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도서관.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노트,필통,9급 공무원 문제집을 펼쳐놓고, 심호흡 크게 한 후 자세를 바로잡았다. 책장 넘기는 소리, 무언가 열심히 적는소리가 들린다. 그때,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뒷쪽 라인 너머에서 들려왔다. '저럴거면, 집에가서 자야지......'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릴 때 쯤, 이번엔 눈에 거슬리게 하는 것이 있어, 창문으로 시선이 고정됐다. 오늘은 분명 맑은 날이었는데...... 하필 지금, 여우비가 내린다.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생각하지 않으려해도 이미 내 심장, 내 눈, 내 입이 온갖 감정을 잡고 있다. 이런 내 마음 알기라도 하듯, 하늘도 점점 세차게 눈물을 쏟아 붓는다. 격해지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코고는 소리에 내 훌쩍이는 콧물 소리까지 번질까 무서워 내 두다리는 도서관을 재빠르게 나와 현관 밖에 서 있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내 얼굴을 하늘 향해 쳐 들고는 한참을 만끽한다. 그러다 천천히 바닥에 고인 작은 우물 한번 쳐다보니, 살다살다 그렇게 불쌍한 얼굴은 처음본다. 사자같던 머리칼이 하늘이 흘린 눈물바람에 미용실 다녀온듯 쫙 펴졌다. 괜찮다. 오늘은 괜찮다. 오늘은 울어도 괜찮은 날이다. 어차피, 비에 젖은 머리, 얼굴, 온몸이, 울었는지 비 맞았는지 알게 뭐냐. 마음껏 울고싶은 날엔, 이렇게 빗방울 벗삼아 펑펑 울어보는것도 괜찮다. 도서관에서 멀지않은 공원까지 뛰었다. 그래, 오늘은 비오는 날이라 실컷 울어도된다고, 마음놓고 울며, 즐기면서 뛰고있는데, 그래도 ..그런데도 사람들이 날 보는 시선이, 괜스레 신경쓰인다. 미친년보듯, 흘깃거리는 것 같다. 그만 뛰라고 가슴에서 신호를 보낸다. 나도 모르게, 또 그자리에 와 있다. 그날은, 그래, 그날은 엄청 맑은날이었다. 아침부터 분주히 정성들인 누드 김밥. 그가 제일 좋아하는 참치 샌드위치. 엄마의 농장에서 직접 짠 100%포도즙. 초록색 도시락에 정성스레 김밥과 샌드위치를 담고, 포도즙은 주둥이에 분홍색 꽃무늬가 있는 투명한 예쁜 병에 담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가 사준 보라색 꽃핀. 앞머리를 가지런히 모아 왼쪽 가르마를 타서 살짝 꼽았다. 아주 능숙한 솜씨로 화사하지만 진하지 않은 화장을 한 후. 그가 좋아하는 엘리자베스아덴 향수를 손목에 뿌리고 살짝 문질러 귓가에도 갖다댔다. 살랑살랑한 원피스와 어제 새로 산 구두까지 모든게 완벽했던, 바로 그날이었다. 그래, 그날 그렇게, 그렇게 맑은날 여우비만 안왔어도. 어쩌면 내가 지금 이렇게 빗속에서 뛰지 않았을 수도있다. 맑은 하늘의 날벼락은, 바로 그때 내 상황을 가리킨 복선된 속담이었다. 벤치에 앉아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준비해온 도시락을 펼치고 샌드위치 한조각을 집어 그의 입속에 넣어주었다. 그는 맛있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우적우적 두조각이나 먹어치운다. 목이 말랐는지 포도즙을 컵에 딸지도 않고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킨다. 입가에 묻은 포도즙을 닦아주려 손수건을 집어든 내손이 그의 입에 다가가자, 그가 내 손목을 멈칫, 잡았다. "저기....." "응?" "..............." "....?" "나......" "....응.." "....비....어? 비온다." "비?어......비..비오네? 정말? 여우비 인가봐! 맑은날 비가 다 오구~ 어머, 이 김밥, 샌드위치 어떡해!" 나는 재빨리 도시락 뚜껑을 닫아 한쪽 팔로 둘러 안았다. 그리고는 평소에 가방에 넣고 다니던 빨간색 삼단 우산을 꺼냈다. 자동 버튼을 누르고 그의 옆에 바짝 다가섰다. 그가 우산과 나를 함께 옆으로 밀고는, 세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다. 그 비를 맞고서 나에게 하는 말인지, 지나가는 털젖은 강아지에게 하는말인지, 한마디했다. "나... 여자...있어..." 그는 내 눈을 쳐다 보지 않았다. 내가 잘못 들었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아주 또렷하게 다시한번 그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결혼해......그동안 수십번 고민하고 몇번을 말하려했는데, 더이상은...." 내 귀엔 우산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와 시멘트 바닥이 젖는소리만 듣고싶었는지, 더이상 그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짧은순간 화를 내야 할까, 따귀를 때려야할까, 욕이라도 해야하나, 아니면 쿨한척 돌아서야하나, 이생각 저생각이 막 들었지만, 난 결국 화도 못내고, 따귀와 욕은 커녕, 전혀 쿨하지 못했다. 안고있던 도시락을 놓치는 바람에 더 처참했다. 빗물에 흩어진 김밥과 샌드위치 처럼 버려진 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산도 바닥에 놓칠 뻔 했지만,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자존심이랍시고 손잡이를 꽉 잡았다. 빨간 우산으로 그의 얼굴을 가렸다. 그랬더니 만지작거리는 그의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반짝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한번더 천천히 그의 손을 가렸다. 그리고 아파오는 목에서 있는 힘을 다했지만, 빗방울 소리보다는 조금 크게, 그에게 말했다. "이 우산, 쓰고 가." 멍청한 반응이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그 빨간 우산을 기대어 주고는 새 구두에 뒷굼치가 까지는 것보다 더 아픈 가슴을 안고, 바로 오늘 처럼 마음껏 즐기면서 빗속에서 뛰었다. 그때 사람들의 시선 또한, 오늘의 나를 보는 것처럼, 미친년 보듯 흘깃 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