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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나님의 경륜 원문보기 글쓴이: 나눔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잠시 지나쳐 온 세월들을 돌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온 날들… 여러 제도권 교회들을 돌고 돌아 이제는 오직 '형제'라는 정체성 하나만을 기쁨으로 여기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들이 흘렀던 것 같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은 성도들에겐 귀중한 간증이자 소망의 원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의 기쁨은 우리들에겐 말할 수 없는 은혜 중의 은혜요, 하루의 삶 속에서 성도를 움직이게 하는 생명의 에너지임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목말라 하며 성경을 읽었던 그 시절이 떠오릅니다. 지금으로선 그 애뜻한 정서를 찾을래야 찾을 수 없어서인지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은 것 같습니다. 그때는 시간 나는 대로 말씀을 읽었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말씀이 정말 꿀송이와 같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자 말씀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내 안에서는 또 다른 의문점들이 하나 둘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의문점이 마음속에서 떠오를 때마다 처음엔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 여기며 하나하나 말씀을 모르면 모르는 대로 정리해 나갔습니다. 젊은 날엔 그분에 대한 지식이 정립되지 않았던 탓인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 스스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믿음에 대한 문제라 그렇다고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엔 정해진 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형제들과 다를 바 없이 어느 시기엔 모든 말씀들이 율법적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진정한 자유함의 의미도 모른 채 자유를 남용한 적도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걸어온 내 삶은 시행착오에 얼룩진 실수 투성뿐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정든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처럼, 긴 여정에 오른 외로운 순례자처럼, 내 인생은 잃어버린 몸 찾아가는 힘겨운 나그네길 그 자체였습니다. 이리저리 교회를 옮겨 다니면서 지금까지 참으로 다양한 형태의 교회를 본의 아니게 접하게 되었습니다. 어린시절엔 길러주신 어머님께서 교회의 한 장로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그분이 헌금 처리를 하는 바람에 어머님은 충격을 받으시고 평생 동안 고통 가운데 사시다가 주님 품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문제로 정들었던 교회를 떠나야 했고, 친구를 따라 간 교회에선 친구가 갑자기 그 교회를 나가는 바람에 홀로 남겨져 외지인 취급받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 싶어서 DTS 받기 위해 교회를 옮기기도 하고, 직장 문제로 교회를 옮기기도 하였으며, 말씀을 공부하다 성경 문제로 교회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 힘든 과정 속에서도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 있었습니다. 좀 더 배우고 싶어 서울로 교회를 옮겨야겠다고 하니까 부서 담당 전도사는 마지막 예배를 마친 뒤 내 손에 택시비를 쥐어주고는 꼭 잘 되라고 격려를 해 주었던 아름다운 기억도 있습니다. 전도를 하기 위해 온 동네를 휘젓고 같이 다녔던 형제들이 눈에 선합니다. 글도 모르고 학벌도 없는 소위 무식한 그들이었지만 교제 가운데 나눈 그들의 간증은 진실로 아름다웠습니다. 어눌하고 몇 마디 안 되는 말들로 표현된 그들의 하나님의 사랑은 내 뇌리 속에 지워지지 않는 보화로 자리잡았습니다. 출판 분야에 몸담고 있는 저로선 간증에 대해서 안타까운 현실을 부디 지적한다면, 시중에 나와 있는 간증집들이나 세련된 사람들의 간증집회는 비즈니스 개념이 다소 들어 있는 목적간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들은 이리저리 다니다가 건물 한 구석에 주저앉아 시시때때로 서로의 간증과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내 삶속에서 은혜를 아낌없이 베풀어 주신 고마운 분들… 힘겨운 여정 속에서 내게 쉼터를 마련해 주고, 때로는 말벗이 되어주었으며, 때로는 내 허기진 배를 걱정하며 남모르게 물질로 베푸셨던 분들을 생각하면 그저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말씀에 대한 갈증으로 신앙서적을 사서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진 성적으로는 사회생활이 어려울 것이 예상되어 영어 공부할 겸 다양한 영어성경을 구입하여 읽었습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정말 알고 싶었고, 그리고 창조론과 재림에 대해 말씀으로 바르게 정립하고 싶었습니다. 심정이 그래서인지 물 만난 솜이불처럼 그렇게 좋다하는 책들을 찾아 읽었습니다.궁금한 것이 생기면 다녔던 교회의 책임자들에게 질문을 해 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95년 들어서면서 정동수 교수의 책을 몇 권 편집해 준 덕에 킹제임스성경을 알게 되었습니다. 게일 리플링거의 「New Age Bible」, 피터 럭크만의 소책자들, 클래어린스 라킨의 '하나님의 경륜' 등 원서들을 보면서 진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잡힌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볼 수 있는 자료가 원서밖에 없었습니다. 합정동에서 「한킹」을 쓰는 부류가 모양새를 갖추고 기독교계에 등장했지만, 그때는 그들의 아우성이 내겐 큰 이슈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킹제임스성경(AV1611)을 통해 살아오면서 궁금해 했던 모든 것들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가지고 심층적으로 진리의 말씀을 다시 정립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내 인생에 있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리고 몇 년 후 다시 교회를 옮겨야 했습니다. 지긋지긋하게 교회를 옮겨 다녔는데 킹제임스성경 이슈 문제로 다시 독립침례교회로 옮겨야 했던 것입니다.
살아오는 동안 대부분의 성경 지식은 독립침례교회에 몸담으면서 얻었습니다. 바른 성경을 쓰고 말씀이 확고해짐에 따라, 그렇게 근본주의 침례교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그때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흠정역 성경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는지 소위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예배가, 그 모임의 형태가 바른 교회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진리의 지식이 내 안에서 정립되어감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한 가지 의문점이 마음속에서 맴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론'이었습니다. '과연 교회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의문들이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의문점을 풀기 위해 성경 안에서 교회의 개념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성경뿐만 아니라 다른 참고자료들도 찾아보았습니다. 어느 날, 신월동에 있는 한 독립침례교회 사이트에서 한 형제가 올린 '목사'는 호칭도 아니고, 교회의 직분(office)도 아니라는 글을 읽고는 나는 잠시 당황했습니다. 그곳도 독립침례교회이면서 그렇게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들은 목사를 '목양자'라는 단어로 바꾸어서 사용했지만, 내 시각엔 그곳도 다른 독립침례교회와는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후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Bible Believer)이라는 타이틀이 성경이 제시하는 성도의 바른 정체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 믿음의 선진들은 어떠했는지 궁금했고, 초대교회 모임은 어떠했으며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주의 몸된 교회가 무엇인가 알기 위해 나는 시중에 나와 있는 신약교회사들과 가능한 한 관련자료를 있는 대로 찾아보았습니다.
교회의 정체성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더군다나 '교회는 주의 몸'이라 몸된 지체로서 자기 몸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성도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성도는 인생에 있어서 '주님의 몸'에 대한 귀향적 DNA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본능적으로 그 몸을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몸은 나중에 탈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차츰 피 흘린 발자취를 담은 교회사를 읽은 후에 형제회 신앙에 눈이 뜨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믿음이 잡히자 또 다른 순례의 여정을 마음 속에 그리며 정든 독립침례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다시 교회를 옮긴 것입니다. 물론 현시대의 신앙인들에게 미친 침례교 유산의 위대함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재침례파도 형제 모임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신약교회사를 들여다보면 스위스 형제단에서 재침례파가 나왔고, 거기에서 다시 침례교단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분리된 남침례 교단에서 독립침례교회가 떨어져 나왔는데 형제회 형제들이 정립해 놓은 세대주의와 영적 유산들을 갖고 나왔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현 독립침례교회는 제도권과 다를 바 없이 '설교' 중심이고, 호칭도 '목사'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들은 물론 '형제'라고 부르면서 적당히 타협하지만, 에베소서 4장 11절 말씀을 슬쩍 오용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목사'는 호칭도 아니고 직분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직분(Office)은 '장로(elders)'와 '집사(decons)'밖에 없으며, 그 구절에서 '목자(pastors)와 교사(teachers)'가 세미콜론(;)으로 하나로 묶여 있음으로 이 단어들은 사도행전과 디모데전후서, 디도서가 언급하는 장로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 구절에서 'AND'는 동격이며 '목자이자 교사'라는 뜻으로 사도나 선지자와 같이 한 직분을 나타내는데 그것이 바로 '장로(elders)'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교회의 장로는 한 사람(단수)이 아니라 '복수'입니다. 장로의 주된 역할은 그 뜻 그대로 양무리를 '돌보는 것'(pastoring)과 '가르치는 것'(teaching)입니다. 양치는 '목자'의 개념이지 지금의 대접받는 '목사'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첫장부터 읽어 보면, 사도들이 만난 사람들은 교회의 장로들이었지 목사는 단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신약교회사를 조금이라도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목사제도는 16세기경에 카톨릭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나타난 제도라는 것과 그것도 루터 이후에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외국 독립침례교회 사이트들을 보면, 목사(pastor)가 마치 그 교회의 대표성을 나타내는 것처럼 표시해 놓았습니다. 가르치는 은사의 개념을 회사 직책처럼 표현한 것은 독립침례교회도 교단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나타낸 격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체들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획일적인 진행에 끝날 때까지 한 사람만 쳐다보면서 정해진 순서에 따라 한두 시간을 앉아서 말없이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자 전하는 일방통행성 형태라 다른 지체들은 의자에 꼿꼿이 앉아서 앞사람 뒤통수 사이로 보이는 목사의 얼굴을 쳐다보아야만 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모임이 없을 뿐더러 초대교회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형태입니다. 그들은 구약의 선지자가 회당에서 두루마리를 읽었던 부분을 근거로 삼지만, 유태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모였고(물리적, Physical), 신약시대의 모임은 성도들의 영적인 교제(spiritual)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교회로 사용된 '에클레시아'는 유태인의 회당(synagogue)과 전혀 다른 색체의 공동체이며,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유태인의 모임과 다른 차원으로 구분하기 위해서 성도의 모임을 '에클레시아'라고 불렀습니다. 즉, 유태인들은 건물 중심으로 회당에서 모였으며 뿐만 아니라 회당이란 이름도 역시 유태인들의 모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교회(에클레시아)는 건물 중심으로 모인 유태인과는 달리 신약성도들의 모임 중심으로 공동체적인 성격을 띠었습니다.
다행히 세상을 둘러보고 찾아보니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형제 모임과 가정교회 모임이 많이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현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겐 '형제', '자매' 존칭 하나만으로 신앙 생활하는 데에는 익숙지 않을 것입니다. 환경이 어떠할지라도 진리가 아니라고 하면 순종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도리라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성경대로 믿기를 원하신다면 교회론을 진지하게 공부해 보시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의 형태를 다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형제회로 오면서 얻게 된 큰 유익이 있다면, 교단 교회든, 아니든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면 그 모임을 존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를 중요시함으로 교제의 폭이 넓어졌고, 성경 이슈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상호교제할 수 있는 조건은 특정 교리가 같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정체성 하나로 이루어진다는 진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믿음(엡 4:5)을 가짐으로 해서 교제가 성립된다는 진리를 삶으로 터득한 것입니다.
'설교'에 매력을 느낀 사람은 결코 '형제 신앙'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설교가 성도의 삶에 영향을 주는 핵심이란 잘못된 상식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교단에서 행해지고 있는 설교는 카톨릭 예배 형태 그대로 이며, 분리되어 나왔음에도 루터 이후 선진들이 모르고 버리지 못한 것을 답습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어떠하든지 인원수엔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은 '설교' 덕분입니다. 설교 덕에 교회는 교인수에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사람이 많아지게 되면 의자만 채워놓으면 됩니다. 교회의 양적, 질적 성장은 설교 덕에 시각적인(Physical) 측면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만찬 가운데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는 뒷전이고, 일요일에 교회를 와서 한두 시간 설교를 듣고 찬양을 하고 돌아가는 것이 주일예배 개념이 되어버렸습니다.
제도권 교회들의 문제점은 성경에서 말하는 '전파'(Preaching)와 '가르침'(Teaching)의 개념을 '설교'(Sermon)로 잘못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교'라는 단어를 그대로 쓰기 때문에 소위 목사를 배출하려는 목적으로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설교자가 사역자의 개념이 된 셈으로 보이지 않게 평신도 지배 계급이 형성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은 결코 학문이 될 수 없습니다. 영적 성장에 필수적인 자양분을 제도에 묶어 단시일 내에 공부한다고 해서 정말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성숙은 삶의 과정 중에 있으며 성도의 교제를 통해 유기적으로 서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가정과 동일하게 유기체입니다. 어떤 유기적 생명체라도 결코 그렇게 단편적으로 자랄 수 없는 것이 생명의 법칙입니다.
지금까지 내 신앙에 영향을 주었던 것은 머리에서 울려나오는 '설교'가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성도의 교제'였습니다. 삶속에서 그들은 본을 보였고 진리가 무엇인지 소리 없이 알려주었습니다. 그들은 삶에 녹아 있지 않은 진리는 함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말하지 않아도 난 그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가운데 우러나오는 사랑을 보았고, 사랑 안에서 전해지는 진리의 지식이 성도의 교제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았습니다.
'교회론'이 믿는 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허락하신 유기체는 오직 '가정'과 '교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교회는 가정만큼 중요합니다. 떠나 보아야 교회의 의미가 무엇인지, 형제 신앙과 가정교회 모임이 어떠한지, 오직 그리스도인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은 그들 스스로도 '형제회' 소속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형제', '그리스도인' 그 한 가지 정체성에 만족하는 무리들입니다. 그리고 모임에서는 형제 자매들 하나 하나가 제사장으로서 유기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모임의 형태도 다양합니다. 불안정해 보여도 오히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모임의 지체들이 자기들의 특성에 맞게 서로서로 세워 가는 교회, 틀에 얽메이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으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 단 한 사람도 도외시되지 않고 참여하는 교회,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교회일 것입니다. 교회는 교제 중심으로 모이기 때문에 보통 50명을 넘지 않습니다. 성경에선 개인이 자기 집의 다락방을 교회로 내놓았던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우리 나라는 중동지역처럼 대형 다락방이 없을 뿐더러 시대 차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어느 지역이든지 간에 삶에 자리잡힌 생활문화는 존중해야 합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문화의 차이에 따라, 그리고 성도들의 특성에 따라 모임의 성격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제 인원도 고려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매일 드나들 정도로 집을 오픈하지 않는 이상 모임에 성도의 수가 늘어나면 분리해야 합니다. 교인수가 많다고 해서 훌륭한 교회가 아닙니다. 프로그램이 좋다고 해서 훌륭한 교회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경험한 바를 들려주었는데 30, 40명 선이 가장 적당한 교제 모임이라고 합니다.
깁스가 쓴 「모임에 대한 성경의 원리」에 초대교회의 모임에 대해서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들은 있었어도 '회중교회'는 없었습니다. 침례 받은 성도들은 있었어도 '침례교인'들은 없었고, 모임에 장로들은 있었지만 '장로교인'들은 없었습니다. 그 모임들에 감리(監理) 하는 자는 있었지만 '감리교인'들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권위에 떨었지만 '퀘이커교도'들은 없었습니다. 그들 모두 오순절의 축복을 나누었지만 그 곳에 '오순절주의자'들은 없었습니다. 형제들이 모두 다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었지만 '모라비아파'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그리스도인들로서 단순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교회의 모임은 '설교'가 핵심이 아닙니다. 복음(Gospel)은 주로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 전해졌고(Preaching), 성도들은 교회에 모여서 진리의 말씀을 상호 교제 가운데 나누었습니다. 초대교회 모임에서는 어느 한 사람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물론 장로와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형제들이 구체적으로 성경을 가르쳤지만, 한사람이 일방적으로 그리고 회중이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는 지금의 설교와는 전혀 다른 형태였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모두가 제사장이며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서로를 세우고 모두가 성직자로서 경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즉, 각 사람이 주의 몸된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해 제사장(성직자)직을 책임 있게 담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 이제 진정한 교회의 의미를 찾아 떠나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첫댓글 올바로 말하는 것도 어렵지만 올바로 행동하는 것은 더 어려운것 같습니다.
전에도 이 글 읽으며 함께 나누고 싶은 글이라 생각했는데요
다시 읽어도 참 시사하는 바가 크고 와 닿는 글입니다
신앙인의 올바른 가치관이 또한 실행하는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 주는 글인것 같습니다
처음 읽을때 두번 연속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님의 글인지, 누군가의 글에 대한 첨언인지 궁금하네요.
가족, 교회.... 구원받은 사람들// 그 사람들을 가족처럼 대할 수 있는 사람 있나요? 전 경험하지 못했네요.
구원받은 사람들은 있지만 그들이 가족처럼 교회를 이룰 수 있다는 건 전 믿지 않습니다. ^^
출처는 이반의 블러그이며 그분의 글입니다.
피를 한방울도 나누지 않은 사람이 가족이 될 순 없겠죠 그렇다고 모든 가정이 다 화목하고 행복한건 아닌 것처럼
저는 이분에게 공감하는 바는 바로 교회의 의미와 역할에 대한 점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진심으로 가족처럼 대하는 성당이 있어 그곳에 나간다고 제가 행복하고 만족할까요...
즉 가족처럼 대하지난 않지만 내가 성경을 통해 알게 된 교회와 그것을 같이 믿는 사람들이 같이 모이는 것이 훨씬 더 편하고 만족할 것입니다.
즉 아무리 세상 친구가 착하다 하더라도 결국 사귐의 한계가 있는 것처럼
교단교회, 독립침례교회일지라도
그들이 가장 성경에서 근본적인 부분들을 간과하고 말씀보다 전통을 중요시 여기고 행하고 있다면 그 전통을 경히 여기는 사람들은 그들과 어울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반형제는 교회제도 특히 목사제도라는 부분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형제교회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그들중 상당 수는 여전히 개역성경을 사용하고 하나님의 경륜을 자세히 모르는 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즉 저라면 그 교회론에서 옳은 형제교회에서도 맘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
지금 목사제도들 부정하고 올바른 성경과 올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는 우리나라에 거의 없을 것입니다.
생각이 다른 수백명과 같이 있는 것보다 생각이 같은 한사람과 같이 있는 것이 훨씬 외롭지 않습니다.
이반 형제는 형제교회에서 본인과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만난 것 같습니다.
교회란 불완전한 사람들이지만 목적지가 같은 곳을 함께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교회란 불완전한 사람들이지만 목적지가 같은 곳을 함께 가는 것....은 이상적인 생각이라면
교회란 불완전한 사람들이지만 목적지가 같은 곳이라고 함께 인정은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