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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하라 수선사와 최익현/ 팔번궁 신사와 神道 2016.11.26. / 청천 17기
수선사
* 이즈하라시내 작은 절 수선사는 우리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 온다. 한말 최익현선생 순국비가 있기 때문이다. * 최익현 선생은 누구인가? 그는 세 번이나 귀양을 갔다. 첫 번째는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다가 제주도에 귀양 갔으며, 개항과 개화운동에 반대하여 위정척사사상으로 대항하다가 흑산도로 귀양갔다. 이 두 번은 쉽게 풀려났으나, 마지막으로 일제의 이등박문에 의해 대마도에 귀양가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순국했다. 왜놈들의 밥은 먹지 않는다며 단식끝에 돌아 가신 것이다. 일제의 강압으로 맺어진 을사조약에 항거하는 의병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인형같은 보살석상에다 옷을 입혔다. 보살들에게 옷 한 벌씩 해드리며, 소원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절은 참 소박하다. 백제승 법묘가 처음 세웠다고 한다.
대마도 이즈하라의 작은 절 수선사(슈센지)에 있는 대한인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 비문을 다시 적어 보면 이렇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대한제국의 위대한 유학자요, 정치가였다. 한말 어려운 정세에서도 소신을 굴하지 않고 애국 항일운동을 일으켜 일본 관헌에 의해 대마도로 호송되어 왔으며 적사에서 순국하셨다. 수선사 창건에는 백제승 비구니 법묘 스님이 관계가 있다고 전하며 한국과는 인연이 깊다. 선생이 순국한 후 대마도 유지들이 유체를 모시고 충절을 되새겨 제사를 올렸다. 이렇듯 유서깊은 곳에 순국비를 세워 선생의 애국애족의 뜻을 기리고자 한다. 최익현 선생 순국비 건립 추진위원회
면암 최익현 선생은 크게 두 가지 운동으로 우리 국사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첫째는 개화기에 위정척사사상의 대표적 인물이고. 둘째는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을사의병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 본 페이지 제일 말미에 면암선생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자세히 기록하였으니 국사 학습에 참고하기 바랍니다.
신도들의 납골당 같은 시설이다. 이런것이 절에는 있고, 신사에는 없다. 절은 일반인들 영혼의 안식처가 되는 곳이고, 신사는 국가적 신이나 천황, 위인을 신으로 받들어 봉안하는 곳이다.
납골당 즉 가족묘지가 절 한귀퉁이에 있다.
절의 유자가 풍년이다.
가이드 설명을 열심히 듣는 일행들.
최익현의 순국비가 왜 여기 있는가? 최익현 유해를 며칠간 이 절에 안치한 후에 부산으로 호송하였다고 한다.
일본은 불교보다 신사를 짓고 섬기는 신도가 더 성한 나라다.
신사를 짓고 숭배하는 신도는 고대에 번성하였다가, 토쿠가와시대 다시 흥기하였다. 민족의식의 함양과 함께.
불교를 좋아하지 않는 유학자들은 역사연구가 필수였다. 역사연구 결과 고대의 신도를 부활시킨 것이다. 유럽각국과 서서히 접촉하면서 쇄국정책이 나왔고, 일본의 문화적 정치적 독자성이 강조되면서 민족의식 함양으로 연결되었다. 그 중심에 신도와 신사가 있다.
민족의식의 함양은 서서히 토쿠가와막부 정권 붕괴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무력하지만 천왕이 있는데, 막부의 장군(쇼군)이 정치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의문을 가진 것이다.
천황이 모든 충성의 촛점이 되어야한다는 생각들을 했다. 유학 영향아래 국학파라 불리는 신도사상가 들이 일어났다. 고대일본의 전통과 문화를 탐구하였다. 신사의 신관들도 고대역사서나 만엽집 같은 고대 시가를 연구하며 시가가 부흥하였다.
우리나라 마을 당산나무와 같이 숭배하는 나무이다.
원래 후츄(府中)라고 하다가 1869년 명치2년에 이즈하라(嚴原)로 고쳐 불렀다. 이즈하라정의 지정 꽃과 나무의 문양이 거리에 활용되고 있다. 정목은 오동나무, 정꽃은 등꽃이네.
팔번궁 신사
도리이(鳥居) ; 신사의 영역을 표시하는 문 역할.
▣ 일본의 神道
* 일본 민족은 고대부터 봄에 풍년을 기원하는 기년제와 가을 추수감사제를 위해 마을마다 신사를 세워 공동으로 제사를 지냈다. * 13세기에 이 신사의 전통에 불교 이론을 수용하여 일본 신도의 사상적 체계가 이루어졌다. *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신사의 국가관리가 법제화, 천황을 신격화 하기 위한 정책. 국가적인 신도가 이루어짐. * 국가 신도는 천황제를 유지시키는 목적 이외에도 일본 국민의 단결과 국수주의 지향을 위해 강요하였다. (일제시대 우리민족에게도 신사참배 강요한 이유) * 신도는 개인종교가 아닌 국가 종교, 민족 종교 이었기 때문에 개인의 종교상 신앙의 자유는 별도의 문제였다.
팔번궁신사는 어부와 병사를 보호하는 하치마신을 모신다. 진구황후(신공황후)를 신으로 받든다. 팔번궁신사는 일본전역에 1000 여 곳 있다. 역사왜곡의 현장이다. 역사를 깊이를 들여다 보면, 우리는 기분이 나빠 신사에는 발걸음을 피해야 할 장소이지만, 일본문화를 탐구한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신공황후는 삼한(신라, 가야 등 한반도 )을 정벌하여 임나일본부를 건설하였다고 하는 가상의 인물이다.
신사를 지을 때 헌금한 액수와 인명을 새긴 돌비석이 즐비하였다. 많이 낸 자 일수록 크고 화려하다. 여기도 돈세상이다.
말이 조각돼 있기도 했는데, 신공황후 정벌을 상징하는 것이다.
보세요. 신공황후와 각 천황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공지사항이다. 누구 어느신에게 언제 제를 지낸다는 알림장을 수기로 써서 붙였다.
헌금한 자들의 석비중 일부이다.
일본국사상 어떤 위인 석비이다.
대마도에 볼 것이 없다지만, 나는 역사의 현장답사로 의미가 깊었다.
팔번궁신사 도리이 앞에서
팔번궁신사를 둘러 보며
국학파의 신도적 경향으로 19세기 초에 신흥종교를 낳았다. 쿠로즈미교는 태양여신을 숭배하고, 1838년 한 여인이 창시한 천리교는 불교의 한 종파라기보다 일본 국수적 신도의 한 분파적 성격을 띤다고 볼 수있다. 천리교는 현재도 왕성하다.
아내를 여신처럼 존중 사랑한다. 신사에 온 영향으로~
일본 신사에 오면 왠지 모르게 으시시하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 그는 누구인가?
면암 선생은 크게 두 가지 운동으로 우리 국사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첫째는 개화기에 위정척사사상의 대표적 인물이고.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을사의병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 1832~1907,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지사(志士). 본관 경주(慶州). 자 찬겸(贊謙). 호 면암(勉庵). 경기 포천(抱川) 출생. 김기현(金琦鉉),이항로(李恒老) 등의 문인(門人). -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 부정을 척결하였다. -1868년(고종 5)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 187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기용되자 명성황후(明成皇后) 측근 등 반흥선대원군 세력과 제휴, 서원(書院)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親政),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 개항 5불가소를 올려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 되었으며 1879년 석방되었다. * 開港5不可疏(강화도 조약을 반대하는 5가지 이유) 1. 일본의 침략에 의한 정치적 자주의 위기 2. 일본의 사치품에 의한 조선의 전통산업 파괴 3. 일본은 양적(洋賊)과 같다. 천주교 확산 4. 일본인에 의한 재산과 부녀의 약탈. 5. 일본은 금수이므로 금수와는 교섭할 수 없다. -1895년 단발령(斷髮令)에 반대하다 투옥되었다. - 관직을 사퇴,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리고 5적 처단을 요구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면암의 의병은 초전에서는 정읍(井邑), 곡성(谷城), 순창(淳昌) 등지에서 크게 위세를 떨쳐나갔으나. 남원 진위대와 전주 진위대 등 정부군이 일본군과 합세하여 토벌해 오자 면암은 스스로 의병의 해산을 명하고, 임병찬을 비롯한 13명의 참모들과 더불어 정부군에 투항하였다. 차마 동족과 싸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면암은 체포되어 쓰시마섬[對馬島]에 유배되었다. 평소 "1백만 조선 민중은 두렵지 않으나, 최익현 한 사람은 두렵다."고 말해 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의중이었다. 면암과 임병찬 등 일행이 부산포에 당도했을 때, 그는 맨손으로 부산포의 흙을 보듬어 몸소 버선 밑바닥에 깔았다. 일본 땅에 당도하더라도 적지의 흙을 밟지 않겠다는 결기를 다진 것이다. 또 임병찬으로 하여금 물 한 동이를 마련하게 하였다. 조선의 물만 마시고 단식할 결심이었다.
- 1907년 7월 9일 7시경, 면암은 임병찬 등과 함께 원한의 땅 대마도의 이즈하라(巖原)에 도착하였다. 이즈하라의 일본군 수비 대장은 불손한 태도로 말했다. "여러분은 일본의 음식을 먹으니 마땅히 일본군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면암이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 "지금 이미 이 지경에 이르러 너희들의 음식을 먹고 너희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도 도리가 아니니, 지금부터는 단식하고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 면암은 부산항에서 마련한 조선의 물만 마실 뿐 일체의 일본 음식을 거부했다.
- 면암의 단식이 계속된다는 보고에 접한 이토 히로부미는 당황하여 면암의 장자 최영조와 문인들을 대마도에 보내 문병하게 하고, 조선에서 가지고 간 탕제를 권하였으나 최익현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죽음을 예감한 위대한 애국정신의 한국인 면암 최익현 선생은 임병찬 등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시 한 편을 남겼다.
일어나면 북두를 우러르고 임금님 계신 곳에 절한다네(起瞻北斗拜瓊樓) 흰머리 오랑캐의 옷자락에 분한 눈물 쏟아져 흐르고(白首蠻衫憤悌류) 만 번을 죽는다 해도 부귀는 탐하지 않으리(萬死不食秦富貴) 평생을 읽은 글이 노나라의 춘추라네.(一生長讀魯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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