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할 수 없는 종교적 진리로서의 이원론적 세계관
-키르케고르의 종교적 진리-
삶의 운명에 대해 이러한 기독교적 이해
이러한 삶의 운명이란 그것이 삶의 권태의 극단까지 밀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지점까지 밀려갔을 때,
자신을 그 지점까지 이끌고 온 분이 하느님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건대,
삶의 시험을 통과한 것이며
영원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한 셈이다.
[키르케고르, 『코펜하겐의 고독한 영혼』 중에서]
위의 내용은 키르케고르가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에서 에누리 없이 본 삶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 ‘삶의 권태의 극단까지 밀려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사회가 결코 자신이 갈망하는 그러한 세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봉착하는 것을 말하며, 인간적인 삶 안에서 추구하는 온갖 가치들―진실, 정의, 올바름, 명예로움, 자유, 평등, 평화 등―이 결국 이 세상살이 안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회의와 절망’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헛되고 헛되다’고 외치는 전도서의 저자처럼, 인간세상이 싫어서 숲속으로 사라져 버린 중세의 신비가 에크하르트처럼 그렇게 일체의 것에 대해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단계가 바로 권태의 극단이다.
사실상 이러한 세상에 대한 환멸은 일상 안에서도 자주 봉착할 수 있다. 한 번도 나를 직접만나서 얘기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이 나를 매우 친근하게 대하고, 긍정적인 생각들을 말해준다. 그러다 어느 날 나에게 매우 적대적으로 대하고 나를 경멸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한 번도 나를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가장 그럴듯한 추측은 누군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그 사람에게 나에게 대한 나쁜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그 말을 믿었을 것이며, 그 이후 나에 대해서 나쁜 선입견을 가졌을 것이고, 처음과 달리 나를 경멸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누구나 한 번쯤은 체험할 수 있는 일이다. 베이컨은 이러한 것을 <시장의 오류>라고 불렀다. 그런데 사실은 인간의 삶이 전반적으로 이렇게 허상과 거짓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문이나 언론이 너무나 쉽게 한 무고한 인간을 아주 나쁜 사람으로 바꾸어버리는 일을 자주 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인간이란, 자연적인 인간이란 얼마나 정신적으로 나약하고 쉽게 허상과 가식과 거짓에 놀아나고 그렇게 거짓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가를 증명해 준다. 그래서 진실과 정의와 자유 등의 가치를 진실로 추구해 본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해서 실망하고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에 대한 환멸과 절망에 봉착한 사람이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이 지점에로 이끌어 온 자가 곧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이러한 비극적 상황에 대해서 일종의 ‘반전’을 보여주고 있다. 즉 진정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이 세상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그리스도교적 이원론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에서 보여준 그 진리, 즉 ‘신을 사랑하여 자신마저 미워하는 나라와 자기 자신을 사랑하여 신마저 미워하는 나라’라는 이원적인 세계관의 진리이다. 그리고 그가 세상에 대해서 절망하고 있다는 이 사실이 곧 그가 신의 진리를 애타게 추구하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환멸과 절망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의인인 것은 아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거나, 어떤 특정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거나 혹은 어떤 범죄자들은 의인들이 세상에 대해서 절망한 것만큼이나 세상에 대해서 회의하고 절망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절망은 결코 이들의 의로움의 증거가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결코 이러한 절망의 순간에 봉착한 것이 곧 신의 이끄심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의 처지가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강하게 확신할 수 있는 사람만이 세상에 대한 이러한 절망이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해 줄 수 있다. 이러한 의로운 자가 삶의 시험을 통과하였다는 말은 세상의 가치들과 신의 진리가 대립할 때 온갖 고뇌를 무릅쓰고서라도 끝까지 신의 진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그 시련을 말한다. 아마도 이러한 삶의 시험과 시련을 잘 견디어낸 대표적인 위인을 들라면 『유토피아』를 저술하여 일약 철학자의 반열에 오른 영국의 대법관 ‘토마스 모어’일 것이다. 그는 영국 왕 헨리 8세가 본처를 버리고 후궁과 결혼하고자 하였을 때, 로마 교황청이 허락하지 않자 스스로 ‘영국교회의 수장’이라고 선포하고 당시 대법관 격이었던 ‘토마스 모어’에게 이를 인정할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토마스 모어는 이를 거절하였고 반역죄로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토마스 모어는 온갖 회유와 설득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고, ‘아버지는 왜 그리 유별나고 특별한 사람인가, 그냥 보통사람들처럼 그렇게 평범하게 행동할 수 없는가?’라고 묻는 그의 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나는 특별하고 유별난 사람이 아니다. 다만 평범하고 정상적으로 살고자 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교 신자일 뿐이다. 한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면 평범하게 살아도 성인이나 성녀가 될 것이지만, 한 사회가 비-정상일 때에는 평범하게 살고자 해도 순교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
아마도 당시에 수많은 영국 시민들은 토마스 모어를 아주 오만하고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일 그는 ‘모든 공직자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아마도 사형을 앞둔 토마스 모어에게 세상이란 권태의 극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고, 밤을 새워 고민하였을 것이다. 만일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교인 이었다면 그는 키르케고르가 고백한 것처럼 ‘자신을 권태의 극단’에로 데려온 자는 다름 아닌 ‘하느님의 섭리’라고 하였을 것이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을 수 없다’는 성경의 말처럼, 진정한 예언자는 결코 당대의 대중들로부터 환영받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엄격하게 말해 예언자는 세상의 불의함(대중들의 불의함)을 고발하는 신의 사자(使者)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 즉 ‘권태의 극단’에 도달하여야 하고, 이러한 상황을 만든 분이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러한 사람이 바로 성서적 의인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이 ‘영원의 세계’에 들어갈 만큼 충분히 성숙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러한 사람에게서 비로소 ‘시간과 영원’ ‘유한과 무한’이 진정으로 종합(일치)을 이루었다는 말이 된다. ‘천국이 바로 당신들 안에 있습니다’라는 성서의 진리를 이러한 의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