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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4월 24일 신해 5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하위지가 자신에게 가자한 일의 부당함을 이유로 사직하다
우승지(右承旨) 노숙동(盧叔仝)이 경연(經筵)의 주강(晝講)에서 세조(世祖)의 말을 가지고 아뢰니, 임금이 집의(執義) 하위지(河緯地)와 지평(持平) 유성원(柳誠源)을 부르도록 명령하였는데 유성원이 먼저 이르니, 세조의 말을 전하고 또 말하기를,
"종사관(從事官)에게 자품(資品)을 더하여 주는 것은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아뢰었기 때문이 아니고, 내가 만리의 먼 길을 무사히 따라갔다가 돌아왔기 때문에 기뻐서 자품을 더하여 준 것이다."
하였다. 하위지가 뒤따라 이르러 아뢰기를,
"비록 전례(前例)가 있다 하지만 종친이 아뢰어서 자품(資品)을 올려 주었고, 또 공로도 없으니, 청컨대, 이 명령을 거두소서."
하니, 전지하기를,
"이미 대신과 더불어 의논하여서 한 것이니 다시 고칠 수 없다."
하였다. 하위지가 물러가서 또 소장(疏章)을 올리어 사직(辭職)하면서 말하기를,
"신은 종친이 아뢰었기 때문에 가자(加資)를 특별히 받았으니, 대체에 어그러짐이 있는 까닭에 소장을 올리어 사면(辭免)하기를 빌었는데, 곧 명하여 출사(出仕)하게 하셨으나, 그러나 헌사(憲司)는 보통 관원의 예가 아니니 뻔뻔스러운 얼굴로 직사에 나아가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헌부(憲府)는 본래 규탄(糾彈)하는 곳이니, 자신의 몸이 바른 다음에야 다른 사람을 바로잡을 수가 있습니다. 종친의 아룀 때문에 부당한 직을 받았으니, 신이 비록 죄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감히 직사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니 의정부에 내려서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6책 583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28.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5월 1일 정사 3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도청의 존재에 관하여 이예장·유성원이 의논하다
사인(舍人) 이예장(李禮長)이 당상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정부(政府) 당상에서 다른 사무를 감독하여 맡아 보는 것은 오로지 지금뿐만 아니라, 세종조(世宗朝)에는 영의정(領議政) 유정현(柳廷顯)이 경시서(京市署)·의금부(義禁府)의 도제조(都提調)가 되어 항상 그 관사에 출근하였고, 의정(議政) 노한(盧閈)은 또 의금부(義禁府)의 도제조(都提調)가 되었으며, 문종(文宗)께서는 영의정 황보인(皇甫仁)에게 명하여 군기감(軍器監)의 일을 감독하게 하였습니다. 그 때 정부에서 아뢰기를, ‘대신들이 제사(諸司)에 출근하여 세세한 일들을 친히 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니 문종께서 명하시기를, ‘경이 군기감(軍器監)의 일을 감독하는 것은 정부에서는 불가하다고 말하나, 병기(兵器)는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이니, 때때로 군기감에 출근하여 이를 감독하라.’ 하였습니다. 마정(馬政)도 또한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우의정(右議政) 김종서(金宗瑞)가 정승(政丞)이 되었지만 인하여 사복시의 일을 감독하였습니다. 더구나, 금상께서는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서 세세한 정사를 친히 보시지 아니하였는데, 비록 ‘정부(政府)에서도 도를 논하고, 〈음양을〉 섭리(燮理)335) 한다.’고 하면서 다만 앉아서 식록(食祿)만을 허비하고 서무(庶務)를 돌아보지 않으며, 그들이 스스로 하는 대로 들어 준다면 일이 반드시 허소(虛疏)하여질 것입니다. 도청(都廳)336) 의 칭호는 국가에서 이름 지은 것이 아니며, 공역(工役)하는 장소를 좌우로 나누어서 그 가운데 있으면서 역사를 감독하는 곳이므로 저절로 이를 도청(都廳)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파(罷)한다면 도청(都廳)의 이름도 또한 따라서 파해질 것입니다. 전순의(全循義)의 일은 전날 의논하기를 다하였습니다."
하고, 좌참찬 허후(許詡)가 혼자 말하기를,
"지금 헌부의 상소를 보니, 너무 적절(適切)하여 채택할 만합니다. 신은 의논할 수가 없으니, 성사의 마음으로 재량하여 헤아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즉위한 처음이니 헌부(憲府)의 말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전지(傳旨)하기를,
"창덕궁(昌德宮)을 감독하는 일은 마땅히 정부의 의논에 따르겠다. 전순의(全循義)의 일은 헌부(憲府)의 말을 따르고자 하니, 다시 의논하여서 아뢰어라."
하였다. 사인(舍人) 이예장(李禮長)이 당상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전순의로 하여금 내의원(內醫院)337) 에 출사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지평(地平) 유성원(柳誠源)을 불러서 정부에서 아뢴 바와 같이 전지(傳旨)하니, 유성원이 다시 아뢰기를,
"만약 공역(工役)이 중요한 일이어서 이를 대신들에게 맡긴다면 정부 대신들이 회좌(會坐)338) 하여 보살피되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요, 한두 의정 대신(議政大臣)에게 따로 명하여서 이를 감독하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오로지 대체에 어그러짐이 있을 뿐만 아니라 대신들을 존대하고 예우(禮遇)하는 도리에는 어떠하겠습니까? 또 도청이 비록 나라에서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고 하나, 군인들의 양료(糧料)와 소금과 장(醬)은 모두 여기에 모아서 오로지 출납(出納)을 맡아 보며, 이어서 인신(印信)을 주고 늘 설치하며 혁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을 맡은 자들이 다투어 일을 일으키고자 하여서 ‘아무 곳은 마땅히 수보(修補)하여야 한다. 아무 곳은 마땅히 새로 지어야 한다.’ 하고, 비록 긴요하지 않은 곳도 모두 공사를 일으켜서 그 직임을 공고하게 하려고 하니, 공역이 어느 때에 그치겠습니까? 신 등은 생각건대, 군인은 병조(兵曹)에서 이를 주관하고 재목은 공조에서 주관하여, 부득이 일으켜야 할 역사(役事)가 있다면 그 많고 적은 수를 헤아려서 이들에게 주며, 양식과 간장에 이르러서도 모두 해당 관사에서 각각 받으며, 도청(都廳)에서는 다만 그 역사에 이바지하게 하면 공역의 번거로움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나라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신 등이 직책(職責)이 언사(言司)339) 에 있기 때문에 이를 아뢰는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큰 일이 있으면 모의(謀議)를 경(卿)·사(士)·서인(庶人)에까지 하였으니, 이제 만약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물으신다면 반드시 모두 불가하다고 할 것입니다. 또 근래 백성들의 힘이 지쳐서 다하였고, 또 농사철을 당하였으니, 인정전(仁政殿) 수문(水門)의 역사를 잠시 가을 추수 때까지 기다려도 또한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정부에 내려서 의논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6책 585면
【분류】
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왕실-국왕(國王) / 의약(醫藥) / 건설(建設) / 군사(軍事) / 역사(歷史) / 행정(行政)
[註 335]
섭리(燮理) : 나라의 정승이 음양(陰陽)의 조화(調和)를 고르게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지 않던 일.
[註 336]
도청(都廳) : 나라의 정부(政府)에서 역사를 직접 감독하던 관청을 말함.
[註 337]
내의원(內醫院) : 조선조 때 궁중의 의약을 맡아 보던 관청.
[註 338]
회좌(會坐) : 관원들이 한 곳에 모여 앉아 중요한 일을 의논함. 이때 가장 관계(官階)가 높은 사람은 동쪽에, 그 다음은 서쪽, 나머지는 남쪽에 앉았음. 교좌(交坐)·회좌례(會坐禮).
[註 339]
언사(言司) : 임금에게 정책을 말하는 관사. 곧 대간(臺諫).
29.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5월 7일 계해 1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유성원이 분선공감을 혁파하고 대신이 감독하지 않을 것을 청하다
지평(持平) 유성원(柳誠源)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지난번에 신 등이 분선공감(分繕工監)347) 을 혁파하여서 정부 대신으로 하여금 토목의 역사를 거느리지 말게 하도록 청하니, 성상께서 하교(下敎)하여 이르시기를, ‘창덕궁(昌德宮)의 역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곧 정지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신 등은 명(命)을 듣고 이를 생각하건대, 지금 그만두지 않는다면 후일에는 더욱 본받아서 폐단이 다시 전과 같아질 것입니다. 또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감독하여 거느리게 하는 것은 그 일을 빨리 이루고자 함이나 선공감(繕工監)과 제조(提調)가 있으니, 반드시 따로 분선공감(分繕工監)을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부로 하여금 이를 거느리게 하니 공역을 쉽게 일으키는 것이 여기에서 비롯되지 아니하는 것이 없습니다. 분선공감(分繕工監)에서 전곡(錢轂)을 많이 저축하고 병졸(兵卒)을 역사시켜 오로지 마음대로 조종(操縱)하니, 자못 모람(冒濫)된 일이 있습니다. 대저 토목의 역사는 천(賤)한 것이므로, 비록 낮은 관리라고 하더라도 또한 하려고 하지 않는 바인데, 하물며 대신이겠습니까? 옛날에는 대신이 전곡(錢穀)의 일을 알지 못하였고, 심지어 옥사(獄事)를 결단하는 일까지도 오히려 또한 알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대신으로서 감독하여 거느리게 하니, 그것이 조정(朝庭)의 대체 같은 것에 어떠하겠습니까? 옛날 환관(宦官) 김사행(金師幸)이 태조를 섬겨 총애를 얻어 관직이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에 이르렀는데, 그때에 그를 ‘광대 부사(廣大府事)’라고 불렀습니다. 창업(創業)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민력(民力)이 지쳐서 피로하였으나, 토목의 역사를 수창(首唱)하여 흥천사(興天寺)의 한 절을 영조(營造)하는 데 지나치게 사치하니, 당시의 여론이 있었습니다. 무인년348) 에 태종께서 간신(姦臣)을 주멸하고, 이어서 말씀하기를, ‘김사행(金師幸)이 만약 살아 있는다면 장차 민폐(民弊)가 될 것이다.’ 하고, 아울러 주살(誅殺)하였습니다. 방패(防牌)·육십(六十) 등으로서 일찍이 역사에 시달리던 자들이 도끼로써 김사행의 목을 찍으면서 말하기를, ‘아무 집[屋]이 무너졌는데, 어찌 일어나서 다시 수리하지 않는가? 아무 집이 무너졌는데 어찌 일어나서 다시 짓지 않는가?’ 하였으니, 이것은 심히 참혹한 일이었습니다. 태종 때에 박자청(朴子靑)은 육십(六十)에서 몸을 일으켜 재상에 이르렀는데, 시종 토목의 역사를 맡았으나, 일찍이 조정의 정사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니, 박자청은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세종조(世宗朝)에 이르러는 안순(安純)이 대신으로서 영선(營繕)을 감독하였는데, 이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빌건대 분선공감(分繕工監)을 혁파하시고 대신으로 하여금 감독하여 다스리지 말게 하여서 그 체통을 높이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이승윤(李承胤)을 사간원 우헌납(司諫院右獻納)으로 삼았는데, 이승윤은 찬성(贊成) 이양(李穰)의 아들입니다. 그윽이 보건대, 송(宋)나라 때 대신의 아들은 대간(臺諫)·경연(經筵)·한림(翰林)과 같은 모든 근시(近侍)의 관직에 제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어찌 까닭이 없었겠습니까? 지금 성상께서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정치를 대신이 합니다. 대신이 잘못하면 대간(臺諫)에서 논박하여 의논하는데, 만약 대신의 아들이 대간의 자리에 있다면, 아들이 감히 그 아비를 탄핵 하겠습니까? 또 윤사윤(尹士昀)은 봉렬 대부(奉列大夫)349) 로서 수 군자 정(守軍資正)이 되었으나 상 줄만한 공로도 없는데 초자(超資)하여 3품의 직사(職事)에 임명하였으니, 청컨대 모두 이를 고치소서."
하였다. 유성원과 경연관(經筵官)이 모두 물러가니, 참찬관(參贊官) 노숙동(盧叔仝)·지경연사(知經筵事) 이사철(李思哲)이 머물러서 품지(稟旨)350) 를 의논하고 나가서 정부에 전지(傳旨)하여 이를 의논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6책 587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건설-토목(土木)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역(軍役) / 정론(政論)
[註 347]
분선공감(分繕工監) : 선공감의 분사(分司).
[註 348]
무인년 : 1398 태조 7년.
[註 349]
봉렬 대부(奉列大夫) : 정4품의 문관 품계.
[註 350]
품지(稟旨) : 임금께 아뢰어 교지(敎旨)를 받던 일.
30.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5월 9일 을축 1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하위지의 인견 여부를 의논하다
지평(持平) 유성원(柳誠源)이 본부(本府)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전날 하위지(河緯地)가 사면(辭免)하였으나 윤허(允許)하시지 않았으므로 면대(面對)376) 하기를 청하니, ‘내가 장차 인견하겠다.’고 하시었으나, 끝내 인견하시지 않고 갑자기 그 직(職)을 바꾸니,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비록 미관(微官)이라 하더라도 면대(面對)하기를 계청(啓請)하면 오히려 접견하는 것이 옳은데, 하물며 언관이 품은 생각을 아뢰고자 하는데도 인견하지 않으시고 갑자기 그 직(職)을 옮기게 하시니, 의리에 어떠하겠습니까? 또 책방(冊房)은 본래 주자소(鑄字所)의 분사인데, 이것은 용관(冗官)377) 이기 때문에 선왕께서도 또한 이를 파하고자 하시었습니다. 이제 의정부(議政府)·승정원(承政院)에서 아울러 혁파(革罷)하도록 청하니, 이를 따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수문의 역사(役事)는 성상께서 하교하여 이르시기를, ‘공역(功役)이 이미 반이나 되었으니, 중지할 수가 없다.’고 하시었으나, 신 등이 듣기로는 이제 겨우 역사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농사철을 당하여 하루가 1년과 맞먹는데, 하물며 창덕궁(昌德宮)과 함께 아울러 역사를 일으켰으니, 양식을 가지고 와서 역사를 오랫동안 하면 폐단이 매우 작지 않을 것입니다. 옛사람이 역사를 일으키는데 불가함이 있으면 혹은 이미 재목을 모았다가도 중도에 혁파하였으며, 혹은 이미 지었다가도 철거(撤去)하였으니, 이를 정지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지(傳旨)하기를,
"하위지(河緯地)의 일은 여러 대신들에게 의논하여서 이를 바꾸었다. 이제 너희들이 말하는 바는 나로 하여금 인견하게 하고자 하는 것인가? 또는 그 직책을 도로 주라는 것인가? 책방(冊房)의 일은 너희들의 말은 옳다. 그러나 세종조(世宗朝)에서부터 있었던 것이니, 가볍게 고칠 수가 없다. 수문의 일도 또한 대신들과 숙의하여 하였으니, 혁파할 수가 없다."
하였다. 유성원이 다시 아뢰기를,
"하위지에게 가자(加資)한 것이 의리에 합당하다면 비록 본직(本職)에 있더라도 가할 것이나, 의리에 합당하지 않다면 비록 다른 관직을 제수(除授)하더라도 또한 불가할 것입니다. 신 등은 인견하게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요, 또한 집의(執義)에 도로 제수(除授)하게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부당한 자품(資品)을 고치기를 빌 뿐입니다. 하물며 인주는 한번 찡그리고 한번 웃는 것도 아끼는데, 어찌 가볍게 사람에게 상작(賞爵)하겠습니까? 주자소(鑄字所)는 처음에 대궐 밖에 있었는데, 뒤에 대궐 안에 들인 것은 안팎의 일을 편하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또 따로 책방을 세우시니, 공장과 사령(使令)을 두 곳에 나누어 역사시키므로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수문은 비록 대신들과 더불어 숙의(熟議)하셨다고 하지만, 그러나, 일이 불가하다면 진실로 마땅히 고쳐야 할 것입니다. 지금 백성들의 힘이 지극히 지쳤는데 그 위에 농사일이 바야흐로 일어나니, 청컨대, 모름지기 정지하도록 명하소서."
하고,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정식(鄭軾)도 또한 본원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집의(執義) 하위지(河緯地)가 가자(加資)를 면하도록, 청하여, 혹은 말로써 아뢰기도 하고, 혹은 상소로써 청하기도 하여 거의 나머지 품은 생각이 없을 터인데도 면대(面對)하기를 청하는 것은 반드시 뜻이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만나 보겠다고 허락하시고 나중에는 만나 주시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만약 하위지가 면대(面對)하기를 굳이 청하면서도 아뢰는 바가 모두 전날에 아뢴 사연이라면 무례(無禮)에 관계될 것 같으니, 다스려서 죄를 주는 것이 좋을 것이나, 따로 아뢸 만한 말이 있다면 채택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금세와 후세에서 하위지가 무슨 일을 아뢰고자 하여서 감히 면대(面對)하기를 청하였고, 성상께서 또한 무슨 일로써 끝내 인견하지 않으셨는지를 어찌 말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모름지기 만나 주소서."
하니, 유성원에게 전지(傳旨)하기를,
"하위지와 수문의 일은 마땅히 대신들에게 다시 의논하겠다. 책방(冊房)의 일은 그 내력이 이미 오래 되어 고칠 수가 없다."
하고, 정식에게 전지(傳旨)하기를,
"너희들의 말을 상량(商量)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이어서 의정부에 의논하도록 하니, 사인(舍人) 이예장(李禮長)이 당상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간원(諫院)에서 아뢴 바는 하위지를 인견하는 일인데, 성상께서 마침 연고가 있어서 만나 보시지 않은 것이요, 다른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또 하위지가 사직(辭職)하는 이유를 아뢰고자 한다면, 혹은 글로써나 혹은 말로써 다 아뢰었고 남은 것이 없을 것이요, 밀계(密啓)378) 하고자 한다면, ‘상전 개탁(上前開拆)379) ’의 봉장(封章)380) 으로 족히 상달할 수가 있을 것이요, 대신과 종친(宗親)의 잘못을 아뢰고자 한다면 공공연하게 아뢰어서 그들로 하여금 듣도록 하여서 마음을 움츠리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위지는 지금 그 직책이 경연(經筵)을 띠고 있으니, 경연에서 이를 보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헌부(憲府)에서 아뢴 바는 하위지 등의 가자(加資)한 일인데, 조종조(祖宗朝)에서도 전례(前例)가 분명히 있으며, 또 내리신 명령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수문의 일은 이미 문비(門扉)381) 를 거두었으니 또한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6책 588면
【분류】
재정-역(役)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건설-토목(土木)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군사-관방(關防)
[註 376]
면대(面對) : 신하가 직접 임금을 대하여 아뢰는 것.
[註 377]
용관(冗官) : 쓸데없는 관사.
[註 378]
밀계(密啓) : 임금에게 비밀히 중대사를 아뢰던 것.
[註 379]
상전 개탁(上前開拆) : 신하가 임금에게 극비밀의 중대사를 상소할 때 그 내용을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상소의 겉장에 ‘임금 앞에서만 열어 보라.’는 뜻을 쓰던 일.
[註 380]
봉장(封章) : 봉하여 올리던 상소문.
[註 381]
문비(門扉) : 문짝.
31.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5월 12일 무진 2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우참찬 이사철이 승도들을 모두 승적에 기록하기를 청하다
우참찬(右參贊) 이사철(李思哲)이 아뢰기를,
"전날 경연(經筵)에서 친히 헌부(憲府)가 아뢴 몇 가지 일을 품신(稟申)하였는데, 이미 본부(本府)394) 당상과 더불어 함께 의논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의정(議政)들이 공역을 감독하여 맡아 보는 일은 전자에 영의정(領議政) 황보인(皇甫仁)에게 전지(傳旨)하기를, ‘세종조(世宗朝)에는 무릇 공역의 급하고 급하지 않은 것과 〈공역을〉 일으키고 폐지하는 것을 성단(聖斷)395) 에서 재량하였기 때문에 비록 대신들이 감독하지 않았을지라도 가(可)하였으나, 나는 나이가 어리니, 모두 감히 알 수가 없다. 경은 모름지기 감독하여 맡아 보라.’ 하였습니다. 우의정(右議政) 정분(鄭苯)은 찬성(贊成) 때부터 창덕궁의 역사를 감독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그에게 명하였습니다. 흥인문(興仁門)·수문(水門)의 일은 세종조(世宗朝)에 일찍이 고쳐 짓고자 하여, 심지어 작은 모형[樣子]까지 만들어 보였으나, 이룩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황보인에게 명하여, 모든 성문(城門)의 일을 모조리 다 맡아 보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양 의정(兩議政)이 감독하여 맡아 보았으나, 시공(施工)할 때에는 오직 양 의정뿐만 아니라, 의정부(議政府) 당상이 모두 가서 보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기를, ‘만약 이 역사를 끝마치면 그 밖의 작은 역사는 반드시 감독하여 맡아 볼 것이 없다. 도청(道廳)의 이름은 나라에서 이름지은 것이 아니요, 모든 역사를 감독하는 자들이 좌우로 나누어서 그것을 총괄하여 다스리고 고찰(考察)하는 곳을 ‘도청’이라고 일컫게 된 것이니, 역사를 파한다면 이름도 또한 따라서 없어질 것이다.’ 하였습니다. 헌부에서도 또 생각하기를, ‘분선공감(分繕工監)에서 쌀과 밀가루의 잡물(雜物)을 많이 모우고 그 출납을 맡아 보니, 반드시 그것을 남용(濫用)하려 할 것이다.’ 합니다. 그러나 출납하는 숫자는 명백하게 장부(帳簿)에 기록하여 참고(參考)한다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방패(防牌)는 본래 금군(禁軍)이기 때문에 세종조(世宗朝)에 있어서는 만약 큰 역사(役事)를 일으킨다면 도진무(都鎭撫) 1인에게 명하여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로 삼아서 진무(鎭撫) 1인을 거느리고 역사를 다스리게 하고, 역사가 파하면 도로 거느리고 입번(入番)하게 하였으니, 지금도 또한 진무(鎭撫) 1인이 역사(役事)를 다스리게 하고, 끝나면 도로 거느리고 시위(侍衛)하게 하되, 도청(都廳)에 속하게 하지 마소서.
전순의(全循義)는 재주가 본래 용렬(庸劣)하고, 정상(情狀)이 있지 아니합니다. 만약 하나의 털끝만한 정상이라도 있다면 어찌 전순의를 아끼겠으며, 또 그때 이미 죄를 정하였으니, 추론(追論)하는 것은 불가 합니다. 이승윤(李承胤)은 의안 대군(義安大君)의 손자이므로 세종(世宗)께서 이를 중히 여겨서 일찍이 간원(諫員)을 제수(除授)하고자 하였고, 또 족친(族親)으로서 과거에 급제한 자를 세종께서는 불차(不次)396) 제수(除授)하였습니다. 이제 이승윤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신 등은 진실로 법사(法司)에 제수하도록 아뢰려고 하였습니다. 이제 마침 빈 자리가 있기 때문에 아뢰어서 헌부(憲府)에 제수하여 법사(法司)로 삼아서 정부(政府)의 잘못을 규탄(糾彈)하게 하였는데, 그 아비가 정부(政府)에 있으니, 탄핵(彈劾)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서로 관계되는 일은 스스로 서로 피혐(避嫌)할 것이요, 만약 정부의 자제(子弟)를 혐의(嫌疑)하여서, 법사에 제수하지 않는다면 어느 때에 할 수가 있겠습니까? 송(宋)나라 때에 집정(執政)의 자제(子弟)는 제배(除拜)할 수가 없었는데, 어찌 만세의 법이겠습니까? 헌사(憲司)에서 또 윤사윤(尹士昀)이 봉렬 대부(奉列大夫)397) 로서 뽑혀서 3품의 직사에 제수되었다고 일컬으나, 그러나 윤사윤이 두 번이나 장령(掌令)과 예문직관(藝文直館)에 제수되었고 성균 사예(成均司藝)가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3품에서 천전(遷轉)하는 자리입니다. 이제 수3품(守三品)398) 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중[僧人]을 문적(文籍)에 기록하는 일은 세종조(世宗朝)에 엄하게 그 법을 세웠으나, 이윽고 생각하기를, 중은 곧 동서 남북에서 동냥하는 무리인데, 한 곳에서 관리한다면 생활을 잇대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 하였기 때문에 명하여 문적(文籍)에 기록하는 법을 파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볍게 의논하는 것이 불가하니, 당초에 문적(文籍)에 기록하는 법과 혁파(革罷)하는 근본 원인을 서로 고찰하여 일일이 베껴 오게 한다면 신 등이 의의(擬議)하여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좌참찬(左參贊) 허후(許詡)가 말하기를,
"의정부에서 역사(役事)를 감독하는 일과 도청(都廳)을 혁파(革罷)하는 일은 신이 생각하건대, 마땅히 담당 관사의 청(請)에 따라야 하겠으나, 그러나, 여러 당상이 모두 말하기를, ‘역사(役事)를 끝마치면 그만두겠다.’고 하니, 우선 중의(衆議)에 따르겠습니다."
하고, 이사철(李思哲)도 또 아뢰기를,
"유성원(柳誠源)의 예궐(詣闕)하기를 기다려서 전지(傳旨)하시는 것이 가(可)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예전 법에는 승도(僧徒)가 있는 곳에서 승적(僧籍)에 기록하고, 부득이 하여 멀리 나갈 적에는 노인(路引)399) 을 가지고 갔다가 오게 하였으며, 관진(關津)으로 하여금 모조리 기찰(譏察)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움직이면 제어하는 바가 있어서 감히 함부로 굴지 못하여 금령(禁令)을 범하는 자가 적었습니다. 승적(僧籍)에 기록하는 것을 파(罷)한 이후부터 승도(僧徒)가 관섭(管攝)400) 하는 바가 없으므로 관리들은 감히 검사하여 핵실(覈實)하지 아니하며, 출입하는 것이 스스로 마음대로 하여 비행(非行)을 많이 행합니다. 심지어 도성(都城) 안에 머리 깎은 중들이 어지럽게 다니는데, 그러나, 이것은 특히 조그마한 폐단일 뿐이요, 남의 나라 땅으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난(亂)을 일으키고 일을 일으킨 일도 또한 있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만약에 불우(不虞)의 변(變)이 있어서 또한 〈중들을〉 사용하여 병사로 삼아야 할 때를 당하여 창졸(倉卒)간에 징발하여 모은다면 근거할 만한 승적(僧籍)이 없으므로 더욱 장부에 올려서 그 숫자를 알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예전 법에 의하여 모조리 승적에 기록하여서 시폐(時弊)를 구제하소서."
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아울러 의논하여 아뢰었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6책 590면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관리(管理) / 사법-재판(裁判) / 군사-중앙군(中央軍) / 건설-건축(建築) / 사상-불교(佛敎)
[註 394]
본부(本府) : 의정부(議政府).
[註 395]
성단(聖斷) : 임금의 결단.
[註 396]
불차(不次) : 차례를 무시함.
[註 397]
봉렬 대부(奉列大夫) : 문관 정4품 품계(品階).
[註 398]
수3품(守三品) : 3품보다 낮은 작위의 사람이 3품의 벼슬을 차지하는 것을 말함.
[註 399]
노인(路引) : 먼 곳을 여행하는 사람이 관가에서 발급받아 가지고 가던 여행 증명서.
[註 400]
관섭(管攝) : 겸직(兼職).
32.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5월 15일 신미 2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유성원이 도청의 불가함과 내의 전순의를 벌줄 것을 아뢰다
지평(持平) 유성원(柳誠源)을 불러서 의정부의 의논과 같이 전지(傳旨)하니, 유성원이 다시 아뢰기를,
"윤사윤(尹士昀)의 일은 신 등이 마땅히 다시 상량(商量)하겠습니다. 중[僧人]을 승적(僧籍)에 기록하는 일은 마땅히 문안(文案)을 상고하여 계목(啓目)을 갖추어서 아뢰겠습니다. 다만 지금 정부(政府)에서 무릇 대소의 서무(庶務)를 총섭(總攝)하지 아니함이 없는데, 어찌 오로지 영선(營繕)하는 한 가지 일만을 반드시 양 의정(兩議政)으로 하여금 이를 맡아 보게 하겠습니까? 공조(工曹)에서 영선(營繕)·공역(工役)을 주장(主掌)하고 제조(提調)가 역사를 감독하므로 정부(政府)의 당상은 때때로 그 공과(功過)를 살펴 볼 따름인데, 따로 도청(都廳)을 세워서 한 사람의 관원으로 하여금 그 직임을 오래도록 맡아 보게 하면, 드디어 그 굴혈(窟穴)을 만들어서 많은 불의를 행할 것입니다. 또 분사(分司)403) 한다고 이르는 것도 분예빈시(分禮賓寺)에서는 연향(宴享)의 희생(犧牲)을 맡아 보고, 분전농시(分典農寺)에서는 제사(祭祀)의 자성(粢盛)404) 을 맡아 보는데 겸하여 다스릴 수 없는 일을 가지고 분장(分掌)한다고 일컫는 것입니다. 분선공(分繕工)은 그렇지 않으나 토목의 일은 동일한데 어찌 반드시 따로 세운 뒤에야 이를 능히 하겠습니까? 또 성상께서 하교(下敎)하시기를, ‘전순의(全循義)는 용졸(庸拙)하고, 의술(醫術)에 정(精)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을 뿐이다.’ 하시나, 신 등은 생각하건대, 의술이 용졸하다면 마땅히 요좌(僚佐)405) 에게 널리 의논하고 방서(方書)406) 를 삼가 지켜야 할 터인데도, 전순의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금기(禁忌)하는 것을 피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해로울 것이 없다.’ 하여 마침내 대고(大故)407) 에 이르게 하였으니, 죄는 죽여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전자에 성상께서 원학(元鶴)·노중례(盧重禮)의 일을 이끌어다가 이를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원학(元鶴)의 죄는 시대가 오래되어 상고하기가 어려우나, 노중례의 죄는 신 등이 세종조(世宗朝)에 자세히 들었습니다. 노중례가 여러 날 약(藥)을 시탕(侍蕩)하다가 피곤하여서 잠이 들었는데, 세종께서 두세 번이나 그를 불렀으나 노중례가 즉시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세종께서 공경(恭敬)하는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여서 영사(令史)로 정하였지만, 일찍이 치료(治療)하는 데 잘못하지는 않았습니다. 전순의는 이와 비할 바가 못되니, 그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네 가지나 있습니다. 신 등은 당초에 전순의의 목을 참(斬)하여 신민(臣民)들의 분(憤)을 쾌(快)하게 하기를 원하였는데, 비록 그와 같이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관노(官奴)로 소속시키고 자손들은 폐고(廢錮)408) 시키기를 청합니다. 또 정부에서 정치를 총괄하여 다스리지만 대간(臺諫)에서 그 득실(得失)을 의논하고 반박하는데, 이승윤(李承胤)이 아비의 일을 당하게 되면 비록 스스로 인혐(引嫌)하더라도 동료(同僚)가 그 아비를 탄핵할 때 또한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이니, 청컨대, 이를 고치소서."
하니, 전지(傳旨)하기를,
"마땅히 대신에게 의논하겠다."
하고, 이어서 정부에 전지(傳旨)하기를,
"이승윤의 일은 대간(臺諫)의 청(請)을 따르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아울러 이를 의논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6책 591면
【분류】
사상-불교(佛敎)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재판(裁判) / 인사-관리(管理)
[註 403]
분사(分司) : 관사를 나누어 일을 보는 것.
[註 404]
자성(粢盛) : 나라의 제사에 쓰는 피와 서직(黍稷).
[註 405]
요좌(僚佐) : 옆에 보좌 하는 관원.
[註 406]
방서(方書) : 의서(醫書).
[註 407]
대고(大故) : 임금의 죽음.
[註 408]
폐고(廢錮) :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발탁(박탈)하는 것.
33.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5월 24일 경진 1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지평 유성원이 도청 혁파와 수양 대군의 수종인에게 가자한 일의 부당함 등을 아뢰다
지평(持平) 유성원(柳誠源)이 아뢰기를,
"소상(小祥) 뒤에 관습 도감(慣習都監)으로 하여금 창기(娼妓)를 모아 음악을 연습시키는데 이제 비록 임시로 상복(喪服)을 벗었다고 하나 아직도 3년상 안에 있으니, 상중(喪中)에 음악을 익히는 것은 심히 옳지 못합니다. 만약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정대업(定大業)·보태평(保太平) 등의 음악을 아는 자가 너무 적으므로 오래 폐지하고 익히지 않는다면 혹시 잊어버려서 후세에 전할 자가 없을까 두렵다.’고 한다면, 이것은 크게 옳지 않습니다. 지금 비록 익히지 않더라도 악보(樂譜)가 존속합니다. 문종(文宗)께서 세종(世宗)의 초상(初喪)을 당하여 연제(練祭) 뒤에 음악을 익히도록 하셨으나, 연제(練祭) 뒤에 이르러서도 드디어 폐하고 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전하(殿下)께서 선왕(先王)의 상제(喪制)를 생각지 아니하시고 문종(文宗)의 고사(故事)를 따르지 않으십니까? 또 양 의정(兩議政)의 역사(役事)를 감독하는 일을 없애자고 여러번 청하였으나 윤허를 하지 않으시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나이가 어려서 영선(營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대신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하시나, 신 등이 생각하건대, 지금 정부에서 일의 크고 작은 것이 없이 총섭(摠攝)하지 아니함이 없는데, 어찌 오로지 영선(營繕)하는 한 가지 일만은 특별히 두 의정에게 명하여 그 일을 오로지 맡게 하십니까? 의정이 사양할 수 없는 것은 성상께서 나를 대신하여 감독하고 거느리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에 사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상께서 의정에게 명하신다면 그들이 반드시 사양할 것입니다. 옛날부터 태평한 시대에 어지러움이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토목의 역사를 다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물을 손상시켜서 백성들에게 원망을 샀기 때문이니, 신중하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까? 도청(都廳)은 당초에 한두 사람이 스스로 칭호(稱號)한 것인데, 인하여 크게 번성하여 드디어 분선공감(分繕工監)이라 이름하고 인신(印信)까지 있기에 이르며, 많은 전곡(錢轂)을 저축하고 모든 여러 군졸을 마음대로 출납하니, 자못 범람(汎濫)한 일이 있으며 그 폐단이 작지 아니합니다. 성상께서 비록 ‘이번 역사를 끝마쳤다고 고하면 다시 대신이 감독하고 거느리는 일과 도청(都廳)은 없을 것이다.’ 하시나, 어찌 후일에 공역이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겠습니까? 반드시 이것을 끌어다가 예로 삼을 것이니, 모름지기 금일에 한결같이 모두 정파(停罷)하여서 후일의 폐단을 막으소서.
전순의(全循義)의 일은 당초에 혹은 말로써 아뢰기도 하고, 혹은 글로써 논하여 그 죄가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 네 가지가 있음을 극간(極諫)하니, 성상께서 명하니 내약방(內藥房)에 출사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순의의 죄는 그 한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묘 사직과 국가에 관계가 있으니, 성상께서 만약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를 생각하신다면 거의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사유(赦宥)를 지났으므로 죄를 추론(追論)할 수가 없다.’고 하신다면, 마땅히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고 아울러 처자를 관노(官奴)로 영속(永屬)시켜서 신민들의 소망을 쾌(快)하게 하소서.
수양 대군(首陽大君)의 수종인(隨從人)에게 가자(加資)한 일은 신 등이 처음에 말하기를, ‘대군이 계청(啓請)한 것이라.’ 하여 대군의 아뢴 것을 지적하였으나, 성상께서 하교하여 곧 말씀하시기를, ‘숙부(叔父)가 만 리를 무사히 돌아온 것이 기뻤기 때문에 특별히 수종(隨從)한 사람에게 상을 준 것이며, 숙부가 아뢰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신 등이 생각하건대, 이것이 대군이 아뢴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아뢴 자가 있을 것이니, 그렇게 한 자를 알려고 하는 까닭입니다. 지금 전하(殿下)께서 나이가 어려서 무릇 크고 작은 일을 모조리 아랫사람에게 물으시는데, 어찌 홀로 이 일만은 아랫사람에게 묻지 않으십니까? 이를 아뢴 자가 정원(政院)이 아니면 반드시 대신일 것이요, 대신이 아니면 반드시 이조(吏曹)일 것이니, 진실로 여기에 하나가 있을 것이 당연합니다. 만약 종친(宗親)에게 아부하고 교묘하게 아뢰어서 가자(加資)하였다면 그 죄는 심히 큰 것입니다. 신 등이 간절히 핵문(劾問)하고자 하니, 다만 진실로 환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저하고 감히 아뢰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인신이 비록 만리를 가더라도 그것은 그 직분(職分)이고 당연히 해야 할 것인데, 어찌 상을 주겠습니까? 조충손(趙衷孫)에게 가자(加資)한 일은 만약 의원(醫員)이 병을 치료하여서 효험을 얻었다면 그 의업(醫業)에 정통한 것을 가상히 여겨서 상을 주는 것이 마땅하나, 조충손 같은 자는 한 도(道)의 수령관(首領官)이 되어서 왕자를 구료한 것은 분수 안의 일입니다.
《병요(兵要)》·병서(兵書)는 세종(世宗)께서 이미 찬정(撰定)하여서 문종께서 손수 스스로 산삭(刪削) 윤색(潤色)하였고, 수양 대군도 또한 참여하여 주장하였습니다. 신미년442) 에 이르러 그 책의 초(草)를 쓴 사람을 아울러 모두 가자(加資)하였는데도, 수찬(修撰)한 관원은 이에 참여시키지 않았습니다. 만약 가자하는 것이 마땅하였으면 문종께서 어찌 시행하지 않았겠습니까? 신 등이 그윽이 듣건대,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세 번씩이나 청한 뒤에 〈허락을〉 얻었다니 대저 인주가 군웅(群雄)들을 마음대로 부리고 그들로 하여금 아래에서 분주(奔走)하게 일하도록 하는 것은 오로지 관작(官爵)을 상주는 것 한 가지 일뿐인데 한 번 가볍게 시행하면 장차 어떻게 아랫사람을 쓰고 제어(制御)하겠습니까? 옛날 김사창(金嗣昌)이 승지(承旨) 김유양(金有讓)의 아들이었는데, 감찰(監察)로서 서반(西班)에 옮기니, 대저 감찰은 청요(淸要)의 직이나 서반(西班)은 비천하고 잡된 직인데, 그러나 김사창(金嗣昌)이 서반으로 옮긴 것은 충의위(忠義衛)로서는 으레 5품에 옮기기 때문에 김유양(金有讓)이 전조(銓曹)에 청하여 옮겼던 것입니다. 세종께서 이를 아시고 병방 승지(兵房承旨) 이순지(李純之)를 추국(推鞫)하여 파직(罷職)시키고 그 밖의 전조 당상(銓曹堂上)도 또한 모두 파직시켰다. 또 의창군(義昌君)443) 이 병조(兵曹)에 통서(通書)하여 박위겸(朴撝謙)을 내금위(內禁衛)에 임명하도록 청하였는데, 세종께서 이를 아시고 의창군을 불러서 매우 꾸짖어 파직하였고 박위겸을 깎아 내렸습니다. 내금위 사인(內禁衛舍人) 이예손(李禮孫)이 특별히 조봉 대부(朝奉大夫)444) 에 제수되었을 때 이예손이 수령(守令)을 지내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사양하니, 세종께서 말씀하기를, ‘나는 아직 수령을 지내지 아니하고서 이를 하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하고, 그 자품(資品)을 도로 거두시고, 드디어 이조(吏曹)에 꾸짖기를, ‘당초에 어찌 상량하여 확정하지 아니하고서 아뢰었는가?’ 하였습니다. 세종께서 상작(賞爵)에 존엄하기가 이와 같이 지극하였습니다."
하고, 시독관(侍讀官) 성삼문(成三問)도 또한 아뢰기를,
"옛날 송(宋)나라 때 부필(富弼)445) 이 거란(契丹)에 사신 갔다가 돌아오니 곧 관작(官爵)을 더하여, 상을 주었으나, 부필이 굳이 사양하니, 〈황제가〉 이에 따랐고, 또 사마 온공(司馬溫公)446) 이 관직을 제수받고도 여러 번 사양하여 면직(免職)을 얻었습니다."
하였다. 성삼문·유성원이 사연을 같이하여서 아뢰기를,
"지금 《병요(兵要)》 때문에 가자(加資)된 하위지(河緯地) 등이 여러 번 사면(辭免)하기를 청하니, 대저 관작(官爵)이 승진되는 것은 사람들이 다같이 바라는 바인데도 굳이 사양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어찌 일이 아래에서 나와서 도리상 받기가 부당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청컨대, 아울러 고치소서. 하위지는 한 번 성상께서 직접 만나 주시기를 바랐는데, 성상께서 처음에는 인견(引見)하겠다고 허락하시고 뒤에는 마침내 이를 그만두시니, 대저 인군(人君)의 거동(擧動)은 지극히 중하여, 비록 한 번 찡그리고 한 번 웃는 것도 삼가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또 신(信)이라는 것은 인군의 중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위(魏)나라 문후(文侯)447) 가 우인(虞人)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았는데, 그 우인(虞人)은 미천한 자인데도 문후가 오히려 그 약속을 어기지 않았으니, 문후가 현군(賢君)이 아니라면 오히려 또 이와 같았겠습니까?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이미 언관에게 허락하셨다가 곧 바로 이를 바꾸십니까? 신 등은 중간에서 이를 저지하는 자가 반드시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바로 〈임금의 덕을〉 가리우고 막는 큰 것이며, 인신(人臣)의 죄로서 또한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그 조짐은 장차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이 간절히 핵문(核問)하고자 하나 어느 사람의 소행인지 알지 못하여 감히 하지 못합니다. 책방(冊房)에서 인판 장인(印板匠人)448) 이 있고 장책 서원(粧冊書員)449) 이 있는 등 공장이 많이 있으므로 그 폐단이 매우 번거롭습니다. 처음에 세종께서 불경(佛經)을 장정(粧幀)하고자 하였으나, 외인의 말을 혐의스럽게 여겨 드디어 궐내에 책방(冊房)을 따로 두었던 것은 궐내에 사용하기에 편하게 하려는 때문이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궁방(弓房)450) 도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세종에서 문종에 이르기까지 양조(兩朝) 대신(大臣)과 언관으로서 이를 말하는 자가 많이 있었으므로, 문종께서 이를 혁파하고자 하셨으나 실행하지 못하시고 안가(晏駕)하셨습니다. 청컨대, 모름지기 빨리 혁파하소서. 근래 언관의 논의가 비록 간절하고 정직한데도 전하께서 모두 받아들이지 아니하시니, 대저 거간(拒諫)451) 은 인주의 미덕(美德)이 크게 아닙니다. 고금에서 요(堯) 임금·순(舜) 임금을 성인(聖人)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 종간 불불(從諫弗咈)452) 하였기 때문이여, 걸(桀) 임금·주(紂) 임금을 폭군(暴君)이라고 가리키는 것은 그 거간 식비(拒諫飾非)453)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처음으로 정치를 행하시니, 모든 대소 신민(大小臣民)들이 우러러 쳐다보지 아니함이 없는데, 새 임금의 동정(動靜)이 어떠하다고 하겠습니까? 돌이켜 보건대, 간관(諫官)의 말을 들어 주시지 아니하고 감히 자기 뜻대로 행하시니, 비단 신 등이 함께 분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골목길의 소민들에 이르기까지도 반드시 실망하지 아니함이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모름지기 성상께서 재결(裁決)하소서."
하였다. 동지경연(同知經筵) 이계전(李季甸)도 또한 아뢰기를,
"간관(諫官)의 말이 심히 옳습니다."
하니, 노산군(魯山君)이 권준(權蹲)에게 이르기를,
"전순의(全循義)와 책방(冊房)의 일 이외에는 한결같이 간관(諫官)의 아뢴 대로 따르겠다."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이조 낭청(吏曹郞廳) 김필(金㻶)을 불러서 내린 전지(傳旨)를 가지고 의논하여 이르기를,
"의정부에 고하지 아니하고서 갑자기 선지(宣旨)함은 옳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중지하였다. 이에 정원(政院)과 대신(大臣)들이 서로 내응하여 이를 저지하였는데, 뒤에도 모두 이와 같았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6책 593면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관리(管理) / 왕실-의식(儀式) / 정론-정론(政論) / 사법-재판(裁判) / 사법-탄핵(彈劾) / 공업-관청수공(官廳手工) / 역사-고사(故事) / 의약-의학(醫學) / 예술-음악(音樂)
[註 442]신미년 : 1451 문종 원년.
[註 443]의창군(義昌君) : 세종조 서왕자(庶王子) 이공(李玒).
[註 444]조봉 대부(朝奉大夫) : 정4품 무관 품계.
[註 445]부필(富弼) :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 명신(名臣).
[註 446]사마 온공(司馬溫公) : 사마광(司馬光).
[註 447]위(魏)나라문후(文侯) : 중국 전국(戰國) 시대 위(魏)나라의 제후. 이름은 사(斯).
[註 448]인판 장인(印板匠人) : 인쇄에 판각(板刻)을 새기는 일을 맡아 보던 장인(匠人).
[註 449]장책 서원(粧冊書員) : 인쇄된 책을 장정하여 꾸미던 일을 맡아 보던 서원(書員).
[註 450]궁방(弓房) : 임금이 사용하는 활과 화살을 만들던 관아.
[註 451]거간(拒諫) :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것.
[註 452]종간 불불(從諫弗咈) : 간(諫)하는 말을 따르고 어기지 아니하는 것.
[註 453]거간 식비(拒諫飾非) : 간(諫)하는 말을 거역하고 그 잘못을 거짓으로 꾸며 변명함
34.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5월 25일 신사 1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수양 대군 수종한 자·《병요》를 수찬한 자 등의 가자한 것을 환수하게 하다
공조(工曹)에 전지하기를,
"만약 창덕궁(昌德宮)·흥인문(興仁門)·수문(水門) 등이 역사를 끝마치거든, 모든 영선(營繕)은 선공감(繕工監)으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고, 따로 사람을 임명하여 역사를 감독시키지 말라."
하고, 또 이조·병조에 전지하기를,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북경에 나아갔을 때, 수종(隨從)하였던 사람과 《병요(兵要)》·병서(兵書)를 수찬한 사람들과 조충손(趙衷孫)에게 가자(加資)한 것은 아울러 모두 환수(還收)하도록 하라."
하니, 유성원(柳誠源)이 힘써 간(諫)한 때문이었다. 김종서(金宗瑞)가 이를 듣고 말하기를,
"근일에 가자한 것은 우리들의 아들들이 참여되었기 때문에 이를 말하는 자가 있었으니, 우리들이야 대체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하비(下批)하는 날은 곧 임금의 명이었는데 이제 곧 환수(還收)하는 것은 가벼운 것 같다."
하니, 황보인(皇甫仁)이 매우 싫어하여, 춘추관(春秋館)에 출근하여 김종서에게 이르기를,
"그 아비 유사근(柳士根)도 성미가 급하고 스스로 어진 체하다가 불행하게 단명(短命)하였다. 이제 이 사람도 그 아비를 본받고자 하는 것인가?"
하였다. 이명민(李命敏)이 이 말을 듣고 분개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경복궁(景福宮)을 조성(造成)할 때에는 하륜(河崙)이 제조(提調)가 되었고, 창덕궁(昌德宮) 때에는 이직(李稷)이 제조가 되었는데, 내가 전례(前例)를 두루 상고하여, 상서(上書)하려고 하다가 사람들에게 만류를 당하여 감히 실행하지 못하였다. 저 유성원(柳誠源)은 일개 소유(小儒)인데 겨우 협책(挾冊)454) 을 면하고 집현전(集賢殿)의 관원이 되자 고론(高論)하기를 좋아하나, 국가의 대체를 알지 못하는 자이다. 내가 장령(掌令) 유규(柳規)를 보고 꾸짖으니, 유규가 말하기를, ‘내가 한 짓이 아니다.’ 하였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6책 594면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건설-토목(土木) / 인사-관리(管理) / 정론(政論)
[註 454]
협책(挾冊) : 책을 끼고 다니며 공부하는 것
35.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6월 2일 정해 2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유성원이 분 예빈시 관리들을 치죄할 것과 변효문 서용의 불가함을 아뢰다
지평(持平) 유성원(柳誠源) 등이 본부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신 등이 다시 분예빈시(分禮賓寺)478) 관리들의 죄를 상고하니, 실로 ‘감수자도(監守自盜)479) 의 죄’로 사유문(赦宥文)의 강도(强盜)·절도(竊盜) 밖의 죄입니다. 이 죄(罪)를 절도죄에 두어 사유(赦宥) 전에 있었다고 논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변효문(卞孝文)은 세종조(世宗朝)에 죄를 지어 길이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제 그를 음양학 제조(陰陽學提調)로 삼는 것은 옳지 못하니, 청컨대, 이를 고쳐서 바로잡으소서. 또 전에 이승윤(李承胤)이 헌납(獻納)의 일에 마땅하지 않다고 청하였더니, 전지하시기를, ‘만약 대신(大臣)의 잘못을 논하다가 일이 그 아비에게 간여된다면, 이승윤은 마땅히 피혐(避嫌)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 등이 이를 생각해 보니, 비록 피혐하도록 하더라도, 그러나 동료로서 어찌 능히 그 탄핵(彈劾)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명하여 이를 고치소서."
하니, 전지(傳旨)하기를,
"분예빈시(分禮賓寺)의 일과 변효문(卞孝文)의 일은 마땅히 대신에게 의논하겠다. 이승윤(李承胤)의 일은 고칠 수 없다."
하였다, 유성원이 다시 아뢰기를,
"언로(言路)480) 는 심히 중한데, 만약 대신의 자제를 언관으로 삼는 것을 한번 그 서단(緖端)을 열어, 장차 대신의 자제가 대간(臺諫)에 나누어 자리잡기에 이른다면, 누가 감히 대신들의 잘못을 말하겠습니까? 만약 이승윤이 종실(宗室)의 족속(族屬)이 되므로 화요(華要)481) 의 자리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면, 육조의 낭관(郞官)과 같은 것이 가(可)합니다. 청컨대 고쳐서 바로잡으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6책 596면
【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탄핵(彈劾) / 인사-관리(管理) / 정론(政論)
[註 478]분예빈시(分禮賓寺) : 예빈시(禮賓寺)의 분시(分寺).
[註 479]감수자도(監守自盜) : 물건을 지켜야 할 관원이 스스로 전곡(錢穀)을 도둑질을 하는 것을 말함.
[註 480]언로(言路) : 임금에게 나라의 일을 아뢰는 일.
[註 481]화요(華要) : 빛나고 높은 자리
36.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6월 8일 계사 1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강맹경·이계전·이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강맹경(姜孟卿)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계전(李季甸)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이변(李邊)을 경창부 윤(慶昌府尹)으로, 박중손(朴仲孫)을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로, 노숙동(盧叔仝)을 좌승지(左承旨)로, 권준(權蹲)을 우승지(右承旨)로, 최항(崔恒)을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신숙주(申叔舟)를 우부승지(右副承旨)로, 함우치(咸禹治)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이석정(李石貞)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강윤(姜胤)을 공조 좌랑(工曹佐郞)으로, 김자청(金自埥)을 전구서 승(典廐署丞)으로, 한치형(韓致亨)을 사온 직장(司醞直長)으로 삼았다. 함우치(咸禹治)는 일찍이 사복 판사(司僕判事)가 되어 환관[宦寺]과 교제를 맺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승전 환관(承傳宦官)485) 김연(金衍)이 임금의 앞에서 칭찬하므로 특지(特旨)로 등용되어서 이 직책에 발탁(拔擢) 제수(除授)되었다. 함우치가 김연의 집에 이르러 사례를 하였다. 김종서(金宗瑞)가 붕어[鮒魚]를 좋아하니, 함우치가 사복시(司僕寺)에 있을 적에 양마(養馬)486) 를 시켜 붕어와 메추라기를 잡게 하여서 아침마다 이를 바쳤으므로, 김종서가 조회(朝會)에서 이를 칭찬하여 일찍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날 함우치는 정부의 천망(薦望)487) 의 열(列)에 있지 않았으나 특별히 이를 제수한 것이었다. 김종서가 춘추관(春秋館)에 출근하여 이르기를,
"환시(宦寺)488) 의 용사(用事)489) 하는 버릇은 진실로 염려스럽다. 승지(承旨)는 권요(權要)한 직(職)인데, 근일에 제수(除授)는 외의(外議)490) 에 인하지 않는다. 성상께서 나이가 어리시고, 또 상중(喪中)에 슬픔이 있어서 여러 신하들을 접하지 아니하시는데, 어떻게 함우치를 알 까닭이 있겠는가? 반드시 몰래 천거한 자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작은 연고가 아닌데, 이를 어찌 할 것인가?"
하였다. 이보다 앞서 황보인(皇甫仁)의 사위[女壻] 홍원숙(洪元淑)이 처남[妻弟] 황보석(皇甫錫)을 대신하여 공조 좌랑(工曹佐郞)이 되었는데, 강윤(姜胤)과 홍원숙은 동서[友壻]의 사이로 지금 또 홍원숙을 대신하여 이 직(職)을 제수받으니, 그때 사람들이 이르기를,
"공조 좌랑(工曹佐郞)은 황보인(皇甫仁) 집의 체아직(遞兒職)이다."
하였다.
김자청(金自埥)은 김종서(金宗瑞)의 사위였고, 한치형(韓致亨)은 한확(韓確)의 조카였으니, 당시 정부 대신(政府大臣)들이 제수(除授)하는데 참여하여 의논하고 상피(相避)하는 법을 지키지 아니하니, 매양 주의(注擬)491) 할 즈음에 당하여서는 아들·사위·아우·조카를 서로 바꾸어 천거하여 이끌어 들이고도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물의(物議)가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곧 임금에게 아뢰어 이를 제수하고 이어서 쓰기를, ‘계특지(啓特旨)492) ’라고 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대간(臺諫)에서 감히 누구인가를 묻지 못하였다. 세종(世宗) 때부터 ‘특지(特旨)’라고 쓰면 대간(臺諫)에서 논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啓)’ 자(字)를 썼으니, 위로부터의 특지(特旨)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또 임금이 즉위한 처음에 하교(下敎)하여 당상관(堂上官)·대간(臺諫)·정조(政曹)·연변(沿邊)의 장수(將帥)·수령(守令)은 정부에서 함께 의논하고, 그 나머지 일반 관원은 다만 살펴서 논박(論駁)하게 하였을 뿐인데, 그 후에 겸 판이조사(兼判吏曹事) 허후(許詡)가, 정부에서 관직(官職)의 크고 작은 것에 관계 없이 모두 품신(稟申)하여 정부에서 지시하므로, 비록 권무 도승(權務渡丞)과 같이 미관(微官)일지라도 정부를 거치지 않고 임명할 수 없음을 두려워하여, 제수(除授)하는 날에는 정부에서는 의사청(議事廳)493) 에 모이고, 이조(吏曹)의 당상(堂上)은 참의(參議)로 하여금 관안(官案)494) 을 지키면서 정청(政廳)495) 에 앉아 있게 하고는, 문선사 낭관(文選司郞官)을 거느리고 정부청(政府廳)에 나아가서, 주의(注擬)하고 수점(受點)496) 한 뒤에 정청(政廳)에 내려 주면 비답(批答)의 초안(草案)을 쓸 따름이었다. 이 날 참의(參議)가 병(病)이라 핑계하여 집에 있고, 참판 이계전(李季甸)이 홀로 정청(政廳)에 출근하니, 좌랑(佐郞) 윤자운(尹子雲)이 정부청(政府廳)에서 와서 고하기를,
"지난번에 유성원(柳誠源)의 아룀으로 인하여 가자(加資)한 것을 개정(改正)한 사람 가운데, 사은사(謝恩使)의 종사관(從事官) 등과 조충손(趙衷孫)은 존장(尊長)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고쳐서 바로잡지 말고, 다만 성삼문(成三問) 이하의 《병요(兵要)》·병서(兵書)를 수찬한 사람 등에게 가자(加資)한 것만을 깎아라."
하니, 이계전이 얼굴빛이 변하며 말하기를,
"서적(書籍)을 찬집(纂集)한 사람에게 가자(加資)하는 것은 선왕조(先王朝)에 있어서 오히려 구례(舊例)로 있었지만, 종사관(從事官)과 조충손(趙衷孫)은 무슨 명목으로써 가자(加資)하였는가? 김승규(金承珪)·황보석(皇甫錫)도 그 열(列)에 끼어 있는데, 이것은 같은 일을 행한 사람으로서 큰 요행이니, 대간(臺諫)의 간쟁(諫諍)하는 것이나, 하위지(河緯地)의 사양함은 여기에 있지 아니하고, 반드시 다른 데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비답(批答)의 초안(草案)을 썼으니, 어쩔 수가 없다."
하였다. 정부에서 다시 가자(加資)한 일을 의논하니, 김종서(金宗瑞)가 여러 사람들에게 고하여 맹세하기를,
"천지 귀신(天地鬼神)이 위[上]에 임(臨)하여 있고 증명하는 사람들이 옆에 있지만, 김승규(金承珪) 등을 당초에 가자(加資)할 때에도 나는 아는 바가 없었고, 도로 빼앗자는 의논도 또한 나는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한때에 가자(加資)한 사람을 혹 어떤 자는 빼앗고 혹 어떤 자는 빼앗지 않는다면 심히 말이 안된다."
하였다. 이리하여 계청(啓請)하니, 명하여 아울러 개정(改正)하지 말게 하고, 이어서 황급히 비답(批答)의 초안(草案)을 다시 고치게 하였다. 이계전도 또 강윤(姜胤)·김자청(金自埥)·한치형(韓致亨) 등의 이름을 보고, 혀를 끝끌 차면서 탄식하기를,
"그 놈이 그 놈이구나. 이것은 곧 정부(政府) 가문(家門)의 일이로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6책 597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정론(政論)
[註 485]승전 환관(承傳宦官) : 임금의 명령을 출납하는 환관(宦官).
[註 486]양마(養馬) : 사복시(司僕寺)에서 말을 기르던 사람.
[註 487]천망(薦望) : 후보자[望]를 천거하는 것.
[註 488]환시(宦寺) : 환관.
[註 489]용사(用事) : 정권을 마음대로 함.
[註 490]외의(外議) : 세상 사람들의 비평.
[註 491]주의(注擬) : 관리를 임명할 때 먼저 문관은 이조(吏曹)·무관(武官)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3사람을 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것.
[註 492]계특지(啓特旨) : 임금에게 아뢰어서, 임금이 특별히 삼망(三望)을 거치지 않고 직접 관리를 임명하던 일.
[註 493]의사청(議事廳) : 정부에서 나라의 일을 의논하는 청사.
[註 494]관안(官案) : 관리를 임명하는 문안(文案).
[註 495]정청(政廳) : 의정부(議政府) 청사(廳舍).
[註 496]수점(受點) : 임금이 낙점(落點)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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