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의 아버지 왕화(王華, 1446-1522, 향년 76살) 소개
양명학 강좌 자료 (2018-3회, 4월 4일)
왕화 소개:
절강성 여요현(浙江省 餘姚縣) 출신이며, 자(字)가 덕휘(德輝), 호(號)가 실암(實庵), 늙은 뒤에 호(號)가 해일옹(海日翁)이며, 용천산(龍泉山) 산속에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용산선생(龍山先生)이라고 불렸다.
35살(1481)에 진사 시험에서 1등 합격하였고 한림원 수찬(翰林院, 修撰)이 되었다. 관직 경력은 한림원 학사(學士), 황태자 교육을 담당하는 첨사부 우춘방 우유덕(詹事府, 右春坊, 右諭德), 첨사부 소첨사(詹事府, 少詹事), 예부 우시랑(禮部, 右侍郎)을 거쳐 좌시랑(左侍郎)을 거쳐 남경 이부상서(南京, 吏部尚書)를 끝으로 관직생활을 마쳤다.
그는 『예기(禮記)』를 공부하여 과거시험에 합격하였고, 관원으로서 『대명회전(大明會典)』과 『통감찬요(通鑒纂要)』 편찬에 참여하였다. 개인 저서는 『용산고(龍山稿)』, 『원남초당고(垣南草堂稿)』, 『예경대의(禮經大義)』, 『잡록(雜錄)』, 『진강여초(進講餘抄)』 등이 있고 모두 46권이다. 왕양명은 그의 맏아들이다.
왕화 경력:
1446년 여요현 부유한 일반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두세 살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아버지 왕륜(王倫)이 마을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글을 읽는 소리를 곁에서 듣고 외울 만큼 기억력이 좋았다.
16살(1462)에 소흥부(紹興府) 부학(府學)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부학에 다녔다. 부학에 다니는 동안에 성적이 우수하여 항상 가깝게 사귀던 동학 사천(謝遷, 1449-1531, 字於喬, 號木齋, 紹興府 餘姚縣, 1475년 진사시험에서 장원)과 1등을 다투었다. 그렇지만 거인(擧人)이 되는 절강성 향시(鄕試)에 여러 번 낙방하였다.
29살(1475)에 송강부(松江府) 제학(提學) 장시민(張時敏)이 그의 답안지를 보고 장원 급제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이때부터 유명해졌고 잘사는 집안에서 많은 돈을 주고 가정교사로 불렀다. 절강성 좌포정사(浙江省, 左布政使) 영량(寧良)이 자신의 고향 기양현(祁陽縣) 선생으로 초빙하였다. 영양 집안에는 수천 권 책을 소장하였기 때문에 왕화가 밖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 많은 책을 읽었다.
34살(1480)에 기양현 선생의 임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서 향시(鄉試)에 참가하여 합격자 90명 가운데 2등으로 합격하였고 전공과목이 『예기』이었다. 왕화는 원래 1등 합격이었으나 시험관 면접시험에서 흰옷을 입고 왔기 때문에 체통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2등에 합격하였다.
35살(1481)에 북경 예부(禮部)의 회시(會試)에서 33등으로 합격하였다. 왕화를 합격시킨 시험관은 『예기』를 함께 공부하였던 사천(謝遷, 26살 진사시험 장원 급제)이었다. 황제의 전시(殿試)에서는 황제가 왕화를 1등으로 낙점하여 장원급제하였다. 한림원 수찬(翰林院, 修撰)이 되었다.
50살(1496)에 황제의 일강관(日講官)이 되었다.
52살(1498)에 첨사부 우춘방 우유덕(詹事府 右春坊 右諭德)이 되어 순천부(順天府) 향시를 담당하였다.
55살(1501)에도 순천부(順天府) 향시를 담당하였다.
56살(1502)에 한림원 학사(學士)로 진급하였다.
57살(1503) 3월에 첨사부 소첨사(少詹事)로 진급하였다. 『대명회전(大明會典)』과 『통감찬요(通鑒纂要)』 편찬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6월에는 예부 우시랑으로 진급하였다.
60살(1506) 5월에 예부 좌시랑으로 진급하였다.
61살 윤정월에 환관 유근(劉瑾, 1451-1510)이 실권을 잡자 많은 고위 관원들이 유근에게 가까이 갔다. 유근은 왕화가 찾아오면 대학사(大學士) 자리를 주겠다고 두 번이나 달랬다. 그러나 왕화는 두 번 모두 찾아가지 않았다. 왕화의 아들 왕수인도 찾아오지 않자 유근은 왕씨 부자를 미워하였다. 그래서 유근은 왕수인에게 곤장을 치고 용장역 역승(驛丞)으로 좌천시켰다. 왕화를 남경 이부상서로 진급시켜서 북경에서 떠나게 하였다.
61살(1507) 9월 유근은 왕화가 『대명회전(大明會典)』 편찬에 참가할 때 저지른 작은 잘못을 핑계로 삼아 사직하도록 권하였다. 왕화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결국 더 큰 재앙을 피하려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연세 많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77살(1522) 2월 집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왕화의 일화:
1. 돈주머니를 돌려주었다:
6살(1452)때 동네아이들과 개천가에서 놀고 있을 때 술 취한 사람이 개천가에서 발을 씻으면서 돈주머니를 놓고 갔다. 왕화가 돈주머니를 들어보니 무거웠다. 꼭 찾으러 올 것이 틀림없었다. 왕화는 얼른 돈주머니를 물속에 던져놓았다. 다른 아이들이 물으니까 돌멩이라고 대답하였다. 저녁때가 되어 아이들이 집에 돌아갔다. 왕화 혼자 남아 사람을 기다렸다. 얼마 뒤에 술 취한 사람이 울면서 돈주머니를 찾으러 왔다. 왕화가 물속에 던져놓은 곳을 알려주었다. 돈주머니를 찾은 사람이 고맙다고 말하고 어린 왕화에게 과자를 사먹으라고 한두 냥을 주었다. 왕화가 “과자는 우리 집에도 있습니다. 당신이 사주실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돈주머니 주인이 자꾸 받으라고 권하여도 끝까지 받지 않았다.
2. 책을 좋아하였다:
7살 때 어머니 잠씨(岑氏)가 왕화를 데리고 책을 읽어주셨다. 마침 봄이 와서 어머니는 아들에게 “다른 아이들도 밖에 나가서 봄맞이를 하는데 너도 나가서 놀다가 들어와서 공부하면 좋겠구나.”라고 말하였다. 어린 왕화는 “저는 봄맞이보다는 책 맞이가 더 좋습니다.”고 대답하고 앉아서 책을 보았다. 어머니도 아들이 기특하여 “나중에 자라서 큰 사람이 되겠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
3. 학교에서 공부에 집중하였다:
11살 때 동네 선생님을 찾아가서 지도를 받았다. 먼저 선생님이 한 마디 말씀하시면 학생이 받아서 한 마디 대답하는 대구(對句) 짓는 방법을 배웠다. 한 달 뒤에는 시(詩) 짓는 것을 배웠고 다시 한 달 뒤에는 글 짓는 것(作文)을 배웠다. 선생님은 “1년이 지나면 내가 너에게 더 싱 가르칠 것이 없을 같구나.”라고 칭찬하였다.
이때 새로 부임한 지현(知縣)이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손님을 맞이하였다. 많은 학생들이 공부하지 않고 밖에 나가서 구경하였다. 왕화는 책상에 앉아 큰소리로 책을 읽었다. 선생님께서 “너는 지현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고, 왕화는 “지현도 사람인데 왜 무섭습니까? 독서는 죄를 짓는 것도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왕화가 공부에 집중하는 것을 보고 나중에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4. 절간에서도 공부에 집중하였다:
14살에 학교를 졸업한 뒤에 근처 용천사(龍泉寺)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그런데 용천사에는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다. 여기에서 공부하다가 놀라거나 아파서 떠난 학생들이 많았고 누구도 오지 않았다. 왕화가 와서 공부하였다. 스님이 밤에 돼지 오줌보에 잿가루를 칠하여 귀신 머리처럼 만들어 왕화 방의 창문가에 걸어놓았다. 왕화가 칼로 창문가의 돼지 오줌보를 찔러 바람이 빠진 뒤에는 여전히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다. 뒤에 사람들이 듣고 모두 혀를 내둘렸다고 한다.
5. 맏아들 왕양명을 낳다:
25살(1471)에 정씨(鄭氏) 부인을 맞이하였다. 정씨 부인이 임신한지 14개월인데 아이를 낳지 못하여 걱정하였다. 왕화의 어머니 잠씨(岑氏)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나타났는데 비단옷을 입고 허리에는 옥(玉)을 차고 있었다. 신인이 하늘의 구름 속에서 악기를 연주하면서 어린아이를 내려주는 꿈이었다. 조금 뒤에 아이를 낳았는데 바로 왕양명이다. 왕화의 아버지가 꿈 징조에 따라 이름을 운(雲)이라고 지었다. 동네 사람들은 아이를 낳은 집을 상서로운 구름이 내려온 집이라는 뜻으로 서운루(瑞雲樓)라고 불렀다. 5살을 먹도록 말을 하지 못하였다. 지나가던 스님이 아이 부르는 이름을 듣고 머리를 쓰다듬더니 “좋은 아이구나, 그런데 천기를 누설하였구나.”라고 말하였다. 할아버지가 듣고 마땅히 천기를 누설하지 말아야하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름을 수인(守仁)이라고 고쳤다. 그날부터 아이가 말을 하고 할아버지가 예전에 읽었던 책의 구절을 외웠다. 물어보니 왕수인은 “많이 들었기 때문에 외울 수 있습니다.”고 대답하였다.
6. 예쁜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젊었을 때 부잣집에 얹혀살면서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에 부잣집 어린 첩이 왕화 방안에 들어왔다. 여자가 접는 부채를 펴서 부자가 “사람의 씨를 받고 싶다.(欲求人間種)”고 쓴 글자를 보여주었다. 왕화는 붓을 들고 부채에 “아마도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 죄를 지을 것입니다.(恐驚天上神)”라고 대답하는 글을 써주었다. 여자가 아무리 달래도 왕화가 듣지 않았다. 이튿날 왕화는 부잣집을 떠났다. 어느 먼 뒷날 부자가 도사를 불러 집안에서 하늘에 제사(醮)를 지냈다. 그런데 도사가 제사를 지내다가 엎드려 한참동안 자다가 깨었다. 부자가 이상하여 물었다. 도사는 “하늘에 아뢰려고 하늘에 갔는데 마침 장원급제한 소식을 하늘에 아뢰려는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서 자신은 뒷전으로 물러났다.”고 대답하였다. 장원급제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도사는 장원급제한 사람 곁에 “사람의 씨를 얻고 싶구나, 아마도 하느님께 죄를 지을 것입니다.”는 두 줄이 있었다고 대답하였다. 부자는 크게 놀랐다. 얼마 뒤에 왕화가 장원급제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7. 기생을 물리치다.
왕화가 34살에 기양현에서 선생 임기를 마치고 떠나올 때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 송별연을 호수 안에 있는 정자에서 베풀어주었다. 정자 안에 기생 2명을 숨겨놓았다. 송별연이 끝나자 친구들은 왕화를 정자에서 쉬라고 떨어뜨려놓고 배를 타고 떠났다. 이때 기생 2명이 나타났다. 왕화는 놀라서 배를 불렀으나 친구들의 배는 벌써 멀리 떠났다. 왕화는 정자의 문짝을 떼어내서 헤엄을 쳐서 돌아갔다. 기양현 사람들은 왕화 인품에 감복하였다.
첫댓글 여자에게 놈어가지 않아 미투는 곡정옶었겠네요.