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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인돌과 고인돌문화
吳江原(한국학중앙연구원 부교수)
목 차
I. 머리말
II. 한국 고인돌, 세계문화유산이 되다
1. 강화도 고인돌
2. 고창군 고인돌
3. 화순군 고인돌
III. 고인돌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왜 만들었는가
1. 어떤 것을 고인돌이라 하는가
2. 어떻게 고인돌을 만들었는가
3. 왜 고인돌을 만들고 세웠는가
IV. 한국 고인돌, 동아시아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1. 세계와 동아시아의 고인돌로는 무엇이 있는가
2. 고인돌을 남긴 사람들의 문화로는 무엇이 있었는가
3. 한국의 고인돌문화, 일본국의 야요이문화를 열다
V. 맺음말
I. 머리말
한국은 1995년 조선 왕조의 왕실 사당인 종묘가 유네스코에 의해 처음으로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2014년 현재까지 북한을 포함하여 12건[ 종묘(1995), 해인사 장경판전(1995), 불국사ㆍ석굴암(1995), 창덕궁(1997), 수원 화성(1997), 경주 역사 유적 지구(2000), 고창-화순-강화 지석묘 유적(2000), 고구려 고분군(2004), 조선 왕릉 40기(2009), 하회ㆍ양동 마을(2010), 개성 역사 유적 지구(2013), 남한산성(2014)]이 세계 문화 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고인돌은 한민족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적인 상징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 민족문화의 차원을 넘어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만리장성에 못지 않은 소중한 인류 문화의 자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옛적 우리 민족이 남긴 이 땅의 수많은 고인돌이 과연 어떤 사람들이,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어떠한 목적으로 세워 놓았는지, 그리고 이 고인돌이 우리 민족문화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이며, 세계와 주변 국가에도 있는 고인돌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강의에서는 이러한 의문점을 쉽고 편안하게 풀어보고자 한다.
II. 한국 고인돌, 세계문화유산이 되다
1. 강화도 고인돌
강화도 고인돌 유적(보존 상태 양호한 것 70기)은 2000년 11월 29일 고창군․화순군 고인돌 유적과 함께 일괄로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기 이전에는 우리나라에서 1964년 하점면(河岾面) 점골 고인돌 등을 사적 137호 등으로 지정하였다.
강화도는 고려시대 고려 조정이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 강화도를 천도하기 전까지 현재의 강화 본섬이 세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었다. 해안선 또한 지금과는 달리 매우 복잡한 형태를 띄고 있었다. 강화도는 고려가 임시로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조금씩 얕은 갯벌과 해안이 매립되기 시작하다가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간척되기 시작하여 현재의 지형을 이루게 되었다. 즉, 현재의 강화도에서 해발 10m 이하의 평지는 원래 갯벌과 바다였다(최종현 2010).
강화도에는 61개 군에 총 165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데, 절대 다수가 원래 3개로 나누어져 있던 강화 본섬 가운데 북쪽의 모섬에 집중되어 있다. 강화도에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은 삼거리 고인돌처럼 높은 산록의 정선부를 따라 조성되어 있는 경우 몇 례를 제외하고는 구릉 말단 정상부의 평탄처 또는 구릉 말단 사면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를 원지형에 대비하여 보면 고인돌 대부분이 원래의 해안선에서 매우 가까운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화도의 주요한 고인돌로는 하점면 부근리(富近里) 점골 고인돌, 하점면 삼거리(三巨里) 샘말마을 고인돌, 강화읍 대산리(大山里) 청송마을 고인돌, 송해면(松海面) 양오리(陽五里) 대촌 고인돌, 송해면 하도리(下道里) 고인돌, 내가면(內可面) 오상리(鰲上里) 고인돌 등이 있다(李亨求 1992). 강화도 고인돌은 조성 당시의 유물이 조사된 것이 거의 없다. 고인돌의 구조와 삼거리 소동마을 고인돌 주변의 파괴 집자리 출토 팽이형토기 구연부편 등으로 보아 대체로 기원전 7~5세기의 기간 동안 조성되지 않았을까 한다.
강화도 고인돌은 부근리 고인돌처럼 무게 108톤의 판상 상석이 있는 대형 탁자식 고인돌을 대표로 하여 탁자식과 개석식이 거의 비등한 구성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개석식과 기반식 등이 주를 이루고 있는 한반도 중남부 지역과 탁자식이 인상적인 서북한 지역의 중간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점과 함께 제한된 공간 내에 고인돌이 밀집 분포하고 있다는 점 등이 인정되어 2000년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른 것이다.
2. 고창군 고인돌
고창군 고인돌 유적(447기)은 2000년 11월 29일 강화도․화순군 고인돌 유적과 함께 일괄로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었다. 고창군 고인돌 유적은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기 이전에 우리나라의 사적 제391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고인돌은 고창군 가운데서도 죽림리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 약 1.7km 범위에 집중되어 있는 고인돌군이다(고창읍 죽림리, 도산리, 아산면 상갑리, 봉덕리). 이 범위에서는 탁자식, 개석식, 기반식 등의 고인돌 442기가 조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좁은 범위에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고창군 전체로는 2,000여기의 고인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고창군의 고인돌이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고창군 일대의 고인돌은 여러 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10여기가 하나의 군집을 이루는 것도 있지만, 상갑리 매산마을처럼 400~500기가 하나의 대군집을 이루고 있는 것도 있다. 매산마을 내에 위치한 고인돌은 상석이 길이 6.5m, 너비 5.3m, 높이 2m, 무게 150톤 가량의 대형이다. 매산마을에는 탁자식 고인돌 또한 3~4기가 분포하고 있는데, 한국 탁자식 고인돌의 최남단에 해당된다.
고창군의 주요 고인돌 유적으로는 위의 유적 외에 아산면(牙山面) 운곡리(雲谷里) 고인돌(20여기), 해리면(海里面) 안산리(安山里) 고인돌(55기), 안산리 이상동(二上洞) 고인돌(11기), 왕촌리(旺村里) 고인돌(9기), 심원면(心元面) 월산리(月山里) 고인돌(31기), 주산리(珠山里) 고인돌(11기) 등이 있다. 고창 일대의 고인돌의 조성 시기는 상갑리 고인돌 분포지에서 마제석검의 손잡이편이, 운곡리 유물 산포지에서 점토대토기가 수습된 것을 통해 기원전 6․5세기~3․2세기로 보고 있다(최몽룡 1999).
3. 화순군 고인돌
화순군 고인돌 유적(596기)은 2000년 11월 29일 강화도․고창군 고인돌 유적과 함께 일괄로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었다. 고창군 고인돌 유적은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기 이전에 우리나라의 사적 제391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기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사적 410호 지정되었다. 화순군 관내의 고인돌 가운데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도곡면(道谷面) 효산리(孝山里, 277기)로부터 춘양면(春陽面) 대신리(大薪里, 319기) 일대에 이르는 길이 10여 km 범위에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이다.
효산리 고인돌 277기 가운데 상석 아래의 지석이 드러나 있거나 상석임이 확실한 것, 다시 말해 고인돌임이 확실한 것은 158기이고, 나머지는 잔존 상태와 주변 정황으로 보아 고인돌로 추정되는 것들이다. 효산리 일대의 고인돌은 고인돌의 군집 상태와 고인돌 간의 거리 등을 기준으로 7개의 군집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대부분 기반식 고인돌인데, 묘실 벽석이 지상으로 얼마간 드러나 있는 지상석곽형 고인돌도 있다.
대신리 고인돌은 곡구 평지로부터 계곡 중단까지 1km의 범위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데, 고인돌임이 확실한 것은 127기이고, 나머지는 파괴되어 원래의 자리에서 이동된 고인돌의 부재이거나 추정되는 것들이다. 8개의 군집으로 구분되고 있다. 고인돌의 형식은 기반식 고인돌, 지상석곽형 고인돌, 개석식 고인돌이다. 대신리와 효산리 고인돌은 연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유물의 출토 사례가 없다. 다만 고인돌의 구조와 주변 유적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고창군 고인돌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화순군 관내의 고인돌은 4km 반경 내에 400여 기의 고인돌이 밀집 분포하고 있으면서 그 주변에 1,280여 기가 분포하고 있어 영산강 유역 최대의 고인돌 집중지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대신리 고인돌 가운데에는 길이 7.3m, 너비 5.0m, 두께 4.0m, 무게 200여 톤에 달하는 상석이 있는 고인돌이 있고, 도곡면 대곡리 고인돌 가운데에는 길이 7.1m, 너비 3.9m, 두께 3.7m의 상석이 있는 고인돌이 있다. 고창군 죽림리 매산마을 고인돌처럼 주변에서 채석장이 발견되기도 하였다(이영문 1999). 이러한 점 때문에 화순군 고인돌이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된 것이다.
III. 고인돌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왜 만들었는가
1. 어떤 것을 고인돌이라 하는가
고인돌은 과거 우리나라 민간에서 ‘고여 놓은 돌’이란 뜻으로 부르던 민간어를 우리나라 학계에서 학술 용어로 받아들여 정착시킨 용어이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고인돌을 한자식으로 표기할 때 ‘지석묘(支石墓)’라고 부르는데, 이 용어는 ‘고여 놓은 돌’이란 뜻의 우리말을 고려시대 이래 지식인들이 한자로 표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금(金)나라 이후 민간에서 부르던 ‘석붕(石棚)’이란 용어를 현대에 들어와서 학술 용어로 받아들여 고인돌을 ‘석붕’이라 부른다.
중국에서 말하는 ‘석붕’이란 것은 ‘돌로 만든 선반 또는 시렁’이란 뜻이므로 이 또한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고인돌과 사실상 같은 뜻이라 할 수 있다. 구미에서 고인돌을 지칭할 때 흔히 사용되고 있는 ‘돌멘(Dolmen)’ 또한 과거 유럽의 민간에서 ‘두 개 이상의 돌로 고여져 있는 큰 돌’이라는 뜻으로 쓰이던 민간어를 근대에 들어와 학계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와 유럽 모두가 같은 형태의 구조물을 고인돌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조의 고인돌은 우리나라 학계에서 탁자처럼 생겼다 하여 ‘탁자식 고인돌’이라 부른다. 탁자식 고인돌은 과거 한반도 남쪽 지역에서는 적은 반면 북쪽 지역에는 많다고 하여 ‘북방식 고인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고인돌은 탁자식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의 것이 있다. 심지어는 땅 위에 굄돌이 없는 것들도 고인돌에 포함된다.
땅 위에 굄돌이 있기는 하지만 바둑판 받침과 유사한 작은 부정형 돌로 고여 놓은 ‘기반식(碁盤式) 또는 바둑판식 고인돌’, 땅 위에 굄돌이 있기는 하지만 기둥처럼 생긴 ‘주상(柱狀) 지석식 또는 기둥 굄돌식 고인돌’, 땅 위에 굄돌이 없고 상석(上石)만이 있는 ‘개석식(蓋石式) 또는 뚜껑돌식 고인돌’, 주검과 부장품을 넣은 땅 아래의 돌널이 땅 위로까지 얼마간 올라와 굄돌과 같은 역할을 하는 ‘지상석곽형 고인돌’, 고인돌 주변의 땅 위에 돌을 깔아 놓거나 얼마간 높이로 쌓아 놓은 ‘부석식 고인돌’과 ‘적석식 고인돌’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까닭에 고인돌의 학술 용어를 땅 위에 굄돌이 있는 형식만을 연상시키는 지금의 용어가 아니라 거대한 상석에 초점을 맞추어 ‘거석묘(巨石墓)’라 부르자는 의견도 있다. 유럽 학계에서도 오래전부터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고인돌을 포함한 큰 돌을 사용하는 무덤과 의례 유구를 ‘거석(Megalithic)’ 유적으로 부르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굄돌로 큰 돌을 받쳐 놓는 구조물이 갖는 전통성과 문화적 상징성을 감안하여 이러한 류의 유적을 고인돌이라 통칭하고 있다.
고인돌의 여러 형식 가운데 기반식, 개석식, 적석식, 지상석곽식 등의 경우 땅 아래에 주검과 부장품을 묻어 놓은 별도의 시설이 있다. 땅 속을 평면 장방형과 타원형으로 파 놓기만 한 것(토광)도 있지만, 대개는 얇은 판석으로 널을 짜맞추어 놓거나(석관), 깬돌을 차곡 차곡 쌓거나 부정형의 막돌을 잘 쌓아 덧널 모양을 만들어 놓거나(석곽) 하였다. 적석식 고인돌은 하나의 적석 범위 안에 탁자식 1기와 여러 기의 개석식 고인돌과 석관묘 등이 함께 묶여져 있다.
2. 어떻게 고인돌을 만들었는가
사람들이 고인돌을 마주할 때 가장 큰 인상을 받는 것은 굄돌로 받쳐져 있는 거대한 상석이다. 중국 요령성 개주시(盖州市) 석붕산(石棚山) 고인돌은 78.5톤,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은 108톤, 고창군 매산리 고인돌은 150톤, 화순군 대신리 고인돌은 상석만 200톤에 달한다. 중국 요령성 수암현(岫岩縣) 홍석(紅石) 탁자식 고인돌과 춘천(春川) 중도(中島) 탁자식 고인돌은 상석이 가장 작은 크기에 속하는데,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무게가 1.0~2.0톤에 달하여 어른이라 하더라도 쉽게 옮기기 어렵기는 매한가지이다.
우리나라 고인돌 유적에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창군 죽림리 매산마을 고인돌 유적의 배후산의 암벽에서 고인돌 석재를 떼어내기 위해 쐐기를 박아 돌을 떼어낸 흔적이 확인되었다(이상균 2000). 또 전라북도 진안군 여의곡(如意谷)의 고인돌 유적에서는 통나무를 레일처럼 깔아 떼어낸 상석을 여러 곳의 고인돌로 끌고 간 흔적이 발견되었다(金承玉․李宗哲 2001). 양평군(楊平郡) 앙덕리(仰德里) 개석식 고인돌 상석 바닥에서는 너비 10cm 가량의 통나무 받침흔이 확인되기도 하였다(이융조 1975).
이러한 조사 결과로 보아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대부분 고인돌을 만든 곳과 가까운 곳의 암반층에서 돌감을 떼어낸 것으로 생각된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고인돌을 만들 때부터 석재를 얻어내기 편리한 곳, 또는 그와 근접한 곳을 장소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중국 동북 지역과 북한 또한 마찬가지여서 대부분은 돌감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장소와 같은 구릉이나 산 능선을 장소로 선택하거나, 반드시 같은 구릉은 아니더라도 채석장으로부터 반경 2km 이내의 근거리에 위치한 곳을 장소로 선택하였다.
채석장과 같은 구릉 또는 지점을 장소로 선택한 고인돌로는 요령성 보란점시(普蘭店市) 쌍방(雙房)․삼대자(三臺子) 동산(東山)․석붕구(石棚溝), 개주시 소발구(小脖溝), 수암현 홍석, 길림성 동풍현(東豊縣) 소사평(小四平) 고려묘산(高麗廟山), 유하현(柳河縣) 대화사(大花斜),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석천산(石泉山), 황해남도 황주군(黃州郡) 침촌리(沈村里) 고인돌 등이 있고, 같은 구릉이 아니더라도 2km 이내에 위치하고 있는 고인돌로는 요령성 개주시 앙산(仰山), 신빈현(新賓縣) 선인당(仙人堂), 길림성 유하현 삼괴석(三塊石), 평안남도 개천군(介川郡) 묵방리(墨房里), 황해북도 연탄군(燕灘郡) 오덕리(五德里) 고인돌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과는 달리 2km를 넘어 멀게는 1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돌을 가져와 만든 고인돌도 있다. 요령성의 개주시 석붕산, 장하시(庄河市) 백점자(白店子)․대황지(大荒地) 고인돌이 그러하다. 이들 고인돌 모두 상석이 50~80톤에 달하는 초대형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상석 또한 한반도의 것과는 달리 균일한 두께의 평면 장방형으로 전체적으로 잘 물매질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석질 또한 매우 훌륭하다. 이 정도의 상석을 캐기 위해서는 절리면이 잘 형성되어 있는 거대한 수직 암반면이 있어야 하는데, 주변 10km 이내에 이러한 돌을 채석할 수 있는 곳이 없다(吳江原 2012a).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만 것이 있으니, 최근까지도 고인돌을 만들고 산 인도네시아 숨바섬의 원주민 사회가 그러하다. 숨바섬에서는 왕족과 최고위급 사제의 고인돌을 만들 때 채석장의 거리와 지형적인 장애와 상관없이 반드시 최상의 석재가 산출되는 동숨바 타분돈군 타림방의 석재를 캐어온다. 1870년 동숨바 푸르레우 왕가 수장의 고인돌을 만들 때에는 18km(가종수 2009), 1970년대 서숨바 루와군 티다스 수장의 고인돌을 만들 때에는 육지 외에 3일간의 바닷길을 건너야 하는 장지까지 돌을 캐 운반하였다(가기야 아키고 2009).
이러한 사례를 고려할 때, 일부 초대형 고인돌은 양질의 석재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캐어와 세우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거운 돌을 운반할 때에는 최근까지 숨바섬에서 고인돌 석재를 운반할 때 사용한 Y자형의 운반틀과 통나무 레일이 사용되기도 하고, 잔자갈을 깔거나 얼음과 눈을 이용한 운반로, 밧줄끌기, 지렛대 사용, 뗏목 등 다양한 방식이 그때 그때 활용되었을 것이다. 또 숨바섬의 민족지 사례와 진안군 여의곡 고인돌 유적에서 확인된 것처럼, 채석․운반․고인돌 만들기와 관련하여 다양한 의례 행위와 축제가 있었다.
고인돌을 만들기 위한 돌감, 특히 상석을 고인돌을 세우고자 하는 장소로 옮긴 다음에는 무겁고 거대한 상석을 땅 위에 세워져 있는 굄돌 위에 올려 놓아야만 한다. 상석을 얹는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주로 활용되었는데, 첫째는 굄돌을 세운 후 주변에 흙무더기를 쌓아 그 위로 상석을 끌어 올린 다음 흙을 제거하는 방식이고, 둘째는 숨바섬의 상석 얹기에서 확인된 것처럼 굄돌 위까지 공중으로 상향하는 통나무 레일 구조를 만들어 이를 이용하여 상석을 올리는 방식이다. 한편 석재, 특히 상석의 가공은 대부분의 작업이 채석장에서 이루어졌다.
3. 왜 고인돌을 만들고 세웠는가
고인돌은 거대한 상석이 가장 인상적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거대한 돌로 고인돌을 만든 까닭은 당연히 사람들이 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구릉 정상, 능선, 정선부, 경사면, 평지에 세워져 있는 고인돌을 보는 사람은 당연히 이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다. 그렇다면 선사시대 사람들은 왜 이 고인돌을 그때를 살아가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후손들이 볼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를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시설물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무덤으로 사용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은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의 고인돌 대부분에 죽은 자를 위해 넣어둔 부장품과 함께 사람뼈가 출토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유물만 출토된 것들 또한 상당히 많은데, 이러한 것들은 오랜 세월 사람뼈가 토양 속에서 부식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의 고인돌 가운데에는 유물이 전혀 부장되어 있지 않으면서 무덤으로 쓰인 일반적인 고인돌과는 구별되는 장소에 특별하게 세워진 것들이 있다. 요령성의 개주시 석붕산 고인돌, 해성시 석목성 고인돌, 수암현 흥륭(興隆) 고인돌, 은율군 관산리 1호 탁자식 고인돌 등이 그러한데, 이들 고인돌 모두 초대형이거나 대형이면서 동일 구릉과 평지 주변에 일체의 다른 고인돌이 세워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러한 고인돌은 과거 보다 넓은 범위의 지역을 대표하는 수장의 무덤으로 해석되기도 하였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부족 공통의 기념물이자 의례 장소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수암현 흥륭 등과 같이 석붕산 초대형 고인돌보다 규모가 작으면서 주변의 고인돌 무리가 형성되어 있는 어느 곳에서나, 특히 고인돌이 있는 골짜기로 진입하는 산곡의 입구에서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곳에 단독으로 세워져 있는 것들은 기념물과 의례 장소 뿐만 아니라 부족을 상징하는 표지의 기능도 하였다.
IV. 한국 고인돌, 동아시아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1. 세계와 동아시아의 고인돌로는 무엇이 있는가
고인돌은 한반도 외에 가깝게는 중국 동북 지역, 산동성, 절강성, 일본 구주, 멀게는 유럽, 북아프리카(모로코, 튀니지), 남아시아와 서아시아에도 있다. 유럽에서는 스웨덴, 덴마크, 독일 서북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남부,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 불가리아, 카프카즈 등지에, 남아시아에는 파키스탄, 인도 남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지에, 서아시아에는 이란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이들 지역의 고인돌은 우리나라의 고인돌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굄돌을 고이거나 거대한 상석 아래에 묘실을 마련하여 놓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동아시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고인돌은 우리 식의 고인돌도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거대한 돌을 수반한 거석묘의 범주에 속한다. 이러한 거석 유적까지 포함할 경우, 유럽의 거석 유적은 프랑스 서북부 브르타뉴(Bretagne) 지방의 거석 유적을 들 수 있다. 기원전 50세기 농경 중심의 신석기시대로 넘어가면서 이 지역에 유럽 최초의 거석 유적이 세워지는데, 이후 기원전 40세기에는 프랑스 남부의 대서양 연안 지역, 기원전 30세기에는 영국과 남유럽으로까지 확산된다.
북아프리카의 고인돌은 스페인 남부를 통해 확산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 기원전 40~35세기에 유럽과 별개로 출현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동유럽의 고인돌은 기원전 30세기 이후 출현하여 늦게는 기원전 1300년 무렵까지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인도는 대체로 기원전 10세기~3세기 기간에 세워졌다. 인도네시아는 기원전에 세워진 것도 있지만, 보르네오섬 서남부 싸라와크강 하류 자옹(Jaong) 일대의 거석 유적처럼 기원후 700~950년 무렵, 또는 숨바섬처럼 1970년대까지 세워진 곳들도 있다(최몽룡 외 1999).
유럽 등지의 거석묘(고인돌)는 여러 형식의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탁자식이나 기반식 고인돌과 같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대형 봉토․석실 수준의 묘실․무덤길 등을 갖추고 있어 차이가 있다. 이러한 사정은 동유럽이나 서아시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시대뿐만 아니라 구조 또한 우리와 비슷한 고인돌이 축조된 곳은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여러 지역인데, 이 가운데 중국 동북 지역, 한반도, 일본 서북 구주 지역이 가장 유사하다.
2. 고인돌을 남긴 사람들의 문화로는 어떠한 것들이 있었는가
세계에 산재하고 있는 고인돌을 남긴 물질문화 가운데 어디까지가 우리 한민족문화에 속하는가? 고인돌의 외형이 유사하기에 이러한 의문이 한번쯤은 들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고인돌 유적을 보면, 고인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인돌 주변에 석관묘와 석곽묘가 한 무리의 무덤 구역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황해남도 황주군 침촌리 고인돌, 강원도 춘천시 천전리 고인돌, 경상북도 대구시 진천동 고인돌, 경상남도 창원군 덕천리 고인돌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현상은 당연히 고인돌과 석관묘를 만든 사람들 사이에 장묘 전통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하더라도 매우 친연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더해 고인돌을 세운 사람들이건, 석관묘, 심지어 토광묘를 만든 사람들이건, 무덤에 부장하는 유물이 꼭 같다. 무덤 주변에서 발견되는 마을 자리에서 발견되는 유물 또한 서로 같다. 이렇게 동질적인 유물 유적이 발견되는 지역은 현재의 한반도를 넘어 요령성, 길림성 중부, 연변 지역까지이다.
그러므로 한민족문화로서의 고인돌을 남긴 문화는 이 범위 안에서 찾아야만 한다.
위의 범위 내에서 고인돌을 남긴 주요한 문화로는 요동 남부의 쌍방유형(雙房類型), 길림성 남부의 일통하(一統河)와 삼통하(三統河)를 중심으로 하는 대화사유형(大花斜類型), 대동강~예성강 유역의 신흥동유형(新興洞類型), 남한의 역삼동유형(驛三洞類型)-송국리유형(松菊里類型) 등이 있다. 이외 이들 문화의 주변 지역, 즉 요령성의 혼하(渾河) 유역과 혼강(渾江) 유역, 길림성 남부의 동요하(東遼河) 중상류역 등지의 일부 집단 또한 고인돌을 남겼다.
이들 문화는 무덤으로는 고인돌, 토기로는 심발형토기, 석기로는 마제석검 등이 유행하였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높지만, 강한 지역적 특색을 보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쌍방유형은 쌍방형 심발형토기, 신흥동유형은 팽이형토기, 대화사유형은 소형 발형토기, 역삼동유형은 서북한과 동북한의 토기 속성이 복합되어 있는 역삼동형 토기, 송국리유형은 구연 속성이 외반 구연의 발형과 구연 만곡도가 현저히 둔화된 옹형과 경부가 매우 짧은 단경호와 연결되는 송국리형 호형토기가 만들어졌다(吳江原 2012b).
고인돌 또한 각 유형마다 조금씩 구조적 차이를 보인다. 요동 남부를 시작점으로 해서 요동 북부와 길림 남부, 그리고 서북한과 한반도 중부를 거쳐 남해안 지역으로 가면서, 탁자식은 줄어들고 개석식과 기반식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적석이 부가되지 않다가 점차 적석이 부가되거나 심지어 구획묘(덕천리)가 발생하고, 단순한 석관형 주검 시설이 석곽형, 심지어는 토광형으로 바뀌고, 상석이 반드시 그 아래에 구조물을 수반하던 것에서 묘역 표지석으로서 상석만 있는 것이 늘어가는 것으로 변해간다(吳江原 2002).
이러한 경향성은 각 지역의 고인돌 축조 시간이 조금씩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동 남부 지역의 쌍방유형에서는 비파형동검과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만이 출토되는 반면, 서북한 지역에서는 비파형동검기의 무문토기와 일부 초기 철기시대의 토기편이, 남한 특히 남부 지역에서는 늦은 시기에 사용되던 일단병식 마제석검과 늦은 시기의 무문토기, 심지어는 초기 철기시대의 점토대토기와 청동기마저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민족문화권 속의 고인돌은 요동 남부 지역에서 처음으로 출현하여 한반도 남해안 지역으로 확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각 지역에서 고인돌을 세운 기간은 출토 유물로 보아, 요동 남부 지역 쌍방유형의 고인돌은 출토 유물의 비교를 통해 기원전 10~5세기, 요동 북부와 길림성 남부 지역은 기원전 6~2세기, 서북한 지역은 기원전 8~4세기, 한반도 중부 지역은 기원전 7~2세기, 한반도 남부 지역은 기원전 7~1세기이다.
3. 한국의 고인돌문화, 일본국 야요이문화를 열다
요동 남부 지역의 고인돌이 매우 짧은 시간에 한반도 남부 지역의 무덤으로 채용되었다. 한반도 남해안의 고인돌은 기원전 5~4세기 남해안 지역의 무문토기, 농경 도구 등과 함께 바다를 건너 일본 구주 지역으로까지 확산된다. 이때 고인돌 뿐만 아니라 한반도계의 석관묘와 토광묘 또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까지 수렵과 채집 위주의 생활을 하던 일본 구주의 죠몽토기문화인들에게 매우 큰 문화적 자극이 되었다.
고인돌은 일본 구주에서도 서북 지역에 위치한 나가사키(長崎)․사가(佐賀)․후쿠오카(福岡)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이때 고인돌과 함께 일정 규모의 사람 또한 건너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들은 현지 주민들을 쫒아내고 한반도의 문화를 이식하는 정도는 아니었던 듯한데, 이러한 점은 고인돌과 마을 자리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고인돌이 처음 일본에 전해졌을 때에는 대체로 남해안 일대의 기반식 고인돌 양식이 비교적 충실하게 모방되었다.
일본의 초기 고인돌에는 죠몽문화 말기의 야마노데라식(山ノ寺式) 토기가 선형을 이루고 있는 각목돌대문토기와 조합하는 유우스식(夜臼式) 토기 호(壺), 홍도(紅陶)가 한반도계 마제석기(마제석검, 마제석촉 등)와 함께 출토된다(長崎縣 諫早市 大渡野町 風觀岳). 일본의 고인돌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의 것은 매우 형식화된 개석(상석의 축소) 아래에 야요이문화 중기 후엽의 구로가미식(黑髮式) 小壺를 옹관으로 사용하거나(熊本縣 菊池郡 旭志村 大弁利 藤尾 1B호) 스구식(須玖式) 토기를 옹관으로 사용하고 옹관 내에 세형동검 등이 부장되어 있는(佐賀縣 東松浦郡 北波多村 大字 德須惠) 것들이 있다. 따라서 일본의 고인돌은 기원전 5․4~기원후 1세기 초엽의 기간 동안 축조되었던 셈이다(심봉근 1999).
아무튼 한국의 고인돌문화는 일본 열도가 수렵․채집 중심의 죠몽문화에서 농경 중심의 야요이문화로 전환하는데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전환은 도작 농경․환호 취락․석기의 마제화와 곧이은 청동기의 등장․취사와 저장 그릇의 개선(토기)․마을 조성의 변화 등 여러 가지로 상징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도작 농경의 수용과 도구 생활의 개선이다. 따라서 한민족문화의 고인돌문화를 동아시아 물질문화 변동과 관련하여 다시 한 번 그 중요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V. 맺음말
고인돌은 요동 남부, 길림 남부, 한반도에 집중되어 있으면서 그 주변 지역에도 일부 분포하고 있다. 이들 지역에 세워진 고인돌은 세계의 많은 고인돌 가운데 가장 유사성이 높은 유적들로서 우리 민족문화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고인돌은 요동과 길림 지역에서는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는 못하였지만, 한반도에서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무덤이자 때로는 묘표석과 기념물로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나아가 일본 문화의 전개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점에서 고인돌은 청동기~초기 철기시대 우리 민족문화의 전개와 동북아시아와의 교류 및 성격을 밝히는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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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강연고는 吳江原 2014(「한국 고대문화의 또 다른 열쇠, 고인돌」, 『한국학중앙연구원과 함께 하는 인문학 대강연』, 전주전통문화연수원)를 일부 수정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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