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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다. 히브리어로 하야 아세르 하야라고 부른다. 엘로힘의 어근은 엘이며,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그리고 야훼라는 이름의 근원은 아도나이에서 시작된다. 아도나이도 하나님이라는 의미다. 히브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하여 성경을 기록할 때 공란으로 했다고 하며, 칠십인경을 만들 때 YHWH라고 표기했는데, 알렉산드리아 지역에 살았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알파벳 Adonai의 표기에서 a와 ai 를 YHWH에 붙여서 YHaWHai(야훼)로 부르면서 야훼라는 이름이 등장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에 기록한 성경 원본은 공란이었을 것이며, 이후 사본으로 필사할 때 야훼(ְהוָֽה)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모세가 출애굽기 3장 13-14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나는 스스로 있는 자(개역개정)』라고 하셨다. 히브리어는 하야 아세르 하야이다 하나님의 이름(여호와)이 『하야 아세르 하야』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하야께서 나를 보내셨다 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야 아세르 하야를 줄여서 하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야는 사전에서는 영어로 be동사에 해당되는 ~이다(존재) 라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완료도 아닌 미완료도 아닌 진행형의 존재라는 것이다. 사전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의미이다.
그러나 구속 사역적인 의미를 생각해야만 알 수 있다. 하야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이름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육체로 오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오시므로 하야 아세르 하야인 것이다.
하야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하야는 파자를 하면 알레프 즉, 은혜의 창으로 오셔서 권능의 말씀으로 마치시고 다시 은혜의 창으로 돌아가는 하나님이시다. 두번째 하야는 예를 들어 아담이 몇 년을 향수하였더라 에서 향수하였다는 말이 하야다. 알파벳은 바브 요드 헤 요드 바브이다. 양쪽 끝에 바브가 있는데, 세상에 말씀의 은혜로 들어왔다가 말씀의 은혜로 나오는 것이다. 물질세계에 잠시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을 향수하였다는 말이다. 요드는 하나님의 권능의 손을 의미한다. 출애굽기 6장 7절의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이해할 수 있다.
하야 아세르 하야라는 말에서 처음과 끝의 하야(하나님 나라의 하나님과 세상 가운데 오신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이다 라는 의미가 된다.) 가운데, 아세르가 있다. 알파벳의 철자는 알레프 쉰 레쉬가 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분리된 것을 의미한다. 분리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과 세상으로 분리되는 것이 모두 같은 의미의 분리(바라)다. 히브리어 바라는 창조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나, 이면적으로는 분리된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야와 하야 사이에 아세르가 있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세상으로 부터도 분리되는 것이다.
“하야 아세르 하야”에서 뒷부분의 하야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에서도 계셨다고 증언한다. 왜 세상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는가? 그의 백성인 범죄한 천사들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범죄한 천사들은 첫사람 아담과 함께 육의 몸으로 물질세상에 왔으며 그들은 회개하여 의의 몸을 입고 마지막 아담과 함께 보좌의 우편에 앉게 된다. 땅의 그리스도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은 보좌의 하나님을 아버지라 한다. 누가복음 3장 3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보면 아담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비록 여호와 하나님이지만 세상에 피조물보다 먼저 나셔서 첫사람이 되셨고 마지막 아담으로 부활하셔서 첫 열매가 되셨다.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면 땅과 하늘이 하나로 충만하게 된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하늘의 군대와 땅의 군대를 다 이루셨으며 안식에 들어가셨다. 이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 모든 것이 안식으로 들어갈 것이다.
성도는 첫사람 아담의 흔적도 있고 마지막 아담의 은혜도 있다. 육체 속에 죄에 대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옛사람이 있으며 심령 속에 새생명으로 나게한 새사람도 있는 것이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그리스도)이 있으나 남자와 여자로 분리된 후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찾는 종교심(사륵스) 이 남아있어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자도 있고 깨닫지 못하는 자도 있는 것이다. 옛사람은 율법 속에 있으나 새사람은 성령 속에 있는 것이다. 여전히 죄인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의인이 된 것도 아니다. 다만 성도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우측 강도와 같은 자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란 무엇인가? 그게 바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인 것이다. 세상에서 짓는 죄의 문제가 핵심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깨달으면 날마다 죽노라가 고백된다. 첫사람 아담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마지막 아담의 모습이다.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을 다 이루신 것이다.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창세기부터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귀절들이 많이 있다.
창세기 1장 1절 베레쉬트 라는 말이 등장한다. 베레쉬트는 베와 레쉬트의 합성어 (접두형전치사+여성 단수 명사)이다. 여기서 베(בְּ)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레쉬트는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질서적인 순서를 의미한다. 레쉬트를 분해해 보면 로쉬רֵאשִׁ֖와 이트ית로 되어있다. 그리고 접두사 베와 이트가 결합된 바이트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로쉬는 우두머리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의 우두머리라는 것이다. 레쉬트에서 레는 머리에 해당하며, 알렙은 신을 나타내며, 쉰은 이빨, 요드는 손, 타우는 (십자가의) 표시를 나타낸다. 머리이신 하나님이 이빨을 드러내고 손으로 표시하는 우두머리라는 것이다. 우두머리이신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우두머리인 첫사람 아담이 하나님 나라에서 이 땅으로 데리고 와서 마지막 아담이 다시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을 떠난 자들은 범죄한 자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 되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은 곧 첫사람 아담을 의미한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마지막 아담의 표상이다. 첫사람 아담은 죄의 몸을 주기 위해 사람으로 태어났고 마지막 아담은 죄의 몸이 죽고, 부활하여 하늘로 부터 태어나는 몸을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 첫사람 아담은 마지막 아담의 흔적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아담은 첫사람 아담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첫사람 아담은 여인의 후손에 대한 약속으로 말씀하신 가죽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그 가죽 옷은 마지막 아담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옷이 된다. 마지막 아담은 죽어야 할 첫사람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죽음을 나타낸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분은 하나님 나라에 있는 자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가 될 것이다. 천사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라고 말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천사를 창조하실 때 천사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범죄한 천사의 경우 하나님이 세상의 물질세계에 가둠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말은 세상에 던져진 자들이 하나님께 대적하여 이세상에 온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자가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말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영들이었는데, 물질세계에 갇힘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졌으나, 그들에게 종교심이 있어서 땅을 갈듯이 깊이 묵상하는 자가 있어서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원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는데,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범죄하므로 형상이 사라졌으나, 이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교회에서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죽었던 영이 살아나서 영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것이다.
창세기 2장 1절『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라는 말은『하늘의 군대와 땅의 군대가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다 이루다』라는 말은『완성하다, 마치다』 라는 것이다. 창세기 2장 2절에서『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하나님께서 지으시던 일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물질세계에 하나님의 군대를 재편성 완료하셨다는 것이다. 창세기 2장 3절에서『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조하시며, 만드시던 일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천사들을 재편성하시는 것이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못한 천사들은 그 옷을 벗기고, 흙속에 넣어서 사람이 되게 하셨는데, 이 사람이 땅의 군대가 되는 것이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Thus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host of them. 라는 말은 하늘의 군대는 범죄한 천사들을 제외한 천사들로, 이 물질세계의 군대는 범죄한 천사들로 창조가 끝났다는 것이다.『and all the host of them.』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군대와 물질세계의 군대를 말한다. 하나님이 그들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만물은 이 땅에 있는 것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도 적용된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의 만물은 물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떠나 물질세계에 창조된 인간들에 대해서 성경에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유다서 1장 6절과 베드로후서 2장 4절에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못한 천사들을 말한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지옥이라는 곳은 다름 아닌 물질세계이고 흙이라는 육체를 의미한다. 베드로전서 3장 18-19절에서『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옥이라는 말은 육체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모든 육체 가운데 있는 영들에게 가셔서 문을 두드리고 말씀을 전한 것이다. 그러나 문을 열어주지 않고 또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가 대부분인 것이다. 노의 시대에 방주에 탄 여덟 혼 외에는 구원받는 자가 없다는 말처럼 구원받을 자가 극히 적다는 말이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5장 6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레위기 25장 23절에서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창세기 2장 1절은 창세기 1장에서 창조의 여러가지 하나님의 일들을 요약하여 설명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2장 2절에서『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성경에서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부분도 엄밀히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하나님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땅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이 땅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영이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서 태어난 하나님의 군대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사탄의 미혹으로 사탄을 따라갔으니, 사탄을 따라간 자들은 사탄의 군대가 된 것이다.
창세기 2장 7절『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네페쉬 하이)이 되니라』 생령은 네퓌시하이로서 살아있는 혼이다.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들려면 물이 필요하다. 흙이 물을 만나는 것이 세례와 같은 것이다. 흙은 물에 풀어지고, 하나님이 영을 불어넣으셔서 사람의 형태로 태어나는 것이 바로 세례라는 말이다. 세례는 첫사람 아담의 창조와 출애굽에서 홍해를 건너는 것과 성도의 심령 속에서 거듭나는 것이 동일한 사건인 것이다. 범죄한 영들이 물질세계에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이미 첫사람 아담(그리스도)을 통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 것은 곧 물에서 죽는 것이요, 세례이며, 구원의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범죄한 영들이 물질세계에 태어난 것은 심판이지만, 구원의 시작인 셈이다.
생령이라고 번역된 것은 살아있는 생명체로 번역되어야 한다. 따라서 창세기 1장에서 물고기, 땅의 동물로 표현된 것은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동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사실을 동물을 비유해서 표현하시고자 함이 있는 것이다. 같은 네피쉬하이 이지만 동물에게는 하나님이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시지 않았다. 생기를 불어 넣는 것은 성령을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주시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영적 생명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네피쉬하이라 하더라도 물고기나 땅의 동물은 영적 생명체가 아니라 단순히 생명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첫사람 아담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의미한다. 자신을 흙 속에 투영한 것이다. 그러나 물고기나 짐승은 하나님 나라에서 땅으로 보내진 범죄한 천사의 영이 흙속에 갇힌 모습을 나타낸다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땅으로 하여금 짐승을 내게 하는 것은 땅으로 표현된 물질세계 속에 갇힌 존재라는 것이다. 짐승에 대해서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기는 것은 파충류(주로 뱀) 등 기어다니는 것을 표현한다. 땅과 하나가 되는 자(부정한 자)를 의미한다. 육축도 종류 대로 만들어졌다. 굽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되새김질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으로 나뉜다. 굽이 있고 되새김질 하는 육축은 정한 동물, 그렇지 못한 동물은 부정한 것이라고 한다. 되새김질은 돌이켜보고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깨달아라는 의미를 갖는다. 깨닫고 돌이키는 자는 범죄하여 하나님 나라로부터 이 땅으로 이주한 것(나그네)을 깨닫는 자가 되는 것이다. 땅의 짐승(베헤마 בְּהֵמָ֥ה)으로 표현된 것은 땅의 가축이다. 가축은 대체로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을 하는 짐승들이다.
창세기 2장 15절『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개역개정)
그 사람은 아담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을 지으셨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아담은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로마서 5장 14절에서『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하나님의 형상이 육체 가운데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요한복음 1장 51절에서『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이 말씀은 예수님이 나다니엘과 대화 중에 하신 말씀이다. 같은 내용의 말씀이 있다. 창세기 28장 12절에서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영들이 첫사람 아담으로 통하여 이 땅에 내려오고, 마지막 아담을 통해서 올라간다는 말씀이다. 아담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왔지만, 흙에 갇히므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영(spirit)이 죽은 혼(soul)의 상태가 된 것이다.
창세기 2장 21-23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첫사람 아담은 마지막 아담의 표상이다.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이말은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와를 이끌어내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떠난 자를 다시 하나님께로 이끌어가는 모습인 것이다.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바나)』바나는 건축하다 라는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표상인 첫사람 아담으로부터 여자(범죄한 영)가 벗어남을 의미한다. 육체로 태어난 생명체들은 한정된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인간들은 한정된 생명체를 통해서 영원한 것이 있음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깨닫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이다. 영원한 생명은 모든 만물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에게서 여자를 만드신 이유는 범죄한 영들을 이 세상에 인간이 되게 하시고, 세상에 살다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왜 이 세상에 있게 되었는지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로 복귀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는 말은『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군대가 곧 하나님 나라의 군대』라는 것이다. 창세기 2장 1절에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라는 말은『하늘의 군대와 땅의 군대가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다 이루다』라는 말은『완성하다, 마치다』 라는 것이다. 창세기 2장 2절에서『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하나님께서 지으시던 일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물질세계에 하나님의 군대를 재편성 완료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하늘에 있을 때에도 나의 지체이고, 이 땅에서도 나(아담)의 지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내(마지막 아담)가 너희들을 데리러 올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아담(그리스도 표상)에게서 지체(범죄한 영들)를 끄집어내었다. 그 지체가 여자라 불리었다. 남자는 아담이 아니라 남편이라는 의미다. 남편(남자)라는 말은 반드시 다른 한쪽(아내)이 있어야 하는 존재다. 결국 남편은 아내와 함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담은 지체가 떨어져 나간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되기 위해서는 아내와 만나야만 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라는 것은 한 지체가 둘로 나뉘어졌음을 말하는 것이지, 남녀가 있었는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천사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창세기 2장 24-25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앞에는 남자로 되어있고, 뒤에는 아담으로 되어 있다. 남자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여자는 하나님을 떠난 영들을 의미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남자와 여자가 되지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남녀가 하나가 되어 다시 분리되기 전의 아담(그리스도의 표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결혼의 제도를 통해서 이 비밀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서 5장 30-32절에서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교회는 영들을 의미한다.
창세기 3장 1-4절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뱀이 여자에게 접근해서 미혹한다. 왜 여자인가? 여자는 첫사람(아담)으로부터 분리된 존재이다. 그래서 하나가 되어야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뱀이 여자에게 미혹하는 것은 사탄이 하나님 안에 있는 영적인 존재를 미혹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되는 자가 사탄의 미혹으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은 곧 영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도 있었으며, 땅에 있는 성전에서도 나타났다. 하나님 나라에서 있었던 것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천사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땅에서 나타난 것은 거짓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성령을 따르지 않고, 육을 따를 때 일어나는 것이다.
마태복음 4장은 예수님이 마귀(사탄)의 시험을 받는 내용이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다. 마귀의 시험에 넘어져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내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범죄하였으며, 범죄한 하와가 주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받아 먹으므로 범죄한 결과가 된 것이다. 이것은 하와로 인하여 스스로 알면서 죄인이 된 것이다. 죄인을 위해 죄인과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세상에 첫사람으로 태어나 죄의 몸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부활의 영광으로 나오셨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가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은 죄의 몸에 대해서 죽고 새생명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첫사람 아담이 죄인들과 같이 세상에 들어오고 마지막 아담과 함께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모습인 것이다.
『남편에게도 주매』라는 것은 과일 하나를 준다는 것이 아니다. 여자는 하나님 나라의 지체를 의미한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지체들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의를 이루어 보겠다고 결심한 내용을 그리스도에게 고백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나를 통하여 천사들이 내려가고 나를 통하여 올라갈 것이라는 약속을 하시는 것이다. 남편이 먹었다는 것은 이 약속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남편이 먹었으므로 죄의 몸으로 세상에 먼저 태어나서, 그 뒤에 오는 모든 영들의 몸을 만들어주고, 마지막 아담이 회개하는 모든 영들에게 영의 몸을 만들어주어서 원래 있던 곳으로 데려간다는 것이다. 사탄은 영들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지만 둘째 사망에서 건져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영들은 그 사실을 믿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런데, 아무나 데려가시지는 않는 것이다. 오직 새언약을 체결한 자만 데려가시겠다는 것이다. 처음에 발생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그 탐욕이 죽으라는 것이다.
창세기 3장 17-19절『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이 흘러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개역개정)
전체적인 의미는 아담은 첫사람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십자가의 저주를 하시는 것이다. 가시덤불과 엉겅퀴의 심판이 내려지고, 고통의 수고를 통해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의 생명 열매를 맺게하라는 메시지이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아내가 한 말이 무엇인지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에게 한 말은 그동안 상황을 설명했을 것이다. 여자(천사)가 남편에게『사탄의 말을 듣고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떠나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그리스도)가 여자가 주는 열매를 먹었다.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여자처럼 사탄의 미혹이 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영들이 들어가야 하므로 남편(그리스도)이 아내(영들)를 데리고 이 세상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들어간다는 것은 죄의 몸이 되는 것이다. 단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열매를 받아 먹고, 죄를 지었다면 그리스도의 표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표상은 죄를 짊어진다는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 나라에서 세상으로 들어옴으로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땅은 저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
창세기 3장 20-21절『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어머니(엠 אֵ֥ם)는 히브리어 철자를 보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칼빈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엄마라고 했다. 여자는 아담이 가지고 있는 언약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녀가 뱀을 취하므로 흙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아담은 영적으로 죽은 여자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하겠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첫사람 아담과 함께 세상에 온 영적으로 죽은 지체들을 마지막 아담이 생명을 주어 살리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언약이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여자들(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하여 세상에 온 영들)은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살린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영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으로 들어오게 되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담이 여자를 하와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담과 하와가 되었다는 것은 다시 문짝이 하나가 됨을 말한다. 이 말 속에는 마지막 아담이 자기의 영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약속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구원받을 영들을 산자라고 하는 것이다. 하와는 영들을 대표하고, 모든 이 세상에 오는 영들은 마지막 아담을 통해서 구원받을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게 된다.
가죽옷은 레위기 1장 6절에서『그는 또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것이요』 라고 되어있는데, 이와 연계되어 있다. 가죽옷을 히브리어로 가죽(오르)의 옷(코트노트)이다. 개역개정에서 가죽이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영어성경의 skin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된 것 같다. 그러나 skin은 살도 된다. 즉 가죽이라는 오르는 레위기 1장 6절의 살 덩어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옷은 번제물의 가죽에 해당된다.
가죽옷(살과 가죽)에서 가죽에 해당하는 오르는 벌거벗음을 면하다 라는 의미다. 5785는 5783에서 유래되었는데, 벌거벗다 라는 의미이며 벌거벗은 살을 나타낸다. 벌거벗은 살은 육체이며, 영이 갇힌 곳이기도 하다. 영이 갇혔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들의 영이 옥에 갇힌 것이다. 베드로후서 2장 4절에서『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세상에 던져진 자들은 다 벌거벗은 자들인 것이다. 첫사람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인간들은 다 이와 같은 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벌거벗었음을 면하기 위해 옷을 입히는 것이다.
첫사람 아담으로부터 받은 살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여인의 후손)에 대한 흔적이 들어있지만,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지금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살(육체)은 종교심(헬라어 사륵스)을 나타낸다. 그래서 대부분 인간들은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을 찾고 있다. 자연숭배, 정령숭배, 우상숭배들이다. 하나님은 이런 영적으로 온갖 더렵혀진 종교심, 즉 가죽을 벗겨버리고 살을 각을 내어 태워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참 신이신 하나님을 찾는 살로 옷을 다시 입히시는 것이다. 이전의 것(옛사람)은 불로 태우고 새로운 옷으로 입는다. 이게 구원받은 자의 가죽옷이다.
가죽옷에서 옷(코터노트 כָּתְנֹ֥ות )은 긴옷이다. 제사장들이 입는 세마포를 의미한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옷이라고 한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가죽(5783오르 עֹ֖ור)에서 5783번은 기본어근;‘벗다’:-벌거벗기우다 라는 의미다. 예수 그리스도는 벌거벗기는 모습이다. 그의 죽음으로 입혀지는 그리스도의 옷을 상징한다. 옷을 지어 입히시는 분은 엘로힘이시다. 가죽은 동물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가죽은 장막에 사용된다. 장막의 덮개로 사용되는 것이 오르이다. 가죽은 죽음을 전제로 만들어진다. 누군가 죽는 것이다. 그래서 가죽옷은 유월절 어린양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양들의 목자이시다. 예레미야 50장 6절에서『내 백성은 잃어 버린 양 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산에서 언덕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
이사야53장 6절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그래서 예수님이 미혹되어 그릇된 방향으로 간 영들을 위하여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시는 것이다. 이 의미는 예수라는 이름 속에 있다. 예수는『여호와가 구원하다』라는 의미다. 여호와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와서 자기 백성(영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여자가 가죽옷(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하와가 되어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생명을 낳는 산자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3장 18절에서『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그리고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서 말한다.『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여자라는 명칭은 돕는 베필을 말한다. 돕는 베필(네피쉬하이)은 쌍의 한쪽이 필요한 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다. 즉 하나님 나라로부터 이 땅으로 들어오는 영들을 말한다. 그들은 아담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네피쉬하이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말한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만물)은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35-39절에서『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부활을 설명하면서 모든 생명체는 부활한다는 것이다. 그 영광이 다르지만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여자』라고 하는 명칭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부활을 기다리는 모든 생명체를 말하는 것이다.
창세기 3장 22-24절『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 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이 사람의 히브리어 성경은 하아담이다. 하는 정관사이고 아담과 정관사가 있는데, 정관사가 있으므로 이름으로서 아담은 아닌 것이다. 이름에는 정관사를 붙이지 않는다. 그런데, 창세기 2장 5절, 7절, 8절, 15절, 16, 18절에서는 사람으로 번역되다가 2장 19, 20절, 21절에서는 이름인 아담으로 바뀌었다. 사람으로 번역된 것은 첫사람 아담인 그리스도이시고, 이름의 아담은 남자인 아담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자가 분리된 존재인 남자 아담인 것이다. 왜 이렇게 다르게 번역했는가? 번역의 오류다. 하와가 범죄했는데, 하나님이 하아담(그 사람)을 쫒아냈다. 하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그 이유는 아직 하와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분리되기 전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죄의 몸을 주기 위해 세상에 오신 첫사람인 것이다. 에덴에서 사람을 내보낸다는 말은 하나님이 스스로 첫사람(그리스도)이 되어 마치 쫒겨나는 모양으로 그려진다.
창세기 5장 1-2절 계보, 아담(אָדָ֑ם)은 120번과 121번이 있다. 아담 자손의 계보라고 하는 아담은 121번으로서 첫사람 아담이라고 했는데, 의미상으로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는데, 그들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5장 2절에서 사람이라고 분명히 말해준다. 아담이라고 표현되므로 마치 아담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의 아담은 120번인데, ‘붉으스름한’, 즉 ‘인간’(개인적,또는 종으로서의 ‘인류’ 등) :- x또 다른, +위선적인, +동류의, x낮은, 사람(비열한, 낮은), 인간으로 표현된다. 창세기 5장 3절(아담은 백삼십세에 …아들을 낳아)에 등장하는 아담은 사람 중에서 남자에 해당하는 아담인 것이다.
첫사람 아담은 엄밀히 사람인 것이다. 남자와 여자로 분리되기 전의 사람이다. 이 첫사람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그리고 첫사람으로부터 남자(이쉬)와 여자(이샤)가 분리되는 것이다. 이 이쉬를 아담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즉 이 아담은 남자인 아담인 것이다. 남자인 아담은 세상에 태어난 모든 남자를 대변하고 여자인 하와는 세상의 모든 여자를 대변한다. 그들을 통해서 인류가 번식하고 확산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계보는 첫사람 아담의 계보가 아니라, 남자인 아담의 계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בִּדְמ֥וּת אֱלֹהִ֖ים עָשָׂ֥ה ) 접두어 베(בְּ)가 붙어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베레시트와 같은 개념이다. 베는 하나님의 집(장소)이라는 의미다. 영어의 in에 해당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모양)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모양이라는 말보다 형상이라는 말이 이해력을 높혀줄 수 있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 비드뭍(기본형:데뭍:1823)은 모양 닮음으로 되어있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했는데, 형상과 모양은 우리말 사전에서는 별로 차이가 없다. 외형적인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형상(영어:image)은 특별한 속성을 지닌 존재(그리스도)이라고 말을 할 수 있고, 모양(영:likeness)은 형상을 가진 자와 질적으로 동질성을 지닌 존재라고 말을 할 수 있다. 몸의 외형적 형태가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 같다는 말이다. 원본과 사본이 같다는 표현이다. 같다는 말은 동일한 효력을 발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외형적인 어떤 사물에 대한 형상과 모양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모양)이 육체로 나타난 첫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영들이 아담 안에서 이 세상에 들어오는 것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다. 다시 오시는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마지막 아담)이시다. 로마서 5장 14절에서『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창세기 6장 5-8절『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와인나헴) 마음에 근심하시고』와인나헴(기본형은 나함)은 한탄하다 라는 의미 외에 위로하다 라는 의미도 있다. 후회와 위로는 아버지의 사랑이 담겨져 있다. 하나님은 범죄한 영들을 흙속에 가둔 것이 참으로 후회스럽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징계하는 것이 후회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징계를 했지만 위로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들에게 죄의 몸을 주어 육체 속에 가두었지만, 하나님이 다시 영들에게 의의 몸을 주어 하나님 나라로 복귀시키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곧 새창조를 의미하며, 육의 몸을 벗고 영의 몸을 입는 것이다. 그 작업이 곧 홍수라는 것이다. 홍수는 심판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홍수의 결과 방주에서 구원받는 자들이라는 의미도 된다. 모든 인간은 홍수로 죽어야 하지만, 방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죽음에서 부활로 나아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육의 몸은 죽도록 하고, 영의 몸으로 부활하는 은혜를 베푸신다.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하나님이 창조한 사람과 동물들은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떠난 혼적인 존재(살아있는 생명체)로 비유된다. 사람은 종교심이 있어서 신을 찾는 마음이 있지만, 동물들은 그러하지 못하다. 사람일지라도 비록 종교심이 있지만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며, 종교심이 없는 동물로 표현된 자들도 역시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원인은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영들에게 책임이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었기에 가슴이 아프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흙속에 가두어 한시적인 생명체를 만든 것을 후회하시고 한탄한다는 말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감옥에 가두었다면, 참으로 후회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이를 다시 새창조로 이어가서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신다는 말이 된다. 여호와(하야 아세르 하야) 이신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오시고 다시 하나님 나라로 데리고 가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창세기 6장 17절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바사르(육체)는 하나님의 영이 없는 존재를 의미하며, 땅에 있는 것들이다. 기운이라고 했는데, 루아흐는 영이다. 하이임은 생명이라기 보다 살아있는 이라는 의미다. 살아있는 영의 바사르는 사람이지만, 짐승과도 같은 존재를 의미한다. 땅에 있는 존재들은 하나님 나라를 떠나서 땅에 있는 존재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존재들이라는 말이다. 이들의 샤하트(부패한) 것을 쓸어버리겠다는 것이다.
홍수에 대해서 베드로전서 3장 20-21절에서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푸쉬케:혼)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쉬네이스데)의 간구니라』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팔이다 라는 것이다. 쉬네이데스(쉰:함께+네이데스: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보는 마음이다. 이 마음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례이다. 세례는 하나님과 함께 보는 마음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이라고 번역했는데, “하나님과 하나되는 마음에서의 간구”라는 말이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이 된다. 홍수는 세례와 같은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홍수의 심판이라기 보다 홍수 세례인 것이다. 물에서 죽고 하늘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출애굽 당시 홍해를 건널 때 이스라엘 백성이 세례를 받은 것이다.
창세기 7장 6-9절『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노아의 홍수는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영들이 첫사람 아담(그리스도)과 함께 물질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비가 사십 주야 땅에 쏟아졌다. 그리고 방주는 흑암이 된 세상에 물 위를 정처없이 떠 다니는 모습이다. 이는 창세기 1장 1-2절의 모습을 보여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그래서 방주에 들어간 노아는 마지막 아담(그리스도)과 같은 모습이다. 방주의 역청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다. 모든 사람이 죄악으로 죽어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살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방주에 들어간 노아는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는 자가 되는 것이다.
창세기 7장 13절 『곧(에쳄)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베에쳄(בְּעֶ֨צֶם 기본형은 에쳄) 에서 에쳄은 뼈를 의미한다. 내 뼈중의 뼈요 할 때 그 뼈이다. 그래서 곧 이라는 말이 잘못된 번역이다. 뼈의 그날에 라고 해야할 것이다. 의미는 똑같다는 말이다. 같은 곳에서 분리되었으므로 같다는 말이다. 그래서, 뼈는 같다라는 의미다.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도 같다는 말이다. 첫사람 아담은 죽어야 할 몸을 나누어 주었으며, 마지막 아담은 그 죽어야 할 몸으로 인해서 세상의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 날은 첫사람 아담이 세상에 온 날도 심판이며, 마지막 아담도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은 것이다. 심판은 곧 새생명을 창조한다. 이 세상에서 심판을 받지 않은 자는 육체를 벗은 후에 둘째 사망에 처해질 것이다.
출애굽기 12장 17절에서도『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에쳄)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이 날을 지킬지니라』에쳄이라는 말은 같다 라는 말이다. 무엇이 같은가? 이 날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떠나 이 세상에 온 하늘의 군대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이 하늘의 군대를 이끌었던 그 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을 군대라고 표현했으나 사실을 하나님 나라를 떠난 탕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탕자들을 이 세상 죄 가운데서 나오게 하신 그 날을 의미한다.
방주에 들어가는 날은 육으로는 죽고, 영으로는 태어나는 날이다. 칠일이 되는 날 즉 안식이 되는 날에 방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칠일은 창세기 2장 1절에서 하늘의 군대와 땅의 군대가 이루어지는 날이다. 바로 죄 가운데 있는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그 날을 의미하는 것이다.
뼈중의 뼈, 즉 하나되는 날은 혼인잔치로 비유된다. 혼인잔치 날 방주에 들어간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마태복음 25장 6-10절에서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혼인잔치에 대해서 문이 열리는 자와 문이 닫히는 자로 나뉘어진다.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요한계시록 19장에서도 같은 표현이다. 구원의 기준은 기름(성령)이다. 기름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오늘날도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성령이 없는 말씀은 심판이 될 뿐이다.
16장 1-3절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개역개정)
여기에서 말하는 주제는 언약에 관한 이야기다. 하나님이 아브람과 맺은 언약은 땅과 자손인데, 사래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아브람이 하갈을 취하여 언약의 자손으로 이어가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갈이 임신을 하자 하갈이 사래를 핍박하고, 사래가 다시 하갈을 광야로 내어쫒는 이야기가 이후에 전개된다. 하갈은 이주하다, 도망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21-30절에서 사래와 하갈에 대해서 율법과 약속으로 비유로 말한다.『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하갈은 옛언약, 육체를 따라 자녀를 낳고(이스마엘), 사라는 새언약을 상징하며 약속의 자녀(이삭)를 낳는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이스마엘이 먼저 태어났다. 아브람이 75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데, 10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하자 사래가 하갈을 아브람의 첩으로 준 것이다. 10년이 되었을 때는 아브람은 85세, 사래는 75세였다. 10년이 지나므로 아브람의 나이가 86세로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분명히 자녀의 약속을 하셨는데, 10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자, 그들 나름대로 해석을 해서 아이를 갖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으로 추정된다. 창세기 15장 4절에서『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아브람의 씨는 사래 외에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상속이 끊어지지 않으려는 인간적인 생각인 것이다. 그래서 일부다처제가 나온 것이다.
창세기 3장 6절에서『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라카)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나탄) 그도 먹은지라』이 말은 창세기 16장 3절과 비유하면『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라카)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나탄)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것은 사래가 하갈을 데리고 가는 것과 같고, 남편에게 주매 라는 말과 아브람에게 하갈을 주는 것과 같은 의미다. 하갈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와 같은 의미로서 율법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담과 아브람은 그 열매를 받아드린다. 아브람은 첫사람 아담(그리스도)을 의미한다.
교회 사람들은 아담이 하와가 주는 열매를 먹으므로 원죄가 생겼다고 믿는다. 그래서 온 세상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로마서 5장 14절에서『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아담은 마지막 사람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 20-21절에서『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라고 언급했다.
이 말은 죄를 통한 죽음(십자가)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연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첫사람 아담은 마지막 사람 아담과 연계선상에 있는 것이다. 첫사람 아담은 죽어야 하는 옛사람인 것이다. 마지막 사람 아담은 부활하신 새사람인 것이다. 그 옛사람의 죽음은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아담은 바로 같은 그리스도 라는 사실이다. 첫사람 아담과 함께 세상에 온 영들이 흙속에 갇혀 인간이 되었고, 그 인간 속에는 옛사람의 흔적이 있으며, 마지막 사람 아담은 그 옛사람의 흔적을 끊게 될 죽음을 짊어진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아버지를 떠난 탕자에게 아버지 스스로 그 죄값을 짊어진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그 첫사람 아담은 죄의 원흉인 원죄를 전해주는 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첫사람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 아담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는 자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떠난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
로마서 6장 4-7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하와는 교회를 대변하고 있고, 아담은 하와가 주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야 할 하나되는 자가 된다. 교회를 위해 죽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교회와 한 몸이 된 그리스도인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는 것이다. 만일 아담이 하와가 주는 열매를 먹지 않았다면, 둘은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가 되어야 죽고 부활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게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인 것이다.
에베소서 5장 31-32절에서『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요한복음은『교회를 내게 주신(나탄) 자』로 표현한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나탄)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7장 6절『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17장 9절에서도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17장 24절에서도『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나열되어 있지만, 결국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며, 성도의 심령 속에 있는 옛사람과 새사람과의 관계이기도 하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것은 성도의 심령 속에 있는 옛사람을 자극하며, 스스로 율법을 통해서 판단하려고 하는 모습과 대비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자는 율법주의에 빠진 자와 같은 모습인 것이다. 모든 성경의 이야기는 다름 아닌 나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영적인 생명을 보지 못하고 육적인 눈으로 율법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에 대한 것이다. 하와가 뱀이 주는 선악과를 먹은 것은 사래가 언약을 생각하지 많고 자신의 육적인 생각을 따른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횃불언약)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은 율법적인 사고로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수를 믿고 죄의 대속을 받았지만, 율법에 비추어 날마다 죄를 짓는지 않짓는지 살펴보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죄를 지으면 예수의 피로 용서받으려고 하는 행동을 계속하게 된다. 이것은 율법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죄와 함께 죽은 자임을 날마다 기억해야만 한다. 내 스스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옛사람의 모습을 가진 자는 예수와 함께 죽은 자가 아닌 것이다. 날마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은 자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인간은 죄에 대해서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창세기 32장 31절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쪠라)』야곱이 야콥강 가에서 하나님과 겨룬 후에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쳤으므로 그가 절뚝거렸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부르셨다. 절룩거린다는 말은 신체 불구라는 말보다 환도뼈 대신에 지팡이(짝)를 얻게 된다. 지팡이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함께 나아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에 온 자를 의미하고, 지팡이는 그들을 데리고 온 첫사람 아담(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1장 1절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같은 개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창세기 1장에서 성전의 머리되시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로부터 물질세계를 분리하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출애굽기 1장 1절에서 야곱이 그들의 권속을 데리고 애굽으로 왔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창조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영들을 하나님(첫사람 아담)이 직접 데리고 세상으로 오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출애굽기 1장 15절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쉬프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푸아)라 하는 사람에게 일러』 산파는 아들을 낳도록 돕는 자를 의미한다. 람얄르돗(לַֽמְיַלְּדֹ֖ת 3205기본형은 야라드)이다. 기본어근;‘새끼를‘낳다’ 사역동사로‘낳게 하다’ 의학적으로‘산파의 일을 하다’ 특히‘혈통을 보이다’:- 낳다, 낳게하다, 출산(【일】), 태어나다, (어린애, 새끼)를 낳다(낳게 하다), 자라다, 새끼, 어린아이, 오다, 해산하다, 알을 까다, 해산의 고통을 겪다, 산파(의 일을 행하다), 계통을 선언하다, …의 아들이 되다, 산고하는 여인
산파가 두명이 소개된다. 두명의 산파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산파로 소개되는 자는 두명인데, 쉬프라(8236)는 8235와 동일함;한 이스라엘 여인 ‘십브라’:로 소개하며, 8231에서 유래;‘맑음’:-장식, 단장, 8231은 기본어근;‘반짝반짝 빛나다’, 즉 상징적으로 ‘아름답다’(사역동사로 ‘아름답게 만들다’):-×아름다운, 훌륭한 이라는 의미를 ㅡ갖는다. 부아(6326)는 ‘번쩍번쩍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찬란함’
두명의 산파는 자리에서 해산을 도우는 두 돌을 상징한다. 첫사람 아담으로서 그리스도와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리스도인 것이다. 돌은 그리스도이시다. 첫사람 아담은 죽어야 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마지막 아담은 십자가에서 죽은 후 부활하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 쌍돌의 자리에서 아들을 낳는 것을 돕는 자인 것이다.
하아하트(첫번째) 시프라 웨쉠(이름)에서 하아하트를 개역개정에서는 사람으로 번역했으나 첫번째인 자(첫사람 아담)인 것이다. 하세니트(두번째)도 개역개정에서는 사람으로 번역했으나 두번째 자(마지막 아담)인 것이다.
출애굽기 2장 15절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우물에서 물은 생명의 말씀을 의미한다. 광야의 사막에서 물을 준다는 것은 어둠에 있는 자에게 빛을 주는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사야 41장 17절에서『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낯을 피하여 라는 말은 면전(네게드)으로 도망하여 라고 되어있다. 애굽에서 40년을 살고(율법 속에서 삶) 도망하여, 광야에서 쉐바를 만나서 40년을 살게된다. 그리고 모세는 다시 백성을 이끄는 자가 된다. 이 내용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첫쩨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영들로 인해 하나님이 직접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첫사람 아담(그리스도)로 세상에 와서 살다가 다시 에덴동산으로 들어가고(하나님 나라로 복귀하시고) 다시 에덴동산에서 쫒겨나(하나님 나라에서 세상 속으로) 남자가 되어(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언약의 씨를 가지고 세상에 들어가서 마지막 아담으로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이다.
둘째, 모세(첫사람 아담의 그림자)가 애굽 왕이 남자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으로 인해 갈대상자(하나님의 형상)를 타고 애굽(세상)으로 들어가서 바로의 공주로 인해 애굽에서 살다가, 다시 미디안 광야를 거쳐 불꼿 속에서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모세(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애굽(세상)으로 들어가 백성을 구출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셋째, 예수님이 헤롯이 남자 아기를 죽이라는 명령으로 인해 애굽으로 피신하고 헤롯이 죽자 애굽에서 이스라엘(나사렛)로 돌아가서 유년기를 보내다가 삼십세의 나이에 하늘로부터 나의 아들이라는 음성을 듣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공생애를 시작으로 세상으로 나와서 전도하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긍휼인 것이다.
넷쩨, 성도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애굽)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사탄의 지배 속에서 살다가(죄악 속에서 살다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심령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이제 세상에 묶여 있는 형제를 구출하기 위해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언약의 씨를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서 첫사람 아담이며, 노아이며, 아브라함이며, 모세이며, 다윗이며,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세상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심어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
요한복음 1장 51절『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이 표현은 창세기 28장 12절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이는 야곱(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고, 요한복음 1장 51절은 예수님이 나다니엘에게 한 말씀이다. 인자는 그리스도이시다. 사닥다리도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범죄한 천사들이 이 땅으로 내려오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로 다시 올라간다는 말이다.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은 같은 그리스도이시다. 이 표현을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생명체)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했다.
로마서 6장 4-6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옛사람은 첫사람 아담이며, 새사람(새생명)은 마지막 아담을 의미한다. 모든 인간은 육체 속에 첫사람 아담의 흔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첫사람 아담의 흔적을 가진 신도 역시 마지막 아담과 함께 죽어야만 하는하는 것.
고린도전서 15장 20-23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다시 살아나사” 에서 “다시”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는 없다. 잠자는 자들은 누구인가?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끊어져 잠자는 자로 표현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첫사람 아담(그리스도)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된 자를 상징한다. 마지막 아담(그리스도)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자를 의미한다. 이 세상의 모든 자들은 아담으로 부터 죽음(육)을 물려 받은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부터 생명(영의 몸)을 물려받은 것이다. 조오포이에데손타이는 살리심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의미다. 조오포(생명)이에데손타이(만들다)에서 조오포의 어근인 조에는 영적 생명을 의미한다. 파루시아는 파라(옆에)+우시아(존재하다:영어의 be동사)의 합성어로서 강림이 아니라, 주님이 내 옆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님의 임재로 표현된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겉사람은 육체를 의미하며 흙으로 만들어진 첫사람 아담을 의미한다. 그러나 속사람은 성령으로 잉태하여 하늘로부터 나신 마지막 아담을 의미한다. 겉사람은 육을 따르는 옛사람을 의미하고, 속사람은 성령의 법을 따르는 새사람을 의미한다. 겉사람이 낡아지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한다.
골로새서 1장 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난 분이 예수님이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아담은 곧 그리스도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영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원래 하나였는데, 그들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그리스도를 떠나고 싶어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물질세계를 만들어 그들이 스스로 의를 이루어보라고 그들을 흙속에 가두어 인간이 되게 한 것이다. 최초의 인간은 모든 악한 영들에게 육체라는 몸을 나누어주게 된다. 그래서 아담으로부터 하와가 분리되어 나온 것 처럼, 영들이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태어나는 것이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본래 하나인데, 나뉘어져서 한 부분이 되는 것이『혼자 사는 것』이 되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태어났는데,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가? 교회 사람들은『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는 말씀으로 인하여 사람을 오늘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동일한 존재로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첫사람은 아담(그리스도의 표상)이다. 그는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기 전의 사람이다. 즉 남자와 여자로 태어난 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주신 영이 죽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2장 24절에서『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여기서 부모는 하나님을 의미하며, 남자는 남자가 된 아담(그리스도의 표상) 여자는 하나님을 떠나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들이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야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이다. 즉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떠난 영은 죽어있다는 것이다. 영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함을 말해주신다.
골로새서 1장 16-17절『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은 첫사람 아담(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래서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이 스스로 흙속으로 들어가 육체가 되신 분이라는 말이다. 만물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첫사람 아담(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장 17절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요한이 본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너무나 놀라워서 죽은 것 같이 넘어졌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본체를 보려면 육적인 몸이 죽어야 함을 말해준다. 단순히 지식이나 신비한 경험으로는 알 수 없는 분이며, 자아가 죽어야 만날 수 있는 분이다. 요한은 찬란하고 위엄 있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두려워하였고 그 앞에서 죽은 자 같이 엎드려졌다. 이러한 현상은 다니엘도 경험하였고, 사도 바울도 경험하였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변화산에서 직접 주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며 엎드렸다.예수님은 엎드러져 죽은 자처럼 되어버린 요한에게 손을 얹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다시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표현을 했다. 알파와 오메가 라는 표현과 같은 말이다. 처음은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아담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죄의 몸을 주기 위해 세상에 와서 마지막 사람으로 십자가에서 그 죽음의 대속을 하셨고, 부활하셔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하나님 나라로 만드시는 것이다. 원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대적한 범죄한 천사들로 인해서 세상에 물질세계로 들어와 범죄한 영들에게 죽어야 할 몸을 만들어주신 분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이루어신 분이다. 알파와 오메가는 히브리어로 알렙프(하나님)와 타우(십자가)이다. 알레프와 타우가 결합된 단어가 에트로서 목적격 조사인 것이다. 목적은 죽음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죽음의 단어는 히브리어로 무트이다. 말씀으로 완성한다는 의미다. 죽어야 하는 몸(예수)로 와서 죽지 않는 몸(그리스도)로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이와 같은 것이다.
성도가 예수로만 알고 있고 그리스도로 넘어가지 못하면, 하나님 아버지는 두려운 분이 된다. 예수로만 알고 그리스도로 넘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죽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사랑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환상이던 꿈이던 만나는 예수님은 육신으로 보는 분이므로 그 분이 두렵게 여겨진다. 그러나 육신이 아니라 영으로 바라보는 자는 그 분이 두렵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도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죄를 대속하러 오시고(첫사람 아담), 영원한 생명을 주러 오신(마지막 아담) 분이라는 말이다.
로마서 8장 3절에서『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요한복음 12장 30-33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 이니라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사탄이 쫒겨난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세상 임금이 쫒겨나면 성령께서 오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8절에서『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성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연합되어 죽으면, 심령 속의 사탄이 쫒겨나고, 그러고 나면 성령이 임하셔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신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다. 그리스도 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구원이라는데도 믿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 죄라는 말이다. 의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여 성부 하나님께로 모든 세상죄를 짊어지고 가셨으므로, 죄에 대해서 자유인이 된 것이다. 심판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오는 것이다. 그 증인이 그리스도이고 성령인 것이다.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아담의 관계를 모르면 죄가 무엇인지, 왜 구원이 필요한지, 그리고 심판을 당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제는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이야기와 연계되어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쪽짜리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에덴동산의 이야기가 신화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첫사람 아담의 실체)만 부여잡고 있다면 알레프에 머무는 신앙이 된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반쪽짜리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운 하나님으로 머물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부활하셔서 하늘에 승천하시고 성도의 심령 속에 성령의 능력으로 임재하셔서 성전으로 오시면 테드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되는 것이다.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인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첫사람 아담으로 태어나고, 마지막 아담으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성도가 부부와 같이 하나가 된다.
요한계시록 16장 1절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15장에서는 자기(옛혼)가 죽어야 성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자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 일곱 재앙이 다 마치기 전까지는 성전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곱 재앙은 성전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일곱 재앙으로 옛성전이 파괴도어야 새로운 성전이 세워진다는 말이다. 회개는 새로운 성전으로 세워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회개(메타노이아)는 옛사람의 죽음인 것이다. 16장은 이러한 옛사람의 죽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작업하시는 내용인 것이다. 옛사람의 파괴를 통한 회개의 촉구인 것이다. 그래서 성전에서 큰 소리가 나는 것이다.
15장의 대접은 일곱 등잔대(불)를 의미한다. 대접은 미즈라크라 한다. 출애굽기 27장 3절에서『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히브리어 미즈라크, 헬라어 피알레)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제단의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지며』미즈라크는 뿌리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향로를 의미하기도 한다. 성막에서 대접은 여러 군데 있는데, 가장 먼저 성막뜰에 있는 번제단에서 동물의 피를 받는 그릇이 있다. 그릇에 피를 담아서 뿌린다. 그 다음에 물두멍에 그릇이 있다. 정결용 대접으로 키요르라고 한다. 세번째 민수기 4장 7절에서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떡상에 마시는 잔(메나키트)이 있다. 잔에는 독주(포도주)가 들어있다. 그 다음 등잔대는 기름을 담는 그릇(가비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향단의 향로(미즈라크)이다.
피는 지성소에 시은좌에 한번 뿌리고 바닥에 일곱번 뿌린다. 그 다음에는 분향단의 뿔에 손가락으로 바른다. 그리고 번제단의 네개의 뿔에 바른다. 그리고 번제단에 일곱번 피를 뿌린다. 피 뿌림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개념이다. 역으로 연기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 사닥다리를 타고 인자가 내리락 오르락 하는 모습이다. 첫사람이 죄인의 모습으로 내려오고, 마지막사람 아담이 죄에서 죽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인 것이다. 요한복음 1장 51절에서『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