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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2:1~11절
제목 : 성도의 교회생활
제가 총신신대원에 입학시험을 보러 갔는데 입구에 돌에 총신대 신대원의 교훈이 색여 있었습니다.
내용은 “①신자가 되라 ②학자가 되라 ③성자가 되라 ④ 전도자가 되라
⑤목자가 되라”입니다. 이 교훈은 내 마음에 목회 방향을 제시하여 주었고 지금도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학교에는 교훈이 있고, 회사에는 사훈이 있고 군에는 구호가 있듯이
각자 나름대로 교회생활을 하는 데에도 어떤 기준이 필요한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봉사도 잘하고, 선교헌금도 잘하고 모든 것이 좋은데 한 가지 서로 다툼이 있었습니다. 4:2절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다투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하여
성도라면 교회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격은 어떻게 다듬어 나갈 것인가 ? 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서 이 서신을 쓰면서
1:8절에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며”, 3:18절 “눈물을 흘리며” 유언하는 마음으로 하나 하나를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1절 ‘그러므로’는 1:27~30절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성도의 교회생활은 한 마음으로 한 뜻이 되어, 복음의 협력자가 되어야 하며, 두려움을 이기고, 고난을 잘 받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의 교회생활을 위해서는 첫째 연합하고, 둘째는 겸손하고, 셋째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저와 성도여러분들에게 크신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1. 연합입니다(1~4)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연합을 위해서는 4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입니다.
권면이란 격려하는 것입니다.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렇고 그렇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자던 가난하든, 지휘가 높던 낮던, 잘 생겼든 못생겼든 하루 3번 밥먹고 자고, 싸고, 사는 것이 다 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도 한 발짝 더 들어가서 마음을 떠놓고 이야기하면 그 안에 걱정과 근심과 초조 불안 염려가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 격려하며 살아야 할 존재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실패하여 좌절해 있을 때,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 풀이 죽어 있을 때 격려가 필요합니다.
만일 교회에서 권면이 사라져 버린다면 교회로서의 한 가지 기능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대다수는 자존심이 상하고, 약점이 잡히는 것 같아서, 그것을 듣기 싫어합니다.
신앙의 발전은 누가 나를 권면해 줌으로, 다른 길로 걸어갈 때 그것을 말씀으로 바로 잡아 줌으로, 그리고 내가 그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 드릴 때 가능합니다.
권면해 주면 오히려 시험에 들어 버리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괄목할만한 신앙의 성장을 도모하는 사람이 있다.
저와 장재찬, 이명호, 이두호 목사가 지난 월요일에 발안제일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노회장 이신 김인중 목사님께서 안수 기도를 할때 그의 특유의 발음으로 “멋진 일꾼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닮은 목자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사도행전을 이어가는 목자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할때 저는 아멘!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이어서 ‘ 증경노회장인 이무영 목사님께서 권면의 말씀을 주셨는데 1) 먼저 하나님 앞에서라! 2)하나님 보기에 좋은 목사되라!(거룩한 목자에 거룩한 성도가 있다). 3)하나님 말씀에 절대 복종하라! 할때 아멘!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제가 목사고시 면접을 보는데도 “좋은 목사가 되라”는 말을 권면 받았습니다. 정말 좋은 목사가 될 것입니다.
권면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드려 힘쓰면 그렇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예배시간에 주시는 말씀을 자기 것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사랑의 위로”입니다.
- 상대방이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위로해야 합니다.
-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입니다.(고후1:3).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나오는 위로를 받고 사는 자들로서 다른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의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고전14:3)
고후1:4절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이러한 위로나 사랑이 없다면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위로는 바로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30:2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또 시86:17절에서『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하나가 된 성도는 바로 이러한 위로와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이야기]오래 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어느 축구선수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당시 그 선수는 한창 떠오르는 신인이었고, 장래는 누구보다 밝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번의 사고 때문에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축구화를 신고 동료들과 함께 푸른 잔디를 마음껏 내달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절망한 채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누구도 그를 위로할 수 없다고 주변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역시 어떤 말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한창 뻗어 나가야 할 시기에 꺾여버린 자신의 꿈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간호사가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 기타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간호사가 건네는 기타를 받아 들었고, 이날부터 그는 전혀 새로운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부상 때문에 축구 영웅이 되는 꿈을 접어야 했던 이 젊은이는 대신에 아름다운 음성으로 전 세계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병상에 누워 있었을 때 건네진 기타라는 위로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후로 사람들은 그를 축구 선수가 아닌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건네는 한 마디의 따뜻한 격려, 그리고 위로가 한 인생을 완전 다른 삶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이 창조의 역사를 우리 교회 안, 곳곳에서 목격되고, 이로 인해 우리 교회가 소망의 현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으로부터 출발입니다. 이 위대한 출발을 오늘 이 시간부터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셋째는 “성령의 교제”입니다.
- 이것은 “성령님께서 창조하시는 교제”를 의미 합니다.
교제는 바로 교회의 생명입니다. 교제가 없는 교회는 그 생명력을 읽고 맘니다. 그런데 그 교제는 반듯이 성령의 교제가 되어야 합니다.
엡4: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령의 교제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신분상의 평등한 위치에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서 [형제님, 자매님]하는 것입니다.
또 성령의 교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이 그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교제는 주님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기도)입니다.
진정한 교제는 바로 주안에서 서로 떡을 나누고, 기도에 힘쓰고, 전도하기를 서로 힘쓰는 것입니다.(행2:42~47)
교제란 사귐을 뜻합니다. 이 사귐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1)하나님과의 사귐
-초대교회 성도들은 기도하기를 힘썼고(42)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46)
-하나님을 찬미하기를 힘썼습니다(47).
이런 행위들은 하나님과의 교제 수단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해야 참 그리스도인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초대 성도들처럼 성전에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기를 힘쓰는 생활을 하도록 합시다.
2)이웃 성도들과 사귐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성도들이 사귄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한 한 몸 됨을 확인하는 행위입니다. 사실상 성도 개개인은 한 몸된 교회의 지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체된 성도들이 서로 사귐이 없다면 건강한 몸 즉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전에 모여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며 신령한 교제를 했습니다.
이처럼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교제와 수평적인 성도들과의 교제가 초대교회를 더욱 견고하고 건강하게 성장시킨 요인이 되었음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향남교회성도들도 이런 교제를 통하여 개개인이 성숙해질 뿐 아니라 주의 몸인 교회가 든든히 서 가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신입한 교인들은 이런 사귐의 자리에 빠짐없이 참석하기를 당부합니다.
우리교회는 모두가 신입한 교인이기 때문에 모두가 사귐의 자리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 따라서 바울은 만일 너희가 성령께서 창조하신 교제의 공동체에 속해서 그 결과로 서로 간의 교제를 누린다면, 이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긍휼과 자비”입니다.
긍휼은 사랑을 전재로 한 것입니다.
긍휼 속에 자비는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비”가 따로 사용됨으로 그 개념이 강조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깊은 긍휼과 자비를 받고 사는 사람들로서 신자들을 깊은 자비로 대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바울이 빌립보교인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심장으로 사랑한다”라고 했습니다.
자비는 약자를 대하는 동정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이 약자를 위해서입니다.
약자의 개념은 단순히 세상적 가난한 자를 말함이 아니라 마음이 상한자입니다. 권세와 돈이 있던 삭개오도 마음이 상한자였기 때문에 그에게 들어 가셨습니다.
시34:18절에서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긍휼과 자비는 곧 바로 십자가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는? 그리스도와 같이 성령 안에서 돌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삶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썬다싱 긍휼]
눈보라 치던 어느 날, 인도의 성자라 불리는 썬다싱이 네팔 지방의 한 산을 넘고 있었습니다. 마침 같은 방향의 여행자 한 사람이 있어서 그와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쌩쌩 몰아치는 눈보라는 겹쳐 입은 옷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살을 도려내는 것 같았습니다. 인적도 없고 민가도 눈에 띄지 않는 외딴 지대가 계속되는데다 휘몰아치는 눈으로 인해 산길은 더욱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가 두 사람은 눈 위에 쓰러져 있는 노인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노인은 온몸이 언 채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썬다싱은 그 노인을 데려가자고 동행자에게 말했지만, 동행자는 화를 벌컥 내면서 “무슨 말입니까? 우리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판에 저런 노인네까지 끌고 간다면 우리 모두 다 죽고 말 것이오.” 하면서 먼저 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썬다싱은 죽어 가는 노인을 두고 그냥 갈 수 없었기에 그를 등에 업고 눈보라를 헤치며 걸음을 내딛기 시작하였습니다. 동행하던 사람은 이미 보이지 않은 지 오래였습니다. 혼자서도 뚫고 나가기 힘든 눈보라 속을 다른 사람까지 업고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그 추운 날씨에도 썬다싱의 몸에서는 더운 열기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열기가 등에 업힌 노인에게 옮겨서인지 노인은 차츰 의식을 회복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으로 인해 동사하지 않고 무사히 그 산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산 너머 마을에 이르게 된 그들은 길에 쓰러져 동사한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썬다싱은 그 시체를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바로 얼마 전 혼자 살겠다고 앞서 간 동행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긍휼을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었던 썬다싱은 항상 바른 길과 의를 위해 살겠다는 것을 양식삼아 왔기에 이웃에 대한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임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구하려는 실천이 따르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동행자는 이러한 선한 것을 양식삼고 있지 않았기에 자신까지 혹 죽을까 하여 지나쳐 가다가 그만 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모든 일은 사람의 수단과 방법, 계산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보면 썬다싱과 노인은 얼어 죽을 것 같지만 오히려 희생의 길이 살 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긍휼과 희생, 사랑과 자비의 마음이 만들어 낸 위대한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가지고 정도를 걸으며 옳은 도리를 좇아 나간다면 죽을 사람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랑으로 상대에게 많은 것을 깨우치게 해 주며 바른 길로 인도해 줄 수 있습니다. 양초 하나가 자신을 태워 방안을 빛으로 가득 채우고, 소금이 녹아져 음식에 맛을 내는 것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삶은 참으로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랑과 긍휼의 삶, 정도를 좇는 삶 속에서 기적을 낳으시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절 연합을 4중으로 강조 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라고 말씀합니다. 본절은 마음의 일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1)마음을 같이하여=같은 것을 생각하라, 2) 같은 사랑 3) 뜻을 합하며=“감정 조화”, 4) 한 마음을 품어 라고 말씀합니다.
-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실 때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한 예수님을 믿고,
한 성령을 받아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 한 마음을 갖는 것은 상대방의 실의와 슬픔과 고통에 동참하는 마음입니다.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연주 됩니까?]
여러가지 악기의 모양과 소리의 체계는 다릅니다. 음색도 틀립니다. 다 같은 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좋은 질서와 좋은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그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면 환상적인 화음이 되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줍니다.(성가대도 마찬가지)
- 연주전에 악사들이 악기를 조율할 때는 시끄럽고 단조로운 소리를 내므로 시끄럽고 어수선합니다. 그러나 지휘자가 그 행동을 멈추게 하고 연주를 시작하면 아름다운 소리를 발한다.
- 그렇게 시끄럽고 다양하고 부산했던 소리가 한 지휘자의 지휘아래 연주해 나갈 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다.]
- 다양한 구성원 - 은사도 다르다.- 사는 모양도 다르다.-
우리교회가 이제 다락이 운영되고, 사역을 정하여 지여 지면 화모니가 필요합니다.
한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뭉쳐서 우리의 지휘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휘를 받아서 움직일 때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 누군가 불협화음을 낼 때, 비난할 것이 아니라 권면하고 사랑으로 가르치므로 한 화음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 우리 교회는 이제 연주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휘를 받아서 우리가 함께 하늘의 연주자가 된 것입니다.
- 우리가 우리 임무에 충실할 때 그것이 아름다운 화음이 되어서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임은 물론이고 연주를 잘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푸짐한 보너스를 안겨 주시는데 그것은 영육 간의 풍성함입니다.
[시편34:9-10에서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 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2. 겸손하라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2:3b, 4a).
3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연합을 방해하는 요소들입니다(2:3a).]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아무 일에든지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고”했습니다.
“다툼”은 이기적인 야망입니다. “허영”은 공허한 자만심입니다.
“이기적인 야망”과 “공허한 자만심”은 동행 합니다.(갈5:26)
갈5:26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허영심은 진실을 잃고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게 합니다.
허영심은 헛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사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사울 왕은 다윗에 대해서 다툼과 허영이 많았습니다.
교회에서도 다툼과 허영이 있으면 파벌이 형성됩니다.
첫째,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3b
- 겸손한 마음으로 각자 자신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 비겁은 공포에서 생기는 것이지만, 겸손은 사랑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 우리는 자랑이나 우월감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 우월감 특권의식 때문에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길 때 가정도 직장도 하나 될 수 있습니다.
- 겸손 해지는 최고의 비결은 “대가(大家)앞에서는 것입니다.
겸손은 대가 앞에서 배웁니다.
-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 욥22:29=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신다고 했다.
· 시10:17=하나님은 겸손한자의 소원을 들으신다고 했고,
· 시22:26에서는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 시147:6에서는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를 붙드신다고 했다. 또한
· 잠11:2에서는 겸손한 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 잠22:4에서는 겸손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또 마음이 겸손한자가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다고 이시야 29:19에서말씀하고 있습니다.
· 이밖에도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 바울의 겸손 - 그는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 [나는 죄인중의 괴수다]라고 고백합니다.
* 예수그리스도의 겸손 - 그분은 누구인가?
만왕의 왕,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 온 우주 만물의 통치자,
그런 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 예수님은 겸손 그 자체입니다.
[마11:29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4절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행동적인 실천을 말하고 있다.
둘째, [각각 자기 일을 돌아 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4a
- 이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을 의미 합니다. 그러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 자기 일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 반면에 자기 것만을 챙기고 다른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는 곳에도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 신자는 나를 돌아 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돌아 봐야 합니다.
* 예화 : 농부의 이야기(가난한 농부 - 논에 물대기)
-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첫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
이것은 즐거워 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을 말합니다.
- 그리고 사랑을 하면 마음에 기쁨이 충만해 집니다.
3.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하나 되기 위해서는“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십니다.(5~8)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면
1) 그리스도의 마음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 여기서 “비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 겸손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겸손은 자신의 존재도 버리는 것이다.
- 하나님(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특권을 버리셨습니다.
- 예수님은 권세, 영광, 자유를 버리셨습니다.
2) 그리스도의 마음은 같아지는 것입니다.(같아지심)
- 하나님은 우리를 권면하고 위로 하기 위해서 같은 몸이 되셨습니다.
* 예화 : 다미안 신부 : 하나님께 문둥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4년간
문둥이로 지냄. - 문뭉이들이 감동하여 복음을 받아 드렸습니다.
1840년 벨기(트레멜루)출생, 1889.4.15(49세)소천. 25(16)년간 사역
[다미안 신부]
한센씨병 환자들은 “하늘의 벌(천형)을 받은 문둥이”로 멸시를 받곤했다. 이들에게 같은 인간으로부터 천대받고, 버림받고 있다는 박탈감과 두려움은 온 살이 문드러지고 없어지는 고통만큼이나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절벽 때문에 해가 뜨고 지는 것마저 보이지않은 태평양의 외딴섬 몰로카이의 나환우들도 다미안 신부가 오기 전까지는 그런 삶 속에 내던져져 있었다.
다미안 신부가 나환자 수용소인 몰로카이 섬에 갔을때 그곳은 지옥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다미안 신부는 그들을 위해 힘껏 일하려 했으나 오히려 그들은 비웃기만 했습니다.
흥! 하나님 사랑 좋아 하시네!
사랑이 있다면 우리를 이모양 이꼴로 썩어 문드러지게 내벼려 둬?
그따위 사람은 당신 처럼 건강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잠 꼬대라구!
사람들은 이렇게 빈정 거렸습니다.
이말을 들은 미디안 신부는 무릎을 꿇고
주님! 저를 나병 환자가 되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그들과 제가 한마음이 되게 해주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결국 나병에 걸린 그는 어느날 강론에 나가서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라고 말하는 대신에 천천히
“우리 나병환자 들은···”이라고 강론을 시작했습니다.
성당안은 갑자기 숨이 막힐정도로 조용해 졌습니다.
이말은 지금까지 그가 건강한 사람으로 나병 환자를 위해 일해왔으나 이제는 그도 나병에 걸린 환자로서 그들과 괴로움을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미안 신부는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습니다.
마침내 다미안 신부의 진실한 사랑에 감복되어 몰로카이 수용소의 환자중에 자살하는 사람이 점점줄어 들었고 삭막한 투쟁의 세계는 평화의 세계로 변화기 시작하였습니다.
3) 그리스도의 마음은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입니다.
- 복종은 순종과 다릅니다.
- 순종은 기쁨으로 하지만,
복종은 납득이 가지 않지만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복종 하셨다는 것은 목숨을 희생하기 까지 절대적인 복종을 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예수님은 절대 복종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시므로 우리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죽기까지 복종하면]
우리에게 큰 축복을 주십니다.
9~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죽기까지 복종 할 때 하나님이 일 하십니다.
1)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만유의 그리스도로 삼으셨습니다.
2) 최선의 위치까지 높이십니다.
- 요셉은 총리가 되기 전에 억울한 죄수로 낮아 졌고
- 모세는 이스라엘이 총통이 도기 전에 미디안 양치기로 낮아 졌으며,
- 다윗도 왕이 되기 전에 사울에게 쫒기는 지명 수배자로 낮아 졌다.
3)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겸손해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아무쪼록 우리가 이러한 겸손한 반열에 서서 하나님을 섬기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성경은 믿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말씀하시면서
성도의 교회생활은 한 마음으로 한 뜻이 되어, 복음의 협력자가 되어야 하며, 두려움을 이기고, 고난을 잘 받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도의 교회생활을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첫째는 1) 그리스도안에서 권면하고, 2) 사랑의 위로와 3) 성령의 교재와 4) 긍휼과 자비를 가지고 연합하며, 둘째는 겸손하고, 셋째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는 성도는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일치를 위해 경쟁심으로부터 비롯되는 다툼이나 자기를 앞세워 높아지려는 허영을 버리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마음과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나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