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오 최방제
끝내 만날 수 없었던 최방제 하비에르 신학생의 무덤
조선 신학생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무덤이 있다는 미카엘 묘지로 향했다.
1837년11월 27일. 이 머나먼 이국 땅에 사랑하는 동료들을 남겨두고 먼저 하느님의 품에 안긴 그였다. 최양업과 김대건의 눈물 속에서 끝까지 십자고상에 입을 맞추며 '좋으신 예수님, 좋으신 하느님'을 되뇌던 그 신학생이었다.
사실 어제 일정을 마친 버스 안에서 현지의 한국인 가이드가 "내일 아침에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학생의 무덤을 보러 갈 것이다."라고 한 탓에 기대가 컸었다. "아니, 하비에르 신학생의 무덤이 언제 발견되었단 말인가?" 그러나 아쉽다. 그것이 아니었다.
마카오 한인 교회에서도 하비에르 신학생의 무덤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단다.
결론은 추정뿐. 1969년과 1997년, 마카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무덤들을 정리하면서 유해들을 한곳에 모아놓았다는 합장묘들 가운데 하비에르 신학생의 유해도들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믿고 순례하면서 조선교구 신학교 칼르리 교장 신부님의 서한 내용을 떠올려본다. "슬프게도 하느님의 무서운 손길이 이 작은 무리를 짓눌렀습니다. 더 강한 믿음, 더 깊은 신심을 가졌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어린 조선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촉망되던 하비에르 신학생이 꽃다운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칼르리 신부의 1837년 12월 서한 중에서>
끝내 만날 수 없었던 하비에르 신학생의 무덤을 뒤로한 채 그 유명한 마카오의 상징인 성 바오로 성당(大三巴牌坊)과 지하의 천주교예술박물관, 마카오 주교좌 성당, 옛 성 요셉 신학교와 잘 보존되고 있는 유물관, 1835년 성 바오로 성당의 화재로 인해 옮겨 안치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유해(팔뼈)가 있는 신학교 성당을 차례로 순례하였다.
<아래 사진> 마카오 성 미카엘 묘지의 합장묘. [자료: 양업 순례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