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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구약 해석 역사
안 유 섭 목사 (아르케 아카데미 원장, 반석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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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유대인의 구약 해석 역사
사실상 모든 성경해석의 역사는 유대교의 전통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그래서 성경해석의 역사를 알려면 제일 먼저 유대인들이 그들이 성경인 구약을 어떻게 해석하였는지를 아는 것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최초로 성경을 해석한 본보기는 성경 안에서 찾아지는데, 신명기에서 모세가 설교한 내용을 보면 율법을 해석한 흔적이 나타난다.
그러나 성경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행해진 것은 에스라 시대부터이다. 에스라 때 성경에 대한 보존 노력과 성경을 해석하는 학풍이 자리 잡은 이후 많은 랍비들에 의해 성경해석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행해지면서 유대교 내에서 성경해석은 차츰 발전하게 되었다.
신약 시대 이후에는 유대인들은 구전 율법을 편집하고 해석하여 미쉬나, 탈무드 등을 탄생시켰고, 이후 AD 7세기경에는 마소라로 불리는 학자들이 기존의 수많은 사본들을 편집하여 마소라 사본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독특한 성경해석방법을 연구하여 보급하였다.
모세의 율법 해석
모세는 율법의 상징으로 표현될 정도로 율법 하면 모세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모세 이전에 율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성문화되지 않은 율법(창 26:5)은 존재하였다. 다만 모세의 역할은 성문(成文) 율법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대로 전하였지만, 필요한 경우엔 말씀에 대한 해석을 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명기에서 모세가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모압 땅에서 행한 세 편의 설교 내용을 보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감 없이 전할 때와는 달리 일종의 해석을 더하여 설득하는 경우가 흔하였다. 그래서 '모세가 가르치거나 말하는 율법'이라는 표현이 종종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때 모세가 행한 율법 해석은 과연 성경해석의 효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쳤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모세의 자의적 해석일 수는 없으며,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영감(靈感)된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을 대하는 태도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을 가감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함이 당연하다.
에스라의 성경해석
모세 시대로부터 약 1000 년의 세월이 지난 후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 왔던 유대인들 중에서 제사장이며 학사였던 에스라는 유수(留囚)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귀환시켜도 좋다는 바사 왕 아닥사스사 2세의 특명 조서에 의해 BC 450-440 년경 2차 귀환을 영도하였다. 에스라는 이후에 3차 귀환 영도자인 느헤미야와 함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힘쓰는 한편 율법을 지키고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금하는 양대 부문에서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중에서도 더욱 중점을 둔 것은 율법의 회복이었는데, 그 까닭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그들의 포로로 잡혀가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면서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에스라의 주도하에 율법과 예언서 등이 모아지면서 구약 정경의 기반이 세워지게 되었다.
에스라 이전까지 모세 오경 곧 토라( )만이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취급되었다면, 에스라 시대에는 토라를 비롯해서 예언서인 네비임( )과 성문서인 케투빔( )까지 포함된 오늘날의 구약 성경 즉, 타나크( )가 형성되었다. 그 이후에는 모든 성경이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요하게 여김을 받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에스라는 성경을 총합하여 형성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형성된 구약 성경을 백성들에게 강론하면서 해석하여 주었다. 느 8:8에 보면 에스라와 레위인들이 백성들에게 율법을 낭독하고 나서 뜻을 해석하여 줌으로써 백성들이 그 뜻을 다 깨닫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단지 율법을 히브리어로 낭독하고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되던 아람어로 통역해준 것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사 통치 당시에 바벨론 지역의 포로 유대인들이 국제공용어인 아람어를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는 단순한 번역 이상의 뜻풀이를 해준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당시에 벌써 성경해석이라는 것이 존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에스라는 당시 이스라엘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성경을 독특하게 해석한 것으로 보이는데, 대표적인 예는 역대기의 기록을 통해서이다. 역대기는 성경 비평을 통해 일반적으로 에스라의 저술로 보고 있다. 그런데 에스라는 역대기를 기록할 때 이미 존재하는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참고하기는 하되 나름대로 자신의 독특한 관점에서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당시에 유대인들의 유일한 꿈은 분열 이전과 같이 강성한 다윗 왕국의 회복이었으므로 굳이 다윗 왕국 시대의 어두운 면은 드러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스라는 적어도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있었던 다윗 왕국의 부정적인 면은 거의 기록하지 않았다. 역대기에서 다윗의 밧세바 간음 사건이나 솔로몬의 우상 숭배 등과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에스라가 성경을 독특하게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모세의 경우처럼 그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에스라의 해석은 성경 말씀 그 자체로 보아야 하며, 거기서 성경해석의 원리를 찾는 것은 무리한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역대기의 기록에 반영된 에스라의 해석을 성경해석의 본보기로 삼는다면 해석자의 어떤 입장에 따라 자의적인 해석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점은 무엇인가?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 안에서 때로는 해석의 어떤 원리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그것을 성경해석의 일반적인 원리로 항상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성경을 기록하면서 행한 방법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서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들은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고, 우리는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구해야 할 성경해석이란 성경이 완성된 이후 시대 사람들에 의해서 연구되어진 것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성경해석의 첫 발자취는 다음에 나오는 쿰란 공동체의 성경 주석 작업에서 비롯된다고 보아야 하겠다.
쿰란 공동체의 성경 주석 작업
쿰란 공동체는 에세네파(Essenes)의 일부가 사해의 광야로 도피하여 동굴에 은거하면서 이룬 유대교의 분파이다. 수리아에게서 유다의 독립을 쟁취한 마카비(하스몬) 왕조 시대 유대교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나뉘었다. 사두개파는 헬라화된 귀족적 제사장들의 단체였던 반면, '분리'라는 뜻을 가진 바리새파는 경건한 종교 생활을 지향하므로 하시딤(Hasidim)으로 칭하였다.
그러나 바리새파가 하스몬 왕조와 손을 잡는 과정에서 왕이 대제사장을 겸임하려는 시도에 반발하여 종교의 순수성을 지키기 힘들게 되자 한 제사장이 '의의 교사(Teacher of Righteousness)'를 자처하며 하스몬 왕가에 대항하며 다시 분리되었다. 이들이 바로 에세네파인데 결국 왕의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쿰란(Qumran)의 동굴로 몸을 피하면서 그들 나름대로 독특한 신앙의 형태를 만들어 가게 된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율법과 제사라는 형식적 신앙에 몰두한 반면 에세네파와 쿰란 공동체는 정결 예식과 기도, 명상 등 금욕주의적 삶을 통해 하나님의 법에 순응해가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이 제일 중요하게 여긴 것은 구약 성경의 보존이었는데, 이를 위해 피나는 노력으로 성경을 양피지에 필사하였고, 그것은 오늘날 사해 사본으로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성경 이외에 공동체 생활 규범도 만들어서 자신들의 삶을 유지해나갔으며, 성경에 대해서는 기록 보존하는 일 뿐 아니라 주석을 다는 일까지 행하였다.
쿰란 공동체가 구약 성경을 주석한 문서를 페솨림(Pesharim)이라고 부르는데 18개 정도가 발견되었다. 그들은 성경을 주석하기 위해 나름대로 독특한 성경해석 방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페쉐르(Pesher)라고 부른다. 페쉐르( )는 히브리어로 해명(Explanation) 또는 해결(Solution)이라는 뜻인데, 전 8:1에서 '사리(事理)의 해석'이라고 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페솨림은 주석하고자 하는 모든 성경 구절마다 페쉐르( )라는 단어와 함께 그 의미를 해석하는 정형화된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페쉐르는 성경 본문의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그들의 공동체 삶과 무리하게 연관시키는 면이 다분히 있었기 때문에 현대적 의미에서 보면 성경해석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하였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성경을 해석하였기 때문에 주로 종말론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 까닭은 페쉐르 해석을 하게 된 목적이 편협했기 때문인데, 자신들이 추종하는 '의의 교사'를 보호하고, 신앙과 인내를 강화하여 배교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함이 주된 이유였다. 또한 '의의 교사'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지나치게 강조한 면은 오늘날 이단에게서 볼 수 있는 형태와 매우 유사한 점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학자들의 풍유법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멸망한 이후 유대인들은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비롯해서 대부분 자신들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났는데 이들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부른다. 사방으로 흩어졌다는 뜻이다. 이들은 비록 타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신앙을 버리지는 않았는데 특히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 성경을 보존하는데 있어서는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다른 민족들로부터 민족적인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음은 역사를 보면 쉽게 드러난다.
그런데 유대인들 역시 다른 민족과 섞여 살면서부터 그전에 팔레스타인에 살 때처럼 자신들의 신앙을 순수하게 지킬 수가 없었다. 따라서 다른 민족들과 문화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점차 자신들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속한 나라의 언어와 국제 공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언어와 문화적으로 세상에 동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히브리어에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언어는 아람어이다. 바벨론의 뒤를 이은 바사는 아람어를 표준어로 사용하였는데 이 때 아람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아람어는 나중에 로마가 지배하던 시대까지 팔레스타인 지역과 근동에 살던 많은 사람들에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제자들도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아람어는 언어적인 측면에서 히브리어에 영향을 미쳤지만, 유대인들의 정신에 실제로 영향을 미친 것은 헬라문화였다.
그것은 신약 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된 것만 보아도 짐작이 된다. 예수님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나라는 로마였으나, 당시 국제 공용어는 헬라어였다. 로마는 무력으로 세계를 제패했지만 헬라의 철학과 정신문화 앞에는 머리를 숙여야 했다. 일반 백성들 중에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당시의 지식층은 모두 헬라어를 알아야만 행세를 할 수 있었다.
바사의 후신국(後身國)인 헬라는 문화적으로 가장 우수한 나라였다. BC 6세기경에 헬라 관할 지역이었던 이오니아 섬에서 철학이 태동하였으며, 철학과 문화의 발달은 헬라어를 발전시키고 헬라가 지배하던 시대뿐 아니라 그 이후에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15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양 문명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어쩌면 헬레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도 인류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70인경 번역과 해석에 끼친 헬라 사상)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잊어버린 반면 국제어인 아람어나 헬라어를 사용하게 되자 유대교 신앙의 보존을 위해 번역본 성경의 필요성이 대두하게 되었다. 아람어 탈굼(Aramaic Targum) 등의 번역본이 만들어지면서 BC 3세기경에는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셉투아진트(Septuagint)라고 불리는 70인경이 탄생하였다. 이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들어졌는데 히브리 신앙을 헬라어로 번역하였으므로 번역 과정에서 헬라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에는 사상과 문화가 녹아져 있으므로 헬라 사상을 담고 있는 헬라어로 번역할 때 자동적으로 헬라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70인경의 번역 자체가 헬라적 표현 요소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당시에 70인경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더욱더 헬라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우의법(寓意法) 혹은 풍유적 해석방법(Allegorical Method)이라는 것이다. 풍유법은 이솝(Aesop) 우화 같은 것을 읽을 때 본문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이나 사물에 대하여 해석자 나름대로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고 저것은 무엇을 가리킨다는 식으로 단정해 놓고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어내려는 해석방법이다.
따라서 해석자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꾸며 갈 수 있으며, 본문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풍유법에 의한 해석을 따르게 되면 문맥이나 문법 그리고 역사적 의미 등은 자동적으로 무시되고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탈바꿈하는 경우가 흔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풍유(諷諭)가 헬라 사상에서 한 조류로 유행하게 된 것은 BC 5세기경 플라톤(Platon)과 디오게네스(Diogenes) 같은 철학자들이 즐겨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호머(Homer) 등 유명한 시인들이 풍유적으로 시를 썼다고 믿었으며 풍유는 자신들의 주장하는 것을 옹호하는 좋은 도구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BC 3세기 초 제논(Zenon)이 창시한 스토아 학파(Stoicism)는 자신들의 입장이나 관점을 변호하기 위하여 과거의 문헌들을 사용하여 그것들을 풍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사람들을 애매모호하게 설득하는 학풍을 가지고 그들의 사상을 확산시키는데 큰 도움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70인경을 번역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알렉산드리아에는 헬라어와 헬라 사상에 익숙한 유대인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이 유대교 신앙을 변호할 때 풍유를 사용하면 유리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부터 풍유법은 유대교 신학자들의 대표적인 성경해석법이 되고 말았다. 풍유법은 그 후 많은 시대를 거쳐 성경해석의 역사를 풍미하였는데, 사실 오늘날에도 풍유적 해석 풍토의 자취가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본문의 원래 의미를 아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풍유법이 그렇게 오래 동안 유행하는 까닭은 해석자에게 많은 재량을 주는 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풍유법의 매력이 쉽게 사라지지 않음은 당연한지 모른다.
그렇다고 풍유적 해석이 모두 그르고 문자적인 해석만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시가서나 예언서에는 많은 상징들이 나오는데 상징적 표현이나 비유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오히려 더 큰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또한 어떤 비유들에서는 분명하게 풍유적 해석을 통해서 교훈을 얻을 때도 있다. 나중에 성경해석 원리 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어떤 한 가지 방법을 고수해 가지고는 불가능하며 균형과 조화의 감각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미리 말해둔다.
(필로)
AD 1세기초에 활약한 필로(Philo)는 유대교 신앙을 당시 헬라 문화권 사람들에게 철학적으로 변증한 유대인 철학자였다. 그는 유대인이면서 헬라 철학을 깊이 연구하였는데, 그 결과 유대교 신앙과 헬라 철학을 적절히 조화시켜보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에 헬라인들이 생각한 우주 근원으로서의 신(神)과 여호와 하나님을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사상은 BC 6세기경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한 로고스(Logos) 개념에서 영향받은 것이다. 로고스는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우주의 이성법칙을 뜻하는데, 필로는 로고스 개념을 도입하여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요한 사도가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로고스 개념으로 설명(요 1:1-2)하는 것도 이러한 배경과 함께 이해가 된다.
성경해석 면에서 필로는 알렉산드리아 유대 학자 중에서 풍유적 해석을 후대에 유행시키는데 가장 크게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다. 그의 성경해석방법은 성경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중요시하지 않고 자신이 지향하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을 찾아내어 밝히려는데 주력하였다. 따라서 본문의 어떤 내용들이 서로 모순되게 여겨질 때 더 깊이 연구하여 본문의 뜻을 정확하게 밝히는데 애쓰기보다는 그것 자체를 무시해버리고 풍유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다. 또한 평범한 진술마저도 무슨 깊은 의미가 있다고 보고 전혀 문맥과 관계없이 해석하기도 하였다.
풍유법이 추구하는 이러한 성경해석 방향은 주해의 일반 원칙에 완전히 이반되는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원리는 사람의 사상이나 감정을 가지고 본문으로 뛰어 들어가는 외삽(Eisegesis)이 아니라 본문에서 비추어져 나오는 빛을 그 자체로서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주해(Exegesis)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필로는 성경해석사에 있어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랍비들의 양대 학파 대립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라 철학과 문화에 익숙한 유대인 학자들이 활약하는 가운데, 거의 동시대에 전통적 랍비 집단에 의해서도 구약 성경에 대한 해석방법이 발전해갔다. 그 중에서도 샴마이(Shammai)와 힐렐(Hillel)이라는 두 랍비 집단 간에 선의의 경쟁을 통해 구약 성경해석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두 학파는 완전히 대조된 성향을 나타냈다. 샴마이와 힐렐은 모두 예수님 오시기 조금 전 헤롯왕 통치 때 살았던 바리새파 사람들로서 나중에 각각 산헤드린(Sanhedrin)의 최고 지도자들이 되어 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샴마이)
샴마이는 바리새파 중에서도 유대교의 핵심 교리를 엄격하게 수호하는 엄숙주의자였다. 샴마이파가 얼마나 바리새 정신에 몰두하였는가는 나중에 그의 제자들이 18개 교령(敎令)을 만들어 그들의 신조로 삼아 지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이방인에게 음식을 사거나 팔지도 말 것과 히브리어와 아람어 이외에 다른 이방의 말을 배우지 말며, 이방인과의 모든 교제를 금한다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샴마이파는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는데 있어서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열심당이라고 하는 셀롯(Zealot)당이 여기서 파생되어 나왔다는 것을 이해할 만하다. 또한 샴마이는 구약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엄격하게 문자적인 해석을 주장하였으므로 이후 샴마이파의 성경해석은 경직된 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힐렐)
힐렐은 샴마이와 동시대 같은 바리새인이었지만 극단적 바리새 정신을 피하고 온건한 보수주의자로서 바리새의 한 유파를 형성하였다. 그의 성품은 온화관대하고 원수 맺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이방인에 대해서도 동정적이었다고 한다.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샴마이의 지나친 문자주의적 해석과 달리 율법의 의문(儀文)에 구애받지 않고 그 근본정신을 깨달아야 한다는 온건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는 전통적 유대교의 학문 방법에 명확한 형식을 부여하는 노력을 많이 기울였는데, 그 중에서도 구약 성경을 주해하는 7가지 법칙을 만들어서 랍비적 성경해석방법에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에는 비교, 추론이나 문맥적 해석 등 해석학적 관점에서 제법 유용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힐렐파의 해석방법은 성경에만 적용되었을 뿐 아니라 점차 유대인의 구전 율법의 성문서를 편찬하는데도 적용되었다. 따라서 힐렐의 성경해석방법은 그의 사후 약 200년이 지난 AD 2-3세기경에 만들어진 미쉬나(Mishnah) 편찬에 밑거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전 율법의 성문화 시대
유대인들에게 성문화된 구약 성경으로서 타나크( )가 있었다면 그들에게는 이보다 훨씬 더 방대한 분량의 구전(口傳) 율법이 존재하였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토라( )를 성문 토라와 구전 토라로 나눠왔으며, 구전 토라를 구약성경인 성문 토라와 똑같은 권위로 인정하였다. 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에 미처 기록하지 못한 것들을 구전 토라로 이해하였고, 따라서 이것들은 잘 전수하여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다가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수가 없게 되자, 더욱더 구전 토라에 중점을 두게 된 것이다. 또한 토라는 좁은 뜻으로는 율법서인 모세 오경을 가리키지만 넓은 뜻으로는 구약성경 전체와 구전 율법까지 포함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구전 율법이 성문화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나름대로 해석학적 지침을 가지고 작업을 하였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힐렐파의 비교․추론적 성경해석방법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유대인들은 나중에 해석 그 자체를 위한 해석까지 하는 해석의 열광자들이 되어갔다.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해석에 몰두했는가하면 처음에 그들은 성경 자체를 해석하다가, 점차 그 해석한 것을 다시 해석하고, 재해석한 것을 또다시 해석하는 등 끝없이 해석의 연속을 해왔음이다.
(미쉬나)
AD 200 년경 랍비 '예후다 하나시'는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방대한 규모의 토라를 집대성하여 '반복'이라는 뜻의 미쉬나( )를 편찬하였다. 즉, 미쉬나는 구전 율법을 한데 모아놓은 것으로 보면 된다. 미쉬나는 농경법, 절기법, 여자에 관한 법, 손해에 관한 법, 성물(聖物)에 관한 법, 정결 의식법의 여섯 가지 내용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는 다시 각각 10여 가지의 소주제로 나뉘어 전체 60가지 주제별로 유대인 삶의 모든 영역을 규범화하였다.
미쉬나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첫째는 씨앗(Zeraim)이라는 주제인데 주로 농경법을 다루고 있다. 그 내용은 축복, 추수,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농산물, 교배 및 교합, 안식년, 거제물, 십일조, 두번째 십일조, 가루떡 제사, 금지된 과일, 첫 열매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둘째로는 절기(Moed)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데, 안식일, 안식일의 금지사항, 유월절, 세겔(성전세), 속죄일, 축제일, 초막절, 신년, 금식일, 두리마리(부림절), 절기제물, 소절기 등을 규정하고 있다.
셋째는 여성(Nashim)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시형제 결혼, 결혼계약서, 서약, 나실인 서약, 간통, 이혼증서, 약혼 등을 규정한다.
넷째는 손해(Nezikin)에 관한 법이다. 즉, 첫째 문, 중간 문, 마지막 문(재산문제), 손해, 산헤드린, 맹세, 증거, 우상숭배, 아버지, 결정권 등에 대하여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규정한 것이다.
다음, 다섯째로 聖物(Kodashim)에 대해서는 번제, 소제, 비제사 도살, 맏물, 가격결정, 대체예물, 악의 근절, 신성모독, 일일제사, 성전의 척도, 새제물 등에 관한 규정을 가르치고 있으며,
마지막 여섯째로 정결(Tohaarot)에 관한 규정은 용기(그릇), 천막, 문둥병, 암송아지, 정결, 제의적 목욕, 생리, 감염, 유출, 오염, 손, 줄기 등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게마라)
유대교 랍비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미쉬나를 해석하고 설명을 더하기 시작했다. AD 3-5세기에 활약했던 유대인 학자들을 특히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아모라임( )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미쉬나를 더욱 자세히 설명한 일종의 주해서로서 '완성'이라는 뜻의 게마라( )를 만들고, 이를 미쉬나에 덧붙여 나중에는 탈무드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게마라는 정확하게 말하면 다시 미쉬나의 해석인 할라카( )와 문집(文集)이라고 할 수 있는 하가다( )로 구분된다. 할라카는 '걷다'라는 뜻의 할라크 ( )에서 나온 말이다. 할라카는 성경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복잡한 삶의 정황 가운데 발생하는 것들을 권위적으로 규제할 필요성 때문에 만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실 조상의 유전으로 믿고 있던 이러한 할라카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는 일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그것을 지키라고 하셨을 때 율법의 제정 정신을 알지 못하고 세부적인 조항에 얽매어 축조적으로 지킬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하가다는 '두드러지다'란 뜻의 나가드( )에서 유래된 말인데, 나가드가 사역형(Hiphil)이 되면 '알리다'라는 뜻의 히기드( )가 되며 하가다는 그것의 명사형이다. 하가다는 잠언이나 교훈, 비유 등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보통은 성경과 직접적인 상관은 없고 더러는 공상적이거나 풍유적인 것들이 내포되어 있다.
(탈무드)
탈무드( )는 원래 '배우다'란 뜻의 라마드( ) 동사에서 유래된 말로 '학자'라는 뜻인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미쉬나를 본문으로 하고 이를 해석하는 주석으로서의 게마라가 덧붙여진 형태를 일컫는 말인 것이다. 따라서 탈무드는 미쉬나와 그에 대한 해석으로서 할라카 그리고 하가다라는 문집이 포함되었다. 다시 말해서 탈무드는 크게 미쉬나의 해석과 문집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보면 된다.
미쉬나와 탈무드의 관계를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미쉬나의 절기(Moed) 편은 다시 10장의 소주제로 되었는데, 그 중에서 안식일(Shabbath)은 첫 장에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탈무드는 안식일에 관한 그 미쉬나 본문에다 엄청나게 많은 해석을 가하여 그 본문과 해석을 모두 포함한 내용을 일컫는 것이다. 미쉬나에서 한 장으로 규정했던 안식일에 대해서 탈무드에서는 독립된 한 권의 책이 될 정도이다.
그러므로 탈무드는 책의 권수만으로도 60권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 되었다. 아무튼 탈무드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아는 것처럼 단순히 처세에 관한 책은 아니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앙과 삶의 전반에 걸쳐 빠짐없이 서술하다 보니 그 규모가 엄청나게 된 것이다.
탈무드는 다시 예루살렘 탈무드와 바벨론 탈무드의 두 종류가 있는데, 예루살렘 탈무드는 AD 5세기경에 갈릴리 지역에서 편찬된 탈무드로서 바벨론에서 편찬된 탈무드와 비교하여 팔레스타인 탈무드라고도 불린다. 단순하고 간결한 것이 특징이다. 예루살렘 탈무드가 만들어진 후 한 세기가 지나서 바벨론 지역의 유대교 랍비들은 더 광범위한 바벨론 탈무드를 완성시켰다. 바벨론은 남유다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온 후부터 성전이 파괴된 이후까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중심지가 되었었다. 바벨론 탈무드의 특징은 섬세하기는 하나 지루하게 편집되었다.
한편 탈무드가 만들어진 것과 같은 시기에 토라와 미쉬나에 대한 해석과 많은 설교 내용이 담긴 (미드라쉬)도 만들어져서 함께 전해져 내려왔는데, 이는 '탐구'라는 뜻이며 곧 율법 해석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소라 학파들의 성경해석
구전 율법에 대한 연구와 성문화 작업이 활발해지면서 상대적으로 구약 성경 히브리어 사본에 대한 연구가 다소 소홀한 가운데 있을 때, 한편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에 대한 정확한 보존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당시에 히브리어 성경은 파피루스나 양피지 등에 필사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오래 보존할 수 없었고, 또 많은 번역본들이 등장하여 혼란스럽게 되자 구약 성경 원본이 가르친 진정한 뜻이 사라지고 말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사본들을 정리하여 권위 있는 정통 사본을 제정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그에 따른 연구들이 병행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로써 얻어지게 된 것이 오늘날 가장 대표적인 히브리어 사본이라고 할 수 있는 마소라 사본을 탄생시킨 것이다.
(랍비 아키바)
AD 2세기경의 랍비 아키바(Akiba)는 구전 율법에 대한 관심보다 구약 성경 히브리어 사본의 보존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 사본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은 고대로부터 벌써 인식되어져 왔기 때문에, 그는 당시에 산재한 사본들을 집대성하고 정리하여 정통적인 히브리어 성경을 제정하고자 주창하였다. 이를 계기로 히브리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또 구약 성경에 대한 주석방법이 많이 개발되었으며, 히브리어 성경의 본문 내용을 구분하기 위한 절(節)의 구분도 생겨났고, 각종 부호(符號)도 만들어졌다.
(맛소라 사본의 등장)
유대인들이 앗수르의 침략과 바벨론 유수로 말미암아 디아스포라의 삶이 시작되면서 히브리어가 점차로 실생활에서 사용되지 않고 토라(율법) 낭독 시에만 읽혀지는 사어(死語)가 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지식이 없는 일반 백성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각지에 흩어진 랍비들도 서로 간에 발음에 대한 착오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정확한 발음의 보존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랍비 아키바가 정확한 성경 보존의 필요성을 주창한 이래 여러 가문에서 학자들을 배출하여 나름대로 연구하여 오다가 AD 7세기경에 가서 '전통'이라는 뜻을 가진 맛소라(Massorah)라고 하는 유대 학자들에 의해 현재의 맛소라 모음(Massoratic Vowel)이 고안되면서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맛소라 모음의 발명은 이후부터 발음에 혼란 없이 히브리어 원문을 후대에 잘 전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맛소라 사본(Codex Massora)은 히브리어의 모든 자음에다 새롭게 고안된 모음을 붙여서 표기함으로써 정확한 발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히브리어는 원래 별도의 모음이 없이 단어를 이루는 글자 자체의 고유한 소리를 일일이 기억하여 발음하였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포로생활로 인하여 세계 각지로 흩어지면서 팔레스타인에서조차 히브리어가 그들의 생활 언어로 사용되지 않음으로써 히브리어 발음이 유실될 우려가 있게 되자, 맛소라 학자들은 발음의 보존을 위하여 새롭게 히브리어의 모음을 고안하였고 이를 맛소라 모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맛소라 사본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구약 본문의 난외에다 평주를 달아서 성경 본문을 설명하거나 혹은 비평적 주해를 겸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본문과 설명이 함께 있는 오늘날 많이 보는 주해 성경책 비슷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랍비들은 맛소라 사본을 만들 때 성경을 필사함에 있어서 다시는 개인적 오류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글자 수와 글자 배열까지 치밀하게 규정한 표준 필사법을 제정하여 그 기준에 미달한 성경은 여지없이 폐기하는 엄격함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맛소라 사본이 만들어지고 나서부터 히브리어 성경은 비교적 정확하게 보존되어져 갔다. 이러한 맛소라 사본은 지역에 따라 바벨론 맛소라와 티베리아 맛소라의 두 종류로 나뉘는데 나중에 사본에 관하여 말할 때 좀더 언급하기로 하겠다.
첫댓글 하나하나 자세한 설명에 많은 것을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