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2년인 1908년 창경궁 내에 황실박물관으로 발족 다음해 부터 일반에 공개 되었는데, 한일병합 후인 1938년 李王家박물관으로 명칭이 격하되었다. 해방 후인 1946년 이 박물관의 소장품을 덕수궁으로 옮긴 후 '덕수궁미술관'으로 개칭하여 개관했다. 1992년 '궁중유물전시관'으로 확대·개편한 후 5대 궁과 12개 능·원에 분산 소장되어 오던 중요 유물을 한데 모아 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그 해 12월 덕수궁 석조전 동관에 '궁중유물전시관'을 신설하여 개관했다. 2004년 '조선왕실역사박물관추진단'을 발족한 후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명칭을 확정하고 경복궁 내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 '국립고궁박물관'을 새롭게 개관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지상 2층, 지하 1층 건물로, 전시실 15개실(11,580㎡), 수장고 15개실(7,694㎡), 보존과학실 1개실(324㎡) 등 총 관리 연면적 18,284㎡의 규모이다. 2010년 현재 약 4만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12개 전시실에 650여 점의 유물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궁중의 의상, 그림, 가구 등이 다양하게 전시되고 있는데, 그 중에는 국보 제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 국보 제278호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太宗十一年李衡原從功臣錄券附函)', 국보 제310호 '백자대호(白磁大壺)' 외에 보물 19점과 근대문화재, 중요민속자료 등이 포함되어 있다.
관람시간은 평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입장은 오후 5시까지)까지, 주말과 공휴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입장은 오후 6시까지)까지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34(세종로 1-57)에 위치하고 있다.
국보급 전시물들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국보 제228호
직육면체의 돌에 천체의 형상을 새겨 놓은 것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권근, 유방택 등 11명의 천문 학자들에게 명을 내려 만들도록 한 것이다. 고구려의 천문도를 표본으로 삼아 그 오차를 고쳐 완성하였는데, 두 부분으로 나누어 내용을 배치하고 있다. 윗부분에는 짧은 설명과 함께 별자리그림이 새겨져 있고, 아래부분에는 천문도의 이름, 작성 배경과 과정, 만든 사람의 이름 및 만든 때가 적혀 있다. 별자리 그림에는 중심에 북극을 두고 태양이 지나는 길인 황도(黃道)와 남북극 가운데로 적도(赤道)를 나타내었다. 또한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별들이 총망라되어, 황도 부근의 하늘을 12등분한 후 1,464개의 별들을 점으로 표시하였다. 이 그림을 통해 해, 달, 5행성(수성, 금성, 토성, 화성, 목성)의 움직임을 알 수 있고, 그 위치에 따라 절기를 구분할 수도 있다. 태조 4년(1395)에 제작된 이 석각천문도는 중국 남송의 『순우천문도』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지금은 표면이 심하게 깎여나가서 알아보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으나, 고구려 천문도의 원형을 짐작케 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이것은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새 왕조의 표상으로 만든 천문도의 각석(刻石)이다. 태조 4년(1395)에 제작된 이 천문도는 권근(權近)이 지은 글에서 그것이 고구려 천문도를 계승하여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별자리 그림에는 1,464개의 별들이 그려져 있고, 천문도의 제작경위와 제작에 참여한 서운관(書雲觀)의 학자들 등의 글이 새겨져 있다. 원래 경복궁에 있던 것을 영조 46년(1770)에 관상감(觀象監)에 흠경각(欽敬閣)을 짓고 숙종 때의 새 천문도 각석과 함께 보존했었다. 이것은 13세기 중국의 석각(石刻) 천문도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귀중한 유물이다.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太宗十一年李衡原從功臣錄券附函)-국보 제278호
태조 이성계가 봉한 원종공신 이후 두 번째로 발급된 공신록권(功臣錄券)으로 이형(李衡)에게 내린 것인데 공신록권이란 나라에 공이 있는 인물에게 공신으로 임명하는 증서를 말한다. 그 내용을 보면 이 록권은 태종(太宗)이 동궁시절부터 주야 돌보고 보좌한 공로를 가상히 여겨 포상(褒賞)하고 수여한다는 3등공신 증서이다. 태종 11년(1411) 11월에 당시 통훈대부판사재감사였던 이형에게 발급한 것으로 조선 전기 공신에 대한 대우와 공신록 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된다.
크기는 가로 243㎝, 세로 34.7㎝ 종이질은 닥나무종이
백자대호(白磁大壺)-국보 제310호
백자대호는 보통 높이가 40cm 이상 되는 대형으로, 둥글고 유백색(乳白色)의 형태가 둥근 달을 연상하게 되어 일명 ‘달항아리’라고도 불린다. 조선 17세기 후기~18세기 전기의 약 1세기 동안 조선왕조 유일의 관요(官窯)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 백자제작소(경기도 광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광주지역에 산포해 있던 340여 개소의 가마 가운데 금사리 가마에서 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순백의 미와 균형감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백자의 독특하고 대표적인 형식으로 주로 17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형태이다.
흔히 백자대호를 조선 백자의 정수로 평가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중국이나 일본의 도자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원만구족(圓滿具足)한 형태미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넉넉한 모습의 이 항아리에서 당시 사람들의 안분자족(安分自足)하고자 했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백자 큰 항아리는 아래 부분과 윗부분을 따로 만들어 붙여 만들었기 때문에 붙였던 부분이 조금씩 드러나기도 하고, 모양도 비대칭인 것이 대부분인데, 이를 개의치 않고 오히려 이러한 비대칭을 즐기듯이 거리낌 없이 제작함으로써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과 조선 중기 백자 큰 항아리의 멋을 창출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 백자 큰 항아리도 위와 같은 제작 기법으로 인해 모양이 완전한 대칭은 아니지만 약간 비틀어지고 변형된 상태가 전체의 조형에 장애가 되지 않고 오히려 변화를 주면서 생동감을 갖게 한다.
높이 45.5㎝, 입지름 19.5㎝, 몸체 지름 44.0㎝, 굽 지름 17.0㎝인 이 백자 큰 항아리는 높이에 비하여 몸통이 둥글고 다소 커 보이지만, 입 지름과 굽 지름의 비례는 대체로 이상적이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굽과 입의 높이도 적당하여 몸통이 둔하지 않고, 무겁거나 처져 보이지도 않는다. 유약 상태는 양호하며, 보존 상태도 매우 양호하여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도자기이다.
그외 진귀한 소장품들이 많이 있었으나 다 기억도 안 날 뿐더러 난다해도 일일이 찾아 올리기엔 필자의 역량이 택도 없이 부족하여 생략하기로 합니다. 관심이 있는 벗들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더욱이 꽁꼬이니 오다가다 들러 관람하심이 좋을듯 합니다만...
순종황제와 영친왕 그리고 방자여사의 체취를 덤으로
이 부분은 국립고궁박물관 홈피의 안내문이 너무 잘 되어 있고, 솔직이 쓰기에 버거워 이로 대신하니 부디 너무 나무라지 마시길....
*당일 손전화 사진기(갤럭시s2)로 찍은 사진 몇 장
순종황제 어차(경복궁역지하도에서 촬영) 오목해시계(경복궁역지하도에서 촬영)
영친왕 곤룡포(경복궁역지하도에서 촬영) 조선왕조 족보(경복궁역지하도에서 촬영)
세종대왕상(세종로에서 촬영)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세종로 지하 세종관에서 촬영)
편종(세종로 지하 세종관에서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