 장안(長安)에 가게하고, 대저(代邸)6702)에 이르러서 천자에 즉위(卽位)하였다.
그날 저녁에 미앙궁(未央宮)에 들어가서 그날 밤 송창을 제수(除授)하여 위장군(衛將軍)을 삼아 남북군(南北軍)을 진무(鎭撫)케하고, 다시 전전(前殿)에 좌정(坐定)하여 조서(詔書)를 내려 천하(天下)에 대사(大赦)하였다.
원년(元年 B.C.179)에 천리마(千里馬)를 바치는 자가 있었는데,
문제가 말하기를,
“앞에는 난여(鑾輿), 뒤에는 속거(屬車)로, 길행(吉行)은 하루에 50리, 사행(師行)은 하루에 30리를 가는 것인데, 짐(朕)이 천리마를 타고서 혼자 먼저 어디를 가겠는가?”하고,
그 말과 가지고온 도리비(道里費)6703)를 주고 하조(下詔)하기를,
“짐은 바치는 물건을 받지않을 것이다. 사방에 명하여 바치지말게 하라.”하였다. 조회 때마다 낭종관(郞從官)이 서소(書疏)를 올리면 연(輦)을 멈추고 그 말을 받아들이지않은 적이 없었는데, 그 말이 쓸 수 없으면 그냥 두고, 그 말이 쓸만하면 채택하여 칭찬하지않은 것이 없었다.
시(詩)에 이르기를,
“본래의 공검함이 백성에 임할 만한데,
더구나 교만과 사치를 받아들이지 않음에랴!
기이한 물건이 뜻을 빼앗지 못하고,
착한 말이라야 마음에 들어가네.
취화(翠華)6704)가 머무는 곳은 모두 아름다운 명,
단조(丹詔)6705)가 내리는 때엔 모두가 덕음이었네.
앉아서 제봉(提封)6706)을 이루어 부유함을 열었으니,
비로소 청정함이 백성을 깊이 감화시킨 줄 알겠네”하였다.【최숙정(崔淑精)】
당태종도(唐太宗圖)
태종(太宗) 때에 기내(畿內)에 황충(蝗蟲)이 있었다.
임금이 원중(苑中)에 들어갔다가 황충을 보고 몇 마리를 잡아서 빌기를,
“백성은 곡식으로 생명을 부지하는데, 네가 곡식을 갉아먹으니,
차라리 나의 폐장(肺腸)을 파먹어라.”하고,
그것을 삼키려 하니, 좌우에서 간(諫)하기를,
“그것은 악물(惡物)이니, 병환이 될까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짐이 백성을 위해 재앙을 받는다면 어떤 병인들 피하겠느냐?”하고,
드디어 그 황충을 삼켰는데, 그 해에 황충의 재앙이 없어졌다.
임금은 궁녀(宮女)가 너무 많이 깊은 궁중에 갇혀 있음을 민망하게 여기어,
“소제(掃除)하는 일외에 소용이 무엇인가?”하고서,
액정(掖庭)의 서문(西門)에 관리를 보내어 가려서 내어보내게 했는데,
전후(前後)하여 나간 것이 3천여명이었다. 또 임읍(林邑)에서 오색(五色)의 앵무(鸚鵡)를 바치고, 신라(新羅)에서는 미녀(美女) 2명을 바쳤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임읍의 앵무도 오히려 스스로 괴롭고 추운 것을 말하며, 제 나라로 돌아가기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친척을 멀리 떠나온 두 미녀이겠는가?”하고,
앵무와 함께 각각 사신을 딸려서 돌아가게 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업성(鄴城)6707)의 궁전에 석양이 비끼니,
진저(晉邸)의 풍운이 천하에 가득했네.
십만의 의병은 일표(日表)6708)를 따랐고,
삼천의 궁녀는 초방(椒房)6709)에서 나왔네.
고향그리는 농(籠)중의 새를 놓아보내고,
농사해치는 황충을 입으로 삼켰네.
이 모두 인의(仁義)를 힘써 행한 효과이니,
정관(貞觀)의 다스림6710)은 당(唐), 우(虞)6711)에 비등했네.”하였다.
【임원준(任元濬)】
○선명후암군병(先明後暗君屛)
오부차도(吳夫差圖)
오왕(吳王) 합려(闔廬)가 월(越)나라를 치니,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마주 공격하여 크게 격파시켰다.
영고부(靈姑浮)가 창으로 합려를 쳤는데, 합려가 그 상처의 병으로 죽으려 할 때 그의 아들 부차(夫差)에게 말하기를,
“월나라를 잊지말라.!”하였다.
부차가 왕이 되고서는 사람을 뜰에 세워 놓고 출입을 할 때는 반드시 자기에게 이르게 하기를,
“부차야, 너는 월왕이 너의 아버지를 죽인 것을 잊었는가?”하면,
곧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감히 잊지않았습니다.”하고,
언제나 월나라를 보복하기로 마음을 먹고 이에 정병(精兵)을 모두 동원하여 월나라를 쳐서 부초(夫椒)에서 격파시켰다.
월왕은 이에 갑병(甲兵) 5천을 데리고 회계(會稽)에 서식(棲息)6712)하면서 서시(西施)를 바치고 군사가 물러나도록 청하니,
오왕이 평화조약을 체결하기를 허락했다【선명(先明)】
시(詩)에 이르기를,
“오나라와 월나라가 번갈아 서로 삼켜,
이기고 진 승부가 한 판국 그림이라.
두 나라 산하에 군대가 들끊었고,
선왕의 해골은 핏발로 얼룩졌네.
원수를 못갚으면 마음이 편할손가?
서로가 경계하여 변치 않길 맹세했네.
부초(夫椒)로 달려가서 설욕을 하였으니,
회계는 그 당시 안중에 없었네.”하였다.【서거정(徐居正)】
부차가 이미 서시(西施)를 얻고는 3백길[丈] 높이의 고소대(姑蘇臺)를 쌓고 그 위에서 잔치놀이를 하니, 오자서(伍子胥)가 간(諫)하기를,
“신(臣)은 오래지않아 이곳에 미록(麋鹿)이 놀게될까 걱정입니다”하였는데, 왕(王)은 듣지않고 촉루검(蜀鏤劍)으로 죽게하니, 죽어가면서 말하길,
“나의 무덤[墓] 위에 가(檟)를 심어서 기구(器具)6713)를 만들 수 있게 하고, 나의 눈을 뽑아 오나라 동문(東門)에 걸어두고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킴을 보게 하라”하니, 왕이 성을 내며 말하기를,
“나[孤]6714)는 대부(大夫)로 하여금 볼 수 없게 하겠다.”하고,
오자서의 시체를 가져다가 치이(鴟夷)6715)에 담아서 강물에 던졌는데,
오나라가 마침내 월나라에게 멸망당했다.【후암(後暗)】
시(詩)에 이르기를,
“부초에서 혈전하여 성공하고 돌아와,
미녀들을 데리고 높은 대에 노닐었네.
너울너울 춤추는 소매 하늘로 올라가고,
구성진 노래소리 기러기에 섞여오네.
그 당시 미인들은 적막하게 되었는데,
지금 강위에는 달만이 배회하네.
가련타, 그 옛날 동문에 눈을 매달라는 오자서도,
성난 파도되어 언덕을 치며 맴도네.”하였다.【유순(柳洵)】
한무제도(漢武帝圖)
무제(武帝)는 처음 즉위(卽位)하여, 현량(賢良)하고 방정(方正)하며, 직언(直言)으로 극간(極諫)하는 선비를 등용하려고 친(親)히 책문(策問)하였고, 신불해(申不害), 한비(韓非), 소진(蘇秦), 장의(張儀)의 말을 하는 자는 모두 파출(罷黜)하라는 조칙(詔勅)을 내렸다.
임금이 유학(儒學)을 숭상하여 조관(趙綰)이 그의 스승 신공(申公)을 추천하니, 임금이 사자(使者)를 시켜 안거포륜(安車蒲輪)6716)을 받들고 비단에 구슬[璧]을 더하여 그를 맞이하였다.【선명(先明)】시(詩)에 이르기를,
“지극한 말은 중론에서 듣고,
현량과의 책문(策問)으로 사방의 문을 열었네.
소진, 장의 배척하고 이단(異端)을 멀리하며,
주공, 공자 표장하여 유학을 숭상했네.
구휼하는 조서내려 은혜가 흡족했고,
폐백으로 어진이맞는 예절이 은근했네.
만약 힘써 실천으로 정치근본 삼았더면,
높은 업적 어이하여 한나라 명군에 그쳤으랴!”하였다.【임사홍(任士洪)】
무제는 방사(方士)인 공손경(公孫卿)의 말을 듣고, 장안(長安)의 감천(甘泉)에 비렴관(蜚廉觀), 계관(桂觀), 통천대(通天臺)를 짓게하고, 공손경으로 하여금 부절(符節)을 가지고 기구를 베풀어 놓고서 신인(神人)을 기다리게하며, 모든 궁실(宮室)을 넓히고, 백량대(柏梁臺)를 짓고 승로반(承露盤)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20장(丈)이고 크기는 7위(圍)이며, 구리[銅]로 만들었다. 위에 선인장(仙人掌)이 있어 이슬을 받는데, 거기에 옥(玉)가루를 타서 마시면 오래산다고 했다. 무제가 후씨(候氏)6717)에 가서 중악(中岳) 태실(太室)에 제(祭)를 지냈는데, 종관(從官)들이 산밑에서 만세(萬歲)소리 삼창이 들리는 듯하다하므로 조칙(詔勅)하여 태실사(太室祠)를 증축(增築)하게하였다.
그리고 동해상(東海上)에 순행(巡行)하여 신선(神仙)을 찾으며 태산(泰山)을 봉하고 숙연산(肅然山)에 제사지냈다.
그리고 다시 동북(東北)으로 갈석(碣石)까지 갔다가 돌아왔다.【후암(後暗)】
시(詩)에 이르기를,
“백척의 동대는 자줏빛 연기에 싸이고,
시신은 언제고 백량편(柏梁篇)6718)을 받드네.
신마(神馬)가 음보(音譜)전함6719)을 이미 즐겼는데,
흉노가 변경 침범함을 다시 한하였네.
제사파한 감천에서 눈물을 흘렸는데,
약없는 봉도(蓬島)에서 신선을 찾을쏜가?
소고울리며 횡분(橫汾)한 즐거움6720)을 그 누가 알 것인가?
오늘날 다시 찾으니 옛일이 되었구려”하였다.【월산대군(月山大君)】
진무제도(晉武帝圖)
무제(武帝)가 처음 즉위(卽位)한 것은 위(魏)나라의 각박(刻迫)하고 사치(奢侈)한 뒤였으므로, 이를 인덕(仁德)과 검소(儉素)로써 바로잡으려고 하였다. 유사(有司)가 말하기를,
“수레끄는 소의 청사(靑絲)6721)로 된 가슴걸이가 끊어졌습니다.”하니,
명하기를,
“청마(靑麻)로 대치하라.”하였다.
또 태의(太醫) 사마정거(司馬程據)가 치두구(雉頭裘)를 바쳤는데,
무제는 궁전(宮殿)앞에서 불사르게 하고, 내외(內外)에 칙명(勅命)하여,
감히 이상한 기교(技巧)와 기이한 의복(衣服)을 바치는 자가 있으면 죄를 주게하였다.【선명(先明)】시(詩)에 이르기를,
“동작대(銅雀臺)는 기울어서6722) 왕기가 쇠하니,
진왕이 창업하여 정신을 차릴 땔세.
사치한 전조의 폐단을 바로잡으려 하였고,
어질고 검소함은 천하가 다 알았네.
꿩털의 갖옷은 불에 던지고,
푸른 실 가슴걸이를 새로 고쳐 갈았네.
석두성(石頭城)6723) 한구석에 항복의 기를 세우게 했으니,
성공한 그 의기를 버리지 마오.”하였다.【김흔(金訢)】
무제가 이미 오(吳)나라를 평정하고서는 자못 놀이를 일삼아 정사(政事)를 게을리 하였다. 손호(孫皓)6724)의 궁인(宮人) 5천명을 선발하여 궁(宮)에 들이게하여 액정(掖庭)6725)이 만인(萬人)이 될 정도였다.
늘 양거(羊車)를 타고서 마음내키는대로 다니며 편리한 대로 잔치를 베풀고 거기서 자기도 하니, 궁인(宮人)들이 저마다 댓잎을 문에 꽂고 소금물을 땅에 뿌려서 임금의 수레를 유도하였다.【후암(後暗)】시(詩)에 이르기를,
“금릉(金陵)6726)을 파하고부터 차츰 교만해져,
여색에 빠지므로 정사에 게을렀네.
오천명의 궁녀를 오궁(吳宮)에서 선발했고,
열둘의 누대는 진전(晉殿)에 드높았네.
짐연(鴆宴)을 베풂은 탐욕에서 온 것인데,6727)
양거가 가는 곳에 몇 밤이나 보냈던가?
유연(流連)6728)함은 원래 포상의 계획이 못되는 것,
오마(五馬)의 집안에 화는 끊이지않았네.6729)”하였다.【서거정(徐居正)】
당현종도(唐玄宗圖)
현종(玄宗)이 처음 즉위하여서는 풍속이 지나치게 사치스럽다하여 수레와 복식(服飾)을 제한하여 유사(有司)로 하여금 금은(金銀)의 완구(玩具)를 녹여서 군국(軍國)의 용도에 공급하게 하였으며, 주옥(珠玉)과 금수(錦繡)를 궁전앞에서 태우게 하였다.
또 주옥을 캐는 것과 조각을 하여 완구를 만드는 것을 금하였으며, 직금방(織錦坊)도 다시 폐지시켰다. 현종은 원중(苑中)에 보리를 심어놓고 황태자 이하를 거느리고 몸소 수확하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종묘(宗廟)에 올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손수하는 것이며, 또한 너희들로 하여금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하고,
이어 시신(侍臣)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말하기를,
“근년에 사람을 시켜 볏모[苗稼]를 순시하여 검사하게 했으나 대답한 것이 사실대로 하지않은 것이 많으므로, 내가 직접 심어서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또 《춘추(春秋)》에는 맥(麥),화(禾) 글자를 쓰지않았으니,
이는 어찌 옛사람이 중하게 여김이 아니겠느냐?”하였다.【선명(先明)】
시(詩)에 이르기를,
“처음에 임금이 되고선 승평에 뜻을 두어,
현단복 면류관으로 정사에 힘을 썼네.
뜰앞에서 구슬태워 검소한 덕을 밝히었고,
원중에 보리심어 제사에 이바지했네.
백년의 풍속이 마침내 귀화되어,
그 당시 황손도 농사를 이해했네.
끝까지 본심대로 욕심을 막았던들,
때묻지않은 그 마음이 자연히 밝았으리”하였다.【이극기(李克基)】
현종이 제위(帝位)에 있은 지 해가 오래되자 차차 사치의 욕심이 늘어나고 정사(政事)에 게을러져서 수왕(壽王)6730)의 비(妃) 양씨(楊氏)를 맞아들여 귀비(貴妃)를 삼고, 오로지 음악과 미색(美色)으로 즐겼다.
잔치[酺宴]를 할 때마다 먼저 태상아악(太常雅樂)으로 좌부(坐部), 입부(立部)6731)를 베푼 뒤에, 북과 취주악으로 된 호악(胡樂)6732)과 교방(敎坊)6733), 부현(府縣)의 산악(散樂)6734)과 잡희(雜戱)6735)로써 계속하였다. 또 산거(山車)6736)와 육선(陸船)6737)으로 악기(樂器)를 싣고 왕래(往來)하며, 또 궁인(宮人)을 동원하여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으로 춤추게 하였다.
또 무마(舞馬) 1백필(匹)로 하여금 잔을 물고 축수(祝壽)케하고, 또 물소[犀]와 코끼리[象]를 입장(入場)시켜 절도 하고 춤도 추게하니, 안녹산(安祿山)이 보고 기뻐하였다.
안녹산이 범양(范陽)에서 반역(叛逆)하자 임금이 재상(宰相)을 불러 대책을 상의하니, 양국충(楊國忠)이 촉(蜀)으로 피난하자는 계책을 먼저 제안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옳게여겨, 오직 양귀비와 그의 자매(姊妹), 황자비(皇子妃)와 주황손(主皇孫), 그리고 친근한 환관(宦官)과 궁인(宮人)들만을 데리고 영추문(迎秋門)으로 나갔다.
마외역(馬嵬驛)에 이르자 장사(將士)들이 굶주리고 피로하여 모두 분노(憤怒)를 터뜨렸고, 진현례(陳玄禮)등은 화근(禍根)이 양국충때문이라 하여 그를 죽였다.
임금이 떠들썩함을 듣고 문에 나가 위로하고 대오(隊伍)를 수습하게 하였으나 군사(軍士)들이 응하지않았다.
임금이 고역사(高力士)를 시켜 이유를 물으니, 진현례가 대답하기를,
“양국충이 모반(謀叛)했으니, 귀비(貴妃)를 받들 수 없습니다.
원컨대 폐하(陛下)는 은정(恩情)을 끊고 법을 바로잡으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짐(朕)이 마땅히 스스로 처리하겠다.”하였다.
고역사가 나아와 말하기를,
“장사(將士)가 이미 양국충(楊國忠)을 죽였는데 귀비(貴妃)는 폐하의 곁에 있으니, 그들이 어찌 감히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장사가 편안하면 폐하도 편안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이에 불당(佛堂)에서〈귀비를〉교살(絞殺)하게 하고 시체를 실어다 마외역 뜰에 두고서 진현례등을 불러 들어와보게 하니,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며, 비로소 대오를 정돈하고 떠날 차비를 하였다.【후암(後暗)】
시(詩)에 이르기를,
“양귀비가 궁중에 들어오면서부터
원앙전에 비단 장막이 항상 가려있었네.
호아(胡兒)가 목욕한 뒤에 추한소문 많았고6738),
척리(戚里)6739)가 교만해지니 일이 벌써 어긋났네.
비고(鼙鼓)가 홀연히 연새에서 일어나고,6740)
용여(龍輿)는 놀라서 금관성(錦官城)으로 향하였네.6741)
가련타, 예상곡을 즐기던 때에,
그 어찌 만리 피난길에 고생할 줄 알았으랴!”하였다.【이숭원(李崇元)】
당덕종도(唐德宗圖)
덕종은 양암(諒闇)6742)중에 있을 때는 모든 일을 예법에 따랐다.
이에 앞서 여러나라에서 길들인 코끼리를 여러번 바쳤는데, 임금이 말하길,
“코끼리는 사료(飼料)를 소비시키고 물성(物性)이 다른데,
무엇에 쓸 것인가?”하고,
명하여 형산(荊山)의 남쪽에 놓아주게 하였다.
그리고 표놜(豹貀), 투계(鬪雞), 응견(鷹犬) 따위도 모두 놓아주고,
또 궁녀 수백명도 내보내니, 중외(中外)에서 모두 기뻐하였다.
치청(淄靑)의 장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서로 돌아보고 말하기를,
“훌륭한 임금이 나왔다. 우리도 귀속할 수 있을까?”하였다.
또 조명(詔命)하기를,
“조집사(朝集使) 2명을 인솔하고 변방사람의 질고(疾苦)를 살피게 하라.”
하였다.【선명(先明)】시(詩)에 이르기를,
“진기한 짐승들을 길들여서,
먼 곳에서 중역(重譯)6743)을 거쳐 궁궐에 바쳤네.
천리밖에서 온 괴이한 물건 혐의쩍게 여겼으며,
백여명의 궁녀들을 모두 내어보냈네.
조야에서 서로가 성주라 일컬었고,
치청의 군사들은 깊은 인덕을 느끼었네.
조집사를 맞이하여 자문을 내리니,
사해의 궁한 백성 억울함을 걱정함이네.”하였다.【임사홍(任士洪)】
덕종(德宗)초년에 최우보(崔祐甫)가 정승이 되어 관대(寬大)함을 힘썼다. 그래서 당시에는 정치의 명성(名聲)이 널리 퍼져 정관(貞觀)6744)의 기풍(氣風)이 있다고 하였었다.
그런데 노기(盧杞)가 정승이 되고서는 의사(疑似)6745)함을 가지고 군신(群臣)을 이간(離間)시키고, 임금에게 권하여 아랫사람을 엄하고 각박하게 다스리도록 하니, 중외(中外)에서 실망하였다.
당시 양하(兩河)6746)에서 전쟁이 일어나 한달의 경비가 백만민(百萬緡)6747)이 넘어 국고(國庫)가 지탱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부상(富商)의 돈[錢]을 조사하여 만민(萬緡)을 제하고 그 나머지를 차용하여 군용(軍用)에 공급(供給)하기로 하고, 장안(長安)의 상인(商人)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색출(索出)하여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이 되면 문득 매를 때리니, 사람들은 그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백성이 그 때문에 파시(罷市)하고 서로 몰려와서 재상(宰相)이 탄 말[馬]을 가로막고 직접 노기(盧杞)에게 항의하니, 노기가 처음에는 그들을 위로하며 설득시키다가 막을 수 없는 형편이 되므로 말을 빨리 몰아 그 자리를 도망하였다.
경원(涇原)의 군사가 난리를 일으키자 임금이 봉천(奉天)으로 피난하였는데, 행궁(行宮)의 행랑[廡] 아래에다 각 도(道)에서 공헌(貢獻)한 물건을 쌓아놓고 현판을 달기를,「경림대영고(瓊林大盈庫)」라 하였다.
궁중(宮中)에서 외부의 물건을 살 때는 환관(宦官)을 시켜서 사오게하고 그를 궁시(宮市)라 하였는데, 남의 물건을 억지로 사면서 홍자색(紅紫色)으로 염색한 헌 옷과 낡은 비단을 척(尺), 촌(寸)쯤 찢어서 주고는, 이에 진봉문호(進奉門戶)6748)와 각가전(脚價錢)6749)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어떤 농부(農夫)가 나귀[驢]에 나무를 싣고가는데, 환관이 궁시라 하면서 나무를 뺏고 또 진봉문호를 요구했다. 농부가 말하기를,
“나의 부모와 처자는 내가 파는 나무로 생계를 이어가는데, 지금 이 나무를 너에게 주고 값은 받지않고 돌아가게하니, 네가 값을 주려고하지 않는다면 나는 죽을 뿐이다.”하고, 드디어 그 환관을 구타하였다.【후암(後暗)】
시(詩)에 이르기를,
“근래에 비정(秕政)6750)이 처음보다 더 심하여,
뜻은 크나 재주가 없는데, 시기는 웬 말,
황옥(黃屋)6751)이 몽진함이 작은 일이 아닌데,
경림에 붙인 방은 누굴 위한 자랑인가?
상인의 돈 긁어들여 은혜는 별로 없고,
궁시를 베풀어서 원망을 많이 샀네.
이 마음의 어둡고 어리석음은,
노기의 간사함을 모른 것이네.”하였다.【서거정(徐居正)】
○현비병(賢妃屛)
주문왕후비도(周文王后妃圖)
주문왕(周文王)은 성덕(聖德)을 타고났고, 또 성녀(聖女)인 사씨(姒氏)를 맞이하여 비(妃)를 삼았다.
갈담시(葛覃詩)는 후비(后妃)가 자작(自作)한 것이다. 그 시에 이르기를,
“칡넝쿨 골짜기에 뻗어 그 잎새 무성하다.
꾀꼬리 날아 숲에 모여 사이좋게 지저귀네.
칡넝쿨 골짜기에 뻗어 그 잎새 더부룩하다.
이걸 베고 이걸 쪄서 가는 베짜고 굵은 베짜니 그 옷이 싫지않네.
사씨(師氏)6752)께 아뢰고 근친(覲親)가리라.
평복도 빨고 예복도 빨아,
이것 모두 빨아 놓고 부모님께 문안가려네.”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주나라 후한 덕이 민심에 사무쳐서,
팔백년 기업이 이남(二南)6753)에서 비롯됐네.
문왕이 천명을 새롭게한 것을 알려면,
태사의 명성 계속됨을 보아야하리.
검소한 갈포는 천고에 빛나고,
종사(螽斯)6754)의 경사는 백명의 아들이네.
성모라야 성자를 낳을 수 있으니, 무왕의 장한 업적 지금까지 빛나네.”하였다.【이승소(李承召)】
주선왕강후도(周宣王姜后圖)
강후(姜后)는 어질고 덕이 있었다. 선왕(宣王)이 일찍이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났는데, 강후가 잠이(簪珥)6755)를 벗고 영항(永巷)에서 대죄(待罪)하면서 그 부모(傅母)를 시켜 왕(王)에게 말하게 하기를,
“첩(妾)이 재덕(才德)이 없어서 군왕(君王)으로 하여금 체통을 잃고 조회(朝會)를 늦게함으로써, 군왕이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덕(德)을 잃음을 드러나게 했습니다.
진실로 여색을 좋아하면 반드시 사치를 좋아하고 욕심내키는대로 하게됩니다. 난(亂)이 일어날 때에 그 난의 일어난 원인을 캐면 비자(婢子)에게서 일어났으니, 감히 비자의 죄를 청합니다.”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덕이 없어서 스스로 허물이 생긴 것이지 부인의 죄가 아닙니다.”하고,
곧 강후를 돌아오게 하고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여 아침일찍 조회하고
저녁 늦게 물러오게 되어서 드디어 중흥주(中興主)로 이름이 났다.
시(詩)에 이르기를,
“훌륭한 모든 신하가 모였다 돌아가고,
두어 길 아침해가 동위(彤闈)6756)에 올라왔네.
예로부터 여색을 즐김은 정치에 누가 되고,
편안함만 생각하면 화의 계기가 된다네.
자신이 죄책을 도맡아서,
임금으로 하여금 허물을 면케 했네.
혁혁하게 중흥한 그 업적은,
어진 후비가 잘못을 고쳐줌에 있었음을.”하였다.【박효원(朴孝元)】
제효공부인도(齊孝公夫人圖)
부인은 맹희(孟姬)이며, 예(禮)를 좋아하고 지조가 곧았다.
효공(孝公)이 낭야(琅琊)에 놀이를 갔을 때에 맹희가 따라갔는데, 수레가 달리다가 맹희는 추락하고 수레가 부서졌다.
효공이 사마입거(駟馬立車)로 맹희를 태워 오게하니,
맹희가 시어자(侍御者)로 하여금 장막을 베풀어 자신을 가리우게 하고,
부모(傅母)로 하여금 사자(使者)를 〈효공께〉보내어 아뢰기를,
“첩(妾)은 들으니,‘후비(后妃)가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안거치변(安車輜輧)6757)을 타며, 당(堂)에 내려갈 때는 반드시 부모나 아보(阿保)를 따르게하고, 진퇴(進退)를 하면 패옥(佩玉)을 울리며, 집안에서는 옷매무시를 단단히 하고, 들에서는 장막으로 가리운다’고 하니, 이는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한결같이 하여 스스로를 단속하는 것입니다.
지금 입거(立車)에 덮개가 없으니, 감히 명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들에서 장막이 없으니, 감히 오래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는 체통을 잃음이 많으니, 무례하게 살기보다는 일찍 죽는 것만 못합니다.”하였다.
사자가 달려와 고(告)하니, 공(公)이 다시 안거(安車)를 가져가게 했는데, 도착했을 때는 이미 스스로 목을 매어달았었다.
부모가 구원하여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부모가 말하기를,
“사자가 왔고 수레에 덮개가 갖추어졌습니다.”하여,
맹희가 소생한 연후에 타고 돌아갔다.
시(詩)에 이르기를,
“당시의 군왕이 한가히 지내면서,
비빈을 데리고서 마음껏 노닐었네.
예사 때도 언제나 조행을 지킬텐데.
불시라고 그 어찌 예의를 벗어나료,
일찍이 이 몸은 가볍기가 잎새같음을 알았고,
예부터 큰 절개는 태산보다 중하다네.
늠름한 청풍은 영원히 어제처럼,
만대의 인간에게 완고함을 일깨우네.”하였다.【이파(李坡)】
초번희도(楚樊姬圖)
번희(樊姬)는 장왕(莊王)의 부인이다. 장왕이 즉위(卽位)하여 수렵(狩獵)을 즐겼는데, 번희가 간하였으나 듣지않으므로 이에 금수(禽獸)의 고기를 먹지 아니하니, 왕이 잘못을 고치고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였다.
왕이 어느 날 조회(朝會)를 늦게 파하였는데,
번희가 뜰에 내려가 영접하면서 묻기를,
“어째서 늦었습니까? 시장하고 피로하지 않으십니까?”하니,
왕이 말하기를,
“어진이와 대화하였으므로 시장하고 피로함을 모르겠소.”하였다.
번희가 말하기를,
“왕께서 어진이라고 한 이는 누구입니까?”하므로,
왕이,
“우구자(虞丘子)요.”하니, 번희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왕이 묻기를,
“희(姬)가 웃음은 무슨 이유요,”하니,
대답하기를,
“우구자가 어질긴 어지나 충성스럽지는 못합니다.
지금 우구자는 초(楚)나라의 재상(宰相)이 된 지 10여년에 천거한 것이 자제(子弟)가 아니면 족형제(族兄弟)이지 어진이를 추천하고 불초(不肖)한 자를 물리쳤다함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어진이의 길을 막은 것입니다.
어진이를 알고도 추천하지않았으면 이는 충성스럽지 못함이고,
어진이를 알지못하였다면 이는 지혜롭지 못함이니,
첩이 웃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우구자에게 그대로 이르니, 우구자가 자리를 옮겨앉으며 대답을 못하였다.
그리고 곧 피사(避舍)6758)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손숙오(孫叔敖)를 맞이하게하여 추천하니, 왕이 영윤(令尹)을 삼았는데,
초나라를 다스린 지 3년에 장왕(莊王)이 패왕(覇王)의 노릇을 하였다.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초왕(楚王)이 패왕노릇 한 것은 번희의 힘이다.”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장왕이 호시(虎視)6759)하며 패권을 도모함은,
번희가 은밀히 내조한 공이었네.
짐승의 고기 한 점도 맛보지아니함은,
사냥만 즐기는 삼풍(三風)6760)을 경계코자 함이로다.
우구자가 어진이의 진로 막음을 비웃었는데,
감히 임금의 은총믿고 후궁을 함부로 대하랴!
손숙오를 맞아들여 영윤을 삼아,
훌륭한 임금되게하여 무궁토록 빛냈도다.”하였다.【이승소(李承召)】
한원제풍소의도(漢元帝馮昭儀圖)
소의(昭儀)는 선발(選拔)되어 궁(宮)에 들어왔다.
원제(元帝)가 어느 날 범기르는 우릿간에 가서 짐승들을 싸움시켰는데,
궁녀들은 모두 앉았었다.
곰이 우릿간에서 뛰어나와 난함(欄檻)을 잡고 어전(御殿)에 올라가려하니, 좌우의 귀인(貴人)들은 모두 놀라서 달아나는데, 풍첩여(馮婕妤)6761)가 곰을 가로막고 섰으므로 좌우 사람들이 곰을 때려 죽였다.
원제가 첩여에게 묻기를,
“사람의 심정으로는 누구나 다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곰을 가로막았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첩(妾)은 들으니,‘맹수(猛獸)는 사람을 만나면 멈춘다’고 합니다.
첩은 곰이 어좌(御座)에 이를까 염려되었으므로 몸으로 막았던 것입니다.”하니, 원제가 감탄을 하고 그로 인해 경중(敬重)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상림원 놀이에 훌륭한 일이 겹치니,
삼천의 미인들 구름처럼 따랐네.
우리에 있던 곰이 난함에 달려드니,
궁녀가 모두 놀라 정신없이 달아났네.
죽음을 무릅쓰고 짐승앞에 막아서니,
이 한몸 모두가 임금위한 충성일세.
구구한 보좌관들 얼굴이 두껍구나!
천자의 감탄이 풍소의(馮昭儀)에게 기울었네.”하였다.【박효원(朴孝元)】
한성제반첩여도(漢成帝班婕妤圖)
첩여(婕妤)는 훌륭한 재주로서 사리에 능통했다.
처음에 후궁(後宮)에 선발되어와서 소사(小使)가 되었었는데,
얼마 안되어 크게 사랑을 받아 첩여가 되었다.
임금이 후정(後庭)에 노닐면서 첩여와 함께 연(輦)을 타려고 하니,
사양하기를,
“옛 그림을 보건대 현성(賢聖)한 임금은 모두 명신(名臣)이 곁에 있었는데, 삼대(三代)6762) 이후의 못난 임금들은 사랑하는 여자를 옆에 두었으니, 지금 함께 연을 탄다면 그와 같지 않겠습니까?”하니,
성제는 그 말을 옳게여겨 그만두었다. 태후(太后)가 듣고 기뻐하기를,
“옛날엔 번희(樊姬)가 있더니, 지금은 반첩여(班婕妤)가 있구나”하였다.
조비연(趙飛燕)의 자매(姉妹)가 총애를 받으면서 교만하고 투기하여 첩여를 참소하기를,
“사술(邪術)을 끼고서 저주(詛呪)합니다.”하였다.
임금이 첩여를 돌아보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첩은 들으니, 죽고 삶은 명이 있고 부하고 귀함은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올바름을 닦아도 오히려 복을 받지못하는데, 사술을 하여 무엇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가령 귀신이 앎이 있다면 신자(臣子)아닌 자의 허소를 받지않을 것이고, 만일 앎이 없다면 하소해본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하니,
임금이 그 대답을 옳게여기고, 가엾게 생각하여 황금(黃金) 1백근을 하사(下賜)했다. 시(詩)에 이르기를,
“연(輦)을 사양하던 때에는 임금의 은총이 융성하여,
한궁(漢宮)의 비빈들이 높은 풍도 사모했네.
한 점의 쉬파리가 깨끗한 몸에 생겼구나.
한 쌍의 비연(飛燕)6763)이 후궁에 들어왔네.
일찍이 죽고 삶은 천명임을 알았는데,
어찌 화와 복을 하늘에 빌겠는가?
황금을 헛된 상에 쓰지않는데,
장신궁(長信宮)은 해마다 무장이 비었네6764)”하였다.【강희맹(姜希孟)】
한명제명덕마황후도(漢明帝明德馬皇后圖)
황후(皇后)는 이미 궁위(宮闈)6765)의 황후가 되어서도 더욱 겸손하고 자숙하여 항상 대련복(大練服)을 입고 치마[裙]에는 단[緣]을 붙이지않았다.
초하루, 보름으로 여러 궁인들이 조청(朝請)6766)할 때의 황후의 웃옷[袍]이 거치른 것을 바라보고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여겼다가 가까이 가서 보고서는 웃었다. 황후가 겸사로 말하기를,
“이 비단은 특히 염색하기에 편의하기 때문에 입는 것이다.”하니,
육궁(六宮)이 모두들 탄식하였다.
황후는 길쌈하는 집을 만들어 탁룡원(濯龍園)안에서 누에를 기르며 자주가서 살펴보면서 그것을 오락(娛樂)으로 삼았다. 시(詩)에 이르기를,
“정숙한 규범은 부드럽고 곧으며,
황후의 높은 지위로도 조심하고 겸손했네.
화려한 의복 멀리하고 대련군을 입었고,
감옥의 죄수들도 황후의 인정에 감동했네.
언제나 검소한 덕은 궁중에서 먼저했는데,
어찌 사친에게 권세와 영화를 주었으랴,
이로부터 평생에 누에길쌈 중히 여겨,
어헌(魚軒)6767)이 때때로 탁룡원에 행차했네.”하였다.【노공필(盧公弼)】
당태종문덕장손황후도(唐太宗文德長孫皇后圖)
황후(皇后)는 천성(天性)이 인효(仁孝)하고 검소(儉素)하며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황제(皇帝)와 조용히 고사(古事)를 상의하면서 헌체(獻替)6 768)하여 도움이 된 것이 매우 많았다.
임금이 혹 죄가 아닌 것을 가지고 궁인(宮人)에게 꾸중을 하면 황후도 겉으로 노여워하면서 직접 추국(推鞫)하기를 청하고, 구속하여 가두어 두라고 명하였다가 임금의 노여움이 풀리기를 기다려 서서히 변명을 해주니, 그로 해서 궁중(宮中)에 형벌의 남용됨이 없었다.
임금이 어느 날 조회(朝會)를 하고 노여워하기를,
“이 촌늙은이를 꼭 죽이겠다.”하므로, 황후가 묻기를,
“누구입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위징(魏徵)이 늘 조정에서 나를 욕보인다.”하였다.
황후가 물러나와 조복(朝服)을 입고 뜰위에 섰으니,
임금이 놀라 그 까닭을 물었다. 황후가 말하기를,
“첩(妾)은 들으니,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다하는데,
지금 위징의 곧음은 폐하(陛下)께서 밝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첩이 감히 하례하지 않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이에 기뻐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문덕황후 겸손함은 타고난 천성이라,
함홍광대(含洪光大)함이 곤원(坤元)에 합하네.6769)
조용히 임금을 이해시켜 노여움 가시게 하고,
시서 읽기를 좋아하며 도의를 지키었네.
현상(賢相)이 빠짐을 보고 임종시에 천거하고,6770)
궁인이 꾸중받자 가두기를 자청했네.
만약 태후의 보필한 힘이 아니었다면,
간관(諫官)을 죽였다는 이름이 임금을 그르쳤으리”하였다.
【(손순효(孫舜孝)】
송인종광헌조황후도(宋仁宗光獻曹皇后圖)
황후(皇后)는 성품이 인자하고 검소하며 농사를 중하게 여겨 일찍이 금원(禁苑)에서 곡식을 심고 친히 누에를 길렀다. 경력(慶曆)6771)중에 위졸(衛卒) 몇 사람이 밤에 난(亂)을 일으켜 집을 넘어 들어와 침전(寢殿)을 두드렸다. 황후가 그 때 임금을 모셨었는데, 변(變)을 듣고 급히 일어나서 임금이 나가려고 하니, 황후가 문을 닫고 가로막으며, 도지(都知) 왕수충(王守忠)을 급히 불러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오게 하였다.
황후는 도적이 반드시 불을 지를 것으로 예측하고 몰래 사람을 보내어 물을 가지고 그들의 뒤를 따르게 했는데, 도적이 과연 횃불을 들어 주렴[簾]에 불을 질렀으나 즉시 물을 부어 불을 껐다. 시(詩)에 이르기를,
“인자하고 순박함은 타고난 천성,
백성들의 어려움을 자신만은 알고 있네.
금원에 봄 깊으니 보리가 무성하고,
공상에 뽕잎이 다하니 누에가 다 자랐네.
간등(諫燈)6772)에서 벌써 간함을 들을 줄은 알았으나,
변을 당하고 바야흐로 기발한 지혜에 놀랐네.
천추에 끼친 자의 새로운 그림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리키며 거듭 감탄케하네”하였다.【박효원(朴孝元)】
송영종선인고황후도(宋英宗宣仁高皇后圖)
황후(皇后)가 신종(神宗)을 낳았는데, 신종이 즉위하고 높여서 황태후(皇太后)를 삼았고, 철종(哲宗)이 위(位)를 계승하고서는 태황태후(太皇太后)를 삼아 권세(權勢)가 청정(聽政)6773)과 같았다.
정시(廷試)에서 사람을 선발하는데, 유사(有司)가 천성(天聖)6774)의 고사(故事)를 따라 임금과 황후가 모두 전(殿)에 나오기를 청하니, 황후가 이를 만류하였다. 또 문덕전(文德殿)에서 책보(冊寶)6775)를 받으라고 청하니,
황후가 말하기를,
“모후(母后)가 당양(當陽)6776)함은 국가(國家)의 미사(美事)가 아니다.
더구나 천자(天子)의 정아(正衙)6777)에 어찌 나아갈 수 있겠는가?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감도 만족하다.”하고,
고사(故事)를 힘써 행하며 외가(外家)의 사은(私恩)은 억제하였다.
그리고 문사원(文思院)의 봉상(奉上)하는 물건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종신토록 하나도 취하지않으니, 사람들이 여자중의 요(堯), 순(舜)이라고 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천성의 유풍이 좋다할 게 못된다는,
선인황후 겸손함은 더할 수 없네.
수렴을 하면서 편전에 나아감을 부끄럽게 여기는데,
책보를 받는다고 정아에 나갈쏜가?
은전은 외척에게 이르지않았고,
공로는 마땅히 왕가에 있어야지.
여러 해된 새 법을 모두 제거했으니,
요, 순이라 일컬음이 그 어찌 과장이랴!”하였다.【노공필(盧公弼)】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성담수(成聃壽)는 천성이 담박(淡泊)하여 사물(事物)에 대하여 욕심내는 것이 없었다. 부모가 일찍 죽으니, 가산(家産)은 모두 아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태연하게 생활하였다. 어린 세 아우를 길러 혼인(婚姻)을 시켜주고 어루만지며 사랑하기를 부모 못지않게 하니, 사람들이 많이 칭찬하였다.”
註6668]세 개의 병풍:세 개의 병풍이란 명군병(明君屛), 선명후암군병(先明後暗君屛), 현비병(賢妃屛)을 말한다. 아래에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 註6669]선온(宣醞):임금이 내리는 술. 註6670]뇌사(耒耜):쟁기와 보습 註6671]서호(鉏鎒):호미 註672]염제(炎帝):신농씨(神農氏). 註6673]삼퇴례(三推禮):임금이 농사짓는 일을 솔선수범하는 뜻으로, 적전(籍田)에서 세 번 밭갈이하는 의식 註6674]황수(黃收):황색의 면관(冕冠) 註6675]치의[純義]:검은 색의 옷 註6676]동거(彤車):붉은 수레 註6677]모자(茅茨):띠로 엮어만든 지붕 註6678]간고(諫鼓):신문고(申聞鼓)같은 것.註6679]사악(四岳):요(堯)임금때 사방(四方)의 제후(諸侯)를 통솔하던 관직(官職) 註6680]양단(兩端):두 가지 일의 실마리 註6681]경운(卿雲):상서로운 구름註6682]역수(曆數):천명(天命) 註6683]중화(重華):순(舜)임금의 공덕(功德)을 칭송하여 일컫는 이름 註6684]천장(天丈):임금의 근위병(近衛兵).註6685]순거(簨簴):악기를 다는 틀 註6686]토악(吐握):토포악발(吐哺握髮)의 준말로, 밥을 먹거나 머리를 감을 때에 손님이 오면 먹던 밥을 뱉고 감던 머리는 움켜쥐고 나가서 마중함을 말함 註6687]희생(犧牲):제물 註 6688]여알(女謁):여자가 임금의 사랑을 믿고 권세를 부려 나라의 정치를 어지럽히는 일 註6689]포저(苞苴):뇌물 註6690]참부(讒夫):아첨하는 무리 註6691]해도 망하고자:하(夏)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걸(桀)은 폭군으로서, 해를 가리키며, “저 해가 없어져야 나도 망할 것이다.”했는데, 당시 백성들이 그의 폭정에 못견디어, “저 해는 언제나 없어질 것인가?”했다는 고사에서 인용이 된 말임 註6692]힐향(肸蠁):소리를 아는 벌레 이름으로, 영감(靈感)이 감통(感通)한다는 뜻으로 쓰여짐 註6693]혁엽(奕葉):누대(屢代)의 자손 註6694]서미(胥靡):부열(傅說)의 별칭 註6695]서백(西伯):문왕의 작호(爵號) 註6696]천자의 덕은 영대(靈臺)에서 전파되고:문왕(文王)이 영대(靈臺)를 지을 때 백성들이 그 덕에 감동되어 아들처럼 와서 도운 고사에서 온 말 註6697]주역(周易)의 이치는 유리(羑里)에서 연구했네:문왕(文王)이 주(紂)에게 감금되어 유리옥(羑里獄)에 갇혀있을 때《주역(周易)》을 연역(演譯)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 註6698]독부(獨夫):주(紂)를 가리킴 註6699]홍범(洪範):천하를 다스리는 큰 법으로, 우(禹)임금이 만든 것인데, 정치(政治),도덕(道德),천문(天文)등에 관한 내용임 註6700]여러 여씨(呂氏):당시의 외척(外戚) 세력자인 여산(呂産), 여록(呂祿)등을 가리킨 말 註6701]참승(驂乘):옆에서 왕을 모시고 탐 註6702]대저(代邸):대왕의 관저 註6703]도리비(道里費):오는 도중의 비용 註6704]취화(翠華):천자(天子)의 기치(旗幟) 註6705]단조(丹詔):임금의 조칙(詔勅) 註6706]제봉(提封):영지(領地), 즉 사경(四境)을 거느림 註6707]업성(鄴城):위(魏)의 서울 註6708]일표(日表):제왕(帝王)의 의표(儀表) 註6709]초방(椒房):후비(后妃)의 궁전(宮殿) 註6710]정관(貞觀)의 다스림:정관(貞觀)은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연호(年號)로, 태종때의 정치를 말함 註6711]당(唐), 우(虞):요(堯)와 순(舜)의 시대를 함께 이르는 말 註6712]서식(棲息):궁실(宮室)을 갖추지못하고 움막에서 짐승처럼 생활함을 가리킴 註6713]기구(器具):관(棺)을 말함 註6714]나[孤]:왕이 자신을 일컫는 말 註6715]치이(鴟夷):말가죽으로 만든 큰 자루 註6716]안거포륜(安車蒲輪):부들로 바퀴를 싸서 편하게갈수 있게 만든 혼자타는 수레 註6717]후씨(候氏):지명(地名) 註6718]백량편(柏梁篇):백량대부(柏梁臺賦)를 말함 註6719]신마(神馬)가 음보(音譜)전함:한무제(漢武帝) 태초(太初)4년에 한혈마(汗血馬)를 얻고서 서극천마가(西極天馬歌)를 지은 고사가 있음 註6720]횡분(橫汾)한 즐거움:뱃놀이하며 즐겼다는 말로, 횡분(橫汾)은 한무제(漢武帝)의 추풍사(秋風辭)에,‘중류를 가로질러[橫中流]……분하를 건너다[濟汾河]’란 말을 줄인 것임 註6721]청사(靑絲):푸른 무명실 註6722]동작대(銅雀臺)는 기울어서:여기서는 위(魏)나라가 망한다는 뜻으로, 동작대(銅雀臺)를 위나라의 조조(曹操)가 지었으므로 일컬어진 것임 註6723]석두성(石頭城):오(吳)나라 손호(孫皓)가 항복한 성(城) 註6724]손호(孫皓):오나라의 마지막 임금. 註6725]액정(掖庭):후궁 註6726]금릉(金陵):오나라 수도 註6727]짐연(鴆宴)을 베풂은 탐욕에서 온 것인데:진(晉)나라 선제(宣帝)가 현석도(玄石圖)에,“소가 말을 계승한다.[牛繼馬]”고 한 말을 믿고 우씨(牛氏)를 꺼려 어느날 그의 장수였던 우금(牛金)에게 짐주(鴆酒)를 먹여 독살(毒殺)시켰는데, 이는 우씨(牛氏)가 사마씨(司馬氏)를 대신하여 군주(君主)가 될까 의심한 때문이었음 註6728]유연(流連):유연황망(流連荒亡)의 준말로, 주색(酒色)과 수렵(狩獵)에 탐닉(眈溺)하여 반성(反省)할 줄 모른다는 말 註6729]오마(五馬)의 집안에 화는 끊이지않았네:진(晉)나라 선제(宣帝)가,“소가 말을 계승한다[牛繼馬]”고 한 현석도(玄石圖)의 말을 믿고 우씨(牛氏)를 꺼려 우금(牛金)을 짐살(鴆殺)시켰으나 선제의 손부(孫婦)인 공왕비(恭王妃) 하후씨(夏侯氏)는 끝내 소리(小吏) 우씨(牛氏)와 간통하여 원제(元帝)를 낳았다. 오마(五馬)는 원제의 5형제를 말하는데, 원제가 처음에는 낭야왕(琅邪王)으로 있으면서, 서양왕(西陽王), 여남왕(汝南王), 남돈왕(南頓王), 팽성왕(彭城王)등의 형제와 협력하여 마침내 제위(帝位)에 올랐다. 당시 동요(童謠)에,“오마가 강을 건너 한 말은 용이 되었네.[五馬渡江 一馬爲龍]”한 데에서 일컬어진 말임. 여기의 시에서는 사실상 무제의 대가 끊긴 것을 뜻한 것임 註6730]수왕(壽王):현종의 아들 註 6731]좌부(坐部),입부(立部):음악(音樂)을 양부(兩部)로 나누어 당하(堂下)에서 입주(立奏)하는 자를 입부기(立部伎), 당상(堂上)에서 좌주(坐奏)하는 자를 좌부기(坐部伎)라 함 註6732]호악(胡樂):호인의 음악 註6733]교방(敎坊):장악원(掌樂院) 註6734]산악(散樂):민간의 음악 註6735]잡희(雜戱):광대놀이 註6736]산거(山車):산 모양을 화려하게 꾸민 수레 註6737]육선(陸船):배모양으로 만든 꽃수레 註6738]호아(胡兒)가 목욕한 뒤에 추한 소문 많았고:호아(胡兒)는 안녹산(安祿山)을 가리킨 말로, 안녹산이 양귀비(楊貴妃)가 쓰는 목욕탕에 들어가 목욕한 것을 이름 註6739]척리(戚里):여기서는 양귀비(楊貴妃)의 형제(兄弟), 자매(姉妹)를 가리킴 註6740]비고(鼙鼓)가 홀연히 연새에서 일어나고:비고(鼙鼓)는 기병(騎兵)이 마상(馬上)에서 치는 북. 안녹산(安祿山)이 반역(叛逆)을 일으킴을 가리킨 말 註6741]용여(龍輿)는 놀라서 금관성(錦官城)으로 향하였네: 용여(龍輿)는 임금이 타는 수레. 당현종(唐玄宗)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해 서촉(西蜀)으로 간 것을 말함. 註6742]양암(諒闇):거상(居喪) 註6743]중역(重譯):이중 통역. 제3국과의 언어가 통하지않아 이중통역을 거치는 일 註6744]정관(貞觀):당(唐)태종(太宗)의 연호 註6745]의사(疑似):분간하기 어려움 註6746]양하(兩河): 하남(河南)과 하북(河北) 註6747]백만민(百萬緡): 민(緡)은 돈꿰미의 단위. 註6748]진봉문호(進奉門戶): 궁에 바칠 물건 註6749]각가전(脚價錢): 심부름값 註6750]비정(秕政): 학정(虐政) 註6751]황옥(黃屋): 임금의 수레 註6752]사씨(師氏): 보모(保姆) 註6753]이남(二南):《시경(詩經)》국풍(國風)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가리키는데, 왕화(王化)의 기초가 되는 가장 아름다운 시풍(詩風)이라하여 일컫는 말 註6754]종사(螽斯): 여치과에 속하는 곤충. 한 번에 아흔 아홉개의 알을 낳는다하는데, 문왕(文王)의 아들이 아흔 아홉이므로, 비유로 일컬어지는 말 註6755]잠이(簪珥): 비녀와 귀고리 註6756]동위(彤闈): 궁궐(宮闕). 궁전(宮殿)을 붉게 칠하였으므로 일컬어진 말 註6757]안거치변(安車輜輧): 앉아서 타는 수레로, 덮개가 있는 것 註6758]피사(避舍): 피삼사(避三舍)의 준말로, 곧 상대에게 양보한다는 뜻임註6759]호시(虎視): 호시탐탐(虎視眈眈)의 준말 註6760]삼풍(三風):《서경(書經)》이훈(伊訓)에서 말한 세 가지의 나쁜 풍습. 즉 무풍(巫風), 음풍(淫風), 난풍(亂風) 註6761]풍첩여(馮婕妤): 첩여는 소의(昭儀)되기 전 직명 註6762]삼대(三代): 하(夏),은(殷),주(周) 註6763]한 쌍의 비연(飛燕): 조비연(趙飛燕)의 자매를 가리킴 註6764]장신궁(長信宮)은 해마다 무장이 비었네: 반첩여(班婕妤)가 조비연(趙飛燕)의 질투를 피하여 장신궁(長信宮)에서 태후(太后)를 봉양(奉養)하고 있음을 가리킨 말 註6765]궁위(宮闈): 중궁(中宮) 註6766]조청(朝請): 조회(朝會)를 뜻한 말로, 봄에는 조(朝), 가을에는 청(請)이라 함 註6767]어헌(魚軒): 물고기 가죽으로 장식한 왕후의 수레 註6768]헌체(獻替): 임금에게 선(善)을 권함 註6769]함홍광대(含洪光大)함이 곤원(坤元)에 합하네: 황후(皇后)의 덕을 일컫는 말.《주역(周易)》곤괘(坤卦)에 있는 말로, 땅의 덕은 무엇이든 포용(包容)하지 않음이 없음을 뜻함인데, 여기서는 장손황후(長孫皇后)의 덕을 거기에 비한 것임. 註6770]현상(賢相)이 빠짐을 보고 임종시에 천거하고: 장손황후(長孫皇后)가 임종시에, 물러나있는 방현령(房玄齡)을 버려두지말라고 태종(太宗)에게 권유한 것을 말함 註6771]경력(慶曆): 인종(仁宗)의 연호 註6772]간등(諫燈):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망석(望夕)에 장등(張燈)을 하려하니, 조황후(曹皇后)가 이를 간하여 중지시킴을 말함 註6773]청정(聽政): 정사(政事)를 청단(聽斷)함 註6774]천성(天聖): 송(宋)인종(仁宗)의 연호 註6775]책보(冊寶): 옥책(玉冊)과 금보(金寶) 註6776]당양(當陽):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림 註6777]정아(正衙): 선정전(宣政殿)의 이칭(異稱).
○先是命採明君、先明後暗君、賢妃事跡, 畫爲三屛, 令文臣分題作詩, 又命掌令朴孝元、應校柳洵、進士成聃壽書事跡與詩于其上, 至是孝元等書進, 賜御衣各一領, 仍饋宣醞。
其明君屛。
《神農圖》: 神農知天地之道, 明於人之性, 以有天下。 古者民茹草飮水, 采樹木之實, 食蠃蚌之肉。 神農以謂人民衆多, 難以久養。 敎民種五穀, 爲耒耜鉏鎒以墾草莽, 然後五穀興。 令曰: ‘丈夫壯而不耕, 天下有受其飢者, 婦人豐盈而不織, 天下有受其寒者。’ 故神農親耕, 后親織, 以爲天下先。 詩曰:
“炎帝當年撫域中, 却將神敎立神功。 生民飢飽關農務, 天下寒溫在女工。 雨玉雨珠非世用, 親耕親織與民同。 千年幸覩三推禮, 願取神農保始終。”【玄碩圭。】
《帝堯圖》: 帝堯黃收純衣, 彤車白馬, 茅茨不剪, 土階三等勤於君道, 作布政之宮曰衢室, 立誹謗之木, 使天下得盡其言, 建進善之旌, 使天下得盡其才, 置諫鼓於朝, 使天下得攻其過。 一民飢, 曰我飢之也, 一民寒, 曰我寒之也。 由是百姓戴之如日月, 親之如父母。 有老人擊壤而歌曰: “日出而作兮, 日入而息兮。 耕田而食兮, 汲井而飮兮, 帝何力於我哉,” 詩曰:
“日日昏花史傳親, 聖中無若帝堯仁。 土階還有第茨儉, 謗木仍兼諫皷陳。 允協萬邦臻至理, 曰吁四岳動咨詢。 巍巍蕩蕩天爲大, 遐邇歸心無異人。”【洪應。】
《帝舜圖》: 帝舜畏天而愛人, 恤遠而親近, 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時日月光華, 卿雲叢聚。 舜彈五絃之琴, 詠《南風》之詩曰: ‘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 詩曰:
“海內謳歌曆數歸, 重華千載仰巍巍。 卿雲藹藹垂天仗, 瑞日輝輝照袗衣。 庶績凝時端冕儼, 五絃和處惠風微。 南薰一曲舒民慍, 皞皞熙熙遍九圍。”【洪貴達。】
《大禹圖》: 禹以五音聽治, 懸鐘、皷、磬、鐸、鞀以待四方之士, 爲銘於簨虡曰: ‘敎寡人爾者擊鼓, 論以義者擊鐘, 告以事者振鐸, 語以憂者擊磬, 有獄訟者搖鞀。’ 一饋十起, 一沐三握, 以勞天下之民。 出見罪人, 下車問而泣之, 左右曰: ‘罪人不順道, 君王何爲痛之,’ 禹曰: ‘堯、舜之人, 皆以堯、舜之心爲心, 寡人爲君, 百姓各自以其心爲心, 是以痛之,’ 詩曰:
“當年足跡遍寰瀛, 辛苦腁胝績用成。 擊皷撞鐘聞理道, 搖鞀振鐸達民情。 哀矜問罪存深愛, 吐握迎人見至誠。 恥俗不如堯、舜世, 至今功化妙難名。”【洪貴達。】
《成湯圖》: 湯適野, 見野人張網四面, 祝曰: ‘自天下四方, 皆入吾網。’ 湯乃去其三面, 祝曰: ‘欲左, 左, 欲右, 右, 不用命者, 乃入吾網。’ 諸侯聞之曰: ‘湯德至矣。’ 歸者四十餘國。 時大旱七年, 太史占之曰: ‘當以人禱。’ 湯曰: ‘吾所爲請雨者, 民也, 若以人禱, 吾請自當。’ 遂齋戒剪爪斷髮, 素車白馬, 身嬰白茅, 以身爲犧, 禱于桑林之野, 以六事自責曰: ‘政不節歟, 民失職歟, 宮室崇歟, 女謁盛歟, 苞苴行歟, 讒夫昌歟,’ 言未已, 大雨方數千里。 詩曰:
“夏德將衰日欲亡, 人心天命屬成湯。 七年荒旱憂民切, 六事兢皇責己詳。 一念至誠通肸蠁, 四郊甘雨澍汪洋。 自從祝網仁心大, 便做商家奕葉長。”【玄碩圭。】
《商高宗圖》: 高宗卽位, 思復興殷, 而未得其佐, 〔三〕年不言政事, 決於冢宰, 以觀國風。 高宗夜夢得聖人, 名曰說。 以夢所見視群臣百吏, 皆非也, 於是審厥象, 俾以形使百工營求之野, 得說於傅巖中, 與之語, 果聖人也。 擧以爲相, 殷國大治。 詩曰:
“湯德巍巍不可肩,高宗燁燁亦光前。三年不語心治道,一夜無端夢大賢 忽作鹽梅調巨鼎,便爲舟楫濟洪川。若敎胥靡終巖穴,殷社焉能六百年!”【洪貴達。】
《周文王圖》: 文王時有呂尙者, 年已八十餘, 釣於渭上。 文王將獵卜之, 卜人曰: “所獵非龍, 非彲, 非虎, 非熊, 而王者之輔也。” 遂出畋, 至磻溪, 果遇呂尙, 同車而歸, 立爲師。 嘗鑿沼得朽骨, 命葬之。 左右曰: “此無主矣,” 文王曰: “天子主天下, 諸侯主一國, 寡人固骨之主矣,” 遂葬之。 天下聞之, 曰: “西伯仁及朽骨, 況生者乎,” 詩曰:
“造周基業至文隆, 天下三分有一中。德感歧陽鳴有鳳,祥凝渭涘獵非熊。皇風時向靈臺播,易象曾從羑里窮。莫問生民游聖澤,九原枯骨尙恩蒙。”【金紐。】
《武王圖》: 武王代紂, 陳于商郊, 俟天休命, 紂率其旅若林, 會于牧野, 罔有敵于我師。 前徒(例)〔倒〕戈, 攻于後以北, 血流漂杵, 一戎衣天下大定。 乃反商政, 政由舊, 釋箕子囚封比干墓, 散鹿臺之財, 發鉅橋之粟, 大賚于四海, 而萬姓悅服。 詩曰:
“應順天人問獨夫, 倒戈攻北是前徒。 壤泉毅魄應銷恨, 縲絏忠臣得脫軀。 已放馬牛歸野牧, 更分財粟及民孤。 若非訪道傳《洪範》, 未識彝倫敍得無。”【李克培。】
《漢文帝圖》: 文帝初封代王, 守薄于代。 周勃等旣誅諸呂, 迎王立之, 王命(宋旦)〔宋昌〕驂乘, 張武等六人乘傳, 從詣長安, 至代邸, 遂卽天子位。 卽夕入未央宮, 夜拜宋昌爲衛將軍, 鎭撫南北軍, 還坐前殿, 下詔書赦天下。 元年有獻千里馬者, 帝曰: “鑾輿在前, 屬車在後, 吉行日五十里, 師行三十里, 朕乘千里馬, 獨先安之,” 於是還其馬與道里費, 而下詔曰: “朕不受獻也。 其令四方毋獻。” 帝每朝郞從官上書疏, 未嘗不止輦受其言, 言不可用置之, 言可用採之, 未嘗不稱善。 詩曰:
“由來恭儉足爲臨,況復驕奢不受侵。異物未能售喪志,善言方得沃虛心。翠葉停處皆休命,丹詔飛時盡德音。坐致提封開富庶,始知淸淨化民深。”【崔淑精。】
《唐太宗圖》: 太宗時, 畿內有蝗。 上入苑中見蝗, 掇數枝, 祝之曰: “民以穀爲命, 而汝食之, 寧食吾之肺腸。” 擧手欲呑之, 左右諫曰: “惡物或成疾。” 上曰: “朕爲民受災, 何疾之避,” 遂呑之, 是歲蝗不爲災。 上以宮女衆多幽閟可憫: “灑掃之餘, 亦何所用”, 於是遣官於掖庭西門簡出之, 前後所出三千餘人。 林邑獻五色鸚鵡, 新羅獻美女二人, 上曰: “林邑鸚鵡, 猶能自言苦寒, 思歸其國, 況二女遠別親戚乎,” 幷鸚鵡各付使者而歸之。 詩曰:
“鄴城宮殿已斜陽, 晋邸風雲滿八荒。 十萬義兵隨日表, 三千宮女出椒房。 放回思土籠中鳥,(含)〔呑〕却傷農口裏蝗。最是力行仁義效,致令貞觀比虞唐。”【任元濬。】
先明後暗君屛。
《吳夫差圖》: 吳王闔廬伐越, 越王句踐迎擊大敗之, 靈姑浮以戈擊闔廬, 闔廬病傷且死, 告其子夫差曰: “必毋忘越。” 夫差旣立, 使人立於庭, 苟出入必謂己曰: “夫差! 而忘越王之殺而父乎,” 則對曰: “唯。 不敢忘。” 常以報越爲志, 乃悉精兵, 以伐越, 敗之夫椒。 越王乃以甲兵五千, 棲於會稽, 進西施請退軍, 吳王乃許行成。【先明】 詩曰:
“吳曾呑越越呑吳,勝敗輸贏一局圖。兩地山河兵爛熳,先君髑髏血糢糊。讎如未復心寧忍,動必相箴誓不渝。直向夫椒能一雪,會稽當日目中無。”【徐居正。】
夫差旣得西施, 築姑蘇臺高三百丈 遊宴其上, 子胥諫曰: “臣恐不久爲麋鹿之遊。” 王不聽, 賜屬鏤之劍以死, 將死曰: “樹吾墓上以檟, 令可爲器, 抉吾眼置之吳東門, 以觀越之滅吳也。” 王慍曰: “孤不使大夫得有見也。” 乃取子胥之尸, 盛以鴟夷, 而投之於江, 吳終爲越所滅。【後暗】 詩曰:
“血戰夫椒得意歸,旋携春色上高臺。飄飄舞袖凌雲去,杳杳歌聲雜雁來。當日舘娃殊寂莫,至今江月獨俳徊。可憐千載東門目,猶作驚潮擊岸回。”【柳洵。】
《漢武帝圖》: 帝初卽位, 擧賢良方正直言極諫之士, 親策問之, 詔申、韓、蘇、張之言者皆罷之。 上雅尙儒術, 趙綰薦其師申公, 上使使者奉安車蒲輪, 束帛加璧迎之。【先明】 詩曰:
“至言當訪衆論聞,發策賢良闢四門。屛黜蘇張排異術,表章周孔右斯文。賑窮下詔仁恩洽,束帛徵賢禮意勤。若使力行爲治本,隆功何止漢明君!” 【任士洪。】
帝用方士公孫卿言, 令長安、甘泉作蜚廉桂觀、通天臺, 使卿持節設具而候神人, 益廣諸宮室, 起栢梁臺, 作承露盤, 高二十丈, 大七圍, 璘爲之。 上有仙人掌以承露, 和玉屑飮之, 云可以長生。 帝如候氏, 禮祭中岳太室, 從官在山下聞若有言萬歲者三。 詔加增太室祠, 遂東巡海上求神仙, 封泰山, 禪肅然。 復東北至碣石而還。【後暗】 詩曰:
“百尺銅臺入紫烟, 侍臣長奉《栢梁篇》。 已娛神馬傳音譜, 更恨匈奴賁戍邊。 祠罷甘泉還灑淚, 藥無蓬島可求仙, 誰知簫鼓橫汾樂, 今日重尋事已遷!”【月山大君。】
《晉武帝圖》: 帝初卽位, 承魏氏刻迫奢侈之後, 欲矯以仁儉。 有司言: “御牛靑絲靷斷”, 詔: “以靑麻代之。” 大醫司馬程據獻雉頭裘, 帝命焚之於殿前, 勅內外, 敢有獻異技異服者罪之。【先明】 詩曰:
“銅雀臺傾王氣衰, 晋王開創勵精時。 奢華欲矯前朝弊, 仁儉還應四海知。 已用雉裘投烈熖,更將牛靷替靑絲。石頭一片降幡竪,莫遣功成意氣。”【金訢。】
武帝旣平吳, 頗事遊宴, 怠於政事。 詔選孫皓宮人五千入宮, 掖庭殆將萬人。 常乘羊車, 恣其所之至便宴寢, 宮人競以竹葉揷戶, 鹽汁灑地, 以引帝車。【後暗】 詩曰:
“一破金陵氣轉驕, 色荒無乃倦臨朝。 五千歌舞吳宮選, 十二樓臺晋殿高。 鴆宴向來貪愒日, 羊車隨處幾經霄。 流連不是苞桑計, 五馬蕭墻禍不銷。”【徐居正。】
《唐玄宗圖》: 玄宗初卽位, 以風俗侈靡, 制乘輿服御金銀器玩, 令有司燒毁, 以供軍國之用, 其珠玉錦繡, 焚於殿前。 又禁採珠玉及爲刻鏤器玩, 復廢織錦坊。 帝於苑中種麥, 率皇子以下, 躬自收穫, 謂曰: “此將薦宗廟。 是以親之, 亦令爾等知稼穡之艱難也。” 因分賜侍臣等曰: “比歲令人巡檢苗稼, 所對多不以實, 故自種植以觀其成。 且《春秋》書無麥禾, 豈非古人所重也,”【先明】 詩曰:
“初臨九五志昇平, 端冕垂衣更勵精。 庭下焚珠昭儉德, 苑中種麥供粢盛。 百年流俗終歸化, 當日皇孫亦解耕。 畢竟操存能窒慾, 未塵心鑑自昭明。”【李克基。】
玄宗在位歲久, 漸肆奢慾, 怠於政事, 納壽王妃楊氏爲貴妃, 專以聲色自娛。 每酺宴先設太常雅樂坐部立部, 繼以皷吹胡樂敎坊府縣散樂雜戲。 又以山車ㆍ陸船載樂往來, 又出宮人舞霓裳羽衣。 又敎舞馬百匹銜盃上壽, 又引犀象入場或拜或舞, 安祿山見而悅之。 祿山叛於范陽, 上召宰相謀之, 楊國忠首唱幸蜀之策。 上然之, 獨與貴妃姊妹、皇子妃、主皇孫及親近宦官、宮人, 出迎秋門。 至馬嵬驛, 將士飢疲, 皆憤怒, 陳玄禮等以禍由楊國忠, 殺之。 上聞喧嘩, 出門慰勞, 令收隊, 軍士不應。 上使高力士問之, 玄禮對曰: “國忠謀叛, 貴妃不宜供奉。 願陛下割恩正法。” 上曰: “朕當自取之。” 高力士進曰: “將士已殺國忠, 而貴妃在陛下左右, 豈敢自安, 將士安, 則陛下安矣。” 上乃命縊殺於佛堂, 輿尸置驛庭, 召玄禮等入視之, 軍士皆呼萬歲, 始整部伍爲行計。【後暗】 詩曰:
“一自楊妃入禁圍, 鴛央金殿鎖羅幃。 胡兒浴後聲多醜, 戚里驕來事已違。 鼙鼓忽從燕塞動, 龍輿驚向錦城飛。 可憐耽玩霓裳日, 那料間關萬里歸!”【李崇元。】
《唐德宗圖》: 德宗在諒闇中, 動遵禮法。 先是諸國屢獻馴象, 上曰: “象費豢養, 而違物性, 將安用之,” 命縱於荊山之陽。 及豹貀鬪鷄鷹犬之類, 悉縱之, 又出宮女數百人, 中外皆悅。 淄、靑將士投兵相顧曰: “明主出矣! 吾屬猶反乎,” 又詔曰: “引朝集使二人, 訪遠人疾苦。”【先明】 詩曰:
“奇獸魁然性自馴, 遐方重譯獻楓宸。 尙嫌異物來千里, 幷出宮娥過百人。 朝野爭歡稱聖主, 淄靑相顧感深仁。 爲迎朝集垂淸問, 四海窮民恐未伸。”【任士洪。】
德宗初年, 崔祐甫爲相, 務崇寬大。 故當時政聲蕩然, 以爲有貞觀之風。 及盧杞爲相, 以疑似離間群臣, 勸上以嚴刻御下, 中外失望。 時兩河用兵, 月費百餘萬緡, 府庫不支。 括富商錢出萬緡者, 借其餘以供軍, 大索長安商賈所有貨, 意其不實, 輒加榜棰, 人不勝苦。 百姓爲之罷市, 相率遮宰相馬自訴, 盧杞始慰諭之, 勢不可遏, 疾馳得免。 涇原兵作亂, 上幸奉天, 於行宮廡下, 貯諸道貢獻之物, 榜曰瓊林大盈庫。 宮中市外間物, 以宦官爲使, 謂之宮市, 抑買人物, 以紅紫染故衣敗繒, 尺寸裂而給之, 仍索進奉門戶及脚價錢。 嘗有農夫以驢負柴, 宦者稱宮市取之, 又就索門戶。 農夫曰: “我有父母妻子, 待此然後食, 今以柴與汝, 不取直而歸, 汝尙不肯, 我有死而已。” 遂毆宦者。【後暗】 詩曰:
“年來秕政比初加, 志大才疎性忌何, 黃屋蒙塵非細事, 瓊林揭榜爲誰誇, 商錢取括寬恩少, 宮市開張斂怨多。 最識此心愚暗處, 不知盧杞是奸邪。”【徐居正。】
賢妃屛。
《周文王后妃圖》: 周文王生有聖德, 又得聖女姒氏以爲之妃。 《葛覃》之詩, 后妃所自作也。 其詩曰: “葛之覃兮, 施于中谷, 維葉萋萋。 黃鳥于飛, 集于灌木, 其鳴喈喈。 葛之覃兮, 施于中谷, 維葉莫莫。 是刈是穫, 爲絺爲綌, 服之無斁。 言告師氏, 言告言歸, 薄汚我私, 薄澣我衣。 害澣害否, 歸寧父母。” 詩曰:
“周家厚德在民心, 八百年基自二南。 要識文王新景命, 須看太姒嗣徽音。 儉昭絺綌輝千古, 慶篤螽斯則百男。 聖母也能生聖子, 丕承武烈照來今。”【李承召。】
《周宣王姜后圖》: 姜后賢而有德。 宣王嘗早臥晏起, 姜后脫簪珥待罪於永巷, 使其傅母通言於王曰: “妾之不才, 至使君王失禮而晏朝, 以見君王樂色而忘德也。 夫苟悅色, 必好奢窮慾。 亂之所興也, 原亂之興, 從婢子起, 敢請婢子之罪。” 王曰: “寡人不德, 寔自生過, 非夫人之罪也。” 遂復姜后而勤於政事, 早朝晏退, 遂成中興之名。 詩曰:
“濟濟群臣會且歸, 數竿朝日上彤闈。 由來樂色爲治累, 斗覺懷安是禍機。 直以此身當罪責, 庶敎君子免愆違。 須知赫赫中興業, 正在賢妃一格非。”【朴孝元。】
《齊孝公夫人圖》: 夫人孟姬, 好禮貞一。 公遊於琅琊孟姬從, 車奔, 姬墮車碎。 孝公使駟馬立車載姬以歸, 姬使侍御者舒帷以自障蔽, 而使傅母應使者曰: “妾聞妃后踰閾必乘安車輜輧, 下堂必從傅母阿保, 進退則鳴玉環佩, 內飾則結紐綢繆, 野處則帷裳擁蔽, 所以正心一意, 自斂制也。 今立車無輧, 非所敢受命者也, 野處無帷, 非所敢久居也。 二者失禮多矣, 無禮而生, 不若早死。” 使者馳以告, 公更取安車, 比其反也, 則自經矣。 傅母救之, 不絶。 傅母曰: “使者至, 輜輧已具。” 姬氏蘇, 然後乘而歸。 詩曰:
“當日君王自在閑, 故携妃嬪恣遊觀。 尋常每守操存地, 顚沛那踰禮義關, 早識此身輕似葉, 由來大節重於山。 淸風澟澟長如昨, 驚起人間萬代頑。”【李坡。】
《楚樊姬圖》: 樊姬, 莊王之夫人也。 莊王卽位好狩獵, 樊姬諫, 不止。 乃不食禽獸之肉, 王改過, 勤於政事。 王嘗聽朝罷晏, 姬下庭迎(日)〔曰〕, ‘何罷晏也, 得無飢倦乎,’ 王曰: “與賢者語, 不知飢倦也。” 姬曰: “王之所謂賢, 何也,” 曰: “虞丘子也。” 姬掩口而笑。 王曰: “姬之所笑, 何也,” 曰: “虞丘子, 賢則賢矣, 未忠也。 今虞丘子相楚十餘年, 所薦非子弟則族昆弟, 未聞進賢退不肖, 是蔽君而塞賢路。 知賢不進, 是不忠, 不知其賢, 是不智也, 妾之所笑, 不亦可乎,” 王悅以告虞丘子, 虞丘子避席不知所對。 於是避舍, 使人迎孫叔敖而進之, 王以爲令尹, 治楚三年, 莊王以覇。 史書曰: “楚王之覇, 樊姬之力也。” 詩曰:
“莊王虎視覇圖雄, 爲有樊姬密贊功。 獸肉不曾嘗一臠, 禽荒深欲戒三風。 笑他丘子防賢路, 敢恃君恩擅後宮, 迎得叔敖爲令尹, 使君榮顯耀無窮。”【李承召。】
《漢元帝馮昭儀圖》: 昭儀以選入宮。 帝嘗幸虎圈鬪獸, 後宮(曹從)〔皆坐〕。 熊逸出圈, 攀檻欲上殿, 左右貴人皆驚走, 而馮婕妤直當熊而立, 左右擊殺熊。 帝問婕妤: “人情皆驚懼, 何故當熊,” 對曰: “妾聞猛獸得人而止。 妾恐至御座, 故以身當之。” 帝嗟嘆, 以此敬重焉。 詩曰:
“上苑遊觀勝事重, 三千粉黛藹雲從。 圈熊忽逸來(樊)〔攀〕檻, 宮女皆驚走失容。 萬死獨能當獸立, 一身都是愛君忠。 區區傅輩顔堪厚, 天子咨嗟只屬馮。【朴孝元。】
《漢成帝班婕妤圖》: 婕妤賢才通辨。 始選入後宮爲小使, 俄而大幸爲婕妤。 帝遊於後庭, 嘗欲與婕妤同輦, 辭曰: “觀古圖畫, 賢聖之君, 皆有名臣在側, 三代之下末主, 乃有女嬖, 今欲同輦, 得無似之乎,” 帝善其言而止。 太后聞而喜曰: “古有樊姬, 今有班婕妤。” 趙飛燕姊妹有寵, 驕妬譖訴婕妤云: “挾邪詛祝。” 上顧問, 婕妤對曰: “妾聞死生有命, 富貴在天。 修正尙未蒙福, 爲邪欲以何望, 且使鬼神有知, 不受不臣之訴, 如其無知, 訴之何益, 故不爲也。” 上善其對而憐之, 賜黃金百斤。 詩曰:
“辭輦當時帝眷隆, 漢家妃嬪慕高風。 蒼蠅一點生昭質, 妖燕雙飛入後宮。 早斷死生緣賦命, 敢將禍福訴天公, 黃金不用施虛賞, 長信年年武帳空。”【姜希孟。】
《漢明帝明德馬皇后圖》: 皇后旣正位宮闈, 愈自謙肅, 常衣大練, 裙不加緣。 朔望諸姬主朝請, 望見后袍, 疎麤以爲綺縠, (執)〔就〕乃笑。 后辭曰: “此繒特宜染色, 故用之耳。” 六宮莫不嘆息。 后置織室蠶於濯龍中, 數往觀視, 以爲娛樂。 詩曰:
“從容閨範自柔貞, 坤極居尊戒滿盈。 衣斥奢華便大練, 獄因冤濫感皇情。 每將儉德先閨閫, 肯爲私親借勢榮。 自是平生重蠶織, 魚軒時向濯龍行。”【盧公弼。】
《唐太宗文德長孫皇后圖》: 皇后性仁孝儉素好讀書。 嘗與帝從容商略古事, 而獻替裨益弘多。 上或以非罪譴怒宮人, 后亦陽怒, 請自推鞫, 因命囚繫, 俟上怒息, 徐爲申理, 由是宮閫之中, 刑無枉濫。 上嘗朝怒曰: “會須殺此田舍翁。” 后問爲誰, 上曰: “魏徵每廷辱我。” 后退具朝服立于庭上, 上驚問其故。 后曰: “妾聞主明臣直, 今魏徵直, 由陛下之明故也, 妾敢不賀,” 上乃悅。 詩曰:
“文德謙恭稟性溫, 含洪光大合坤元。 從容啓沃雷霆霽, 好讀《詩》《書》道義存。 賢相見遺臨訣薦, 宮人當譴請囚原。 若非太后扶持力, 殺諫之名誤至尊。”【孫舜孝。】
《宋仁宗光獻曺皇后圖》: 皇后性慈儉, 重稼穡, 嘗於禁苑種穀親蠶。 慶曆中衛卒數人夜作亂, 越屋叩寢殿。 后方侍帝, 聞變遽起, 帝欲出, 后閉閤擁持, 趣呼都知王守忠, 使引兵入。 后度賊必縱火, 陰遣人挈水踵其後, 賊果〔擧〕炬焚簾, 水隨滅之。 詩曰:
“至仁純儉實天資, 民事艱難只自知。 禁苑春深分麥隴, 公桑葉盡長蠶絲。 諫燈已覺能回聽, 應變方驚喜出奇。 千載遺蹤新樣畫, 令人指點重嗟咨。”【朴孝元。】
《宋英宗宣仁高皇后圖》: 皇后生神宗, 神宗立, 尊爲皇太后, 哲宗嗣位, 尊爲大皇太后, 權同聽政。 廷試擧人, 有司請循天聖故事, 帝后皆御殿, 后止之。 又請受冊寶於文德, 后曰: “母后當陽, 非國家美事。 況天子正衙, 豈所當御, 就崇政足矣。” 力行故事, 抑絶外家私恩。 文思院奉上之物, 無問巨細, 終身不取其一, 人以爲女中堯、舜。 詩曰:
“天聖風流不是多, 宣仁謙抑更無加。 垂簾尙愧臨便殿, 受冊何心就正衙! 恩數未曾推外戚, 勳勞應已在王家。 年來新法除還盡, 堯舜稱名豈謾誇!”【盧公弼。】
【史臣曰: “聃壽性恬淡, 於物無所求。 父母早沒, 家産盡推與弟。 家甚貧窶, 處之晏如也。 幼孤三弟養育婚嫁, 撫愛不啻如父母, 人多稱之。”】
중종 21권, 10년(1515 을해/명정덕(正德) 10년) 3월 23일(경진) 2번째기사
대행 왕비의 지문
대행왕비 지문(誌文)5572)은 다음과 같다.
“윤씨(尹氏)의 세계(世系)는 파주(坡州)에서 나시어 연원이 멀고 현달하였으니, 후(后)의 성이 바로 이것이다.
시조 신달(莘達)은 고려 태조조(太祖朝)에 훈공을 세워 이름이 났다.
4세(世)를 지나 태보문하시중(太保門下侍中) 문숙공(文肅公) 관(瓘)에 이르러 여진(女眞)을 평정하고 공을 세워 더욱 그 문중을 떨쳤으며,
그 후로 잇달은 관작이 넘쳐흘러 크게 높아졌다.
왕부(王父) 번(璠)은 시중의 후손으로 증영의정(贈領議政)이며, 시호는 정정(貞靖)으로 우리 성모(聖母) 정희왕후(貞熹王后)를 낳아 광릉(光陵)5573) 과 짝하였으며, 성묘(成廟)를 옹립(擁立)하여 재차 종사(宗社)를 평안히 하니, 그 조선(祖先)누대에 후한 덕을 쌓지않았으면 어찌 능히 이렇게 뭉쳐지리요?
공조판서 겸보문각대제학(工曹判書兼寶文閣大提學)으로 시호 성안(成安)인 윤사균(尹士昀)은 증조부로서 정난좌익공신(靖難左翼功臣)에 책봉되고 영평군(鈴平君)에 봉하여졌으며 후에 좌찬성(左贊成)으로 증직되었다.
그 아들 보(甫)는 습작(襲爵)으로 파릉군(坡陵君)이 되고, 증의정부 영의정이 되었으니, 모두 국구(國舅)5574)의 관질(官秩)에 의하여 추후로 조니(祖禰)에 미친 것이다.
국구 여필(汝弼)은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숭록대부(崇祿大夫)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이 되었다.
부인 박씨(朴氏)는 순천(順天)의 귀한 집안으로서, 증우의정인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박중선(朴仲善)의 딸이며, 추후로 순천부부인(順天府夫人)으로 봉하여졌다. 내외 집안이 훤혁(烜赫)하여 모두 아름다운 덕이 있어 뭉쳐서 모여 큰경사가 되어 이런 사록(沙麓)의 상서5575)를 열었다.
홍치(弘治)5576) 신해년5577) 7월 경진일에 후(后)는 호현방(好賢坊) 사제(私第)에서 나셨다. 겨우 8세때에 황비(皇妣)5578)를 여의었는데, 애훼(哀毁)하여 복상[持服]하기를 한결같이 성인(成人)처럼 하니, 그 외종모(外從母) 승평부인(昇平夫人)이 듣고서 비범한 아이라 하며 거두어길렀다.
아름다운 규범으로 가르치고 《소학(小學)》,《내훈(內訓)》의 여러 편을 가르쳤는데, 드디어 경서와 사기를 통달하여 크게 행신에 드러났다.
병인년5579) 가을에 성상이 즉위하시고, 뽑혀 궁에 들어가 숙의(淑儀)가 되었는데 공경하고 유순하며, 대궐안의 일을 잘 거행하니 궁중이 흡연(洽然)히 칭송하였다. 이때에 오래도록 문정(文定)5580)을 궐하였으므로 대신이 왕비 세우기를 청하니, 상이‘선입(選立)하기를 조심해야 할 것이니, 그 일을 갑자기 함이 불가하다하였다.
정묘년에 또 청하니, 하교하기를‘어진 덕이 윤씨같은 이가 없으니, 책봉하는 예를 거행함이 가하다’하여, 이해 8월 초4일에 드디어 중궁의 자리에 오르셨다. 효도로 자전을 받들어 잠자리의 문안을 어기지 않았다.
시종하는 여인[媵侍]을 예절로 대우하고 투기하는 일이 없으며, 은혜로 위무(慰撫)함이 아래로 액비(掖婢)5581)에 미치고, 사랑하여 양육함은 더욱 서출(庶出)5582)에 수고하며, 높은 자리에 처하여 더욱 조심하니, 안에서의 보좌함이 넓고 컸다.
일찍이 상께 아뢰기를‘첩이 옛일을 보았는데, 어진 부인에게는 부끄럽지만 상에게 근심을 끼치고 싶지않은 것이 첩의 소원입니다. 첩이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성상의 말씀이 계셔야 빨리 고치겠습니다’하고, 또 아뢰기를‘외가의 흥패는 후비(后妃)의 현부(賢否)에 매였습니다. 첩은 사친(私親)을 위하여 은혜를 구하고 싶지않습니다. 과연 어진 사람이라면 자연 공론을 따라 쓸 것이요, 과연 불초(不肖)하다면 누구를 허물할 것이겠습니까?’하였다. 항상 척리(戚里)5583)를 주의시켜 각자 근칙(謹勅)하게 하며, 그 관작이나 죄법에 대하여 일찍이 상께 간구한 일이 없었다.
상이 이러므로 더욱 어질게 여기며 이르기를‘어질다 비(妃)여, 예전에 사신(姒莘)5584)이 있었는데 그에 가깝겠다’하시며 특별히 공경하고 중히 여겼으며, 모후(母后)의 자리에 있은 지 9년동안에도 좌우에서 이간할 수 없었다.
계유년5585) 봄에, 상이 선농단(先農壇)에 제사를 드리고 적전(籍田)에 밭갈이 하였는데, 후(后) 또한 몸소 후원에서 뽕을 따니, 이것은 유민(游民)과 말업(末業)을 억제하고 여색과 관광을 금하여 농업에 힘쓰게 함이니 경계함이 깊었다. 빈시(豳詩)5586)는 화(化)가 크고, 갈담(葛覃)은 능히 부지런하였다. 검박함을 서로 닦아 다스림을 이루니, 얼마나 융성하였는가?
공주가 신미년5587)에 태어나고, 오래도록 또 후사(後嗣)가 없으니, 여망(輿望)이 목마른 것 같았는데, 을해년 2월 계축일에 원자(元子)가 탄생하였다. 중외가 함께 경하하고, 상이 또한 매우 기뻐하시어 교서를 반포하여 크게 사유하고, 여러 신하들이 들어와서 하례하였다.
며칠을 지나 후(后)가 문득 병에 걸려 매우 위중해지니 상이 놀라 근심하며 친림(親臨)하여 문병하고, 또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물으니 후가 대답하기를,‘은혜를 입음이 지극히 크니, 다시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하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다음 날에 병이 다시 더해지니, 후가 부축을 받아 일어나서 글로 써서 아뢰기를‘어제는 심사가 혼미하여 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지난해 여름 임신중 꿈에 사람이 나타나 말하기를「이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억명(億命)이라 하라」하므로 벽에 써서 기록하였고, 아직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하였는데 상이 나아가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아, 높은 중매 부러움을 주고, 서몽(瑞夢)의 조짐이 길하여, 우리의 억만년 가없는 명을 길이 누림을 여기서 더욱 징험할 수 있는 것이니 이 얼마나 기이한가!
바야흐로 큰 복지(福祉)가 흐르는데, 백약이 효험이 없어, 3월 초2일에 경복궁(景福宮)의 동궁별전(東宮別殿)에서 별세하시니, 상이 애통해 하시며 특별히 백의(白衣)소찬(素饌)을 하기까지 하였다.
탄식하여 이르기를‘기쁨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닌데 슬픔이 또 미치었다.
경사가 있은 지 얼마 안 되는데 어찌 이렇게 빨리 닥쳐왔는가?
사생이 천명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빨리 나의 어진 내조를 빼앗는가!
슬픔을 참지 못하겠다’하며, 승정원에 전교하기를‘일찍 어진 내조를 잃고, 정신이 희미하고 마음이 어지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장례에 대한 일을 품하는 것 외에는 아직 여러가지 계(啓)함을 정지하라’하니, 안으로 궁액(宮掖)에서부터 밖으로 백료(百僚), 서민에 이르기까지 호곡 애통해하기를 그 어머니를 여읜 것같이 하였다.
시호를 올려 장경(章敬)이라 하고, 휘호(徽號)를 더하여 숙신명혜(淑愼明惠)라 하였다.
현궁(玄宮)5588)을 광주읍(廣州邑) 서쪽 헌릉(獻陵)5589)의 오른쪽 건좌(乾坐) 손향(巽向) 언덕에 만들고, 윤4월 신유일에 장사를 지내고 능호를 희릉(禧陵)이라 하니, 후의 경사를 넓힌다는 뜻이다.
후는 총혜자유(聰惠慈柔)한 천성을 타고났고, 인효(仁孝)와 더불어 살고, 예순(禮順)과 함께 자라났다. 집에 있을 때에는 순여(純如)하였고, 나라에서는 목여(穆如)하였다.
덕스러운 품행은 지임(摯壬)이 하늘로부터 명이 있은 것과 같고,5590) 주(周)나라의 사업을 회복함에는 강후(姜后)가 귀고리를 벗은 도움5591)이 있은 것과 같다.
이미 덕에 후하고 또 공경함을 독실히 하여 성상의 중흥(中興) 정치의 복조를 협찬하시니, 거의 사람의 하는 일이 아닌데도 시보(施報)할 것을 아끼어 세상에 계신 지 겨우 춘추 25세에 돌아가셨으니 이것이 무슨 이치인가?
그것이 천명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겠다. 천명이 이렇게도 가혹하고 잔인한가! 아, 애통하도다!”【직제학(直提學) 김안로(金安老)가 지었다.】
註5572]지문(誌文):죽은 사람의 행적등을 적은 글 註5573]광릉(光陵):세조 註5574]국구(國舅):왕후의 아버지 註5575]사록(沙麓)의 상서:성녀(聖女)가 태어날 조짐이라는 뜻. 춘추시대에 사록이 무너지니 진(晉)나라 사관(史官)이 점쳐 말하기를“후에 성녀(聖女)가 날 조짐이다 하였는데, 그 뒤 6백여 년을 지나서 한(漢)원제(元帝)의 원후(元后)가 이곳에서 났다.《춘추(春秋)》희공(僖公)14년 註5576]홍치(弘治):명효종(孝宗)의 연호 註5577]신해년:1491 성종22년 註5578]황비(皇妣):어머니 註5579]병인년:1506 중종 원년 註5580]문정(文定):왕비와 혼인정함을 뜻한다.《시경(詩經)》대아(大雅) 대명(大明)에“주문왕(周文王)이 왕비 태사(太姒)와 혼인을 할 때, 점쳐서 길한 괘(卦)를 얻고 위수(渭水)가에 나아가 친영(親迎)하였다”했다 註5581]액비(掖婢):궁중 비자 註5582]서출(庶出):정실 이외의 소생자녀 註5583]척리(戚里):임금의 내외친족 註5584]사신(姒莘):문왕(文王)의 비 태사(太姒)를 말하는데, 태사의 출생지가 신(莘)땅이었기 때문이다 註5585]계유년: 1513 중종8년 註5586]빈시(豳詩):《시경》빈풍 칠월장을 말한다. 주공이 성왕(成王)에게 농사의 어려움을 알리려고 지은 시인데, 농사짓는데 관한 이야기가 상세히 적혀있다 註5587]신미년:1511 중종6년 註5588]현궁(玄宮): 묘실 註5589]헌릉(獻陵):태종 왕릉 註5590]지임(摯壬)이 하늘로부터 명이 있은 것과 같고:지임은 진나라 임금 임씨(任氏)의 둘째 딸인 태임(太任)으로 문왕(文王)의 아버지 왕계(王季)의 비이다. 태임은 뛰어난 덕행이 있어, 왕계를 내조한 공이 컸으며, 아들 문왕을 임신하고부터 태교(胎敎)를 하여 훌륭한 문왕을 낳았다고 한다. 여기서는 왕후의 덕이 태임과 같다는 말이다. 註5591]강후(姜后)가 귀고리를 벗은 도움:주선왕(周宣王)이 일찍 자리에 들고 늦게 일어나 정사에 게으르매, 왕후 강씨(姜氏)가 하루는 비녀와 귀고리등 장식품을 뽑아놓고“첩이 부덕하여 군왕으로 하여금 예를 잃고 늦게 일어나게 했으니 죄주소서”하면서 대죄(待罪)하니, 선왕이 크게 깨닫고 그 후로 정사에 근면하여 국가를 중흥하였다한다.《열녀전(列女傳)》주선왕후전(周宣姜后傳).
○大行王妃誌文:
尹氏系出坡州, 最遠而顯, 后姓是已。 鼻祖莘達在高麗太祖朝, 樹勳著名。 更四世至太保門下侍中文肅公諱瓘, 平女眞勒功, 尤振其門, 自是袞袞軒紱, 流益以大高。 王父諱璠, 卽侍中後, 贈領議政諡貞靖, 實生我聖母貞熹王后, 配光陵, 擁成廟, 再安宗社, 自非其先積累之厚, 孰能鍾是? 工曹判書兼寶文閣大提學諡成安諱士昀, 是曾王父, 策靖難佐翼功, 封鈴平君, 後贈左贊成。 子諱甫, 襲爲坡陵君, 贈議政府領議政, 皆視秩于國舅, 追及祖禰也。 國舅諱汝弼, 錄勳靖國, 崇祿領敦寧府事坡原府院君。 夫人朴氏, 順天右族, 贈右議政平陽府院君諱仲善之女, 追封順天府夫人。 內外烜赫, 咸有懿美, 鍾爲大慶, 啓此沙麓之祥。 維弘治辛亥七月庚辰也, 后生好賢坊私第。 齡僅八, 喪皇妣, 哀毁持服, 一如成人, 其外從母昇平夫人聞以爲非凡兒, 收而育之, 敎以懿範, 授《小學》、《內訓》諸篇, 遂通書史, 大著于行。 丙寅秋, 聖上卽祚, 選入爲淑儀, 肅承婉娩, 克修內事, 宮中洽然稱之。 時, 久闕文定, 大臣請建妃, 上以“選立宜謹, 不可遽其事。” 丁卯又請, 下敎曰: “賢德無如尹氏, 可擧冊禮。” 是年八月初四日, 遂正位中壼。 孝奉慈殿, 不愆問寢。 禮遇媵侍, 絶意猜妬, 恩撫下究於掖婢, 愛養尤勞於庶出, 處崇益畏, 內輔弘多。 嘗白上曰: “妾觀古事, 雖愧賢姒, 不欲貽憂於上, 妾之願也。 妾有過晷, 必須聖規, 可亟改也。” 又曰: “外家興敗, 在於后妃之賢否。 妾不欲爲私親, 求恩也。 其果賢也, 用自由公; 果不肖也, 尙誰愆乎?” 常戒戚里, 俾自謹勑, 其爵、其罪, 未嘗干上。 上由是, 益賢之曰: “賢哉! 妃古有姒莘, 此可近之。” 特加敬重。 母儀九載, 左右無間然。 歲癸酉春, 上祀先農, 耕籍田, 后亦躬桑于後苑, 所以抑游。 末、禁女。 觀, 俾勉於本也。 戒深豳詩化敦, 《葛覃》克勤。 以儉交修成治, 何其盛哉! 公主生于辛未, 久且無嗣, 輿望如渴, 乙亥二月癸丑, 誕生元子。 中外交慶, 上亦喜甚, 頒敎大宥, 群臣入賀。 居數日, 后忽罹疾甚危, 上憂駭, 親臨視疾, 且問所欲言, 對曰: “蒙恩至大, 更無所煩。” 但淚下而已。 明日疾轉革, 后扶起, 以手札啓曰: “昨心思昏忘, 未能省覺, 今思之, 去年夏, 方有身, 夢有人言: ‘生此兒, 可名曰億命’ 書識諸壁, 未有以語人也。” 上就視之果然。 嗚呼! 高媒錫羡, 瑞夢兆吉, 以永我億萬年無彊之命, 於斯焉益可徵, 是何奇也? 方流厚祉, 百藥莫效, 乃於三月初二日, 薨於景福宮東宮別殿, 上哀慟, 特至御白衣素膳, 嘆曰: “喜不可常, 哀又及之。 有慶未幾, 何遽此也? 死生雖云天命, 何早奪予賢助乎? 悲不自勝。” 敎承政院曰: “早失賢助, 神迷心亂, 罔知攸措。 只稟襄事, 姑輟雜啓。” 內而宮掖, 外達百僚群黎, 莫不號慟, 如喪其妣。 上諡曰章敬, 加徽號曰淑愼明惠。 治玄宮于廣州治西, 獻陵之右阜乾坐巽向之原, 葬以閏四月辛酉, 號曰禧陵, 衍後慶也。 后聰惠慈柔, 實出天武賦, 與仁孝俱生, 以禮順偕長。 始於家純如也, 終於國穆如也。 惟德之行, 有摯壬自天之命, 復周之業, 多姜后脫珥之助。 旣厚之德, 又篤其敬, 于以贊聖上中興之治之祚, 殆非人也, 而尙靳其施報, 假于世二十五春秋, 而止焉, 獨何理耶? 不知其天也、非天也。 吁! 何天之酷也忍也? 嗚呼, 痛哉!
【直提學金安老製。】
숙종 5권, 2년(1676 병진/청강희(康熙) 15년) 10월 21일(경오) 2번째기사
대왕대비·왕대비의 옥책문과 왕비의 교명문과 옥책문
대왕대비(大王大妃)의 옥책문(玉冊文)에 이르기를,
“공경히 생각하건대, 모의(母儀)가 삼조(三朝)에 높으시니, 자훈(慈訓)이 일찍부터 나타나셨고, 이장(彛章)1525)을 백대(百代)에 상고하매 현호(顯號)를 의당 높여야하는지라, 휘음(徽音)1526)을 찬양해 보책(寶冊)을 빛냅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자의공신대왕대비전하(慈懿恭愼大王大妃殿下)께서는 법도는 동관(彤管)1527)에 합하고, 상서로움은 옥의(玉衣)에서 증명되셨도다. 주위(周闈)에 탈잠(脫簪)1528)처럼 규잠(規箴)하심을 성조(聖祖)에 다하셨고, 한전(漢殿)에 함이(含飴)1529)하는 것같이 무양(撫養)함은 묘궁(眇躬)에 융숭하게 하셨도다.
매양 훈화(勳華)1530)의 잇달아 승하(昇遐)하심을 마음 아파하면서도 오히려 임사(任姒)1531)를 공경히 받든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습니다.
숨은 교육을 선후(先後)에 폐하지 아니하셨고, 아름다운 규범은 시종(始終) 더욱 빛났으니, 덕(德)이 보다 성(盛)할 수 없으신지라, 복은 이미 제명(帝命)을 받으신 데 베풀어졌으며, 예(禮)는 그러한 것이오나, 효(孝)는 어버이를 나타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근심과 슬픔으로 연유하여 칭호를 드리는 행사를 오늘까지 늦추어 왔습니다. 때가 옮아가고 해[歲]가 바뀌어져, 어느덧 즉길(即吉)하는 기일이 이르렀는지라, 해와 하늘을 본떠 그려서, 이에 가미(加美)하는 전례(典禮)를 밝히고, 삼가 존호(尊號)를 더하여 올리기를 휘헌(徽獻)이라 했나이다. 엎드려 생각건대, 장추(長秋)1532)는 예와 같으나, 경명(景命)1533)은 유신(維新)합니다.
이러한 실(實)이 있기에 이러한 이름이 있는지라 정문(情文)을 갖추어 결함이 없으니, 그 녹(祿)을 얻으시고, 그 수(壽)를 얻으셔서 자손(子孫)을 한없이 보전케 하소서”하였다.【대제학(大提學) 민점(閔點)이 지어 올렸다】
왕대비(王大妃)의 옥책문(玉冊文)에 이르기를,
“삼가 생각하옵건대, 나를 낳으시고 나를 기르심으로써 이미 보덕(報德)하는 정성을 다하였사오나, 지친(至親)은 오직 어버이신지라, 마땅히 존숭(尊崇)하는 도리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현책(顯冊)을 진설해 올려 미충(微衷)을 폅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왕대비전하(王大妃殿下)께서는 유한(幽閒)으로 몸을 닦으시고, 숙신(淑愼)을 마음에 두시매, 주(周)의 기초를 이룩한 임사(任姒)와 우(虞)의 빈(嬪) 황·영(皇英)1534)처럼 되셨나이다.
휘음(徽音)1535)으로 찬양하매 일찍부터 찬녀(纘女)의 영가(詠歌)에 부합되시고, 가훈(嘉訓)을 본받게 하신 것은 길이 익자(翼子)의 계책을 주셨습니다. 바야흐로 동관(彤管)의 칭예(稱譽)에 오르시려니 갑자기 오궁(烏弓)을 버리시는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작고 어린 나이로 공경히 자안(慈顔)을 받들었습니다.
7일간의 꿈이 겨우 돌아와 놀라움과 기쁨이 망극하옵더니 3년의 복제를 어느덧 마치니, 슬픔과 아픔이 더욱 깊습니다.
이에 변제(變除)함을 당하였으니 감히 융미(隆美)하는 행사를 늦추어야겠습니까? 주아(周雅)1536)에 대방(大邦)이 아들을 두었으니, 그 빛이 나타나지 아니할까?라고 하였으며, 송조(宋朝)에서는 성후(聖后)가 요(堯)와 같으니 그 공렬(功烈)에 다툼이 없다고 칭송하였습니다.
이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겸하여 시장(詩章)을 채택하여 삼가 존호(尊號)를 현열(顯烈)이라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힘써 위겸(撝謙)1537)하심을 억제하시고 굽어 숭귀(崇貴)하심을 받으소서. 멀고 큰 복은 모기(母氣)를 받아 동류(同流)할 것이오니 후하고 긴 수명은 곤덕(坤德)과 짝하시어 실추(失墜)함이 없게하소서”
하였다.【병조판서(兵曹判書) 김석주(金錫胄)가 지어 올렸다.】
왕비(王妃)의 교명문(敎命文)에 이르기를,
“왕(王)은 이르노라. 건도(乾道)는 쉬지않는지라, 스스로 아래를 돕는 광명을 가졌고, 곤덕(坤德)은 끝이 없는지라, 이에 중곤(中壼)의 지위에 나아갔도다.
이장(彛章)은 비록 옛 법전이라 하나, 책명(冊命)은 오직 새롭도다.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要諦)를 생각하건대 반드시 자기 집으로 법칙을 삼아야한다. 도산(塗山)1538)이 하(夏)나라를 도우니, 큰 사업이 현규(玄圭)1539)에서 비롯했고 경실(京室)1540)의 지어미1541)가 주(周)나라를 일으키니,
역대 제위(帝位)가 창록(蒼籙)1542)에 연면하였으니, 어찌 다만 조단(造端)1543)의 의범(懿範)뿐이리요. 또한 정본(正本)의 홍규(弘規)로다.
아! 저 김씨(金氏)는 명문(名門)에서 태어나서 예간(睿簡)1544)을 받았도다. 유한(幽閒)이 성품을 이루니, 모두 다 국풍(國風)의 아름다움에 짝할 만하다고 일렀고, 숙겸(肅謙)을 마음에 두니, 내 또한 공경스런 마음을 평일(平日)에 일으켰도다. 오직 그것이 만화(萬化)의 시초인지라, 이로써 삼전(三殿)의 기쁨을 함께 하게하였다.
불행하게도 거우(居憂)의 슬픔을 당하여 아픈 마음이 추원(追遠)하는데 미치지 못했으나 이 복제를 마침에 이르렀으니, 예(禮)는 마땅히 배존(配尊)하는데 융숭하여야 할 것이라.
이에 고금(古今)의 성대한 의절을 상고하여 마땅히 조종(祖宗)의 경상의 법도를 좇아야 할 것이다. 이에 길일을 가리고 예의를 갖추어 왕비(王妃)로 책봉하여 삼으니, 동관(彤管)으로 밝은 빛을 드날리어 칭송은 이미 중위(重闈)1545)에 올랐고, 보전(寶篆)이 아름다움을 더하니, 경사는 백세(百世)에 뻗어 가리로다.
아! 공검(恭儉)은 오직 부귀(富貴)를 지키는 바탕이 되고, 계구(戒懼)는 실로 복록(福祿)을 잡는 끈이 될 것이다.
빈조(蘋藻)를 정결히 제사에 받들어 성효(誠孝)를 다하고, 침선(寢膳)을 편안히 물어서 신혼(晨昏)에 게으름이 없어서 더욱 힘써 닦으며, 모름지기 지극한 이 뜻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마땅히 자세히 알도록 하라”하였다.【대사헌(大司憲) 이무(李袤)가 지어 올렸다】
옥책문(玉冊文)에 이르기를,
“왕(王)은 이르노라.
나는 생각하건대 임금이 집을 두기에 이르면 왕비를 세우는 의(義)는 오래 된 일이며, 곤(坤)은 후중하여 만물을 싣고 건(乾)에 배합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나니, 관저(關雎)1546)를 풍화(風化)의 기본으로 삼고 읍강(邑姜)1547)은 난신(亂臣)1548)의 하나로 되어 있다.
이에 길일(吉日)을 가리어 욕의(縟儀)를 거행하는 바이다.
살펴보건대, 아! 저 왕비 김씨(金氏)는 시례(詩禮)의 명가(名家)에서 태어나서 유한(幽閒)하고 현숙한 자질이라. 분화(紛華)한 습관을 끊은 것은 그 성품이 그러하였고, 환패(環佩)의 소리를 따르는 것은 모교(姆敎)1549)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이에 선조(先朝)의 간택에 뽑혀 일찍부터 과인(寡人)을 저궁(儲宮)1550)에서 도왔도다. 3년을 거우(居憂)함에 미쳐서는 더욱 빈조(蘋藻)를 경건하게 다스렸고, 양전(兩殿)을 받들며 효성을 다하매, 정온(情溫)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에 복제를 벗을 때를 당하여 책명(冊命)의 선포를 천명하노라.
남은 슬픔이 다하지않았으니 계서(繼序)의 예(禮)를 어찌 편케 행하리오마는, 옛 법전을 따르매 정시(正始)의 도(道) 또한 중한지라, 이에 신(臣)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 의정부우참찬(右參贊) 민점(閔點)을 보내어 부절(符節)을 가지고 예(禮)를 갖추어 옥책(玉冊)과 보장(寶章)을 주노라.
귀장(龜章)과 적불(翟茀)은 문물(文物)을 갖추어 빛을 더하고, 옥검(玉檢)과 금니(金泥)로 영규(令規)를 기록하여 아름다움을 전파하도다.
아! 오직 절검(節儉)은 바로 감화를 일으키는 근본이요, 오직 교만과 사치는 곧 도(道)를 잃게하는 계제(階除)이니, 계명(鷄鳴)에 올린 잠계(箴戒)를 정치(政治)에 비익(裨益)이 이르게 하였으며, 인지(麟趾)로 퍼지는 경사는 본지(本支)가 번창(蕃昌)함을 기다려 보리니, 임사(任姒)의 아름다운 명예를 폐하지 말 것이며, 길이 종조(宗祧)의 아름다운 공렬(功烈)을 이어받게 할지어다. 그러기에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마땅히 자세히 알도록 하라”하였다.【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홍우원(洪宇遠)이 지어 올렸다】
註1525]이장(彛章):일반 법칙 註1526]휘음(徽音):아름다운 명예 註1527]동관(彤管):붉은 빛의 대붓. 옛날에는 여사(女史)가 적필(赤筆)을 가지고 궁중의 정령(政令)이나 왕비의 언행등을 기록하였음 註1528]탈잠(脫簪):주(周)나라 선왕(宣王)이 아침에 늦게 일어나자, 강후(姜后)가 비녀를 뽑고 궁중 복도에서 대죄(待罪)하며 말하기를,‘첩(妾)이 재덕(才德)이 없어서 임금으로 하여금 실례(失禮)하고 늦게 일어나게 하였으니, 죄줄 것을 청한다’하므로 선왕이 드디어 정사(政事)에 부지런히 하여 중흥(中興)의 명망을 이루게 됐다는 고사 註1529]함이(含飴):후한(後漢)의 마황후(馬皇后)가 손자(孫子)들과 벗할 뿐 정사(政事)에는 관여하지않겠다고 말한 고사(故事).註1530]훈화(勳華):요(堯)임금은 방훈(放勳)·순(舜)임금은 중화(重華)라 일컫는 말로, 선대왕에 비긴 말 註1531]임사(任姒):태임(太任)·태사(太姒)를 말하는데, 후비(后妃)의 덕행을 일컬음 註1532]장추(長秋):황후(皇后)가 거처하는 궁 註1533]경명(景命):하늘의 큰 명령 註1534]황·영(皇英):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요(堯)의 두 딸로 모두 순(舜)의 비(妃)가 되었음.註1535]휘음(徽音):아름다운 명예 註536]주아(周雅):《시경》의 대아편(大雅篇) 註1537]위겸(撝謙):겸손의 뜻 註1538]도산(塗山):하(夏)의 우(禹)가 도산(塗山)씨에게 장가감 註1539]현규(玄圭):현(玄)은 검은 빛이고, 규(圭)는 큰 홀(笏)이다. 예전에 요(堯)임금이 우(禹)임금에게 이 현규를 하사하였었는데, 이것은 하늘 아래의 모든 것을 물려준다는 뜻임 註1540]경실(京室):왕실.註1541]지어미:태임(太任).註1542]창록(蒼籙):사기(史記)를 넣어둔 상자. 즉 사기를 말함 註1543]조단(造端):발단.註1544]예간(睿簡):임금의 간택.註1545]중위(重闈):궁궐 註1546]관저(關雎):《시경(詩經)》국풍(國風) 주남(周南)의 편명(篇名).《모시집전(毛詩集傳)》에 의하면, 후비(后妃)의 덕(德)을 노래한 것이라 하였음 註1547]읍강(邑姜):태공망(太公望)의 딸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후(后) 註1548]난신(亂臣):세상을 잘 다스리는 신하 註1549]모교(姆敎):유교의 가르침.註1550]저궁(儲宮):세자궁.
○大王大妃玉冊文曰:
恭以尊母儀於三朝, 慈訓夙著; 攷彝章於百代, 顯號宜崇。 載敭徽音, 式煥寶冊。 恭惟慈懿恭愼大王大妃殿下, 度合彤管, 祥徵玉衣。 脫簪周闈, 盡規箴於聖祖; 含飴漢殿, 隆撫養於眇躬。 每痛勛華之繼昇, 猶幸任姒之祗奉。 而陰敎不替於先後, 蓋懿範益彰於終始, 德莫盛焉。 祉旣施於受帝, 禮則然矣, 孝孰大於顯親? 顧緣煢疚之哀, 尙稽薦稱之擧。 星移歲改, 奄屆卽吉之期。 日畫天摹, 遹闡加美之典, 謹加上尊號曰徽獻。 伏惟長秋如昔, 景命維新。 有是實、有是名, 備情文而罔缺; 得其祿、得其壽, 保子孫於無疆。【大提學閔點製進。】
王大妃玉冊文曰:
恭以生我鞠我, 旣殫報德之誠, 至親維親, 宜致歸尊之道。 肆陳顯冊, 用申微衷。 恭惟王大妃殿下, 飭躬幽閒, 存心淑愼, 竝基周之任姒, 作嬪虞之皇英。 徽音載揚, 夙符纉女之詠; 嘉訓是式, 永貽翼子之謀。 方彤管之騰譽, 遽烏弓之遺慟。 藐以弱齒, 袛承慈顔。 七日之夢纔回, 驚喜罔極; 三年之制奄闋, 愴疚冞深。 玆當變除之餘, 敢緩隆美之擧? 《周雅》贊大邦有子, 不顯其光? 宋朝稱聖后如堯, 維烈無競。 爰稽禮典, 兼採詩章, 謹上尊號曰顯烈。 伏惟勉抑撝謙, 俯膺崇賁。 遐嘏景福, 襲母氣仁流; 厚載悠齡, 侶坤元而罔墜。【兵曹判書金錫冑製進。】
王妃敎命文曰:
王若曰, 乾道不息, 自有下濟之光, 坤德無疆, 爰進中壼之位。 彝章雖舊, 冊命維新。 念惟御邦之要, 必須自家爲則。 塗山翼夏, 肇洪基於玄圭; 京室興周, 綿歷祚於蒼籙。 奚但造端之懿範? 抑亦正本之弘規。 咨爾金氏, 篤生名門, 夙膺睿簡。 幽閒成性, 咸謂儷美於國風; 肅謙存心, 予亦起敬於平日。 惟其爲萬化之始, 是以諧三殿之懽。 不幸丁憂, 痛莫及於追遠, 屬玆終制, 禮宜隆於配尊。 式稽古今之盛儀, 庸遵祖宗之常憲。 玆涓吉備儀, 冊封爲王妃, 彤管揚煒, 頌已騰於重闈; 寶篆增徽, 慶則衍於百世。 於戲! 恭儉惟富貴之守, 戒懼實福祿之綏。 奉蘋藻於精禋, 克盡誠孝; 問寢膳於長樂, 罔懈晨昏, 益勉欽修, 須體至意。 故玆敎示, 想宜知悉。【大司憲李袤製進。】
玉冊文曰:
王若曰, 予惟, 王假有家, 建妃之義尙矣。 坤厚載物, 配乾之象著焉。 所以《關雎》爲風化之基, 邑姜居亂臣之一。 肆蠲吉日, 爰擧縟儀。 咨爾王妃金氏, 詩禮名家, 幽閒淑質。 絶紛華之習, 蓋其性成; 循環佩之聲, 不煩姆敎。 聿膺先朝之睿簡, 早相寡人於儲宮。 逮三年之居憂, 益虔蘋藻; 奉兩殿而殫孝, 匪懈凊溫。 玆當釋服之辰, 庸闡宣冊之命。 餘哀未盡, 繼序之禮何安? 舊典斯循, 正始之道亦重。 玆遣臣議政府領議政許積、議政府右參贊閔點, 持節備禮, 授以玉冊寶章。 龜章翟茀, 備文物而增輝; 玉檢金泥, 載令規而播美。 於戲! 惟節儉寔興化之本; 惟驕奢卽敗道之階, 《鷄鳴》進箴, 庶臻政治之裨益; 《麟趾》衍慶, 佇看本支之蕃昌。 勿替任姒之徽音, 永承宗祧之休烈。 故玆敎示, 想宜知悉。【知中樞府事洪宇遠製進。】
숙종 27권, 20년(1694 갑술/청강희(康熙) 33년) 6월 1일(정유) 3번째기사
인정전에서 의식에 따라 왕비를 책봉하는 예를 거행하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왕비(王妃)를 책봉(冊封)하는 예를 거행하여 왕비가 의식(儀式)대로 책봉을 받았다.
이때 현종(顯宗) 신축년8129)과 성상(聖上) 병진년8130)에 왕비를 책봉할 때의 전례(典例)를 고찰하여 거행하였다. 대개 《오례의(五禮儀)》의 예문을 근본으로 한 것이고, 오직 치사(致詞) 내용에 있는‘복위(復位)’란 두 글자는 고쳐서 사용했다. 교명문(敎命文)에 이르기를,
“건곤(乾坤)이 안정되어야 조화(造化)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기에 풍교(風敎)의 근본이 중요한 것이고, 일월(日月)이 다시 밝아지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게 되는 법이니, 마땅히 위호(位號)가 회복되어야 한다. 이미 경명(景命)8131)이 다시 새로와졌으니, 이에 책봉하는 일을 거듭 거행한다.
아! 왕비 민씨(閔氏)는 단장(端莊)하여 예법을 지키고 정정(貞靜)하여 아름다움을 지니었다. 온화하게 혼정신성(昏定晨省)을 다하여 양궁(兩宮)의 뜻을 잘 받들었고, 경건하게 아침저녁의 번조(번藻)8132)를 갖추어 나와 함께 3년상(三年喪)을 받들었다.
영항(永巷)8133)에는 이미 잠계(箴戒)가 새겨졌고, 규목(樛木)의 어짊8134)이 이에 드러났다. 하지만 오로지 과인(寡人)의 부덕으로 말미암아 선량한 보좌(輔佐)인 왕비가 의심을 받게 되었었다.
6년을 물러나있는 동안 아름다운 법도에 흠이 없음을 보고 여러 사람들이 답답하게 여기며 음화(陰化)8135)가 평소와 다르지 않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상(彛常)8136)에 흠이 있게 된 일인데, 어찌 자나깨나 생각이 없었겠는가?
진실로 조종(祖宗)들께서 도와주심에 힘입어 마침내 덕음(德音)이 어그러짐 없게 되었다. 인륜의 대도(大道)를 바로잡음은 진실로 제왕(帝王)이 신중하게 여겨야 하는 바이기에, 깊이 지난날이 후회스러웠음을 말하며 신서(臣庶)들이 모두 알도록 하노라.
주궁(周宮)의 금슬(琴瑟)이 다시 관저(關雎)의 악장(樂章)을 이어 가고8137) 한전(漢殿)의 요적(褕翟)에는 재차 장추(長秋)의 용의(容儀)가 빛나게 되었으니,8138) 인륜이 이로 인해 도타와지게되고 국가의 예법이 이로 인해 대단해지게 될 것이다.
이에 신(臣) 영의정 남구만(南九萬)과 예조판서 윤지선(尹趾善)을 보내 연길(涓吉)의 의식(儀式)을 갖추고서 금보(金寶)와 옥책(玉冊)을 바치노라.
아! 사람의 심정은 곤횡(困橫)8139)을 겪고 나서야 진실로 더욱 나아지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고, 천도(天道)의 운행은 순환(循環) 속에서 비색(否塞)과 태평의 이치를 증험하게 되는 것이다.
오직 그 지위에 있기를 겸손하게 하고 오직 몸 가지기를 검약(儉約)하게 하여, 오직 안팎이 서로 이루어져야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가 드러나게 되고, 오직 시종 공경스럽게 해야만 복록(福祿)을 누리게 되는 법이니, 아름다운 계책이 변하지 않도록 하여 거룩한 국운(國運)이 길이 이어지기를 바라노라. 그러므로 이렇게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알아차리게 될 것이라 생각하노라”하였다.【형조참판 이여(李畬)가 지어 올린 것이다.】
옥책문(玉冊文)에 이르기를,
“오직 임금이 교화(敎化)를 일으킬 적에는 반드시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에 근본을 두었고, 오직 성인들은 인륜을 다하되 특히 배필(配匹)을 소중하게 여겼었다.
내가 진실로 이 의리에 느낀 바가 있었기에 이제 시급하게 옛 법도를 찾아야 함이 마땅하다.
이미 존명(尊名)을 복구했으니, 곧 갖가지의 예절을 거행해야 하겠다.
아! 왕비 민씨(閔氏)는 사록(沙麓)8140)의 경사속에서 자라나 빛나는 계위(桂闈)8141)로 들어왔다.
밀물(密勿)하는 아름다운 계책은 거의 모두가 탈잠(脫簪)8142)처럼 경계가 되는 것이었고, 옹용(雍容)하며 아름다운 동작은 울리는 패옥(佩玉)의 소리와 어긋나지 않았으며, 양전(兩殿)을 기쁜 안색으로 공경스럽게 받들어 섬기었고 육궁(六宮)8143)들은 골고루 혜택을 펼치며 거느렸다.
서로 떨어진 지 여러 해가 될수록 비록 어진 내조(內助)와 소원하기는 했지만, 자나깨나 한결같이 생각하였으니, 어찌 덕음(德音)을 끝까지 잊을 수 있었겠는가?
이에 수레를 호위하는 의장(儀仗)을 갖추어 드디어 곤극(坤極)의 자리에 오르도록 하노라.
지난날의 나의 과오를 밝히는 십행(十行)의 글을 이에 반포하니, 처음처럼 엄연(儼然)히 국모(國母)로서 엄하게 하매 오만가지 것이 이에 바로 잡히게 되었다.
마치 고리가 돌듯이 오래 가지않아 기쁨이 도로 돌아오게 되었거니와,
옥(玉)처럼 되려면 더욱 나아짐이 있어야 함을 알았노라.
천리(天理)와 인정을 알게 되었기에 상복(象服)8144)과 보명(寶命)이 유신(維新)해지게 된 것이다.
이에 신(臣) 영의정 남구만(南九萬)과 예조판서 윤지선(尹趾善)에게 나의 부신(符信)을 지니고 나아가 예절을 갖추고서 옥책(玉冊)과 보장(寶章)을 수여(授與)하게 되는 것이다.
아! 오직 부지런하고 검소해야 국가를 교훈할 수 있으며, 오직 겸손하고 조심해야 총록(寵祿)을 보존하게 되는 법이니, 다시 음교(陰敎)를 천명(闡明)하여 이남(二南)8145)과 같은 풍화(風化)가 두루 알려지게하고, 거듭 영도(靈圖)8146)를 찬양(贊襄)하여 만대토록 영원히 전해지도록 할지어다.
태임(太任)·태사(太姒)와 같은 아름다운 공덕이 변함없게 된다면 종사(宗社)의 큰 복이 더욱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알 것이라 생각하노라”하였다.【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박태상(朴泰尙)이 지어 올린 것이다】
예식이 끝나고, 임금이 또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하례를 받고 반교문(頒敎文)을 내렸다. 그 반교문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천도(天道)는 반드시 되돌아오는 것이기에 국가에 대한 천명(天命)이 유신(維新)의 시기를 이어가게 되었고, 곤위(坤位)가 다시 회복되어 종묘(宗廟)가 한없는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중대한 명령을 내리어 널리 사방에 고하노라. 생각해 보건대, 부족한 몸이 큰 왕업(王業)을 지키면서 중곤(中壼)8147)에게 재앙이 얽히어 일찍이 적의(翟儀)8148)가 비게되는 슬픔을 당했다가, 명문(名門)을 점쳐 내어 크게 길한 봉황이 날아드는 기쁨을 맞이하게 되었다.
왕비 민씨는 아름다운 덕음(德音)을 잘 이어받아 착한 범절이 크게 빛났다. 치장한 비녀와 귀고리를 치우며 자주 잠계(箴戒)를 진언하고 갈담시(葛覃詩)8149)처럼 부지런히 일을 보매 점점 풍교(風敎)가 나타나게 되었으며,
조심해서 양전(兩殿)을 받들되 언제나 화평하고 순탄한 안색을 가지었고, 나와 함께 3년상(三年喪)을 치르면서는 대신해서 서러워하는 예절을 다하였다. 중간에 있었던 일은 내 마음속에 겸연쩍음이 있다.
당초에 충고하는 말을 살펴보지않아 하찮은 일로 인해 슬픔을 끼치게 될 것이다. 스스로 착한 내조(內助)를 멀리 했음도 또한 과매(寡昧)의 잘못된 생각 때문이었는데, 드디어 중간에 은덕과 예의가 끊어졌으니, 대개 일찍부터 후회와 한탄이 마음속에 쌓이게 되었었다.
사제(私第)에 물러가 있을 적에도 연정(淵貞)한 평소의 행실이 변함없어, 비록 울적한 마음을 펴게 되지 못한다하더라도 끝까지 원우(怨尤)8150)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처음으로 음문(音問)8151)을 접하자 비로소 슬퍼하며 한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진실로 감오(感悟)되는 마음이 매우 깊었으니, 어찌 뉘우치고 고침을 혹시라도 아낄 수 있겠는가?
십행(十行)8152)의 이 글을 분명하게 내걸자, 모두들‘이기(彛紀)가 이제 닦아지게 되었다’고 하였고, 육궁(六宮)이 깜짝 놀라며 기뻐하기를 자모(慈母)를 다시 보게 되는 것같을 뿐만이 아니었다.
이에 이달 초하룻날 정유(丁酉)에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주어 복위(復位)시키니, 갖가지 범절이 이루어졌고, 예전의 법도가 모두 갖추어졌다.
자시(資始)하고 자생(資生)하여8153) 갖가지 것이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승순(承順)하는 도리가 더욱 빛나게 될 것이고, 치내(治內)하고 치외(治外)하여8154) 모든 업적이 쌓이게 됨으로써 협찬(協贊)하는 덕화(德化)가 더욱 높아지게 될 것이다.
다시 새로와지는 국정(國政)을 펴게 되었으니, 마땅히 이전의 잘못들을 씻어주는 인덕(仁德)을 베풀어 가야 할 것이다.
초하룻날 새벽 이전의 잡범(雜犯)중에 사죄(死罪)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면제해주고, 벼슬에 있는 사람들을 각각 1자급(資級)씩 올려주되, 자궁(資窮)한 사람은 대가(代加)하라.
아! 해와 달이 다 같이 밝으므로 먼 곳과 가까운 곳이 모두 밝은 빛을 받게 되고, 뇌우(雷雨)가 작해(作解)하여8155)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모두 발생(發生)하는 속에 담기게 될 것이다.
나의 말은 진실로 나의 마음을 널리 펴려는 것이니, 대중을 심정 속의 큰 소망을 위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교시(敎示)하노니, 마땅히 알 것이라 생각하노라”하였다.
【대제학(大提學) 박태상(朴泰尙)이 지어 올린 것이다.】
註8129]현종(顯宗) 신축년:1661 현종2년.註8130]성상(聖上) 병진년:1676 숙종2년.註8131]경명(景命):하늘의 큰 명령.註8132]번조(蘩藻):제물(祭物)을 뜻함.註8133]영항(永巷):궁중(宮中).註8134]규목(樛木)의 어짊:규목은《시경(詩經)》주남(周南)의 한 편명. 어짊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비(后妃) 태사(太姒)가 은덕(恩德)을 가지고 여러 궁녀들을 대하므로 그 궁녀들도 또한 친근하게 여기며 섬기어, 규문(閨門)안이 잘 다스려지고 예의범절이 훌륭해졌음을 말함 註8135]음화(陰化):왕비의 덕화.註8136]이상(彛常): 인륜.註8137]관저(關雎)의 악장(樂章)을 이어가고:주궁(周宮)은 주나라 궁전. 관저는 《시경》의 첫 편명으로, 문왕(文王)과 후비(后妃)가 화락한 성덕(盛德)을 읊은 시. 곧 임금과 왕비의 금슬(琴瑟)이 이 시처럼 좋아졌음을 말함.註8138]한전(漢殿)의 요적(褕翟)에는 재차 장추(長秋)의 용의(容儀)가 빛나게 되었으니:한전(漢殿)은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마황후(馬皇后)가 거처한 장추전(長秋殿). 요적(褕翟)은 황후가 입은 제복(祭服). 마황후가 정식으로 황후가 되면서 의복을 검소하게 입고, 겸손하고 정숙(靜肅)하여 용의가 있었음을 말한 것으로, 왕후도 이러함을 말한 것임.註8139]곤횡(困橫):《맹자(孟子)》에 나오는‘곤어심횡어려(困於心橫於慮)’의 약어. 곧 과오가 있었음을 마음속에 깨닫게 되는 것.註8140]사록(沙麓):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晋)나라에 있던 토산(土山)의 이름. 춘추시대 이 토산이 무너지자 일관(日官)이 645년 뒤 성녀(聖女)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과연 이 예언과 같이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후(后)인 원후(元后)가 이곳에서 태어나 645년 뒤인 해에 애제(哀帝)가 죽은 후 섭정(攝政)하였던 것임.註8141]계위(桂闈):대궐.註8142]탈잠(脫簪):귀고리를 치워버린 것.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늦잠을 자게 되자, 강후(姜后)가 귀고리를 치워버리고 대죄(待罪)하면서“제가 잘하지 못하여, 군왕께서 예모를 망각하고 늦게 일어나도록 하였으니, 감히 죄주기를 청합니다”하니, 선왕이 드디어 부지런히 정사를 닦아 나라가 중흥하게 된 고사.註8143]육궁(六宮):후(后)·비(妃)·빈(嬪)·세부(世婦)·여어(女御)등 임금이 거느리는 여섯계급의 궁녀.註8144]상복(象服):왕비의 의복.註8145]이남(二南):주남(周南)·소남(召南)의 약어. 곧 《시경》제1편과 제2편의 이름. 이 시는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비(后妃)가 수신(修身)하고 제가(齊家)하여 그만한 덕을 가지고 군자를 도와 나라를 교화한 것을 노래한 것이라고 함.註8146]영도(靈圖):훌륭한 계책.註8147]중곤(中壼):왕후.註8148]적의(翟儀):왕비의 자리.註8149]갈담시(葛覃詩):《시경》주남(周南) 제2편의 시. 문왕의 후비가 부도(婦道)에 철저하여 여공(女功)에 뜻을 두었고, 절검(節儉)을 실천하고, 사부(師傅)를 존경한 것을 노래한 시.註8150]원우(怨尤):원천우인(怨天尤人)의 약어. 곧 하늘을 원망하는 짓을 하고, 남을 허물하는 짓을 하는 것.註8151]음문(音問):소식.註8152]십행(十行):수적(手迹)으로 나라에서 내리는 문서는 모두 10행으로 쓰기때문에 나온 말임. 곧 교서(敎書) 따위의 나라에서 내리는 글을 말함.註8154]치내(治內)하고 치외(治外)하여:치내(治內)는 왕후가 대궐 안 일들을 다스리는 것. 치외(治外)는 임금이 대궐밖의 모든 일을 다스리는 것.註8155]뇌우(雷雨)가 작해(作解)하여:천지해이뇌우작(天地解而雷雨作)’을 줄인 말. 곧 천지의 기운이 순조로와 뇌성이 올리며 비가 내리는 것.
○上御仁政殿行冊妃禮, 妃受冊如儀, 時考顯宗辛丑上丙辰冊妃之典而行之, 蓋本諸五禮儀之文也。 惟致詞中, 改用復位二字, 敎命文曰:
乾坤正而化乃行, 寔重風敎之本, 日月更而人皆仰, 宜復位號之崇。 旣景命之重新, 肆典冊之申擧, 咨爾王妃閔氏, 端莊率禮, 貞靜含章, 盡怡愉於晨昏, 克順兩宮之志, 虔蘩藻於夙夜, 與經三年之喪, 永巷之箴旣勒, 樛木之仁斯著。 亶由寡躬之失德, 致令良佐而受疑, 六載退居, 見懿度之靡玷, 群情積鬱, 識陰化之素孚, 事有歉於彝常, 念豈忘於寤寐? 允賴宗祧之垂祐, 終幸德音之無違, 式正大倫, 固帝王之攸愼, 深陳往悔, 俾臣庶而咸知, 周宮瑟琴, 復尋關睢之樂, 漢殿褕翟, 再光長秋之儀, 民紀以之可敦, 邦禮於是爲大, 玆遣臣領議政南九萬, 禮曹判書尹趾善, 涓吉備儀, 授以金寶玉冊。 於戲! 人情困衡, 實爲增益之基。 天運循環, 可驗否泰之理。 惟謙挹以居位, 惟儉約以飭躬。 惟內外相成, 治道乃闡。 惟終始克敬, 福履是將。 期毋替於徽猷, 庶永綿乎洪祚。 故玆敎示, 想宜知悉。【刑曹參判李畬製進。】
玉冊文曰:
惟辟興化, 必本修齊。 惟聖盡倫, 尤重媲耦。 予實有感於斯義, 今宜亟尋於舊章。 旣復尊名, 載擧縟禮。 咨爾王妃閔氏! 毓慶沙麓。 陞華桂闈, 密勿嘉謨。 幾多脫簪之戒, 雍容懿度。 不愆鳴珮之聲, 事兩殿而祗承歡顔。 御六宮而均覃惠澤, 頃從屛退以後。 克持謹畏之心, 睽阻彌年? 雖自疏於良佐, 寤寐一念, 豈終忘於德音? 爰備轝衛之儀, 遂登坤極之位, 明吾過於旣往, 十行斯頒, 儼母臨之如初, 萬品乃正, 若環斯轉, 喜不遠而來歸, 庸玉于成, 知有資於增益, 天理人情之可見, 象服寶命之維新, 玆遣臣領議政南九萬, 禮曹判書尹趾善, 持節備禮, 授以玉冊寶章, 於戲! 惟勤儉所以訓家邦, 惟謙愼所以保寵祿, 重闡陰敎, 佇聞二南之風, 申贊靈圖, 永垂萬代之範, 勿替任姒之徽烈, 益綿宗社之洪休, 故玆敎示, 想宜知悉。【弘文提學朴泰尙製進。】
禮訖。 上又御仁政殿, 受賀頒敎, 其文曰:
王若曰, 天道必復, 邦命屬維新之期。 坤位重升, 宗祧迓無疆之慶。 肆敭大號, 誕告多方。 永惟眇躬, 叨守丕緖。 災纏中壼, 悲翟儀之早虛。 卜叶名門, 喜鳳飛之元吉。 王妃閔氏, 徽音克嗣。 懿範孔彰, 褫簪珥之飾而屢進規箴。 涖葛覃之勤而漸形風敎, 祗承兩殿。 常持媮婉之容, 與更三年。 兼盡昜戚之節, 間者之事。 恧焉在懷, 莫察忠言。 初因微細而貽戚, 自踈良佐。 亦由寡昧之失圖, 遂致恩禮之中衰。 蓋嘗悔恨之內積, 粤從私第之退就。 靡愆素履之淵貞, 雖幽鬱而未伸。 終無怨尤之意, 逮音問之始接, 乃聞悽惋之辭, 固感悟之已深。 豈遷改之或靳, 十行昭揭。 咸曰彝紀之載修, 六宮驚欣。 不啻慈母之復覩, 殆天所啓, 匪予有私, 乃於本月初一日丁酉, 授冊寶復位, 縟禮旣成, 舊章備擧, 資始資生而品物遂, 道彌光於承順, 治內治外而庶績凝, 化愈隆於協贊, 方布更化之政, 宜推蕩垢之仁, 自初一日昧爽以前, 雜犯死罪以下, 咸宥除之。 在官者各加一資。 資窮者代加。 於戲! 日月竝明, 遐邇普歸於臨照, 雷雨作解, 鉅細咸囿於發生, 予言寔出於敷心, 輿情可慰於顒望, 故玆敎示, 想宜知悉。【大提學朴泰尙製進。】
숙종 35권, 27년(1701 신사/청강희(康熙)40년) 11월 11일(갑오) 2번째기사
예조판서 서종태가 지어 바친 애책문
국장도감(國葬都監)에서 아뢰기를,
“시책문(諡冊文)10796)과 애책문(哀冊文)10797)은 마땅히 여관(女官)으로 하여금 진독(進讀)하게 하여야 하는 까닭에, 전례(前例)에 의하여 진서(眞書)와 언문(諺文)을 모두 써서 넣을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
“알았다”하였다.
애책문(哀冊文)에 이르기를,
“유세차(維歲次) 신사년 8월14일 기사(己巳)에 대행왕비(大行王妃)께서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에서 훙(薨)하셨으므로, 이 해 겨울 12월초8일경신(庚申)에 영좌(靈座)를 조(祖)10798)에 옮기고, 9일 신유(辛酉)에 영구히 명릉(明陵)으로 옮겼으니, 이는 예(禮)입니다.
용찬(龍攅)10799)의 휘장을 거두고 적로(翟輅)10800)가 큰 길에 임(臨)하니, 삼광(三光)10801)은 어두워 처측(悽惻)하고 온갖 신령은 호위하기에 분주하였는데, 소만(簫輓)10802)은 청필(淸蹕)10803)을 의심케하고, 길장(吉仗)10804 )은 완연한 상의(常儀)였습니다.
우리 주상전하께서 초액(椒掖)10805)에 임하시어, 남기신 자취를 어루만지시고, 조류(組旒)10806)를 바라보시며 상심(傷心)하시며, 영원히 깊은 수도(隧道)속에 잠드심을 슬퍼하시고, 착한 잠규(箴規)를 듣지못하심을 가슴아파하셨습니다.
이전(彝典)10807)을 상고하여 휘음(徽音)10808)을 외우게 하시니,
그 사(詞)에 이르기를,‘옛날의 다스림을 우러러 살펴보건대, 반드시 어진 곤위(壼位)에 힘입어 수제(修齊)10809)를 이루고, 복조(福祚)를 오래도록 누렸으니, 아! 빛나고 밝은 시대에 규달(閨闥)이 가장 엄정하였다.
임사(任姒)10810)가 대(代)를 이어 덕을 배합하여 교명을 이루니,
하늘이 휴운(休運)을 권고(眷顧)하여 이에 내찬(內贊)을 맡게 하셨도다.
여흥(驪興)의 집안에서 복을 받아 성녀(聖女)가 탄강하시니, 달을 꿈꾸는 상서가 나타나고, 사록(沙麓)10811)’이 무너진 경사를 징험하였도다.
내외가 법가(法家)이므로 동작(動作)이 이목(耳目)에 젖어 아름다운 자질이 일찍 성취되시고, 전훈(典訓)10812)에 따라 행하시어 유가(柔嘉) 완순(婉順)하였으니, 진실로 선량하였다는 소문에 합당하였도다.
상서로운 날을 점쳐서 정하여 신극(宸極)의 배필을 삼으니, 그 즐거움은 종고(鍾鼓)하기에 흡족하고,10813) 예절은 신석(晨夕)에 경건(敬虔)하였도다. 공경히 양전(兩殿)을 섬기며 기쁜 낯으로 뜻을 받들고, 그 권애(眷愛)하심을 깊이 입으니, 더욱 효경(孝敬)을 다하였다.
일마다 고요히 도우시며 옛날의 어진 보좌(輔佐)를 본받아 힘쓰시니, 더욱 건덕(乾德)10814)이 빛나고, 아름다운 교화(敎化)가 널리 미쳤다.
시(詩)를 진술(陳述)하고 사서(史書)를 돌이켜보며, 널리 여칙(女則)10815)을 살피셔서 온화한 마음으로 정도(正道)를 행하시니, 패옥(佩玉)의 소리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굉연(紘연)10816)을 가르쳐 이루고, 규목(樛木)10817)의 은택(恩澤)을 다하여 칭송이 육궁(六宮)에 드높으니, 시(詩)가 이남(二南)10818)에 전파되었다. 몸소 검소한 뜻을 가지고 억제하며 화식(華飾)10819)을 물리치시고, 사사로운 은택을 두절(杜絶)하였다.
중도에 간둔(艱屯)10820)을 만났으나, 옥도(玉度)10821)에 흠이 없었으며, 삼가고 두려워한 나머지 6년을 하루같이 폄손(貶損)하여 지극한 덕이 더욱 빛나므로, 보명(寶命)을 거듭 내려서 육괴(六騩)10822)가 거듭 높아지니, 경사(慶事)를 귀신과 사람이 함께 흡족해하였다.
원량(元良)10823)을 무육(撫育)하며, 은애(恩愛)가 밝은 덕에 넘치니 궁정(宮庭)의 자효(慈孝)가 애연(藹然)히 깊고 돈독하였고, 중위(中闈)가 숙옹(肅雍)10824)하니, 통서(統序)10825)가 모두 정연하였다.
묘현(廟見)10826)을 비로소 행하시니, 그 예의(禮儀)가 이에 성대하였다.
꽃다운 연세에 문득 병환에 걸리시니, 유·편(兪扁)10827)도 재주가 다하여 1년이 넘게 침중(沈重)하였는데, 풍상씨(馮相氏)10828)가 재앙의 조짐을 고하고 헌원성(軒轅星)이 정채(情彩)를 잃더니, 지유(地維)10829)가 흔들려 끊어지고, 표어(飆馭)가 아득히 가버렸으니, 슬픔이 궁벽한 골짜기까지 미치고, 곡성이 높은 하늘에 사무쳤다.
면구(綿區)는 자모(慈母)의 보살핌을 잃었고, 큰 덕화(德化)는 음공(陰功)을 잃게 되었다.
아! 슬프도다. 어진 자는 수(壽)한다는 말을 징험(徵驗)할 길이 없고, 신의 도움도 종말이 없도다.
어찌 수(壽)를 조금 더 늘려 왕도(王道)를 돕지않는 것인가?
난궁(蘭宮)10830)은 비어있는 채 새벽달만 비치고, 견관(繭館)10831)은 적막하게 가을 풀속에 묻혀 있도다.
위유(褘褕)10832)를 거두어 영의(靈衣)로 하고, 보좌(寶座)가 바뀌어 세악(繐幄)10833)이 되었다. 낙엽지는 동산의 나무[苑樹]에는 서리가 차갑고, 침침한 전각(殿閣)의 발에는 바람만 쓸쓸하도다.
은저(銀渚)10834)를 따르려 하니 길이 멀고, 요지(瑤池)를 찾으려 하니 구름만 아득하도다. 아! 슬프도다.
길한 산을 이미 복정(卜定)하고, 흠위(廞衛)10835)를 진열하니, 난조(鸞旐)가 바람에 펄럭이네. 삐걱거리는 신위(蜃衛)10836)가 깊고 엄한 단금(丹禁)10837)을 떠나 그윽하고 어두운 현당(玄堂)10838)으로 향하니, 백료(百僚)는 영결(永訣)을 슬퍼하여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천승(千乘)은 애통하시며 소재(宵載)10839)에 임하셨다.
아! 슬프도다. 앵봉(鶯峰) 기슭에 봉황(鳳凰)이 날고 용(龍)이 오르며, 신령(神靈)께서 만년토록 가호(加護)하시리라.
세 능침(陵寢)과 이어져서 우러러 뵙는 형상을 설치하니 엄연히 임하신 듯하고, 영각(靈閣)이 엄숙하니 더욱 빛이 있다.
진유(眞遊)를 우러르니 날로 멀어지고, 지극하신 그 은택(恩澤) 잊을 수 없도다. 아! 슬프도다.
조화(造化)의 기미(機微)를 미루어 살피건대, 수단(脩短)10840)을 누가 주관하는가? 중생(衆生)과 같이 다하도록 아름다운 이름은 끝이 없으리.
도신(塗辛)10841)의 밝은 법도는 동사(彤史)10842)에 성적(聲績)을 전하고, 계명(鷄鳴)10843)·주이(周珥)10844)는 그 아름다움을 거의 이을 수 있으리라. 인현(仁顯)의 시호로써 숭미(崇美)함을 다하니, 지난날의 법칙을 뛰어넘어 밝게 빛나고, 옥돌에 새겨서 그 공렬(功烈)을 실으니,
이 천지와 함께 길이 드리우리라. 아! 슬프도다”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서종태(徐宗泰)가 지어 바쳤다.】
註10796]시책문(諡冊文):제왕(帝王)·후비(后妃)의 시호(諡號)를 임금께 아뢸 때 그 생전의 덕행(德行)을 칭송한 글.註10797]애책문(哀冊文):제왕(帝王)이나 후비(后妃)의 죽음을 슬퍼하여 지은 글.註10798]조(祖): 발인(發靷)하기 전날 저녁에 조전(祖奠)을 지내는데, 곧 조전을 지내는 곳을 말함. 조전은 발인하기 전에 영결(永訣)을 고하는 제전.註10799]용찬(龍攅):왕이나 왕비의 구(柩).註10800]적로(翟輅):왕비가 타는 수레 註10801]삼광(三光):해·달·별의 빛註10802]소만(簫輓):소고(簫鼓)와 만장(輓章).註10803]청필(淸蹕):왕이나 왕비의 평상시의 행차.註10804]길장(吉仗):의식을 행할 때의 의장.註10805]초액(椒掖):왕비가 거처하는 궁전.註10806]조류(組旒):깃발을 매달아 장식한 기(旗) 註10807]이전(彝典):정상(正常)의 전례(典禮).註10808]휘음(徽音):왕비의 아름다운 언행(言行) 註10809]수제(修齊):수신 제가(修身齊家) 註10810]임사(任姒):태임(太任)과 태사(太姒)를 말함. 태임은 문왕(文王)의 어머니요, 왕계(王季)의 아내로 훌륭한 부덕(婦德)을 지녔다고 하며, 태사는 문왕의 아내요 무왕(武王)의 어머니로 역시 부덕이 훌륭하였다고 함.註10811]사록(沙麓):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에 있던 토산(土山)의 이름. 춘추시대때 이 토산이 무너지자, 일관(日官)이 645년 뒤 성녀(聖女)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과연 이 예언과 같이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후(后)인 원후(元后)가 이 곳에서 태어나, 645년 뒤인 해에 애제(哀帝)가 죽은 후 섭정(攝政)하였던 것임 註10812]전훈(典訓):교훈(敎訓).註10813]그 즐거움은 종고(鍾鼓)하기에 흡족하고:정숙하고 어진 여인을 구하려고 자나깨나 근심하였다가, 세상에 드문 덕있는 여인을 얻고, 친애하여 큰 악기를 연주하며 즐긴다는 뜻.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태사(太姒)를 배필로 얻고 기뻐하여 높이 받드는 뜻을 그린 것으로서, 《시경(詩經)》주남(周南) 관저(關雎)에 보면,“정숙한 여인을 맞았으니, 사랑하여 종과 북으로 즐긴다”하였음.註10814]건덕(乾德):임금의 덕 註10815]여칙(女則):여인의 행동의 법칙 註10816]굉연(紘綖):면류관의 끈과 덮개로서 존비(尊卑)의 구분을 말함.註10817]규목(樛木):《시경(詩經)》 주남(周南)의 편명(篇名).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비(后妃) 태사(太姒)가 은덕(恩德)으로써 여러 첩(妾)을 접하고, 여러 첩도 후비에게 친부(親附)하였으므로, 규문(閨門)의 예의(禮儀)가 성(盛)한 모양을 말함.註10818]이남(二南): 《시경》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두 편명. 주남은 주나라 문왕의 후비가 수신제가(修身齊家)한 일을 노래한 것이고, 소남은 남국(南國)의 제후(諸侯)가 후비의 덕화(德化)를 입은 것을 읊은 것임.註10819]화식(華飾) 화려한 장식.註10820]간둔(艱屯):간고(艱苦).註10821]옥도(玉度):제왕이나 후비의 기거(起居).註10822]육괴(六騩):《진서(晉書)》예지(禮志)에 보면 “황후(皇后)는 운모(雲母)를 유화(油畵)한 안거(安車)를 타고 여섯필의 괴마(騩馬)가 끌었다”하였는데, 곧 왕비(王妃)의 지위를 뜻함.註10823]원량(元良):왕세자.註10824]숙옹(肅雍):엄숙하고도 화기가 있음.註10825]통서(統序):계통의 질서.註10826]묘현(廟見):종묘를 알현함 註10827]유·편(兪扁):유부(兪跗)와 편작(扁鵲)으로, 모두 명의(名醫)임.註10828]풍상씨(馮相氏):천문(天文)을 맡아보는 관원.註10829]지유(地維):대지(大地)를 얽어서 받들고 있다는 밧줄 註10830]난궁(蘭宮):왕비가 거처하는 궁전.註10831]견관(繭館):왕비가 누에치는 집 註10832]위유(褘褕):꿩무늬를 수놓은 왕비의 옷.註10833]세악(繐幄):가는 베로 만든 영장(靈帳) 註10834]은저(銀渚):은하(銀河) 註10835]흠위(廞衛):장례때 행렬에 쓰는 기구註10836]신위(蜃衛): 구(柩)를 실은 수레.註10837]단금(丹禁):궁궐(宮闕).註10838]현당(玄堂): 무덤 註10839]소재(宵載):밤늦게 영구하는 수레에 널을 실음 註10840]수단(脩短):길고 짧음. 곧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의 비유 註10841]도신(塗辛): 도산씨(塗山氏)가 신일(辛日)에 우(禹)에게 시집옴.註10842]동사(彤史):사관(史官)으로, 궁중의 정령(政令)과 후비(后妃)의 일을 기록하였음. 동관사(彤管史).註10843]계명(鷄鳴):왕비가 임금이 정사(政事)에 부지런히 힘쓰도록 내조(內助)하는 것을 말함.《모시(毛詩)》에 의하면, 제(齊)나라 애공(哀公)이 황음(荒淫)하자, 현비(賢妃)가 새벽에 닭이 울고 동녘이 밝았으니, 정청(政廳)에 나아가라고 권고한 데에서 나온 말임.註10844]주이(周珥) :주선왕(周宣王)이 아침에 늦게 일어나자, 강후(姜后)가 비녀와 귀고리를 뽑고 궁중 복도에서 대죄(待罪)하며 자신이 부재(不才)한 소치(所致)라 하고 죄를 청하니, 선왕이 깨닫고 정사(政事)에 근면하여 중흥(中興)을 이루었다는 고사(故事).
○國葬都監啓曰: 諡冊文、哀冊文, 當今女官進讀, 故依前例眞、諺竝書以入之意敢啓。” 答曰: “知道。” 哀冊文曰:
維歲次辛巳八月十四日己巳, 大行王妃薨于昌慶宮之景春殿, 是年冬十二月初八日庚申, 遷座于祖, 初九日辛酉, 永遷于明陵, 禮也。 龍攅撤帷, 翟輅臨逵。 三光黯以悽惻, 百靈護而奔馳。 簫輓疑於淸蹕, 吉仗宛其常儀。 惟我主上殿下, 臨椒掖而撫迹, 緬組旋而疚心。 悲永潛於厚隧, 痛莫聆於良箴。 式稽彝典, 俾頌徽音。 其詞曰: “仰觀古治, 必資賢壼。 修齊以成, 福祚以遠。 於赫熙朝, 閨闥㝡正。 任、姒代繼, 儷德凝命。 天眷休運, 聿俾內贊。 驪興毓祉, 聖女載誕。 夢月祥著, 崩沙慶驗。 內外法家, 動有擩染。 懿質夙睿, 循蹈典訓。 柔嘉婉順, 允矣淑問。 文定厥祥, 配我宸極。 樂洽鍾皷, 禮虔晨夕。 祗事兩殿, 愉色承歡。 深荷眷愛, 孝敬彌殫。 隨事密裨, 邁古良佐。 益光乾德, 旁達美化。 陳詩顧史, 博觀女則。 含和履正, 珩佩靚穆。 紘綖敎成, 《樛木》恩覃。 頌騰六宮, 詠播《二南》。 躬秉儉素, 志在沖抑。 屛斥華飾, 杜絶私澤。 中遘艱屯, 玉度無缺。 謹畏貶損, 六年一日。 至德愈彰, 寶命遂申。 六騩重尊, 慶洽神人。 撫育元良, 恩踰明德。 宮庭慈孝, 藹然深篤。 中闈肅雍, 統序咸整。 廟見始行, 禮斯爲盛。 芳齡政茂, 美疹遽纏。 兪、扁技窮, 閱朞沈綿。 馮相告祲, 軒曜淪精。 地維宸騫, 飆馭眇冥。 慟遍窮谷, 哀徹高穹。 綿區失於慈覆, 大化缺其陰功。 嗚呼哀哉! 仁壽無徵, 神祐罔終。 胡不少延, 叶相王道? 蘭宮虛以曉月, 繭館閴其秋草。 褘褕輟而靈衣, 寶座改而繐幄。 苑樹摵摵而霜冷, 殿簾曖曖而風肅。 躡銀渚兮路迢忽, 訪瑤池兮雲杳邈。 嗚呼哀哉! 吉岡旣卜, 廞衛式陳。 鸞旐旖旎, 蜃衛殷轔。 違丹禁之邃嚴, 指玄堂之幽昧。 百僚攀慕而雨泣, 千乘哀臨乎宵載。 嗚呼哀哉! 鶯峰之麓, 鳳騫龍騰。 神護萬年, 地聯三陵。 瞻象設兮若臨, 儼靈閣兮斯煌。 仰眞遊兮日以遠, 耿至澤兮不可忘。 嗚呼哀哉! 化機推敓, 脩短孰尸。 衆生同盡, 令名無涯。 塗、辛喆軌, 彤史流聲, 齊雞周弭, 庶紹其馨。 極崇美於仁顯, 超往則而輝炳。 紀貞珉而載烈, 際高厚而垂永。 嗚呼哀哉!”【禮曹判書徐宗泰製進】
숙종 37권, 28년(1702 임오/청강희(康熙)41년) 10월 3일 경진 3번째기사
홍문제학 강현이 지어 바친 옥책문의 내용
옥책문(玉冊文)에 이르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원광(圓光)이 해를 거슬러 올라가니,
이요(二曜)11497)와 아울러 정명(貞明)하고, 두터운 덕(德)이 하늘을 받드니 양의(兩儀)11498)로 나뉘어져 복재(覆載)11499)하였다.
그러므로 국풍(國風)이 비로소 바로잡혔으니, 곧 인도(人道)의 발단(發端)이었다. 복을 받고 상서로움을 쌓았으니 현부(玄符)11500)가 마침내 증험(證驗)되었으며, 명호(名號)를 높이고 위서(位序)를 정하였으니 욕전(縟典)을 곧 수행(修行)할 것이다.
아! 그대 김씨(金氏)는 경사를 쌓은 좋은 집안에 태어나 아름다움을 품은 훌륭한 규범 속에서 자랐도다.
상서(尙書)의 옛 교훈을 이어받아 일찍이 휘음(徽音)을 퍼뜨렸으며, 상국(相國)의 남긴 명예를 계승하여 혜문(惠問)을 더욱 드러내어 마침내 문천의 꿈[捫天之蘉]11501)과 화합하니, 이에 영위(迎渭)의 다리11502)를 이루었다. 모든 경사(卿士)에게 물으니 다 매우 착하다 말하고, 점을 쳐보니 또한 길(吉)하다고 하였다.
이장(彛章)의 거행은 예경(禮經)을 모방하여 문장을 밝힌 것이며, 복색(服色)이 이에 빛남은 고실(故實)을 따라 예물을 마련한 것이다.
이에 신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이세백(李世白)과 예조판서(禮曹判書) 김진귀(金鎭龜)를 보내어, 부절(符節)을 가지고 예의(禮儀)를 갖취서 책명(冊命)하여 왕비(王妃)로 삼는다.
부덕(婦德)이 이미 극(極)11503)에 짝이 되는데 적합하니 음교(陰校)를 장차 입을 것이며, 교화(校化)는 반드시 집을 잘 다스리는데서 시작되니 곤의(壼儀)를 마땅히 닦을 것이다.
아! 오로지 근검(勤儉)하여야 아랫사람을 거느릴 수 있고, 단장(端莊)하여야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있을 것이며, 오직 내외(內外)가 서로 화목해야 집과 나라가 편안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게으르지 않아야 복록(福祿)이 많을 것이다. 원량(元良)11504)을 잘 보살펴서 마후(馬后)11505)가 한장제(漢章帝)를 무육(撫育)한 것과 같이 할 것이며, 주야(晝夜)로 바르게 경계하기를 강비(姜妃)11506)가 주선왕(周宣王)을 깨우친 것과 같이 하면, 백성들이 다 훌륭한 국모(國母)라고 칭송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校示)하니, 의당 자세히 알라”하였다.
【홍문 제학(弘文提學) 강현(姜鋧)이 지어서 바쳤다.】
註11497]이요(二曜):해와 달 註11498]양의(兩儀):하늘 땅.註11499]복재(覆載):하늘은 위에서 덮고 땅은 아래에서 실음.註11500]현부(玄符):하늘의 상서로운 징조.註11501]문천의 꿈[捫天之蘉]:후한(後漢) 화제(和帝)의 비(妃) 등후(鄧后)가 일찍이 꿈에 광대(廣大)하고 끝없이 푸른 하늘을 더듬어 보니, 고드름[鍾乳狀]같은 것이 있어서 입으로 빨아마셨다는 길몽(吉夢)으로, 뒤에 황후(皇后)가 되었음.註11502]영위(迎渭)의 다리:주(周)나라 문왕(文王)이 후비(后妃) 태사(太姒)를 위수(渭水)에서 맞이할 때 배로써 다리를 만든 일 註11503]극(極):임금을 말함.註11504]원량(元良):왕세자(王世子).註11505]마후(馬后):후한(後漢) 명제(明帝)의 후(后)로, 가귀인(賈貴人)이 낳은 숙종(肅宗)을 자기소생과 같이 무육(撫育)하여 뒤에 장제(章帝)가 됨. 덕관후궁(德冠後宮)이란 칭송을 들었음.註11506]강비(姜妃):주(周)선왕(宣王)의 비(妃)로, 선왕이 항상 늦게 일어나매 강후가 비녀와 귀고리를 풀어놓고 뜰에서 대죄(待罪)하니, 드디어 선왕이 깨닫고 근정(勤政)했음.
○玉冊文:
王若曰, 圓光溯日, 竝二曜而貞明; 厚德承乾, 分兩儀而覆載。 故國風之正始, 乃人道之造端。 毓祉儲祥, 玄符聿驗; 尊名定位, 縟典載修。 咨爾金氏, 積慶華宗, 含章懿範。 承尙書之舊訓, 早播徽音; 襲相國之遺芬, 冞彰惠問。 肆叶捫天之夢, 爰成迎渭之梁。 詢諸卿士, 則皆曰允臧; 謀及筮龜, 則亦云其吉。 彝章式擧, 倣禮經而昭文; 象服斯煌, 遵故實而備物。 玆遣臣議政府左議政李世白、禮曹判書金鎭龜, 持節備禮, 冊命爲王妃。 德已孚於儷極, 陰敎將資; 化必本於齊家, 壼儀宜飭。 於戲! 惟勤儉可以率下, 惟端莊可以莅尊。 惟內外相成, 家邦則泰; 惟終始不怠, 福祿則豐。 撫愛元良, 如馬后之慈于漢嗣;規箴夙夜,如姜妃之警于周王。可使國人,咸稱聖母。故玆敎示,想宜知悉。【弘文提學姜鋧製進。】
영조 12권, 3년(1727 정미/청옹정(雍正)5년) 8월 20일(계묘) 11번째기사
윤지술의 종향을 철폐하자는 관학유생 조태상의 상소
관학유생(館學儒生) 조태상(趙台祥)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아들은 어머니에 대하여 끝내 끊을 수없는 은혜가 있고, 신하는 임금에 대하여 불경(不敬)할 수없는 의리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선강(宣姜)은 송환공(宋桓公)이 내친 아내인데도 선유(先儒)가 오히려 양공(襄公)이 예(禮)를 다한 것을 받아들였고, 문강(文姜)은 노환공(魯桓公)의 죄인인데도 부자(夫子)가 오히려 장공(莊公)을 위하여 그 악한 것을 숨겼습니다.
대개 그 임금이 사친(私親)의 은혜를 끊지 않으면 신하가 된 자도 감히 솔직하게 쓰지 못하는 것은 임금을 공경하기 때문입니다.
아! 저 윤지술(尹志述)이 생각하는 바를 상소하여 선왕앞에서 사친을 핍박하여 욕한 것은 그 은혜를 업신여기고 분수를 범한 죄를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윤지술도 선왕의 신하인데, 감히 전형(典刑)을 밝게 바로잡아야 궁위(宮闈)가 엄숙해지고 뭇사람의 분노가 풀어진다는 따위 말을 조금도 꺼림없이 상소에 쓰고, 끝에는 전하께서 감히 다시 사친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였으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접때 대신을 기다려서 처분하겠다는 분부가 있었으나, 이제는 사현(四賢)의 제삿날이 이미 가까와졌으니, 빨리 윤지술의 종향(從享)을 철폐하시기 바랍니다”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처분하겠다는 뜻을 이미 하교하였으니, 이번 제사는 거행하지말라”하였다.
○館學儒生趙台祥等上疏。 略曰:
子之於母, 恩不可終絶; 臣之於君, 義無所不敬。 是以, 宣姜, 宋桓之出婦也, 而先儒猶許襄公之盡禮, 文姜, 魯桓之罪人也, 而夫子猶爲莊公而諱惡, 蓋其君不絶其私親之恩, 則爲臣者, 亦不敢直書, 所以敬君也。 嗚呼! 彼尹志述之投進所懷, 逼辱私親於先王之前者, 其蔑恩犯分之罪, 可勝言哉? 志述亦先王之臣子耳。 乃敢以明正典刑, 宮闈肅而輿憤洩等語, 登諸書奏, 略無顧忌, 末乃以殿下不敢復有私親爲言。 噫嘻痛矣! 頃有待大臣處分之敎, 而今則四賢之祀日已迫, 伏願亟撤志述之從享。
批曰: “處分之意, 已爲下敎, 今番俎豆, 勿爲擧行焉。”
영조 65권, 23년(1747 정묘/청건륭(乾隆) 12년) 2월 19일(기묘) 1번째기사
대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리는 의식절차와 교문
임금이 친히 책보(冊寶)를 대왕대비전에 올리고 가상존호(加上尊號)를 강성(康聖)이라고 하였다.
하루 전날 액정서(掖庭署)에서 전하의 판위(版位)를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위 중앙에 북향하여 설치하고, 소차(小次)를 전계(殿階) 위 서편에다 설치하였다.
책보를 임시로 안치할 안(案)을 전의 안쪽 북쪽에 가깝게 남향하여 설치하였다. 전의(典儀)가 종친과 문무백관의 자리를 전정(殿庭)의 동쪽과 서쪽에 설치하기를 일반 의식과 같이 하였다.
장악원(掌樂院)에서 헌가(軒歌)와 현가(懸歌)를 전정에다 진열하고, 협률랑(恊律郞)의 거휘위(擧麾位)를 서쪽뜰 위에다 설치하였다.
집사(執事)가 책보를 받들어 먼저 안(案)에 두었다.
북을 울려 초엄(初嚴)11192)을 알리자 병조에서 의장(儀仗)의 호위를 진열하고, 사복시정(司僕寺正)이 여(輿)를 합문(閤門)밖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종친과 문무백관은 모두 조복(朝服)을 갖추었다.【5품 이하는 흑단령(黑團領)이다】 북을 울려 이엄(二嚴)을 알리자 명정전 문밖 자리로 나아가고, 좌통례(左通禮)가 합문에 나아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을 계청(啓請)하였다.
북을 울려 삼엄(三嚴)을 알리고 북소리가 그치자, 안팎의 문을 열고 좌통례가 꿇어앉아 외판(外辦)을 아뢰니,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여(輿)를 타고 나왔는데, 산선(繖扇)과 시어(侍御)는 평상시와 같았다.
헌가가 음악을 연주하면 좌우통례가 꿇어앉아 여에서 내리기를 계청하고, 임금이 여에서 내려 소차로 들어가니 음악 연주가 그쳤다.
인의(引儀)가 종친과 문무백관을 인도하여 정해진 자리로 들어갔다.
대왕대비가 통명전(通明殿)으로 나왔는데, 시위(侍衛)는 일반 의식과 같이 하였다. 인의가 사자(使者)를 인도하여 첨계(簷階) 아래로 나아가 서향하여 서고,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차(出次)하도록 계청하자 헌가가 음악을 연주하였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도록 계청하자, 근시(近侍)가 규를 올리고, 좌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판위(版位)로 나아가 북쪽을 향해 섰다.【음악이 그치면 산선(簷扇)·화개(華蓋)·금월부(金鉞斧)를 뜰아래의 좌우(左右)에다 미리 진열한다】 전의(典儀)가 네번 절하라고 외치자 좌통례가 네번 절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국궁(鞠躬)하면 음악이 연주되는데, 네번 절하였다.
종친과 문무백관은 꿇어앉았다. 봉책관(捧冊官)이 책안(冊案) 앞에 나아가 책함(冊函)을 받들고 나와 꿇어앉아 근시(近侍)에게 주고,〈근시가〉서로 받들고 서향하여 꿇어앉아 올리니 임금이 그것을 받았다.
근시가 마주 들고서 정사(正使)에게 주고, 정사가 나아가 동향하여 꿇어앉아서 받아 정문(正門)을 경유하여 들어가 도로 안(案)에다 두었다.
그리고 동문(東門)을 경유해서 나와 첨계(簷階) 아래 동쪽 가까이 서향하여 섰다. 봉보관(捧寶官)이 보안(寶案)앞으로 들어가 보록(寶盝)11193)을 받들고 나와 꿇어앉아서 근시에게 주고, 근시가 서로 받들고 서향하여 꿇어앉아 올리니, 임금이 그것을 받았다.
근시가 마주 들고서 정사에게 주자, 정사가 동향하여 꿇어앉아 받아서 정문을 경유하여 들어가 도로 안(案)에 두었다.
그리고 동문을 경유하여 나와 첨계 위의 동쪽 가까이 서향하여 섰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고 네번 절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규를 잡고 엎드렸다가 일어나면 음악이 연주되는데, 네번 절하였다. 종친과 문무백관도 똑같이 하였는데, 음악이 그쳤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의식이 끝났음을 아뢰자, 좌우 통례가 임금을 인도하여 북쪽 뜰에서 내려와 남쪽을 향해 섰다.
정사는 책함을 받들고 부사는 보록을 받들고 정문을 경유하여 중계(中階)에서부터 나왔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국궁하도록 계청하자 임금이 국궁하였으며, 지나가면 평신(平身)하도록 계청하여 임금이 평신하였는데, 종친과 문무백관도 똑같이 하였다. 사자(使者)가 책함과 보록을 각각 요여(腰輿)와 채여(彩輿)에 안치하면,【요여와 채여는 명정전(明政殿)문밖에 있다】 세장(細仗)과 고취(鼓吹)가 앞에서 인도하며 헌가가 음악을 연주한다.
좌우통례가 임금을 인도하여 승여(乘輿)에 이르자,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를 놓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규를 놓으니, 근시가 꿇어앉아 규를 받았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輿)에 타도록 계청하자, 임금이 여를 타고 들어갔는데, 산선과 시위는 평상시 의식과 같이 하였다.
임금이 내전(內殿)에 이르자, 음악이 그쳤다.
인의가 종친과 문무백관을 인도하여 나오고, 좌통례가 꿇어앉아 해엄(解嚴)하기를 계청하니, 병조에서 하교를 받아 의장을 놓게 하였다.
사자가 문정문(文政門)밖에 이르러 책함과 보록을 상전(尙傳)에게 주어 들여가게 하고, 사자가 도로 전정(殿庭)의 동북쪽에 이르러 서향하여 섰다. 사자가 꿇어앉으니, 정사가 복명(復命)하기를,
“삼가 하교를 받들어 대왕 대비전에 존호책보(尊號冊寶)를 올렸습니다”
하였다.
의식을 마치자, 구부렸다가 일어나 네번 절을 하니, 근시가 계문하였다.
임금이 명정전에 나아가 하례를 받고 반교(頒敎)하여 국중(國中)에 대사(大赦)하였는데,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보갑(寶甲)이 돌아오니 우러러 큰 복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요첩(瑤牒)을 성실하게 이어받으니 다행히 대왕대비의 마음을 빨리 돌이키게 되었다.
이에 떳떳한 전례를 법으로 따르니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왕대비전하께서는 형황(珩璜)11194)같은 지극한 덕으로 시례(詩禮)를 훌륭하게 본을 삼아 주(周)나라 궁궐에서 귀의 장식품을 제거해 버린 것11195)같이 영고(寧考)를 큰 공으로 도우셨고, 한(漢)나라 궁전에서 누인 명주옷을 입은 것11196)같이 아름다운 교훈을 과궁(寡躬)에게 물려 주셨으니, 장락궁(長樂宮)11197)에는 기쁨과 환희가 융성하고 하늘이 도와 강릉(岡陵)같이 장수하시라는 축원을 하게 하였다.
자성(慈聖)의 춘추가 70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우리 조정에 두번째 있는 아름다움이다. 경자년11198)을 돌이켜 생각하여 겸양함은 비록 지난날을 서글프게 생각하는 데 기인하였으나, 진실로 병오년11199)에 〈존호를 가상하는 일에〉부합되니, 정성은 선대의 뜻을 계승하는 데 간절하였다.
대비전에서 겸양의 뜻을 밝히고서 어찌 소자(小子)에게 간절한 정성을 맡기셨겠는가?
궐정에서 부르짖으며 흉금을 털어놓은데서 뭇 신하들이 크게 바라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 겸양하시던 마음을 돌려 힘써 따라주시니, 이에 빛나는 존호를 크게 천명할 수있게 되었다.
옥검(玉檢)11200)을 받들어 공경히 올리니, 보록(寶盝)을 계승하시어 받으소서. 이미 본년(本年) 2월19일에 책보(冊寶)를 받들어 혜순자경헌열광선현익대왕대비(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大王大妃)로 가상(加上)하고,
존호를 강성(康聖)이라 하였다.
〈춘추〉 12세가 넘어서야 영명(永命)의 때를 만나 깊은 궁중에서 요순(堯舜)같은 임금을 받들었으며, 27세가 되시던 해에는 〈존호를 올리게 되어〉 후천(後天)의 수를 늘리셨기에 명령(冥靈)11201)처럼 장수하시를 바랐었다. 성대한 의식은 꿩의 깃으로 장식한 왕후의 의복에서 빛이 나니, 이미 옛날의 법을 따라 거행하였고 아름다운 법식은 고운 옥에서 더욱 드러나도다.
어버이를 돋보이게 하려는 정성을 다하여, 이에 자성의 깊은 인애를 따라 온 나라에 후한 은택을 내리려 한다.
오늘 매상(昧爽) 이전부터 잡법(雜犯)으로 사죄(死罪)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없애주고, 관직에 있는 자는 각기 한 자급을 더해주며, 자궁(資窮)11202)인 자는 대가(代加)하도록 하라.
아! 큰 복을 오복(五福)에서 첫번째 말한 장수에다 크게 하였으니, 실제로 기성(箕聖)11203)의 구주(九疇)에 합당하고, 온유한 교화를 팔방(八方)에다 펴시니 모두 문모(文母)11204)같은 가르침에 얽매었도다.
그래서 이렇게 교시하니 마땅히 모두 알도록 하라”하였다.
【예문관제학 원경하(元景夏)가 지어 올렸다】
註11192]초엄(初嚴):의식을 행할 때 처음에 울리는 북소리. 광화문(光化門)의 큰 북을 두드리는데, 초엄에는 백관이 모이고, 이엄(二嚴)에는 문밖에 나오고, 삼엄(三嚴)에는 뜰에 들어오는 것임.註11193]보록(寶盝):어보(御寶)를 넣은 궤.註11194]형황(珩璜):패옥(佩玉).註11195]주(周)나라 궁궐에서 귀의 장식품을 제거해 버린 것:주(周)나라 선왕(宣王)이 정무(政務)를 게을리하며 늘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므로, 강후(姜后)가 일찍 일어나 귀의 장식품을 제거해버리고 영항(永巷)에서 대죄(待罪)하며 말하기를,“첩(妾)이 변변치 못하여 사군(使君)으로 하여금 예의를 상실하게 하여 늦게 일어나는데 이르도록 하였기에 감히 죄받기를 청합니다”하였는데, 선왕이 마침내 깨닫고 정무를 부지런히 하여 주나라를 중흥시켜 명성을 이루게 했다는 고사(故事).註11196]한(漢)나라 궁전에서 누인 명주옷을 입은 것:후한(後漢) 명제(明帝)의 후(后)인 명덕마황후(明德馬皇后)가 궁중에서 늘 대련(大練)을 입고 치마의 단을 두르지 않았는데, 초하루와 보름에 제희(諸姬)들이 조청(朝請)을 주장하면서 황후의 엉성하고 거친 것을 바라보고는 도리어 무늬가 있는 고운 명주옷을 입고 나아가 보이며 웃으니, 황후가 말하기를,
“이 명주옷은 특별히 염색하기에 알맞기 때문에 착용하였을 뿐이오”하자, 육궁(六宮)에서 그의 검소함에 탄식하지않는 이가 없었다는 고사.註11197]장락궁(長樂宮):한(漢)나라 고조(高祖)5년에 모후(母后)를 받들기 위하여 세운 궁전. 혜제(惠帝)이후 황제의 모후는 모두 이곳에 거처했는데 황제의 미앙궁(未央宮)은 서쪽에 있었는데 반해 이 궁은 동쪽에 있었으므로 동조(東朝)라고 하며, 흔히 대왕대비(大王大妃)와 대비전(大妃殿)을 가리키는 말로 쓰임.註1198]경자년:1720 경종 즉위년.註11199]병오년:1726 영조2년.註11200]옥검(玉檢):옥함(玉函).註11201]명령(冥靈):거북.註11202]자궁(資窮):당하관(堂下官)의 품계가 더 올라갈 자리가 없이 된다는 뜻으로, 당하 정3품을 말함.註11203]기성(箕聖):기자(箕子).註11204]문모(文母):주나라 문왕(文王)의 비(妃) 태사(太姒).
○己卯/上親上冊寶於大王大妃殿, 加上尊號曰康聖。 前期一日, 掖庭署設殿下版位於明政殿月臺上當中北向, 設小次於殿階上西邊。 設冊寶權置案於殿內近北南向。 典議設宗親文武百官位於殿庭東西如常儀。 掌樂院展軒懸於殿庭, 設協律郞擧麾位於西階上。 執事捧冊寶, 先置於案。 鼓初嚴, 兵曹陳仗衛, 司僕正進輿於閤外。 宗親文武百官具朝服。【五品以下黑團領。】 鼓二嚴, 就明政門外位, 左通禮詣閤, 跪啓請中嚴。 闢三嚴, 鼓聲止, 闢內外門, 左通禮詭啓外辨, 上具冕服乘輿以出, 繖扇侍御如常。 軒架樂作, 左右通禮跪啓請降輿, 上降輿入小次, 樂止。 引儀引宗親、文武百官入就位。 大王大妃出御通明殿, 侍衛如常儀。 引儀引使者, 陞就簷階下西向立, 左通禮跪啓請出次, 軒架樂作。 左通禮跪啓請執圭, 近侍進圭, 左右通禮前導, 就版位北向立。【樂止, 繖扇、華蓋、金銊斧, 先進於階下左右。】 典儀唱四拜, 左通禮請四拜。 上鞠躬, 樂作, 四拜。 宗親、文武百官跪。 捧冊官詣冊案前, 捧冊凾出, 跪授近侍, 傳捧西向跪進, 上受之。 近侍對擧, 以授正使, 正使進東向跪受, 由正門入, 還置於案。 由東門出, 立於簷階下近東西向。 捧寶官入詣寶案前, 捧寶盝出, 跪授近侍, 近侍傳捧西向跪進, 上受之。 近侍對擧, 以授正使, 正使東向跪受, 由正門入, 還置於案。 由東門出, 立於簷階上近東西向。 左通禮跪請執圭, 四拜。 上執圭, 俯伏興, 樂作, 四拜。 宗親文武百官同, 樂止。 左通禮跪啓禮畢, 左右通禮導上, 降于北庭南向立。 正使捧冊凾, 副使捧寶盝, 由正門, 降自中階以出。 左通禮跪啓請鞠躬, 上鞠躬, 過則啓請平身, 上平身, 宗親文武百官同。 使者以冊寶, 各置於腰彩轝,【腰彩轝在明政門外。】 細仗、鼓吹前導, 軒架樂作。 左右通禮導上, 至乘與, 左通禮跪請釋圭。 上釋圭, 近侍跪受圭。 左通禮跪啓請乘與, 上乘輿以入, 繖扇、侍衛如常儀。 上至內殿, 樂止。 引儀引宗親、文武百官出, 左通禮跪啓請解嚴, 兵曹承敎, 放仗。 使者至文政門外, 以冊函寶盝, 授尙傳以入, 使者還至殿庭, 東北西向立。 使者跪, 正使復命曰: “謹奉敎, 謹奉上大王大妃殿尊號冊寶。” 禮畢, 俯伏興四拜, 近侍啓聞。 上御明政殿, 受賀頒敎, 大赦國中, 敎文曰:
寶甲載周, 仰純禧之聿迓, 瑤牒誕受, 幸慈聽之亟回。 彝典式遵, 輿情共忭。 恭惟大王大妃殿下, 珩璜至德, 詩禮懿規, 脫珥周闈, 贊洪烈於寧考, 服練漢殿, 貽嘉訓於寡躬, 長樂隆怡愉之歡, 天保騰岡陵之祝。 惟聖算七秩之始, 卽我朝再有之休。 追想庚年, 沖挹雖因於愴昔, 允符丙歲, 忱悃彌切於紹先。 臨殿敷心, 曷任小子之懇迫? 籲庭披膈, 可見群工之顒望。 何幸謙衷之勉循, 肆致渙號之丕闡。 攀玉檢而祗進, 綿寶籙而茂膺。 已於本年二月十九日, 奉冊寶加上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大王大妃, 尊號康聖。 演二六而値永命之辰 奉深宮之堯舜, 會三九而衍後天之算, 冀冥靈之春秋。 盛儀有煌於翟褕, 旣擧率舊之典, 徽範孔彰於琬琰。 庶殫顯親之誠, 玆追慈極之深仁, 用霈寰宇之厚澤。 自今日昧爽以前, 雜犯死罪以下, 咸宥除之, 在官者各加一資, 資窮者代加。 於戲! 介景福於一, 曰實叶箕聖之疇, 被柔化於八方, 咸囿文母之敎。 故玆敎示想宜知慾。
【兼文提學元景夏製進。】
순조 4권, 2년(1802 임술/청가경(嘉慶) 7년) 8월 11일(기유) 2번째기사
교문을 반포하다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는데, 다음과 같았다.
“태실(太室)804)에서 올려서 부제(祔祭)의 의식을 거행하니 경명(景命)을 이에 맞게 되었고, 양전(兩殿)에 존숭의 전례(典禮)를 드리니 성대한 예를 비로소 거행하게 되었다.
삼가 떳떳한 전장(典章)에 따라 크게 명고(明誥)를 반포한다.
삼가 생각건대 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대왕대비전하(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大王大妃殿下)께서는 주실(周室)의 성사(聖姒)805)이고,
송조(宋朝)의 여요(女堯)이시다.
정곤(正壼)으로 규목(樛木)806)의 인(仁)을 펼쳐 황조(皇祖)의 건극(建極)의 정치에 짝하셨고, 세자를 도와 반석같이 튼튼함에 올려놓아 소고(昭考)807)의 천조(踐祚)808)하시는 일을 도우셨다.
신묘한 솜씨를 깊은 궁중에서 말없이 운용하시어 여러번에 걸쳐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을 안정시켰고, 음공(陰功)은 훌륭한 칭호로 천양되어 크게 요책(瑤冊)의 찬란함을 입으시게 되었다.
아! 소자(小子)가 하늘에 도움을 받지못하여 오직 태모(太母)만을 의지해 살아왔다.
구면(裘冕)809)의 조용한 모습을 우러러보며 날마다 사랑해주시는 은혜를 받았고, 염유(簾帷)의 엄연히 임하심을 받들어 만기(萬機)는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뜻을 힘입었다.
해와 별같이 밝은 대의(大義)를 밝히시니 선대(先代)의 아름다움에 빛남이 있었고, 무지개와 같은 여러 간사한 무리들을 시원히 없애버리니 만민들의 습속이 크게 변하였다.
충신과 역적을 진퇴시키기를 엄정하게 하니 조정이 깨끗이 맑아지고, 민생의 고질병을 영원히 제거하니 공화(功化)가 널리 펴졌다.
자천(慈天)의 보우하신 덕을 입어서 종사가 안정되기에 이르렀으니, 돌아보건대 지금 보답하고 싶은 심정은 하해(河海)와 같아 헤아릴 수가 없도다, 아! 우리 왕대비의 곤범(壼範)은 진실로 옛 현천한 왕후의 규범(閨範)보다 휠씬 뛰어나셨다. 상서로움은 위량(渭梁)810)의 빈(嬪)에 부응하시어, 영왕(寧王)811)의 시초를 바로잡는 치화(治化)에 터전을 닦으셨고 덕은 경실(京室)의 부인됨에 합당하여 문모(文母)812)의 단정하시다는 칭송을 이으셨다. 비록 어렵고 험난한 때라도 육궁(六宮)에서 잠이(簪珥)813)의 칭송을 올렸고, 그 근검하고 공손하게 삼가시는 행실은 팔방(八方)이 굉연(紘연)814)의 공덕을 입었다. 선어(仙馭)815)가 멀리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어찌 달랠 수 있겠는가?
초라한 이 몸이 상중(喪中)에 있음을 민망히 여겨, 덮어주고 감싸주시는 은혜를 치우치게 받았다.
해옥(海屋)816)의 보주(寶籌)가 점차 높아지시니 소자의 마음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두려웠다. 계전(桂殿)817)의 봄빛이 길게 머무니 덕을 현양하고 싶은 생각이 뭉클하게 솟는다.
이에 청묘(淸廟)에 올려 부제(祔祭)를 지낸 끝에 동조(東朝)에 존호를 올리는 전례를 거행하는 바이다. 지위는 장락궁(長樂宮)818)보다 더욱 높으니 천승(千乘)의 숭봉(崇奉)함에 의절이 있고, 예는 우리 가문에 마땅한 것이니, 세분 왕후의 거룩한 일을 기술할 수가 있다.
다만 양성(兩聖)의 겸손하심으로 인하여 굳이 열조(列朝)의 떳떳한 전례를 거절하셨다. 이번의 커다란 의식을 치룸에 있어서 아마도 자심(慈心)에 슬픔이 많으셨으리라.
옛날의 정미(精微)한 의리를 추억하여 실로 마음이 더욱 슬프신 것이다.
연달아 호소함이 뜰에 가득하였으나 이미 마음을 돌릴 가망은 없었고, 온화한 유음(諭音)을 거듭 내리시어 행여 대양(對揚)하는 말씀이 있을까 하였다. 이에 공덕을 묘사하는 글월은 그만두기로 하고 다만 위호(位號)를 더 높이는 예만 거행하노라.
어버이를 높이는 효도가 큰 것인데 비록 2자(二字)의 찬양은 결여되었지만 뜻을 순종하는 도리가 이에 있으니 거의 백세(百世)의 빛남을 기약할 수 있으리라. 차례대로 전하여 빛나는 자리에 오르니 우뚝하게 자극(慈極)·자위(慈衛)가 더욱 높았으며 명호(名號)를 바르게 하는 높고 귀한 의식을 거행하여, 빛나는 옥전(玉篆)과 옥첩(玉牒)을 삼가 드린다.
갱장(羹牆)819)의 사모가 더욱 깊으니 지극히 애통하는 마음이 항시 세상이 끝날 때까지 맺혀있다.
강릉(岡陵)같은 수명(壽命)을 누리시기를 빌면서 작은 정성을 날짜를 아끼며 조금 펼친다. 이에 자은(慈恩)의 넓고 크심을 미루어 널리 큰 혜택을 내린다. 이번 달 11일날이 밝기 이전의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석방해 주라.
아! 국운(國運)이 바야흐로 형통하여 열리니 만물이 각기 풍성하게 되리로다. 나라의 대부(大夫)·서사(庶士)들은 모름지기 석류(錫類)820)의 큰 규모를 도와, 여러 백성들도 더불어 함께 복을 받는 지화(至化)에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는 것이니 생각건대 마땅히 잘 알아야 할 것이다”하였다.【예문관 제학 황승원(黃昇源)이 지었다.】
註804]태실(太室):종묘(宗廟).註805]성사(聖姒):문왕(文王)의 비(妃) 태사(太姒).註806]규목(樛木):《시경(詩經)》주남(周南)의 시명(詩名). 모시서(毛詩序)에서는 후비(后妃)가 질투하지않고 밑의 여러 첩들을 두루 돌보아주는 것을 읊은 시라 하였음. 즉 가지가 밑으로 늘어진 나무[樛木]는 밑의 여러 첩들을 감싸주고 후비의 덕을 상징한 것으로 봄.註807]소고(昭考):정조(正祖).註808]천조(踐祚):왕위(王位)의 계승.註809]구면(裘冕):복장. 註 810]위량(渭梁):문왕(文王)의 태사(太姒) 친영(親迎)을 말함.註811]영왕(寧王):정조를 말함.註812]문모(文母):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말함.註813]잠이(簪珥):비녀와 귀걸이. 주(周)선왕(宣王)이 항상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니 강후(姜后)가 비녀와 귀걸이를 벗고 대죄(待罪)했다는 고사(故事).註814]굉연(紘綖):면주관의 줄과 덮개로 왕후가 만드는 것.註815]선어(仙馭):임금의 상여.註816]해옥(海屋):바다위에 신선이 사는 집.註817]계전(桂殿):내전(內殿).註818]장락궁(長樂宮):한(漢)고조(高祖)5년에 모후(母后)를 받들기 위하여 세운 궁전. 혜제(惠帝)이후 황제의 모후는 모두 이곳에 거처했다. 황제가 거처하는 미앙궁(未央宮)은 서쪽에 있었는데 반해 이 궁은 동쪽에 있었으므로 동조(東朝)라고 하며, 흔히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과 대비전(大妃殿)을 가리키는 말로 쓰임.註819]갱장(羹牆):선왕(先王)을 추모하는 마음.《후한서(後漢書)》이고전(李固傳)에 의하면,“예전에 요(堯)임금이 죽은 후에 순(舜)임금이 3년 동안 추모하였는데 앉으면 벽에 요임금이 보이고 음식을 들 때에는 국에 요임금이 보였다”하였음.註820]석류(錫類):효자에게 복을 내린다는 뜻. 즉 《시경(詩經)》 대아(大雅) 기취(旣醉)에“효자의 효도다함이 없으시니, 영원토록 복 내리시겠네[孝子不匱永錫爾類]”라고 하였음.
○頒敎文:
若曰。 太室擧躋祔之儀, 景命載迓, 兩殿晉尊崇之典, 縟禮肇稱。 祗率彝章, 誕敷明誥。 恭惟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大王大妃殿下, 周室聖姒, 宋朝女堯。 正壼敷《樛木》之仁, 配皇祖建極之治, 翼儲措磐石之固, 贊昭考踐阼之謨。 神機默運於深宮, 屢奠宗社之岌嶪, 陰功載闡於顯號, 誕膺瑤冊之煒煌。 嗟! 小子不弔于天, 惟太母相依爲命。 瞻裘冕之淵靜, 三朝承止慈之恩, 奉簾帷之嚴臨, 萬幾賴仰成之旨。 闡日星之大義, 有光先休, 廓螮蝀之群邪, 於變民俗。 忠逆進退之嚴正, 朝著肅淸, 民生膏肓之永除, 功化普暢。 荷慈天保佑之德, 旣宗祊之底安, 顧今日崇報之忱, 若河海之莫量。 猗! 我王大妃壼範, 允邁古哲后閨徽。 祥膺渭梁之嬪, 基寧王正始之化德合京室之婦, 嗣文母思濟之音。 雖艱難險巇之時, 六宮騰簪珥之頌, 伊勤儉恭謹之行, 八方被紘綖之功。 望仙馭之陟遐, 曷慰崩毁之慟? 閔眇躬之在疚, 偏荷覆幬之仁。 海屋之寶籌漸高, 翼小心於喜懼。 桂殿之春暉長駐, 藹一念於顯敡。 肆於淸廟升祔之餘, 爰有東朝晉號之例。 位彌隆於長樂, 千乘之崇奉有儀, 禮則宜於我家, 三后之盛事可述。 祗緣兩聖之謙挹, 堅拒列朝之典常。 迨此時張大之儀, 蓋慈心之多慼。 追昔年精微之義, 寔懿衷之增摧。 聯籲齊登於滿庭, 旣感回之無望, 溫諭洊降於盈缶, 庶對揚之有辭。 斯寢功德摸畫之章, 只擧位號加隆之禮。 尊親之孝爲大, 縱欠二字之揄揚, 順志之道斯存, 庶期百世之炫燿。 傳序膺光升之位, 巍乎慈極慈闈之冞尊, 正名擧隆貴之儀, 煥矣玉篆玉牒之祗獻。 羹墻之慕冞篤, 至痛恒纏於終天。 岡陵之壽是祈, 微誠粗伸於愛日。 斯推慈恩之曠蕩, 用霈惠澤之涵泓。 自本月十一日昧爽以前, 雜犯死罪以下, 咸宥除之。 於戲! 運方啓於泰亨, 物各遂於豐阜。 邦之大夫、庶士, 須贊錫類之洪規, 嘉與百姓群黎, 咸歸斂福之至化。 故玆敎示, 想宜知悉。【藝文提學黃昇源製。】
순조 17권, 13년(1813 계유/청가경(嘉慶)18년) 1월 3일(신미) 1번째기사
왕대비의 회갑에 차사·전문·표리를 올리고 인정전에서 하례받고 교문을 반포하다
왕대비(王大妃)3257)의 회갑이다.
친히 치사(致詞)와 전문(箋文)과 표리(表裏)를 올리고, 이어서 인정전에 나아가 하례를 받고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다. 치사에 이르기를,
“왕실이 휘음(徽音)3258)을 이으시고 장락궁(長樂宮)3259)에 높이 계시니, 크게 음공(陰功)을 빛내시어 길이 곤원(坤元)에 짝하셨습니다.
보령(寶齡)이 더욱 높으시어 상서로운 갑년(甲年)이 이에 돌아왔으니,
하늘이 태평한 운수를 열어서 왕업의 밝은 미래가 바야흐로 다가옵니다.
자위(慈闈)께서 기쁜 얼굴을 하시니 문손(文孫)이 그 슬하(膝下)를 맴돕니다. 4세(世)가 한 당(堂)에 모였으니 만년이 항상 오늘같으소서.
기쁨이 우주간에 가득하고 경사가 종묘에 넘치도다.
송초(頌椒)3260)하는 절일을 만나 화봉인(華封人)의 축수3261)하는 정성을 바칩니다. 이는 진실로 우리 동방의 더할수없는 경사이므로 손뼉을 치며 기뻐하게 됨을 억제하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전문(箋文)에 이르기를,
“만세를 이어갈 왕업의 경사는 그 상서로움이 자극(慈極)에 엉기었고,
보력(寶曆)이 칠순에 들어섰으므로 법전(法殿)에서 하례를 드립니다.
정월의 이 날이여, 천년이 한 봄이소서.
삼가 생각건대, 왕대비 전하께서는 송(宋)나라 여요(女堯)3262)보다 뛰어나시고 주(周)나라 국모(國母)인 태사(太姒)에 필적하셨습니다.
영고(寧考)3263)를 도와서 남국(南國)의 교화(敎化)를 베푸셨으니 두터운 곤덕(坤德)이 바탕을 이룩하였으며, 소자를 도와서 동조(東朝)3264)에 높이 계셨으니 자천(慈天)이 광명으로 덮어 주셨습니다.
계유년이 되어 상서로운 회갑이 이르렀으니 만년(晩年)에 옥체(玉體)가 더욱 강녕(康寧)하셨습니다.
기자(箕子)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아홉번째인 오복(五福)의 수(壽)를 누리시니 송축하는 기쁨이 온 나라에 퍼지고, 헌원씨(軒轅氏)의 기년(紀年)이후 천년에 한번 있는 기회를 만났으니 남산(南山)처럼 오래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에 크게 성대한 예식을 거행하여 세번 만세를 불러서, 하늘이 주시는 온갖 복록을 거듭 맞이합니다.
삼가 신은 연세를 기억하여 세월이 흐르는 것을 아끼는 정성으로 기뻐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침선(寢膳)을 살피어 온 나라로써 봉양하는 도리를 더욱 다하고, 아침 해가 솟아오르듯 초승달이 점점 충만해지듯 억만년을 사시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가만히 기도드립니다”하였다.
교문을 반포하였는데,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하늘의 상서가 거듭하여 자극(慈極)께서 냇물이 흘러오는듯하는 복을 받으셨다.
해주(海籌)3265) 갑년(甲年)이 다시 돌아왔으니, 법전(法殿)에서 산호(山呼)3266)하는 의식을 거행하노라.
이에 널리 알리는 정하여진 규례에 따라 손뼉치며 기뻐하는 조그만 정성을 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태모(太母)께서는 그 훌륭하신 규범이 진실로 옛날 현철(賢哲)한 후비(后妃)의 방유(芳猷)3267)보다 뛰어나셨다.
황고(皇考)3268)를 도와 탈잠(脫簪)3269)의 규간(規諫)을 바쳐서 음공이 24년 동안에 흡족하였으며, 자위(慈闈)를 받들어 휘음(徽音)을 이은 영예를 드러내니 아름다운 칭송이 팔방에 넘친다.
아! 경사를 쌓아 온 명문 집안에서 명성모(明聖母)3270)의 성렬(盛烈)을 크게 이어받았고, 드디어 장락궁(長樂宮)에 높이 계실 것이니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높으셨던 보령을 능히 이으시리라.
생각해보면 부덕한 내가 지극한 자애를 지나치게 받았으며, 그 돌보아 사랑하심이 어릴 때 부터였다.
두터우신 곤덕(坤德)을 바탕으로 이룩되도록 하여 주셨으니 무육(撫育)한 은혜가 깊고, 자천(慈天)이 묵묵히 도우신 인덕(仁德)을 입었으니 보호하여 기르신 공로가 크시도다.
이에 보갑(寶甲)이 다시 이른 때를 당하여 옥체(玉體)가 강령하시기를 더욱 바란다. 봄 햇살이 차츰 영훤(靈萱)3271)에 길어지니 진실로 나날을 아끼는 자식의 마음이 깊고, 하늘의 별이 선약(璇籥)에 돌아오니 어버이의 연세를 기억하는 기쁨이 절실하도다.
봉력(鳳曆)3272)이 7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무녀성(婺女星)을 쳐다보매 빛이 찬란하고,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장수(長壽)의 복을 누리시니 왕업의 미래가 끝없이 이어지리라.
이는 정말로 천년에 한번 만나기 어려운 상서로운 일이요, 또한 나라를 세운 지 4백년동안에 드물게 있었던 경사라. 흉년을 진념(軫念)하시는 자교(慈敎)를 우러러 따라서 풍성하게 드리는 잔치는 잠깐 늦추고, 초승달이 점점 충만해지듯 하시기를 비는 미미한 정성으로 우선 하례를 올리는 예를 먼저 하노라.
어찌 조정백관들만의 기쁨 뿐이겠는가?
팔도의 백성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리라.
춘대(春臺)에 환희가 넘치니 정월의 이 좋은 날에 욕례(縟禮)를 올림이요, 기쁨이 우주 사이에 넘치니 성수(聖壽)가 북두성과 남산처럼 장수하기를 바라노라. 이미 태실(太室)3273)에 명결(明潔)한 인제(禋祭)를 올렸으며, 다시 대정(大庭)에서 이를 크게 알리노라.
그래서 군생(群生)이 모두 즐거우니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조칙3274)을 화창한 봄날에 선포하고, 은택이 널리 흐르니《주역(周易)》의 뇌수해괘(雷水解卦)3275)의 뜻을 본받는다.
이달 3일 새벽 이전에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면제한다.
아! 그 자손들이 대대로 착하도록 하여 온 나라가 효도로 다스리는 경사에 부응하게 하고, 화기와 상서를 맞아들여서 모두가 감화되어 태평한 세상이 되도록 하라. 그래서 이렇게 교시하는 것이니 마땅히 잘 알 것이다”하였다.【예문관 제학 김계락(金啓洛)이 지었다.】
註3257]왕대비(王大妃):정조(正祖)비인 효의왕후(孝懿王后)김씨.註 3258]휘음(徽音):후비(后妃)의 덕음(德音).註3259]장락궁(長樂宮):왕대비가 거처하는 곳을 뜻함.註3260]송초(頌椒):초화송(椒花頌)으로, 신년의 축사(祝詞)를 이름.《진서(晉書)》열녀전(烈女傳)에,“유진(劉臻)의 처 진씨(陳氏)가 총명하여 글을 지을 줄 알아서 일찍이 정월 초하룻날 《초화송(椒花頌)》을 지어드렸는데, 그 가사에,‘하늘이 돌고 돌아 설날이 되었구려……, 성용(聖容)을 비추어서 천만년 살고지고[旋穹周迴 三朝肇建 …… 聖容映之 永壽於萬]”라고 하였음.註3261]화봉인(華封人)의 축수:화봉인(華封人)은 화(華)라고 하는 땅의 봉인(封人). 화봉인이 수(壽)·부(富)·다남자(多男子) 세가지를 가지고 요(堯)임금을 축하했다는 고사(故事)가 있음.註3262]여요(女堯):송(宋)나라 철종(哲宗)의 모후(母后)인 선인태후(宣仁太后)를 말함. 철종이 어려서 선인태후가 섭정할 때 왕안석(王安石)을 물리치고 사마광(司馬光)을 등용하여 원우(元祐)의 치(治)를 이루었으므로, 여자중의 요(堯) 순(舜)이라고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음.註3263]영고(寧考):정조를 가리킴.註3264]동조(東朝) 왕대비가 거처하는 궁궐.註3265]해주(海籌):해옥첨주(海屋添籌)의 준말. 해옥은 바다위에 신선이 산다는 집으로, 《동파지림(東坡志林)》에,“세노인이 있었는데, 서로 나이를 묻게 되자, 한 노인이 말하기를,‘바닷물이 상전(桑田)으로 한 번 변할 때에 나는 1주(籌:산가리)씩을 내려놓았는데, 지금 10주가 찼다’고 했다”하였음.註3266]산호(山呼):나라의 큰 의식이 있을 때 황제나 임금의 축수(祝壽)를 표하기 위하여 만수무강을 비는 뜻에서 신하들이 두 손을 치켜들고‘만세’또는‘천세’를 크게 일제히 외치던 일 註 267]방유(芳猷):훌륭한 계책.註3268]황고(皇考):정조를 가리킴.註3269]탈잠(脫簪):주(周)나라 선왕(宣王)이 항상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니, 강후(姜后)가 잠이(簪珥)를 벗고 영항(永巷)에서 대죄(待罪)하자, 선왕이 말하기를“과인이 부덕(不德)하여 저절로 생긴 잘못이지 부인의 죄가 아니다”하고는 드디어 정사(政事)에 부지런히 힘썼다는 고사(故事).註3270]명성모(明聖母):현종비인 명성왕후를 이름.註3271]영훤(靈萱):훤당(萱堂), 즉 어머니가 계신 곳.註3272]봉력(鳳曆):보령.註3273]태실(太室): 종묘.註3274]조칙:봄철에 초목 군생(群生)이 즐기고 있으니 백성들을 구휼(救恤)해야 한다는 내용임.註3275]뇌수해괘(雷水解卦):천지의 기운이 풀어져서 뇌우(雷雨)가 일어나고 만물이 싹트는 시기에 군자(君子)는 이 뜻을 본받아 죄과(罪過)를 사유(赦宥)한다는 뜻임.
○辛未/王大妃回甲。 親上致詞箋文表裏, 仍御仁政殿受賀頒敎, 致詞曰:
京室嗣徽, 長樂履尊, 丕彰陰功, 永配坤元。 寶齡彌邵, 瑞甲載回, 天開泰運, 景籙鼎來。 慈闈歡顔, 文孫繞膝。 四世一堂, 萬年今日。 喜騰區宇, 慶溢宗祊。 値頌椒節, 獻祝華誠。 此誠我東方莫大之慶, 不勝慶忭之至。
箋文曰:
瑤籙膺萬世之慶, 慈極凝祥, 寶曆啓七耋之齡, 法殿獻賀。 三陽是日, 千歲爲春。 恭惟王大妃殿下, 邁宋女堯媲周母姒。 贊寧考而宣南國之化, 厚坤資成, 翼小子而履東朝之尊, 慈天光覆。 迨昭陽瑞甲之載屆, 猗晩景玉度之冞康。 箕疇享九五之禧, 頌幾騰於左海, 軒紀逢千一之會, 祝願切於南山。 肆縟禮誕擧於三呼, 而景貺益迓於百祿。 伏念臣知年以喜愛日之誠, 寢膳晨昏, 益殫致一國之養, 升恒日月, 竊祈奉萬齡之懽。
頒敎文:
若曰, 天休用申, 慈極膺川至之福。 海籌回甲, 法殿擧山呼之儀。 爰遵播告之彝章, 少伸慶忭之微悃。 竊念我太母懿範, 允邁古哲妃芳猷。 贊皇考而獻脫簪之規, 陰功洽於二紀, 奉慈闈而著嗣徽之譽, 嘉頌溢於八埏。 猗歟! 積慶名門, 誕承明聖母盛烈, 肆惟履尊長樂, 克追仁元后邵齡。 顧寡昧偏蒙至慈, 而眷愛寔自沖歲。 體厚坤資成之德, 撫育恩深, 荷慈天默佑之仁, 保護功大。 玆當寶甲之重屆, 益仰玉體之冞康。 春暉彌長於靈萱, 誠深愛日, 天星載周於璇籥, 喜切知年。 鳳曆啓七旬之籌, 瞻寶婺而增曜, 龜疇享九五之福, 綿瑤籙於無彊。 此誠千一會難逢之休, 抑亦四百載罕有之慶, 仰遵軫歲歉之慈敎, 讌姑徐於豐呈, 顧以祝月恒之微忱, 禮宜先於晉賀。 奚但百僚之胥悅? 思與八域而同歡。 喜溢春臺, 擧縟禮於正月上日, 歡騰海宇, 祈聖壽於北斗南山。 旣太室之明禋, 又大庭之誕告。 群生皆樂, 宣漢詔於春和, 霈澤旁流, 體羲繇於雷解。 自本月初三日昧爽以前, 雜犯死罪以下, 咸宥除之。 於戲! 敎愛錫類, 一國孚孝理之休, 導和迎祥, 萬化躋仁壽之域。 故玆敎示, 想宜知悉。【藝文提學金啓洛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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