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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는 이야기[2]
-고참 구타 사망사건-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앞에 있는 코가 깨진다고 했던가.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자대로 찾아 일요일에 도착했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
내일 월요일부터 1주일간 유격훈련 들어가니 군장 꾸리고 준비하란다.
제기랄!
정말 욕 나왔다.
뭐 빠지게 하사관학교 졸업하고 겨우 1주일이 위로 휴가랍시고 갔다가 자대에 왔는데 무슨 일은 재수 없는 일이 있단 말인가.
분대원들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데 말이다.
난 본래 군에 가기 전에 욕을 하지 않았는데 군대의 유산 중의 하나가 욕을 가르쳐 준 것이다. 하기야 그 당시 호칭이 욕이었을 정도니까 뭐.
투덜거림도 입 밖으로도 내놓지 못하던 시절의 군대생활이 아니었던가.
그날 밤!
하사관 학교에서 말로만 듣던 분대장끼리의 ‘집합’명령이 떨어졌다.
신참 분대장이 왔으니 신고 푸닥거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깨울 거란 긴장 속에 부대까지 오는 피로도 잊은 채 자는 둥 마는 둥 신고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2시경 바로 위 소대 고참이 조용히 일어나란다. 따라서 도착한 곳은 부대 막사 뒤쪽의 목욕탕!
불빛이 창문으로 조금 스며드는 얼굴만 희미하게 보이는 컴컴한 벽 쪽으로 중대 분대장들이 도열 해 있다.
크게 숨도 못 쉴 듯한 정적이 잠시 흐르고, 드디어 왕고참이 나타나자 서열 3번째 고참이 번호를 시킨다.
난 그때 중대 전체 분대장이 17명이란 것을 알았다.
내가 막내니까 내 번호에 3명의 고참을 더 하면 되니까.
신고식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엎드려뻗쳐서 곡괭이 자루로 20대를 맞았다.
그때야 뭐 긴장 속에 그 정도는 하사관 학교에서 이미 숙달되어 있었던지라 그다지 아픈 줄도 몰랐다.
그다음부터 웃기는 짜장들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잡아 밤마다 푸닥거리를 해대니 정말 돌아버릴 정도였다.
그나마 잘 때리는 고참에게 맞으면 다음 날 후유증이 없는데 주먹질도 못해본 고참 놈들이 마구잡이 구타를 하는 다음날에는 온 전신 아팠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고, 구타도 좀 해본 놈이 하는 것이다.
군대 와서 한풀이식 주먹을 휘두르니 서로 못할 짓이다.
매일 밤마다 2시면 깨운다.
목욕탕에 집합하면 온갖 구질구질한 핑계를 잡아 구타한다.
어떤 날은 걷는 자세가 불량하고 또 어떤 날은 경례하는 자세가 불량하고 또 어떤 날은 어떻고 참 여러 가지 하더라.
이럴 때는 무식한 놈들과 같은 의식을 가져야 살아남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같은 소대 바로 위 고참인 김 하사가 귀에다 대고 이렇게 속삭인다.
“서 하사! 미치겠지. 나도 그래서 안다. 참다가 정말 못 참으면 실탄 한 발을 저 위에 천정에다 숨겨놨으니 사용해라. 내가 사격장에 빼돌렸는데 사용 못 하고 숨겨 놨다.”
이게 뭔 소린가?
그때는 또 다른 음흉한 저의가 있을지 모른다 싶어 그냥 간단하게 ‘예’하고 말았다. 다음날 정말 실탄이 있는지 궁금했다.
혼자 있을 때 천정 끝 부분에 숨겨진 실탄 한 발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래도 억울한 구타를 당할 때마다 매일 하루만 더 참자!를 외치고 있었다.
그러다 정말 못 참으면 실탄을 사용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지면서 말이다.
이런 무식한 군대가 대한민국 군대인 줄은 정말 몰랐다.
군 생활이 훈련과 작전수행에 피곤한 게 아니라 고참들 눈치보고, 구타에 시달린다고 피곤했다.
구타로 밤이 두려운 군인이 무슨 군인인가?
적이 아닌 아군이 더 겁나는 군대가 무슨 군대인가?
밤마다 누우면 천정에 있는 실탄을 바라보면서 잠이 들었다.
그렇게 청상과부 허벅지 찌르듯 매일 밤을 인내로 넘기기를 몇 달하니 왕고참이 제대하고 신참 분대장이 전입되어 왔다.
나도 이제 소위 쫄다구가 생긴 것이다.
그 기분은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정말 모른다.
그것도 고향이 부산 근처인 마산 놈이 왔으니 얼마나 반가웠던가.
내보다 더 폼 나는 멋진 놈이 와서 전입신고를 했다.
절대로 난 거지 같은 고참이 안 되겠다고 다짐했고, 우린 친하게 지냈다.
그 후 몇 년 후에 우린 마산역 앞에서 술 한번 진하게 취한 추억이 아직 남아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도 그의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이 하사! 정말 마치겠지? 나도 그랬다. 내가 사격장에서 실탄 한 발 빼돌렸는데 사용 못하고, 저 위 천정에 숨겨놨으니 도저히 못 참으면 사용해라.”
그놈도 그 다음날 혼자서 그 실탄 존재를 나처럼 확인했으리라.
그 실탄은 내게 가르쳐준 고참이 아닌 그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것이란 것을 나중에 나도 자연스럽게 터득했고, 난 이 하사에게 또 그렇게 인수인계를 한 것이다.
몰론 그 실탄은 이 하사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 하사는 또 다음 후임에게 그렇게 귀에 대고 속삭였을 것이다.
우린 그 정도는 그래도 버티고 견딜 수 있는 시대의 군인이었다.
수많은 생각을 하면서 마음도 몸도 키웠던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구타가 사라지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곧 사단 사격측정이 있다고 중대 전체가 사격연습에 열중이었다.
그 당시 중대장은 3사관학교 출신이었는데 어려운 소령 진급에 혈안이 되어 진급 점수를 높이려고 무식할 정도로 사격훈련을 시켰다.
그 노력은 통해서 사격대회 1등을 했고, 난 특등사수로 1주일의 포상 휴가를 받았다.
정말 기분 요즘말로 짱이었다.
휴가 간다고 군화는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 반질반질하게 닦고, 전투복은 다림질에 또 다림질을 해서 칼같이 바지 날을 세우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몇 시간 후에 그 포상휴가는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호사다마라 했지 않는가.
중대장은 안 그래도 불같은 성격에 너무 흥분해서 그것을 잊었고, 절제와 자중을 배우지 못했던가 보다.
휴가 전날 난 일직하사, 우리 소대장은 일직사관 그리고 중대장은 본래 자신이 일직사령이 아닌데도 다른 중대장과 바꿔서 일직사령 하면서 중대원의 노고를 위로하는 회식자리를 열었다.
이것이 중대장에게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줄 몰랐다.
그동안 여러 날을 모두 시달렸으니 술이 얼마나 잘 들어갔겠는가.
전부 술에 취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일직하사고, 내일 휴가 가니까 술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취침시간이 다 되어갈 즈음에 행정반 근무자가 뛰어오더니 빨리 행정반에 가보란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중대장이 김 하사님을 때리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야말로 총알같이 뛰어갔다.
중대장 개떡 같고, 말대가리 같은 성질을 잘 알기 때문이다.
문을 여는 순간 중대의 발길이 김 하사님의 가슴팍을 찼고, 김 하사님은 벽 쪽으로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쳤다.
그래도 중대장은 화가 안 풀리는지 술 취한 소리로 기분 다 깬다는 식으로
“분대장이란 새끼가 고참들한테 좀 맞았다고 중대장한테 와서 일러바치나. 그따위 정신으로 무슨 분대를 지휘한단 말이냐”
대충 상황파악을 하고 중대장을 말리고는 김 하사님을 껴안고 해당 소대 분대장실로 모시고 가서 눕히면서 괜찮으시냐고 했더니 괜찮다고 해서 문을 닫아주고 회식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조 점호시간!
내가 일직사관에게 보고하기 위해 둘러보니 김 하사님이 보이질 않는다.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다.
성실한 사람이 안 나온 건 이미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분대장실로 뛰어나가니 얼굴에 파리가 앉아 있었다.
이건 숨이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잠을 자도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파리가 얼굴에 앉으면 쳐서 쫓는다.
숨을 쉬지 않는다.
이 상황은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보안대, 헌병대 차가 들어오더니 고참 5명을 잡아 싣고 사라졌다.
중대장의 발길질로 벽에 부딪힐 때 뇌출혈을 일으켜 밤새 서서히 출혈이 진행되면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건 개죽음이다.
대한민국 군대인 아군이 개죽음을 시킨 것이다.
김 하사님 부모님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지금도 참 착했던 김 하사님 얼굴이 희미하게 생각 날 때가 있다.
이 김 하사님은 고참 중에 가장 온순하고 합리적인 분이었다.
아주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고, 그것을 군대에서도 실천하려하니 자주 고참들의 질책이 있었다.
분대 지휘능력이 엉망이라는 이유로 집중 교육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날도 회식 중에 술 취한 기분에 고참에게 몇 마디 입바른 소리를 하자 고참 몇 명이 목욕탕으로 끌고 가서 집단 구타를 했고, 김 하사님은 또 술기운에 억울한 심정을 호소한다고 중대장에게 가서 구타를 없애든지 다른 부대로 전출시켜달라고 했던 것이다.
요즘 식으로 본다면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당시 김 하사님의 주장은 시대를 잘못 만난 군사정권시대의 유서가 되었다.
아무튼 김 하사님은 하늘나라로 떠났고, 진급을 위해 열정적인 중대장은 군사재판에 회부 되었고, 나의 휴가증도 사라졌다.
중대장이 모든 책임을 진다는 조건으로 구타 고참들은 짧은 형기를 마치고 타 부대로 배속되었다.
이제 폭격 맞은 것은 침울한 기운만이 부대에 가득했다.
그때 난 우울증 비슷한 걸 앓았던 것 같다.
말이 적어지고, 식욕도 사라지고 있었다.
군대생활에 대한 회의가 강하게 일어났다.
밤마다 집합시키던 고참들 몇 명은 잡혀갔고, 남은 고참들은 몸 사린다고 이제는 구타를 하라고 해도 도망갈 상황이 되었다.
참 세상 일은 희한하다.
고참들이 영창에 많이 가버리니 1년 조금 넘은 나의 서열이 수직 상승해버린 것이다. 나에게 군 생활 편하게 되는 기회가 빨리 온 것이다.
김 하사님의 희생을 밟고서 말이다.
소대에서는 왕고참이 되었으니 우리 소대 분대장들은 전부 통제할 수 있었다. 즉시 일체의 구타행위를 금지했다.
물론 그 후 제대할 때까지 단 한 번의 구타도 한 적이 없다.
특히 맨손으로 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할 짓이 아니질 않는가.
그런데 고참들이 몸을 사리자 이젠 이상기류가 나타났다.
급격히 질서가 흐트러지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군기가 빠지고 있었다.
이것도 난 용인할 수 없었다.
내가 그 사건 이후 몸을 사리는 고참들을 대신해서 내 밑으로 전부 집합을 시켰다. 그리고 때리지 않고도 군기를 확립시켰다.
군대는 군대여야 한다.
군대는 궁극적으로 살인집단이다.
전쟁에 한번 써 먹기 위해 사육하는 집단이다.
순수 민간인이 되어서는 그 임무를 수행 할 수 없다.
클래식이나 멜로드라마는 잠시 잊고 지내야 하는 곳이다.
그래야 후방의 우리의 부모.형제가 편안히 잠 잘 수 있다.
군인의 존재 가치는 바로 그것이다.
그때 후임의 기억나는 말 한마디가 있다.
“차라리 때리십시오. 맞는 게 낫지. 선착순은 정말 더 지겹습니다.”
그럼 난 그랬다.
“나도 부모형제가 있다. 영창 안 갈란다.”
난 구타대신 군기확립을 위해 교범에 나와 있는 것처럼 체력단련도 되는 완전 군장 선착순이나 팔굽혀 펴기를 시켰다.
이것은 일거양득의 효과를 가진 군기확립 법이었다.
차차 더 응집하고 전우애로 다져지는 인간의 군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비무장지대 적의 기관총 사거리 안에서, 지뢰밭에서, 영하 20도가 더 내려가는 눈 속에서 수색정찰하고 매복하는 생명수당 150원짜리들이 서로를 구타할 동안, 밖에서는 돈 가진 자들과 권력 있는 자들은 육신이 멀쩡한데도 병역면제 받던 더러운 시절이었다.
요즘 높은 자리 청문회에서 낙마하는 것도, 개망신을 당하는 것도 그때 누린 특권욕심에 대한 당연한 응징이다.
군대 갈 때 감기 걸려서 갔다가 제대 할 때 감기 걸려서 나오면 3년 세월 빼고 본전이라는 말을 그 당시에 했었다.
제대 후 소대원 하나가 부상당해서 대구 육군통합병원에 면회 갔다가 많은 부상병들을 보면서
참 가슴 아팠던 기억이 난다.
김 하사님이 떠났지만 나의 군대생활은 점점 더 강도를 더해 갔다.
2013.2.14
[재미없는 이야기 계속/ 제3화: 북쪽으로 온 사나이]
첫댓글 참 가슴앞픈 사연들입니다,청현 선생님 수고하셧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십년이 지나도 상처로 남아있는 일중 하나입니다~
군 뿐만 아니라 그당시에 기본적 통솔 수딘이 구타였습니다 국민학교때 시함쳐서 60점 아래 되면 하나틀리면 한대씩 선생 지도 몰라서 동아전과 펴놓고 산수 풀면서 ㅎㅎ 청현선생님 고생많으셨습니다
^*^전 초등학교 5학년때 손등을 때리던 백명지 여선생님을 기억합니다.
맞아도 기분좋았던 것은 이쁜 선생님에게 첫사랑을 느꼈는지 모르겠습니다~ㅋ
푸하하 청현 선생님의 첫사랑은 아픔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역시 비슷비슷한 경험입니다. 무척 가슴아프고 공감가는 내용입니다. ()
^*^네~~스님!!
언젠 암자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다음 이야기도 기대만땅입니다 ㅋㅋ
^*^넵~~ 열심히 한번 또 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