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크마 주석 누가복음 제19장 1-10절
누가복음 19:1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 이 구절은 새로이 시작되는 삭개오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앞에서 소개된 소경 치유 기사와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즉 여리고에 '이르러'생긴 사건(18:35)에 곧이어 여리고 안에서 새로운 사건이 전개됨을 보여준다. 누가는 '지나가다'(디에르코마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예루살렘을 향한, 다시 말해서 고난을 향한 예수의 굳은 의지를 보다 확연히 드러내고자 한 듯하다. 한편 삭개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사건을 다루는 본기사의 시간적 배경은 수난주간 전 목요일 쯤으로 짐작된다.
누가복음 19:2
삭개오(재카이오스) - 이 이름은 전통적 유대인의 이름으로서 본래의 뜻은 '청결한 사람' 또는 '의로운 사람'이다. 누가의 소개에 따르면 삭개오는 세리장(稅吏長)의 직책을 맡은 사람이었다. 세리장이란 곧 세관장을 의미하는데 여기고는 베레아 지방으로 부터 요단강을 건너가는 통상인들의 길목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세관이 있었을 것이고 그 세관에서는 주로 길르앗 지방으로부터 유입되는 향유 등 여러 상품에 대해 통관세를 징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 지방은 발삼나무의 산지였기 때문에 특산물에 대한 세금까지도 징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삭개오는 이 세관의 우두머리로서 세금 징수를 지휘했던 인물로 보인다. 당시 세리장은 로마의 막강한 공권력을 이용하여 의도에 다라 자율적으로 세금을 부과하여 징수할 수 있었고, 자기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누가는 삭개오를 소개할 때에 '부자'라는 말을 첨가시킨다. 이는 당시 세리에게도 '허가낸 도둑'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는데 하물며 세리장이 받고 있는 원성은 더 높았을 것이고 또 그가 누리는 '부'의 원천이 부당한 착취에 있음을 암시한다. 삭개오에 대한 이와 같은 배경은 그의 직책이 관료라는 점과, 부자라는 점과 함께 18:18-30의 이야기 즉 부자의 구원에 대한 질문과 연결되고 있다(Danker). 그리고 당시 세리들이 유대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았던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삭개오의 구원에 관한 이 이야기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의 은혜를 확연히 드러낸다.
누가복음 19:3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 삭개오가 예수를 보려고 한 이유는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아마 호기심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으로 보인다. 삭개오도 이미 예수께 관한 소문을 못들었을리 없고 특히 여리고 성 가까이에서 일어났던 소경 치유 기적과 그를 따르는 군중(18:35-43)에 대해서 듣고 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분인지 확인하고, 또 만나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 사람이 많아서 앞을 가려 예수가 보이지 않았고 둘째는 설상가상으로 키가 작아서였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일행이 걸어갈 때 그 주위에 많은 군중들이 둘러싸고 함께 걸어가고 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아마도 삭개오의 호기심은 더욱 고조되어 예수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 여기서 나타난 장면 묘사에서 상징적인 두 가지 의미를 읽을 수 있는데 하나는 예수를 만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외적 요인 즉 다른 사람에 의해서 방해되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미 예수를 만나려고 모여든 무리가 예수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삭개오는 예수를 볼래야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에서도 먼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왜곡된 특권 의식이나 이기심 때문에 새롭게 교회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도리어 문을 막고 있는 위치에 있음으로써 예수를 가로막아 다른 사람의 구원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암시로도 이해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예수를 만날 수 없는 내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카가 작은 점이다. 키가 작다는 말은 볼 수 있는 위치에 못미친다는 말인데 예수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의 영적 결핍에 있다는 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기적 교만, 세상적 욕심, 진리에 대한 경멸심 등이 다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예수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이 두 가지의 장애를 극복하는 일을 선결 과제(先決課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누가복음 19:4
앞으로 달려가 - '앞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프로스텐'은 본래 장소를 나타내는 부사였다. 여기서는 전치사적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어디를 향해 앞으로 달려갔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문맥상 뽕나무를 향한 것이었고 예수의 일행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앞질러가 기다리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앞절에서 언급된 삭개오의 한계 즉 예수를 만날 수 없게 하는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을 극복하려는 삭개오의 의지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에게 관계된 외.내적 한계를 극복하고 앞으로 향해 달려가는 용기가 참다운 신앙을 형성하게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뽕나무 - 이는 단순한 뽕나무(모론)가 아니라 무화과를 의미하는 '쉬케'와 합성된 '쉬코모레아'라는 뽕나무이다. 따라서 17:6에서 언급되는 뽕나무(쉬카미노스)와는 다른 나무이다. 이 뽕나무는 '애굽 무화과' 또는 '무화과 뽕나무'라고도 불리워지며, 열매는 무화과이고 잎은 뽕잎인 나무로서 요단강 지역에서 많이 자란다. 이 나무는 그 가지가 넓게 퍼지고 아래로 늘어져 있어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삭개오는 이 뽕나무 위로 올라가게 됨으로써 예수를 만나기 위해 자기의 한계성(限界性)을 극복해 내는 놀라운 지혜를 발휘하고 있다.
누가복음 19:5
우러러 보시고 - 헬라어 '아나블레포'는 '위'(up)라는 전치사 '아나'와 '보다'의 동사 '블레포'가 합성된 복합어로서 '쳐다본다'(look up)는 뜻이다. 예수는 뽕나무에 앉아있는 삭개오를 쳐다보셨다.
삭개오야 - 뽕나무 위에 올라 앉아있는 삭개오에게 예수는 직접 이름을 부르셨다. 예수가 신적 전지성에 의해 삭개오의 이름을 아셨을 수도 있고 혹은 삭개오의 이름이 이미 여리고 땅에 널리 알려졌으므로 무리들 중에서 삭개오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본문에서 누가의 관심은 에수의 초자연적 능력보다는 예수가 삭개오를 지목하여 인격적으로 부른 사실 자체에 집중되어 있다 하겠다.
내려오라...유하여야 하겠다 - 예수의 인격적 초대는 단순한 부름에 그치지 않고 삭개오의 집에 함께 머무르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이같은 이야기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예수와의 만남은 예수의 주권적인 초대(sovereign invitation)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여러가지의 한계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사실 호기심이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만남은 예수가 인격적으로 삭개오를 부르고 그의 집에서 머물겠다고 제안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특히 '...해야 하겠다'는 표현은 신적 필연성(必然性)을 강조함과 아울러 예수의 주권적 의지를 뚜렷이 드러내준다(4:43).
누가복음 19:6
급히 내려와...영접하거늘 - 예수의 인격적 초청에 대한 삭개오의 응답은 전격적인 것이었다. 즉 '급히 내려와'라는 단어와 '즐거워하며'라는 단어, 그리고 '영접하거늘'이라는 단어는 예수의 제안을 더할나위 없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표현이다. 이는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의 인격적 부르심과 삭개오의 전격적인 영접은 구원의 눈부신 접촉점이 되고 있다. 이같이 누구에게든 향하고 있는 예수의 초청을(요 6:35;7:37)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고 영접하는 사람에게 구원의 문은 활짝 열리게 된다. 삭개오가 이같이 기쁜 마음으로 승낙한 것은 이미 예수에 대한 소문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명성에 대한 권위를 인정함을 뜻한다. 또 삭개오는 평소에 자신의 세리장이라는 직책과 정당하지 못한 세금 징수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샀을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소외된 아픈 심정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또 자신의 정당하지 못한 행위에 대한 자책감으로 고민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름은 삭개오에게 있어서 어둠 속에 비추어지는 빛이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을 그 명성 높으신 예수가 초청했다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었고 또 자신을 초청했다는 사실은 7절에 언급된 바처럼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배척하는 지옥같은 상황으로부터 구원해주는 생생한 용서의 선언으로 이해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5절에서 언급한 '오늘'은 구원의 즉각성(卽刻性)을 뜻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 단어는 '급히 내려와'라는 말과 맛물려 구원이 주저할 수 없는 결단성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또 9절에서 다시 '오늘'이라는 말이 언급되어 구원의 즉각성을 재삼 강조한다.
누가복음 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당시 세리는 죄인 취급을 당하였으므로 예수의 행위는 당연히 문제시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죄인의 집에 머물며 함께 식사한다는 사실은 죄인의 죄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5:29,30). 한편 이들의 수군거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의 두가지 악한 본성을 엿볼 수 있다. 첫째는 자신의 눈에 박힌 들보를 보지 못하고 타인의 눈에 묻은 티를 흉보는 비판 심리이다(마 7:3). 특히 당시 유대인들은 왜곡된 선민의식에 근거한 교만과 자기 의를 과시하는 형식주의로 인해 타인을 비판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둘째는 타인의 잘됨을 시기하는 심리이다. 본문의 '뭇 사람'은 죄인에 불과한 세리장이 예수의 관심과 호의를 받게 되자 시기심이 발동하였던 것 같다.
누가복음 19:8
서서 주께 여짜오되 - 앞절의 내용으로 보아 삭개오가 말하고 있는 장소는 삭개오의 집 안이었을 것이다. 아마 식탁이나 탁자 주위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말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일어서서 말하는 행위는 말하는 사람의 진지함과 말하는 내용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엄숙성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
주여 보시옵소서 - 이미 삭개오는 예수께 대한 호칭을 신앙적인 의미의 '주'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또 삭개오는 '보시옵소서'(이두)라는 말로서 자신의 의지의 단호함과 실천 가능성에 있어서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같은 말은 6절에서 언급된 바 있는 그의 기쁨과 결부되어 나오는 즐거운 선언임을 느낄 수 있다. 즉 강요에 의한 타율적 선언이 아니라 기쁨에 의한 자율적(自律的) 결단인 것이다.
내 소유의 절반을...주겠사오며 - 삭개오는 당시 랍비들에 의해 제시된 구제비 곧 소유 혹은 수입의 20%보다 훨씬 많은 파격적 액수를 제시한다. 이러한 헌신적인 태도는, 영생을 사모하여 예수께로 나아왔으면서도 '네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서 근심하여 집으로 돌아갔던 부자 청년의 모습과 너무도 대조적이다(18:18-23).
만일 뉘 것을...사 배나 갚겠나이다 - 여기서 '만일'로 시작되는 가정문은 삭개오가 부당하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갈취한 사실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정문을 이끌고 있는 '에이'라는 단어를 '...하는 무엇이든지'라는 의미의 관계 접속사(everythint that...)로 해석하여 '토색한 것은 무엇이나'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또 '에이'는 '멘'이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되어 '확실히' 또는 '틀림 없이'라는 뜻으로 서약문에 사용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삭개오의 진술은 자신이 부당하게 취한 모든 것은 본래의 주인에게 확실하게 그리고 무엇이나 돌려준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여기서 삭개오는 부당하게 빼앗긴 사람에게 본래의 것의 4배를 돌려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는데 율법에 의하면 부정으로 취한 것을 돌려 줄 때에는 1/5을 덧붙여 상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레 6:5;민 5:7). 또 남의 것을 도적질한 것은 4배로 갚아야 한다는 규정도 있다(출 22:1;삼하 12:6). 따라서 삭개오의 이같은 선언은 당시 율법이 정하는 도적질에 상당하는 배상을 하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삭개오 자신이 그같은 정도의 죄를 범하였음을 고백하는 셈이다. 이같은 삭개오의 파격적(破格的)인 행위는 자기 중심적 삶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이 방향을 바꾸는 전격적인 회개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회개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회개는 죄에 대한 참회나 죄에 대한 단순한 고백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전격적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실천적 행동을 동반해야 한다. 회개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13:1-9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누가복음 19:9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 삭개오의 선언에 대한 예수의 응답 역시 즉각적인 것이었다. 즉 구원이 오늘 이 집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죄인에게 구원을 선언한 것은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실로 파격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같은 선언은 삭개오의 헌신적 자아 부인의 선언에 따른 직접적 결과임에 분명하다. 구원은 장차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자아 부인의 실천적 결단을 통해 경험되는 현재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 이 말은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고 배타적인 대접을 받아온 삭개오를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게 한 형제로 살아가야 할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특히 삭개오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삭개오야말로 참된 믿음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당시 종교적 복권은 곧 정치.사회적 복권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는 전인적 인간 구원을 의미한다.
누가복음 19:10
인자의 온 것은...구원하려 함이니라 - 삭개오에 대한 구원 선언 후 그 선언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즉 이미 앞절의 주석에서 밝힌 바 있듯이 잃어버린 자에 대한 구원이란 소외되고 비뚤어진 인간을 다시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고 품위있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말은 온갖 죄악과 허물로 말미암아 혼돈과 파멸에로 향하는 인간들을 구해내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로 인도하시는 것을 뜻한다. 이같은 선언은 사실 예수의 전체적 삶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병에 걸려 정상적인 인간 삶이 불가능한 귀신 들린 자(마 17:18), 문둥병자(17:14), 벙어리, 귀머거리(막 9:25), 소경(막 8:23) 등과 같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며 삭개오와 같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는 모든 행위는 땅위의 평화(平和)를 위한 사랑의 치유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사람다와질 수 있도록 하는 예수의 구원 행위는 오늘의 기독교가 우선적으로 따라야 할 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의 선언이 이미 5:31,32에서 언급되었는데 결국 삭개오는 이와 같은 선언의 실천적 모델(model)이 된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