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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5월 19일 을해 5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혜빈이 안평 대군이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일을 꾀함을 아뢰다
혜빈(惠嬪)이 밀계(密啓)하기를,
"이용(李瑢)417) 이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여 여러 무뢰배를 모으고, 이현로(李賢老)의 말을 듣고서 무계 정사(武溪精舍)를 방룡 소흥(旁龍所興)의 땅에 지었으니, 마땅히 미리 막아야 합니다."
하였다. 성녕 대군(誠寧大君)의 종 김보명(金寶明)이 풍수의 설(說)을 거짓으로 꾸며서 용(瑢)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보현봉(普賢峯) 아래에 집을 지으면, 이것은 비기(秘記)에 이른바, ‘명당(明堂)이 장손(長孫)에 이롭고 만대(萬代)에 왕이 일어난다.’는 땅입니다."
하였으므로, 용(瑢)이 무계 정사(武溪精舍)를 짓고서 핑계하여 말하기를,
"나는 산수를 좋아하고 홍진(紅塵)418) 을 좋아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뒤에 김보명(金寶明)이 죽자, 용(瑢)의 계집종 약비(若非)가 자성 왕비(慈聖王妃)에게 아뢰기를,
"잘 죽었다. 살았으면 매우 큰 죄를 지었을 것이다."
하였다. 백악산(白岳山)이 뒤에 왕이 일어날 땅이라 하고 장손(長孫)에 이롭다고 일컬었는데, 여러 사람들의 듣는 것을 속이었지만 실은 의춘군(宜春君)419) 을 가리킨 것이었다. 용(瑢)이 널리 조사(朝士)와 결탁하려고 ‘시가(詩家)’라고 칭탁하니, 이현로(李賢老)·이승윤(李承胤)·이개(李塏)·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이 교결(交結)하여 마음으로 굳게 맹세하고 ‘문하(門下)’라고 칭하고, 모두 도서(圖書)의 헌호(軒號)420) 를 지어서 서로 한때의 문사임을 자랑하였으나, 모두 농락(籠絡)당한 것이었다. 이현로 등이 용(瑢)을 칭하여 ‘사백(詞伯)’이라 하고, 또 ‘동평(東平)’이라고도 칭하였다. 김종서(金宗瑞)가 매양 용(瑢)에게 글을 보낼 때 ‘맹말(盟末)421) ’·‘맹로(盟老)422) ’라고 자칭하고 동료로써 대하니, 용(瑢)의 거짓된 명예가 이미 넘쳐서 임금의 자리[神器]를 엿보게 되었다. 이에 권세 있고 부유한 것을 가지고 사람을 멸시함이 아주 많았고, 참람(僭濫)한 물건을 많이 만들어 착용하였으며, 계(契)의 모임에서 시문을 지어서 등급을 매기고, 큰 인장(印章)을 만들어 찍었다. 일이 많이 이와 같았고, 또 마음대로 역마(驛馬)를 사용하기에 이르러, 한때 용(瑢)에게 아첨하는 자들이 용(瑢)에게 글을 보내는 데 한결같이 계서(啓書)와 같이 하여, ‘용비(龍飛)’·‘봉상(鳳翔)’·‘번린(攀鱗)’·‘부익(附翼)’·‘계운(啓運)’·‘개치(開治)’ 등과 같은 용어를 쓰고도 의혹하지 않았으며, 혹은 신이라 칭하는 자도 있었다. 정난(靖難)423) 한 뒤에 많이 얼굴을 바꾸고 꼬리를 흔들었으나, 세조는 모두 묻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6책 593면
【분류】
변란(變亂) / 사법-치안(治安)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註 417]이용(李瑢) : 안평 대군(安平大君).
[註 418]홍진(紅塵) : 번거롭고 속된 세상.
[註 419]의춘군(宜春君) : 안평 대군(安平大君)의 아들 이우직(李友直).
[註 420]헌호(軒號) : 당호(堂號).
[註 421]맹말(盟末) : 맹세한 사람 가운데 끝자리 사람.
[註 422]맹로(盟老) : 맹세한 사람 가운데 늙은 사람.
[註 423]정난(靖難) : 계유 정난(癸酉靖難).
19.단종실록 8권, 단종 1년 10월 15일 무술 4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박종우·한확·이사철·김효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종우(朴從愚)를 운성위(雲城尉)로 삼고, 한확(韓確)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이사철(李思哲)을 좌찬성(左贊成)으로, 김효성(金孝誠)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이계린(李季疄)을 좌참찬(左參贊)으로, 박중림(朴仲林)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변(李邊)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김말(金末)을 경창부 윤(慶昌府尹)으로, 이흥상(李興商)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김신민(金新民)을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으로, 하위지(河緯地)를 사간원 좌사간(司諫院左司諫)으로, 성삼문(成三問)을 우사간(右司諫)으로, 이개(李塏)를 수사헌 집의(守司憲執義)로, 구치관(具致寬)을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유응부(兪應孚)를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로, 박쟁(朴崝)을 충청도 처치사(忠淸道處置使)로, 이교연(李皎然)을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삼고, 난신(亂臣)을 잡아 죽인 여러 사람을 또한 공을 논하여 상직(賞職)하고, 김윤부(金允富)는 파직하였으니, 김종서(金宗瑞)에게 말을 준 때문이다. 이교연(李皎然)이 성품이 교활하고 아첨하여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권문(權門)에 투자(投刺)하였다. 일찍이 헌납(獻納)이 되었을 때에 형조(刑曹)·병조(兵曹)·당상의 자제가 강도(强盜)를 잡은 것으로 하여 함부로 상직(賞職)을 받은 자가 많아서 의논하여 탄핵하고자 하니, 이교연이 홀로 말하기를,
"만일 끝내 탄핵한다면 나는 병으로 옮기겠다."
하니, 듣는 자가 웃었다.
【태백산사고본】 3책 8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6책 628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20.단종실록 8권, 단종 1년 10월 28일 신해 3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이개가 정분·허후·조수량·안완경 등은 이용의 당이라 말하고 법에 의해 논단하기를 청하다
집의(執義) 이개(李塏)가 본부(本府)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신 등이 지금 정부에서 아뢴 죄목(罪目)을 보니, 이용(李瑢)이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정분(鄭笨)에게 지시하여 심복을 병조(兵曹) 군기감(軍器監)에 포열(布列)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정분의 죄가 황보인·김종서에 못하지 않습니다. 또 허후(許詡)는 집정 대신(執政大臣)으로서 자주 용(瑢)의 집에 갔으니, 당여(黨與)인 것이 분명합니다. 조수량(趙遂良)·안완경(安完慶) 등은 용(瑢)과 더불어 비밀한 말로 약속하였고, 또 조수량은 용(瑢)의 금대(金帶)를 받았으니, 이것도 또한 용(瑢)의 당입니다. 조순생(趙順生)·이석정(李石貞)·지정(池淨) 등은 모두 무관(武官)으로서 용(瑢)의 집에 왕래하여 당원(黨援)을 하였으니, 청컨대 모두 율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그 나머지 지당(支黨) 이보인(李保仁) 등은 밤낮으로 용의 집에 모였으니 어찌 역모를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또한 법에 의하여 논단하소서."
하니,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8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6책 635면
【분류】
사법-재판(裁判) / 변란-정변(政變)
21.단종실록 9권, 단종 1년 11월 6일 무오 4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이징석을 벌하는 것에 관한 황효원·이개·김계우 등의 논의
사인(舍人) 황효원(黃孝源)이 당상의 의논을 아뢰기를,
"이징석은 본디 신임(信任)하는 대신이며, 또, 그 아우와는 항상 불목(不睦)하여 절대로 함께 모의할 이치가 없습니다. 옛날 제왕(帝王)도 간혹 율외(律外)의 법(法)을 써서, 그 아우를 죄 주면서도 그 형을 보전한 이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징석은 마땅히 그대로 두고 죄를 묻지 말아야 합니다. 이징규는 당초에 효자(孝子)로서 종사(從仕)하였고, 그 거처하는 곳도 역시 그 형과 멀리 떨어져 있었사오니, 어찌 죄 줄 수 있겠습니까? 그 아비가 연좌되지 않았는데 그 아들을 어찌 논죄하겠습니까? 이세문(李世問)은 비록 본관(本貫) 근처에 안치하였지만, 이세문은 일찍이 이징옥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안치한 것으로 족합니다. 김문기(金文起)는 지금 이미 부임(赴任)하였고, 군사를 보내는 일에는 일찍이 서로 관계하지 않았으니, 어찌 다시 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대간(臺諫)을 불러 위의 말과 같이 전교하니, 집의(執義) 이개(李塏)가 다시 아뢰기를,
"반적(反賊)에 대한 연좌(緣坐)의 율(律)은 처음에 서로 화목(和睦)하였는지 아니하였는지의 여부는 헤아리지 않습니다. 어찌 그 아우가 반역을 하였는데, 그 형만 홀로 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징옥은 일찍이 청렴(淸廉)한 것으로써 이름이 났었는데 지금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징규가 어찌 효자라 하여 그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모름지기 법에 의거하여 시행하소서."
하였다. 헌납(獻納) 김계우(金季友)도 역시 같은 말로 청하고, 또 아뢰기를,
"김문기는 절제사(節制使)의 직임에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전지하기를,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이징석 형제의 일은 다시 대신과 의논하겠다."
하였다. 황효원(黃孝源)이 당상의 의논을 아뢰기를,
"그 아우를 죄 주고 그 형은 보전하는 것은 이미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인주(人主)에게 어찌 권형(權衡)이 없을 수 있습니까? 마땅히 논하지 마소서."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9권 7장 A면【국편영인본】 6책 639면
【분류】
사법-재판(裁判) / 변란(變亂)
22.단종실록 9권, 단종 1년 11월 8일 경신 2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정난한 공이 있는 이들에게 동·서반직을 차등있게 올려 제수하다
도원군(桃源君) 【의경왕(懿敬王)의 휘(諱).】 을 올려 흥록 대부(興祿大夫)로 삼고, 박종우(朴從愚)를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으로, 안맹담(安孟聃)을 성록 대부(成祿大夫) 연창위(延昌尉)로, 정종(鄭悰)을 광덕 대부(光德大夫) 영양위(寧陽尉)로, 정인지(鄭麟趾)를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 의정부 좌의정(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議政府左議政)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으로, 한확(韓確)을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 의정부 우의정 서성 부원군(西城府院君)으로, 이사철(李思哲)을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 의정부 좌찬성 견성군(甄城君)으로, 김효성(金孝誠)을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연산군(延山君)으로, 정창손(鄭昌孫)을 이조 판서로, 조혜(趙惠)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이계전(李季甸)을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 병조 판서 한산군(韓山君)으로, 이변(李邊)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박중림(朴仲林)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권맹손(權孟孫)을 중추 원사(中樞院事)로, 이견기(李堅基)·홍약(洪約)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김세민(金世敏)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강맹경(姜孟卿)을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신석조(辛碩祖)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노숙동(盧叔仝)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정척(鄭陟)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박중손(朴仲孫)을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 병조 참판 응천군(凝川君)으로, 이인손(李仁孫)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김황(金滉)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신자수(申自守)·연경(延慶)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봉안국(奉安國)·이효정(李孝貞)·박강(朴薑)·맹효증(孟孝曾)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김청(金聽)을 인순부 윤(仁順府尹)으로, 이순지(李純之)·유수강(柳守剛)을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권준(權蹲)을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 사헌부 대사헌 안천군(安川君)으로, 안숭효(安崇孝)를 이조 참의로, 홍원용(洪元用)을 호조 참의로, 어효첨(魚孝瞻)을 예조 참의로, 홍달손(洪達孫)을 수충 위사 협책 정난 공신 병조 참의(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兵曹參議)로, 김순(金淳)을 형조 참의로, 최항(崔恒)을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 승정원 도승지로, 신숙주(申叔舟)를 수충 협책 정난 공신 승정원 좌승지로, 박팽년(朴彭年)을 승정원 우승지로, 박원형(朴元亨)을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권자신(權自愼)을 승정원 우부승지로, 권남(權擥)을 수충 위사 협책 정난 공신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김자갱(金自鏗)·김혼지(金俒之)·박소(朴昭)·홍익성(洪益誠)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이흥상(李興商)을 수충 정난 공신 첨지 중추원사(輸忠靖難功臣僉知中樞院事)로, 양정(楊汀)을 수충 협책 정난 공신 지병조사(知兵曹事)로, 성삼문(成三問)을 수충 정난 공신 사간원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로, 조어(趙峿)를 사간원 우사간 대부로 삼았으며, 집의(執義) 이개(李塏)는 중훈(中訓)을 더하고, 김지경(金之慶)·유성원(柳誠源)을 수사헌 장령(守司憲掌令)으로, 윤기견(尹起畎)·이극감(李克堪)을 사헌 지평(司憲持平)으로, 성승(成勝)을 충청도 병마 도절제사(忠淸道兵馬都節制使)로, 한명회(韓明澮)를 수충 위사 협책 정난 공신으로, 봉석주(奉石柱)·윤사윤(尹士昀)·유하(柳河)·유수(柳洙)·홍윤성(洪允成)·곽연성(郭連城)을 수충 협책 정난 공신으로, 이예장(李禮長)·김처의(金處義)·강곤(康袞)·유숙(柳淑)·유사(柳泗)·권언(權躽)·홍순로(洪純老)·안경손(安慶孫)·임자번(林自蕃)·설계조(薛繼祖)·유자황(柳子晃)·권경(權擎)·홍순손(洪順孫)·송익손(宋益孫)·최윤(崔潤)·한서구(韓瑞龜)·이몽가(李蒙哥)·한명진(韓明溍)을 추충 정난 공신(推忠靖難功臣)으로 삼고, 아울러 동·서반직(東西班職)을 차등 있게 올려 제수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9권 8장 A면【국편영인본】 6책 639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23.단종실록 9권, 단종 1년 11월 10일 임술 2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집의 이개가 자신에게 공로가 없음을 이유로 가자된 일의 개정을 청하다
집의(執義) 이개(李塏)가 아뢰기를,
"신이 지금 가자(加資)되었사오나,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실로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청컨대 고쳐 바로잡으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또 〈이개가〉 아뢰기를,
"신이 전일(前日)에 비록 집현전에 벼슬하였사오나, 경연(經筵)에서 잠시의 조그마한 도움도 없었는데, 벼슬자리를 옮긴 뒤에 노고를 추론(追論)하여 자급을 더하시니, 마치 값을 거두는 것과 같아서 더욱 미안합니다."
하였으나, 또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3책 9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6책 640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24.단종실록 9권, 단종 1년 11월 21일 계유 1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김지경·유성원 등이 상서하여 사직하다
장령(掌令) 김지경(金之慶)·유성원(柳誠源) 등이 상서하여 사직(辭職)하기를,
"신 등이 요사이 시정(時政)의 불편한 일 몇 가지로써 여러 차례 천위(天威)를 모독하였사오나, 하나도 윤허하심을 받지 못하여 황공하고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사오니, 청컨대 직사(職事)를 해면(解免)하여 주소서. 신들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헌사(憲司) 일국의 기강(紀綱)을 세우는 근본이므로, 시정(時政)의 좋고 나쁜 점과 조정의 득실(得失)을 모두 맡겨 진언(盡言)할 수 있게 하여, 이미 언사(言事)로써 책임을 지웠으니, 말하는 것이 옳으면 인군이 쫓아야 하고, 말하는 것이 받아 들여지지 않으면 또한 구차스럽게 그 직임에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들은 모두 불초(不肖)한 사람들로 경시지초(景始之初)1135) 를 당하여 잘못 중책을 맡아 일을 문득 잘못 아뢰오니, 직책을 다하지 못하면서 벼슬에 있는 것이 옳지 못합니다. 비옵건대, 신들을 파직(罷職)하고 현능(賢能)한 사람으로 대신하시오면 매우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정부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김지경과 유성원을 불러 전교하기를,
"이미 대신들과 숙의(熟議)하였으니, 따를 수 없다. 혐의하지 말고 직임에 나아가도록 하라."
하였다. 김지경이 다시 아뢰기를,
"신 등이 아뢴 바가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에 어둡다면 언관(言官)으로 있는 것이 부당하고, 만약에 말한 것이 옳은대도 윤허을 받지 못한다면, 언책(言責)에 있는 자는 의리상 마땅히 물러가야 합니다. 신들이 어찌 감히 직임에 나아가겠습니까?"
하고, 유성원도 아뢰기를,
"대간(臺諫)을 둔 것은 정사(政事)의 득실(得失)을 말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의논이 이미 정하여져서 고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잘못된 것을 끝내 개정하여 다스릴 수 없습니다. 지금 공신(功臣)들의 등제(等第)를 보면, 공이 아주 적은 자가 간혹 1등에 있고, 공이 없는데도 공신의 열에 참여된 자가 또한 간혹 있사오니, 청컨대 모름지기 이를 개정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집의(執義) 이개(李塏)가 사직하기를,
"근자에 장령 김지경 등이 아뢴 바의 공신(功臣) 및 환시(宦寺)에게 봉군(封君)한 것 등의 옳지 못한 사건은 신이 비록 병으로 누워 있었어도 사실은 함께 모의(謀議)한 것입니다. 지금 듣자오니, 하나도 허락하심을 내리지 않았다 하오니, 부끄럽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건대, 언관(言官)은 인주(人主)의 이목(耳目)이니, 만약 아는 바가 있는데도 진언(盡言)하지 않으려 한다면 이는 임금의 총명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합당하지 못한데도 스스로 물러나 피하지 않는다면, 이는 영화를 탐하여 직위를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늘을 감격시킬 만한 정성도 없고, 또 직위를 도적질하였다는 비방을 얻었사오니, 신이 비록 보잘것 없는 사람이오나 진실로 이는 못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의 직책을 빨리 파하소서."
하니, 정부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고, 사장(辭狀)을 돌려 주었다.
【태백산사고본】 3책 9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6책 64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註 1135]경시지초(景始之初) : 옛것을 고치어 새롭게 하는 처음
25.단종실록 9권, 단종 1년 11월 28일 경진 2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성삼문·이개 등이 환관에게 봉군하는 일의 불가함을 아뢰다
좌사간(左司諫) 성삼문(成三問)·집의(執義) 이개(李塏)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가만히 생각건대, 환시(宦寺)가 예로부터 국가의 환(患)이 된 것은 오래이오니, 처음에 삼가지 않으면 말류(末流)의 폐가 반드시 망국(亡國)·패가(敗家)에 이르고야 맙니다. 이는 진실로 뒤를 계승한 임금과 재상이 조종(祖宗)의 옛법[舊章]을 따르지 않으며, 후세의 환(患)을 걱정하지 아니하고 경이(輕易)하게 한 때문입니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망함이 모두 이들 때문이었으니, 그 근원은 화제(和帝)1177) ·고조(高祖)1178) 의 규약을 변경하여 정중(鄭衆)을 후(侯)로 삼고, 현종(玄宗)1179) 이 태종(太宗)1180) 의 제도를 개정하여 고 역사(高力士)를 공(公)으로 삼아, 마침내 뒤에 올 침고(沈痼)의 질환을 이루어서 끝내 구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에 이르러 후회한다 하더라도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송(宋)나라 진종(眞宗)1181) 때에 유승규(劉承規)가 충근(忠謹)으로서 총행(寵幸)을 받았는데,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절도사(節度使)가 되기를 구하자, 진종이 말하기를, ‘유승규에게 이를 대접하여 눈을 감게 하라.’하니, 대신 왕단(王旦)이 불가함을 고집하기를, ‘이는 타일(他日)에 추밀사(樞密使)가 되기 위한 계제를 구하는 것이니, 따를 수 없습니다.’하여 마침내 그만두었습니다. 이로부터 환시의 권한이 점점 쇠미하여졌는데도 뒷날에 오히려 동관(童貫)의 화(禍)가 있었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진실로 엎어진 수레바퀴[覆轍]가 앞에 있는데도 뒤따르던 수레[後車]가 경계하지 않았던 때문입니다. 당나라가 한나라를 거울삼지 아니하여 이로써 망하였고, 송나라가 한나라와 당나라를 거울삼지 아니하여 또한 이로써 망하였습니다. 지금 한나라나 당나라·송나라의 뒤에 있으면서 한·당·송나라로 경계를 삼지 아니하면, 한·당·송나라의 화를 면할 수 없음은 사세로 보아 필연(必然)한 일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엄자치(嚴自治)·전균(田畇)은 전하의 가노(家奴)입니다. 만약 공이 있어 이를 포상하시려면, 재백(財帛)과 전민(田民)을 하사하시면 가합니다. 무릇 봉군(封君)을 중국[中朝]에 비유하면 5등(五等)1182) 의 작위[爵]로서 대우의 융성함이 항상 양부(兩府)1183) 의 위에 있어서, 비록 대신이라도 큰 공이 있지 않으면 또한 오히려 불가한데, 하물며 엄자치 등이 공신의 열에 끼인 것만도 이미 해괴스러운데, 여기에 중한 호칭까지 더하여 작명(爵命)을 가볍게 더럽히고 조종(祖宗)의 조정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비록 김사행(金師幸)을 구실[藉口]로 삼으나, 김사행은 고려가 혼란(昏亂)의 극에 달하였을 때에 총행(寵幸)을 인연하여 극품(極品)에 이르렀던 것이며, 〈우리〉 국초(國初)에는 다만 그 옛것을 따랐을 뿐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천주(天誅)를 당하였으니, 어찌 총우(寵遇)와 횡자(橫恣)의 극(極)이 이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태종(太宗)·세종(世宗)께서는 이들을 매우 엄하게 대접하여, 공로가 있어도 상을 함부로 주지 않았고, 죄가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셨으니, 진실로 이들을 대우함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헌의(獻議)한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봉군(封君)은 권병(權柄)도 없고 직사(職事)도 없이 한갓 허호(虛號)만 있을 뿐이라.’고 할 것이나, 이는 생각치 못한 것입니다. 지금 태종·세종의 교훈[貽謀]과 유범(遺範)이 후세를 위하여 걱정하신 바가 매우 잘 갖추어져 있고, 또, 전하의 밝으신 예지(睿智)와 보필하는 대신들이 고금(古今)을 통하고 대체(大體)를 잘 앎으로도, 세종 시대가 지난 지 오래지 아니한데도 오히려 오늘날의 일이 있어, 그 순치(馴致)의 형세1184) 가 반드시 이르게 될 것이니, 후일(後日)에 한나라나 당나라·송나라의 말류(末流)의 폐단이 없기를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신 등이 그윽이 헤아리건대, 이 일은 결코 신충(宸衷)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반드시 헌의한 자가 있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신 등과 헌의한 대신·정부·육조(六曹)·신종하는 신료(臣僚)들을 불러, 이들로 하여금 가부(可否)를 논힐(論詰)하게 하여, 전하께서 천천히 들으시고 익히 생각하시어, 신 등의 말이 잘못되었다면 마땅히 잘못된 견해를 고집한 죄를 밝게 다스리시고, 그렇지 아니하면 마땅히 곧 윤가(允可)하시어 성명(成命)을 거두셔서, 일국(一國)의 신민(臣民)의 바람을 쾌(快)하게 하시면, 만세토록 심히 다행이겠습니다."
하였으나, 궁중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3책 9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6책 649면
【분류】
왕실-궁관(宮官) / 인사-관리(管理) / 역사-고사(故事) / 정론-정론(政論)
[註 1177]화제(和帝) : 후한(後漢)의 4대 황제.
[註 1178]고조(高祖) : 한(漢)나라의 시조.
[註 1179]현종(玄宗) : 당의 7대 황제.
[註 1180]태종(太宗) : 당의 2대 황제.
[註 1181]진종(眞宗) : 송의 3대 황제.
[註 1182] 5등(五等) :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의 작위를 말함.
[註 1183]양부(兩府) : 조선조 때 의정부(議政府)와 중추원(中樞院)을 아울러 일컫던 말.
[註 1184]형세 : 점차로 나쁜 결과가 오는 형세. 그 조짐이 생기면 자연적으로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을 말함. 《주역(周易)》 곤괘(坤卦)에 "그 도에 익고 극진하면 굳은 얼음에 이른다.[馴致其道 至堅氷也]"하였음.
26.단종실록 9권, 단종 1년 11월 29일 신사 1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이개·이극감 등이 이징석의 죄를 청한 일로 피혐하기를 청하다
집의(執義) 이개(李塏)·지평(持平) 이극감(李克堪)·정언(正言) 공기(孔頎) 등이 피혐(避嫌)하였다. 이개가 아뢰기를,
"신이 오늘아침 면대(面對)를 계청(啓請)하니, 전지하시기를, ‘내가 마땅히 만나 보겠다. 그러나 어제 교지(敎旨)를 내리기를, 「금후로 모역(謀逆) 등의 일을 아뢰는 자가 있으면 반좌(反坐)하겠다.」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이를 아는가?’하셨습니다. 신이 명(命)을 듣고 들어갔더니, 마침 정언 공기가 이징석(李澄石)의 죄를 계청(啓請)하였고, 신도 깜박 잊고 역시 아뢰었습니다."
하였다. 이극감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예궐(詣闕)하였더니 이개가 신에게 전지(傳旨)를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공기가 이징석의 죄를 계청할 때 〈신도〉 역시 잊어버리고 아뢰었습니다."
하였다. 공기가 아뢰기를,
"신은 아직 어제의 교지(敎旨)를 듣지 못했으므로 이징석의 죄를 청하였습니다."
하니, 전지하기를,
"혐의하지 말고 출사(出仕)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9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6책 650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변란(變亂)
27.단종실록 9권, 단종 1년 12월 1일 계미 1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권준·이개·김지경 등을 불러 사장을 돌려 주다
대사헌(大司憲) 권준(權蹲), 집의(執義) 이개(李塏), 장령(掌令) 김지경(金之慶)·유성원(柳誠源), 지평(持平) 윤기견(尹起畎)·이극감(李克堪)을 불러 사장(辭狀)을 돌려주었다. 권준 등이 또 사장을 올려 아뢰기를,
"지금 성은(聖恩)을 입어 신 등의 출사(出仕)를 허락하셨으나, 신 등이 낯부끄럽게 직책을 다하지 못하고 영화를 탐내어 은총을 무릅쓰는 것은, 다만 전하께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실로 당세(當世)의 물의(物議)에 비방을 받을 것이고, 또한 천만세의 공론(公論)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임금의 총명을 가리는 화(禍)는 옛날의 감계(鑑戒)가 밝게 있는데, 근자에 정원(政院)에 명하여, ‘만약 대간(臺諫)에서 다시 환관(宦官) 등의 일을 말하거든 계달(啓達)하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으니, 신 등이 용렬(庸劣)하고 나약(懦弱)하여 이미 그른 것을 바로잡지 못하였고, 또 후일에 간쟁(諫諍)을 못하게 하는 길을 열어 놓아 무궁한 화(禍)를 끼치게 하였으니, 죄책(罪責)이 심히 무겁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 등을 놓아 보내어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하시고, 다시 현능(賢能)한 사람을 뽑아 이에 대신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또 사장을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9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6책 650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정론-간쟁(諫諍)
28.단종실록 9권, 단종 1년 12월 5일 정해 1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권준·이개·유성원 등을 불러 출사하도록 하다
대사헌(大司憲) 권준(權蹲), 집의(執義) 이개(李塏), 장령(掌令) 유성원(柳誠源), 지평(持平) 윤기견(尹起畎)·이극감(李克堪)을 불러 출사(出仕)하도록 하였다. 권준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집에서 대죄(待罪)하고 있는데 다시 출사하게 하시나, 무릇 헌사(憲司)는 일국(一國)의 이목(耳目)이요, 백관(百官)의 법도(法度)인데 지금 결단(決斷)하는 데 잘못하였으니, 헌사의 직임에 합당치 않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다시 출사하라는 명령을 거두어 주소서."
하니, 전지하기를,
"혐의가 없으니 직임에 나오도록 하라."
하였다. 권준 등이 물러 나와 상서(上書)하여 사직(辭職)하기를,
"요사이 신 등이 율(律)을 적용하는 데 적당하지 못하게 하여 〈성상께서 신들에게〉 귀가(歸家)하여 대죄(待罪)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은(聖恩)을 입어 출사하도록 허락하시나, 본부(本府)는 모든 중외(中外)의 처결(處決)이 마땅한가 마땅하지 아니한가를 죄다 규찰(糾察)하는데, 어찌 먼저 스스로 이를 범하고 그 자리에 버젓이 있겠습니까? 신 등이 비록 마음 속으로 감격하고 있으나, 두렵고 부끄러워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만약에 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직임에 나가게 되면, 신 등의 어리석고 미욱함으로 인하여 국가의 풍헌(風憲)을 욕되게 하여, 죄가 더욱 심하게 될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신 등의 직사(職事)를 파면하소서."
하니, 명하여 그 사장(辭狀)을 돌려주게 하였다. 권준 등이 다시 상서하기를,
"예로부터 언관(言官)이 언사(言事) 때문에 견책을 받았다가 다시 그 직임에 되돌아간 자가 간혹 있으나, 법률을 비부(比附)1198) 하는 데 이르러서 경중(輕重)을 용이(容易)하게 하여서는 안되므로, 경(輕)한 것이면 죄보다 가볍[失出]1199) 게 하고 중(重)한 것이면 죄보다 무겁[失入]1200) 게 하는 것이니, 만약 경하게 하거나 중하게 한 죄[出入人罪]1201) 가 있다면, 율(律)에 정죄(正罪)가 있으면 조금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 등은 직책이 국법을 관장하여 무릇 중외(中外)의 모든 일을 규찰하여 다스리지 않는 것이 없는데, 옥송(獄訟)이 그 중에서 가장 중대한 것입니다. 지금 신 등이 정득훤(鄭得萱)과 강처휴(姜處休)의 죄를 율(律)에 비(比)하여 중하게 다스린 실수를 저질러서 집에서 견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성은(聖恩)이 너그럽게 용서하시어 직임에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풍헌(風憲)을 규찰하는 임무를 죄가 있는 몸으로서 그 자리에 함부로 앉아 조정의 기강을 욕되게 할 수 없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신 등의 직사(職事)를 파하도록 명하시어 풍헌의 체통을 보전하소서."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9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6책 651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註 1198]비부(比附) : 법률에 그 죄에 해당하는 정조(正條)가 없을 때 그 죄와 유사한 법률 조문을 적용하던 일.
[註 1199]가볍[失出] : 죄는 무거우나 벌은 가벼운 것을 말함.
[註 1200]무겁[失入] : 죄는 가벼우나 벌이 무거운 것을 말함.
[註 1201]중하게 한 죄[出入人罪] : 재판을 할 때 잘못하여 죄가 가벼운 사람에게 무거운 형벌을 적용하고, 죄가 무거운 사람에게 가벼운 형벌을 적용하는 죄.
29.단종실록 10권, 단종 2년 1월 7일 기미 2번째기사 1454년 명 경태(景泰) 5년
이개·유성원 등이 불당 철거를 청하다
집의(執義) 이개(李塏), 장령(掌令) 유성원(柳誠源), 지평(持平) 윤기견(尹起畎)·이극감(李克堪) 등이 아뢰기를,
"불당(佛堂)을 헐어버리는 일에 대하여 혹은 말씀을 드리기도 하고 혹은 상소를 올렸으나, 아직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신 등이 물러나서 생각하니, 술사(術士)의 말이 비록 증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신자(臣子)의 임금[君父]을 위하는 마음에 오히려 또 이를 삼가는데, 하물며 그 말이 증험이 있지 않습니까? 이미 지나간 증험이 이미 이와 같았으니, 장차의 일도 또한 알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지(傳旨)하기를,
"따를 수가 없다."
하였다. 이개 등이 다시 아뢰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천금(千金)040) 의 자식은 마루 끝에 앉게 할 수 없다.’ 하였는데, 하물며 전하께서는 종묘·사직(社稷)의 주인이 아니십니까? 또 이번 춘향 대제(春享大祭)를 처음에 9일로 날을 받았다가 뒤에 성수(聖壽)의 길신(吉辰)으로써 10일로 고쳐 정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음양 화복(陰陽禍福)의 설(說)을 또한 쓰지 않는 것도 아닌데, 어찌 오로지 신 등의 말씀에만 윤허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임금이 전지(傳旨)하기를,
"너희들의 말을 내가 모조리 알고 있다."
하였다. 이개 등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차마 헐어버리지 못하시는 것은 조종(祖宗)께서 하신 바이기 때문인데, 신 등이 말씀드리는 바는 종묘·사직과 생민(生民)을 위한 계책이니, 전하 한 몸의 조그마한 혐의를 가지고 종묘·사직과 생민을 위하는 대계(大計)와 비교한다면 가볍고 무거운 것은 판연(判然)한 것입니다. 만약 세종(世宗)·문종(文宗)께서 아직도 살아 계시다면, 금일의 우환(憂患)은 반드시 빨리 헐어 없앴을 것입니다. 신민(臣民)들이 녹(祿)이 없고, 세종·문종께서도 모두 이미 빈천(賓天)041) 하셨는데, 만약 사신(使臣) 등도 또한 녹이 없다면 천만세의 우환을 이루 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명하여 정부에 의논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10권 5장 B면【국편영인본】 6책 658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불교(佛敎) / 왕실-의식(儀式) / 정론(政論)
[註 040]천금(千金) : 부자 또는 고귀한 집.
[註 041]빈천(賓天) : 임금의 죽음.
30.단종실록 10권, 단종 2년 1월 9일 신유 2번째기사 1454년 명 경태(景泰) 5년
이개·윤기견 등이 불당 철거를 청하다
집의(執義) 이개(李塏)·지평(持平) 윤기견(尹起畝[尹起畎])·이극감(李克堪) 등이 아뢰기를,
"전날 불당(佛堂)을 헐어버리도록 청하였으나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신 등이 생각하건대, 무릇 집을 가진 자는 음양(陰陽)의 사위[拘忌]하는 것과 술사(術士)·무격(巫覡)의 말을 따르는데, 하물며 경복궁(景福宮)은 조종(祖宗) 천만세의 법궁(法宮)이니, 어찌 불리하다는 말을 듣고서도 차마 이를 헐어버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신 등의 말이 미덥지 않으시다면 마땅히 정부와 육조(六曹)에 의논하여서, 백료(百僚)·서사(庶司)에 이르기까지 모두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신 등은 마땅히 대죄(待罪)할 것이며, 만약 옳다고 생각한다면 모름지기 공론(公論)을 따라서 이를 빨리 허물어버리소서."
하니, 임금이 전지(傳旨)하기를,
"들어줄 수가 없다."
하였다. 이개 등이 말하기를,
"일을 의논하여 아뢰는 대신(大臣)들이 술사(術士)의 말을 족히 믿을 수가 없다고 하지만, 국가에서 음양(陰陽)의 설(說)을 폐지하지 아니하고 믿어서 쓰는 것이 자못 많은데, 오로지 불당만을 사위하는 바를 믿지 않는 것이 가(可)하겠습니까?"
하였으나, 또한 들어주지 않았다. 이개 등이 말하기를,
"술사(術士)의 말이 비록 족히 믿을 것이 못 될지라도 어찌 임금[君父]께 이롭지 못하다는 말을 듣고서 그대로 내버려두어 장래의 증험을 시험하겠습니까? 백료(百僚) 중에서 비록 말하고자 하는 자가 있지만 언관(言官)의 직책(職責)에 있지 않은 자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신 등의 말을 가지고 백료들에게 널리 물어 보소서."
하였으나, 또한 들어주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4책 10권 6장 A면【국편영인본】 6책 659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불교(佛敎) / 정론-정론(政論)
31.단종실록 10권, 단종 2년 1월 9일 신유 2번째기사 1454년 명 경태(景泰) 5년
이개·윤기견 등이 불당 철거를 청하다
집의(執義) 이개(李塏)·지평(持平) 윤기견(尹起畝[尹起畎])·이극감(李克堪) 등이 아뢰기를,
"전날 불당(佛堂)을 헐어버리도록 청하였으나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신 등이 생각하건대, 무릇 집을 가진 자는 음양(陰陽)의 사위[拘忌]하는 것과 술사(術士)·무격(巫覡)의 말을 따르는데, 하물며 경복궁(景福宮)은 조종(祖宗) 천만세의 법궁(法宮)이니, 어찌 불리하다는 말을 듣고서도 차마 이를 헐어버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신 등의 말이 미덥지 않으시다면 마땅히 정부와 육조(六曹)에 의논하여서, 백료(百僚)·서사(庶司)에 이르기까지 모두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신 등은 마땅히 대죄(待罪)할 것이며, 만약 옳다고 생각한다면 모름지기 공론(公論)을 따라서 이를 빨리 허물어버리소서."
하니, 임금이 전지(傳旨)하기를,
"들어줄 수가 없다."
하였다. 이개 등이 말하기를,
"일을 의논하여 아뢰는 대신(大臣)들이 술사(術士)의 말을 족히 믿을 수가 없다고 하지만, 국가에서 음양(陰陽)의 설(說)을 폐지하지 아니하고 믿어서 쓰는 것이 자못 많은데, 오로지 불당만을 사위하는 바를 믿지 않는 것이 가(可)하겠습니까?"
하였으나, 또한 들어주지 않았다. 이개 등이 말하기를,
"술사(術士)의 말이 비록 족히 믿을 것이 못 될지라도 어찌 임금[君父]께 이롭지 못하다는 말을 듣고서 그대로 내버려두어 장래의 증험을 시험하겠습니까? 백료(百僚) 중에서 비록 말하고자 하는 자가 있지만 언관(言官)의 직책(職責)에 있지 않은 자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신 등의 말을 가지고 백료들에게 널리 물어 보소서."
하였으나, 또한 들어주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4책 10권 6장 A면【국편영인본】 6책 659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불교(佛敎) / 정론-정론(政論)
32.단종실록 11권, 단종 2년 7월 7일 병진 1번째기사 1454년 명 경태(景泰) 5년
사헌부에서 제사에서 기녀를 불러 회음한 죄를 추핵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대궐 안에 있는 제사(諸司)에서 기녀(妓女)를 불러 회음(會飮)한 죄를 추핵(推劾)하고 조율(照律)하여 아뢰기를,
"상의원 제거(尙衣院提擧) 김중렴(金仲廉)·진무(鎭撫) 이행검(李行儉)은 그 죄율이 응당 장(杖) 1백 대에 처하여야 하고, 상의원 제거(尙衣院提擧) 정흥손(鄭興孫)·안치강(安致康)·매우(梅佑)·별좌(別坐) 박대손(朴大孫)·김숙(金潚)과 호조 좌랑(戶曹佐郞) 권온(權溫)과 주자소 별좌(鑄字所別坐) 최윤중(崔允中)·김영전(金永湔)·임숙(任淑)·노삼(魯參), 진무(鎭撫) 노호(盧晧)·박훤(朴萱)·권숭지(權崇智)·유맹돈(柳孟敦)·권윤인(權允仁)·유혜(柳繐)·박공신(朴恭信)·이항전(李恒全)·지혼(池渾)·나치정(羅致貞)·정윤신(鄭允信)·이계중(李繼重)·정인충(鄭仁忠)·민순(閔諄)·조수무(趙秀武)는 장(杖) 90대에 처하여야 하고, 관습 도감 부사(慣習都監副使) 김자안(金自安)·예조 좌랑(禮曹佐郞) 정문형(鄭文炯)·주서(注書) 권윤(權綸)은 장(杖)은 80대에 처하여야 하며,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하위지(河緯地)·직제학(直提學) 강희안(姜希顔)·이석형(李石亨)·이개(李塏), 직전(直殿) 유성원(柳誠源)·양성지(梁誠之), 응교(應敎) 이예(李芮), 교리(校理) 이극감(李克堪), 수찬(修撰) 이파(李坡)·최선복(崔善復)·박기년(朴耆年)·김수령(金壽寧)·심신(沈愼), 박사(博士) 노사신(盧思愼)·성간(成侃), 춘추관 겸관(春秋館兼官) 이조 정랑(吏曹正郞) 조근(趙瑾)과 성균직강(成均直講) 이함장(李諴長)·주부(注簿) 김명중(金命中)·교서 교리(校書校理) 성희(成熺)·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 이유의(李由義)·훈련 주부(訓鍊注簿) 유자문(柳子文)·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 강미수(姜眉壽)·공조 좌랑(工曹佐郞) 이익(李翊)·성균 주부(成均注簿) 박찬조(朴纘祖)·봉교(奉敎) 윤자영(尹子濚), 대교(待敎) 이제림(李悌林)·최한보(崔漢輔), 검열(檢閱)·권이경(權以經)·김겸광(金謙光), 감찰(監察) 안중후(安重厚)·민규(閔奎) 등은, 청컨대, 조율(照律)하여 시행하게 하시고,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계전(李季甸)은 성상께서 재탁(裁度)하시어 시행하소서."
하니, 이를 정부(政府)에 내려 논의하게 하였다. 정부에서 논의하여 아뢰기를,
"김자안(金自安)·정문형(鄭文炯)·민순(閔諄)·노삼(魯參)·김영전(金永湔)·정인충(鄭仁忠)·이계중(李繼重)·나치정(羅致貞)·지혼(池渾)·이항전(李恒全)·박공신(朴恭信)·권윤인(權允仁)·유맹돈(柳孟敦)·권숭지(權崇智)·매우(梅佑)·김숙(金潚)·안치강(安致康)·정흥손(鄭興孫)·권온(權溫) 등은 각각 태(笞) 30대에 속전(贖錢)을 거두고, 최윤중(崔允中)·김중렴(金仲廉) 등은 각각 태(笞) 40대에 속전(贖錢)을 거두며, 권윤(權綸)·임숙(任淑)·조수무(趙秀武)·정윤신(鄭允信)·노호(盧皓)·유혜(柳繐)·박대손(朴大孫)·이행검(李行儉)·박훤(朴萱) 등은 공신(功臣)의 후손이니, 모두 논하지 말게 하고 집현전(集賢殿)·춘추관(春秋館)의 관원과 이계전(李季甸)도 논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4책 11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6책 691면
【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탄핵(彈劾)
33.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9월 2일 갑술 1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병조 판서 이계전 등에게 명하여 관제를 편찬하게 하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계전(李季甸), 우찬성(右贊成) 정창손(鄭昌孫), 예문 제학(藝文提學) 박팽년(朴彭年), 예조 참판(禮曹參判) 하위지(河緯地),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김예몽(金禮蒙)·송처관(宋處寬), 직제학(直提學) 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 직집현전(直集賢殿) 이승소(李承召), 응교(應敎) 서거정(徐居正), 수찬(修撰) 심신(沈愼)·김수령(金壽寧), 부수찬(副修撰) 정효상(鄭孝常)·성간(成侃)에게 명하여 관제(官制)를 편찬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7책 84면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출판-서책(書冊)
34.세조실록 3권, 세조 2년 2월 4일 계묘 1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정창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창손(鄭昌孫)을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겸판이조사(兼判吏曹事)로, 이계전(李季甸)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겸판병조사(兼判兵曹事)로, 강맹경(姜孟卿)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황수신(黃守信)을 우참찬(右參贊)으로, 권남(權擥)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김하(金何)를 예조 판서로, 신숙주(申叔舟)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박중손(朴仲孫)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어효첨(魚孝瞻)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우효강(禹孝剛)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이보정(李補丁)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송처관(宋處寬)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이개(李塏)를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8장 B면【국편영인본】 7책 113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35.세조실록 3권, 세조 2년 2월 14일 계축 1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경연에서 《통감속편절요》의 여이간의 사건을 강론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가 《통감속편절요(通鑑續編節要)》를 강(講)하다가 여이간(呂夷簡)의 사건에 이르러 묻기를,
"여이간은 어떤 사람이냐?"
하니, 시강관(侍講官) 이개(李塏)가 대답하기를,
"현상(賢相)은 아닙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7책 114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출판-서책(書冊)
36.세조실록 3권, 세조 2년 4월 15일 갑인 2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경회루에서 진법과 사서 오경을 강하게 하다. 이징석의 활솜씨를 칭찬하다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나아가서 활 쏘는 것을 구경하니, 종친(宗親)·재추(宰樞)·승지(承旨)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재추(宰樞)로서 무재(武才)가 있는 자 이징석(李澄石)·윤암(尹巖)·박강(朴薑)·유응부(兪應孚)·이수의(李守義)·홍윤성(洪允成)·박거겸(朴居謙)·민발(閔發) 등과 내금위 겸사복관(內禁衛兼司僕官) 등을 뽑아 과녁을 쏘아 승부(勝負)를 겨루게 하고, 또 습진 훈도(習陣訓導)를 불러 진법(陣法)을 강(講)하게 하며, 집현전(集賢殿) 관원은 《사서(四書)》·《오경(五經)》을 강(講)하게 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이개(李塏), 직제학(直提學) 양성지(梁誠之)에게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은 제신(諸臣)으로 하여금 술을 올리게 하려 하였으나, 그러나 그 수가 많으니 형세가 그렇게 할 수 없구나. 집현전(集賢殿)·겸사복관(兼司僕官)의 하위(下位)에 있는 자 1인으로 하여금 술을 올리게 한다면 이것은 군신(群臣)이 모두 술을 올린 것과 같은 것이다."
하고, 임금이 집현관(集賢官)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사람은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고 유자(儒者)는 일찍이 학문(學問)하여 의리(義理)를 알고 있으므로, 그 마음은 사람 중에서도 가장 영특하다."
하고, 인하여 정창손(鄭昌孫)에게 이르기를,
"앵무(鸚鵡)는 말을 잘하되 나는 새[鳥]에 틀림없고, 성성(猩猩)이도 말을 잘하되 금수(禽獸)를 떠날 수 없다. 범인(凡人)은 오히려 그 직(職)에 능히 종사하여 그 힘으로 먹는데, 종친(宗親) 같은 이는 부귀(富貴)한 데서 생장하여 이 이치를 알지 못한다. 경(卿)은 이미 종친 제조관(宗親提調官)이 되었으니, 마땅히 항상 이를 효유하라."
하니, 정창손이 즉시 두루 효유하러 종친 자리에 있다가 사관(史官)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상교(上敎)가 지극하니, 모름지기 상세히 써서 후세에 보이게 하시오."
하였다. 임금이 집현관(集賢官)에게 이르기를,
"사람은 마땅히 실학(實學)에 힘써야 하며 실학이 근본이다. 국가는 사장(詞章)을 쓰기에 간절한 까닭으로 부득이 사장을 써서 사람을 취하나, 스스로 하는 도(道)에 있어서는 실학을 버리는 것이 옳지 않다. 오늘 너희들이 경서를 강론함에 창달(暢達)한 자가 있지 않으니, 또한 스스로 부끄러울 것이다. 내 너희들로 하여금 바라는 바에 따라 《사서(四書)》·《오경(五經)》 중 각각 1서(書)를 읽게 하고 내가 때때로 친강(親講)하려고 한다."
하였다. 이징석(李澄石)이 아뢰기를,
"공조 판서 김문기(金文起)·좌참찬 강맹경(姜孟卿)은 비록 선비라 하더라도 사후(射侯)를 잘 합니다."
하고, 청하여 과녁을 쏘게 하였다. 강맹경(姜孟卿)이 연중(連中)하므로 궁시(弓矢)를 내려 준 뒤에, 김문기(金文起)도 연중하니 또 궁시를 내려 주었다. 김문기는 쏜 숫까치[籌]가 강맹경보다 많아서 김문기에도 환도(環刀)를 더 내려 주었다. 이징석은 나이가 70을 넘었는데도 과녁을 쏘는 것이 오히려 건장하니, 임금이 그 활을 취하여 당겨보고 이르기를,
"이 활은 강한데 장군은 늙었어도 더욱 건장하니, 사람을 만날 적마다 오히려 선우(單于)220) 를 참(斬)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구나. 내가 이징석(李澄石)의 형제를 왕돈(王敦)·왕도(王導)221) 를 삼겠노라." 【이징석(李澄石)의 아우 이징옥(李澄玉)은 반역(反逆)으로 복주(伏誅)되었다.】
하고, 명하여 어좌(御座)의 병풍을 거두게 하여, 우의정 이사철(李思哲)에게 내려 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그전에 경(卿)과 더불어 중국 조정에 입조하던 그림[朝天圖]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7책 126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군사-병법(兵法) / 사상-불교(佛敎) / 역사(歷史)
[註 220]선우(單于) : 흉노(凶奴) 추장의 칭호.
[註 221]왕돈(王敦)·왕도(王導) : 진(晉)나라 원제(元帝) 때 사람. 두 사람 다 공(功)이 있었는데, 왕도의 종형(從兄) 왕돈이 공을 믿고 전횡(專橫)하다가 마침내 무창(武昌)의 난(亂)을 일으키니, 왕도가 명제(明帝)를 도와 이를 평정하였음
37.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5월 21일 기축 3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경연에서 양성지가 밤에 공신들과 연회하는 것이 불가함을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가니, 시독관(侍讀官) 양성지(梁誠之)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대신(大臣)들을 우대하여 여러 번 그 집으로 행차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밤중에 민가 사이를 세자(世子)의 훈신(勳臣)과 함께 행차하시니, 신은 불가하게 여깁니다. 숙위(宿衛)하는 금병(禁兵)에게도 일시 술을 내리지 마시고, 변진(邊鎭)의 군사들에게도 명일(名日)에 연회하고 술 마시는 것을 금하시며, 의창(義倉)에 저장하여 〈흉년에〉 대비한 곡식은 다시 해조(該曹)로 하여금 곡진하게 조치하게 하시며, 도성(都城)과 모든 진성(鎭城)에는 아울러 옹성(擁城)292) 을 쌓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신(功臣)들과 밤에 연회하는 것이 무슨 해가 되겠는가?"
하였다. 좌승지 구치관(具致寬)이 아뢰기를,
"신도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또한 아뢰려고 하였는데, 양성지의 말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강(講)이 끝난 뒤에 부 검토관(副檢討官) 임원준(任元濬)이 집현전(集賢殿)으로 물러나와 그 말을 하니, 이개(李塏)가 그 말을 듣고 박기년(朴耆年)에게 눈짓을 하면서 말하기를,
"양공(梁公)은 경제(經濟)의 재사(才士)라고 하더니, 참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구나."
하자, 박기년도 즉시 눈짓을 하면서 입술을 비쭉거렸다. 대개 그들의 간악한 음모를 알아맞힌 것을 미워해서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7장 A면【국편영인본】 7책 132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관방(關防) / 재정-창고(倉庫) / 재정-국용(國用) / 정론(政論)
[註 292]옹성(擁城) : 큰 성(城)의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밖에 원형이나 방형(方形)으로 쌓는 작은 성
38.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2일 경자 2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성균 사예 김질과 우찬성 정창손이 성삼문의 불궤를 고하다
성균 사예(成均司藝) 김질(金礩)이 그 장인인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정창손(鄭昌孫)과 더불어 청하기를,
"비밀히 아뢸 것이 있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서 인견(引見)하였다. 김질이 아뢰기를,
"좌부승지(左副承旨) 성삼문(成三問)이 사람을 시켜서 신을 보자고 청하기에 신이 그 집에 갔더니, 성삼문이 한담을 하다가 말하기를, ‘근일에 혜성(彗星)이 나타나고, 사옹방(司饔房)의 시루가 저절로 울었다니, 장차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과연 앞으로 무슨 일이 있기 때문일까?’ 하였습니다. 성삼문이 또 말하기를, ‘근일에 상왕(上王)이 창덕궁(昌德宮)의 북쪽 담장 문을 열고 이유(李瑜)306) 의 구가(舊家)에 왕래하시는데, 이것은 반드시 한명회(韓明澮) 등의 헌책(獻策)에 의한 것이리라.’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그 자세한 것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상왕(上王)을 좁은 곳에다 두고, 한두 사람의 역사(力士)를 시켜 담을 넘어 들어가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윽고 또 말하기를, ‘상왕(上王)과 세자(世子)는 모두 어린 임금이다. 만약 왕위에 오르기를 다투게 된다면 상왕을 보필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모름지기 그대의 장인[婦翁]을 타일러 보라.’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그럴 리가 만무하겠지만, 가령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장인이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좌의정(左議政)307) 은 북경(北京)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우의정(右議政)308) 은 본래부터 결단성이 없으니, 윤사로(尹師路)·신숙주(申叔舟)·권남(權擥)·한명회(韓明澮) 같은 무리를 먼저 제거해야 마땅하다. 그대의 장인은 사람들이 다 정직하다고 하니, 이러한 때에 창의(唱義)하여 상왕(上王)을 다시 세운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그러나 죽어야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처음에 더불어 말할 때에는 성삼문은 본래 언사(言辭)가 너무 높은 사람이므로, 이 말도 역시 우연히 하는 말로 여겼는데, 이 말을 듣고 나서는 놀랍고도 의심스러워서 다그쳐 묻기를, ‘역시 그대의 뜻과 같은 사람이 또 있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도 알고 있다.’ 하였습니다."
하니, 명하여 숙위(宿衛)하는 군사들을 집합시키게 하고, 급하게 승지(承旨)들을 불렀다. 도승지 박원형(朴元亨)·우부승지 조석문(曹錫文)·동부승지 윤자운(尹子雲)과 성삼문(成三問)이 입시(入侍)하였다. 내금위(內禁衛) 조방림(趙邦霖)에게 명하여 성삼문을 잡아 끌어내어 꿇어앉힌 다음에 묻기를,
"네가 김질과 무슨 일을 의논했느냐?"
하니, 성삼문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참 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청컨대 김질과 면질(面質)하고서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김질에게 명하여 그와 말하게 하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삼문이 말하기를,
"다 말하지 말라."
하고서 이어 말하기를,
"김질이 말한 것이 대체로 같지만, 그 곡절은 사실과 다릅니다."
하였다. 임금이 성삼문에게 이르기를,
"네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혜성(彗星)이 나타났기에 신은 참소(讒訴)하는 사람이 나올까 염려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그를 결박하게 하고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내가 네 마음을 들여다보기를 폐간(肺肝)을 보는 듯이 하고 있으니, 사실을 소상하게 말하라."
하고, 명하여 그에게 곤장을 치게 하였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신은 그 밖에 다른 뜻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같이 공모한 자를 물었으나 성삼문은 말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나를 안 지가 가장 오래 되었고, 나도 또한 너를 대접함이 극히 후하였다. 지금 네가 비록 그 같은 일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내 이미 친히 묻는 것이니, 네가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네 죄의 경중(輕重)도 역시 나에게 달려 있다."
하니, 대답하기를,
"진실로 상교(上敎)와 같습니다. 신은 벌써 대죄(大罪)를 범하였으니, 어찌 감히 숨김이 있겠습니까? 신은 실상 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과 같이 공모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들뿐만이 아닐 것이니, 네가 모조리 말함이 옳을 것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유응부(兪應孚)와 박쟁(朴崝)도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명하여 하위지를 잡아들이게 하고 묻기를,
"성삼문이 너와 함께 무슨 일을 의논하였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기억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변(星變)의 일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전날 승정원(承政院)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변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변의 일로 인하여 불궤(不軌)한 일을 같이 공모했느냐?"
하였으나, 하위지는 말하지 아니하였다. 또 이개에게 묻기를,
"너는 나의 옛 친구였으니, 참으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네가 모조리 말하라."
하니, 이개는 말하기를,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즉시 엄한 형벌을 가하여 국문(鞫問)함이 마땅하나, 유사(有司)가 있으니, 그들을 의금부에 하옥하라."
하고, 여러 죄수가 나간 다음에 임금이 말하기를,
"전일에 이유(李瑜)의 집 정자를 상왕(上王)께 바치려고 할 때에 성삼문이 나에게 이르기를, ‘상왕께서 이곳에 왕래하게 되신다면 참소하고 이간질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기에 내가 경박하다고 여기었더니 지금 과연 이와 같구나."
하였다. 임금이 윤자운(尹子雲)을 노산군(魯山君)에게 보내어 고하기를,
"성삼문은 심술이 좋지 못하지만, 그러나 학문을 조금 알기 때문에 그를 정원(政院)에 두었는데, 근일에 일에 실수가 많으므로 예방(禮房)에서 공방(工房)으로 개임(改任)하였더니, 마음으로 원망을 품고 말을 만들어내어 말하기를, ‘성왕께서 이유(李瑜)의 집에 왕래하는 것은 반드시 가만히 불측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하고, 인하여 대신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이제 방금 그를 국문(鞫問)하는 참입니다."
하니, 노산군이 명하여 윤자운에게 술을 먹이게 하였다. 공조 참의(工曹參議) 이휘(李徽)는 사실이 발각되었다는 말을 듣고, 정원(政院)에 나와서 아뢰기를,
"신이 전일에 성삼문의 집에 갔더니, 마침 권자신(權自愼)·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자네는 시사(時事)를 알고 있는가?’ 하고 묻기에, 신이 ‘내가 어찌 알겠나?’ 하였더니, 성삼문이 좌중을 눈짓하면서 말하기를, ‘자네가 잘 생각하여 보게나. 어찌 모르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묻기를, ‘그 의논을 아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였더니, 성삼문이 대답하기를, ‘박중림(朴仲林)과 박쟁(朴崝) 등도 역시 알고 있다.’ 하기에, 신이 곧 먼저 나와서 즉시 아뢰고자 하였으나,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히 즉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으로 나아가서 이휘를 인견하고, 다시 성삼문 등을 끌어들이고, 또 박팽년 등을 잡아와서 친히 국문하였다. 박팽년에게 곤장을 쳐서 당여(黨與)를 물으니, 박팽년이 대답하기를,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이개(李塏)·김문기(金文起)·성승(成勝)·박쟁(朴崝)·유응부(兪應孚)·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와 신의 아비였습니다."
하였다. 다시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의 아비까지도 숨기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을 대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 시행하려던 방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성승·유응부·박쟁이 모두 별운검(別雲劍)309) 이 되었으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 시기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제 연회에 그 일을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장소가 좁다 하여 운검(雲劍)을 없앤 까닭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대개 어전(御殿)에서는 2품 이상인 무반(武班) 2명이 큰 칼을 차고 좌우에 시립(侍立)하게 되어 있다. 이날 임금이 노산군과 함께 대전에 나가게 되고, 성승·유응부·박쟁 등이 별운검(別雲劍)이 되었는데, 임금이 전내(殿內)가 좁다고 하여 별운검을 없애라고 명하였다. 성삼문이 정원(政院)에 건의하여 없앨 수 없다고 아뢰었으나 임금이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다시 전내(殿內)를 살펴보게 하고, 드디어 〈별운검이〉 들어가지 말게 하였다.】 후일에 관가(觀稼)310) 할 때 노상(路上)에서 거사(擧事)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개에게 곤장을 치고 물으니, 박팽년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머지 사람들도 다 공초(供招)에 승복(承服)하였으나, 오직 김문기(金文起)만이 〈공초(供招)에〉 불복(不服)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모두 하옥하라고 명하였다. 도승지 박원형(朴元亨)·좌참찬 강맹경(姜孟卿)·좌찬성 윤사로(尹師路)·병조 판서 신숙주(申叔舟)·형조 판서 박중손(朴仲孫) 등에게 명하여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호조 판서 이인손(李仁孫)·이조 참판 어효첨(魚孝瞻)과 대간(臺諫) 등과 함께 같이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유성원(柳誠源)은 집에 있다가 일이 발각된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7책 134면
【분류】
변란-정변(政變) / 사법-재판(裁判) / 과학-천기(天氣) / 왕실(王室)
[註 306]이유(李瑜) : 금성 대군(錦城大君).
[註 307]좌의정(左議政) : 한확(韓確).
[註 308]우의정(右議政) : 이사철(李思哲).
[註 309]별운검(別雲劍) : 운검(雲劍)을 차고 임금을 옆에서 모시던 무관(武官)의 임시 벼슬.
[註 310]관가(觀稼) : 임금이 농작물의 작황(作況)을 돌아보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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