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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도마초등학교(00) ⧉창원 이창초등학교(00) ⧉사천 서포초 자혜분교장(00) ⧉사천 서포초등학교(00) ⧉사천 동성초등학교(00) ⧉통영 사량초등학교(00) ⧉통영 사량초 돈지분교장(00) ⧉통영 도원초등학교(00) ⧉사천 서포초등학교(00) ⧉사천 사천초등학교(00) ⧉양산 천성초등학교(00) ⧉사천 서포초등학교(00) ⧉사천 곤양초등학교(00) ⧉남해 남명초등학교(00) |
⧉ 노산초등학교 편 - 삼천포 신항 도시 - 노산공원이 가까이 있는 곳(000)
⧮ 노산이라는 곳(000) ⧮ 나보다 먼저 온 소문(000) ⧮ 다소 먼 통근 길(000) ⧮ 종소리 영어의 도입(000) ⧮ 시조쓰기를 학교 특색교육 과제로(000) ⧮ 교육방송과의 교섭 시도 - 결과는 오리무중(000) ⧮ 교육청에서 교육 지원청으로(000) ⧮ 사회체육시설의 학교 구내설치 문제(000) |
⧉ 정동초등학교 편 - 교학성로 마지막 정거장 - 니구산 바라보며(000)
⧮ 마지막 지게자리(000) ⧮ 정동이라는 곳(000) ⧮ 여기는 더 해괴한 소문이(000) ⧮ 연구시범 보고회(000) ⧮ 영원히 살린 소나무(000) ⧮ 스마트교육 이야기(000) ⧮ 2012년 한 해의 성과(000) ⧮ 학부모 시조교실(000) ⧮ 이색 졸업식(000) ⧮ 내게는 과분한 사천교육상(000) |
<제2부> 추억의 오솔길(000)
⧉ <그리운 그 때 그 시절> 독후감들(000)
⧉ 추억의 오솔길(000)
◇ 인생 여정(旅程) ◇
⧮ 내가 살아온 역사(歷史)(000)
Ⅰ. 근무 학교별 연구업무 및 문예지도 실적(000)
Ⅱ. 개인 연구실적 및 표창 수상(000)
Ⅲ. 교육청, 지원청 업무협조(000)
Ⅳ. 문학, 교육관련 개인 도서 출판(000)
Ⅴ. 인생사(人生史) 와 인생사(人生事)(000)
1. 가족사(000) 2. 내가 사는 동안에(000)
◇ 엮고 나서 ◇ ⧮ 교직을 떠나며(000)
내 교직의 첫 출발지 - 화방사 아랫동네
<남해 도마 국민학교 : 72.05.01-77.09.30>
◇ 첫 임지 -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각오로
도마(都馬)라는 곳은 남해읍으로 들어가기 5킬로미터 쯤 전의 지점으로 보면 된다. 당시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성내(城內)(읍)에 들어가기 전에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말은 매어 놓고 거기서 부터는 반드시 걸어서 성내로 들어가야 했다고 한다. 바로 거기가 말의 도읍쯤 되는 곳 즉 도마(都馬)인 셈이다.
도마는 사면 모두가 바다인 남해 땅이면서 바다는 좀 멀리 떨어져 있고, 따라서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아예 없고, 도마초등학교 교가(校歌)에도 등장하는 버리들이라는 기름진 들판에서 논농사와 산기슭 밭에서의 밭농사를 주로 하는 농촌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사자성어를 생각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입장이니 그런 마음가짐으로 하나하나 배워 나갈 것이다. 그런 결심을 하고 나니 왠지 모를 힘이 솟고 걱정이 없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교직 모든 것의 시작지점이라 할 수 있는 도마에서의 5년 반은 내게 그만큼 의미도 깊은 세월이었다.
평생 동안 함께할 교직의 첫 출발지라는 의미도 그렇지만 그게 내가 성인이 되어서 하게 된 사회생활의 시작이기도 했으니까. 더구나 진정한 의미의 객지생활이 시작된 역사적인 순간이요 시기이기도 했다.
첫 발령지에서 첫 담임을 맡았던 학반이 5학년 1반, 다음 해에는 6학년 2반을 맡아 졸업을 시키게 되었다. 그들이 바로 도마29회 졸업생들로서 지금까지 끈끈한 정이 이어지고 있다. 첫 담임을 했던 관계인 점, 2년 연속 담임을 맡은 점도 있겠지만 그들은 다른 제자들과 좀은 차별화된 사고를 지닌 듯 했다.
3년여의 세월이 흐른 후에는 결혼도 했고, 첫 딸이 태어난 것도 도마초등학교 근무 때의 일이다. 5년 반이 지난 후 직장의 첫 이동도 도마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 당시 교육계의 변화들 - 새로운 역사와 일들
○문교부 자유학습의 날 선포
1972년 10월 16일, 문교부는 자유학습의 날 운영을 선포 했다. 자유학습의 날의 근본 취지는 국민학교에서 일주일에 하루씩 교과 수업을 하지 않고 교과와 관련된 스포츠 활동, 취미 활동, 현장 학습 등을 실시하는 날로 정하여 아동의 학습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고 학습 능률을 높이기 위한다는 취지였다.
다음 학년도인 1973년 3월부터 곧바로 시행에 들어갔는데 이게 처음으로 접한 일이라 학교마다 조금씩은 다른 방향으로 계획이 되고 실행이 되었었다. 물론 상부 기관으로부터 시달된 공문서들을 참고로 했으니 전체적인 틀이야 변하지 않았다.
당시 남해 도마국민학교에서 6학년을 맡았던 필자는 학교 방침대로 토요일을 자유학습의 날로 정했으니 매주 토요일 4시간 분량의 학습 계획을 세우느라 초임교사 입장에서 경험 부족을 절감하면서 고민을 해야 했다.
책가방을 안 가져 와도 되도록 짜야 하는 대 전제에 충실하면서 당일의 교과들과 관련되는 내용들로 딴에는 아동들의 흥미랑 교육의 효과도 고려하면서 계획을 수립하여 교무선생님께 제출했다.
직원 조회시간에 교무선생님께서,
“자유학습의 날 운영 계획은 6학년 것이 잘 짜져 있으니 다른 학년들은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씀을 하시어 크게 보람스러웠던 기억이 새롭다.
○ 제3차 교육과정 선포
2차 생활중심 교육과정에서 학문중심의 3차 교육과정이 1973년 2월 14일 공포되었다.
산업화사회에서의 국민의 자질함양과 인간교육을 강조한 교육과정으로 이 교육과정은 교육의 방향 면에서는 1968년에 선포된 ‘국민교육헌장’의 이념 및 1972년에 선언된 유신 이념의 구현을, 그리고 교육의 방법 및 원리 면에서는 1960년대부터 미국에서 새롭게 대두된 학문 중심 교육과정의 도입을 배경으로 하여 개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징으로는 ‘반공도덕’ 영역이 교과 활동에 포함되면서 ‘도덕’이라는 교과가 새롭게 등장한 점이고, 교육과정이 다시 크게 교과 활동과 특별 활동의 두 영역으로 구성된 점을 들 수 있다.
3차 교육과정의 문제점은 지식의 학문적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여러 가지 문제점 을 야기하게 되었다. 즉 학습내용의 과다, ‘수학’, ‘과학’등 일부 교과에서의 지나치 게 어려운 학습 내용, 아동의 흥미와 무관한 교과목 위주의 분과 교육, 일반 교육 의 소홀, 전인 교육의 도외시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 그 밖의 일들
그 밖에 1973년 10월 27일에 마산시 자산동에 소재한 마산고등학교 부근에 학생 과학관 기공식을 거행함으로써 오늘날 진주시 진성면 소재 경상남도 학생 과학교육원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그간 과학교육원은 도내 초,중,고등학교의 과학교육 발전과 교육과정 운영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교사 양성 대학인 전국 교육대학이 16개에서 11개 교대로 5개 교대가 일반 전문대학으로 개편되는 일이 1977년에 있었다. 이 때 도내에는 진주교대와 마산교대가 나란히 경남교육의 발전을 위해 예비교사들을 교육하고 있었는데 대단히 아쉽게도 마산 가포에 있던 마산 교육대학이 없어졌다.
남해(南海)
천년 한 고이 안은
전설 속 남향해안(南鄕海岸)
메아리 목쉬던 나루
현수교(懸垂橋)로 이은 오늘
저 물결 푸른 저 하늘이
그림처럼 고와라
태동(胎動)의 순간을 짚어
구원(久遠)으로 닿을 연륜
자고새면 닦은 절경(絶景)
삼자로 향기 메워
저 산 속 독경(讀經)에 밝힐
밤을 열어 가는 곳
사면을 헤아려도
서글픔 머물 곳 없다
물 닿은 해안선(海岸線) 기슭
인정(人情) 함께 닦고 쌓아
은파(銀波)에 고이 실리고
바람 따라 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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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에 살게된 기념으로 써 본 시조다.
1772년 5월, 내가 초등교직에 첫 발령을 받았을 때는 남해대교 건설 공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하동 노량에서 버스도 도선에 실어 건너편 남해 노량으로 건너던 불편함이 사라지기 직전의 일이다.
그러다가 그 후 1년여가 지난 1973년 6월 22일, 남해 노량에서는 역사적이고 거국적인 남해대교 개통식이 열렸다. 길이 660m, 높이 80m의 아름다운 현수교로 개통 된 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일컬어지고 있다.
남해대교가 가로지른 노량해협의 거센 물살은 충무공의 임진왜란을 포함하는 남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산 증인이요, 역사의 마당이었다.
개통 당일 수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대교가 흔들렸다고 할 정도였다.
꼬시락 맛 일품이던 바닷가 작은 학교
<창원 이창 국민학교 : 77.10.01-80.02.29>
◇ 청정해역 바닷가의 풍성함이 있는 곳
이창초등학교는 전 임지 도마초등학교와 비교하면 전교생의 수 면에서 대략 3분의 1 정도의 규모였고, 교문을 나서기 바쁘게 나를 맞아 주는 것은 때마침 만조로 아주 풍성하게 철썩이는 파도였다. 역시 바다라는 곳은 바닥이 드러난 모습보다는 만조로 출렁이는 광경이 훨씬 풍요롭게 보이는 것인가 보다.
청정해역답게 아주 맑고 깨끗한 해수가 품고 있는 한 뼘이 넘어 보이는 망둥어(이 지역에서는 꼬시락이라 부르는), 그 밖의 작은 물고기들을 그대로 보여 주는 무척이나 인상적인 곳이었다.
지금의 이창초등학교는 폐교가 되어 수련원으로 운영이 되고 있다. 학교가 있는 곳의 행정구역도 1977년 내가 부임해 갔을 당시에는 창원군 진전면이었고, 좀 있다가 의창군 진전면으로 바뀌더니 지금은 마산시 합포구 진전면으로 바뀌었다.
학교 앞 바다는 창포만이라 하여 지금도 건너편 진동면 고현 마을 앞 바다와 함께 미더덕 주산지로 자주 내 고향 소식 관련한 프로로 텔레비전의 화면을 타는 그런 곳이다.
이창에서는 교직생활과 관련하여 1급 정교사 자격을 취득한 곳이고, 처음으로 주임교사(지금의 부장교사)가 되기도 했으며 교원 예능경진대회 시조백일장 부에 출전하여 입상함으로써 교직 생애 첫 연구실적을 쌓기도 했던 곳이다.
그리고 주임교사는 처음 맡은 것이 교무주임이어서 일과 기획, 진행은 물론 모든 학교 행사의 기획과 진행도 맡아서 매일을 긴장 속에서 고민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 안타까운 현직 대통령 서거
1978년 10월 26일 우리나라에는 정말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현직 대통령이 부하에 의해서 살해되는 소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그것이다.
박대통령과는 동향인이고 명색이 중앙정보부장을 지냈고 당시에도 건설부 장관이었던 김재규라는 인물이 저지른 사건으로 잠간이나마 국가 안보에 커다란 구멍을 뚫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워낙 비중도 큰 사건이었고, 세계적인 관심거리였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당시 온 나라 곳곳에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내가 근무하던 이창국민학교에도 분향소가 설치되고 인근 주민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각 교실에는 국기 , 국가, 국가원수에 대한 예절교육을 강조하여 환경 게시물들이 게시되어 있었는데 이창초등학교 4학년 교실에 박대통령의 사진이 계시된 곳에다가 4학년 여자 어린이 하나가 들국화 대 여섯 송이를 꺾어다가 만든 꽃다발을 입체적인 구성으로 바친 일이 있어서 학교 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백목련(白木蓮)
크신 뜻 안으로만 천만년을 여몄다가
부시게 흰 송이송이 숨은 듯 터진 미소
앙금 진 마음 말끔히 씻어주는 자태여!
볼수록 시려오는
동공 가득 정한 숨결
은백색 꽃잎 사이
다져 모은 불심(佛心)인가
봄바람 고운 결에 실어
온 세상에 뿌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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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마다 백목련이 없는 곳은 없다. 내 두 번째 학교도 지금은 폐교가 된 곳이지만 백목련 한 그루가 사택 주변에 서 있었다. 3년을 근무하는 동안 이른 봄이면 묵직한 느낌으로 다가와서는 하얀 비둘기 떼가 앉아있는 것 같은 정경을 연출하였던 추억이다.
그런데 백목련의 꽃말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니 뭔가가 안 맞는 듯 한 느낌이 든다. 더구나 자목련의 꽃말이 ‘숭고한 사랑’이라니 둘이 비교 되어 더욱 그렇다.
산 꼭대기 바람 세던 동네, 아담하던 학교
<사천 서포 국민학교 자혜분교장 : 80.03.01-81.02.28>
◇ 다시 구성원의 막내로 살던 곳
자혜분교는 당시 4학년까지만 있는 학교였다.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학교라서 마을은 학교보다는 좀 아래에 있는 곳이기도 했다. 자혜리는 구포(九浦)와 중촌 두 부락으로 학구를 이루고 있는데 우선 구포는 원래의 지명을 구우진(九牛振), 구신머리라고도 한다.
동네 산의 형태가 아홉 마리의 소가 누운 형상이라는 설과 소 아홉 마리가 들어와서 흩어져 동네가 형성되었다는 설(說)이 있지만 지역 원로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후자가 더 정설에 가깝다.
실제 쇠모가지의 도로가 소멍에 형상이라고 하고, 오랫동안 마을 이름을 구우진이라 했다가 일제 강점기 때 한자표기법에 따라 구포(九浦)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또 중촌(中村)은 동네 중간에 있다하여 중촌이라고 했다는 전언이다. 중촌 동네에서 대단한 인물이 많이 났다고 하는데 곤양향교의 초대장(직원이라는 벼슬)을 지낸 분이라던가 부산 동래 초대 경찰서장 등등의 고향이 중촌이라고 한다.
자혜분교는 교직생활 8년 만에 전교생 수가 126명이고 1학년부터 4학년까지만 있는 가장 소규모 학교 근무를 한 셈이다. 그리고, 본교가 아닌 분교장 근무도 처음으로 해 보는 경험을 쌓기도 한 셈이다.
구성원 4명 중 내가 가장 막내였다. 전 임지 이창에서는 최고참 교사로 교무주임까지 맡아 했었는데. 나는 자혜분교장 1년 근무 동안 4학년을 맡음으로써 23명의 아동들과 함께 생활했었다.
◇ 교육개혁의 현장 침투
자혜분교 1년, 개인적으로는 무던히도 편했던 기억이다. 구성원의 막내란 그만큼 정신적인 부담은 전무한 법이고, 따라서 그렇게도 편하게 지냈던 기억이 많은 것인가 보다.
1980년 7월 30일 처음으로 교육개혁조치가 단행되었다. 이 교육개혁 조치의 주요 내용으로는 대학 본고사가 폐지되고, 과외가 전면 금지되었으며, 대학 졸업 정원제가 시행되게 되었다.
물론 과외 금지 조치 탓으로 고액 과외 행위가 지하로 숨어드는 현상이 생겨나게 되고, 졸업 정원제의 시행으로 대학 진학 후에 공부를 게을리 하는 대학생이 없도록 하자는 조치였지만 아무래도 예상 못한 부작용이 생겨나는 것은 있었음이 사실이다.
아울러 삼불정책(三不政策)이라 하여 고교 등급제, 대학별 본고사, 기여 입학제는 할 수 없도록 못 박기도 했다.
1981년도 3월에는 교육법 중 개정법률 제 3370(관보 제8765호, 2.13 공포) 에 의해 전국 교대 중 서울, 부산, 광주교육대학이 4년제로 승격 개편되었다. 이는 초등교육의 중요성이 국가적인 사안으로 떠올랐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일이기도 하기에 초등교육에 종사하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었다.
다만 전국의 모든 교육대학이 동시에 맞았어야 할 경사를 위에 열거한 3개 대학만이 먼저 맞은 결과라서 좀은 서운함을 떨칠 수 없었고, 이듬해인 1982년 3월에는 대구, 인천, 공주교대가 4년제로 개편되었다.
경남에 있던 진주교육대학은 1983년에야 나머지 교육대학들과 함께 교육법(1981.2.13 법률 제3370호) 제120조 및 동법 부칙 제2항에 의거 4년제 교육대학으로 개편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 교육계의 커다란 사안으로 볼 변화가 있었으니 1981년 2월 28일자로 교육법 시행령이 개정되어 복수교감제가 처음으로 시작된 일을 꼽을 수 있다.
가을 달밤
교교히 흘러드는 보드라운 빛을 모아
그리움의 사연 안은 님 올 길을 밝히우고
풀벌레 음향도 고운 이 한 밤을 지새우다
긴 여행의 귀각인 양
감회로운 시각 안에
무심히 바랜 채로
텅 빈 이 가슴 속은
가을 달 애끓는 정한
마주 세워 달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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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가을 어느 날 밤늦은 시각에 살그머니 사택을 빠져 나와 운동장으로 통하는 계단에 혼자 앉아 시월 상달의 커 보이는 모습을 보며 어울리지 않게 시름에 잠긴 적이 있었다.
그걸 가장 미화하는 방법은 남들에게는 시상을 떠올려 정리했다고 말하면 되는 것일까? 아무튼 바람조차 센 동네라서 한기까지 느끼면서 남이 보면 청승스러웠을 그 때의 일이 작은 추억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후 이날 이때껏 단 한 번도 달을 보고 혼자 시름에 잠긴 적은 없었다.
서녘포구 주막거리 추억 많던 학교
<사천 서포 국민학교 : 81.03.01-86.02.28>
◇ 전 교과 전담의 지평을 열던 곳
내가 근무할 당시의 서포초등학교 학구는 구평, 구랑, 다평, 선전, 조도리라는 다섯 개 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서포면 소재지는 구평 마을인데 주막거리라고 흔히들 부른다. 옛날에 자혜, 염전등지에서 소금을 만들어 곤양, 진교장등에 가기 전에 말 수 십 필이 쉬어 가기도 하고 팔고 와서는 두툼한 주머니로 시원한 막걸리 한잔 들이키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던 곳이 바로 주막거리였다고 한다. 자혜, 대포등지에서 염전, 선창, 비토등지에서 나오는 이들이 꼭 지나야 하는 마을로서 어쩌면 자연스럽게 주막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서포에서는 소위 전 교과 전담을 동 학년끼리 의논하여 교장 교감의 허락 하에 운영했던 일이 있었다. 6학년 담임 4명이 수업시간 수에 따라 교과를 나누고 4개 반을 전담으로 운영한 것인데 당시로는 정말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지금이야 학급 수를 기준으로 아예 교과 전담교사의 인원 배당이 이루어져 담임교사들의 수업시간 수가 획기적으로 줄었지만 당시에는 예체능 전담이라 할지라도 권장사항에 불과한 그런 시절이었으니 우리는 참으로 앞서가는 교육활동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 성과도 컸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는 아동들이 반 편성 배치고사를 쳤는데 그 성적이 다른 학교보다 월등히 좋아서 한 때 서포 지역의 화제 거리가 되기도 했으니까.
서포 5년 근무 동안 6학년을 내리 3년 담임하는 바람에 4년째 되는 해에는 인근 서포 중학교에 볼 일이 있어 가게 되면 온 교실마다 내다보고 선생님을 불러대는 바람에 상당히 흐뭇했던 기억이 있다.
◇ 4년제 교육대학 승격과 스승의 날 이야기
○ 교육대학 4년제로 승격 개편
1981년도 3월에는 교육법 중 개정법률 제 3370(관보 제8765호, 2.13 공포) 에 의해 전국 교대 중 서울, 부산, 광주교육대학이 4년제로 승격 개편되었다. 이는 초등교육의 중요성이 국가적인 사안으로 떠올랐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일이기도 하기에 초등교육에 종사하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었다.
다만 전국의 모든 교육대학이 동시에 맞았어야 할 경사를 위에 열거한 3개 대학만이 먼저 맞은 결과라서 좀은 서운함을 떨칠 수 없었고, 이듬해인 1982년 3월에는 대구, 인천, 공주교대가 4년제로 개편되었다.
경남에 있던 진주교육대학은 1983년에야 나머지 교육대학들과 함께 교육법(1981.2.13 법률 제3370호) 제120조 및 동법 부칙 제2항에 의거 4년제 교육대학으로 개편이 되었다.
○ 사도헌장 제정 선포와 스승의 날 부침(浮沈)
한편 1963년에 제정되어 매년 계속되었던 스승의 날이 1973년부터 학부모들이 소위 치맛바람을 심하게 일으킨다는 이유로 사회문제화 되어 10 여 년간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1982년 5월 15일을 사도헌장이 제정 선포되면서 스승의 날도 부활되었다.
우스운 일이다. 이제 치맛바람이 잠잠해졌다는 얘긴지? 예전의 결단이 졸속이었음을 시인하는 일인지? 모호하기만 한 일이다.
중요한 백년대계의 사안을 사려 깊은 검토도 없이 조자룡이 헌 칼 쓰듯 폐지했다가 사람이 바뀌면 앞 사람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으로 쉽사리 부활하고 그런다면 다시 언제 또 폐지될지 모르는 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닐까?
매사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고 일을 처리하는 자질과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사안이다. 급변하는 사회와 더불어 우리 풍속도 따라 변화하기는 하겠지만 스승 존경과 선생님들을 예로 대하는 마음만은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노승
다문 입 천년 가도
잃지 않은 깊은 미소
오욕이 머물지 못할
안을 쌓은 몸매여라
그 안에
말없이 살은
세월 혼이 잠겨든다.
하 많은 어린 중생
가슴가슴 어루만져
허구 헌 저 번뇌를
참선으로 떨치우며
쌓아온
일월 거슬러
염주 알을 헤아린다.
바다 같은 무한으로
시방을 더듬는가
때 절은 인연들은
탁성으로 회오하고
뼈 마른
안을 다지어
사리알을 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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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 시조와 일생을 함께할 숙명적인 시작은 훨씬 앞의 일이었지만 이 한 편의 시조로 1983년 봄 호 <시조문학>지에 추천이 완료되면서 맨발에 신 신는 일처럼 좀은 자신감이 생겼다.
시조 창작 지도는 계속했고, 아무래도 이 이후에는 창작 활동도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지도의 원활화를 꾀하기 위해 지도서와 워크북의 윤곽을 짜던 때가 바로 이때였으니까.
불교재단의 사립 고등학교를 다닌 탓으로 남들이 보면 신심 깊은 불자로 오인하겠지만 그런 경지는 아니고 불교의 삼보(三寶)가 불(佛) 법(法) 승(僧)이고, 사홍서원(四弘誓願)은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인 것 정도는 아는, 불교와 인연(因緣)은 맺고 사는 나인 것은 맞다.
비행기소리 시끄러워도 즐거움 넘친 3년
<사천 동성국민학교 : 86.03.01-89.02.28>
◇ 진주에서 제일 가깝고 교통도 편리한 곳
동성은 아침 시간이 상당히 시끄러운 학교였다. 공군 부대가 인접해 있어서 훈련의 특성상 꼭 아침 시간에 비행기 소리로 운동장 조회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했던 것이다.
동성은 내게 그 때 까지 제일 도회지 학교였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사실이 그랬다. 아이들의 눈망울부터 달랐다. 글짓기 지도를 해 보니 정말로 뛰어난 아동들이 많았고, 따라서 대외행사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어쩌면 시골 아이들에 비하여 순수한 면이 좀 떨어지기는 하지만 교육의 성과는 명확히 달랐다. 이런 상황을 두고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깨친다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가르치는 선생의 입장에서 좀은 신바람이 나는 일이 많았다.
동성 근무 3년차인 88년, 수많은 글짓기 대회 입상 실적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이 4학년 진성혜 어린이가 호국 백일장에서 받은 금상(전국 대회 최고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사건 내지 이 학교의 특성은 미감아 반이 있다는 사실과 그 미감아 반으로 인해 상당히 심각한 수준의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그 이름도 한센 병 학급으로 바뀐 뒤지만 아무튼 학년마다 한 반씩 있는 그 반 담임을 맡아서 특수 수당은 고사하더라도 승진에 필요한 점수라도 챙겨 보려는 교사들 간의 경쟁이 그 도를 지나치는 경우가 가끔 발생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더러 있었었다.
◇ 5차 교육과정, 그리고 크고 작은 변화들
1987년 6월 30일을 기하여 제5차 교육과정이 개정 고시되었다. 5차 교육과정은 건강한 사람, 자주적인 사람, 창의적인 사람, 도덕적인 사람을 기르는 데 목적을 두고 교육과정의 지역화를 시도한 것도 한 특징이다.
1986년에는 초등학교 급당 인원을 60명에서 50명으로 하향조정했고, 교원 업무의 경감을 위하여 학교에 인쇄기, 복사기 등을 공급하였다. 그리고, 1987, 88년에 걸쳐 23학급 이상 26학급까지의 학교에 사무직을 배치하였다.
우리 경상남도의 교원들의 연수활동 원활화를 위하여 1988년 1월에 경상남도 교원연수원이 설치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연수의 종류에 따라 교대나, 다른 대학들의 부설 연수기관에 위탁하여 연수를 받게 되는 등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전학
아쉬운 이야기는
눈시울에 재워두고
코 묻은 정도 둔 채
거북걸음 걸어와도
자꾸만
돌아다 뵈던
그래 좋던 친구들!
설은 낯 생소한 정
함께 쏘는 눈 화살들
기어드는 목소리로
인사 대강 치르는데
따가운
손뼉 소리만
귓전에서 맴돈다.
새 교실 새 선생님
모두 다 어려워서
빈자리 찾아가는
걸음도 천근인데
새 짝궁
고운 미소에
깃털보다 가벼운 맘
진정으로 반겨주는
새 짝궁 그 눈길이
가슴 속 구름발을
하이얗게 씻어주고
어느새
형제가 된 듯
어울리는 동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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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 열리던 그 역사적인 시기에 나는 사천 동성국민학교에 근무했다. 동성은 공군 부대가 학구내에 있는 바람에 아동의 전학이 정말로 잦은 학교였다. 아빠의 군부대 이동에 따라 자기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전학을 할 수밖에 없는 그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른들도 아이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던 어느 선배님의 말씀이 딱 맞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교직생활을 하면서 상황마다 아이들의 고충을 먼저 생각해 보는 버릇을 그 때부터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예컨대 임원 선거가 끝나면 반드시 낙선자들을 챙겨 위로 겸 용기 북돋우기 겸해서 이야기를 해 주는 나만의 절차는 계속해 왔었다.
옥녀봉 아래 엔젤호 닿던 곳
<통영 사량국민학교 : 89.03.01-92.02.29>
◇ 섬마을과 마흔 살 먹은 총각 출신 선생님
사량면의 홈페이지에 들러 보면 「사량면은 상도와 하도, 수우도 등 3개의 유인도와 1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총 26.83k㎡의 면적에 4개리 14개마을 14개반으로 구성, 약 930세대 1,772명의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상도(윗섬)와 하도(아랫섬)가 마주보고 윗섬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지리산, 불모산, 가마봉, 옥녀봉이 능선으로 차례로 연결되어 긴 뱀의 등을 산행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국민가수 이미자씨의 ‘섬마을 선생님’에 나오는 섬마을 선생님인 것은 완벽하게 맞는데 총각이 아니라 억지로 갖다 붙인 총각 출신 선생님으로서의 섬 생활을 시작했다.
사량도에서는 두 번째 해에 6학년을 담임했는데 학급 전체 아동들에게 시조쓰기 지도를 하는 프로그램 구안을 마무리하여 적용하는 학급 경영연구대회에 출품을 했다. 결과는 3등급으로 끝났다.
그렇지만 그 때 내가 구안한 지도안의 활용을 주 내용으로 한 현장연구 대회 논문을 응모하여 입상했고, 그 지도안이 오늘날까지 학급 전체 아동을 지도하는 훌륭한 네비게이션 역할을 하고 있으니 가슴 뿌듯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에는 사량초등학교 외에 내지, 돈지, 읍덕, 양지 등 4개의 초등학교가 더 있었고 수우도 분교까지 있었는데 2013년 현재는 사량초등학교만 남고 모조리 폐교가 된 상태이다.
◇ 몇 가지 변화와 그 의미들 살펴보기
6학급 이하 학교에서는 오히려 사기를 저하 시키는 일이기는 했지만 1990년에는 7학급 이상 10학급 이하의 소규모 학교에도 드디어 사무직이 배치되었다. 실은 작은 규모의 학교일수록 일손은 더 모자란다는 눈에 훤히 보이는 일에 언제나 인력의 증원은 규모 큰 학교부터 하는, 어찌 보면 부익부 빈익빈적인 일로 하여 크게 사기가 저하되고 작은 규모의 학교를 회피하는 경향은 그 뿌리가 매우 깊었는데도 이를 계기로 하여 더욱 튼튼해지게 되는 사안이었다.
1991년에는 문교부라는 뿌리 깊던 교육관련 부서의 명칭이 교육부로 바뀌고 시도 교육위원회가 시도 교육청으로 바뀌었다. 실은 그 명칭들이 바뀌는 것 하고 일선 학교들의 하는 일들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문교부가 교육부로 이름이 바뀔 적에는 우리 교사들의 의식에 교육 중시라는 암시를 받는 듯하기는 했다.
옥녀봉
넋으로 남은 옥녀(玉女)
안개 속을 서성이고
흩어 늘인 산발(散髮)이
환상(幻像)으로 오가는데
이제는
설은 사연(事緣)만
전설(傳說) 되어 전한다.
아내 잃은 아비의
깊디 깊던 그 사랑이
어미 닮은 옥녀에게
환각(幻覺)으로 덧씌워져
방석 쓴
소의 모습에
문득 부른 불행이여!
하늘 땅 수평선이
어우린 동강만에
선명한 윤곽(輪廓)들이
빚어내는 절경(絶景)인데
서럽던
옥녀의 넋은
원혼(冤魂)으로 떠도는가
선명한 핏자국이
세월에 씻기우고
생각의 굴레들이
닳고 닳아 벗어지면
내일은
숭고(崇高)한 사랑
승화(昇華)되어 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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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도 옥녀봉은 아름답지 못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전국에 수많은 옥녀봉이 산재해 있는데 곳곳마다 전설이 똑 같지는 않을 것이다.
사량도 옥녀봉 전설은 무남독녀 옥녀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옥녀를 겁간하려하는 바람에 옥녀가 높은 산봉우리에서 떨어져 죽은 것으로 되어 전하는 것이다.
어쩌면 정말 추악한 단면만을 고집하고 볼 것이 아니라 한 치 더 생각해 보면 옥녀가 엄마를 아주 닮아서 옥녀 아버지가 만취 상태에서 딸을 아내로 착각한 것이겠다고 생각하면 좀은 다른 방향으로의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서 소개한 시조도 그렇게 썼더니 뜻밖에도 사량도 주민이 아닌 전혀 다른 지역 사람으로부터 공감의 메시지를 전해온 이가 있어서 힘을 얻었던 일이 있었다.
오늘날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옥녀봉은 하필 전설 속의 그 때 그 장소에 붉은 색을 띤 풀이 자라고 있어 직접 보면 얄궂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지리산 밑 미니학교
<통영 사량 국민학교 돈지 분교장 : 92.03.01-94.02.28>
◇ 복식과 3복식 수업을 경험한 학교
사량도 전체를 이를 때 지리산(智異山)이 있는데 상도의 돈지리에 소재하고 있는 해발 398m의 산으로 전라도와 경상도 에 걸친 지리산이 바라다보여 지리망산(地異望山)이라 불리다가 그 말이 줄어 지리산이 된 것이라고 한다.
바다와 산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섬 산행으로 암봉과 암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불모산을 거쳐 옥녀봉의 능선이 이어지는 바위봉우리와 능선을 번갈아 타면서 산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으며 산행코스로도 인기가 있어 매년 수십만 명의 등산객이 찾고 있다.
실제로 필자도 돈지분교장 근무 2년 동안 지리산 정상은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는 비나 눈이 오지 않는 한 거의 매일 새벽 등산을 했었다.
돈지분교장은 2011학년도 말에 매우 아쉽게도 폐교되었다.
내가 근무하던 92, 93학년도에는 전교생 서른 명 안팎으로 92학년도에는 3,4학년복식을, 93학년도에는 2,5,6학년 3복식을 운영했다. 내 교직생활 중 가장 낮은 학년(2학년)을 담임하는 경험과 복식, 3복식 수업을 경험하는 등 잊지 못할 곳이기도 하다.
◇ 문민정부의 교육 정책들
1993년 2월 들어 문민정부에서는 교육 GNP 5%확보 노력과 아울러 평생학습 사회를 구현을 위해 노력한다는 의지를 약속했고, 1992년 9월 30일 국가수준, 지역수준, 학교수준 등 세 가지 기준을 골자로 하는 제6차 교육과정을 개정 고시하기에 이르렀다.
평생학습은 국민들의 의식을 말 그대로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면 공부하고는 졸업을 했다는 당시의 생각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여러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 평생 동안 학습을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했다고 본다.
그리하여 확보되는 교육 재정들이 오늘날 정말로 깜짝 놀랄 만큼 변화를 이루었다.
수많은 일들이 예가 될 수 있겠지만 몇 가지만 들어 본다면, 먼저 대강수당이라는 것이 있다. 교사가 출장 등 여러 가지 사유로 교실을 비우게 되면 예전에는 이웃 교실 담임들이 번갈아 가며 자습을 지도하는 것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어떤가?
교과전담교사나 교감이 그 교실에 들어가서 수업을 하게 되고 그럴 경우 시간당 5,000원의 대강 수당을 받게 된다.
또 전에는 초등학교 학급 수와 교사의 수는 일치했는데 교육재정이 확보되면서 정원 령이 달라지게되었다. 학급 수에 따라 전담교사의 자리가 일정하게 확보되어 교사 정원이 전과는 달라지면서 늘어나게 되었다.
◇ 6차 교육과정 개정고시
국가수준 ,지역수준, 학교수준 등 세 가지 기준을 골자로 하는 제6차 교육과정은 중앙 집권적 교육과정에서, 정녕 절실하고 필요했던 교육과정의 지역화를 정착하는 일대 전환점적인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일선학교에서는 국가가 마련해 주는 교육과정에 따라 학교 교육과정이 손쉽게 마련될 수 있었고, 따라서 교사들의 태도도 매우 수동작인 방항으로 흘러갔는데 그게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었다.
물론 조금 정도의 가감에 의해 해당 지역의 특성들이 미미한 가운데 반영되고 지역화가 실현되기도 하기는 했다.
당시 이제는 학교 교육과정을 학교 나름대로의 실정에 맞춰서 수립하고 운영도 해야 하니 혼선이 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해서 당시 지역 교육청별로 비슷한 환경의 학교들끼리 권역들을 묶어서 3-4개 학교 연구부장들이 모여 교육과정을 수립하기도 했다.
실제로 필자도 다음해에 옮겨간 도원초등학교에서 연구업무를 맡게 되어서 이웃 학교들의 연구담당교사들과 함께 논의를 거쳐 통영 도산면 교육과정을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벽지학교 운동장
새아침 밝은 햇살이
보드라운 빛을 보내면
휑하니 너른 뜰 한 켠
고요 활짝 걷어내고
서른 명 전교생이 모여
웃음소릴 흩는다.
또르르 흘린 그 웃음
보석으로 다듬어져
소담스런 꿈이 되어
가슴 안에 고여 들고
더러는 은행나무 가지
은행 알로 여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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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생 서른 명으로 미니학교 운동회도 기획하여 운영해 보았고, 분교장 주임으로서 젊은 시절에 학교 경영도 경험할 수 있었다. 낮에는 학교에서 아이들과 바쁜 일과를 보내고 밤이 되면 마을 주민들과 어울려 낚시도 하고 심심풀이 화투도 치면서 섬 생활의 무료함이라고는 조금도 모르고 2년을 훌쩍 보낼 수 있었다.
시업 전이나 방과 후 또는 쉬는 시간에 그들이 뛰어노는 모습들에 혼자 미소 짓던 날들이 참 많았었다.
사계사 밑 차 소리 요란하던 곳
<통영 도원 국민학교 : 94.03.01-95.02.28>
◇ 일 년 만에 떠나온 아쉬움은 지금도
도원초등학교가 자리한 원산리 마을은 전형적인 농. 어촌 지역으로 청정해역과 비옥한 토질로 수산물과 농산물이 풍부한 곳이다. 통영과 고성의 경계 지역으로 관광통영의 관문역할을 하는 이곳은 면 중앙 남북으로 국도 14호선이 관통하고 해안굴곡이 심하여 수산물 양식적지로 가공업체가 밀집하여 일본 등지로 수출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특산물로는 굴, 진주, 멸치, 멸치 액젓 등 수산물과 화훼재배가 성한 곳이기도 했다.
딱 1년 근무한 학교, 그래서 언제나 당시 맡았던 5학년 23명의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마을사람들에게도 미안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1년이 내게는 참 바쁜 1년이었다. 연구업무를 맡아서 교통안전교육 시범학교를 운영하여 가을에는 보고회까지 해야 했던 1년이었던 것이다.
도원에서는 교통안전교육시범학교를 운영하면서 교통퀴즈 프로그램 운영 관계로 나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자동차 운전에 관한 상식을 제법 체득했었다. 그걸 토대로 아주 손쉽게 운전 면허시험을 통과하여 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도 떳떳한 마이카족의 대열에 들 수 있었다. 진주 집에서 학교까지 50킬로미터 거리를 매일 손수 운전으로 출퇴근을 함으로써 처음에는 공포스럽기까지 하던 손수 운전이 도원을 떠날 때쯤에는 달인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숙달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계사에서
전원의 고요 깨며
가쁜 숨에 오른 길이
까마득 실개천
굽이 따라 아물이면
몰아서 터뜨린 숨결에
문득 흩는 번뇌여
산문 앞 계단 가에
번뇌 가득 부려 놓고
대웅전 본존불에
합장으로 뇌는 소망
울창한 숲 속 가득히
침잠하는 고요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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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사는 통영시 도산면 원산리, 필자가 딱 1년 근무한 통영 도원초등학교 뒷 편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이다. 그 해 봄 소풍 때 전교생이 함께 갔던 곳인데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사찰들이 골짜기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절들은 대개 전망들이 거의 산이고, 숲인데 비하여 사계사는 전망이 멀리 마을이 보이는 것이다. 규모는 아주 작은 편인데 그런 만큼 조용하고 속세와의 연결이 느껴지는 그런 사찰이다.
다시 찾은 서녘포구
<사천 서포 초등학교 : 95.03.01-00.02.29>
◇ 두 번째라 낯설지 않고 정도 더 가던 학교
두 번째 서포 근무는 참 여유로운 마음으로 근무를 할 수 있었다. 이제 그간 쌓은 경력이 23년이 넘었으니 저절로 조금은 자신감이 붙어 있었고, 교사들 중에서는 원로급에 속함으로써 무슨 일에나 모범적이어야 했고, 후배교사들에게 학교 업무 전반에 걸쳐 안내를 해 줄 수 있는 조금은 깊이 있는 실력자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그건 따로 열심히 공부를 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니라 평소 주어지는 업무들을 성의 있게 접근하고 합리적으로 처리하려고 애를 쓰다 보면 저절로 붙게 되는 노하우에 해당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서포초등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나는 교직에서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인근 학교가 폐교되어 통합되는 일을 교무부장으로서 직접 기획 운영해야 했고, 무엇보다 1997년 9월 1일자로 경남 최초의 초빙교장 여섯 분이 탄생할 때 그 중 한 분을 서포초등학교에서 맞기도 했다.
◇ 국민학교, 초등학교, 전교조, 정년 단축
1996년 3월 1일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너무나 귀에 익었던 국민학교가 하루아침에 바뀌었으니 이후 상당기간 동안 혼용이 불가피해졌다. 이렇게 바꾼데 대하여 국민학교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이름이어서 그랬다고 했다.(국민학교의 국민이란 낱말이 황국신민의 줄인 말이라나?)
그렇다면 진작 바꿨어야 할 것을 해방 된지 51년이 지나도록 교육 위정자들은 뭘 했다는 이야기일까? 교육의 기반을 확고하게 세우는데 그토록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면 할 말 없는 것이고.
이어 1997년에는 제7차 교육과정 개정 고시가 있었다. 21세기로 넘어가는 문명사의 대 전환적인 시점에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질적인 변화의 하나로 해석할 수 있는 교육과정인 것이다.
한 편 1999년 1월 6일에는 교원 노조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이 의결됨으로써 지금까지는 불법 활동으로 교육행정 당국과 끝없는 투쟁을 계속해오던 전교조가 합법적인 투쟁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던 당시가 생각난다.
결국 오늘날에 와서는 전교조의 활동이 외부로 크게 드러나지 않는 상황이고 끝없는 투쟁의 길에 섰던 전교조 지도자들이 승진하여 노측이 아닌 사측이 되기도 하는 상황이 도래했어도 노조는 계속 활동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같은 날짜에 교원 정년을 62세로 단축하는 안이 확정되어 곧바로 3월 1일자로 적용이 됨으로써 일종의 교육공황이 도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65,64,63,62세의 교원이 한꺼번에 정년퇴직을 하게 되어 생긴 혼란을 얘기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원이라면 대학교수도 포함되는 것이 당연한데도 62세 정년 대상에 대학교수는 예외로 인정하여 합리적이지도 못할뿐더러 초,중등 교원들의 사기 저하에도 크게 기여했으니 교육 공황(恐慌)은 올 수 밖에 없는, 어쩌면 앞 뒤 분간도 못하는 위정자들의 조자룡 헌 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렇게 한번 고착화된 제도는 자주 정치인들의 출마 공약으로 정년 환원을 들먹이다가 선거가 끝나면 식언이 되고 마는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이 되고 있다. 요즈음은 정년 환언 이야기가 나와도 경상도 말로 <씰 대 없는 소리> 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관심조차 갖지 않게 되고 말았다.
작도정사
이윽히 바라보면
바다로 가는 길목
까치섬 원경 속에
지친 넋이 달려오면
이끼 낀 기왓골마다
서려 이는 선현의 혼
무너져 앉은 돌팍마다
옛님의 체취 어려
가고 없는 성현이사
뵈올 일 더 없어도
바른길 사모하는 정
분수처럼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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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도정사(鵲島精舍)의 작도는 까치섬이란 뜻인데 그 이름은 작도정사가 자리한 서포면 외구리가 당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작은 섬이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500년 쯤 전에 당시 32세였던 퇴계선생께서 곤양군수 어득장(당시 63세)의 초대를 받아 곤양으로 가서 작도에 머물면서 생선회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학급 아동들을 데리고 작도정사에 현장학습을 간 적이 있었다.
관리가 허술하여 아이들에게도 민망하리만치 초라한 정사지만 지역에 있는 조상들의 문화유산이라는 의미만 해도 그 가치는 충분한 것이라 생각하며 당국에서 보다 큰 관심으로 관리해 주기를 마음속으로 바랄 뿐이었다.
산성 공원 아랫동네 - 아쉬운 반년
<사천 초등학교 : 00.03.01-00.08.31>
◇ 교사 생활의 마지막을 보낸 학교
사천초등학교는 그 해에 사천 교육 지원청 관내에서 제일 큰 학교였다. 나는 교감 자격연수 대상자로서 지명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전임 서포초등학교 만기가 되는 바람에 옮겨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사실 어느 누구도 그런 사람의 전입은 반가워하지 않을 것을 뻔히 알지만 만기로 옮겨야 하니 도리가 없었다. 제일 큰 학교는 아무래도 내 입장에서 그래도 덜 미안할 수 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사천초등학교를 선택했다.
학교생활은 아마 교직 첫 발령 이후 가장 사무도 가볍고 맡은 학년도 적당하여(4학년) 가장 안정되고 평안한 마음으로 근무를 할 수 있었다. 그 해 내가 맡은 사무는 소방, 민방위였다.
비록 근무한 기간이 고작 반년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 반년, 딴에는 정말로 열심히 근무했다고 자부한다. 그 해 4학년 일곱 반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시조창작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300명이 넘는 어린이들에게 시조를 쓸 수 있도록 지도를 했고, 절장, 양장, 평시조집을 혼자서 워드 작업 하고 복사 제본하여 만들어 배포까지 했던 기억이 새롭다.
오봉산
-백정 영호의 전설에 부쳐
천하디 천한 신분 백정으로 던져저서
온갖 멸시 찬 설움에 세월 밖을 서성이다
괄시 속 처연한 아픔 안으로만 삭였네
내리치는 칼끝마다 피 묻은 살점이 튀고
독사눈 날 세운 끝에 세상마저 잦아들면
앙다문 입술 가으로 득의의 미소가 피고
입어온 서러움이 쟁여온 엽전 꾸러미가
한으로 어린 가슴 양반놀음에 풀어보다
끝내는 늘임 꼬리 끝 밟히고야 말았는데
허허로운 벌판이라 숨을 곳 하나 없고
치밀한 양반님네 한치 오차도 없어
앞에도 뒤 양옆에도 횃불 줄이 이었어라
양반님 하 부러워 밤중에만 흉내 낸게
하늘 노할 죄였던가 죽음 길을 열었으니
넘는 숨 추스려 가며 앙갚음만 새겼네
동구 밖 미루나무 내어 걸린 시체 끝에
쉬파리 드나들고 까마귀도 날아들어
원통한 죽음의 소리 구천으로 메아리진다.
서린 한 질긴 혼에 사무친 추스림이
소 돼지 가축들에 원혼으로 깃들어 와
오뉴월 염천 속에도 찬서리가 내린다.
어지신 원님 앞에 털어놓은 사연인즉
다섯 봉 산을 빚고 그 아래 연못도 파고
죽어진 구천에서도 양반행세 하겠다네
삼끈인양 질긴 원혼 제 풀 안고 지쳤는가
서슬 퍼런 짓거리가 오봉산에 메아리로
더러는 작은 연못 속 풍랑으로 재어들다.
지금은 형상마저 사라져 없어져도
그날 그 전설만이 흑소 나루 맴을 돌고
영호 놈 질긴 원혼도 쇠잔하고 없는데
바람 새 들녘 돌아 회오리로 비상하면
신분이 몰아다 준 한 인생 측은한 정
이제는 전설로만 남아 꼬리 길게 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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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 영호는 천대 받는 신분 때문에 양반들의 천대와 멸시 받는 것이 늘 서러웠다. 그래서 말하자면 그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만인이 잠든 한밤중에 혼자서 양반 차림을 하고 양반 놀음을 벌이다가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격언에 맞게 잡히고야 말았다.
심한 고문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서 원혼이 되어 마을 가축들에게 분풀이를 하게 된다. 그러다가 마을 사람들이 영호 원혼의 억울함을 달래 주기로 하여 해괴한 일은 사라졌는데 그 때 만들어 준 작은 오봉산이 지금은 비행장과 공군 부대 때문에 없어진 실정이다.
옛날 일이긴 하지만 작은 지역의 전설로 아직도 전해지고 있고, 군지나 읍지 등에 수록되어 있으니 우리들 후손들에게는 조상들이 남긴 문화적인 유산임에 틀림없는 일이다.
내가 교사 시절 마지막으로 사천초등학교에 근무할 적에 내가 담임한 4학년 6반 아이들에게 국어시간에 백정 영호의 전설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아주 재미있어 했던 기억이 있다.
새내기 교감, 천성산(千聖山) 한 자락에 둥지 틀다
<양산 천성 초등학교 : 00.09.01-03.02.28>
◇ 교감 첫 임지 - 천성산 이름을 그대로 딴 학교
천성초등학교는 양산 중심시가에서 따지면 변방도 한참 변방인 웅상 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부산과 울산을 연결하는 지점이라서 부산으로나 울산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객지인 것은 분명하지만 왠지 정이 가고 아침 시간에 천성산의 한 봉우리인 등잔 봉 등산을 많이 했고, 미타암, 잎새바람(카페), 무지개 폭포 등 관광지를 구경하기도 했던 추억어린 곳이다.
훌륭한 교장선생님을 만나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가운데 객지에서 당시 비슷한 처지의 동료 교감들 사이에 유행하던 독거노인이란 이름으로 2년 하고도 반이라는 세월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사실 나의 교장 직무 수행에 있어서 거울이었던 교장선생님 덕분에 스스로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추구하는데 방향을 잡아주신 은혜를 입고 산대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 교육인적자원부 그리고, 행정정보시스템 개통
2001년 정부는 1991년에 문교부에서 교육부로 바꾸었던 부서 명칭을 교육인적자원부로 바꾸었다. 교육부라는 이름이 교육 행위 그 자체에 무게의 중심을 두었다면 이번에 교육인적자원부로 바꾼 것은 교육으로 길러내는 사람들 즉 인간을 국가 발전에 필요한 인적자원에게로 그 무게의 중심을 둔다는 의도겠거니 짐작할 수밖에 없다.
2003년 들어서는 그간 교무 업무보다는 교육 행정 업무를 대상으로 전산화를 시도하다가 드디어 교육행정 정보 시스템이 개통을 하게 된다.
깊은 연구를 한다고는 했지만 처음 개통하여 연수를 하게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등 오히려 일선학교를, 교원과 행정직원들을 힘들게 만들었었다.
말로는 쉽게, 처음이라 겪게 되는 시행착오라고 변명하지만 차라리 완벽하거나 완벽에 가까울 때 까지는 연구를 계속하면서 이전의 제도를 활용하게 하고 시행착오의 정도를 줄이는 것이 효율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건 교육이라는 일 자체가 잠시 잠간도 소홀할 수 없는 백년대계(百年大計)이니 그걸 수행하는 사람들이 엉뚱한 헛일들로 바빠서는 수많은 난관들이 봉착될 수밖에 없는 일이라 확신하기에 더욱 그런 것이다.
천성산
수려(秀麗)한 산 윤곽(輪廓)이
불러오는 평온(平穩)이여
드높은 정상(頂上)에서
가지 뻗듯 갈래진 능선(稜線)
소롯이 깃든 전설(傳說)이
산골짝을 덮는다
봄이면 흐드러진
진달래 철쭉으로
한여름 어우러진
잡목(雜木) 숲 매미소리
환상(幻想)의 길섶 가득히
새로 피는 사연(事緣)들
당나라 일천 학승(學僧)
목마른 배움의 뜻을
화엄경(華嚴經) 설법(說法)으로
확연(確然)히 깨쳐 주던
오늘도 그 선연(鮮然)한 모습
원효대사 긴 석장(錫杖)
억새꽃 하늘대는
선경(仙境)을 열어 놓고
바람도 골골마다
물소리에 섞여들면
하 홀로 신비(神秘)를 빚어
세월(歲月) 한 켜 쌓는다
까마귀 울음으로
정겨운 아침을 열면
약수터 쪽박에다
담아 마신 소망(所望) 한 모금
속진(俗塵)에 찌든 육신(肉身)에
솟아 오는 새 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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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천성산은 연전에 지하철도 건설을 막고자 단식 농성을 한 지율스님 아야기 만으로도 유명한 산이다. 양산에 있는 초 중 고등학교 교가에 천성산이라는 노랫말이 들어가는 학교가 스무 개 쯤 된다는 말이 있었으니 그 만큼 산세가 웅장하고 그 범위가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세 번째 부임 학교, 추억도 새로워
<사천 서포 초등학교 : 03.03.01-04.02.29>
◇ 내게 고향이 되어버린 서포
교감으로 서포에 부임을 하고 보니 벌써 같은 학교에 세 번째 부임하는 셈이다.
학교는 면내 모든 초등학교가 하나로 합쳐진 상태인데도 이제 규모가 엄청나게 작아져서 8학급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처음 근무 때는 24학급 규모였고, 두 번째 근무 때는 12학급이었으니 격세지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처음과 두 번째 근무 때는 면내에 금진, 비토, 자혜, 서부 그리고, 서포 등 다섯 학교가 각각 존재할 때였으니 단순 비교는 의미 없는 사안인데도 그런 것이다.
교직에 있는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내 고향을 서포인 줄 안다. 사실 내 고향은 곤양인데도 하도 서포 근무를 오래 하다 보니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서포에는 고모님 댁도 있었고, 외가도 있었고, 장형(長兄)의 처가 즉 사돈댁도 있어서 스스로의 행동거지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곳이었다.
묵향(墨香)
참선(參禪)의 진한 맘으로
둥글게 먹을 갈면
문득 이(起)는 번뇌(煩惱)들이
검은빛에 침잠(沈潛)하고
큰 한 정 향기로 피어
세상 가득 퍼져난다
지순(至順)의 붓 끝 고이
수액 마냥 진한 묵 즙(墨汁)
선현(先賢)의 얼을 다져
속진(俗塵)을 씻어 주고
진하디 진한 체취(體臭)로
가슴 성큼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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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교사로 근무할 적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연구주임으로 미술과 우수학교를 추진할 때 지금의 용현 강대백 교장선생님과 합천 이현석 교장선생님이 교사로 함께 근무했었다.
실은 두 사람 덕분으로 과제 추진과 우수학교 평가시에 상당히 쉽게 임하고 지나칠 수 있었다. 이유는 학교 규모에 비하여 놀라울 만큼 대외행사 실적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 점 지금도 그들 생각만 해도 직접 말은 안 해도 고마운 마음 갖고 있다.
특히 당시의 서예실 그 묵향은 오늘날도 잊을 수 없다. 밤이 깊도록 아이들과 씨름하던 두 분의 열정도 아름다웠지만 특유의 그 묵향을 생각하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이기는 하지만 추억은 자꾸만 새로워지는 것이다.
내 모교가 합쳐진 내 고향 학교로
<사천 곤양 초등학교 : 04.03.01-06.08.31>
◇ 역사 깊은 학교 - 어쩔 수 없는 내 모교
곤양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내 고향이다. 비록 내 모교는 아니지만 폐교된 내 모교의 모든 것들이 정리 보존되어 있으니 어쩌지 못할 내 모교인 셈이다. 폐교된 모교 건흥초등학교의 모든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 역사관에서 초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나에 대한 여러 가지 기록들을 접할 수 있었다.
학적부(생활기록부), 수상대장 등 몇 가지 장부들을 들추니 1학년 대부터 졸업할 때까지의 여러 사항들이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특히 내가 가장 어렸을 때의 사진인 1학년 때의 생활기록부 사진이 얼굴이 온전하지 못하고 반 이상이 떨어져 나간 것이라서 아쉬운 마음 금할 길 없었다.
그리고 곤양초등학교는 면내에 있던 건흥, 동명, 서부초등학교가 모두 통합되어 명실 공히 면내 유일의 초등교육기관이 되었는데 사립학교 연혁을 포함하면 100년이 다 된 오랜 역사를 가진 학교이다.
당시 학교 측에서는 하수종 교장선생님과 함께 당연히 사립학교 연혁을 포함하여 100주년 행사를 준비하자는 의사를 총동창회에다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총동창회의 생각은 학교 측의 생각과 정 반대였다.
사립학교 역사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건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자신들이 임원을 맡고 있을 적에 귀찮은 일을 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밖에 받아들일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다. 알고 보면 자기들이 주인이고 학교 측은 임시 관리자들일 뿐인데 주객이 전도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 7년이 지난 2011년에야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으니 한없이 아쉬워서 부탁 받은 축시는 써서 보냈다. 그렇지만 이러나 저러나 곤양초등학교의 역사가 한 세기란 얘기가 되는데 역사가 백년이 넘는 학교는 경남 전체로도 몇 학교 안 되는 것으로 안다.
◇ 당시 교육계의 변화들 - 새로운 역사와 일들
주5일 수업제는 2000년대에 들기 전에도 그 논의나 연구들이 상당히 있었다. 당시 전국 주5일 수업제 연구회장은 경남 진주 지역에서 근무하던 교사였고 부회장 등은 대학교수들이 맡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2005년 드디어 월 1회의 주 5일제 수업이 시행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 준비를 위하여 연구시범학교를 운영허여 보고회를 갖는 등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무슨 일이나 처음 만들어진 제도를 시행하면 자기 처지에 맞추어 찬성하는 축과 결사 반대하는 축이 있게 마련이다.
주 5일 수업제도 마찬가지였다. 토요일에 근무를 하지 않는 직종의 사람들은 대 환영이었고, 그렇지 못한 직종의 사람들은 결사반대였다. 심지어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교원들이 놀기 위한 제도라고 생각해버리는 소인배들이 많아 문제였다.
이어 2006년에는 월 2회 전면 시행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학교는 언제나 피해자적 입장이다. 왜냐하면 토요일에 등교를 희망하는 아동이 있으면 교사들은 출근을 하여 그들을 지도해야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게 쉬운 일일 것 같지만 매우 복잡한 문제다. 학부모들의 편의를 생각하여 일방적으로 희생이 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해 버리면 한없이 괴로운 일이 되고, 내가 하는 일이 아이들을 잘 인도하고 가르치는 일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조씨 고가에서
왕대 숲 병풍으로
세월마저 가둔 성역
낙엽 져 쌓인 대 잎
빛바랜 연륜 헤며
바람새 숨결 고르고
옛이야기 보를 풀고
음산한 골바람이
날개 치듯 비상하다
카랑한 음성으로
대청 벽 타고 올라
대들보 육중한 몸에
흙먼지로 앉는다.
청태 낀 기왓골에
해묵은 잡초 대궁
무너진 댓돌 아래
이끼로 쌓인 역사
아득히 감은 눈앞에
아롱이는 선현의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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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 고가(古家)는 학구 내 환덕리 2구에 자리 잡은 함안 조씨 집성촌에 있으니 함안 조씨의 입곤양 문중의 종손이 거주해 오는 고택(古宅)으로서 도 지정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환덕의 조씨 고가에는 예부터 후손들이 기거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에 관리는 그런대로 잘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필자가 교감으로 근무하는 기간 동안에 야외 현장학습 가는 3학년을 인솔하여 가 본 기억이 있다.
보내 드리는 마음
강 바다 산을 더해
다가온 서기(瑞氣) 받고
수려(秀麗)한 경관(景觀) 더불어
키워온 꿈 다듬어
하늘이 점지한 이 길
필연(必然)으로 택하신 길
망망대해(茫茫大海) 헤쳐 가는 항해사(航海士)의 심정(心情)으로
어린 순 고이 가꾸는 참 농부(農夫)의 지성(至誠)으로
길러낸 님의 동량(棟樑)들이 이 나라를 빛내 가고
백년대계(百年大計) 한 복판에 선구자(先驅者)로 서신 님이
스스로 다진 기단(基壇)에 하나 둘 올린 업적(業績)
찬란한 빛을 뿌리는 금자탑(金子塔)을 쌓았네
역경(逆境)은 기회로 알고
불의(不義)는 마주 서며
순리(順利)의 세월(歲月) 속에
때로 아픔이 있었어도
언제나 꿋꿋한 님께
사랑 모아 보냅니다
이제 시름 접어 두고
평온(平穩) 깃든 마음으로
남보다는 님을 위한
삶이기를 절원(切願)하는
이 시각(時刻) 광영(光榮) 함께한
우리 합창(合唱) 들으소서.
-2005년 8월 말 하수종교장님 퇴임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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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교장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사돈이 되는 분이다. 교장 교감으로는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일반 사람들의 충고도 더러 들었었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실제로 조금도 문제 되는 것 없이 근무를 했다.
사실 이 시조를 구상하여 쓰면서 처음으로 아득히 오래 남은 내 정년을 생각해 보기도 했었다.
그 옛날을 생각하며 - 다시 남해로
<남해 남명 초등학교 : 06.09.01-10.03.01>
◇ 남해의 한 쪽 끝 다랭이 마을이 있는 곳
남명 초등학교가 있는 남해 남면은 남해읍에서 13km 떨어진 위치이고 서면을 거쳐 오는 길과 이동면 소재지를 거쳐 오는 길이 있다.
면 소재지인 홍덕정에는 소도시를 이루는 남면의 중심지 시가지를 이루고 있고, 4일과 9일에 장이 서기는 하는데 다양한 물량들이 풍성하기는 하나 정오가 채 되기도 전에 파장이 되어버리는 시골 장터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남면에는 유명한 가천 다랭이 마을이 있어 자주 텔레비전의 화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2006년 9월에 부임하여 6개월 뒤부터 맞기 시작한 된서리는 내게 진정 크나큰 타격이었다. 가뜩이나 남들이 나를 향해 내성적이라 평했는데 이제는 스스로도 내성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만 것이다.
두 방 된서리의 후유증을 평생 더불어 살자면 운동을 게을리 하여서는 아니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느라 남면 공설운동장, 월포 두곡 해수욕장, 학교 운동장, 주변 산 길 등 무던히도 걸었다. 그래도 그 때 집사람이랑 둘이서, 또는 홍덕정 주민들과 함께 어울려 걷던 그 길들이 고스란히 추억이 되었다.
◇ 7차 교육과정 개정 보완 판 고시
2007년 2월 28일자로 교육인적자원부에서는 7차교육과정의 개정 증보판인 2007년 개정교육과정을 고시하였다.
그 개정의 배경과 기본적인 방향을 살펴보면, 먼저 개정 배경으로 제7차 교육과정 개정(97.12.30)이후 사회 문화적인 변화를 반영한 교육내용이나 내용체계의 개편이 필요하였고, 국가 사회적 요구사항인 과학 역사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방향이었다.
또 제7차 교육과정 적용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들과 교과교육 내용의 개선이 필요하였고, 주5일 수업제의 월 2회 실시에 따른 수업 시수의 일부 조정이 불가피했던 점 등이 개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었다.
개정의 기본 방향을 살펴보면, 제7차 교육과정의 기본 철학과 체제는 그대로 유지하고, 단위 학교별 교육과정 편성 운영의 자율권을 확대하며 과학교육과 역사교육 강화를 골자로 하는 국가 사회적 요구사항을 반영하게 하였다.
또 학습량과 수준을 적정화하고 학교 급, 학년, 교과간의 내용 연계성 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의 교과별 교육내용을 적정화 하도록 하고, 주5일 수업제의 월 2회 시행에 차질 없도록 수업 시수를 일부 조정하도록 하였다.
回憶
육십갑자 넘긴 나이
새삼 느껴지는 즈음
되돌아 회한(悔恨)이라도
가고 없는 허전함 뿐
고요히
좇는 숙명론(宿命論)
가슴 안의 잔물결
조용히 가다듬어
앞을 보는 눈 안에는
내가 만든 이야기가
영상(映像)인 듯 열려오고
젊음이
내 것이었듯
남은 것도 내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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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 초임지인 남명초등학교 근무 중에 나는 회갑을 맞았다. 여러 가지 사회적 현상들의 발달 등으로 예전과는 많이 다른 의미의 회갑이지만 당시의 나는 심근경색과 췌장 수술이라는 된서리 두 방을 맞은 뒤라 자꾸만 살아온 세월 전체가 되돌아 뵈는 삶이었다.
그래서 우선 내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이어 더불어 살아온 교단도 되돌아볼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삼천포 신항 도시, 노산 공원이 있는 곳
<사천 노산초등학교 : 10.03.01-11.09.30>
<함께했던 직원들> 2010.3.1/박용화(교감), 홍둘임, 정정남, 김남숙, 김윤희, 이정훈, 임중근, 천희선, 김계자, 조지민, 배정환, 황유연, 김세련, 정진희, 박희상, 조현정, 이진호, 곽평호, 우한희, 황신애(특수반), 이지은(유치원), 이소영(보건), 성영미(영양), 한언진(행정실장), 박정화(조리), 박동옥, 권정율, 민평란, 최민아, 전선애, 정인숙, 추은경 2010.7.1/강석호, 김미영, 박지용 2011.3.1/류송자, 박미숙, 구미진, 유은정 기간제 선생님들/권성근, 천재선, 최경임, 임희숙, 박슬아 |
○ 노산(魯山)이라는 곳
노산(魯山)이라는 학교 이름은 개교 당시인 1987년에 지금의 동서금동 학교 자리에 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개교를 준비하면서 인근에 있는 삼천포를 대표할만한 브랜드 가치의 비중을 충분히 지닌 노산 공원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붙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만큼 노산공원과 노산초등학교는 가까운 거리에 이웃하여 있다.
위치는 삼천포 시가지의 고성 쪽 끝자락이고, 학교 앞을 지나 10분정도 승용차를 달리면 곧이어 고성군 하이면이 나온다. 학구 내에 유명한 남일대 해수욕장이 있고 도다리가 많이 잡히는 진널 마을을 거쳐 신항 길을 따라 가다가 남일대 해수욕장 방향이 아닌 해안선 끝 부분 쯤의 산에 진널 전망대가 자리 잡고 있다.
인근 통영 사량도로 차량과 손님을 함께 태우고 가는 객선이 다니는 항구가 있고, 또 유명한 팔포 매립지에 있는 횟집 촌이 길게 연결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팔포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는 팔장개. 팔양개. 팔양포. 팔장포라고 불린 서금동 동쪽과 동금동 사이에 있는 내를 중심으로 한 지역 이라는 뜻이 있고 옛날에 한내의 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 여덟 팔자 같이 벌어졌다고 하는 의미와 팔문장, 팔 장수가 났다고 하는 의미 등이 합쳐져 동네의 이름이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내가 부임했을 당시 학급은 17학급에 병설유치원이 2개 학급이었다. 이건 연전에 필자가 관내 교사로 근무할 당시의 학교 규모와 비교하면 대개 반 가까운 정도의 교세(校勢)가 줄어든 상황이었다.
그 원인은 자세하게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바다와 가깝게 인접한 탓으로 주택이나 아파트의 밀집된 건축이 이루어지지 않아 인근의 발전이 되지 않은데다가 이웃 용산초등학교 주변에 아파트 단지 등이 들어서 많은 주민들이 이주하는 바람에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전임지인 남해 남명의 어린이들에 비하여 순진한 면은 완전히 딴 판이었고, 어린이들 자기들끼리 통하는 삼천포 지역의 초등학교 6학년 소위 짱이 노산초등학교에 재학하고 있음만 봐도 하교 후에 학원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그들의 일상은 어른 뺨치는 일들이 벌어지곤 했을 것도 다만 짐작으로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실제로 내가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6학년 한 어린이가 흡연을 했다는 제보가 들어와서 보건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이 합심으로 생활지도에 임하는 등 생활태도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아동들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2010년 2학기에는 한 어린이가 시내의 다른 학교 학생을 자신의 집에 불러다가 아버지의 골프채로 쳐서 얻어맞은 아동은 육체적인 상처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상당한 타격을 입어 우리학교도 아닌 타교의 학부모가 교장실로 찾아와서 학교장인 필자를 면담하는 등의 일도 있었다.
그 규모는 얼마 되지 않는 학교지만 불과 몇 년 전의 규모와 교세 때문에 그래도 제법 널리 알려진 학교이기도 하고 교육 지원청이 주관하는 체육대회, 합창 합주대회 등 모든 행사때 교세에 맞지 않게 1부에 속하는 바람에 늘 성적이 좋지 않았다. 도회지에 있는 학교인 것은 분명한데 해마다 학생 수가 점점 줄어드는 학교인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 나보다 먼저 온 소문
난생 처음으로 내 이동(移動)에 있어서 사실과는 전혀 다른 해괴(駭怪)한 소문이 함께 와 있는 경우를 볼 수 있었다.
내가 남해 남명초 교장으로 근무하다 사천 노산으로 옮겨온 2010년 3월 당시 사천 교육청(지금은 교육지원청) 관내에는 노산, 서포, 축동초등학교 교장선생님들이 정년퇴직을 하셨다. 여러 가지 정황들로 미루어 남해에서 사천으로 전입한 내게 가장 걸맞는 학교는 전기한 세 학교 중에서는 축동이 가장 적합했다. 그건 내 생각 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누구의 생각으로도 그게 정답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설명하기 곤란한 어떤 요인으로 내가 노산으로 가게 되었으니 제일 먼저 노산행을 꿈꾸었던 내 선배님께 죄송했고, 주위 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얘기들을 했다는 전언을 후에 들을 수 있었다. 더구나 그 선배님은 직접 선배이기도 하지만 전에 이웃에 근무하면서 아주 가까이 지낸 선배님이기에 더욱 죄송했다.
‘김형진이 그 사람이 그런 짓 할 사람이 아닌데------.’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격한 말투였음은 읽는 사람들의 판단에 맡긴다.
그런 짓(?) 할 사람이 아닌 것은 고사하고 그런 짓(?)이 나중에 불러올 파장 등 어떤 방향으로 해석을 하려고 해도 내 노산행은 내게 불리하기만 한 이동이었고 그래서, 고개 갸우뚱거리는 사람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짓이란 도대체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면 인사에 있어 여러 가지 요인들을 가지고 질서를 지켜야 뒤에 소위 잡음이란 것이 없는 법인데 그런 질서들을 인사권자가 함부로 무너뜨려서 누가 봐도 질서 없는 인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인사를 했다는 이야기이고 거기에 내가 수혜자로 자리했다는 불명예스런 짓이라는 말이다.
발령은 내가 낸 것도 아니라 엄연히 다른 기관이요, 사람이 낸 것인데 마치 내가 그런 엄청난 기관이나 사람들을 내 뜻대로 조종이라도 해서 상식선을 벗어난 음모를 꾸몄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니 해괴하다는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아울러 당시에 사천 지역은 조금은 이야깃거리가 되는 화젯거리로 한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전언이 있었다. 언제나 남의 이야기는 상당부분 주관적인 입장에서 난도질하는 재미가 훌륭한 술안주도 되고, 또 아주 좋은 스트레스 해소용(解消用) 선약(仙藥)이 되는 법이니까.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소문이 나보다 먼저 당도해 있었거나 말았거나 나는 노산초등학교가 교장으로서의 두 번째 임지인 것은 틀림이 없었고, 부족하나마 소신을 펴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을 수밖에 없었다.
○ 다소 먼 통근 길
진주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자동차로 측정한 결과 대략 35킬로미터였고, 필자의 운전 실력으로 50분이 좀 넘게 걸려야 하는 거리로 다소 먼 통근길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통근을 하지 않는 방법을 강구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사택이라도 있으면 거주하면서 진주 집에는 가끔씩 다녀오는 방식으로 근무를 할 수도 있겠는데 일이 꼬이느라고 사택마저 있던 것을 오랫동안 필요가 없어 교육청에서 환수조치한지가 이미 여러 해가 지났다고 했다.
매일 왕복으로 70킬로미터를 달리는 일이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더러 내 나이또래에도 운전을 즐기는 사람이 있어서 나를 보고 웃으면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그걸 힘들다고 하나?”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좀 다르다. 심근경색에, 췌장 수술 등 굵은 병명으로 서울 아산 병원 신세를 진후에는 스스로도 느낄 만큼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
예컨대 출근 길에 운전을 하여 남양중학교 앞에 다다를 즈음에는 자주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참기 어려울 적이 있었으니 남들이야 뭐라고 말을 하건 내게는 버거운 일이었고, 분명히 개선의 여지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천만 다행으로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선생님이 한 분 있어서 둘이서 번갈아 가며 카풀을 함으로써 조금은 부담을 덜 수 있었지만 힘든 것은 어쩔 수가 없었고 결국은 다소 먼 통근 길 때문에 1년 반 뒤인 2011년 9월에는 정동초등학교로 스스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 종소리 영어 도입 활용
종소리 영어는 수업의 시종을 알리는 종소리를 대신해서 짧은 영어 문장을 들려주는 방법을 말한다. 물론 원어민이 녹음한 양질의 자료를 활용하여 기왕에 도입된 초등학교에서의 영어교육에 아주 자연스런 방법으로 도움을 기하자는 의도에서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게 된 것이다.
처음 종소리 영어를 접하게 된 것은 교장연수 동기인 부산의 이용빈 교장선생님이 자기 학교(당시 부산 개금초등학교)에서 사용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과 예산을 투입하여 만든 그야말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하고도 좋은 자료였다.
그런데 그것을 교원대학교에서 교장연수를 함께하는 동안 같은 거실을 사용했다는 인연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무상 사용을 허락한 것이다. 메일로 받은 사이버 자료를 노산초등학교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다.
요즈음의 초등학교 방송시설이라면 모두 다 어려움 없이 사용이 가능하고, 혹 낡은 방송 기기 탓으로 사용이 어렵거나 불가능하면 첨가하는 시설 간단한 것 하나면 손쉽게 활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료의 내용이나 운영 방법 등을 따로 설명하자면 길어질 것 같아서 시작 당시 학부모님들에게 안내해 드렸던 안내장의 문구를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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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우리 어린이들의 영어에 대한 친숙함과 의사소통 능력을 길러주기 위하여 실시하는 “종소리 영어”에 대해 안내드립니다.
앞으로 학생들은 종소리 영어 방송을 통하여 원어민이 직접 녹음한 간단한 문장들을 반복하여가면서 아주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듣게 됩니다. 1주에 2개의 문장을 매일 수업 마치는 종으로 반복(20여 회)하여 듣게 됨으로써, 부담 없이 영어 문장을 익힐 수 있습니다.
-중략-
국제화, 세계화 시대의 주역이 될 우리 정동어린이들을 위해서 학교에서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종소리 영어”를 통해 영어와 친해지도록 학부모님들의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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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쓰기를 학교 특색교육과제로
2010년 3월 초에 부임 당시 노산초등학교 특색교육과제는 대취타 운영이었다. 다른 학교에서는 잘 하지 않는, 차별화된 종목인 셈이다. 그런데 몇 년간 계속해 오는 동안에 열성적이던 담당자는 전근으로 다른 학교로 갔고 후임으로 맡은 선생님은 그 분야에 문외한인데다가 관심도 부족했다.
학교장도 그저 그런 관심으로 명맥의 유지도 곤란한 지경이었고 그러니 자연적으로 악기마저 고장 나서 소리조차 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인데 그 악기들의 가격 또한 크게 부담되는 사안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특색과제로는 도저히 부끄러워 차마 입에 올리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대취타를 아동들이 이해하고 국악과 친해지도록 하고, 해당 악기 연주의 기능을 갖출 수 있도록 지도하는 과제를 이어 나간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여건상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임을 안 이상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해서 생각해 낸 것이 민족시 시조 교육으로 특색과제의 종목을 바꾸는 것이어서 선생님들과 의논한 끝에 결정을 보았다.
다른 학교에서도 계속해온 일이라 어려움은 없었다. 3,4,5,6학년을 각 반에 주 1시간씩 국어시간을 할애 받아 지도를 했다. 각 반 지도 시 담임선생님들은 아동들과 함께 앉아서 지도방법을 연수하도록 안내했다. 마련되어 있는 교재의 부분마다 어떤 방식으로 지도를 하는지만 세밀히 기록하도록 함으로써 다음해에는 모든 선생님들이 지도를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3,4,5,6학년 전 아동들이 시조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것은 1학기가 끝나갈 무렵인 7월 말 경이었다. 그동안 학급마다 절장시조집, 양장시조집, 평시조집을 차례로 발간했고, 학예발표회와 때를 같이하여 시화전을 교내에서 가짐으로써 민족시 시조교육은 그 결실을 튼튼하게 할 수 있었다.
때마침 도교육청이 공모한 특성화 교육 우수학교에 출품을 하기에 이르렀고, 사천교육지원청의 예선 때는 턱걸이로 도교육청까지 보고가 가까스로 이루어졌다. 노산초등학교가 여섯 팀 중 5위로 간신히 추천 되었는데 도교육청에서의 최종심사 결과 우리 지원청에서는 3개교만 입상이 결정되었는데 그 중에 노산이 포함된 것이었다.
우여곡절을 겪고 입상하여 상패와 함께 푸짐한 상금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상금은 전적으로 학교장 재량으로 쓸 수 있는 성질의 상금으로 받은 기 백 만원을 어떻게 쓸지를 직원회의에서 의논했더니 선생님들의 대답이 한결같았다.
“시조는 교장선생님이 지도하셨으니 상금 쓰는 일도 교장선생님 뜻대로 하십시오.”
결국 그 돈으로 졸업생들에게 정식 출판사에 의뢰하여 제대로 된 시조집 <추억 샘 우정 샘>을 발간하여 선물했다.
졸업식장에서 출판 기념회와 시화전을 곁들임으로써 이색적인 졸업식을 연출하여 아동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하도록 했다.
○ 교육방송과의 교섭 시도 - 결과는 오리무중
시조가 민족문학이라는 점 때문에 나는 지금껏 시조를 널리 보급하고자 애를 쓰고 있다고 자부한다. 나 혼자만,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만 애쓰기보다 전국을 대상으로 확장해 보고자 하는 욕심이 생겨 2010년 5월에 교육방송과 협의를 하기 위해 사이버 상으로 접촉을 하여 대화를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그 결과 상당히 고무적인 반응을 보여서 기대를 잔뜩 했었는데 여태 감감 무소식이어서 실망감이 크지만 그들은 그들대로 사정이 여의치 않았나 보다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맨 처음 필자가 교육방송 홈페이지에 문의의 글을 올려 접촉한 것, 즉각적으로 보여준 답변,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금 구체적인 답변을 보내왔던 것을 단 한 글자도 수정 없이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필자가 메일로 보낸 글이다.
사장님께 먼저 생면부지의 사람이 이런 글 드리게 된 점 양해부터 구합니다.
저는 경남 사천 노산초등학교 교장 김형진입니다. 저는 오래 전 교사 때 부터 순수 민족시 시조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여 시조문학지 추천을 거쳐 문단 데뷔를 했고, 초등학교에서 시조 쓰기 지도를 해 왔습니다. 그간 시조집도 네 권을 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지금 교장으로서 우리학교 4,5,6학년 아동 전원이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시조를 쓸 줄 알도록 하려고 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대부분 황당해했지만 저는 성공한 경험이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에 장담하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의 얼이 담긴 時調와 國技 태권도를 비교하면서 <태권도는 배울 곳이 많은데 시조는 배울 곳이 너무 없다.>는 생각에 고심하다가 민족시 시조를 읽고 감상할 줄만 아는 것 보다는 쓸줄도 아는 국민이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지도자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아동들을 지도하면서 교사들이 지도를 어려워하고 꺼리는 이유가 지도할 프로그램 부재 탓인 것을 깨닫고 연구하여 우수아동이 아닌 학급 전체아동을 지도할 수 있는 지도과정안과 아동용 워크북을 개발하여 1990년부터 지도하여왔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그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시조 지도는 교감이 된 후에도 계속해 왔고, 교장이 되고서도 계속해 왔습니다.
제가 지도하는 방법은 우수아 대상의 문예반 지도가 아니라 학급 단위 전 아동을 대상으로 지도하여 100% 따라오는 것을 감히 장담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도 방법을 아동들과 함께 지켜보던 담임교사들에게 단계별로 1/2정도는 담임이 하도록 함으로써 일련의 과정이 끝나면 다음 해 부터는 자기반 아동들을 대상으로 지도하도록 함으로써 연수 효과도 확실합니다.
저는 아동들이 단계적으로 성장하여 시조를 쓸 수 있게 되는 과정을 될 수 있는대로 널리 알려 우리 순수민족문학 시조의 위상을 높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연구하여 만든 지도과정안과 아동용 워크북을 가능한 한 널리 보급하여 그 효과를 높이는 것이 제 꿈입니다.
그러자면 교육방송을 통하면 좋을 것 같아서 우선 문의를 드리는 것입니다.
지도과정안은 대충 시조를 절장시조 ,양장시조 ,평시조, 연시조의 네 단계로 구분하여 아동들이 단계별로 체험을 통하여 익히고 쓰도록 하는 것입니다.
금년에도 벌써 첫 단계인 절장시조를 마스터하고 시조집이 발간 되었습니다.(4,5,6학년 9개 학급별로)
아동용 워크북은 지도과정안과 연계하여 만든 학습장입니다.
앞으로 양장시조집, 평시조집, 연시조집을 차례로 발간하면서 우리 아이들을 모두 시조를 쓸 줄 아는 어린이로 키울 수 있음은 자신 있게 장담할 수 있습니다.
10월 중순경이 되면 4,5,6학년 전 아동이 참가하는 시조 시화전도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제 이야기가 혹 허황된 어느 시골 교장의 꿈일 뿐이라 여겨지시면 이 편지는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2010.5.31. 13:52)
다음은 글을 올리고나서 약 두 시간 여가 지난 후 보내준 방송국 측의 답변인데 역시 단 한 자도 수정이나 가감 없이 그대로 소개한다.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좋은 의견에 감사드리며 우리 아이들의 창의성 및 인성 교육을 위해 노력하시는 교장 선생님의 열정에 감사드립니다.
보내주신 내용을 관련 부서로 보내 검토한 후 상호 협력할 수 있는 방안에 관해 논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곽덕훈 드림(2010.5.31. 16:17)
마지막으로 이틀 뒤에 조금 자세한 내용으로 보내준 답변이다.
좋은 제안을 주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시조에 대한 선생님의 애정과 열정이 느껴집니다.
EBS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지만 시조 짓기와 관련한 프로그램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제안에 많은 직원들이 공감하고 있으며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할 기회가 된다면 꼭 찾아뵙고 취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동용 워크북을 만드시고, 학생들이 체험을 통해 각 단계별로 시조를 익힐 수 있도록 한 선생님의 열정에 다시 한번 열렬한 응원을 보냅니다.
선생님의 독창적인 노력이 더 큰 결실로 이어지길 기원합니다.
꼭 취재해서 방송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0.6.2. 13:47)
그러고는 여직 감감 무소식인 것이다.
○ 교육청에서 교육 지원청으로
2011학년도부터 갑작스럽게 지역교육청의 명칭이 교육 지원청으로 바뀌었다. 교육청과 교육 지원청이란 이름을 놓고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어렸을 적에
‘곰곰 생각하니 곰 다리가 네 개더라.’
라고 하는 어른들의 말씀을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따라 썼던 기억을 떠올리며 실소를 금치 못하는 가운데 나름대로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교육청이라면 교육에 관한 제반 사항을 관장하는 관청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고, 굳이 교육 지원청이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교육에 관한 제반 사항들을 지원하는 봉사적 뉘앙스가 풍기는 의미의 관청이라는 것일 텐데 그게 필자 생각으로는 100% 찬동할 일이 아닌 듯하니 문제라면 문제인 것이다.
쉽게 공감이 가지 않는 이유를 몇 가지 들어보면,
첫째로 교육 지원청으로 명칭을 바꾼다고 해서 구성원들의 하는 일이 바뀔 수가 없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혹 근무하는 자세를 군림에서 지원 쪽으로 바꾸라는 의미로 입안을 했다면 그 당시 지역교육청 교육장님이나 장학사들이 군림하는 자세를 보인 경우는 필자가 볼 때는 전혀 아니다. 오히려 친절한 그 자세를 일선 교사들이 배워서 학교, 학급경영이나 대 학부모 관계에 적용을 권하고 싶은 사안이었다.
둘째로 필자 혼자만의 잘못된 생각일지 모르는 일이지만 국정을 수행하는 관청이면서 소위 좀 높은 곳은 지원적 자세로 업무 수행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고 상대적으로 낮은 곳은 지원적 자세로 업무에 임해야 한다는 말은 잘못이 아닐까? 청와대까지도 국민을 위한 방향의 정무를 위해 고심하고 있음이 사실일진대 하물며-------.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도교육청은 그대로 교육청이어야하고 시군교육청은 지원청이어야 하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도 교육청도 경상남도 교육지원청이어야 일관성 있는 관청의 이름이 된다는 생각인 것이다.
셋째로 상부 관청의 영으로 명칭을 바꾸었다면 그걸 바꾼 취지를 살린다는 의미에서라도 그대로 써야한다는 생각이다. 관청의 명칭은 일종의 고유명사에 속한다. 그렇게 정해만 놓고 제대로 사용하지 않을 바에는 간단히 말해서 안해도 될 일을 한 셈 즉, 헛일을 한 셈이란 것이다.
그건 만 2년이 지나고 3년도 한참 넘긴 오늘까지도 도교육청이 보낸 공문서에 어떤 때는 지역교육청으로, 어떤 때는 지역교육 지원청으로 아주 무질서하게 사용하고 있으니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공문서도 그렇지만 나이스상에까지도 그런 곳들이 있으니 어쩌면 심각한 문제에 속하는 것이다.
혹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면 된다.’는 말로 설명을 한다면 이런 사안하고는 맞지 않으니 설득력이 전혀 없다. 그러니까 결론은 바꿀 필요가 전혀 없는 교육청의 명칭을 쓸 데 없는 탁상공론으로 바꾼 것이나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란 뜻인 것이다.
차라리 이름은 그대로 두고 소속 직원들의 근무 자세를 대민 지원자의 입장에서 친절과 봉사가 이루어지도록 했다면 국가 기관의 이름을 혼용하는, 그래서 많은 이들을 어지럽게 만드는 불합리한 사안은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 사회체육시설의 학교 구내설치 문제
노산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사천시가 설치한 사회체육 시설, 다시 말해서 야외용 헬스기구가 상당히 많이 설치되어 있다. 체육공원이나 등산객이 많은 산 정상 부근에 주로 설치해 놓은 <옆 파도타기>, <하늘 걷기> 그 밖에 이름도 잘 모르는 체력단련용 기구들이 초등학교 운동장에 설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 규격은 물론 사회체육시설이라서 그렇겠지만 초등학교 학생들이 사용하기에는 전적으로 부적합하다. 학교의 주인인 아이들에게는 화중지병(畵中之餠)이요 무용지물(無用之物)에 속한다.
물론 처음 설치할 때에는 아동들이 하교하기 전에는 주민들이 사용하지 않는다는 전제나 계산에서 세웠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다른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노산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어르신들이 운동장 트랙을 돌거나 야외용 헬스기구로 운동을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몇 번 보고 망설이다가 어느 날 운동을 열심히 하고 계시는 할머니께 다가가서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건넸다.
“저는 이 학교 교장입니다. 수업시간 중에는 여기서 운동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할머니.”
그랬더니 대답이 참 대처 난감했다.
“고장선상님, 우리가 오대 떠듭니까? 조용히 운동하는대------.”
교장의 말을 쓸 데 없는 간섭쯤으로 여기시는 말투에 그만 할 말을 잊었다. 물론 대화는 더 계속했다.
“그래도 교실에서 아동들이 공부에 정신을 쏟지 못하고 내다보지 않습니까?”
“알았소.”
퉁명스런 말투로 운동을 그치고 교문 쪽으로 나가면서 그들끼리 주고받는 대화가 나를 어지럽게 만든다. 그 말인즉,
“앞애 고장덜언 안 그라더마넌 이분 고장은 좀 빡세내.”
그러니 내가 뭐라고 더 할 말이 있겠는가? 한정 없이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자부는 하는데도 그렇게 비쳤으니 어쩌겠는가?
‘죄송합니다. 할머니.’
들리지는 않지만 속으로 그러는 수밖에----.
노산은 그나마 사회체육시설로 인한 안전사고는 한 건도 없었다. 다른 학교에서는 아동들이 그 시설을 이용하다가 잘 못하여 발이 끼이는 사고가 있었는데 학교장이 꼼짝 없이 거액의 치료비에다 알파를 더하여 물어주고 무마시킨 일도 실제로 있었었다.
이런 일은 언제나 마지막 법의 심판을 받기 전에 속되게 말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사롭게 무마하고 마는데 그 원인은 일선학교나 학교장의 편에 서서 끝까지 도와줄 곳이 한 군데도 없는 실정인 탓이니 그런 사실이나 원망하고 말아야 하는 것이다.
아주 소박한 바람이지만 학교 안에 사회체육시설이 들어와서 좋을 것 하나 없다는 필자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이 늘어나기를 희망할 뿐이다.
용담화(龍膽花)
호젓한 산길 홀로
묵상(黙想)으로 걷다가
모퉁이 돌아설 때
문득 만난 기꺼움에
보랏빛 그리움 하나
막힌 가슴 열었소
진한 향 미치는 곳
온 세상은 아니래도
반가이 맞는 이가
열 손가락 안(內)일지라도
소박한 그대 자태(姿態)에
눈웃음이 피었소.
낮에는 미소 지어
객(客)의 수심(愁心) 덜어주고
밤이면 더운 가슴
홀로 삭인 아쉬움을
내리는 찬이슬에다
달래보는 그대 시름
⧉시작 노트⧉
노산 근무 때 점심시간에 간혹 걷기운동을 했었다. 하루 한 시간 이상은 꼭 걸으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지만 즐거움이 절로 수반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남일대 해수욕장을 지나 산길이 있는데 인적이 드문 어느 지점에서 만난 꽃이 하도 예쁘고 인상적이어서 알아보았더니 용담화라하여 용의 쓸개를 뜻한다고 했다.
아마 그 맛이 용의 쓸개처럼 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용담 꽃은 아침에 꽃잎을 열었다가 저녁이 되면 입을 다문다고 한다.
내가 용담 꽃을 만난 건 10월의 가을쯤이었다. 그리고, 용담화의 꽃말이 ‘정의’ 라고 하니 거기 따르는 좀은 장황한 설화가 있건 말건 좋은 쪽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교학성로 마지막 정거장 - 니구산 바라보며
<사천 정동초등학교 : 11.09.01-13.08.31>
<함께 했던 직원들> 2011.9.1/이순복(교감), 차차훈, 양정미, 황정임, 박현희, 임연희, 조숙희, 문금이, 정애연, 이순주, 김민정, 정진아, 곽요한, 김혜숙, 강경왜, 김종희(도움반), 강홍점(보건), 이정옥(영양), 신희자(유치원), 하진희(유치원), 박영화(행정실장), 이병태(주), 정대경(주), 정옥선(주), 박지성(주), 박송이(주), 이성연(교), 천현희(특), 백미수(조), 임정남(조), 허희선(조) 김현옥, 정대도, 이정은, 박정선, 이필생, 정재윤, 이성호(경비) 2011.9.30/홍혜리(조) 2012.3.1/김춘자, 구미옥, 유배승, 2012.7.1/최용환(주) 2012.9.1/이창현 2013.1.1/박현국(주) 2013.3.1/윤영순, 이경숙, 김성훈, 주단하, 이숙남(유)/ 2013.4.15/박문혁(기)/ 2013.6.20/도미석(조) 2013.7.1/백운길(경비) |
○ 마지막 지게 자리
나는 어렸을 적에 산에 나무하러 많이 다녔다. 농촌에 태어나 살면서 조리용도 난방용도 모두 산에서 해 오는 나무에 의존하던 시절이었으니 어리다고 나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고 너무나 당연히 나무하는 일이 내 일일 수밖에 없었다.
나무를 하는 일이란 산에 가서 갈퀴라는 기구를 사용하여 주로 소나무, 오리나무 등의 낙엽을 긁어모아 새끼줄로 묶어서 집까지 지게로 져 날라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전에 일차적으로 낙엽을 긁어모을 적당한 자리를 잡고 지게를 벗어 놓게 되는데 그 장소를 우리는 지게 자리라고 했다.
이제 이 곳 정동초등학교를 나는 마지막 지게 자리로 잡은 셈이다.
그동안 무수히 나무를 했고 그걸 져 날라서는 유용하게 썼다. 그게 우리 교육현장의 일로 보자면 옮겨가는 학교마다가 나무꾼의 지게 자리요, 열심히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곧 나무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마지막 지게 자리』라는 생각에 일말(一抹)의 서글픔이 느껴진다. 이는 그간 내 활동이 상당히 미흡(未洽)했다는 스스로의 판단에 기인(起因)된 것일 텐데 그렇다면 이제는 달리 방법이 없다.
이제 방법은 단 하나 2011년 9월 1일부터 2013년 8월 31일까지 정해 놓은 기간 동안만 내가 작업할 권한을 가진다. 정말로 이 마지막 지게 자리에서 나무하는 작업을 마칠 때쯤에는 스스로 뿌듯한 마음으로 지게를 지고 자리를 떠날 수 있어야 하리라.
○ 정동이라는 곳
정동초등학교가 자리한 정동면은 사천시의 읍면동 중에서 이름 그대로 제일 동쪽에 자리 잡은 곳으로 학교는 면사무소와 나란히 자리 잡은 정동면 대곡리에 있다.
사천읍과 가까이 있거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읍, 화암, 예수마을이 있고, 면을 가로지르는 사천 천을 건너면 꽤 널리 알려진 사찰로 니구사(尼丘寺)가 니구산의 6부쯤 되는 골짜기에 자리 잡은 수청 마을이 있다.
니구산(尼丘山) 정상 줄기들로 경계를 이룬 산 너머는 사남면이 있고, 고성군과의 경계는 감곡, 학촌, 소곡 마을로서 옛 신월초등학교 학구로 이어져 있고, 정동면의 중심지는 공공기관들이 자리 잡은 대곡마을이고 고성 쪽으로 강을 건너서 일명 놀래라고도 하는 노천이 포함된 장산리가 자리하고 있다.
정동면의 주 농산물은 감과 복숭아를 꼽을 수 있는데 감은 전국적으로 알아 줄만큼 유명한 정동 감으로 수확기가 되면 도로변에 감을 파는 주민들이 꽤 긴 거리를 이어 자리 잡고 지나가는 차량들을 세우게 하고 판매를 하고 있다. 그렇게 하여 판매되는 양이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비중이라는 전언이다.
수청이라는 마을을 주로 하는 복숭아도 당도가 높아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물이다.
또 하나 정동의 특징은 사천읍과 너무나 가깝게 붙어 있는 바람에 면 소재지로서의 위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면 소재지에 다방 하나도, 노래방 하나도 없는 실정인 것이다. 어쩌면 그런 위락시설이 없어서 불편함이야 없겠지만 그런 시설이 있다면 면의 살림살이에는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도 그렇고, 실정을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학교는 2013년 2월에 제79회 졸업생을 배출한 상당히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고, 동문들은 경향각지에서 눈부신 활동들로 정동인의 기상을 한껏 펼치고 있고, 특히 교육계에는 교육행정가로 이름을 날리는 분들도 있고, 평생을 교사로 재직하시면서 오직 아이들 잘 가르치는 참 스승으로 오래 오래 존경과 추앙 받고 있는 동문들이 많은 학교이다.
○ 여기는 더 해괴한 소문이
부임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전임교 노산초등학교에서 나를 포함한 전출자들을 위한 송별연회 자리에서 부장교사 한 사람이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교장선생님, 정동 가시는 데 대해 밖에서 이런 얘기들을 합디다.”
“어떤 얘긴데요?”
“어느 선배가요, ‘느그 교장 노산서 선생님들과 싸웠거나 안 좋은 일이 있었재?’
라고 하셨습니다.”
그 부장교사의 부연 설명에 의하면, 극구 아니라고 하는데 그 선배라는 분이 내 뱉는 한마디가 의미심장한 것이었단다. 그 말인즉,
“네로서는 임마, 그리 말할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이미 물어서 파악하려는 절차를 밟자는 것이 아니라 제 멋대로 기정사실화하여 굳게 믿으면서 확인하는 수순인 셈이다.
그 선배가 누구냐는 내 물음에 끝내 밝히지 않으려던 그 부장교사는 내가 대충 누군지 알겠다고 하면서,
“그 선배 내가 지 같은 줄 알았는가보네.”
라고 하자 그만 누군지를 밝히고 말았다. 알고 보니 퇴직 전에 그 선배는 성희롱 문제로 좌천(左遷)을 당했던 전력(前歷)이 있는 분이었다.
‘왜 그런 소문이 나야 했을까?’
한참을 생각한 끝에 짐작으로, 그것도 순전히 나 혼자만의 사고방식으로 유추(類推)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있었다.
노산이 정동보다 학교 규모가 조금은 크다는 점이 그것인데 사람에 따라 사고방식이 제각각이니 큰데서 작은 데로 옮기면 무조건 좌천 쪽으로 결론짓는 사고방식의 소유자라면 가능한 얘기라는 결론을 짓고 혼자 웃고 말았다.
정녕 나는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와 아울러 정동에 와서 할 일도 나름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 연구시범학교 보고회
2011학년도에는 특수교육에 관한 경상남도교육청 지정 연구학교 운영 보고회를 우리학교 단독으로 개최하였다. 대개 몇 개 학교씩 동일 주제의 학교가 모여서 합동 보고회를 개최하여 업무양이나 예산을 줄이는 추세였으나 우리학교는 여러 가지로 당시 여건이 합동 보고회를 갖기에는 여의치 못하여 단독 보고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통합교육 프로그램 운영을 통한 장애 인식 개선과 사회 적응력 신장』을 주제로 1년 동안 계획하고 운영한 내용들을 도내 각 초등학교와 특수학교 교사들을 회원으로 모아놓고 양정미 연구부장이 보고를 했다.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즐거움으로 하나 되는 집단 추구를 주 내용으로 하고, 환경 조성면에서는 장애 이해 코너를 마련하여 시각자료를 통한 통합교육 이해를 모색했고, 통합교육 관련 홈페이지를 구축하여 사이버를 통한 정보 공유를 추구했으며 월 1회정도 특수교사와 통합학급 담임교사간의 통합교육협의회를 통하여 실질적인 교육활동 방법 개선에 힘썼고 사천시 장애인 복지회와 특수교육 지원센터를 주축으로 지역의 관련 기관이나 단체를 활용함으로써 교육의 사회화를 꾀하기도 했다.
통합교육의 활성화를 위한 연수활동은 교내연수를 월 2회로 기획하여 알차게 운영했고 세 차례에 걸쳐 전문가를 초빙하여 학부모와 교사들을 대상으로 통합교육 이해와 자녀의 문제행동에 대처하는 방법 등을 연수했다.
그 밖에도 교수-학습 활동 중심의 통합 프로그램 전개, 함께 하는 온돌방 통합학급 운영, 사회 적응 체험학습 실시, 라온놀이로 열린 마음 실천, 알음알이활동으로 장애인식 개선을 꾀하는 등 나름대로 알찬 운영으로 회원들의 갈채를 받아낼 수 있었다.
보고회 순서 중에 전문가를 모셔다가 듣게 되는 강연 강사로 내 교대 동기인 강찬기 교장의 차분한 강의에 몰두하는 청중들이 정녕 보기 좋았었다.
○ 영원히 살린 소나무
정동초등학교에 부임해 와서 보니 교문 들어서서 운동장 초입 지점의 오른 편 교장 사택 입구에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꽤나 잘 생긴 소나무 두 그루가 죽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기가 막힌 것은 전전임 교장이 처음 옮겨 심을 적에 죽을 줄 알고 옮겨 심었다는 얘기를 전해 듣는 순간이었다.
결국 전전임 교장은 나무를 옮겨 심었고, 전임교장은 죽어가는 징후가 보이기 시작하자 살려보겠다고 영양제를 투여하기도 했고, 속설대로 술을 부어주기도 하는 등 무진 애를 썼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처리 작업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깊이 생각을 해 본 후에야 당시의 상황(常況)상 어쩔 수 없었겠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아쉬운 마음은 금할 길 없었다. 아울러 전임자가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정림관(정동 체육관의 이름) 신축을 위하여 급하게 노송 두 그루를 옮겨 심어야 했는데 일이 시간적으로 급하다 보니 졸속스런 이식이 될 수밖에 없었고, 옮겨 심은 후 아주 서서히 말라가는 소나무를 보고 고심도 많이 했다는 당사자(전전임자)의 전언을 듣고서야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이제는 도리 없이 내가 두 노송을 처리를 해야 할 지경이 되었는데 우선 전문기관인 경남 산림연구소(진주 반성 수목원 소재)에 공문을 보내어 정식으로 전문적인 진단을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공문서로도 회신을 해 주었지만 공무원 두 분이 직접 학교까지 방문하여 자세한 설명을 해 주기도 했다. 결과는, 나무는 이미 죽은 것이라서 더 이상 지켜볼 필요도 없는 상황이고, 뽑아내고 대체목(代替木)을 심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름대로의 고심 끝에 두 그루의 소나무를 그대로 이용하여 장승을 만들어 세우기로 했다.
수소문 끝에 교직에 함께 하다 연전에 정년퇴직하고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는 선배를 연결할 수 있었고, 50만원에 둘 다 새겨주겠다는 말씀에 확정을 짓기에 이르렀다.
비용은 이 계획을 들은 정동 총 동창회장(정동초 29회 조규남-필자와 중학교 동기)이 공사비를 포함하여 일백만원을 희사하기로 하여 진행을 했다. 소나무 두 그루를 베고 껍질을 벗기고, 장승을 새기는 일련의 작업과 곁들여 아홉 개의 솟대를 제작하여 조성을 완료하고 드디어 2012년 11월 27일에 민속공원 개원식을 거행하였다.
죽은 소나무를 이용하여 장승을 만들어 놓고 생명을 불어넣었느니, 영원히 살렸느니 하고 말하는 것이 어쩌면 억지일 수도 있고, 말도 아닌 말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 생각은 전혀 거리낌 없고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다.
지금도 공원 앞에는 장승과 솟대를 세우게 된 경위와 그 취지가 아름다운 안내판에 새겨져서 서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조규남 회장이 희사한 부분을 절대로 표시하지 말아달라는 당부 때문에 곧이곧대로 처리하여 기증자 표시가 전혀 안되었다.
학교 곳곳에 기념식수나 조형물 기증자들의 명패가 빠짐없이 붙어 있는 상황에서 조회장의 마음 씀이 고맙고, 더욱 그가 내 친구라는 점이 한없이 자랑스러운 것이다.
다음은 민속공원 앞쪽에 세운 안내 팻말에 새겨진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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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관 신축공사로 옮겨 심은 소나무 두 그루가 안타깝게 고사하여, 새 생명을 불
어 넣고자 장승으로 다듬어 세웠습니다. 장승과 솟대는 예로부터 거룩한 수호신의
의미가 있으니 우리학교와 정동 가족 모두를 지켜 주고 영원히 함께할 것입니다.
2012년 11월 7일
정동초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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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마트교육 이야기
2000년대에 들어서 교육계에는 이상하리만치 새로운 단어 만들기가 거의 패션계를 능가할 만큼 유행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교육에 관련되는 용어나 좋은 몇 몇 단어들의 첫 자만을 모아 전혀 새로운 낱말을 만드는 것이다. 그게 순수하게 우리말이라면 좀 나은데 영어 단어의 첫 스펠들만 모아서 전혀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어 내는 데는 그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운동을 우리는 첫 머리 글자들만 따다 모아서 ‘아나바다’ 운동 또는 ‘아나바다’ 장터라고 했다. 또 생활지도시 활용했던 1970년대 초반의 ‘고미안 운동’도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안녕하십니까?‘의 첫 글자들만 따서 모은 것이다.
스마트 교육이란 용어도 그런 맥락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으니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즉
S : Self-directed(자기 주도적), 즉 과거 교사 주도적인 교육과정 구성에서 학생 스스로 학습을 계획하고 수행하는 자기 주도적 학습을 지향한다는 취지이고,
M : Motivated(학습흥미), 정형화된 교과서 강의 수업에서 다향한 콘덴츠를 활용한 체험기반의 창의적 학습을 지향하며
A : Adaptive(수준과 적성), 단일 과정의 획일적 수업에서 학생 개별의 수준과 적성을 고려한 유연하고 개별화된 학습을 지향하고,
R : Resource free(풍부한 자료), 서책형 교과서 위주의 교육에서 디지털 콘덴츠 및 온라인을 활용한 풍부한 교육 콘덴츠 활용 학습을 지향하며
T : Technology embedded(정보기술활용), 교실과 집으로 국한된 교육 기회를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학습 환경 조성의 기술 기반의 학습을 지향한다는 의미로 해석을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섯 개 단어의 첫 스펠링들을 모으면 바로 SMART라는 단어가 탄생하게 되는데 SMART라는 단어의 원 의미가 <영리하다>, <현명하다>, <멋있다>라는 뜻인데 스마트 교육이 영리한 교육이라 하자니 어색하고, 현명한 교육도, 멋있는 교육도 그 뜻들의 일부는 억지로나마 포함 시킬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어색함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 내용은 다섯 요소들을 다 포함하는 것이 맞고 이름은 신조어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리고, 스마트교육 태동의 순간부터 자주 이루어진 연수장에서 강사들이 너무 빈번하게 예를 든 영향인지 현장에서는 대부분 스마트 디바이스(스마트폰, 테블릿PC 등)을 활용한 교육으로 오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부분일 수밖에 없는 건데 말이다.
우스운 얘기가 될지 모르나 필자도 관리자지만 스마트교육을 논하자면 먼저 전화기부터 스마트폰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화기를 과감하게 스마트폰으로 바꾸었다.
정부에서는 2015년까지 스마트교육을 완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발표를 한 상태이다.
위로는 국가적 차원에서도 그렇고, 아래로는 최일선 교육현장에서도 현재로는 2015년의 완전시행을 목표로 여러 모로 노력을 하고 있다.
가히 혁명에 가까운 스마트교육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여건을 조성하고 연수를 실시하고 연구 시범학교를 운영하는 등 준비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니, 꿈만은 아닌 현실로 다가설 것이 확실해 보인다.
○ 2012년 한 해의 성과
늘상 하는 얘기지만 학교 교육활동의 성패를 제일 크게 좌우하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최일선에서 학생들을 직접 지도하는 선생님들이다.
그럼에도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바는 좀 다른 것 같다. 무슨 일에나 성과가 나타나면 그 공로를 두고 교장이나 교감이 잘 지도를 해서, 아니면 방향을 잘 잡아주고 도와주어서라고 생각하고 이해한다. 전혀 무관하거나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간혹, 교장 스스로가 마치 제 공로로 그리 된 것인 양 자랑하는 것을 보면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2012년 한 해는 참으로 크고 많은 학교 경영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앞에서 얘기한대로 공로는 교장 몫이 아님을 전제로 그 성과를 나열해 보고자 한다.
1위를 차지한 행사로는 먼저 교육장 기 축구 대회 우승으로 작년에 이어 2연패를 달성했으니 내년 1년만 더 우승하면 3연패로 교육장기의 영구 보존을 달성하는 셈이다. 다음 합창대회 최우수상을 수상했는데 훌륭한 지도자를 초빙하여 연수를 실시하고 지도를 하여 이룩해 낸 쾌거다, 그리고 독서 골든벨 대회에 참가하여 우리 학교 대표가 그야말로 월등한 실력 차로 대상을 차지했다. 또, 배드민턴 대회에서 남,여 모두가 나란히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배드민턴은 그 실력차가 뚜렷하다 할 만큼 시원스런 경기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2위를 차지한 대회들을 열거해 보면 먼저합주 경연대회에서 리코더 부문 2위를 차지했고, 육상 여자 초등부에서 2위, 남자부 2위를 나란히 차지했다.
다음 3위를 차지한 대회들은 교육 지원청 주최 배구대회에서 남, 여 모두 3위를 차지했고, 농구대회에서도 남 여 각 3위, 탁구대회에서도 남 여 각 3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수영대회에서도 남자 3위 여자 3위를 했다. 아울러 전통의 국민 독서경진대회에도 출전하여 3위에 입상을 했다.
그 밖에도 학교 교육과정 우수학교에 출품하여 상을 받았는가 하면 백일장, 미술 실기대회, 음악 등 여러 분야의 대회에 참가한 아동 개개인의 상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게 모두 선생님들의 열성적인 지도에 기인된 것이니 학교장으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 학부모 시조교실
필자가 교단에 첫 발을 내디딘 1972년 무렵에 교육계에는 교육의 사회화라는 슬로건이 있었다. 교육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교육활동이 어떤 방법으로든 학교 부근 즉 학구 내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어쩌면 학교가 사회교육을 담당해야 한다는 멧시지가 담긴 슬로건이었다는 생각이다.
전 임지 노산초등학교에서도 했던 일이지만 학부모 시조교실을 운영하면서 교육의 사회화에 기여한 것은 물론 정말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일임을 알 수 있었다.
학교시설을 이용한 평생교육의 한 강좌로 시작한 학부모 시조교실,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두 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이 시간은 주 내용인 시조쓰기 공부는 물론이고 정말로 학부모들이 학교를 참되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 학기동안 계속된 학부모 시조교실 교육과정은 아동 지도를 위해 필자가 만든 지도 과정안을 적절히 수준을 높여가며 활용했고, 과정의 성격상 학부모들 스스로의 노작활동을 많이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운영했다.
절장시조, 양장시조, 평시조, 연시조를 차례로 공부함으로써 시조쓰기에 대한 어려움이나 부담을 거의 없도록 하고 감상활동을 통해서 주로 옛시조에 나타난 우리민족의 정서를 바르게 접근 이해하고 알게 하여 성과를 자각할 수 있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간간이 학교의 사정과 학부모들께 부탁하거나 꼬집을 일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풀어놓을 수도 있었다.
한 학기가 끝나고 그간의 작품들 중에서 스스로 엄선에 엄선을 거듭해서 시조집 <터앝에서 거둔 열매>를 발간하고 조촐하나마 출판기념회를 가짐으로써 10명의 학부모들과 학교장과는 엄청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고 적어도 참여했던 회원들만은 학교 입장에서 생각하고 학교 편을 들 수 있도록 세뇌를 했다고 하면 졸렬한 표현이 될까?
필자는 이날 인사말을 통해 ‘앞으로 우리 민족의 고유 시조를 계승 해 나갈 시조시인들이 되도록 시조작업의 끈을 놓지 말아 달라’고 학부모들에게 당부했는데 그 실현이사 이미 내 몫이 아니라 그들의 몫인 걸 잘 알고 있다.
출판기념회가 끝나고 나는 학부모 시조교실 회원들로부터 뇌물(?)을 하나 받았다. 얼마짜리인지는 지금도 알아보지 않았지만 그들이 정성으로 선물한 것은 겨울용 스웨터였는데 겨울을 따뜻하게 나는데 도움도 되었고 영원히 잊지 못할 선물이었음은 사실인 것이다.
○ 이색 졸업식
우리 학교에서는 2011학년도와 2012학년도에 졸업식을 좀 색다르게 기획을 했다. 2011학년도에는 졸업생 전원이 참여하는 민족시 시조 시화전과 졸업장 수여를 묶어서 분위기를 전과는 좀 다르게 했고, 2012학년도에는 여기에다 졸업생 전원이 참가한 시조집 <사랑씨앗 꿈 영글터> 출판기념회를 겸함으로써 시골 어린이들에게 하기 어려운 경험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런 졸업식은 전임지인 노산초등학교에서도 했던 일이고, 반응이 대단히 좋았었다.
시화전은 시화를 스크린 인쇄로 제작했는데 글의 내용은 물론 작자의 얼굴 사진까지 인쇄된 시화가 대단히 호의적이었던지 아동 당사자들은 물론, 학부모나 내빈들까지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실은 학예발표회 때 운동장에서 3,4,5,6학년 전원이 참여하여 열었던 민족시 시조 시화전 때 내걸었던 작품들을 철거하여 정성스럽게 잘 보관했다가 재활용을 한 것이지만 졸업식의 분위기를 새롭게 하는 데는 크나큰 도움이 되고도 남았다.
출판기념회는 작품 낭송, 축하 공연을 번갈아 가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는데 시골 학생들이지만 그들은 적어도 출판기념회라는 말이 생소하지는 않게 된 것이다. 그런 것이 교육의 참 의미란 생각에 우리 직원들 모두가 뿌듯해 했으니 더 이상 뭘 바라겠는가?
이어서 계속된 졸업장 수여식은 정동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는 학부모와 어린이가 나란히 앉아서 진행하는 졸업장 수여식이어서 그 분위기가 다른 학교와 비교하여 사뭇 달랐다.
그리고 또 정동초등학교 자랑거리의 하나인 아주 모범적고 활성화된 총동창회가 주로 제공하는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이 졸업생들에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어지게 되어 졸업생들과 학부모들이 모두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내게는 과분한 사천교육상
2012년 12월 말에 사천교육상을 받았다. 사천교육상은 아주 오래 전에 삼천포교육청 시절에 삼천포교육상으로 주어지다가 1995년 6월 1일부터 교육청 명칭이 삼천포시 교육청에서 사천교육청으로 바뀜에 따라 새롭게 사천교육상으로 그 명칭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제1회 사천교육상은 2005년에 시상이 되었고 이후 해마다 시상이 진행되어서 금년에는 어언 8회를 맞게 되었고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많이 부족한 내가 한자리 차지하게 된 것이다.
1회부터 7회까지 그야말로 쟁쟁한 인사들이 수상자였는데 그 중에는 내 형님 이름도 있고, 내가 모셨고 추천서류를 작성해 드렸던 하수종 교장선생님 이름도 있어 무척 반가왔다. 아마 앞으로는 역대 수상자 명단 중에 내 이름도 끼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에 하나 세월이 흐른 후 역대 수상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발견한 후배들이 ‘허허 이런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상을 받았을까?’ 라고 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에 괜히 수상을 꿈 꾼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수상식장에서 들었으니 늦게 깨달았어도 한참 늦게 깨달은 셈이니 그냥 넘어가기로 작정했다.
1회 때의 수상자인 하수종 교장선생님은 당시 곤양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셨고, 필자가 같은 학교 교감으로 근무했을 때였다. 그 당시의 공적조서를 만들던 일이 생각났다. 공적조서 이외의 증빙자료 일체는 하교장 선생님이 손수 준비하고 분류하여 파일집에 차곡차곡 모은 것을 넘겨주셨던 일이 고맙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일을 더 보태서 했다면 고작 파일집 표지를 만드는 정도였다. 명색이 인사 업무를 맡은 교감이 거의 거저먹기 식으로 큰 일 하나를 아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으니 송구한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그건 고대로 배워서 실천에 옮겼다.
공적조서를 만들기 위해 지나간 나의 행적들을 조사하다 보니 제법 거론해도 될 만한 일들이 내 업적이란 이름으로 과거를 이루고 있었다. 주로 교육연구업무와 문예지도 실적들을 중심으로 챙겼다.
내 행적들을 세세하게 챙긴 이유는 하교장 선생님께 배운 바도 있었지만 내가 받는 사천교육상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장 비중 있고, 뜻도 있는 상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단순히 공적조서 몇 줄, 그것도 추상적이기 이를 데 없는 문구의 나열로 상을 받는다면 내가 받는 상의 격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일이란 생각에서다. 뚜렷한 목적으로 모아온 것은 아니나 오래 전부터 내가 근무했던 학교마다 내가 근무할 당시의 관련 기록들을 하나하나 수집하고 정리해 두었던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었다.
시상식에서 교육장님이 하신 인사말씀 중에 이런 부분이 있었다.
“-----오늘 제8회 사천교육상은 뜨거운 교육 열정으로 아이들을 향한 관심과 사랑이 희망의 씨앗이 되어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열어주기 위한 아낌없는 사랑과 애정을 주신 김형진 교장선생님-----.”
많이 부끄러운 가운데 그래도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지막 결론은 아무래도 사천교육상이 내게는 너무도 과분한 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숲 속 아침
옅은 자색 구름 들추고 밝아오는 여명의 틈
늦잠 청한 풀벌레도 단잠에 빠진 시각
심호흡 폐부에 스민 참 상쾌한 삼라(森羅)여
밤새워 빚은 구슬
꿰어 단 풀잎들이
천진한 마음으로
동녘 향해 웃고 서면
이제 막 솟는 태양도
함박웃음 웃고 있다.
⧉시작 노트⧉
마지막 임지 정동으로 옮기고 나니 새벽 산책(散策)이 가능해졌다. 여유가 생겼으니 정녕 축복받을 일이 아니겠는가? 참다운 여유란 놀기 위해, 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차질 없이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어느 아침 이른 시각에 숲 속에서 만난 풍경이 너무 상쾌하여 한 편의 시조를 써 보았다.
선학산 정상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가장 편안한 길을 걷다가 만난 정경이라 더욱 인상적이기도 했다.
나로서는 전에 어렵기만 했던 시간의 여유가 가져다 준 큰 행운이었기에 혼자지만 흐뭇할 수 있었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운 그 때 그 시절 독후감들>>
진솔해서 좋았습니다.
김석근 진주사범13회 전 진주시교육장 |
내가 나이가 들어 책을 빨리 읽지도 못하고 평소에도 책벌레도 아닌데 귀하가 마음먹고 보내준 ‘그리운 그때 그 시절’은 1주일 만에 한 글자도 안 빠뜨리고 다 읽어버렸습니다.
내 스스로 생각해도 좀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한 문장 한 테마가 진실하고 솔직했기도 했습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당시의 초등교육계의 정책과 시책들이 일선 학교에 어떻게 적용되고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너무나 정확하고 생생한 기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김 교장 선생님이 잘 아시다시피 나는 사천교육청에서 장학사, 학무과장도 역임했고 도교육청 장학사로도 근무한 경력이 있으니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데, 어느 내용은 의미도 있었구나 싶기도 하고, 어떤 내용은 이건 잘못된 일이었구나 하고 반성도 해 보았습니다.
아마 이 기록들은 당시 정확하면서도 끈질기게 메모해 두었던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있어서
이렇게 의미 있는 산 역사적 자료가 발간된 것이라 싶어 매우 뜻있는 일이라 생각 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김교장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행복했구나 싶고, 직장동료들은 푸근했다 싶습니다.
어떻게 보면 나도 김교장 선생님과 비슷한 생각으로 제법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을 보니 부끄럽고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여간 요 며칠간 몰두해서 읽음으로써 세상 잡일 모두 잊어버리게 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정년 때 까지 열심히 지금처럼 사시고 특히 건강 꼭 챙기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학산 김석근이 감사한 마음으로 보냅니다.
변화 속에서 새로움을 얻는 자세
김형인 종형(從兄)님 전 농수산부 공무원 |
동천이!
가내도 평안 하시고 학무도 여전한지 ? 보낸 자전적 논픽션 ‘그리운 그 때 그 시절’을 받은 지 달포가 다가오네. 아직까지 다 읽지는 못했지만 집사람과 같이 동천이와 지냈던 과거 이야기를 나누며 재밌게 읽고 있네.
남해에서 평교사로 시작해 다시 남해에서 교장선생님으로 60갑을 맞으니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문학적인 글 솜씨가 좋아서 미사여구(美辭麗句) 보다 읽기 쉽게 엮어 서정적 감정도 느낄 수 있게 한 것이나, 그 때를 돌아 볼 수 있도록 정리한 것이 참 좋았네-----.
처음부터 그렇게 마음먹고 자료를 모았는지는 모르지만 부임 하는 곳 마다 그 특성을 살려 변화 있을 때 마다 버리지 아니 하고 그 속에서 새로움을 얻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양식이 되었는지 짐작이 가네.
동천이의 타고난 성품이 그 책속에 그대로 나타나 있으니 말이다,
가까이 있었으면 출판 기념회에 가서 축하 했을 텐데 , 늦게나마 다시 한 번 축하 한다.
‘그리운 그 때 시절’을 읽고
정근영 부산 학진초 교장 진주동명고, 진주교대 동기 |
날이 갈수록 기력이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가운데 시력이 더하다. 돋보기안경을 쓰고 책을 읽고 나면 눈이 침침해 지는 것이 이렇게 늙어가는 것인가를 생각하노라면 한 참 쓸쓸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책이란 것을 조금은 멀리하려고 한다.
책이란 지식의 보고라고는 하지만 황혼녘에 선 인생으로서의 느낌은 그것은 번뇌의 모임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명상에 잠겨 마음을 찾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 책을 멀리하고 참선에 열중하고 싶다.
형진이.
물맛 같은 친구다.
물은 무색(無色) 무미(無味) 무취(無臭)로되 최고의 맛을 지니고 있지 않는가. 형진이가 쓴 교직생활 기록 ‘그리운 그때 그 시절’을 읽었다. 이렇게 손을 들고 한꺼번에 끝까지 읽은 책은 오랜만이지 싶다.
교직을 걸어온 한 평범한 교원의 이야기지만 거기에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탐정소설처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동인(動因)은 없지만 다 읽을 때 까지 손에 서 놓지 않은 그런 책이었다.
심근경색(心筋哽塞)으로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까지 갔다 온 것일까? 심근경색은 생존율이 3분의 1이라고, 3대 1의 경합을 뚫고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 왔으니 이제 앞으로 더 좋은 삶이 전개되는 것이 아닐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삶에 대한 마무리로 정년을 몇 해 남겨놓고서도 서둘러 교직회상을 마무리 해 이 책을 내어 놓았는가 보다. 이제 모든 걱정일랑 거두어 버리고 편안하게 살기 바란다.
지나간 일은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모두가 그리움으로 기억되는 것인가 보다. 김형진의 교직생활에서 기쁜 일도 많았고 아픈 기억도 있지만 이제는 모두가 <그리운 그 때 그 시절>이 되어 이 책에 고스란히 살아있다. 교직을 마무리 하는 분들이 더러 교직 회고록을 펴내지만 대부분이 개인의 기록으로 보편성이 좀 부족해서 재미가 덜한데 김형진의 <그리운 그 때 그 시절>은 개인의 기록이로되 보편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어 공적인 기록이 되었다.
당국에서는 많은 돈을 들여서 교육사를 만들어 내는데 엄청난 부피로 호화로운 양장본이지만 별 관심이 없다. 거의가 도서관에서 독자의 손길과는 멀리 떨어져서 폐지로 늙어갈 것이다.
그런 책에서 우리 교육의 역사를 읽는 것 보다는 여기 성실하게 평생을 초등교단 현장에서 교직을 수행해온 기록을 읽는 것이 우리 교육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 믿는다.
김형진과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이들은 그 옛날의 추억에 공감하게 되었지만 정작 이 책을 읽어야 할 사람은 교직생활에 첫 발을 내디디는 신규교사들이 아닐까 싶다. 그들 앞에서 이책은 나침반, 아니 네비게이션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한 성실한 교원의 교직 기록은 그들의 앞에서 갈 길을 친절하게 보여주지 않을까 싶다.
눈물이 흐를 듯이 아름다운 ‘그리운 그때 그 시절’
최미숙 양산천성초임교감시절 동근(同勤)교사 |
교장선생님!
제가 살아가면서 존경하는 분이 있다는 것은 존경을 받는 그분도 행복이지만 제 삶도 그 분으로 인하여 얼마나 풍성하여 지는지요.
어제 이경민 선생님이 가져다주신 책 ‘그리운 그 때 그 시절’의 뒷부분을 잠시 읽고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맞아 좋은 선생님!
지금까지는 정신없이 달려 왔으니...
오늘 이무경 교장선생님과 진영경 교감선생님께 책을 전해 드리고
저도 아이들을 보내고 책장을 넘겼습니다.
우선 최근의 근황을 살피면서
아! 건강이 많이 안 좋으셨구나.
학교경영철학을 보면서...한 교장선생님 이시로구나.
같이 근무하시던 분의 명단을 기록하신 것을 보면서...사람을 얻는 다는 것에 대하여
교장선생님!
참 고맙습니다.
무심한 저를 기억해 주시고
또 제 맘속에
존경의 마음을 넣어 주셔서
제 삶을 더 풍성케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교장선생님께서 현세의 삶 뿐 아니라
내세에도 더 행복하게
예수님을 마음속에 꼭 모시기를 기도드리며
더 건강하세요. 더 멋진 삶을 끌어가시 길
감사합니다. 아직도 덜 영근 최미숙 드립니다.
자꾸 읽어도 의미 깊은 이야기
김대환 남해군 고현면장 남해도마초임시 고교생 |
교장선생님
바쁘신 선생님께서 일부러 저희 집을 찾아 오셔서 저와 동생에게 주고 가신 선생님 교직의 역사와 추억 그리고 정성이 가득 담긴 귀한 자료인 ‘그리운 그때 그 시절’은 몇 번이나 읽고 특히, 우리 도마에서의 시절은 바쁘게 살아오면서 옛날 어릴 적 소중한 추억을 잊고 지내던 저에게는 다시 한 번 어린 시절을 뒤 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운 그때 그 시절’ 책자는 우리 고현면의 중요한 기본현황과 추진해야할 주요 현안과 함께 저 책상위에 함께 하면서 업무 중에도 시간 나면 도마시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고는 나 혼자서 옛날 생각을 하면서 실없이 웃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옛날이 그립기도 하고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왔는지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는지 많은 생각을 하면서 모두가 잊고 지냈던 옛날의 모습을 생각하게 해 주신
선생님께 고맙기도 학고 한편으로는 이런 사진자료를 포함한 기록물들을 어떻게 37년간이나 관리를 해 왔는지 그리고 이런 소중한 자료를 모아서 회갑기념 책자를 발간하여 주신데 대하여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처음 ․ 시작 ․ 끝 ․ 마무리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도마에서 시작하여 남명까지 걸어온 교직생활 중 처음 우리 도마에서 시작하여 교직의 꽃인 교장선생님도 우리 남해에서 하신다는 것은 우리 남해와는 특별한 인연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듭니다.
소중한 옛 추억을 다시 생각하게 해 주신 선생님께 진작에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는 것이
오늘에야 연락을 드리는 게으름에 대해 이해를 바랍니다.
저는 선생님과는 달리 시를 포함한 문학에는 소질도 관심도 없습니다만 그런 중에서도 저의 마음에 와 닿는 시가 있습니다.
선생님의 남해와의 인연과 같이 저도 법정스님의 귀한 인연 이란 시는 저와 같이 근무하는 직원들에게는 꼭 알려주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
우리 남해에서 교직을 마치고 돌아가실 때 선생님께서 남해에서 맺은 인연과 생활이
아련함과 추억이 함께하는 소중한 인연되기를 바라고 앞으로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기원합니다.
2009년 9월 7일
고현에서 金 大 桓 드림
외국에서 받은 김치나 고추장 같은 이야기
하향실 곤양교감시절 동근 충남 태안초 교사 |
김형진 교장선생님께
매미소리 맴맴, 초록빛 나뭇잎들이 흔들흔들, 모처럼 한가로운 여름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건강은 괜찮으시죠?
교장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책을 받고 너무 감사했어요.
외국에서 있다가 김치나 고추장 같은 것을 받았을 때의 감동이 이럴까요?
충남에서 아직도 조금은 이방인 같은 느낌을 갖고 생활하다가 교장선생님께서 저를 기억해 주시고 손수 쓴 책을 보내 주시고 메모까지 해 주셔서 저에게 너무 힘이 되었어요. 그리고 교장선생님께서 그렇게 힘 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줄은 또 몰랐답니다.
책을 읽다가 가을 단풍아래서 즐겁게들 웃고 있는 사진(제가 포함한 곤양사진)을 발견하고 ‘인연’이 참 중요하구나 새삼 느꼈답니다.
‘지금의 나의 모습이 누군가의 자서전에서 한 페이지를 차지 할 수도 있겠구나.’
이런 생각도 들었구요.
교직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직업 같기도 해요. 그 만남 속에 교장선생님이 있었던걸 감사드려요.
저도 누군가에게 좋은 만남이 될 수 있게 열심히 살겠습니다.
가을에는 더 건강하시고 더 좋은 시간들이 될 수 있길 기도드리겠습니다.
2009. 8. 10
태안에서 하향실 올림
추신: 책을 받고도 바로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결례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허둥지둥 의무감으로 급하게 호들갑스레 감사를 전하기 싫었답니다.
감동을 오래오래 간직하다가 조용한 시간에 펜을 들고 싶었는데 그만 너무 늦어서...
소중한 추억의 한 장(章)
문미옥 1982학년도 서포초등학교 제자 식당 경영(자주복집) |
선생님!
안녕 하시지요? 지난번에 책을 일부러 가져다 주셔서 너무 황송했습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그때 뵐 때는 괜찮아 보이시던데. 사모님께서도 여전히 잘 지내시죠. 아마 선생님 건강 챙기신다고 더 바쁘실 것 같네요.
저는 올 하반기 여름을 선생님 덕분에 무척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선생님의 교직생활 추억담과 함께 할 수 있어서요. 그 소중한 추억의 한 장을 저희들이 차지한다고 생각하니 뿌듯하기까지 했어요. 기분 짱입니다요.
덕분에 잊었던 친구들 애기며 오래전에 소풍 갔던 때 사진까지 너무 설레었답니다.
과거 속으로 다시 되돌아 간 듯 신기했고요. 그리고 더 재미났던 건요. 선생님들 세상과의 만남이었답니다. 우습기도 한 애깃거리며 힘들었던 생활까지, 또한 선생님의 유머실력도 꽤 대단하시던 걸요. 겉모습과는 다르게요. 어떤 부분에서 저 혼자 얼마나 웃었다구요. 아마 일반인들이 읽어도 충분히 재미나게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반 책들과는 다른 더 신선한 내용이라서 더 많이 호응해 줄 것 같아요. 맞지요? 선생님 책을 읽으신 분들 대부분이 이런 생각을 하리라 봅니다. 그리고 몰랐던 선생님의 건강소식에 놀라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괜찮으신 것 맞지요? 연세도 그리 많지 않으신데 조심하십시오.
저희 시아버님께서는 여든세까지 건강하게 사시다가 가셨답니다. 농사일 다 하시고 경운기 운전까지.
선생님께서도 알아서 잘 챙기시겠지만 운동도 꾸준히 하시고 건강관리에 더 신경을 써 주세요. 그래야 저희들도 행복하답니다.
인제 여름도 그 끝을 보이네요. 아마 처서를 기점으로 찬바람을 몰고 온듯해요. 절기라는 게 참으로 딱 맞아 떨어지니 선조 분 들에게 고마움까지 느낀답니다. 덕분에 또 다른 꽃들이 가게 화단을 환하게 만들어요. 다달이 피어나는 갖가지 꽃들을 보면서 나 혼자 쳐다보기 아까워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릅니다.
같이 볼 수 있는 분들이 더 더욱 많아질 날이 오겠지요. 도로가에 저희 가게가 있었다면 누구나 즐겁게 예쁜 꽃들을 볼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 많이 든답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사진이라도 많이 찍어 담아두고 휴대폰으로 찍어 전송도 많이 하고 선물도 주고 저 많이 바쁘답니다.
화단도 어찌하면 더 예쁘게 가꿀까 생각도 많이 하고 이래보고 저래보고 겨울이 좀 걱정되긴 해요. 저 많은 화초들을 다 안으로 들여놓아야 하는데 무슨 수가 생기겠지요. 오늘은 태양빛을 가린 구름 탓으로 비도 내리고 신선해서 기분까지 좋네요. 찬바람불면 대 유행 신종플루도 좀 잦아들 것인지 선생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겠지요?
많은 학생들 걱정, 아마 좋아지겠지요. 저마다 예방에 신경을 써고 관리 잘해서 이겨내세요. 선생님 몸 상하실까 두렵네요. 두루두루 다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저희들 곁에서 오래오래 계셨음 해요
그럼 다음에 또 연락 드릴게요.
안녕히 계십시오.
2009. 8. 27
진주에서 문미옥 올립니다.
나의 젊은 시절 다시 회상하고
전수정 창원 이창초등학교 근무시절 동료 함안초등 교감 |
김형진 교장선생님
‘그리운 그때 그 시절’ 책 잘 받고 감동하면서 나의 젊은 시절 다시 회상하고 감사드리며, 교장선생님 마음속의 풍요로움은 항상 훈훈한 입김이 되어 되살아납니다.
지난날들을 일일이 메모하셨다가 좋은 작품 엮으셨습니다.
교감승진에 즈음하여 내 일 같이 기뻐해 주시고,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아끼지 않은 점 감사히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아직 여러 방면에 부족한 저로서는 관리자(교감) 위치에서 중압감을 느끼며 겸손한 지세로 선,후배님들의 고견에 경청하는 자세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제가 걸어오는 길목마다 염려해주시고 격려해 주셨던 그 정을 잊지 않겠습니다.
교육에 대한 열정과 언제나 여유 있는 모습으로 자라나는 아이들과 전 직원들의 내일의 꿈을 키우는 원동력이 되도록 노력하여 좋은 교감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들 뜻대로 이루시며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2009년 9월 8일
전수정 드림
아련한 추억 그리고 그리움
김재선 서포초등학교 자혜분교 제자 |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저 재선입니다.
보내주신 책 다 읽고 너무나 기쁘고 감동받고 너무나 선생님이 자랑스럽습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 마다 수많은 생각, 감동 존경 질투 행복 아련한 추억 그리고 그리움들이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 눈물이 주루룩 어떨 땐 히히거리면서 책장을 넘기기도 했답니다.
선생님 새삼스레 선생님이 행복하시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각 학교마다 이렇게 많은 훌륭한 제자들이 선생님을 기억하면서 아직까지 선생님과 연락하는지 뿌듯하시고 보람이겠습니다.
전 항상 저희만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존경하는 줄 알았는데 ㅎㅎ 나에게 너무나 훌륭한 스승님이 계신다는 게 넘 행복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주위에 친구들에게 얼마나 많이 자랑했게요.
다들 넘 부러워하더군요.
그리고, 세 자녀들이 아빠의 교장명패(校長名牌)를 선물했다는 말씀에 얼마나 또 행복해 하셨을까? 생각했습니다.
선생님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남은 임기동안 건강하게 멋지게 학교장님으로 마무리 잘 하셨으면 합니다. 저번에 선생님 편찮으셨단 말씀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아직까지도 저의 기억 속엔 키 크시고 체격 좋으시고 잘생긴 옛날 그 모습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 항상 건강하세요.
머지않은 시일 안에 또 한 번 찾아 뵐 것을 다짐합니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2009년 9월 6일
김재선 올림
사랑하는 제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나와의 추억담들 |
세월이 흘러도 그 시절은 늘
‘그리운 그 때 그 시절’
입니다. 지난 시간들을
반추하며 아련한
‘추억의 오솔길’을
조용히 거닐어
봅니다.
선생님과의 인연
최영만(남해 도마)
1972. 초임시절 5, 6학년
현 한국통운 전무이사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41년 전 1972년도 초등학교 이야기를 하고자한다. 우리들의 나이 열두 살 철부지 시절인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젊고 잘생긴 미남 선생님 한분이 새로 부임해오셨다.
어찌 보면 큰형님 같기도 하고 은근히 소탈하고 친근감이 묻어나는 총각 선생님이었다. 5학년1반 담임을 맡은 것이었다.
그 당시 선생님의 연세는 우리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을 해보면 스물넷 정도의 나이였던 것 같다. 요즘의 스물넷의 나이는 철없는 아이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는 철부지는 아니었을 것 같았다. 스물 네 살의 청년이 아이들의 선생님으로 오신 것이다. 교직이라는 것이 절대 쉬운 것이 아님은 부인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김형진 선생님은 반세기나 다름없는 41년이라는 긴 세월을 후학양성에 열정을 쏟으신 것이다. 지금은 산업화의 발달로 1년이면 강산이 변하고 있지만 그 당시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보면 강산이 네 번이나 변하고도 남는 세월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선생님께 존경의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그동안 몆 개의 학교를 거쳐 오셨으며 몆 명의 제자가 있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오로지 후학 양성은 물론 여러 아이들을 참되게 바르게 되라고 가르쳐 주신 것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의 교직 생활도 중요하지만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선생님과 우리들의 관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선생님이 교직에 몸담으시면서 첫 제자가 도마초등학교 29회 아이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우리들이었으니 참으로 행복한 것이다.
선생님은 첫 제자가 생길 때 그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궁금하다. 지금이야 교직에 40년을 넘게 계셨으니 수많은 제자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래도 첫 제자들은 잊지를 않으실 것이라 생각한다.
그이유로는 첫 제자이기도 하지만 졸업이후 지금껏 만남을 이어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 당시 아이들이 지금은 이 사회의 한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나이 53세의 장년이 된 것이다. 그 첫 제자들의 자식들이 이미 그 당시의 선생님 나이가 되었으니 흘러온 세월을 짐작케 한다.
우리 주변을 보면 대부분 스승과 제자의 사이는 졸업이라는 절차를 거치면서 별 의미가 없이 잊고 사는 것이 다반사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선생님과 그 첫 제자들은 무슨 인연이기에 지금껏 만남을 이어 오고 있으니 자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을 자랑이라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우리들처럼 41년 동안이나 만남을 이어 오고 있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쉽지는 않은 것 아닌가?
이제는 선생님을 만나면 흔히들 말하는 같이 늙어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선생님과 우리들이 이렇게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선생님의 소탈함과 친근감 때문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이것이 곧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사랑이 있기에 그런 것 아닌가도 생각해본다. 아름다운 사랑이 있는 풍경은 언제나 어디서나 행복한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해서 언제나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사랑이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만큼 가슴 시릴 정도로 슬픈 것일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은 행복과 슬픔이라는 두 가지의 얼굴을 하고 있는것같다. 때로는 너무나 행복해서 저절로 눈물이 흐를 때가 있듯이 선생님과 우리들의 이 아름다운 사랑도 우리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슴시릴 정도의 슬픈 사랑이 될수도 있겠지만 나는 끝까지 행복한 사랑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이 나이가 들어서인지 만나면 스승이 아닌 형님처럼 따스하게 말을 건네주심이 더더욱 친근하고 소탈해 보이는 것 같다. 몇 년 전 선생님께선 사경을 넘나들며 건강이 악화된 젓이 있어 힘들었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그 어려움과 힘든 것을 이겨내시며 교직의 주어진 시간까지 오신 것이다.
41년의 긴 세월의 일화도 많겠지만 그중에서 우리들과의 만남지속 이라는 것도 잊지 못할 일이 아닌가 생각 된다. 그동안 저희들과 만남을 이어 오면서 우리들이 30대에는 부산동래산성에서 신나는 모임을 가졌었고, 40대 때에는 선생님이 교감선생님으로 재직하고 계신 양산 천성초등학교에서 남자 친구들의 족구 배구 그리고 여자 친구들의 축구경기 등등 체육대회도했다.
같은 시기에 경주 불국사 감포 바닷가 등등 봄 소풍을 가서는 졸업이후 처음 보는 제자가 선생님을 몰라뵙고 친구로 착각하여 너는 누구냐 하고 물으며 여러 친구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50대에는 한 번씩 얼굴 보며 만나서 삶의 얘기를 나누며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41년의 긴 세월 동안 몸담았던 교직을 떠나지만 저희들의 바람은 스승님으로 큰형님으로 또 인생의 선배로써 앞으로도 계속해서 만나며 안부도 묻고 서로 살아가는 얘기도 나누고 삶의 지혜도 가르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선생님!!
41년의 긴 세월 교직에서 후학양성에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먼 훗날 이세상을 진동하게 하실 것입니다. 비록 교직을 떠나지만 앞으로도 우리들의 만남은 계속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건강 하십시오. 그리고, 늘 행복 하십시오.
2013년 5월 10일
선생님 보셔요.
김정숙(남해 도마)
1973학년도 4학년 문예부원
가정주부, 직장인
아파트 화단에 눈이 아프도록 붉게 핀 연산홍에 취해 할 일을 잊어 버린 채 잠시 유년 시절로 돌아가 봅니다.
굳이 산으로 바다로 떠나지 않더라도 늘 남해바다를 생각나게 하는 봄.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내일이라도 달려갈 수 있는 고향이 있고 친구들이 있어 행복합니다.
여행지를 향해 색깔고운 옷차림과 티없는 웃음을 활짝 웃으며 어디론가 떠나는 이들을 보며 저도 주말엔 떠날데 하고 크게 기지개를 켜고 하늘을 보니 햇살에눈물이 어립니다. 계절은 어느덧 5월을 향해 가지만 항상 가슴엔 그리움이 더욱더 깊어만 갑니다.
선생님!
선생님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이 시기에 비록 지면을 통해 대화지만 만나 뵌 듯 행복합니다.
때론 힘들고 지치고 기쁘고 즐거웠던 일들이 엉켜진 날들도 있었지만 항상 그리운 고향에서의 추억들이 아쉬워 마음은 항상 고향을 향해 있습니다.
일전에 도마초등학교 총 동창회가 있어 남해 갔다 운동장에서 김봉옥 선생님 뵙고 행복한 봄나들이를 했답니다. 50을 넘긴 제자들의 재롱을 너그러이 받아 주셔서 봄날의 하루가 너무 짧기만 했답니다.
항상 그리운 고향에서의 유년시절의 친구, 선생님이 그리워 추억의 파편들을 주어 모아 둔 내 마음을 열고서 이제는 풍요로운 앞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뿐입니다.
선생님!
앞으로의 날들은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신 모습의 선생님으로 우리들 곁에 계셔 주시길 바라면서 언젠가의 만남을 기다리겠습니다.
봄처럼 화사한 선생님 모습을 뵙고 싶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사랑합니다. 선생님.
2013년 4월의 봄날에
김 정 숙 드림
내 인생에 봄비! 김형진 선생님
김용호(창원 이창)
1977학년도 4학년
한국해양소년단 경남남부연맹 기획관리부장
중학교 입학하기 전 당시에는 입학시험 비슷한 시험이 있었다. 반 편성 자료를 얻기 위한 소위 반 편성 배치고사가 그것이었다. 성적을 산출하여 상위 5등까지는 갑 류 장학생, 6등부터 10등 까지는 을 류 장학생을 선발하였다.
당시 나는 6등을 하여 을 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고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했던 친구 2명(은연이와 익식이로 기억 됨) 등위는 기억나지 않으나 갑 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6학년 전부라야 27명밖에 되지 않은 작은 학교(이창초등학교, 현재는 폐교되었음) 치고는 우수한 성적이었다.
당시 진전중학교에는 진전, 옥봉, 양촌, 낙동, 이창초등학교와 함안 여항초등학교, 그리고, 일부 고성군 회화면에 소재한 동창초등학교 졸업생 중 산북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입학했다. 가장 규모가 작은 학교에서 장학생이 3명이나 나왔으니 당시 가르쳤던 선생님의 노고가 컸으리라 짐작된다.
이후 나는 200여명의 동창들과 함께 중학교를 신나고 즐겁게 다녔던 것 같다.
중학교 시절에 부모님께서는 용호의 공부 뒷머리를 트이게 하신 분이 4학년 2학기에 담임을 맡으셨던 김형진 선생님이시고 공부의 끈기를 가르쳤던 분은 예권익 선생님이라고 항상 말씀하셨다.
공부의 방법을 알았다고 할까, 아니면 공부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던 계기가 아무튼 김형진 선생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5학년과 6학년은 예권익 선생님이 2년 동안 담임이셨는데 방학 중에도 출근하셔서 공부를 강제로(!) 시켰던 분이셨다.
당시 김형진 선생님은 시조를 문예부에서 지도하셨는데 6학년 때에는 진해교육청에서 주최하는 대회에도 참가하여 수상을 했던 것 같다. 중학교에 가셔도 각종 시조대회에 참가하였고 이러한 계기가 국어 시간이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흥미를 가지는 시간이 되었다.
지금도 시조의 초장,중장,종장의 운율 3434-3434-3543을 동요처럼 입가에 외우고 있다. 이러한 탓에 국어 시간에 나왔던 웬만한 시조와 시를 당시에는 외우고 있었다. 지금도 윤동주의 서시, 별 헤는 밤, 김소월의 진달래꽃, 조지훈의 승무 등 일부 시를 한번 읽어 보고 난 뒤에는 암송할 수 있다. 시조는 정몽주의 단심가, 이방원의 하여가, 성삼문, 박팽년, 남구만의 시조 등을 외우고 있다. 이러한 시와 시조 애착에는 김형진 선생님이 모티브가 되었다. 중학교 국어 시간 시조를 배울 때 시조의 운율을 자신 있게 대답하자 당시 국어 선생님이 어떻게 알았냐고 하시길래 초등학교 다닐 때 배웠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이러한 시조 공부는 국어 공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까지 각종 기획안을 자신 있게 처리하는 원천이 되고 있다. 또한 청소년과 함께 하는 직장이라 국어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강조하고 있다.
벽 한 귀퉁이 시조라도 적혀 있으면 걸음을 멈추고 읽으며 어릴 적 선생님을 향수한다. 이러한 저마다의 소질과 능력을 선생님은 제자들의 미래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셨던 것 같다. 이러한 감사를 세월이 지나야 알 수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후 끊길 것만 같았던 사제 간의 인연이 우연히 도서관에서 선생님의 시조집을 접하게 되어 연락되다 끊어질 무렵 다시 제2집을 선생님께서 보내 주셨다. 이후 선생님의 사위가 내가 다니는 직장의 막역한 후배와 아는 사이라 몇 번 놀러 온 적이 있었는데 수인사만 나누다 이야기를 나눠 보니 김형진 선생님의 사위인 줄 알게 되어 깜짝 놀라며 한바탕 더욱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고 이후 통영에서 직장까지 다니게 되어 서로 왕래하게 되었다.
정말 세상이 좁다는 것을 말해 무엇하랴.
세월이 흘려 수많은 아이들을 훈육했던 선생님은 어느덧 교단을 떠날 때가 되셨고 그때의 4학년 시골 촌놈아이는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36년의 세월을 더해 어릴 적 바닷가 그 학교를 추억한다.
“선생님 그때 너무 헌신적으로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이 글을 마칠 즈음 갑자기 선생님이 많이 작문하게 하였던 시조의 제목이 생각난다.
봄비, 그래 선생님은 나에게 봄비 같은 분이셨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김은정(사천 서포)
1981학년도 6학년
직장인, 가정주부
30여 년 전 선생님께서 네 번 째로 부임해 오신 서포초등학교 제자 김은정입니다. 젊음의 패기와 열정으로 저희들을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의 옛 모습이 엊그제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벌써 정년퇴임을 하신다니 세월은 어찌 이리 무심하게도 뒤 돌아보지 않고 빠르기만 한 걸까요?
10대 아이들이 벌써 40대 중반에 접어들었으니까요. 그동안 선생님과 제자의 연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질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선생님의 영광스러운 퇴임을 맞아 작은 마음이나마 이글을 쓰면서 옛 추억에 잠길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합니다.
요즘 같은 정보의 홍수 속에 아이들의 놀이문화가 인터넷이나 게임으로 물들어 있지만 그때 그 시절 우리들은 자연 속에서 뛰어 노는 게 유일한 놀이였지요.
친구들이 고무줄놀이나 공기 돌 놀이를 하면서 놀 때도 학교도서관에서 열심히 책 읽고 독후감 쓰고 글짓기 하던 유년시절의 제 모습이 떠올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글짓기 대회에도 많이 나갔었지요.
시골을 떠나 시외버스를 타고 대회에 나가던 날 버스차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이 얼마나 낯설고 신기했었는지, 글짓기 대회에서 새로 만나는 친구들이 너무나 좋아 설레었던 기억도 선명합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대회에 따라 가시겠다고 하셨다가 바쁜 농사일 때문에 결국 같이 가지 못하셨는데 그날따라 최우수상 트로피와 상장을 받아 가지고 와서 너무나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웃음소리도 귀에 들리는 것 같아요.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꼭 글 쓰는 거 게을리 하지 말고 좋은 글 많이 써서 훌륭한 시인이 되라고 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좋은 책 많이 읽고 늘 많이 써보려고 노력은 했는데 생활의 타성에 젖어 유년시절의 꿈을 잊고 살지는 않았는지 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때나 30여년이 지난 지금이나 선생님의 여전한 글 사랑, 우리 시조사랑은 늘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교장선생님이 되시고도)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직접 시조를 가르치시고 문집을 만들어 전시회도 열어 주시고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시화전가지 열어 주시니 선생님의 인기는 가히 요즘 아이들에게 최고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정말 친한 친구나 선생님에게도 정성들여 손 편지를 쓰고 우체통에 넣어 부치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요즘 아이들은 휴대전화 하나로 모든 소통을 하니 우리글의 소중함이나 아름다움을 모르고 자라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인데 선생님이 우리글, 우리 시조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가르쳐 주시니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선생님이 저희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에게 주신 사랑과 가르침에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리며 교직을 떠나시더라도 저희들 마음속에 언제나 영원한 스승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계속 시조사랑 지킴이로 저희 곁에 계셔주길 바랍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2013년 4월 벚꽃 흩날리는 봄날에
제자 김은정 드림.
고마움이 묻어나는 추억, 향기롭게 다가 올 새로운 추억
문미옥(사천 서포)
1981학년도 6학년
식당 경영(진주 자주복집)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한 아득한 세월의 저편에 서포초등학교 6학년이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습니다. 그 때 네 반이었던 우리 동기들의 담임선생님 네 분이 당시로서는 중학교에나 가서야 볼 수 있는 전 교과 전담제를 하셨습니다.
그 때 선생님께서는 국어와 체육을 맡으셨는데 우리들은 그냥 체육은 빼고 국어선생님으로 통했습니다. 말하자면 내 담임선생님도 아닌 그저 국어, 체육시간에만 우리들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런 인연이 지금 제가 이 글을 쓰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니 그 점만 해도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30년의 세월이 흘러간 후 나는 아늑하게 들어앉은 식당 마당 한켠에서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화단을 가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삼천포에서 진주로 갓 이사를 와서 아직 적응이 힘들던 그 때 선생님께서는 오랜 제자의 진주행 결과가 궁금하셨던지 산책길에 지나가시다가도 가게 골목을 일부러 거치시며 훔쳐보곤 하셨다지요.
손님이 얼마나 드나드는지 확인도 하시면서 노심초사 속앓이를 하신 모양입니다. 고객이 그리 많지 않았던 초창기 진주 법원 건너편 좁은 골목 안에 있던 그 가게는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지만 한산한 가게 일로 시간이 남았었습니다. 덕분에 가게 마당의 작은 공간에 화초 가꾸기로 또 다른 마음의 힐링을 만들기도 한 셈이었지요.
선생님께서는 그런 저를 도우시려고 동창회 모임, 가족들 모임, 직장 동료들과의 모임 등을 제자의 성공을 비는 마음 쓰심으로 자주 예약을 해 주셨습니다. 정말이지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큰 힘이 되었습니다.
또한 회갑 기념으로 <그리운 그 때 그 시절>이란 책을 내신 것만 해도 자랑스러운 일인데 읽어보면 제자들과 동료들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얼마나 특별하신지 알 수 있었지요. 일일이 기억하시고 담아 두시며 체크하시고 챙겨 주시는 그런 정력이 어디서 샘솟는지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렇게 행복한 인연으로 담임도 아닌 국어선생님께서 지금은 제 가슴 속에 젤로 큰 은사님으로 기억되고 있답니다. 세월은 흘러 이제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고 다시 향기롭고 아름다워질 새로운 등불처럼 선생님의 건강도 한결같기를 기원 드립니다.
언제나 건강이 열정보다 먼정미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중년의 추억하는 선생님!
박수기(사천 서포)
1981학년도 6학년
○○건설회사 간부 사원
내 나이 마흔다섯, 흔히들 중년이라고하는---. 인생 전환점쯤 됐을까? 지나온 길을 한번씩 돌아 볼 때! 그래! 내게 가장 아름답고 즐거웠던 기억들은 단연 유년시절의 친구와 추억들! 격식을 차리고 긴장하면서 어색한 미소로 서로를 만나야 하는 척박한 사회생활에서 잠시나마 해방되는 그것들인 것이다
나는 국민학교 6학년 때 김형진 선생님을 만났다. 그 일 년이 내 학창시절을 통틀어 단지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고 입꼬리가 올려지는 행복한 추억으로 자리한다.
많은 추억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 내 친구 대용이와의 이야기가 잌ㅅ다. 대용이는 카리스마 있고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항상 리더였고 쾌활하고 거침이 없었다. 전교어린이회장이기도 했고 웅변도 잘했었다. 나와는 4학년 때 부터 짝지를 하면서 서로에 대해서 사소한 것까지도 잘 알게 된 요샛말로 절친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알게 된 비극,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버금갈 것 같은 우리의 그것은 한 여학생 S를 같이 좋아 한다는 것. 그 당시 우리 눈에 비친 S는 한마디로 환상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공부를 잘 하면서 또한 저렇게 이쁘기까지---. 우리는,
“쟤는 변소에도 안갈 것 같다”
고 둘이서 속닥거리며 낄낄대곤 했었다. 그 당시에는. 그러나 하늘에는 태양이 하나이고, 한 골에 대장 호랑이는 한 마리이어야 하듯 둘이서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우리 두 놈은 이 심각한 사안을 어떻게든 풀어야만 했다. 두 놈이 며칠에 걸쳐 공책에 그림을 그려가며 머리를 짜내어 만든 계획! 일단은 평화로운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책을 만들었다.
모 일 모 시에 모처에서 싸나이답게 오직 맨손으로 싸우고, 항복하는 놈이 모든 걸 포기하고 두 사람의 사랑과 행복을 빌어주기로.. 하는 협정에 둘은 묵시적 동의를 했고, 드디어 결전의 날, 친구들이 모두 하교한 다음 우리는 비장한 눈빛으로 서로를 쏘아보고는 결전의 장소에서 마주했다.
빙그르르, 슉슉, 헙, 하이, 얍!!!
정작 서로를 너무 잘 아는 처지. 공갈포만 거품을 물면서 한참을 허세만 잡고 서로에게 헛발질, 헛손질을 해 대던 그때!
“야!”
귀에 익은 일갈! 헐~ 우리 선생님이었다! 김형진 선생님! 둘은 2층 교실로 불려 올라갔다.
일단 싸대기를 한 대씩 걸친 후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나는 너희들 잘잘못은 관심이 없다. 친구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너희들이 싸움질을 한다는 것에 상당히 실망스럽다. 뭣들 하는 짓이고? 여기 들통이 하나있다. 둘이 사택에 가서 물을 떠와라.”
(당시 대용이는 전교 회장, 나는 6학년 3반 반장이었던 것이다.)
내가 사실 이 사건을 인상 깊게 기억하는 건, 선생님께서 내 예상과는 정 반대로 장황하고 지루한 설교가 없으셨던 때문이 아닌가 한다. 2층 교실로 불려 올라가면서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선생님이 뭘 물어보실까?’
여자문제로 쌈질했다고 하면 엄청 실망 하실 텐데---. 그러면 어떤 판결이 나올까? 이런 복잡한 머리와 두려움으로 마주한 선생님과의 어색한 자리에서 나온 단 몇 마디! 요즘말로 쿨한 마무리였다.
물을 떠 오면서 선생님의 바람대로 대용이와 나는 당연히 아주 자연스럽게 화해가 이루어졌다. 교실에서 기다리시던 선생님은 우리 둘이서 들통에 들고 온 물을 확인하시고는 하신말씀,
“인자 집에 가라.”
요즘말로 <신의 한 수>였지 싶다.
그런데 다음날 등교를 하면서 나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똑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교실에 와서 어색하게 내 자리에 앉자, 뜻밖에 대용이가 했던 기막힌 말. 내 고민은 이 한마디에 우스운 꼴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는 오늘부터 M을 좋아하기로 했다, S는 니 해라”.
허걱! 나는 순간 표정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던 걸로 기억한다. 사실 S나 M이나 떡줄 놈은 꿈도 꾸지 않고 있었는데 우리 둘은 김칫국물만 사발 채로 건배를 하고 있는 꼴이었다.
그 후 중학생이 되고, 또 고등학교 연합고사를 치르기 위해 진주에서 단체로 하루를 보냈던 세명장 여관에서 뜻밖에 선생님께서 위문 차 오셔서는 하신 단 한마디
“니는 꼭 붙을 끼라. 맘 푹 놓고 시험 쳐라이.”
난생처음 치는 중차대한 시험. 중학교 선생님들은 이 시험은 너희들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험이라며 중3시절 내내, 노상 강조를 하셨고, 그로인해 연합고사에 대한 압박이 심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 와중에 예상치 않은 선생님의 출현은 심적으로 내게 많은 안정을 주었다. 선생님의 응원 덕분이었을까? 나는 모의고사 때 보다 훨씬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을 했다. 그때는 선생님이 그냥 고마웠다. 그런데 지금 내 나이 마흔다섯 중년의 지금은, 사무치게 고맙고 존경스럽다.
그 선생님이 이제 교정을 떠나 퇴임을 하신다니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 무언 까닭인지?
꿈을 꿔본다. 그때 그 까까머리에 허연 콧물 훔치던 그 시절로 돌아가서 선생님 수업도 듣고, 재잘재잘 떠들어도 보고, 뛰고 굴리고 엎어져도 마냥 즐거웠던, 눈이 시리게 청명했던 가을하늘 아래에서의 청군백군 운동회.
상상만으로도 가슴 먹먹한 꿈! 내게 이런 꿈과 추억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신 김형진 선생님! 선생님이 내 아이의 선생님이었으면 내 아이도 나만큼 행복한 추억을 지금 내 나이에 추억할 수 있을텐데---.
내 가슴 속 아직 온기 가득한 그 분
박정원(사천 동성)
1986학년도 6학년
진주외국어고등학교 교사
1986년 6학년이 되어서 만난 선생님. 김형진 선생님. 선생님께선 사천 동성초등학교에 그 해 전근을 오셔서 6학년 담임을 맡으셨는데, 지나고 보니 6학년 담임은 모두가 꺼리는 자리로 초등학교에서도 가장 힘든 업무 중 하나라고 한다. 하지만 선생님께선 잔잔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때론 세심하게 보살피시고, 또 때론 매섭게 야단치시면서 개구쟁이 우리 6학년 2반 아이들을 잘 이끌어주셨다.
기억하기에 선생님께선 여느 선생님들과는 다르게 우리의 개인적 특징을 잘 파악하시고 손수 별명을 지어주시곤
“넌 이런 모습이 제일 귀엽다.”
“문장력이 좋구나.”
라는 식의 살가운 메시지를 계속 전하셨다. 친구같이 편안한 이런 선생님의 모습이 우리도 무척 좋았고 그래서 마냥 어리광을 부리며 선생님께 다가갔던 것 같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판단하셨을 때 어긋난 행동이라고 여겨지면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을 내셨다. 당시 우리 반에는 학습 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어느 수업 시간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질문을 하셨다. 기억하기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여 겨레의 의기를 드높인 사람은?’이란 문제였는데 주관식이었던 그 질문에 그 친구가 손을 든 것이다.
놀라신 선생님께선 그 친구를 얼른 지명하셨고, 그 친구는 망설임 없이 “징기스칸”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옆에 앉은 짝과 함께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다소 민망할 정도로 크게 웃었던 것 같다. 그러자 선생님께선 그 즉시 나를 쫓아내셨다. 그리고 무섭게 야단치셨는데 안 그래도 자신감이 부족한 그 친구에게 미칠 영향을 걱정하셨던 것이다.
나는 거의 반나절 동안 교실에 들어오지 못 했고 평상시 선생님께 나름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터라 다소 놀라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내 잘못을 깊게 반성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선생님께선 몇 몇 학생만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을 아우르시는 분이셨다.
동시조 교육도 잊을 수 없다. 절장시조에서 시작해 평시조에 이르기까지 처음 배워보는 동시조는 우리 정서와 잘 맞았고 운율감도 느껴져 무척 흥미로웠다. 또 매 시간 주제를 바꿔 자신이 지은 시조를 발표하고 선생님의 평을 듣는 수업 방식도 좋았는데 나는 선생님의 평을 기다릴 때면 가슴이 무척 두근거렸다. 또 선생님께선 수업 말미에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차근차근 채워주셨는데 이러한 선생님의 지도 때문에 나는 아직도 시가를 가까이하며 그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다. 더불어 사천향군회관에서 당신의 시조집을 발표하실 때 단상 중앙에 서시지 않고 한 쪽 모퉁이에 있는 사회자석에서 소감 발표 하시던 소탈한 모습도 관련해 기억이 난다.
이 밖에도 박씨 성을 가진 강원이, 영각이, 나 세 사람을 ‘바가지 삼총사’로 명하시고 인자하게 웃으시던 모습, 매일 한 사람씩 아침 조례 전에 장기자랑을 하게하고 함께 즐거워하시던 모습, 수시로 복싱 모션으로 우리와 장난을 치시던 모습까지 모두 다 애틋하고 정겹게 가슴에 남아있다.
선생님! 무심한 제자. 선생님께는 늘 면목이 없습니다.
교생시절, 학교에 전화 걸어 챙겨주신 것, 아버지 편에 귀한 시집 전해주신 것, 제 근무하는 학교에 연락 주시어 안부 여쭤 주신 것, 또 최근에 알았지만 제 집사람 일까지 알뜰히 살펴봐 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이 한 편의 글로 이런 선생님을 모두 담을 수 없지만 따뜻한 선생님의 마음을 다시 새겨볼 수 있어 정말 행복했습니다.
선생님! 부디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인자하신 그 모습 간직하시길 기원합니다. 또 보잘 것 없는 제 글이 선생님께서 준비하시는 일에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앞으로 선생님을 닮은 좋은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선생님처럼 좋은 가르침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986년 짧은 기간이었지만 선생님과 함께 했던 그 따뜻한 기억들은 아직도 제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쁘다는 핑계로 무심했던 제자를 그 시간 이후 지금까지 기억해주셔서,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선생님.
2013년 4월 제자 박정원 올림.
사춘기 소녀의 담임선생님
신수진(사천 동성)
1986학년도 6학년
진주촉석초 보건교사
“신 선생!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누구셨는가?”
35세 늦은 나이에 보건교사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거제 숭덕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은 나에게 이상권 교감선생님(현 덕산초 교장선생님)께서 물으셨다.
“김형진 선생님이신데 예..”
김형진 교장선생님은 나의 초·중·고 학창시절을 통틀어 유일하게 이름을 기억하는 담임 선생님이시다. 나는 이것이 항상 의문이다. 왜 다른 담임선생님의 이름은 기억을 못 하는 걸까? 내가 기억력이 좋지 못해서 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는 평범한 아이였다.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고, 공부를 잘 하지도 못하지도 않는 중간 정도의 있을 듯 없을 듯 그런 아이였다. 담임선생님도 나를 잘 기억하지 못하고 나도 담임선생님을 잘 기억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평범한 내가 사춘기가 시작된 것은 6학년 때였다.
사춘기를 막 시작한 6학년 소녀의 눈에 비친 담임선생님은 잘 생기시고 멋진 시인이셨다. 우리반 아이들에게 <생활속의 노래>라는 시집을 한 권씩 기념으로 나누어 주셨는데 어른 시조집이었다.
6학년인 내가 읽기엔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그 책이 너무 좋아서 어른으로 성장하고도 여전히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6학년 담임선생님은 학생들을 잘 지도하기 위해서 ‘포상제도’를 적절히 잘 사용하셨다. 한 번 씩 크레파스 등 학용품을 선물로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나는 공부보다도 청소를 열심히 해 공책을 받은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청소보다 공부를 잘 해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우리 담임선생님은 공부 잘 하는 학생뿐 아니라 청소 잘하는 아이까지 챙겨 보시는 섬세한 선생님이셨다. 그리고 참 부끄러운 얘기지만, 수업시간에 멋진 선생님의 얼굴을 멍하게 쳐다보다가 몇 번 지적받고 순간 내 마음을 들킨 듯 하여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적도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좋아서 내 가슴을 설레게 했던 수많은 기억들이 사춘기가 시작되는 소녀의 마음인 듯하여... 종종 나의 보건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좋아했던 일들을 “사춘기의 이해”라는 부분에 동기유발 자료로 활용하기도 한다.
“김형진 선생님 나도 잘 안다. 현재 삼천포에서 노산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계신다!”
라는 소식을 전해 주신분도 이상권 교감선생님이시다. 그리고 김형진 교장선생님의 교직생활 회고록 <그리운 그 때 그 시절>을 주시며 한번 읽어보라고 하셨다. 철렁하며 내 가슴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다시 뵈올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내가 교장선생님께 연락을 먼저 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과연 나를 기억하고 계실까?
연락은 드리지도 못하고 교장선생님이 밟아 오신 교직의 삶을 책으로 읽으며 막 교직 생활을 시작한 나의 푯대로 삶고자 하였다. 그렇게 1년을 연락을 먼저 드리지도 못한 채 학교생활을 하였다.
이상권 교감선생님이 교장선생님으로 승진하여 사천 곤명초로 발령을 받으셨고 사천시 교장단 모임에서 교장선생님께 나의 이야기를 전하셨다. 나의 담임선생님은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그리고 먼저 나에게 전화를 해 오셨다.
나는 너무나 반갑고 죄송한 마음에 핸드폰을 귀에 댄 채 90도로 인사했다. 친절하고 따뜻한 목소리셨다. 그 후 진주에서 교장선생님을 만나기로 했다. 약속 장소는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나는 순간 또 한 번 가슴이 무너졌다. 10분이면 만날 수 있는 거리인데.. 23년을 기다렸구나! 진작 인사 한번 드릴걸.
그렇게 좋아했던 담임선생님이 가까이 계신데.... 교장 선생님은 여전히 멋진 모습이셨고, 23년 만에 다시 만난 담임선생님께 사춘기 소녀의 눈에 담임선생님이 얼마나 멋지셨는지 속 시원하게 고백하였다. 그리고 내 교직 인생에 든든한 백이 생긴 듯 너무 행복했다 힘든 임용고사의 산을 넘어 보건교사 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담임선생님이 제자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지켜보고 계신다.’는 자세로 오늘도 학교일을 하고 있다. 담임선생님이 보시기에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고 싶다. 6학년 소녀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담임선생님에서 이제는 교직의 선후배 사이로 다시 뵙게 되어 참 행복하다.
섬마을 꼬마들에게 심어주신 희망과 사랑
이현아(통영 사량)
1991학년도 3학년
경기도 시흥 매화중학교 교사
그리운 선생님께
작은 시골 섬마을에 희망과 사랑을 심어주신 김형진 선생님의 퇴임을 축하드립니다.
춥기만 하던 겨울의 문턱을 지나 어느덧 주변이 푸른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 봄이 왔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저는 새 학기를 맞아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가르치고 있는 학교는 혁신학교로 한 반의 학생 수가 26~27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한반에 40명 남짓한 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내다가 이 학교로 오게 된 후 저는 아이들과 더 많이 웃고 교감하여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아이들은 넘치는 에너지로 저를 당황시키기도 하고 기쁘게 하기도 합니다. 며칠 전 학교에서 글짓기, 그림 그리기 행사가 있었습니다.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제 어린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통영의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나 초,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학급의 친구들이 얼마 되지 않아 도시의 친구들이 부럽기만 했던 시절이었지만 지나와 생각해 보니 그때가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신 김형진 선생님께서는 항상 저희에게 꿈을 가르쳐주신 분이셨습니다. 선생님의 시집을 처음 보았을 때 어린 마음에 신기하기도 하고 존경스러운 마음이 가득했었던 듯합니다. 선생님의 시집을 읽으며 나도 저런 책을 펴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항상 바른 길을 알려주시고 사랑을 주신 덕분에 그 시절을 잘 보낼 수 있었던 듯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그때는 어려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였고, 더 커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인사드리지 못하여 죄송한 마음이었는데 이렇게 글로나마 표현할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선생님을 뵙지 못하였지만 항상 제 마음속에는 20여 년 전의 그 모습 그대로 계십니다. 제 기억 속 선생님은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저희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얼마 전 메신저 속 사진으로 나마 선생님을 뵈었는데 여전히 그 미소로 웃고 계셨습니다.
어린 시절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맘이 뭉클해졌습니다.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그때나 지금이나 글을 쓴다는 것이 어렵기만 한 저이지만 기쁜 마음으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때 받은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표현하고 싶어서입니다.
오랜 교직 생활동안 수많은 어린 시절의 저와 같은 아이들을 무한한 사랑으로 품어주셨을 선생님, 이제 시작하는 단계에 있는 저와 같은 교사들에게도 길을 알려주셨을 선생님을 생각하며, 선생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 바르고 본이 되는 교사가 되리라 다짐을 해봅니다.
퇴임을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세월이 벌써 그렇게 흘렀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아쉬운 마음이 먼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기운이 넘쳐나는 지금 계절의 변화처럼 선생님께서도 퇴임 후 더 많은 활동들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다시 한 번 퇴임을 축하드리며, 선생님,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가까이 지낸 언어 영역
정영민(사천 서포)
1995학년도 5학년
현 육군 ○○부대 ○중대장 대위(육사 졸업)
결전!
선생님. 저 영민입니다.
7월 내내 K21사격부터 공지훈련 2주짜리 야외훈련 나와서 폰 충전도 못하고 그러다보니 인터넷 가능한 게임방 갈 시간도 없었습니다. 애타게 기다리셨을 원고를 휴대폰 인터넷으로나마 이렇게 보냅니다.
× × ×
태어나서 한 번도 시조를 배울 것이라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초등학생에게 시조, 시라는 것은 매력적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어렵다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철모르는 5학년 어린 시절에 존경하는 김형진 은사님을 담임선생님으로 만나기 전에 우리에게는 서포라는 시골 농촌의 한 초등학교에서 옛 선인들의 시구나. 선비들이 지어서 읊던 구절들이구나 라고만 알고 있었다.
"시조"라는 것을 처음 접하게 되면서 3-4-3-4, 3-4-3-4, 3-5-4-3 이라는 글자 수가 정해져 있다는 말을 처음 듣게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듯이, 이렇게 알고 보니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만은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3-4-3-4 3-4-3-4, 3-5-4-3이라는 규칙을 지키는 것을 보면서 단어의 선택이나 구절에 함축적 의미를 담아 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언어를 감성적으로 표현하는 요령인 은유법, 직유법 등을 배우기 시작하여 갈수록 내 마음과 생각을 함축된 언어로 표현하는 재미에 김형진 은사님과 함께 하는 시조수업은 항상 새로웠고, 재미로 가득 차 있었다.
선생님과 함께 진주교대에서 열린 시조창작 대회에도 참가하며 그동안 배운 기량을 다른 친구들과 겨뤄보기도 했던 그 시절. 첫 출전에 큰 상을 받고 그 큰 기쁨을 누리기도 했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면서 시를 문학으로 배우기만 할 뿐 창작의 기회나 여유는 찾지 못했지만 어릴 때 김형진 은사님의 가르침 덕분에 언어 영역은 항상 재미를 유지하며 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1학년 생도에 한해서 존경하는 선생님을 초청할 수 있는 스승의 날 행사를 계획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단숨에 어머니께 전화하여 나의 은사님을 꼭 모시고 싶다 말씀드렸고, 선생님도 흔쾌히 먼 길을 와주시겠다 하셨다.
지. 인. 용. 이라는 사관학교 교훈 아래 군사훈련과 배움을 계속하는 동안 나름대로 시골 뜨기였지만 열정과 끈기로 노력하여 입학했던 학교였기에 나의 은사님을 우리학교로 초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보람되고 뿌듯했다. 학교 소개를 해 드리고, 생도들의 분열 모습을 보여드리는 동안 나를 이렇게 잘 될 수 있게 도와주시며 이 자리에서 공부할 수 있고, 나라를 생각하며 젊음을 바칠 수 있게 이끌어 주신 은사님께 너무도 감사하고 고마웠다.
만약 김형진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고, 가르침을 받을 수 없었다면...
내 인생은 또 달라졌을 것이며, 나 역시 문학에 대한 눈 또한 뜰 수 없었을 것이다.
더 오랜 시간동안 더 많은 가르침을 배우지 못하여 항상 아쉬움이 남지만, 내 가슴에는 항상 김형진 선생님의 시조공부 시간이 짙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 人生歷程과 敎職歷史
Ⅰ. 人生史와 人生事
1. 家族史
<居所>
☆ 本籍 : 慶南 泗川市 昆陽面 默谷里 205番地
☆ 住所 : 慶南 晉州市 모덕로 181번 길 7 상대 現代아파트 105동 605호
慶南 晉州市 정촌면 화개리 산 00번지(9월 이후 새 거소임)
<뿌리 考>
★ 本貫 : 金寧
★ 始祖 : 金閼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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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貫祖 : 金始興, 始祖로부터 38世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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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派祖 : 金文起, 始祖로부터 45世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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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祖父 : 金溶祚, 1873.03.20生, 1941.05.06卒(忠義公派)
★ 祖母 : 金桂女, 1883.03.10生, 1934.11.29卒(金海人)
↓
★ 父 : 金相道, 1916.10.08生, 1991.10.11卒
★ 母 : 金順岳, 1920.07.10生, 1974.06.24卒(金海人)
↓
★ 我 : 金炯辰, 1949.12.27生(貫祖로부터 25世孫)
★ 妻 : 鄭秀子, 1953.12.29生(晉陽人)
↓
★ 長女 : 金貞姬, 晉州 保健大學校 卒業(事務自動化科)
專業主婦
★ 長胥 : 河泰亨, 晉州 慶尙大學校 會計學科 卒業(晉陽人, 會計學士)
SPP造船 次長
★ 次女 : 金貞和, 晉州敎育大學校 卒業(敎育學士)
창원 호계초등학교 部長敎師
★ 次胥 : 李乙洙, 晉州敎育大學校 卒業(韓山人)
晉州敎育大學校 大學院 卒業(敎育學 碩士)
의령 봉수초등학교 敎師
★ 三女 : 金貞銀, 晉州敎育大學校 卒業(敎育學士)
거제 수월초등학교 敎師
★ 三胥 : 李炫錫, 昌原大學校 工科大學 卒業(長水人, 理學士)
大宇造船海洋 대리
↓
★ 外孫女 : 河智媛, 진주 도동초등학교 5학년
★ 外孫子 : 李銀䄷, 의령 봉수초등학교 1학년
★ 外孫子 : 河承穆, 진주 도동초등학교 1학년
<家族年譜>
◇ 1949년 12월 27일 慶南 泗川郡 昆陽面 默谷里 205番地에서
父 金寧人 金相道, 母 金海人 金順岳 女史 사이에
三男 四女 중 넷째(3남)로 出生
◇ 1957년 4월 1일 사천 건흥국민학교 入學
◇ 1963년 3월 1일 사천중학교 入學
◇ 1967년 3월 1일 진주 동명고등학교 入學
◇ 1970년 2월 28일 진주 동명고등학교 卒業
◇ 1970년 3월 1일 진주교육대학교 入學
◇ 1972년 2월 22일 진주교육대학교 卒業
◇ 1972년 2월 23일 初等學校 貳級正敎師 資格 取得, 文敎部 本第32715號
◇ 1972년 5월 1일 남해군 도마초등학교 敎師 初任 發令
◇ 1975년 1월 30일 사천 곤명 추천리에서 1953년 12월 29일
父 晋陽人 鄭在益과 母 草溪人 卞錦蓮 女史 사이에
4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난 鄭秀子와 結婚
남해 도마국민학교 舍宅에서 新婚살림 始作
◇ 1975년 11월 5일 새교실 誌 時調 推薦完了(薦了作 : 길)
◇ 1975년 12월 14일 첫 딸 정희 出生
◇ 1976년 10월 6일 敎育資料 誌 時調 推薦完了(薦了作 : 塔)
◇ 1977년 10월 1일 창원 이창초등학교 교사로 轉出
창원군 진전면 이명리 오경도씨 댁으로 전세 이사
◇ 1978년 12월 15일 둘째 딸 정화 出生
◇ 1979년 2월 27일 初等學校 壹級 正敎師 資格 取得, 慶南敎育廳 아 第8420號
◇ 1980년 3월 1일 사천 서포초등학교 자혜분교장 교사로 轉出
◇ 1980년 3월 1일 자혜분교장 舍宅으로 이사
◇ 1981년 3월 1일 사천 서포초등학교 교사로 轉出
◇ 1981년 3월 1일 서포면 구평리로 이사
◇ 1981년 3월 5일 장녀 정희, 서포초등학교 倂設幼稚園 入學
◇ 1981년 4월 2일 셋째 딸 정은이 出生
◇ 1982년 2월 20일 진주시 하대동 상대주공아파트 7동 305호로 이사
◇ 1982년 2월 22일 장녀 정희, 서포초등학교 倂設幼稚園 卒業
◇ 1982년 3월 5일 장녀 정희, 진주 도동초등학교 入學
◇ 1983년 5월 12일 時調文學誌 推薦完了(薦了作 : 老僧)
◇ 1984년 3월 5일 둘째 정화, 진주 새싹 幼稚園 入學
◇ 1985년 2월 25일 진주시 하대동 하대주공아파트 105동 605호로 이사
◇ 1985년 2월 26일 둘째 정화, 진주 새싹 幼稚園 卒業
◇ 1985년 3월 5일 둘째 정화, 진주 동진초등학교 入學
◇ 1985년 3월 8일 진주교육대학교 제3학년 編入(夜間:學士課程)
◇ 1986년 1월 25일 첫 시조집<生活 속의 노래> 出版
◇ 1986년 2월 1일 첫 시조집<生活 속의 노래> 出版記念會 開催
진주 강남동 성도 禮式場
◇ 1986년 3월 1일 사천 동성초등학교 교사로 轉出
◇ 1987년 2월 28일 진주교육대학교 學士課程 卒業(敎育學士)
◇ 1987년 3월 5일 막내 정은 진주 새싹 幼稚園 入學
◇ 1988년 2월 1일 童時調集<옹달샘> 出版
◇ 1988년 2월 11일 韓國童時調思想 新人賞 受賞
◇ 1988년 2월 25일 장녀 정희, 진주 동진초등학교 卒業
◇ 1988년 2월 26일 막내 정은, 진주 새싹 幼稚園 卒業
◇ 1988년 2월 15일 童時調集 옹달샘 出版記念會 開催, 사천읍 鄕軍會館
◇ 1988년 3월 4일 장녀 정희, 진주 서여자중학교 入學
◇ 1988년 3월 4일 막내 정은, 진주 동진초등학교 入學
◇ 1989년 5월 10일 진주시 하대동 건일아파트 1동 207호로 이사
◇ 1989년 3월 1일 통영 사량초등학교 교사로 轉出
◇ 1991년 2월 24일 장녀 정희, 진주 서여자중학교 卒業
◇ 1991년 2월 25일 둘째 정화, 진주 동진초등학교 卒業
◇ 1991년 3월 4일 장녀 정희, 사천 용남고등학교 入學
◇ 1991년 3월 5일 둘째 정화, 진주 삼현여자중학교 入學
◇ 1991년 5월 10일 時調集<예나 지금이나> 出版
◇ 1991년 6월 22일 時調集<예나 지금이나> 出版紀念會 開催, 사천 南韓禮式場
◇ 1992년 3월 1일 통영 사량초등학교 돈지분교장 교사로 轉出
◇ 1994년 2월 20일 막내 정은, 진주 동진초등학교 卒業
◇ 1994년 2월 20일 둘째 정화, 진주 삼현여자중학교 卒業
◇ 1994년 2월 24일 장녀 정희, 사천 용남고등학교 卒業
◇ 1994년 3월 1일 통영 도원초등학교 교사로 轉出
◇ 1994년 3월 5일 장녀 정희, 진주 보건대학교 事務自動化科 入學
◇ 1994년 3월 5일 막내 정은, 진주 삼현여자중학교 入學
◇ 1994년 3월 5일 둘째 정화, 진주 경해여자고등학교 入學
◇ 1995년 3월 1일 사천 서포초등학교 교사로 轉出
◇ 1996년 2월 25일 장녀 정희, 진주 보건대학교 事務自動化科 卒業
◇ 1997년 2월 20일 막내 정은, 진주 삼현여자중학교 卒業
◇ 1997년 2월 21일 둘째 정화, 진주 경해여자고등학교 卒業
◇ 1997년 3월 4일 막내 정은, 진주 삼현여자고등학교 入學
◇ 1997년 3월 5일 둘째 정화, 진주교육대학교 入學
◇ 2000년 2월 24일 막내 정은, 진주 삼현여자고등학교 卒業
◇ 2000년 3월 1일 사천 사천초등학교로 轉出
◇ 2000년 8월 23일 初等 校監 자격 取得, 慶南敎育廳 아제3434호
◇ 2000년 9월 1일 양산 천성초등학교 校監으로 昇進 發令
◇ 2001년 2월 25일 둘째 정화, 진주교육대학교 卒業
◇ 2001년 3월 1일 둘째 정화, 양산 평산초등학교 교사 초임 發令
◇ 2001년 3월 4일 막내 정은, 진주교육대학교 入學
◇ 2002년 1월 6일 큰 딸 정희, 진양인 하태형과 結婚
진주 귀빈예식장 2층 貴賓室
◇ 2003년 3월 1일 사천 서포초등학교 校監으로 轉出
◇ 2002년 11월 10일 첫 외손녀 하지원 出生
◇ 2003년 6월 20일 진주시 상대1동 상대현대아파트 105동 605호로 移徙
◇ 2003년 12월 21일 둘째 딸 정화, 韓山人 이을수와 結婚
진주시청 2층 市民 홀
◇ 2004년 3월 1일 사천 곤양초등학교로 轉出
◇ 2004년 6월 5일 동시조집<감꽃 목걸이> 出版
◇ 2005년 2월 24일 막내 정은, 진주교육대학교 卒業
◇ 2006년 3월 1일 막내 정은, 마산 신월초등학교 교사로 신규 發令
◇ 2005년 9월 13일 初等校長자격 取得, 慶南敎育廳 아제2299호
◇ 2006년 4월 12일 외손자 이은석 出生
◇ 2006년 6월 16일 외손자 하승목 出生
◇ 2006년 9월 1일 남해 남명초등학교 校長으로 昇進 發令
◇ 2009년 6월 17일 回甲記念文集<그리운 그 때 그 時節> 出版
◇ 2010년 3월 1일 사천 노산초등학교 校長으로 轉出
◇ 2010년 3월 1일 막내 정은, 마산 중리초등학교 교사로 轉出
◇ 2010년 9월 1일 校長 重任 發令
◇ 2011년 9월 1일 사천 정동초등학교로 轉出
◇ 2011년 12월 18일 막내 정은 長水人 이현석과 結婚
진주 포시즌 2층 라일락 홀
◇ 2012년 3월 1일 막내 정은 거제 수월초등학교 교사로 轉出
◇ 2013년 8월 20일 停年退任 記念 敎育文集<續 . 그리운 그 때 그 時節> 出版
◇ 2013년 8월 31일 停年退職(41년 4개월) 黃條勤政勳章 受勳
2. 내가 사는 동안에
(1) 가장 기뻤던 일
슬펐거나 힘들었던 일도 그렇겠지만 기뻤던 일도 상당히 많다. 그러나, 제목 앞에 ‘가장’이라는 낱말이 붙었으니 딱 하나만 집어야 할 것이다. 그런 연유로 더욱 어려운 사안이기는 하지만 내게는 사는 동안에 가장 기뻤던 일로 <시조문학지 추천 완료>를 꼽는데 전혀 망설임이 없겠다.
애초 시조문학지 추천을 목표로 정진을 시작할 때는 교직 평생을 걸고 순수 우리 민족문학인 시조의 보급을 위해 나름대로 애를 쓰겠다는 각오였고, 그걸 실천 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 때는 이미 새교실과 교육자료지의 추천을 완료한 상태였고 교단문인으로 내 이름이 도내와 전국적으로 알려진 상태였다.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시조 창작에 대한 실기연수는 나름대로는 다른 교사들에 비하여 많이 이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는 얘기다.
사실 그랬기 때문에 교원예능경진대회에 시조 백일장 분야가 처음으로 도입된 1978학년도에 창원 이창국민학교에 재직할 당시 출전하여 입상을 함으로써 교직 첫 연구실적을 내가 사랑하는 시조쓰기로 채울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1983년 5월 추천완료 통지를 엽서로 받는 순간(배달된 엽서를 내 책상 서랍을 열다가 확인한) 혼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제법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게 소위 환희의 소리였을 테고 아울러 감전이라도 된 듯한 전율이라는 것도 느낄 수가 있었다.
더구나 당시 초등 교사로서 정식 데뷔 과정을 통과하고 시조시인으로 등단한 사람은 전국적으로 희귀했다. 경북의 조주환, 강원도의 최도규, 남진원, 그리고 경남의 김형진(나)이가 고작이었다. 지금이야 교원 예능대회 덕분에 시조에 관심을 갖는 초, 중등 교사들이 무수히 많고, 따라서 정식으로 데뷔과정을 거친 시조시인들이 양 손으로는 모자랄 만큼 많다.
(2) 가장 슬펐던 일
가장 기뻤던 일 못지않게 내게는 슬픈 일도 많았다. 그 중 가장 슬펐던 일은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신 일이다.
돌아가실 적 어머니의 연세는 고작 쉰 하고도 다섯, 누가 생각해도 아직은 가실 연세가 아니셨는데, 요즈음만 같았어도 결코 돌아가시기까지 하지 않을 저혈압이라는 갑작스런 증세로 병원으로 가시는 도중에 그만 안타까운 삶을 마감하신 것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육영수 여사의 서거보다 사흘 앞에 있었던, 내게는 생애 가장 슬펐던 어머님의 영면이 당연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첫 임지인 남해 도마국민학교에서 당시 형님이 근무하시던 거제 화도초등학교에 다니러 갔다가 학교로 돌아갔더니 부음이 와 있었다.
그걸 접하는 순간은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란 게 바로 이런 거구나 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초등 교사였던 나와 작은 형님은 방학 중이기는 했지만 각자의 일로 집에 있지 않았기에 어머니의 임종을 하지 못했음도 두고두고 철천지한(徹天之恨)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아버님이 우리 가정의 울타리요 버팀목이셨다면 어머님은 우리 8남매의 믿음 그 자체이셨다. 어려운 가정 살림을 꾸리시느라 늘 힘드셨지만, 농사일로 언제나 고되셨지만 우리 형제자매(兄弟姉妹)들에게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어머니셨다.
이후 세월의 차이를 두고 장형이 몹쓸 병으로 마흔 아홉 꽃다운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가신 일도 나를 한없이 슬프게 한 일이었고, 일흔 여섯 아쉬운 연세에 아버님이 돌아가신 일도 말할 수 없는 회한과 억장 무너짐을 겪었지만 맨 먼저 겪은 어머님 돌아가신 일로 세상의, 세월의 이치를 깨달았음인지 보다 빨리 나를 수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3) 가장 힘들었던 일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사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일이 과연 무엇일까?
그건 망설임 없이 꼽을 수 있으니 바로 중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다가 1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중도 하차한 일이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슬픔, 절망이 나를 억눌렀었다. 지금에 와서 50년도 더 넘은 세월에도 내 생애 가장 힘들었던 일로 꼽는 것만으로도 정말로 힘들었던 일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이다.
내가 중1이던 해는 육십갑자(六十甲子)로 계묘년(癸卯年)이었는데 그 해 사상 초유의 긴 장마로 보리농사를 완전히 망쳐서 당시 고 2였던 형님과 중 1이었던 내가 함께 학교에 다닐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고향 사천 곤양 동천 마을의 바로 옆집 친구는 아침이면 교복 입고 학교 가는 모습 보며 나는 소를 몰거나 지게를 지고 논이나 밭으로 나가야 하는 심정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고인이 되신 내 장형(長兄)도 중학교 과정을 다니다가 그만두는, 나와 꼭 같은 경험을 가지셨다. 나보다 못하지 않으셨을 고통을 짐작하지만 실제로 형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단 한 번도 그 일을 애처롭게 얘기 하신다거나 아버님을 원망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어느 날 단 둘이만 있는 툇마루에서 숨길 수 없었던 시름을 내 얼굴에서 읽으셨는지,
“형진아! 학교 중도에 그만둔 일로 슬퍼만 하면 결국은 너만 손해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의미며, 강의록으로 독학(獨學)하는 방법도 있고, 당장은 독학(獨學)으로 한학(漢學)을 할 수 있다는 등 좀 더 자세한 얘기도 있었는데 당신께서도 같은 처지에서 울어도 보고 절망도 했지만 결국은 운명이려니 하고 산다는 말씀으로 나를 다독이셨던 일은 큰 형님과 나를 제외한 우리 형제자매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부모님께서도 모르고 돌아가신 일이다.
실제로 내 장형께서는 혼자 독학으로 하신 한학(漢學)만큼은 대학 공부를 마친 나보다는 훨씬 박식(博識)하셨으니 그저 하기 좋은 말로만 그런 얘기를 들려주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아버님에 대한 생각은 나도 마찬가지다. 원망할 상황이나 처지가 아님을 어린 소년이 알았다고 하면 지나친 이야기일 것이고, 아버님의 입장에서 가정 전체를 이끌어 나가시는데 가능한 일이 있고, 불가능한 일이 있으셨을 것인데 마음 크게 아프신 가운데 그런 결정을 하실 수밖에 없는 입장이셨을 것으로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절망에 빠져 농사일을 거들며 살았던 몹시 힘든 그 시절, 나를 보시고 마음 아파하시는 아버님의 모습을 아둔한 나로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해서 이날 이때껏 원망의 마음은 가져본 적이 없다.
오히려 세월이 좀 지난 뒤에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가늘게나마 이어보려는 내 향학(向學)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도우시고 늦게나마 논 서마지기를 팔아서 금융기관에 맡기시고 그 이자로 학비를 대 주시던 경제적인 희생으로 길을 열어주셔서 오늘의 내가 있게 하신 점만 태산(泰山) 같은 고마움으로 간직하고 살고 있다.
아울러 작은 형님도 둘이 다니다가 학교 공부를 중단한 동생을 마음 편히 보고 지내지는 못하셨을 것을 짐작으로 알고 있었고, 스스로의 공부를 다 마치기도 전에 그 일을 돕느라고 아버님을 설득하는 등 고심(苦心)하신 일도 이 지면을 빌어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싶다.
(4) 가장 잘 한 일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잘 한 일’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아니 그런 기특한 일을 한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어렵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고 내 생각에 기인할 일이니 내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것이란 단정으로 2002년 2월 14일에 혼자 단행했던 <담배 끊은 일>을 꼽고 싶다.
그 때는 내가 양산 천성초등학교 초임 교감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한 달 쯤 전에 내게 녹내장(綠內障) 진단을 내린 안과의사의 금연 권유가 있었는데 그 때는 들을 의사가 전혀 없었었다.
이유는 그간 몇 차례 금연을 결심하고 시도했다가 모두 실패하고 말았던 전과(前過)에 비추어 담배 끊는 일이 내게는 불가능한 일 일 거라는 단정을 먼저 하고 담당 의사 선생님께 어렵겠다고 의사를 명확히 밝힌 바가 있었다. 사실 30년 넘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피워온 담배를 쉽게 끊을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다.
당시 진주 집을 떠나 혼자 양산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진주 집과 양산 웅상이란 지역은 멀어도 너무 멀었던 탓이었다. 집사람도 내게는 담배를 끊으라는 얘기는 아예 안하고 간혹 담배 좀 많이 피지 말라는 당부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세 시 경에 잠이 깨어 습관대로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는데 TV를 켜니 금연에 관한 광고를 하고 있었다. 별다른 관심 없이 보고 있는데 내용인즉 금연초라 이름 하는 광고 대상 물건이 꼭 담배처럼 생긴 것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저걸 피워야 금연이 된다면 오히려 더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저런 것 까지 사다 피워야 가능한 일이라면 나는 그냥 금연에 도전해 보아야겠다는 야무지다기 보다는 맹랑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즉시 피우던 담배를 끄고, 아직도 삼분의 이 정도나 남은 담배 곽을 열지도 않고 그대로 힘주어 구겨서는 휴지통에다가 과감히 버렸다. 물론 라이터까지도 함께였다. 지금껏 여러 차례 시도는 했지만 단 한 번도 금연을 성공에까지 이끌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꼭 결행을 성공으로 이끌리라 굳게 마음을 먹고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결정적으로 내 흡연을 걱정하는 집사람이 함께 있지 않다는 이유를 비롯한 금연을 방해할 온갖 유혹 요소들이 열거할 수도 없이 많아서 온갖 어려움은 전과 마찬가지로 따랐다. 날짜가 지남에 따라 유혹이 있으면 지금까지 참은 것이 아까워서 이를 악물기 까진 아니래도 참곤 한 것이 오늘에 이르도록 담배를 입에 대어 보지 않고 지나올 수 있었다.
어쨌거나 금연을 결행하여 성공한 일은 내 생애를 두고 가장 잘 한 일인 것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
(5) 가장 보람을 느낀 일
살아오면서 보람을 느낀 일도 많은 것 같아서 어느 것이 가장 보람스러웠는지 단정 짓기가 상당히 난감하다. 아무래도 교육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교육 현장에서 있었던 일 중에서 고르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시조 교육>을 꼽는다.
아동 지도는 교직 평생을 두고 문예부를 떠나 다른 부서를 맡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해마다 시조 지도는 할 수가 있었다. 1972년부터 1990년도에 이르는 동안 20년의 기간 동안 준비했던 학생지도를 위한 교사용 지도서와 아동용 워크북을 개발 완료하여 1990학년도에 담임했던 통영 사량초등학교 6학년 47명(54회 졸업생)을 대상으로 처음으로 시도했다.
선발된 우수 아동 대상이 아니라 한 학급 전체 아동이 시조를 쓸 수 있도록 지도 한다는 목표였기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시작을 했는데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처음 예상은 적어도 5,6명은 따라오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고 벌인 일이었는데 47명 모두가 시조를 쓸 수 있게 되었고 한결 같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달 만큼 좋아들 했다.
이후 부임하는 학교마다 내가 담임하는 학급은 반드시 시조지도를 실시했고 절장시조, 양장시조, 평시조의 단계마다 시조집을 만들어 나누었고, 그 일은 교감이 되어서도, 교장이 되어서도 계속했으니 지금은 그 수효를 헤아리기가 힘들다. 그 헤아리기 힘든 수효만큼 크나큰 보람을 나는 누려온 셈이다.
다음으로 학부모 시조교실 운영으로 학부모들에게 시조를 쓰도록 지도한 일이다.
2004학년도에 사천 곤양초등학교 교감 근무 때 평생교육 시범학교 운영의 한 강좌를 맡아 지도를 했는데 14명 참가에 끝에 가서는 복사판 시조집을 발간하여 나누어 갖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2010학년도에는 사천 노산초등학교 교장 재직 시에 15명의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학부모 시조교실을 운영했는데, 역시 마지막에는, <우리 노래>라는 시조집을 교내에서 복사판으로 발간하여 나누어 갖게 함으로써 보람을 함께 했고, 다소 비판적이던 학부모들의 학교에 대한 시선을 아주 조금은 돌려놓을 수가 있었다.
2012학년도에는 마지막 재직학교인 정동초등학교에서 학년 초에 예산을 수립하여 10명이 참가한 학부모 시조교실 회원들의 작품집 <터앝에서 거둔 열매>를 출판사에 의뢰하여 발간했다. 2013학년도에는 1학기 동안에 16명의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하여 열심히 지도에 임하고 있고 1학기 말이 되면 역시 깔끔한 시조집이 만들어져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단순한 시조 보급 내지 자도의 차원으로만 끝나는 일이 아니라 눈에 당장 나타나지는 않지만 교육의 사회화에도 큰 몫을 했다고 자부하는 일이니 내게는 가장 보람 있는 일로 꼽을 수 있는 것이다.
Ⅱ. 근무 학교별 연구업무 및 문예지도 실적
1. 남해 도마<72.05.01-77.09.30(5년)> - 교사
(1) 문예지도 성과
◇군립도서관 주최 독후감 - 72.10.19 독서 감상문 장려(5.김창표)
◇교육성과 실증자료 전시회 - 73.2.12 독후감 우량(5.김창표), 일기쓰기 특선(2.류행선)
◇학생 학예발표대회 - 73.4.26 동시 우량(6.채원석), 산문 우량(6.장충남), 동화 우량(3.정봉헌)
◇교육성과 실증자료 전시회 - 75.2.18 독후감 1위(5.정숙지), 일기장 3위(2.김성갑),
관찰기록장 3위(4.이덕녀)
◇임진성 개관 기념 학예대회 - 76.8.30 산문 장려(4.이심자), 일기장 최우수(1.박창훈)
2. 창원 이창<77.10.01-80.02.29(2년5개월)> - 교사
(1) 연구업무
◇78학년도 진해시교육청 지정 반공교육 우수학교 (연구담당)
(2) 문예지도 성과
◇학예발표대회 - 78.11.4 시조부 우수(6.최미란), 동시부(5.전은연)
◇학예발표대회 - 79.10.18 시조부 우수(6.김용호), 시조부 장려(5.김성곤)
3. 서포초 자혜분교<80.03.01-81.02.28(1년)> - 교사
◇교원예능경진대회 예선대회(시조부) 최우수 - 본인
4. 사천 서포<81.03.01-86.02.28(5년)> - 교사
(1) 연구업무
◇82학년도 경상남도교육청 지정 해양탐구 시범교육청 협력학교 (연구부장)
◇82.08.31 해양탐구 자료전시회 최우수상-학교수상 (연구부장)
◇84학년도 사천교육청 지정 해양탐구교육 시범학교 (연구부장)
◇85학년도 경상남도교육청 지정 미술과 우수학교 (연구부장)
(2) 문예지도 성과
◇학생 종합학예대회 글짓기 - 81.10.15 시부 장려(6.김은정)
◇반공학예대회 글짓기 - 81.10.29 우수(6.김은정)
◇선진성 벚꽃 축제 - 81.4.6 우수(6.박미경) 장려(백선미)
◇자연보호 백일장 - 81.12.14 최우수(6.김은정)
◇독서대회 - 83.10.29 장려(6.김은정)
◇해양탐구교육 작품 전시회 - 83.8.31 산문 우수(6.김경옥) 동시 우수(6.이정길)
산문 우수(6.최광석) 산문 장려(5.김해성) 동시 장려(5.최형욱)
동시 장려(5.문지용) 산문 장려(5.홍지찬) 동시 장려(6.황영현)
◇사회정화 글짓기 - 83.10.22 산문 장려(6.황성운)
◇반공학예대회 - 83.10.20 산문 장려(6.황성운)
◇정의사회구현 - 83.11.19 산문 최우수(5.이인숙)
◇경로효친 수기 - 85.10.19 금상(4.임복점) 동상(5.안은정)
5.사천 동성<86.03.01-89.02.28(3년)> - 교사
(1) 연구업무
◇88학년도 경상남도교육청 지정 선진학교 운영-1988.12.31 (연구부장)
(2) 문예지도 성과
◇86학년도 - 사회정화 글짓기 최우수(6.박강원) 외 15개 대회 53명 입상
◇87학년도 - 전국 농어촌 어린이 글짓기 우수(6.이순이) 외 13개 대회 44명 입상
◇88학년도 - 호국문예 백일장 대상(4.진성혜) 외 14개 대회 48명 입상
6.통영 사량<89.03.01-92.02.29(3년)> - 교사
(1) 연구업무
◇91학년도 체육교육활동 시범학교 (연구담당)
(2) 문예지도 실적
◇미래과학 글짓기 - 89.04.21 최우수(6.이지영)
◇주민신고정신 함양 글짓기 - 89.07.24 장려(6.주혜정)
◇전국 농어촌어린이 글짓기대회 - 98.09.02 중앙 장려(6.주혜정)
◇부산경남 학생 편지쓰기대회 - 89.11.29 장려(6.정인정)
◇과학 독후감 발표대회 - 은상(6.박혜진)-90.04.21
◇주민신고 글짓기대회 - 우수(6.장은경)-90.07.23
◇독후감 발표대회 - 장려(6.추헌미)-90.08.14
◇한산대첩 기념 제전 한글시백일장 - 차상(6.장은경)-90.10.27
◇독후감 발표대회 - 2위(3.이현아)-91.08.27
◇진주교대 두류문화전 백일장 - 차상(4.장민경), 차하(5.박서영)-91.10.18
◇군민의 날 기념 통영의 얼 백일장 - 참방(5.박서영)-91.11.03
7.통영 사량 돈지분교<92.03.01-94.02.28(2년)> - 교사
(1) 문예지도 실적
◇진주교대 두류문화전 백일장 - 시조 차상(6.조춘희), 시조 차하(6.박소연)-93.10.16
8.통영 도원<94.03.01-95.02.28(1년)> - 교사
(1) 연구업무
◇94학년도 통영시교육청지정 교통안전교육 시범학교 (연구담당)
(2) 문예지도 실적
◇청소년 과학경진대회 - 94.4.21 미래과학 글짓기 우수(6.김지혜), 장려(5.박혜림)
과학 독후감 쓰기 우수(5.이한나)
◇교통안전 글짓기 - 94.5.13 최우수(6.김지혜), 장려(5.이영수)
◇자원절약 환경보전 학예대회 - 94.10.14 산문부 장려(6.김지혜), 운문부 장려(6.박미정)
◇진주교대 두류문화전 백일장 - 94.10.15 시조부 차하(5.박선희), 참방(5.임종용), 참방(5.김희수) 동시부 참방(5.이한나)
◇자원절약 환경보전 실천사례발표 - 94.11.29 장려(6.김지혜)
9.사천 서포<95.03.01-00.02.29(5년)> - 교사
(1) 연구업무
◇경상남도교육청 지정 특별활동교육 우수학교(1996학년도) (연구부장)
(2) 문예지도 성과
◇건전소비 글짓기 - 97.04.24 장려(6.주정재)
◇청소년 문예 - 97.06.27 최우수(6.김보라) 우수(6.최혜경) 장려(6.진정은) 장려(6.황수재)
◇경남 아동 백일장 - 97.09.23 장원(5.김옥주) 차하(5.이영화) 참방(6.최혜경)
◇가정의 달 글짓기 - 98.05.20 장려(4.박나란)
◇바다사랑 글짓기 - 98.05.23 동상(6.주신자)
◇부산 매일 어린이 글짓기 - 98.06.24 장려(4.이은혜)
◇경남 아동 백일장 - 98.10.07 차상 (6.김옥주) 차상 (4.박나란) 차하 (4.이은혜) 참방 (4.이율리아)
◇사랑의 일기 공모 - 98.10.30 미당상(5.윤혜빈) 입상(5.서미경)
◇선진성 벚꽃 축제 - 99.04.02 참방(5.전은희) 참방(6.윤혜빈)
◇사천도서관 주최 백일장 - 99.09.28 차하(6.이경주)
◇와룡제 백일장 - 99.10.22 산문 차하(5.백승준), 산문 참방(6.박은경)
◇새천년 장학 축제 백일장 - 00.01.13 장려(3.황수연) 장려(3.강미정) 장려(3.황수연) 장려(3.정민진) 장려(3.박혜임) 장려(4.박희은) 장려(4.강정미) 장려(5.이정혜) 장려(6.김종미) 장려(6.송어지나)
◇선진성 벚꽃 축제 백일장 - 00.04.08 장려(6.백승준)
10. 사천 사천<00.03.01-00.08.31(6개월)> - 교사
(1) 학급 전체 시조창작지도
4학년 7개 학급 지도, 시조집(절장, 양장, 평, 연 시조집) - 28권 발행
11. 양산 천성<00.09.01-03.02,28(2년 6개월)> - 교감
(1) 연구업무
2001학년도 정보 통신 윤리교육 시 시범학교 (교감)
(2) 학급 전체 시조창작지도 - 교감 수업
2000, 6학년 3개학급 지도, 시조집(절장, 양장, 평, 연시조집) - 12권 발행
2001, 6학년 4개학급 지도, 시조집(절장, 양장, 평, 연시조집) - 16권 발행
2002, 6학년 4개학급 지도, 시조집(절장, 양장, 평, 연시조집) - 16권 발행
12. 사천 서포<03.03,01-04,02,29(1년)> - 교감
(1) 학급 전체 시조창작지도 - 교감 직접 수업
2003, 4,5,6학년 5개학급 지도, 시조집(절장, 양장, 평, 연시조집) - 20권 발행
13. 사천 곤양<04.03.01-06.08.31(2년 6개월)> - 교감
(1) 연구업무
◇04학년도 생활지도 도 지정 연구학교 운영 보고 (교감)
◇04학년도 평생교육 지역중심학교 운영 보고(도) (교감)
◇04.12.28 교육부 100대 교육과정 우수학교 표창 수상 (교감)
◇05.12.15 제6회 전국 아름다운학교 최우수 수상 (교감)
(2) 학급 전체 시조 창작지도 - 교감 수업
2004, 5,6학년 4개학급 지도, 시조집(절장, 양장, 평, 연시조집) - 16권 발행
2005, 4,5학년 4개학급 지도, 시조집(절장, 양장, 평, 연시조집) - 16권 발행
2006, 3,4학년 4개학급 지도, 시조집(절장, 양장, 평, 연시조집) - 16권 발행
(3) 학부모 동아리 시조교실 운영 - 교감 지도
2005, 14명 동아리 직접 지도, 전시회 개최 및 개인별 육필문집 발행 - 14권
14. 남해 남명<06.09.01-10.02.28(3년 6개월)> - 교장
(1) 연구업무
08학년도 남해교육청 지정 독서활동 시범학교 (교장)
09학년도 경남교육청 지정 농산어촌 돌봄학교 운영 (교장)
09학년도 남해교육청 지정 학력향상 지역 중심학교 운영 (교장)
(2) 학급 전체 시조 창작지도 - 학교장 수업
2006, 4,5,6학년 3개학급 지도, 시조집(절장, 양장, 평, 연시조집) - 12권 발행
2007, 3학년 1개학급 지도, 시조집(절장, 양장, 평, 연시조집) - 4권 발행
2008, 3학년 1개학급 지도, 시조집(절장, 양장, 평, 연시조집) - 4권 발행
2009, 3학년 1개학급 지도, 시조집(절장, 양장, 평, 연시조집) - 4권 발행
(3) 민족시 시조시화전 개최 - 2009년 3,4,5,6학년 전교생 참가
15. 사천 노산<10.03.01-11.08.31(1년 6개월)> - 교장
(1) 연구업무
◇2010 학교 특성화 교육 우수학교 교육감 표창(시조교육) (교장)
◇2010 사천시 보건소 지정 금연 교육 솔선 시범학교 운영 (교장)
(2) 학급 전체 시조 창작지도 - 학교장 수업
◇2010 4,5,6학년 8개학급 지도, 시조집(절장, 양장, 평, 연시조집) - 40권 발행
◇2011 3학년 2개학급 지도, 시조집(절장, 양장, 평, 연시조집) - 8권 발행
(3) 학부모 시조교실
학교장 지도 2011, 12명 동아리 활동 지도, 시조집 ‘우리 노래 우리 얘기’ 발행
(4) 민족시 시조시화전 개최 - 2010년, 3,4,5,6학년 전교생 참가
16. 사천 정동<11.09.01-13.08.31(2년)> - 교장
(1) 연구업무
◇11.11.15 도 지정 특수교육 시범학교 보고회(교장)
(2) 학급 전체 시조 창작지도 - 학교장 수업
◇2011, 3,4,5,6학년 8개학급 지도, 시조집(절장, 양장, 평, 연시조집) - 32권 발행
◇2012, 3학년 2개학급 지도, 시조집(절장, 양장, 평, 연시조집) - 8권 발행
◇2013, 3학년 2개학급 지도, 시조집(절장, 양장, 평, 연시조집) - 8권 발행
(3) 학부모 시조교실 - 학교장 지도
◇2012, 10명 동아리 활동지도, 시조집 ‘터앝에서 거둔 열매’ 발행
◇2013, 15명 동아리 활동지도, 시조집 ‘우리노래 우리얘기’ 발행
(4) 민족시 시조시화전 개최 - 2011년, 2012년 2회 3,4,5,6학년 전교생 참가
Ⅱ. 개인 연구실적 및 표창 수상
1. 연구실적
○교원예능경진 시조 2등급(79-창원 이창 교사)
○학습지도연구대회 도덕과 도2등급 (82-사천 서포 교사)
○개인 시조집 생활속의 노래 발간(86-사천 서포 교사)
○개인 시조집 옹달샘 발간(88-사천 동성 교사)
○한국 동시조사상 신인상 수상(88-사천 동성 교사)
○학급경영연구 3등급(90-통영 사량 교사)
○개인 시조집 출판(예나 지금이나)(91-통영 사량 교사)
○전통예능 시조 2등급(91-통영 사량 교사)
○현장교육연구대회 2등급(92-통영 사량 돈지분교 교사)
○예능경진 시조 1등급(93-통영 사량 돈지분교 교사)
○학습지도연구대회 국어과 도2등급(96-사천 서포 교사)
○교과교육연구대회 국어과 도2등급(98-사천 서포 교사)
○인성교육연구대회 특수교육 도3등급(99-사천 서포 교사)
○동시조집 ‘감꽃 목걸이’ 발간 (04-사천 곤양 교감)
○회갑기념 문집 발간 ‘그리운 그 때 그 시절’ (09-남해 남명 교장)
○정년기념 문집 발간 ‘속 ․ 그리운 그 때 그 시절’ (13-사천 정동 교장)
2. 표창 수상
○새마을 수기 우수 교육장 표창(76-남해 도마 교사)
○교원예능경진대회 진해시 예선 최우수 교육장 표창(78-창원 이창 교사)
○교원예능경진대회 사천시 예선 최우수 교육장 표창(80-서포 자혜분교 교사)
○우수학교 학생 기능신장 유공 교육감 표창(84-사천 서포 교사)
○학교정화 우수사례 제출 유공 교육장 표창(87-사천 동성 교사)
○호국백일장 우수학생 지도유공 교육장 표창(87-사천 동성 교사)
○체육교육활동 우수학교 유공 교육감 표창(90-통영 사량 교사)
○학습지도 유공 교육장 표창(94-통영 도원 교사)
○교육시책 구현 유공 교육감 표창(97-사천 서포 교사)
○국민교육헌장이념구현 유공 국무총리 표창(98-사천 서포 교사)
○양산교육 편집 유공 교육장 표창(02-양산 천성 교감)
○교육공로(연공)표창(04-곤양 교감)
○사천교육상 수상(제8회)(2012.12.31-사천 정동 교장)
○黃條勤政勳章 受勳(2013.8.31-사천 정동 교장)
Ⅲ. 교육청, 교육지원청 업무 협조
1. 심사위원 활동
(1) 도교육청 주최 교원예능경진대회 교육지원청 주최 또는 주관 문예행사 수십 회
(2) 학습지도연구대회 심사 수 회
(3) 육상대회 심판 활동 수 회 - 3종 육상 공인심판 자격증 소지
2. 교육지원청 도서자료 발간 업무 협조
- 원고 수집, 원고 수정, 원고 정리, 교정 등
도 서 명 |
도 서 내 용 |
연도 |
비 고 |
해양탐구 지도 자료 |
교과 관련 지도서 |
1983 |
본인 체육교과 관련자료 작성 |
내고장 자랑대회 자료집 |
학교별 원고 수합 편집 |
1984 |
책자 발간, 책임 교정 |
새마을교육 실천사례집 |
학교별 사례 수합 편집 |
1985 |
책자 발간, 책임 교정 |
부모자랑대회 자료집 |
학교별 원고 수합 편집 |
1986 |
책자 발간, 책임 교정 |
정화활동 실천 사례집 |
학교별 사례 수합 편집 |
1987 |
책자 발간, 책임 교정 |
3. 사천교육, 양산교육 편집
- 편집 기획, 원고 배정 ,수집, 정리, 편집회의, 교정, 인쇄, 배포 등
<사천교육>
○1996학년도 편집위원 ○1997학년도 편집위원 ○1998학년도 편집위원
○1999학년도 편집위원 ○2000학년도 편집위원(3-8월)
<양산교육>
○2001학년도 편집위원장 ○2002학년도 편집위원장
Ⅳ. 문학, 교육관련 개인 도서 출판
도서종류 |
도 서 명 |
출 판 사 |
출판시기 |
크기, 쪽 수 |
時調集 |
生活 속의 노래 |
圖書出版 詩路(釜山) |
86.01.25 |
14.5×22, 120쪽 |
童時調集 |
옹달샘 |
圖書出版 詩路(釜山) |
88.02.01 |
14.5×22, 115쪽 |
時調集 |
예나 지금이나 |
圖書出版 慶南(馬山) |
91.05.10 |
12.5×22, 138쪽 |
童時調集 |
감꽃 목걸이 |
圖書出版 慶南(馬山) |
04.06.05 |
12.5×22, 144쪽 |
敎育隨想集 |
그리운 그 때 그 時節 |
圖書出版 慶南(馬山) |
09.06.17 |
15.0×22, 400쪽 |
敎育隨想集 |
續,그리운 그 때 그 時節 |
유승印刷•出版(晋州) |
13.08.10 |
19.0×26, 300쪽 |
<엮고 나서>
교직을 마치며
평생을 두고 딴엔 우직한 가운데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교직을 마친다는 생각에 모든 일들이 서글퍼지고, 어차피 내가 만들어 나가야 할 일이겠지만 벌써부터 퇴직(退職) 후에 전개될 새로운 세계가 궁금해진다.
오늘이 있기까지 내가 옮겨 다니면서 소속된 직장의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가정사 일체를 혼자서 도맡다시피 해왔고 불평 한마디 안하고 내가 편안하도록 내조 해 온 집사람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내가 외조할 일이 있으면 열심히 할 각오다.
아울러 어릴 적부터 제 일 제가 알아서 잘 해왔고, 커서도 평범한 가운데 부모 이름에 빛이 더하게 살아가는 딸들에게 대견함을 느낀다. 아울러 함께 가정을 이루어 나와 내 내자에게 아들보다 더 진한 가족애로 살아가는 세 사위들, 첫째 하서방, 둘째 이서방, 셋째 이서방에게도 고마움과 진한 사랑을 느낀다.
바쁘고 귀찮은 일인데도 정성 들여 원고 만들어 보내준 제자들에게, 주옥같은 독후감 보내주신 분들, 이날 이때껏 학교마다 함께 근무했던 동료님들, 학부모님들, 지역민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끝으로 출판을 위해 애써주신 유승 출판사 사장님께 큰 고마움을 전한다.
2013년 8월 어느 좋은 날
저자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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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배님 보내주신 책 잘 받았습니다. 지병으로 고생하던 저의아버지 장례(裝禮)치루느라 한동안 카페 방문을 하지못하였습니다, 형진선배님의 용담화, 주희후배님의 사랑, 카페지기 종형후배님의 올린글 등을 주희의 국화차 를 마시며(?) 댓글을 하고있습니다. 선,후배님들에게 항상 감사하는마음 가슴속에 품고있습니다.
하 선배님 선친께서 작고 하셨던가 보네요. 당연히 알려 주셔야 했는데 .... 늦게나마 고인의 삼가 명복을 빌며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길 기도합니다.
선배님! 그런 슬픈일이 있었군요...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말 대단하시고, 존경스럽습니다.선배님...
형진이 형님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어릴때 부터 형님 께서는 뭔가를 하실것 같은 생각을 외갓집에 갈때마다 늘 했었고 형님들께 공부도 좀 배우고 싶었던게 제 어린시절 희망이었습니다. 자녀들도 휼륭히 잘 키워 일등 가정 이루어 놓으셨고 공직생활도 참 알차고 보람있게 하신것 같습니다. 제자들 보면 가슴 너무 뿌듯하겠습니다 . 인간의 가장 소중한 자산 아니겠습니까? 저도 이제 만 2년 남았습니다만 조직과 후배들을 위해 제 모든 열정을 다하고 마칠까 합니다. 다시한번 존경합니다
끝까지 정독하며 다 읽어보았습니다.
선배님은 교직자로서, 우리 일반인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많은 일을 해내시며 삶을 사셨군요.
정말 존경합니다. 그리고 자랑스럽습니다.
꼼꼼한 메모의 습관으로 교단 40여년의 체험과 추억을 담은 교육수상집 그“때 그 시절” 발간, 4권의 시조집발간, 우리 민족문학인 시조 보급, 심근경색의 힘든 병마와의 싸움에서 다시 일어서신 일 등 그 어느 것 하나 존경스럽고 자랑스럽지 않은 것들이 없습니다.
그런 선배님 밑에서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정말로 행복했었겠구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