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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종실록 126권, 세종 31년 12월 24일 경오 1번째기사 1449년 명 정통(正統) 14년
조칙을 맞이하고 사신을 연향하는 일을 왕세손이 대행하는 것의 가부를 논의하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조칙(詔勅)을 맞이하고 사신을 연향(宴享)하는데 있어 왕자(王子)로서 대행하도록 정했지만, 왕세손(王世孫)도 나이 장성한데다가 또 위호(位號)가 있으니, 왕세손으로 하여금 대행하게 함이 어떻겠느냐. 예전에 세자가 8세에 봉함을 받고 12세에 대신하여 칙서를 맞이했는데, 그때의 사신이 행주(行酒)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통사가 미봉(彌縫)하여 그만두었다. 이제 세손으로 조칙을 맞이하게 하여, 사신이 만약 행주를 청한다면, 이를 거절하기도 어려우니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만둠이 가할 것이나, 어떻게 이를 처리할 것인지 그것을 정부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이어서 강서원 좌익선(講書院左翊善) 박팽년(朴彭年)이 아뢰기를,
"이제 들으오니, 왕자(王子)로 하여금 대리로 조칙을 맞이하게 한다 하옵는데, 세손께서도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지셨고 천품이 뛰어나시니, 조칙을 맞이하는 일은 장소에 따라서 마땅히 행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조정에는 근심이 있사온데, 조칙이 올 때 임금과 동궁께서 모두 나가 마중하지 않으오면 중국에서도 의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과 동궁께서 편찮으시어 연소한 세손이 나가 맞이한다면, 심히 조정을 공경하되 부득이하다는 뜻을 사신이 반드시 알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윽고 사인(舍人) 정식(鄭軾)이 정부의 의논으로써 아뢰기를,
"영의정 하연(河演) 이하는 모두 세손의 나이가 어리다 하여 왕자로 하여금 대행하게 함이 옳다 하옵는데, 좌찬성 박종우(朴從愚)만은 연향(宴享)의 사례(私禮)는 왕자로써 대행함이 옳으나, 조칙을 맞이하는 중대사는 세손이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연 등의 의논을 따랐다. 또 말하기를,
"강서원(講書院)에서도 이 일을 알고 정부에다 의논하고서 또 와서 청하니 그 뜻이 무엇이냐."
하고, 인하여 박팽년(朴彭年)과 우익선(右翊善) 신숙주(申叔舟)·좌찬독(左贊讀) 유성원(柳誠源)·우찬독(右贊讀) 이극감(李克堪)을 불러 이를 물으매, 박팽년 등이 대답하기를,
"비로소 왕자가 대행한다는 것을 들었사오나, 정부에 의논한 것을 알지 못하므로 장차 정원(政院)으로 나아가 아뢰려 하다가, 길에서 우부승지 이계전(李季甸)을 만나 그 이유를 말했더니, 계전(季甸)이 말하기를, ‘이 일은 오늘 아침에 정부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으니 반드시 아뢸 것이 없다. ’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이 일을 들었사오나 오히려 이를 청하옵는 것은 모든 일은 말하는 자가 많으면 반드시 그 일이 옳은 것이고, 성상께서도 그렇게 믿으시리라 여겨서였습니다. 신 등은 시학(侍學)한 날이 오래 되어 참으로 세손께서 행례할 수 있음을 아옵는 까닭으로 감히 청한 것이옵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하니, 임금이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으로 하여금 반복하여 힐문하게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범조우(范祖禹)가 장차 상서(上書)하려 하는데 소동파(蘇東坡)가 이것을 보고, ‘내 뜻과 같다.’ 하여, 드디어 연명(聯名)으로 바치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간사하기만 하여 비록 타인의 소위(所爲)가 자기와 다름이 없음을 보더라도 스스로 자기의 뜻을 달성함으로써 명예를 구하고자 한다. 너희들은 정부에서 의논하는 줄 알면서도 억지로 자기의 의사를 펴고자 했으니 간교함이 심하나, 그러나, 세손이 조칙을 맞이함은 이치에 있어서 매우 순하고 너희들의 직책으로써 와서 아뢰니, 내 어찌 너희들을 허물하겠느냐."
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9책 126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54면
【분류】
외교-명(明) / 왕실-국왕(國王) / 역사-고사(故事)
2.세종실록 86권, 세종 21년 9월 27일 임신 2번째기사 1439년 명 정통(正統) 4년
집현전 부수찬 박팽년이 사직을 청하다
집현전(集賢殿) 부수찬(副修撰) 박팽년(朴彭年)이 상언(上言)하기를,
"신이 학술이 거칠고 소루하여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어, 한가한 데에 있어 글을 읽을 뜻이 있으나, 말씀을 하려다가 못한 지가 여러 해 되었습니다. 지금 아비가 상(喪)을 당하여 전의현(全義縣)에 여막을 짓고 있고, 신의 어미도 따라가 있는데 또 병이 있사오니, 멀리 떠나서 벼슬하는 것이 어찌 마음을 잡을 수 있습니까. 그리하여 가서 여막 옆에 있어 면식(眠食)을 살펴 묻고, 또 어미의 탕약(湯藥)을 받들어서 조석(朝夕)을 함께 하고 다행히 여력(餘力)이 있으면 대강 학업을 연구하려 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신의 조그마한 정성을 양찰하시와 신의 직책을 면하게 하여 구구(區區)한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7책 86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4책 241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3.세종실록 93권, 세종 23년 9월 29일 임술 5번째기사 1441년 명 정통(正統) 6년
이선·박팽년·이개 등에게 《명황계감》의 편찬을 명하다
임금이 호조 참판 이선(李宣)·집현전 부수찬 박팽년(朴彭年)·저작랑(著作郞) 이개(李塏) 등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옛사람이 당(唐) 명황(明皇)129) 과 양귀비(楊貴妃)의 일을 그린 자가 퍽 많았다. 그러나, 희롱하고 구경하는 자료에 불과하였다. 내가 개원(開元)·천보(天寶)의 성패(成敗)한 사적을 채집하여 그림을 그려 두고 보려 한다. 예전 한(漢)나라 때에 승여(乘輿)와 악좌(幄坐)와 병풍(屛風)에 주(紂)가 취(醉)하여 달기(妲己)에게 걸어앉아 긴 밤[長夜]의 즐거움을 짓던 것을 그렸다 하니, 어찌 세상 인주(人主)들로 하여금 전철(前轍)을 거울삼아 스스로 경계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명황(明皇)은 영주(英主)라고 이름하였었는데, 만년(晩年)에 여색(女色)에 빠져 패망하기에 이르렀으니, 처음과 끝의 다름이 이 같은 자가 있지 않았다. 월궁(月宮)에 놀았다든가, 용녀(龍女)를 보았다든가, 양통유(楊通幽)130) 등의 일은 지극히 허황하고 망령되어 쓸[書] 만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주자(朱子)가 강목(綱目)에다 역시 ‘황제가 공중(空中)에서 귀신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고 써서, 명황(明皇)이 기괴한 것을 좋아하는 사실을 보인 것이니, 무릇 이런 등(等)의 말은 역시 국가를 맡은 자가 마땅히 깊이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너희들은 이를 편찬하여라."
하니, 이선 등이 명령을 받들어 찬집(撰集)하되, 먼저 그 형상을 그리고 뒤에 그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혹은 선유(先儒)의 논(論)한 것을 기록하기도 하고, 혹은 고금(古今)의 시(詩)를 써 넣기도 하였다. 서(書)가 다 이룩되매, 이름을 《명황계감(明皇誡鑑)》이라고 내렸다.
【태백산사고본】 30책 93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4책 364면
【분류】
역사-고사(故事) / 출판-서책(書冊)
[註 129]당(唐)명황(明皇) : 현종(玄宗).
[註 130]양통유(楊通幽) : 도사(道士)로서 죽은 사람의 혼백을 불러 올 수 있다 하여, 이에게 명하여 양귀비의 혼백이라도 다시 만나기를 바랐다고 함.
4.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 2월 16일 병신 1번째기사 1444년 명 정통(正統) 9년
집현전 교리 최항·부교리 박팽년 등에게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다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최항(崔恒)·부교리 박팽년(朴彭年), 부수찬(副修撰) 신숙주(申叔舟)·이선로(李善老)·이개(李塏), 돈녕부 주부(敦寧府注簿) 강희안(姜希顔)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議事廳)에 나아가 언문(諺文)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고, 동궁(東宮)과 진양 대군(晉陽大君) 이유(李瑈)·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여 모두 성상의 판단에 품의하도록 하였으므로 상(賞)을 거듭 내려 주고 공억(供億)하는 것을 넉넉하고 후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3책 103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4책 542면
【분류】
어문학-어학(語學) / 출판-서책(書冊) / 인사-관리(管理)
5.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 9월 29일 갑오 4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 어제와 예조 판서 정인지의 서문
이달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이루어졌다. 어제(御製)에,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ㄱ은 아음(牙音)이니 군(君)자의 첫 발성(發聲)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규(虯)자의 첫 발성(發聲)과 같고, ㅋ은 아음(牙音)이니 쾌(快)자의 첫 발성과 같고,ㆁ은 아음(牙音)이니 업(業)자의 첫 발성과 같고, ㄷ은 설음(舌音)이니 두(斗)자의 첫 발성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담(覃)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ㅌ은 설음(舌音)이니 탄(呑)자의 첫 발성과 같고, ㄴ은 설음(舌音)이니 나(那)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ㅂ은 순음(脣音)이니 별(彆)자의 첫 발성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보(步)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ㅍ은 순음(脣音)이니 표(漂)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ㅁ은 순음(脣音)이니 미(彌)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ㅈ은 치음(齒音)이니 즉(卽)자의 첫 발성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자(慈)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ㅊ은 치음(齒音)이니 침(侵)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ㅅ은 치음(齒音)이니 슐(戌)자의 첫 발성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사(邪)자의 첫 발성과 같고, ㆆ은 후음(喉音)이니 읍(挹)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ㅎ은 후음(喉音)이니 허(虛)자의 첫 발성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홍(洪)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ㅇ은 후음(喉音)이니 욕(欲)자의 첫 발성과 같고, ㄹ은 반설음(半舌音)이니 려(閭)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ㅿ는 반치음(半齒音)이니 양(穰)자의 첫 발성과 같고, ㆍ은 탄(呑)자의 중성(中聲)과 같고, ㅡ는 즉(卽)자의 중성과 같고, ㅣ는 침(侵)자의 중성과 같고, ㅗ는 홍(洪)자의 중성과 같고, ㅏ는 담(覃)자의 중성과 같고, ㅜ는 군(君)자의 중성과 같고, ㅓ는 업(業)자의 중성과 같고, ㅛ는 욕(欲)자의 중성과 같고, ㅑ는 양(穰)자의 중성과 같고, ㅠ는 슐(戌)자의 중성과 같고, ㅕ는 별(彆)자의 중성과 같으며, 종성(終聲)은 다시 초성(初聲)으로 사용하며, ㅇ을 순음(脣音) 밑에 연달아 쓰면 순경음(脣輕音)이 되고, 초성(初聲)을 합해 사용하려면 가로 나란히 붙여 쓰고, 종성(終聲)도 같다. ㆍ·ㅡ·ㅗ·ㅜ·ㅛ·ㅠ는 초성의 밑에 붙여 쓰고, ㅣ·ㅓ·ㅏ·ㅑ·ㅕ는 오른쪽에 붙여 쓴다. 무릇 글자는 반드시 합하여 음을 이루게 되니, 왼쪽에 1점을 가하면 거성(去聲)이 되고, 2점을 가하면 상성(上聲)이 되고, 점이 없으면 평성(平聲)이 되고, 입성(入聲)은 점을 가하는 것은 같은데 촉급(促急)하게 된다."
라고 하였다. 예조 판서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에,
"천지(天地)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글이 있게 되니, 옛날 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어 만물(萬物)의 정(情)을 통하여서, 삼재(三才)128) 의 도리를 기재하여 뒷세상에서 변경할 수 없게 한 까닭이다. 그러나, 사방의 풍토(風土)가 구별되매 성기(聲氣)도 또한 따라 다르게 된다. 대개 외국(外國)의 말은 그 소리는 있어도 그 글자는 없으므로, 중국의 글자를 빌려서 그 일용(日用)에 통하게 하니, 이것이 둥근 장부가 네모진 구멍에 들어가 서로 어긋남과 같은데, 어찌 능히 통하여 막힘이 없겠는가. 요는 모두 각기 처지(處地)에 따라 편안하게 해야만 되고, 억지로 같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동방의 예악 문물(禮樂文物)이 중국에 견주되었으나 다만 방언(方言)과 이어(俚語)만이 같지 않으므로, 글을 배우는 사람은 그 지취(旨趣)의 이해하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 곡절(曲折)의 통하기 어려움을 괴로워하였다. 옛날에 신라의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이두(吏讀)를 만들어 관부(官府)와 민간에서 지금까지 이를 행하고 있지마는, 그러나 모두 글자를 빌려서 쓰기 때문에 혹은 간삽(艱澁)하고 혹은 질색(窒塞)하여, 다만 비루하여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이에서도 그 만분의 일도 통할 수가 없었다.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殿下)께서 정음(正音) 28자(字)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고, 소리에 인하여 음(音)은 칠조(七調)129) 에 합하여 삼극(三極)130) 의 뜻과 이기(二氣)131) 의 정묘함이 구비 포괄(包括)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28자로써 전환(轉換)하여 다함이 없이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자세하면서도 통달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자운(字韻)은 청탁(淸濁)을 능히 분별할 수가 있고, 악가(樂歌)는 율려(律呂)가 능히 화합할 수가 있으므로 사용하여 구비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어디를 가더라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울음소리나 개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 마침내 상세히 해석을 가하여 여러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라고 명하시니, 이에 신(臣)이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최항(崔恒), 부교리(副校理) 박팽년(朴彭年)과 신숙주(申叔舟), 수찬(修撰) 성삼문(成三問), 돈녕부 주부(敦寧府注簿) 강희안(姜希顔), 행 집현전 부수찬(行集賢殿副修撰) 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과 더불어 삼가 모든 해석과 범례(凡例)를 지어 그 경개(梗槪)를 서술하여, 이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연원(淵源)의 정밀한 뜻의 오묘(奧妙)한 것은 신(臣) 등이 능히 발휘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하늘에서 낳으신 성인(聖人)으로써 제도와 시설(施設)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正音)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한 사람의 사적인 업적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대체로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가 오래 되지 않은 것이 아니나, 만물의 뜻을 깨달아 모든 일을 이루는 큰 지혜는 대개 오늘날에 기다리고 있을 것인져."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6책 113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4책 702면
【분류】
어문학-어학(語學)
[註 128]삼재(三才) : 천(天)·지(地)·인(人).
[註 129]칠조(七調) : 칠음(七音). 곧 궁(宮)•상(商)•각(角)•치(緻)•우(羽)•변치(變緻)•변궁(變宮)의 일곱 음계(音階).
[註 130]삼극(三極) : 천(天)·지(地)·인(人).
[註 131]이기(二氣) : 음양(陰陽).
6.세종실록 114권, 세종 28년 10월 10일 갑진 2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이계전 등이 대간을 처벌한 것을 거두어 달라고 아뢰다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이계전(李季甸), 응교(應敎) 최항(崔恒)·어효첨(魚孝瞻), 교리(校理) 박팽년(朴彭年), 수찬(修撰) 성삼문(成三問), 부수찬(副修撰) 이개(李塏)·이예(李芮), 박사(博士) 서거정(徐居正)·한혁(韓弈)·유성원(柳誠源), 저작(著作) 이극감(李克堪)이 아뢰기를,
"대간(臺諫)은 〈임금의〉 이목(耳目)과 같은 관직인데, 지금 국사를 말한 것이 옳지 아니하였다고 이를 처벌한다면, 신하로서 임금에게 말을 올릴 수 있는 길이 막혀질 것이오니, 그 죄를 용서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수양 대군이 임금의 교지(敎旨)를 전하기를,
"그대들의 말은 옳다. 그러나 그대들이 내 마음을 알지 못한다."
하고, 이에 의금부에 유시(諭示)한 언문(諺文)의 글을 보이면서,
"범죄가 이와 같은데 죄주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계전 등이 아뢰기를,
"대간의 죄는 비록 이와 같지마는 진실로 사사(私事)가 아니오니, 어찌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이 용납되겠습니까. 다만 나라의 일을 의논한 것뿐이온데 지금 만약 이를 죄준다면, 비록 말할 만한 일이 있더라도 누가 감히 말하겠습니까. 말할 수 있는 길이 통하고 막히는 것은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되오니, 죄가 비록 이와 같더라도 마땅히 너그러이 용납해 주어야 될 것입니다."
하니, 수양 대군이 노하여 말하기를,
"간사하여 임금을 속이는 사람을 죄주지 않음이 옳겠는가."
하였다. 이계전 등이 대답하기를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하니, 수양 대군이 말하기를,
"이 일은 관계된 바가 가볍지 않으니, 내가 마땅히 써서 이를 계(啓)하겠다."
하면서, 즉시 붓을 잡아 쓰기를,
"대간(臺諫)이 간사하여 임금에게 무례(無禮)하였으니, 이를 죄주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지마는, 이를 죄준다면 신하로서 임금에게 말을 올릴 수 있는 길이 통하지 않게 될 것이니, 죄는 비록 이와 같지마는 마땅히 너그러이 용납해야 되겠습니다."
하고는, 계전 등에게 보이기를,
"그대들의 말도 이와 같은가."
하니,
"그렇습니다."
하였다. 수양 대군이 또 도승지 황수신(黃守身)에게 이르기를,
"이 일은 매우 큰일이니 쉽사리 계(啓)할 수가 없겠다. 대간(臺諫)들이 임금을 속인 죄를 용서할 수가 있겠는가. 대간이 본디 이 죄가 없었는가. 그 이유를 자세히 물어 보라."
하니, 계전이 대답하기를 또한 앞에 말한 것과 같이 하였다. 수신(守身)이 말하기를,
"계전 등의 뜻은 다만 언로(言路)가 막힐까 두려워하였을 뿐입니다."
하니, 수양 대군이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 효첨(孝瞻)이 계전에게 이르기를,
"형세가 반드시 의금부에 내려 가둘 것이니, 속히 입자(笠子)를 가져오는 것이 옳겠다."
하니, 계전이 말하기를,
"만약 옥에 내려 가둔다면 입자(笠子)를 벗고 갈 것인데, 어찌 입자가 필요하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조금 후에 계전에게 이르기를,
"내가 그대들의 의사를 알았으니, 국문(鞫問)을 마치고 난 뒤에 이를 상량(商量)하겠다."
하였다. 이보다 먼저 임금이 강진(康晉)을 힐책(詰責)함이 매우 엄하니, 계전·효첨과 직제학(直提學) 김문(金汶)이 마침 이를 보고, 효첨이 말하기를,
"오늘날에 강진의 신세(身勢)가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하였다. 계전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이 언사(言事)로써 옥에 갇혔으니 언로(言路)가 통하고 막힘이 이번 일거(一擧)에 있으니 작은 일이 아니다. 마땅히 동료(同僚)와 더불어 의논하여 아뢰야 되겠다."
하였다. 이튿날 김문이 계전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임금의 노여움이 한창 대단하시니 위엄을 무릅쓰고 아뢸 수는 없다."
하니, 계전이 말하기를,
"이 일을 아뢰는데 세 가지 절차가 있으니, 신 등의 말을 듣고서 대간(臺諫)을 석방하는 것이 상(上)이요, 말을 듣지 않고 견책(譴責)하는 것이 그 다음이요, 대간에서 편당하였다고 해서 모두 의금부에 내려 가두는 것이 하(下)이다. 그러나 이것도 또한 신 등의 피하지 못할 일이니 무엇을 꺼려서 계(啓)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김문은 마침내 참여하지 아니하였는데, 또한 두서너 사람이 김문의 행동에 따라 한 사람이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36책 114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책 708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재판(裁判) / 사상-불교(佛敎)
7.세종실록 114권, 세종 28년 12월 18일 신해 1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수 집현전 교리 박팽년이 아버지 박중림의 무죄를 상서하였다
수 집현전 교리(守集賢殿校理) 박팽년(朴彭年)이 상서하기를,
"신의 부자(父子)가 모두 용렬하고 우매한 사람으로서 외람히 성은(聖恩)을 입어 복이 지나쳐서 재앙이 발생하였습니다. 신의 아버지가 옥(獄)에 있은 지 이미 20일이나 되어 원통함을 품고 억울해 하고 있사오니, 신도 또한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어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오니 삼가 불쌍히 여기시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신이 듣자옵건대, 천하의 일은 시비(是非)가 양립(兩立)할 수 없으며, 곡직(曲直)이 서로 같지 않으니, 만약 옳은 것을 그르게 여기고, 굽은 것을 곧게 여긴다면, 이것은 변고(變故)의 큰 것입니다. 부자(父子)의 천륜(天倫)에 이르러서는 본시 천성(天性)의 친(親)에 속한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인간이 변경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사람의 하는 일이 비록 한 때에는 암매(暗昧)하더라도, 시비(是非)와 곡직(曲直)은 마침내 그 천성(天性)을 속일 수 없습니다. 진(秦)나라의 영씨(嬴氏)가 여씨(呂氏)146) 인 것과, 진(晉)나라 사마씨(司馬氏)가 우씨(牛氏)147) 인 변고와, 우 왕조(禑王朝)의 반야(般若)의 옥사(獄事)는 사책(史冊)에 있어 사람들의 청문(聽聞)을 놀라게 한 일이지마는, 지금 김산(金山)의 일은 그 아버지의 종 김삼(金三)이 송중손(宋重孫)의 비부(婢夫)인 천장명(千長命)과 처음에 형조에서 송사(訟事)하여 시비(是非)가 본디부터 명백하고, 곡직(曲直)이 저절로 나타났으며, 신의 아버지는 관여함이 없었는데, 의금부로 옮겨서 국문(鞫問)한 이후로 신의 아버지가 종의 주인이 된 이유로써 체포되어 추문(推問)하매, 의금부에서 시비(是非)에 현혹(眩惑)되어 굽은 것을 변경하여 곧은 것으로 삼으려 하니, 신은 그윽이 상심(傷心)하고 있습니다.
신의 아버지는 이 일에 있어서 본디부터 아부(阿附)하여 굽힌 것이 없으며, 전혀 남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중손(重孫)이 스스로 그 그른 점을 알고서 온갖 방법으로 거짓을 꾸며 여러 사람의 청문(聽聞)을 현혹(眩惑)하게 하였으니, 스스로 지극히 공평하여 사심(私心)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는 잘 지껄이는 사람에게 오도(誤導)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중손(重孫)은 응당 말하기를, ‘나는 관위(官位)가 낮고 세력이 가벼우며, 저 사람은 관위가 높고 세력이 무거우니, 내 일이 본시 옳은데도 관청에 굴(屈)함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습속(習俗)은 논의(論議)에 있어서, 반드시 높은 이를 억제하고 낮은 이를 올려 주어서 자기의 정대(正大)함을 보이게 되니,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세 번 듣고는 비로소 짜던 베틀의 북을 던지는 의심148) 과 아무 근거도 없이 이웃 사람의 도끼를 훔쳐 갔으리라는 견해149) 가 없겠습니까. 하물며,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의논하여 그 시비(是非)를 결정하고, 또 한 사람이 이를 의논하게 한다면 앞의 소견(所見)에 반대하게 되는 것은 고금의 공통되는 법도인데, 지금 이미 먼저 들은 말로써 주견(主見)을 삼고 형조의 의논한 것을 그렇게 여겨, 모든 입론(立論)을 다 반대하게 되니, 어찌 그리 치우치는 것입니까. 형조의 의논이 옳다면 오늘날의 의논이 반드시 그르게 될 것이며, 오늘날의 의논이 옳다면 형조의 의논이 반드시 그르게 될 것이니, 곡직(曲直)의 변고(變故)가 반드시 귀착(歸着)되는 데가 있을 것입니다.
대저 옥사(獄事)를 국문(鞫問)하는 사람은 마땅히 공평 무사(公平無私)한 마음으로 청찰(聽察)하여 그 실정을 알아내여야 되는 것인데, 지금 의심나는 옥사(獄事)를 판결하고자 하면서 먼저 자기가 의심을 내어, 의심나는 단서(端緖)를 풀지 않고서 곧장 죄안(罪案)을 교묘하게 꾸며서 만들려고 하니, 다만 어리석고 약한 아이가 옛 마을과 산천을 기억하지 못한 것으로써 증거로 삼아, 먼저 그 아버지에게 곤장을 치고, 다음에 증인(證人)에게 곤장을 쳐서, 3일 안에 연달아 두 차례나 곤장을 쳐서 무복(誣服)을 꼭 받도록 하고, 중손(重孫) 등은 의심나는 말을 임시 변통으로 진술하였는데도 모두 덮어두고 추문(推問)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불공평함이 심한 것이 아닙니까. 신은 간절히 마음이 상하고 간절히 마음이 상합니다. 청하옵건대 낱낱이 조목별로 뒤에 진술하겠사오니, 만약 신의 부자(父子)가 과실을 꾸미고 그른 것을 꾸며서 성총(聖聰)을 모독한다면, 천지 귀신이 위에서 굽어보고 옆에서 대질(對質)하게 되는데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다른 대신(大臣)에게 명해서 공평 무사하게 청단(聽斷)하여 형조와 의금부의 시비(是非)를 판결하여 원왕(冤枉)을 펴 주고 천륜(天倫)을 바로 잡는다면, 공도(公道)에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1. 신의 아버지는 갑자년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전의현(全義縣) 남촌(南村)에서 여묘(廬墓)를 살았는데, 그해 여름에 목천(木川)의 접노(接奴) 김삼(金三)이 그 아들 김산(金山)을 데리고 전의(全義)의 본가(本家)에 이르러 그 아들을 두고, 신의 부자(父子)를 여차(廬次)에서 보고 그대로 수일(數日)을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아들이 도망하여 간 곳을 알 수가 없었으나, 그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마침내 뒤를 밟아 쫓아가지 아니했는데, 그 아버지가 그 집에 돌아가 보니 있지 않았습니다. 사방으로 찾아보았으나 찾아내지 못한 지가 지금 2년이나 되었습니다. 금년 4월 27일에 해가 저물었는데 한 조그만 아이가 신의 아버지 집에서 구걸하므로, 비(婢)가 처음에 그 아이를 보니 바로 그전에 잃었던 김산이었습니다. 그의 형 김녹(金祿)이 이를 보고는 또한 말하기를, ‘김산이다.’ 하니, 아이도 또한 그렇게 여기고 머물러 있으면서 가지 아니하였습니다. 신의 아버지는 이날 인정종(人定鐘)이 울린 뒤에 집에 돌아와서 이 사실을 듣고서, 그 얼굴을 증거 삼고자 하였는데, 신의 아버지는 본디 그 아이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그의 지내온 내력을 물어 보니 모두 맞았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감히 그 아이가 그러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보증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튿날 사람을 시켜 데리고 그 집으로 가게 했는데, 아이가 고의로 그 집을 바로 가리키지 않으므로, 마을의 관령(管領)과 함께 가도록 했으나, 관령을 보지 못한 까닭으로 3일 만에야 가게 되었던 것인데, 그 문자(文字)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신의 아버지가 만약 조금이라도 그 사이에 사의(私意)가 있었다면 어찌 명백 정대(明白正大)하게 관령과 더불어 그 집에 찾아주도록 하였겠습니까. 이것은 사리(事理)와 인정(人情)의 매우 명백한 것입니다.
1. 무릇 다른 사람의 노비(奴婢)를 속여 자기의 사역(使役)으로 삼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유인하여 숨기고는 다른 사람이 알까 두려워하여, 혹은 구류(拘留)하기도 하고, 혹은 방매(放賣)하기도 하는데, 이같이 무상(無狀)한 소인(小人)은 혹시 있을 수 있지마는, 서울 도성(都城) 밑에서 다른 아이를 차지하여 그 집에 데리고 가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진실로 우리 집 종이고 너희 아들은 아니다.’ 한다 하니,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은 세상의 교활한 도적이니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신의 아버지는 비록 불초(不肖)하지마는 태평한 세상에 공명(功名)을 기록하고 성명(聖明)을 만났으니, 그가 감히 이런 등류의 일을 하고서도 말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처음부터 속여 차지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마땅히 먼 지방에 두고 길러서 장성하기를 기다린다면 사람들이 저절로 알지 못하게 될 것인데, 어찌 먼저 그 집을 찾아가게 한 뒤에 그 아버지를 불러서 시비(是非)를 분변하고 목천(木川)의 여러 사람들을 끌어내어 증거로 삼게 하겠습니까. 그 계획을 세움이 또한 수고롭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또한 사리(事理)와 인정(人情)의 매우 명백한 것입니다.
1. 신의 아버지가 김삼을 불러서 왕복(往復)한 사이가 몇 10여 일이 된 뒤에야 오게 되었는데, 그에게 그 집에 가서 시비(是非)를 증험해 보게 하니 조금도 의심나는 말이 없었으므로, 이에 형조에 정소(呈訴)하여 이를 변명하게 하였습니다. 대저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겉으로는 비록 복종하지 않지마는 마음속으로 먼저 굴복하게 되는 것인데, 이 아이가 만약 천장명(千長命)의 아들이라면 그 집에서 어찌 먼저 관청에 정소(呈訴)하여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지 않고서 앉아서 김삼이 오기를 기다리겠습니까. 김삼이 만약 의심을 품고 보았다면 또한 먼저 스스로 물러갈 것이지, 어찌 감히 형조에 정소(呈訴)하여 변명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정리(情理)의 명백한 것이 이것입니다.
1. 무릇 사람의 상모(狀貌)와 일의 허실(虛實)이란 것은 언어(言語)로써 형용할 수는 없으니, 비록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게 하더라도, 만약 눈으로 직접 보고 자신이 실제 행하지 않았다면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이 드문 법인데, 어리석은 아이를 잠시 동안에 달래어 가르치고서 후일(後日)의 증거를 삼고자 한다면 보증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달래어 가르치려고 한다면 진실로 마땅히 세월(歲月)을 두고 그로 하여금 익히고 듣도록 해야 할 것인데, 어찌 급급히 그 집에 돌려보내어 맡기겠습니까. 지금 신의 아버지 집에 있은 지는 겨우 3일 뿐이고, 장명(長命)의 집에 있은 지는 이미 수년(數年)이나 되었으니, 그를 달래어 가르치기를 누구가 하였겠습니까. 형조에 있을 적에 그 아버지가 이웃에 사는 황보공(皇甫恭)으로써 이를 증명하게 하므로, 형조에서 황보공을 불러서 물으니, 황보공이 아이가 김삼(金三)의 자식인 것을 알고 있었고, 아이도 또한 황보공이 개동(介同)의 아버지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령 황보공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아이가 무슨 이유로 황보공이 아무의 아버지인 줄 알겠습니까. 하물며, 이 아이는 목천(木川) 사람을 보고 아는 사람이 자못 많았는데, 가령 명호(名號)를 달래어 가르쳤다 하더라도 어찌 능히 이 사람들을 미리 모아서 아이로 하여금 친히 면목(面目)을 보고서 이를 기억하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형조에서 공공연히 아이로 하여금 먼저 이 사람들을 보지 않게 하고서 의금부로 옮겨 국문(鞫問)한 후에, 이 아이도 또한 목천 사람을 알고서 ‘이는 아무이고, 이는 아무이다.’ 한다면, 이 아이는 상시 부내(府內)에 있었고, 목천 사람은 외부에서 왔는데, 아이가 무슨 이유로 이를 알겠습니까. 사실 증거의 명백한 것이 이것입니다.
1. 형조에서 김삼의 아내 삼가(三加)를 전의(全義)에서 불러 오고, 또 장명(長命)의 아내 분이(粉伊)를 죽산(竹山)에서 불러 왔는데, 두 어머니가 이르러서 아이들을 한데 모아 앞에 죽 늘어세우고는, 두 어머니로 하여금 이를 분변하게 하였더니, 분이가 형조의 아이를 점치면서 자기 아들이라 하니, 형조에서 재삼(再三) 힐문(詰問)하기를, ‘이 아이가 아니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내가 내 아이를 알지 못하겠습니까.’ 하고, 삼가는 말하기를, ‘여러 아이들 중에서 내 아들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재삼(再三) 힘써 분변하게 하였으나, 이 아이는 과연 그 중에 있지 않았습니다. 또 몸에 흉터가 있는가 없는가를 물으니, 삼가는 ‘배꼽 위에 한 작은 흉터가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형조에서는 그 흉터를 보지 못하였는데 이 여인이 가리켜 보이니, 그 말이 과연 맞았습니다. 분이는 그 얼굴도 알지 못하고 그 흉터도 기억하지 못하였으니, 그의 거짓이 즉시 나타났습니다. 말하는 사람이 만약 ‘삼가는 배워서 능히 말하게 되었다. ’고 한다면, 가령 삼가가 배워서 말했다면 분이는 어찌 그 아들의 얼굴과 흉터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서로 떨어진 것이 비록 어린아이였을 시기일지라도 그 어머니는 그래도 비슷한 모습을 알 것인데, 하물며, 이 아이는 나이 7세가 넘어 두각(頭角)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비록 먼 지방에 서로 떨어져서 수십년(數十年)이 지났더라도 어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 굽고 곧은 것을 가히 알 수가 있겠습니다.
1. 김삼과 그 아내가 세상 사람들을 우롱(愚弄)하고 의혹(疑惑)한 것이 매우 심한 편이며, 장명과 그 아내는 간사하고 교활한 것이 우심(尤甚)한 자입니다. 그 말을 들어 보고 그 안색을 살펴본다면 그의 굽고 곧은 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하물며, 장명이란 사람은 그 마음이 정직하였다면 진실로 마땅히 스스로 나타나서 먼저 시비(是非)를 변명해야 될 것인데, 형조의 계하(階下)에 잠복(潛伏)해 있다가 사변(事變)을 환히 알고서 사람들에게 잡히게 되었으니, 그가 굽은 것을 또한 가히 알 수 있겠습니다.
1. 분이는 말하기를, ‘이 아이의 일은 우리 주인이 능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므로, 이에 형조에서 천보(千甫)의 사유를 죽산(竹山)의 중손(重孫)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유년 부임(赴任)할 때에 천보를 그 아버지 장명(長命)에게 맡겨 두고 왔습니다.’ 하니, 그 말이 장명의 말한 바와 합하지 아니했습니다. 또 물으니 말을 변경하기를, ‘신유년 8월에 데리고 부임(赴任)했는데, 임술년 2월에 그 아버지가 데리고 갔습니다.’ 하였으니, 그 앞뒤의 말한 바가 각기 달랐습니다. 형조에서 중손을 불러 아이의 형모(刑貌)를 물으니, 중손은 말하기를, ‘알지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끝까지 힐문(詰問)하니 그제야 말하기를, ‘이 아이는 우리 집 종이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장명의 말한 바도 매우 어긋남이 많았습니다. 그 가까운 이웃의 공사(供辭)에도 천보를 본 연월(年月)이 또한 같지 않은 점이 많았습니다. 의금부로 옮겨서 국문한 이래로 중손은 말하기를, ‘내가 집에 있을 때에 이 아이가 행랑(行廊)에 있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인하여 그 모양을 보지 못하고, 죽산에 있을 때는, 일이 바빠 또한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그 얼굴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고 합니다. 그러나, 집에 있을 때에 아이의 나이가 6세이므로 이르지 않는 데가 없었을 것인데, 비록 행랑에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볼 수 있을 때가 없었겠습니까. 죽산에 있을 때는 아내(衙內)의 방사(房舍)가 눈앞에 빙 둘러 있었으니, 사무가 비록 바쁘더라도 관아(官衙)에 물러와서 밥 먹은 것은 수령들의 상례(常例)인데, 어찌 한번 보고 한번 말한 때가 없음으로써 전혀 그 얼굴도 알지 못했다고 하겠습니까. 그의 간사하고 거짓이 이보다 심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에 마을의 관령(管領)과 가까운 이웃 사람들이 모두 공모(共謀)하여 말을 모으기를, ‘이 아이를 본 지가 지금 벌써 5년이 되었다. ’고 하니, 그들의 굽은 것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1. 장명이 천보를 죽산에 데리고 온 연월(年月)이 혹은 봄이라 하고, 혹은 가을이라 하여, 앞뒤에 말한 것이 같지 않으니, 그 속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만약 그 아들이라면 그 어머니를 따라 고을 관아(官衙)에 편안히 앉아서 음식을 먹고 의복을 입는 데에 근심이 없기를 보장할 것인데, 어찌 가난한 집에 데리고 와서 해진 옷을 입고 남에게 붙여 생계(生計)를 이어가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도 그의 속임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1. 중손의 앞뒤에 말한 바가 스스로 서로 어긋나서 맞지 않으니, 그런 까닭으로 되풀이하면서 끝까지 힐문(詰問)할 때에, 사리(事理)가 굴(屈)하고 말이 궁해져서 능히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여 밤을 틈타 옥문(獄門)을 열고 나와서 도망하였으니, 실정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뒤쫓아 체포하여 도로 가두매, 술을 가져온다고 핑계하였으니, 그 말을 믿고 들을 수 있겠습니까. 또 양동(陽東)의 일을 교묘하게 꾸며서 이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이것이 더욱 신이 매우 민망히 여기는 바입니다. 양동의 집은 비록 신의 아버지의 집과 가까이 있지마는, 실제는 중손(重孫)과 사이가 좋으며, 양동은 강리(康履)의 처남(妻娚)이요, 중손은 강리의 매부(妹夫)이니, 그들의 정리가 범연(泛然)한 사이가 아닙니다. 하물며, 양동이 말한 전득수(全得水)란 사람은 장명과 근친(近親) 관계이므로, 이 사실을 주장하고 꾸며내어 그 옥사(獄事)를 만들었으니, 비록 달콤한 말을 하고 후하게 물건을 주어서 온갖 방법으로 되풀이하더라도 능히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신의 아버지가 비록 어리석지마는 어찌 감히 양동으로 인하여 득수에게 뇌물을 써서 스스로 도움을 얻었겠습니까. 비록 삼척 동자(三尺童子)일지라도 또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아버지가 양동과 더불어 말한 것은 천보의 있고 없음과 이 아이를 본 연월(年月)을 알고자 한 데 불과(不過)할 뿐이었으니, 진실로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장차 관청에 알려서 상을 주도록 할 것입니다. 다만 양동에게만 이를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이 일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말이 반드시 이에 미쳤던 까닭으로, 양동도 또한 이를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의 집에서도 또한 득수(得水)에게 옷을 주지 못하였는데도 양동이 먼저 그 옷을 주려고 한 것은 신도 또한 그 의도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장차 저 사람에게 사이 좋게 지내어서 그 사이를 어지럽히려고 한 것입니까, 장차 이웃집의 일로써 그 실정을 알려고 한 것입니까. 그러나, 신의 아버지의 사정(事情)이 바른 것은 또한 가리울 수 없는 것입니다.
1. 이 아이가 목천(木川)을 알지 못하는 것은 신이 그윽이 이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 앞서 이 아이가 목천(木川)과 전의(全義)의 사이에서 말을 타고 갔던 일은 절대로 없었으며, 다만 사람을 따라 걸어갔을 뿐이었는데, 지금 말 위에 올려 태우고 빨리 달려서 갑자기 예전의 놀던 땅에 갔는데, 참으로 꿈속에 찾아간 듯하여 앞일도 아득하고 뒷일도 불명하여 능히 기억하지 못하니, 알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데리고 간 관원은 비록 공정(公正)하였다고 말하고 있지마는, 종자(從者)가 뇌물을 받고 가만히 저주하여 고의로 미혹(迷惑)하게 했는가도 또한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전의(全義)에서 머문 지가 겨우 7, 8일인데도 말한 바의 산천의 형세와 나무의 있고 없는 것도 또한 맞는 것도 있으니, 또한 전연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목천(木川)에서도 또한 그러했으니, 비록 신자경(申自敬)의 집을 가리켜서 목천(木川)의 관원이라 하지마는, 그가 아버지를 따라가서 환상(還上)을 받은 일이 사실이라면, 어찌 장명(長命)의 아들이 김삼(金三)을 따라가서 목천(木川)에서 환상을 받은 일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의심할 만한 일입니다.
1. 신하가 명령을 받고 밖으로 나가면 마땅히 이른 밤에 길을 떠나야 될 것인데, 알 수 없는 일은, 이중(李重)의 무리는 무슨 이유로 용인(龍仁)으로 돌아와서 1일을 머물고는, 그래도 부족하여 또 그 이튿날 해가 진 뒤에야 복명(復命)하는 것입니까. 만약 계본(啓本)을 만들기 위해서라 말한다면, 지금 겨울 밤이 지극히 기니 수일(數日) 밤이면 능히 계본(啓本)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김개(金漑)는 중손(重孫)의 예전 매부(妹夫)이요, 이중(李重)은 김개 아내의 숙모부(叔母夫)이니, 신이 의심이 없을 수 없는 것은 또한 이 때문입니다.
1. 지금 이 아이가 목천(木川)과 전의(全義)를 명백히 알지 못한 일로써 근거를 삼아, 중손이 도망해 나온 본디 사정과 여러가지로 꾸며낸 말에 대해서는 다시 신문(訊問)하지 아니하고, 장명과 그리고 가까운 이웃의 어긋난 단서(端緖)에 대해서는 처음에 알지 못한 듯하고는, 작은 아이를 위협하여 장차 매를 치려고 하면서 그 아버지를 물으니, 또한 김삼을 일러서 아버지라고 하니, 그 진정(眞情)은 그래도 알 수 있는데 도리어 김삼을 매질하고, 또 목천(木川)의 여러 사람들을 매질하여 무복(誣服)을 꼭 받아서, 신의 아버지의 죄를 얽어서 법망(法網)에 끌어넣으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지극히 공평하고 치우치지 않는 의논이겠습니까. 만약 이 아이가 목천을 알지 못하는 일로써 증거를 삼는다면, 어찌 죽산(竹山)을 알지 못하는 일로써 핑계를 삼아서 중손을 국문(鞫問)하지 않습니까. 아이가 김삼을 일러 아버지라 한 일로써 도리어 그 아버지를 곤장을 친다면, 어찌 장명을 일러 그 아버지라 하지 않는 일로써 장명을 곤장을 치지 않습니까. 옥사(獄辭)의 판결은 한마디 말의 사이에 있는데도 지금까지 판결이 나지 않는 것은, 다만 이 아이가 어리석어 밝지 못하고 사건이 애매한 데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목천과 전의의 행차는 명백한 증거라 말할 수 있는데, 중손의 어긋난 단서(端緖)는 끝내 신문(訊問)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1. 아이가 부모라 말할 줄 아는 것은 믿지 않으며 예전 마을을 보지 못했다는 것만을 증거로 삼아서 도리어 그 아버지를 곤장을 치게 되니, 아이가 만약 죽지 않고 장성한다면 마침내 그 어버이를 정하게 될 것입니다. 천도(天道)가 만약 앎이 없지 않다면 어찌 매우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으나, 회답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36책 114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책 715면
【분류】
사법-재판(裁判) / 가족-가족(家族) / 역사-고사(故事)
[註 146]여씨(呂氏) : 진(秦)나라의 성(姓)은 영씨(嬴氏)인데, 시황(始皇) 정(政)이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음.
[註 147]우씨(牛氏) : 진(晉)나라의 성(姓)은 사마씨(司馬氏)인데, 진 원제(晉元帝)가 우금(牛金)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음.
[註 148]짜던 베틀의 북을 던지는 의심 : 노(魯)나라 증자(曾子)의 어머니가 그 아들이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세 번 듣고서야 비로소 의심이 나서 짜던 베틀의 북을 던지고 일어났다는 고사(故事)가 있음.
[註 149]이웃 사람의 도끼를 훔쳐 갔으리라는 견해 : 아무 근거도 없이 이웃 사람의 아들이 자기집 도끼를 훔쳐 갔으리라고 의심했다는 고사(故事)가 있음.
8.세종실록 115권, 세종 29년 3월 12일 갑술 2번째기사 1447년 명 정통(正統) 12년
교리 박팽년을 처벌하지 않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교리(校理) 박팽년(朴彭年)이 아버지의 의롭지 못한 일을 능히 간(諫)하지 못하였으니 이미 과실을 범했는데, 또 몽롱하게 글을 올려서 군부(君父)를 섬기는 도리에 어긋나게 하였으니 그 죄를 다스리기를 청합니다."
하고, 사간원에서도 또한 이를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팽년(彭年)이 그 아버지의 죄를 민망히 여겨 글을 올려 원통함을 알렸으니, 박절한 정리에서 나와 그렇게 된 것인데 어찌 이를 처벌하겠는가."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7책 115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5책 9면
【분류】
윤리(倫理) / 정론(政論)
9.세종실록 116권, 세종 29년 4월 5일 병신 1번째기사 1447년 명 정통(正統) 12년
천보와 김산의 일로 승지 박중림 등이 벌받았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전 현감(縣監) 송중손(宋重孫)의 계집종인 분이(粉伊)가 천장명(千長命)에게 시집가서 낳은 사내종 천보(千寶)를, 승지(承旨) 박중림(朴仲林)이 이르기를, 저의 계집종 삼가(三加)가 김삼(金三)에게 시집가서 낳은 사내종 김산(金山)이라고 하며, 억지로 변명하여 서로 다투어 사람을 교사하여 증거를 세웠사오니, 죄가 곤장 90과 도형(徒刑) 2년 반에 해당되었고, 전 직장(直長) 이양동(李陽東)은 중림(仲林)의 말을 듣고 관령(管領) 김득수(金得守)에게 의복을 주고 꾀어서 천보(千寶)를 김산(金山)이라고 하였사오니 곤장 70과 도형 1년이오며, 교리(校理) 권기(權琦)는 경차관(敬差官)으로서 김산(金山)의 사건을 목천(木川)에서 가려낼 때 그 문서의 초안(草案)을 불살라 버리고, 또 중림(仲林)의 아들 박팽년(朴彭年)과 호군(護軍) 황보공(皇甫恭)이 분명히 김산(金山)이 아님을 안다고 은밀히 실토[漏洩]하면서 말하기를, ‘얼굴이 비슷하더라. ’고 하였고, 중손(重孫)은 옥에 있을 때 정신없이 취하여 도망쳐 나갔사오니, 모두 죄가 곤장 80에 해당하옵니다. 위증(僞證)한 녹산(祿山) 등 8인은 양계(兩界)로 온 집안을 입거(入居)시키옵고, 천보(千寶)는 영원히 진도(珍島)의 관노(官奴)에 소속시키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되, 특히 중림(仲林)은 직첩만 회수하고 여산군(礪山郡)으로 귀양보내며, 권기(權琦)는 3등을 감형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천장명(千長命)과 분이(粉伊)와 김삼(金三)과 삼가(三加)를 한 군데에다가 두고 천보(千寶)로 하여금 제 부모를 가려내라 하였더니, 천보(千寶)가 나이는 어리나 심히 간사하여 중손(重孫)에게 붙고 싶을 때는 김삼(金三)과 삼가(三加)의 뺨을 치면서 욕설을 하여, 중림(仲林)에게 붙고 싶을 때는, 장명(長命)과 분이(粉伊)의 뺨을 치면서 욕설을 하여, 형편에 따라서 이랬다저랬다 하여 옳고 그름이 대중이 없고 아비 어미를 함부로 바꾸니, 비록 장명(長命)의 아들이라 하여도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37책 116권 1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가족(家族) / 신분(身分)
10.세종실록 117권, 세종 29년 8월 23일 임오 1번째기사 1447년 명 정통(正統) 12년
박팽년이 문과 중시에 합격하여 그의 아비 박중림의 부처를 풀어 주었다
전라도 감사(監司)에게 유시하기를,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박팽년(朴彭年)이 이번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합격하였는데, 그 아비 박중림(朴仲林)이 여산(礪山)에 부처(付處)되어 있으니, 말을 태워 올려보내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7책 117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5책 33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 사법-행형(行刑)
11.세종실록 117권, 세종 29년 9월 3일 임진 3번째기사 1447년 명 정통(正統) 12년
사간원에서 박중림을 다시 부처할 것을 청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박중림(朴仲林)이 승지(承旨) 자리에 있는 신하로서 이득을 탐하기에 급급하여 남의 부자(父子)를 뒤바꾸기까지 함으로써 강상(綱常)을 문란하게 하였으므로, 그 죄가 지극히 크옵는데, 이제 그 아들 박팽년(朴彭年)이 중시(重試)에 합격됨으로써 서울로 불러 올려서 그 아들이 유가(遊街)100) 와 경연(慶宴)하는 일이 이미 끝났은즉, 의당 속히 보내야 할 일이오니, 오래 서울에 머물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중림(仲林)의 손녀 혼인을 하려 하는데, 만일 이 예식은 행하려면 가장(家長)이 있어야 하겠고, 또 중림의 범한 바가 정혼(停婚)까지 시킬 일은 아니므로, 머물러 있게 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7책 117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5책 35면
【분류】
윤리(倫理) / 인사-선발(選拔) / 사법-행형(行刑) / 가족(家族)
[註 100]유가(遊街) : 과거에 급제하여 선배 친척들을 역방함.
12.세종실록 117권, 세종 29년 9월 29일 무오 2번째기사 1447년 명 정통(正統) 12년
《동국정운》 완성에 따른 신숙주의 서문
이달에 《동국정운(東國正韻)》이 완성되니 모두 6권인데, 명하여 간행하였다.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신숙주(申叔舟)가 교지를 받들어 서문(序文)을 지었는데,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화합하여 조화(造化)가 유통하매 사람이 생기고, 음(陰)과 양(陽)이 서로 만나 기운이 맞닿으매 소리가 생기나니, 소리가 생기매 칠음(七音)이 스스로 갖추이고, 칠음이 갖추이매 사성(四聲)이 또한 구비된지라, 칠음과 사성이 경위(經緯)로 서로 사귀면서 맑고 흐리고 가볍고 무거움과 깊고 얕고 빠르고 느림이 자연으로 생겨난 이러한 까닭으로, 포희(庖犧)가 괘(卦)를 그리고 창힐(蒼頡)이 글자를 만든 것이 역시 다 그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만물의 실정을 통한 것이고, 심약(沈約)108) ·육법언(陸法言)109) 등 여러 선비에 이르러서, 무리에 따라 나누고 종류에 따라 모아서 성조(聲調)를 고르고 운율(韻律)을 맞추면서 성운(聲韻)의 학설이 일어나기 시작하매, 글 짓는 이가 서로 이어서 각각 기교(技巧)를 내보이고, 이론(理論)하는 이가 하도 많아서 역시 잘못됨이 많았는데, 이에 사마 온공(司馬溫公)110) 이 그림으로 나타내고, 소강절(邵康節)111) 이 수학(數學)으로 밝히어서 숨은 것을 찾아내고 깊은 것을 긁어내어 여러 학설을 통일하였으나, 오방(五方)112) 의 음(音)이 각각 다르므로 그르니 옳으니 하는 분변이 여러가지로 시끄러웠다.
대저 음(音)이 다르고 같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다르고 같음이 있고, 사람이 다르고 같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방이 다르고 같음이 있나니, 대개 지세(地勢)가 다름으로써 풍습과 기질이 다르며, 풍습과 기질이 다름으로써 호흡하는 것이 다르니, 동남(東南) 지방의 이[齒]와 입술의 움직임과 서북(西北) 지방의 볼과 목구멍의 움직임이 이런 것이어서, 드디어 글뜻으로는 비록 통할지라도 성음(聲音)으로는 같지 않게 된다. 우리 나라는 안팎 강산이 자작으로 한 구역이 되어 풍습과 기질이 이미 중국과 다르니, 호흡이 어찌 중국음과 서로 합치될 것이랴. 그러한즉, 말의 소리가 중국과 다른 까닭은 이치의 당연한 것이고, 글자의 음에 있어서는 마땅히 중국음과 서로 합치될 것 같으나, 호흡의 돌고 구르는 사이에 가볍고 무거움과 열리고 닫힘의 동작이 역시 반드시 말의 소리에 저절로 끌림이 있어서, 이것이 글자의 음이 또한 따라서 변하게 된 것이니, 그 음(音)은 비록 변하였더라도 청탁(淸濁)과 사성(四聲)113) 은 옛날과 같은데, 일찍이 책으로 저술하여 그 바른 것을 전한 것이 없어서, 용렬한 스승과 속된 선비가 글자를 반절(反切)하는 법칙을 모르고 얽어놓은 요점에 어두워서 혹은 글자 모양이 비슷함에 따라 같은 음(音)으로 하기도 하고, 혹은 전대(前代)의 임금이나 조상의 이름을 피하여 다른 음(音)으로 빌어서 하기도 하며, 혹은 두 글자로 합하여 하나로 만들거나, 혹은 한 음을 나누어 둘을 만들거나 하며, 혹은 다른 글자를 빌어 쓰거나, 혹은 점(點)이나 획(劃)을 더하기도 하고 감하기도 하며, 혹은 한음(漢音)114) 을 따르거나, 혹은 속음[俚語]에 따르거나 하여서, 자모(字母)115) 칠음(七音)과 청탁(淸濁)·사성(四聲)이 모두 변한 것이 있으니, 아음(牙音)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계모(溪母)116) 의 글자가 태반(太半)이 견모(見母)117) 에 들어갔으니, 이는 자모(字母)가 변한 것이고, 계모(溪母)의 글자가 혹 효모(曉母)118) 에도 들었으니, 이는 칠음(七音)이 변한 것이라.
우리 나라의 말소리에 청탁(淸濁)의 분변이 중국과 다름이 없는데, 글자음[字音]에는 오직 탁성(濁聲)이 없으니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을 것인가. 이는 청탁(淸濁)의 변한 것이고, 말하는 소리에는 사성(四聲)이 심히 분명한데, 글자 음에는 상성(上聲)·거성(去聲)이 구별이 없고, ‘질(質)’의 운(韻)과 ‘물(勿)’의 운(韻)들은 마땅히 단모(端母)119) 로서 종성(終聲)을 삼아야 할 것인데, 세속에서 내모(來母)120) 로 발음하여 그 소리가 느리게 되므로 입성(入聲)에 마땅하지 아니하니, 이는 사성(四聲)의 변한 것이라. ‘단(端)121) ’을 ‘내(來)122) 소리’로 하는 것이 종성(終聲)123) 에만 아니고 차제(次第)의 ‘제’와 목단(牧丹)의 ‘단’같은 따위와 같이 초성(初聲)124) 의 변한 것도 또한 많으며, 우리 나라의 말에서는 계모(溪母)125) 를 많이 쓰면서 글자 음에는 오직 ‘쾌(快)’라는 한 글자의 음뿐이니, 이는 더욱 우스운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글자의 획이 잘못되어 ‘어(魚)’와 ‘노(魯)’에 참것이 혼란되고, 성음(聲音)이 문란하여 경(涇)126) 과 위(渭)127) 가 함께 흐르는지라 가로[橫]로는 사성(四聲)의 세로줄[經]을 잃고 세로[縱]로는 칠음(七音)의 가로줄[緯]에 뒤얽혀서, 날[經]과 씨[緯]가 짜이지 못하고 가볍고 무거움이 차례가 뒤바뀌어, 성운(聲韻)의 변한 것이 극도에 이르렀는데, 세속에 선비로 스승된 사람이 이따금 혹 그 잘못된 것을 알고 사사로이 자작으로 고쳐서 자제(子弟)들을 가르치기도 하나, 마음대로 고치는 것을 중난하게 여겨 그대로 구습(舊習)을 따르는 이가 많으니, 만일 크게 바로잡지 아니하면 오래 될수록 더욱 심하여져서 장차 구해낼 수 없는 폐단이 있을 것이다.
대개 옛적에 시(詩)를 짓는 데에 그 음을 맞출 뿐이었는데, 3백편(三百篇)128) 으로부터 내려와 한(漢)·위(魏)·진(晉)·당(唐)의 모든 작가(作家)도 또한 언제나 같은 운율에만 구애하지 아니하였으니, ‘동(東)’운을 ‘동(冬)’운에도 쓰고, ‘강(江)’운을 ‘양(陽)’운에도 씀과 같은 따위이니, 어찌 운(韻)이 구별된다 하여 서로 통하여 맞추지 못할 것이랴. 또 자모(字母)를 만든 것이 소리에 맞출 따름이니, 설두(舌頭)·설상(舌上)과 순중(唇重)·순경(唇經)과 치두(齒頭)·정치(正齒)와 같은 따위인데, 우리 나라의 글자 음에는 분별할 수 없으니 또한 마땅히 자연에 따라 할 것이지, 어찌 꼭 36자(三十六字)129) 에 구애할 것이랴.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옵서 유교를 숭상하시고 도(道)를 소중히 여기시며, 문학을 힘쓰고 교회를 일으킴에 그 지극함을 쓰지 않는 바가 없사온데, 만기(萬機)를 살피시는 여가에 이일에 생각을 두시와, 이에 신(臣) 신숙주(申叔舟)와 수 집현전 직제학(守集賢殿直提學) 신(臣) 최항(崔恒), 수 직집현전(守直集賢殿) 신(臣) 성삼문(成三問)·신(臣) 박팽년(朴彭年), 수 집현전 교리(守集賢殿校理) 신(臣) 이개(李愷), 수 이조 정랑(守吏曹正郞) 신(臣) 강희안(姜希顔), 수 병조 정랑(守兵曹正郞) 신(臣) 이현로(李賢老), 수 승문원 교리(守承文院校理) 신(臣) 조변안(曹變安), 승문원 부교리(承文院副校理) 신(臣) 김증(金曾)에게 명하시와 세속의 습관을 두루 채집하고 전해 오는 문적을 널리 상고하여, 널리 쓰이는 음(音)에 기본을 두고 옛 음운의 반절법에 맞추어서 자모(字母)의 칠음(七音)과 청탁(淸濁)과 사성(四聲)을 근원의 위세(委細)한 것까지 연구하지 아니함이 없이 하여 옳은 길로 바로잡게 하셨사온데, 신들이 재주와 학식이 얕고 짧으며 학문 공부가 좁고 비루하매, 뜻을 받들기에 미달(未達)하와 매번 지시하심과 돌보심을 번거로이 하게 되겠삽기에, 이에 옛사람의 편성한 음운과 제정한 자모를 가지고 합쳐야 할 것은 합치고 나눠야 할 것은 나누되, 하나의 합침과 하나의 나눔이나 한 성음과 한 자운마다 모두 위에 결재를 받고, 또한 각각 고증과 빙거를 두어서, 이에 사성(四聲)으로써 조절하여 91운(韻)과 23자모(字母)를 정하여 가지고 어제(御製)하신 《훈민정음》으로 그 음을 정하고, 또 ‘질(質)’·‘물(勿)’ 둘의 운(韻)은 ‘영(影)’130) 으로써 ‘내(來)’131) 를 기워서 속음을 따르면서 바른 음에 맞게 하니, 옛 습관의 그릇됨이 이에 이르러 모두 고쳐진지라, 글이 완성되매 이름을 하사하시기를, ‘《동국정운(東國正韻)》’이라 하시고, 인하여 신(臣) 숙주(叔舟)에게 명하시어 서문(序文)을 지으라 하시니, 신 숙주(叔舟)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사람이 날 때에 천지의 가운을 받지 않은 자가 없는데 성음(聲音)은 기운에서 나는 것이니, 청탁(淸濁)이란 것은 음양(陰陽)의 분류(分類)로서 천지의 도(道)이요, 사성(四聲)이란 것은 조화(造化)의 단서(端緖)로서 사시(四時)의 운행이라, 천지의 도(道)가 어지러우면 음양이 그 자리를 뒤바꾸고, 사시(四時)의 운행이 문란하면 조화(造化)가 그 차례를 잃게 되나니, 지극하도다 성운(聲韻)의 묘함이여. 음양(陰陽)의 문턱은 심오(深奧)하고 조화(造化)의 기틀은 은밀한지고. 더구나 글자[書契]가 만들어지지 못했을 때는 성인의 도(道)가 천지에 의탁했고, 글자[書契]가 만들어진 뒤에는 성인의 도가 서책(書冊)에 실리었으니, 성인의 도를 연구하려면 마땅히 글의 뜻을 먼저 알아야 하고, 글의 뜻을 알기 위한 요령은 마땅히 성운(聲韻)부터 알아야 하니, 성운은 곧 도를 배우는 시작[權輿]인지라, 또한 어찌 쉽게 능통할 수 있으랴. 이것이 우리 성상(聖上)께서 성운(聲韻)에 마음을 두시고 고금(古今)을 참작하시어 지침(指針)을 만드셔서 억만대의 모든 후생들을 길 열어 주신 까닭이다.
옛사람이 글을 지어 내고 그림을 그려서 음(音)으로 고르고 종류로 가르며 정절(正切)로 함과 회절(回切)로 함에 그 법이 심히 자상한데, 배우는 이가 그래도 입을 어물거리고 더듬더듬하여 음(音)을 고르고 운(韻)을 맞추기에 어두었더니,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제작됨으로부터 만고(萬古)의 한 소리로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니, 실로 음(音)을 전하는 중심줄[樞紐]인지라. 청탁(淸濁)이 분별되매 천지의 도(道)가 정하여지고, 사성(四聲)이 바로잡히매 사시(四時)의 운행이 순하게 되니, 진실로 조화(造化)를 경륜(經綸)하고 우주(宇宙)를 주름잡으며, 오묘한 뜻이 현관(玄關)132) 에 부합(符合)되고 신비한 기미(幾微)가 대자연의 소리에 통한 것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에 이르리요. 청탁(淸濁)이 돌고 구르며 자모(字母)가 서로 밀어 칠음(七音)과 12운율(韻律)과 84성조(聲調)가 가히 성악(聲樂)의 정도(正道)로 더불어 한 가지로 크게 화합하게 되었도다. 아아, 소리를 살펴서 음(音)을 알고, 음(音)을 살펴서 음악을 알며, 음악을 살펴서 정치를 알게 되나니, 뒤에 보는 이들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으리로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7책 117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5책 39면
【분류】
어문학(語文學) / 출판-서책(書冊)
[註 108]심약(沈約) : 양(梁)나라 때 학자.
[註 109]육법언(陸法言) : 수(隋) 나라 때 학자.
[註 110]사마 온공(司馬溫公) : 송나라 학자.
[註 111]소강절(邵康節) : 송나라 학자.
[註 112]오방(五方) : 동·서·남·북·중앙.
[註 113]사성(四聲) : 평성·상성·거성·입성.
[註 114]한음(漢音) : 옛 중국음.
[註 115]자모(字母) : 첫소리.
[註 116]계모(溪母) : ㅋ첫소리.
[註 117]견모(見母) : ㄱ첫소리.
[註 118]효모(曉母) : ㅎ첫소리.
[註 119]단모(端母) : ㄷ소리.
[註 120]내모(來母) : ㄹ소리.
[註 121]단(端) : ㄷ소리.
[註 122]내(來) : ㄹ소리.
[註 123]종성(終聲) : 받침.
[註 124]초성(初聲) : 첫소리.
[註 125]계모(溪母) : ㅋ첫소리.
[註 126]경(涇) : 탁한 물.
[註 127]위(渭) : 맑은 물.
[註 128]3백편(三百篇) : 공자가 정리하여 엮은 시경.
[註 129]36자(三十六字) : 중국의 자모.
[註 130]‘영(影)’ : ㆆ소리.
[註 131]‘내(來)’ : ㄹ소리.
[註 132]현관(玄關) : 현묘(玄妙)한 도(道)로 들어가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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